와타루 미사카
1. 소개
미국 NBA에서 플레이 한 전직 농구 선수로, 순수 동양계 혈통선수로서는 처음이다. 일본계 미국인으로 일본명은 미사카 와타루(三阪 亙, Misaka Wataru).
2. 커리어
2.1. NBA 입성 전
일본 출신의 부모 사이에서[1]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유년 시절에는 일본어로 대화하지 않았어도 모든 스포츠 종목을 즐겼다. 그러자 1939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대역으로서 경제적인 부담을 걸지 않기 위해 농구를 선택하였다. 이후 오그덴 고등학교에서 주 대회 우승, 위버 카렛지 진학 후 컨퍼런스에서 2번 우승해 대회 우수선수로 선출되었다.
그러던 1941년 12월 7일에 발생한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전역에 일본계 외국인들의 박해를 가했고, 1942년부터는 일본계 외국인의 강제수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유타주는 비교적으로 관대한 곳이었기 때문에 미사카 자신도 농구를 하겠다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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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이 된 1943년에는 유타 대학교에 편입되어 수비의 명수로서 명성을 떨쳤다. 1944년에는 전미 초대 대학 선수권에 출전했으나 켄터키 대학교를 상대로 패하고 말았다. 그 때 마침 교통사고의 영향으로 사퇴한 아칸소 대학의 대체선수로써 NCAA남자 농구 토너먼트 대회의 출장권을 얻은 뒤, 거기서 우승을 하게 되었다. 당시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다트머스 대학교와의 결승전 경기에서는 식스맨으로써 활약을 펼쳐 연장전 끝에 42-40으로 승리해 NCAA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안게 된다.[A] 게다가 실제 경기를 본 한 스포츠 기자는 그의 이름을 "'''킬로 와트 미사카"'''라고 지어 주었다.
NCAA토너먼트에서 우승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자, 미군으로부터 온 소집 영장을 보고 1944년 6월에 미 육군에 입대해 미 육군정보부 일본계 학생 병사가 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한 요새 안에 있던 일본어학교에 입학해 9개월동안 배웠다. 그 후 필리핀 마닐라 기지에 배속이 결정되어 중간에 이동 항해하는 과정에서 1945년 9월 2일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1946년 9월에는 2년동안의 병역 의무를 마치고 유타 대학교로 복학한 미사카는 서서히 선발로 정착해 갔으며, 1년 뒤인 1947년 3월 켄터키 대학교와의 NIT토너먼트 결승전에서 1개의 득점을 꽂아 승리에 공헌과 함께 우승을 하게 된다.[A]
2.2. NBA 입성 후
1947년에 창설된 BAA[2] 에서 사상 첫 대학 드래프트에서 뉴욕 닉커복커스[3] 에 지명되어 유니폼을 입게 된 사상 첫 동양계 선수가 되었다. 또 유타 대학교 출신으로서 처음으로 NBA에 입성한 선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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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48시즌에는 프로비던스 스팀롤러스[4] 와의 경기에서는 5득점을 넣었지만 출장기회가 줄어들어 가, 5라운드 이외에는 기회가 없었다. 팀은 개막전부터 3연승을 기록했지만, 그 뒤에 3연패를 기록했다. 게다가 팀이 선수를 보강하기 위해 엄청 많았던 가드 때문에 선수를 삭감하게 되어, 같은 해 11월 24일에 네드 아이리시 사장으로부터 방출을 통보받았다. 그후 할렘 글로브트로터스로부터 영입이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농구계에서 은퇴했다.
3. 은퇴 후
농구계를 떠난 미사카는 기계공학 학사를 취득하였다. 그 후에는 솔트레이크 시티에 있었던 스페리 사에서 미사일 제어장치 시스템 설계 담당자로 근무했다.
4. 사망
현지 시각 2019년 11월 20일, 9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5. 관련 문서
[1] 모두 히로시마현 출신으로 아버지가 1902년, 어머니가 1922년에 각자 미국으로 이민을 가 결혼한 뒤에는 유타 주에서 이발소를 운영했다고 한다.[A] A B 같은 대회에서 우승한 일본계 미국인은 '''미사카가 유일하다.'''[2] Basketball Association of America의 약자로 현재의 NBA.[3] 현 뉴욕 닉스[4] 1946년부터 1949년까지 BAA 동부 디비전에 소속되었던 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