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직

 

'''王直''' (? - 1560)
왕직의 동상
1. 개요
2. 평가


1. 개요


중국 명나라 대의 해적.
중국인 출신의 거물 왜구.[1] 가정제 시절에 악명을 떨쳤던 가정왜구(嘉靖俊德)의 대표격인 인물이며 당대의 해적왕이라 할만한 대해적이었다.[2]
중국의 휘주 흡현 출생으로 본명은 왕정(王鋥)이다. 왕직은 어머니의 성을 따와서 부른 별칭이며, 스스로를 오봉(五峯)이라고도 칭하곤 했다.
본래는 소금상인으로, 용맹하고 의협심이 있어서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3] 그러나 사업에 실패하게 되자 허이의 밑으로 들어가 밀수꾼 생활을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해상무역에 진출하여 일본, 필리핀, 안남, 타이, 말라카 등과 교역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1540년 경에는 일본의 고토열도(五島列島)[4]를 근거지로 삼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밀무역의 중개자로 이름을 떨치며 위세를 누렸다. 이 때에 이르러서는 정해왕(淨海王)을 자칭하기도 하였다.
1543년에 일본에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타네가시마에 갔다가 조총을 전파했다는 설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배에 있던 포르투갈인이 타네가시마 영주에게 화승총을 팔았다고 한다. 다만 멘데스 핀투는 자신이 1542년 전파한 것이라고 자신의 편력기에서 주장하였다.
1547년에는 주환의 해금 강화와 단속이 심해지자 왜구들과 결탁하여 중국 연안을 약탈하는 등 해적 행위를 하였다.
1555년 을묘왜변 때 조선에 쳐들어온 해적단도 왕직의 해적단이었다.
1559년 12월, 절강순무 호종헌에 의해 체포되었고, 이듬해 1월에 처형당하였다.

2. 평가


행적을 보면 그야말로 콜롬비아의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전생에 왕직이 아니었을까 싶을정도로 닮은게 많다.
대규모 카르텔을 구축하고 국제적으로 골칫거리를 만들던 것, 가족을 끔찍히 아끼는 모습, 심지어 사람들을 다루는 기술까지 비슷하다.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그 유명한 Plata o Plomo(은 아니면 납)의 경우 자신의 은(돈)을 받고 자기 밑에서 일하거나 납(총알)을 박아주거나 양자택일을 하도록 사람들에게 강요하던 방식을 왕직도 아주 유사하게 했다. 자신에게 거스르는 관리가 있다면 그 집에 은이 든 궤짝을 보내 시험하는 것이 그것이다.
최후에도 이 둘은 비슷한 방식으로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가족에게 전화 통화를 하던 것이 들통나면서 위치가 노출되어 죽게되었고 왕직 역시 가족의 안전과 이에 대한 향수를 미끼로 잡아 참형 당하게 된다.
더불어 범죄의 길로 대성하게 된 시대적 배경까지도 에스코바르와 판박이인데, 에스코바르가 미국에서 마약과의 전쟁이 선언 되면서 오히려 마약 문제가 더 극심해진 것을 틈타 부를 키운 것과 같이 왕직의 해적 행위 뒤에도 명나라의 해금령으로 인한 밀무역 수요가 배경이 되었다.[5]

[1] 명나라 대의 왜구는 악명이 높아 중국의 도시와 마을들을 대대적으로 약탈하고 중국인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잡아갔으며 중국의 해적들과 결탁하기도 했다.[2] 비슷한 부류의 인물로는 이광두(李光頭), 허동(許棟) 등을 꼽을 수 있다.[3] 본래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민간인들이 소금을 파는 것을 규제하고 전매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다보니 소금상인들 중에는 밀수꾼들이 많았는데, 요즘으로 치면 조직폭력배와 같은 무리들이다. 왕직도 이런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4] 고토는 옛날부터 왜구 및 일본이 한반도와 중국을 침략하는 출발지로 활용되어왔다. 또한 이 지역은 사쓰마랑 가깝기 때문에 훗날 일본 해군의 중심 지역이 되기도 한다,[5] 사실 마약과의 전쟁이나 해금령의 경우 단순히 에스코바르와 왕직의 유사함 외에도 범죄학 분야에서 '''풍선 효과'''의 대표적인 예시들이라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