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계 미국인

 



1. 개요
2. 상세
3. 유명한 일본계 미국인 목록
4. 관련 문서


1. 개요


영어:Japanese Americans
일본어:日系アメリカ人 / 日系米国人
본인 또는 가까운 조상이 일본계이며 미국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이민 1세대는 일본계 미국인으로 부르지 않기도 한다.

2. 상세


한국계 미국인들의 대규모 이민은 1960년대 이후[1]인데 비해 일본인들은 19세기말부터 12만명이 미국남아메리카 등으로 이주했다. 그 때문에 한국계 미국인보다 커뮤니티의 역사가 깊고 4세대, 5세대까지 등장했다. 4세대를 욘세이(Yonsei)라고 하는 등 용어도 있다. 숫자는 일본계 혈통만 이어온 사람은 2010년 기준 763,325명이며 부분적으로 일본계 혈통이 있는 미국인은 1,304,286명이다.
1,706,822명인 한국계 미국인보다는 적지만 더 오랜 기간 동안 미국 사회에서 살아왔던 탓에 커뮤니티의 파워는 더 큰 편이다. 그러나 일본 본국이 발전을 거듭함으로써 미국에 새로 유입되는 숫자가 적어졌고 한국계 미국인, 중국계 미국인보다 동화된 기간이 길기 때문에 두드러지진 않고 있다. 2015년 기준 일본계 미국인 중 27% 정도만이 해외에서 태어났는데 이는 아시아계 미국인 중 독보적으로 낮은 수치이다.[2]
일본계 미국인은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과 비교할 때 눈에 띄게 타민족과의 결혼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2008-10년 동안 일본계 미국인의 55%가 비아시아인과, 9%가 비일본 아시아계 미국인과 결혼해 약 64%나 되는 일본계 미국인이 타 인종과 결혼했다. 아시아계 평균은 35%였고 두번째로 타민족과 혼인을 많이 한 필리핀계도 54%로 일본계에 비해 유의미하게 낮다.
이민 역사가 길어서 뿌리인 일본보다는 현 거주지인 미국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하고, 또 과거 미국과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치뤘던 탓에 그 사이에서 고래 싸움에 끼인 새우마냥 많은 수난을 당한 적이 있어서 스스로를 일본인이 아닌 미국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 커뮤니티인 심지어 한국계 미국인이나 중국계 미국인과는 달리 3세대, 4세대부터는 일본어조차도 못하는 경우가 흔하고 영어구사율이 약 84%로 아시아계 미국인 중 가장 높은 민족에 속한다. 종교도 기독교 인구가 1% 전후인 일본과는 달리 절반 가까이가 기독교인일 정도이기도 하다.
한편 진주만 습격을 준비할때 스파이 활동으로 엄청난 공을 세운 요시카와 타케오(吉川猛夫)[3]는 본국에 보내는 무전에서 하와이에 있는 일본계 미국인들을 (일본인 기준에서) '''쓰레기'''라고 불렀고, 전쟁이 시작되면 이들은 바로 미국 편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주장을 보고하기도 하는 등 일본에서의 인식 또한 나빴던 적이 있다. 하지만 전쟁이 실제로 일어나자 일본계 미국인들은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에 반발해 니세이 부대를 조직해서 유럽으로 파병가거나, 태평양 전쟁에서 통역과 암호해독관[4] 그리고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해할 때 자문역할[5]을 맡아서 틀린 보고는 아니였다. 그래서인지, WBC에서 사무라이 재팬 선수 소집 때 크리스티안 옐리치같이 차출 조건이 되는 일본계 미국인 선수들이 '''일본 내 언론에서 자주 언급되지 않고 있다'''. 교포이면서 성적이 우수하면 자주 언급하여 대표팀 차출 폭을 넓히려는 한국 쪽과는 정반대.
그렇다고 정체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일본 문화가 과거에도 미국에서 유명했던 편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 1980년대 이후 더이상 미국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못된다는 인식이 미국인들에게 자리잡히자 일본 문화가 생활속에 더욱 깊고 넓게 자리잡혔고 이에 자신감을 얻고 일본 메이저리거들의 경기를 챙겨보기도 한다.
미국으로 이민간 재일교포나 한국계 일본인들은 한국계 미국인이 되기도 하지만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이 없는 경우에는 일본계 미국인이라고 한다.[6] 이는 재일화교가 다시 미국으로 이민간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중국인 정체성이 있으면 중국계 미국인이 되고 중국인 정체성이 없으면 일본계 미국인이 된다.
종교는 대체로 불교신자이거나 무종교인이다.

