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삼국지)

 

1.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1.1. 창작물에서
2.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王士)
3.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王嗣)
3.1. 창작물에서


1.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王思
생몰년도 미상
제음 사람으로 서조영사를 지내면서 왕사는 정치에 관한 의견서를 갖추었다가 조조의 의견을 빠뜨리자 매우 노해 중형을 받을 위기에 처했는데, 왕사는 외출하던 중이라서 양습이 대신 가서 조조에게 대답했다.
결국 왕사는 자신을 대신해 심문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는 것을 듣고 황급히 돌아와서 자신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다고 인정했으며, 조조는 양습이 자기를 변호하지 않은 것과 왕사가 책임을 다하는 태도에 감탄하면서 '아군 진영에 이렇게 의기가 넘치는 선비가 두 명이나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라고 말했다.
양습과 함께 죄가 면해져서 둘은 자사로 임명되었는데, 왕사는 예주자사에 임명되었다. 설제, 극가(郤嘉)[1]와 벼슬의 직위가 대략 비슷했고,[2] 극가와 더불어 생각하는 바와 일을 행하는 것이 서로 비슷했다. 조비는 조서를 내려,

설제는 순수하지 못한 관리요, 왕사와 극가는 순수한 관리라. 각각 관내후(關內侯)를 내리니 그를 부지런히 갚으라.

라는 조서를 내리면서 설제는 빼놓고 왕사와 극가에게만 관내후를 내린다.
후에는 상서복야가 되었다가 용종복야였던 필궤가 왕사의 후임으로 신비를 추천한다.

상서복야 왕사는 정력적이고 부지런한 옛날 관리이지만 그의 충성심과 신의 및 지략은 신비만 못합니다. 신비가 왕사를 대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때 조예는 총애하는 신하인 유방손자에게 조언을 구했고, 두 사람은 이렇게 답변했다.

폐하께서 왕사를 기용한 것은 실제로 그의 노력을 취하려고 한 것이었지. 허명을 귀하게 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비는 실제로 총명하고 정직하지만 성정은 강직하고 독단적입니다. 성상께서는 이 점을 깊이 관찰해야만 합니다.

결국 신비는 왕사의 후임이 되는 대신, 밖으로 나가 위위가 되었다. 이것은 신비가 유방과 손자와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 일로 유방과 손자는 세상 사람들의 조소를 받는다.
사람들이 번거롭다고 여기는 효련문서에서 현인을 공경하고 선비를 예우하자 이로써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고 정시 연간[3]에는 대사농이 되었는데, 연로해서 눈이 어두웠고 성내면서 노하는 것에 절제가 없어, 아래의 관리가 시끄럽게 말해도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성품은 믿음이 적어 한 관리가 자신의 아버지가 병에 심하게 걸리자 휴가를 청했지만 이를 사실이 아니라고 의심해 휴가를 주지 않았으며, 관리의 아버지가 다음날에 죽었지만 왕사는 한스러운 생각이 없었고 그의 각박함이 이와 같았다.
위지에 따르면 그는 업무를 잘 처리하는 능력이 있는 관리였지만 작은 일에 가혹할 정도로 추궁해 일을 대범하게 처리할 줄을 몰랐으며, 위략에는 그의 성격을 드러내는 파리에 관련된 일화가 있다.
붓을 들어 글을 쓰고 있을 때 파리가 날아와 붓끝에 앉았고 쫓아도 계속 날아왔는데, 서너 번씩 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자리에 일어나 파리를 쫓았지만 잡을 수 없었다. 되돌아와 붓을 집어서 방바닥에 내던진 후에 짓밟아 부쉈으며, 이 일화를 왕사노승(王思怒蠅)이라고 부른다.
양습전에서는 왕사 또한 능력 있는 관리지만, 지나치게 세심하여 전체적인 기둥이 없었다고 평가되었다.

1.1. 창작물에서


[image]
삼국지 14 일러스트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14부터 등장하고 능력치는 통솔 26, 무력 30, 지력 63, 정치 77, 매력 28이며 일러스트는 불량배 같은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다. 개성은 조달, 농정, 격분, 주의는 명리, 정책은 지역진흥 Lv 3, 진형은 방원, 충차, 전법은 업화, 매성, 친애무장은 양습, 혐오무장은 필궤다. 생년은 168년, 몰년은 246년까지 되어있다.