3. 유명한 일본계 미국인 목록


  • 고바야시 하루카: 아나운서
  • 그랜트 이마하라(이마하라 마사루): 디스커버리 채널의 인기 프로그램인 Mythbusters의 고정 출연자이자, 특수효과 전문가. 2020년 7월 15일, 뇌출혈에 의해 4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 노먼 미네타(미네타 요시오): 1931년생. 미국 최초의 아시아계 장관으로 민주당 하원의원, 캘리포니아새너제이 시장, 상무부 장관, 교통부 장관을 역임했다. 하원의원 시절에는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사과와 보상 법안을 발의해 통과시키기도 했다. 2000년 빌 클린턴 정부에서 교통부 장관으로 지명됐는데 이듬해 정권을 교체한 조지 W 부시 정부에서도 그대로 유임되었고, 2006년까지 재직해서 역대 교통부 장관 중 최장기 임기를 기록했다. 9.11 테러 당시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전체 북미 지역(캐나다 포함) 항공 차단 명령을 발동시켰으며 사태 수습에 일조했다. 이때를 기념해 산호세시는 2001년부터 산호세 국제공항을 노먼 미네타 국제공항으로 개칭하고 있다.
  • 대니얼 이노우에(이노우에 켄): 하와이 호놀룰루 태생. 아시아계 미국인 정치인으로 가장 높은 위치까지 올라간 인물로서 하와이 초대 연방 하원의원이자 6년 주기 선거에서 9번 연속으로 당선되어 49년간 연방 상원의원을 지낸 민주당의 거물. 진주만 공습 당시에 의료봉사자였다. 1943년부터 미국은 일본계 미국인의 입대를 거부하지만 이노우에는 하와이 대학 의대를 포기하고 입대 신청을 하고 승인된다. 전원 일본계[7] 2세로 구성된 442보병연대(442nd Regimental Combat Team)에 들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이탈리아 전선에서 소대장으로 참여해 독일군 기관총 진지를 무력화하는 과정에서 팔을 한 쪽 잃었고 2000년 들어서 이 공로를 인정 받아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의회에서는 주로 외교, 상공, 국방 부문에서 활동하면서 워터게이트 사건, 이란-콘트라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맡아 정치적 입지를 키웠고 2009년에는 최고 원로 상원의원으로 상원의장 대행인이 되어 미국 대통령 승계서열 3위까지 오르며 미국 의원으로서 역사상 2번째로 최장기 임기 기록을 세웠다. 아래 마이크 혼다 의원과는 달리 미국과 일본 정계를 잇는 가교 노릇을 해왔고, 미국-이스라엘 외교 관계를 정립하기도 해서 친이스라엘 의원으로도 알려져 있다. 사후 미국은 그를 기려 알레이버크급 DDG-118을 USS 대니얼 이노우에함으로 명명했고, 이스라엘도 애로우 미사일 통제 기지 명칭으로 그의 이름을 따왔다. 또한 호놀룰루 국제공항의 명칭이 그의 이름을 따서 다니엘 K. 이노우에 국제공항으로 바뀌었으며, 하와이에 설치된 세계 최대 규모의 태양 망원경의 명칭도 DKIST(Daniel K.Inouye Solar Telescope)로 명명되었다.#
  • 마이크 혼다(혼다 마코토): 1941년 생. 미국 연방 캘리포니아 주 하원의원이다. 12년동안이나 해당 지역의 하원의원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이 사람의 지역구가 바로 실리콘 밸리 지역이라서 그쪽 관련 법안에 굉장히 영향력이 큰 사람이다.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며 일본 정부에게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한 전력도 있다.
  • 마이클 K. 나가타 (Michael K. Nagata)
현역 미 육군 3성장군이자 전 미 그린베레, ISA, 중부 특수전사령부의 엘리트 지휘관이었다. 익살스럽고 침착한 성격과 대단한 실력으로 미 특수부대쪽에서 널리 알려진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하나 종사하는 부대 특성상 업계 밖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image]
  • 마이클 리버스: 일본의 성우. 아버지가 미국인. 출생지는 불명.
  • 맷 히피:메탈코어 밴드 트리비움의 보컬 겸 기타. 어머니가 일본계고 아버지는 아일랜드계라고 한다.

  • 미나(TWICE)(미나 샤론 묘이)[8]
  • 미키 데자키: 영화 주전장의 감독.
  • 메이지 히로노(히로노 케이코): 1947년 일본 후쿠시마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하와이 태생의 일본계 미국인이라 태생 미국 국적자이다. 2013년에 하와이 연방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소속 정당은 민주당. 최초의 여성 아시아계 상원의원이다. 그리고 최초의 불교 신자 상원의원이자 일본 태생 상원의원이기도 하다. 대니얼 이노우에는 하와이 태생이다. 남편은 일본계 미국인인 레이턴 킴 오시마(Leighton Kim Oshima)이다. 인터뷰에 따르면 남편인 레이턴은 한국계 미국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레이턴은 일본계 정체성이 더 강한듯 하다.
  • 미유키 멜로디 이시하라[9]: 미야비의 부인. 이전에 melody.란 이름으로 활동한 가수였다.

  • 메리 키타가와:밑의 쟈니 키타가와의 누나.
  • 벤 쿠로키:1917년 5월 16일~2015년 9월 5일. 네브래스카 출신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에 미국 육군 항공대로 참전했다. 1941년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자 벤의 아버지 쿠로키 쇼스케는 아들 프레드와 벤에게 미군에 입대하라고 했다. 벤과 프레드는 그랜드아일랜드의 모병소에서 지원했지만 거절당했고 노스플랫으로 가 다시 지원했는데, 쿠로키란 성이 폴란드식 이름이라 생각한 모병관은 그냥 질문 없이 그를 통과시켰다. 사실 이는 농담으로 하는 말이고 모병관이 1명을 모병할 때마다 2달러를 받기 때문에 혈통 따윈 연연하지 않았다고 한다. 형제인 빌 쿠로키와 헨리 쿠로키도 같은 해에 입대했다. 1942년에 텍사스의 셰퍼드필드에서 벤과 프레드는 훈련을 받았는데 일본계 미국인들은 해외로 배치되지 않을 거란 얘길 들었다. 쿠로키는 장교에게 부탁해 영국에 주둔한 미 공군 8군에 행정병으로 갔다. 당시 항공기 사수의 수요가 높았던 탓에 그는 지원했고 2주 동안 교육을 받은 뒤에 B-24 포탑상부 사수로 활약했다.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갔다가 기체 문제로 착륙했다가 프랑코스페인 독재정부에 3개월 동안 붙잡혔다. 그의 동료들과 그는 미국 국무부의 신원 보장으로 풀려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복무했다. 그 후 주요 폭격작전에 참여했고 태평양 전쟁에 참전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거절당했지만 전쟁장관[10]인 헨리 스팀슨이 그를 보장하면서 일본계 미국인으론 유일하게 태평양 전쟁에 참전해 28회 출격하여 일본군을 박살냈다. 1946년까지 복무한 뒤 주로 기자로 일했으며 1984년 은퇴했다. 2015년 9월 5일에 9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센토류: 스모 선수 출신의 이종격투기 선수. 아버지가 주일미군.

  • 사무엘 이치에 하야카와
  • 에릭 신세키(신세키 켄):前 미국 육군 참모총장, 보훈부 장관
  • 제임스 이하(이하 요시노부): 다만 친부는 오키나와 출신이다. 즉, 선조가 과거 류큐인이라는 것인데, 井葉라는 성씨 자체가 오키나와 쪽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성씨이다.

  • 카일 히가시오카 : 뉴욕 양키스의 포수로 일본계 미국인 4세이다.
  • 캐리 후쿠나가
  • 쿄코 찬 콕스: 오노 요코의 딸. 위에 있는 션 레논의 이부 누나이기도 하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후쿠야마 요시히로):정치학자. 냉전의 종결되고 소련에 대한 미국의 승리가 확정된 1990년대 초반에 '자유민주주의가 이데올로기 경쟁에서 최종 승리했다'는 요지의 <역사의 종말>이라는 논문으로 학계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뒤로 발생한 여러 역사적 사건들을 보고 자신이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렸었다고 한다.
  • 헤일리 키요코: 어머니가 일본계 캐나다인 피겨 스케이터 사라 카와하라
  • Alex(오니지와 레이몬):ONE OK ROCK의 멤버였다.현재는 탈퇴.
[1] 하와이에는 대한제국 시절부터 갔지만 대규모 이민이 이뤄진 것은 이때부터이다.[2] 아시아계 평균이 59%이며 미국 이민 역사가 깊은 필리핀계도 52%는 미국 밖에서 태어났다.[3] 일본 해군의 정보장교이고 하와이 주재 일본영사관으로 배치되었을 때는 '''모리무라 타다시'''라는 이름으로 침투했다. 일본군이 진주만 습격 훈련과 실제 작전할 때 참고했었던 지도를 이 사람이 제작을 했고, 하와이에 소규모이지만 간첩망을 만들어 태평양 함대의 움직임까지 알아내 보고를 했다. 그리고 그의 스파이 활동은 매우 교묘해서, 진주만 습격 후 체포당했는데도 스파이 활동은 발각되지 않았다.[4] 일본군에서는 미군일본어에 대해 이해를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미군의 암호해독 프로젝트 책임자인 조셉 로슈포르 대령만 해도 일본어에 능통했고 많은 일본계 미국인 덕분에 매우 빠르게 번역 할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계 미국인들의 출신들도 다양해서 일본군이 가고시마벤으로 암호를 보낸걸 바로 해독할 정도였다.[5] 미국 정부에서 의뢰를 받아 쓴 국화와 칼의 저자인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에 가지않고 일본계 미국인들과 일본과 연줄이 있는 미국인들을 인터뷰해서 책을 썼다.[6] 일본 내에서 차별을 피하기 위해 일본어 밖에 못하는 경우[7] 공식적으로는 사실이 아니지만 비공식적으로 한국계를 일본계로 간주한 경우는 있었다.[8] 이렇게 서술한 이유는 브리드컷 세라 에미 항목 참고.[9] 혼전 성은 이시카와이다.[10] 당시엔 국방장관이 없었다


4.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