2.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王士)


王士
생몰년도 미상
광한군 처현 사람으로 왕보의 사촌형이며, 자는 의강(義彊).
유비를 따라 촉으로 들어간 후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부절의 장이 되었다가 아문장으로 승진했으며, 지방으로 나가 탕거 태수가 되었다가 건위 태수로 옮겼다. 제갈량이 남쪽 정벌에 나서자 익주 태수로 전임되었는데, 남쪽으로 가기 전에 만족에게 살해되었다.
유비를 따라 촉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으로 볼 때 늦어도 형주 시절부터는 유비를 섬긴 것으로 보이며,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왕보, 이소, 마훈, 마제, 이복, 이조, 공록과 함께 본성을 닦아 촉에 향기가 나도록 했다면서 공록과 함께 지기가 있고 용감하다고 평가했다.
진삼국무쌍6에서는 진나라 스토리 모드의 제2차 촉 격퇴전 전편에서 남안성 외부의 촉군, 강족의 군사들을 물리치면 남안성 서쪽에 있는 계곡에서 황월영과 함께 촉군의 원군으로 등장한다.

3.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王嗣)


王嗣
생몰년도 미상
건위군 자중현 사람으로 자는 승종(承宗).
연희 연간(238 ~ 257년)에 공업, 덕행이 현저해 효렴에 추천되었으며, 점차 승진해 서안위독, 문산 태수를 역임하고 안원 장군을 겸임했다. 영 내의 강족, 호족들을 은애, 신의를 가지고 접했기 때문에 강족, 호족들이 모두 그에게 복종했다. 또 평소 난폭한 여러 부족들도 모두 복종했기에 당시 북방의 국경 지대는 안정되었다.
그 때문에 강유가 북벌을 할 때마다 강족이 말, 소, 양, 모직물 등을 제공했으며, 한층 더 곡물을 내서 자금의 도움으로 했기 때문에 강유는 그 자재를 기반으로 싸울 수 있었다. 진군 장군[4]으로 승진해 그대로 군 태수를 겸임했으며, 후에 강유의 북벌에 수행했을 때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고 이로 인해 수 개월 후에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이민족들이 수 천 명이 몰려 들어 눈물을 흘려 소리높여 울었으며, 왕사는 인정이 두텁고 진심있는 인품으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신뢰받았다. 강족들은 왕사의 자식, 손자들[5]에 대해 육친과 같이 접하거나 의형제의 인연을 묶었으며, 그에게의 친분은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촉한의 인물들을 논한 계한보신찬에 나와있지 않지만, 촉한 때 관직을 역임한 사람이기에 익부기구잡기에 상파, 위계 등과 함께 기록되었다.

3.1. 창작물에서


[image]
삼국지 14 일러스트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14부터 등장하고 통솔 58, 무력 43, 지력 61, 정치 74, 매력 81이며 일러스트는 100만인의 삼국지의 부하를 재활용했다. 때문에 촉나라 인물이면서 입고있는 옷이 파란색이라 위나라 인물로 보인다. 개성은 조달, 친강, 인정, 주의는 예교, 정책은 운반개발 Lv 4, 진형은 학익, 장사, 전법은 치료, 진정, 친애무장과 혐오무장은 모두 없다. 생년은 219년, 몰년은 256년까지 되어있다.

[1] 왕사의 이 기록을 제외하면 등장이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2] 이것이 언제 일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뒤의 조비의 말을 보아 조비 때의 일인 듯하다. 즉, 양습이 병주자사가 된 것이 조조 시절이고 이 때 왕사도 같이 예주자사가 되는 한편, 점점 승진하면서 조비 때에는 설제, 극가와 벼슬이 비슷했다고 하면 승진 흐름이 자연스럽다.[3] 240 ~ 249년이다.[4] 제갈량의 1차 북벌로 인해 조운이 받은 그 직책이다.[5] 강유의 북벌 당시 강유군 본대 소속 부장으로서 많은 공을 세운 인물로 왕사와 유은을 들 수 있는데 이 두명 모두 강유보다 더 연장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은 같은 경우는 확실히 생몰년도가 기록에 남아서 강유보다 10살 이상의 연장자였다는 걸 알 수 있고, 왕사 같은 경우는 생몰년도가 기록에 남지 않았지만 강유의 북벌 당시 이미 손자들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강유의 북벌 최소 당시 강유와 비슷한 또래인 50대 이상이었거나 유은과 비슷한 연배인 60대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