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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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명나라의 제11대 황제.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흠천이도영의성신선문광무홍인대효숙황제(欽天履道英毅聖神宣文廣武洪仁大孝肅皇帝). 휘는 후총(厚熜). 연호는 가정(嘉靖). 성화제의 4남이자 홍치제의 이복 동생이 되는 흥헌왕 주우원(예종)의 차남. 그러니까 전임 황제인 정덕제에게는 사촌동생이다. 만력제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명군이 많기로 유명한 세종 묘호[1] 를 받은 군주 가운데 유일한 암군이다. 가정제가 통치한 16세기 중엽은 북로남왜(北虜南倭), 즉 몽골과 왜구의 침공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시기였다.
원래대로라면 황실의 방계로서 배를 통통 두들기며 놀고 먹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인물이였으나 후사가 없던 전임 황제인 정덕제가 놀고 먹다가 물에 빠져 죽어버리는 바람에(...)[2] 평범한 황족 주후총은 순식간에 대명의 황제가 되어버리고 만다. 사실 그가 즉위한 것도 단지 계승 자격이 있는 정덕제의 직계친족 중 항렬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즉위 당시 겨우 15세.
유교예법에 따르면, 황제의 자리는 아버지 → 아들, 그게 아니면 형 → 동생으로 계승되어야 한다.[3][4] 따라서 후사 없이 죽은 정덕제를 잇는 차기 황제는 당연히 정덕제와 같은 항렬, 또는 조카 뻘 중에서 찾아야 한다. 만약 흥헌왕 주우원이 살아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정덕제의 후계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홍치제의 바로 아랫 동생이기에 정덕제에게는 숙부가 되고, 조카 → 숙부로는 계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홍치제가 성화제의 3남이고 흥헌왕 주우원이 4남이니 홍치제의 아들인 정덕제의 뒤를 이을 수 있는 가장 항렬 높은 황족은 주우원의 아들인 주후총, 즉 가정제뿐이었다.
1521년 즉위 당시에 가정제는 대신 양정화 등이 건의한 바를 따라 정덕제의 측근들을 처치하고 그 악정을 고침으로써 민심의 일신을 꾀했다. 당연히 새 황제에게 거는 기대는 대단히 높았다.
2. 생애
2.1. 대례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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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종 주우원
그러나 가정제는 즉위 직후 커다란 문제에 부딪혔다. 그것이 중국판 예송논쟁인 '대례의 의(議. 혹은 대례의분의)'이다. 문제의 중심은 가정제가 방계 황족으로서 들어와 즉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로서는 누구의 뒤를 이었다고 해야 하는가? 또한 가정제의 친부 흥헌왕(興獻王) 주우원(朱祐杬 1476-1519)[5] 을 어떻게 처우해야 하는가?
황실의 정통성을 중시하는 양정화 등을 위시한 관료들은 가정제의 백부에 해당하는 효종(홍치제)을 양부로 모셔서 황고(皇考)[6] 라 하고 친부인 흥헌왕은 황숙부(皇叔父)라 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가정제는 이를 내키지 않았고, 친부를 황고, 홍치제는 '''황백부'''라 칭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리하여 황제파와 신하들이 정면으로 대립하는 대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가정제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양정화 등 예법파가 사직하고, 나머지 황제파를 중심으로 하여 황제의 뜻대로 결론을 지으며 흥헌왕을 '''예종 헌황제'''로 추존했다.[7]
대례의 의는 단순히 고루한 예법에 얽매여 치고 박고 싸운 것이 아니라, 실은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가정제가 정덕제가 아니라 흥헌왕의 뒤를 이었다고 하면, 황제가 적장자를 우선으로 하는 정통 라인이 아니라 방계도 이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영락제 시기에 발생한 사안과 사실상 동일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황실의 방계라도 힘만 있으면 영락제처럼 황제가 되든가, 아니면 나중에 이런 상황이 또 발생할 경우 누구라도 황실의 계승을 주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게 되는 것이다.
당장은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훗날 정덕제처럼 후손이 끊긴 상황이 발생하면, 비록 방계 출신이지만 자신이 제2의 가정제가 되겠다고 나서는 황족이 나올 위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양정화 등은 목숨을 걸고 반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가정제가 승리했다. 여기에는 가정제의 독단적인 똥고집(?)도 작용하기는 했지만, 양명학처럼 절대적인 정통성 말고 누구라도 정종이 될 수 있다는 사상적인 뒷받침, 국법을 엄격하게 준수하기보다는 유연하고 느슨하게 적용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명대 중후기의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뒷받침된 결과다.
2.2. 암군 세종
이후 황제는 환관의 주선으로 할아버지 성화제처럼 도교를 신봉하여 스스로를 신선이라 칭하고 긴 도호를 붙이는가 하면, 월경혈과 아침 이슬 등으로 불사의 약을 만든다고 궁녀들을 학대했다. 또 궁녀들이 조금이라도 비위를 거슬리게 하면 사정없이 매를 쳤다. 명나라 황제 가운데 즉위 후 가장 빨리 여색에 빠졌는데(3년), 이것도 도교 때문이었다. 신기하게도 총애하는 도사들이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음이 그나마 다행일까?
그가 얼마나 궁녀들을 혹사했는지, 가정 21년(1542) 황제의 행실을 견디지 못한 궁녀 16명이 애첩과 동침하던 황제를 목졸라 죽이려고 시도했다. 이 사태를 임인궁변(壬寅宮變)이라 한다. 궁녀들의 계획이 성공하여 가정제가 죽었다면 역사상 최악의 죽음을 당한 황제가 되었겠지만[8] , 황후가 그를 구해주었다. 물론 가정제 암살을 시도한 궁녀 16명은 전원이 저자거리에 끌려가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 불쌍한 궁녀들의 이름은 양금영(楊金英), 형취련(刑翠蓮), 양옥향(楊玉香), 소천약(蘇天藥), 요숙고(姚淑皐), 왕괴향(王槐香), 관매수(關梅秀), 유묘련(劉妙蓮), 진국화(陳國花), 장금련(張金蓮), 왕수란(王秀蘭), 서추화(徐秋花), 정금향(鄭金香), 황옥련(黃玉蓮), 양취영(楊翠英), 장춘경(張春景)이다.
그런데 황후가 뒷처리를 하면서 아무 관련 없는 가정제의 애첩까지 죽여버린 것이 드러나자, 가정제는 황후한테 크게 화를 내었다. 물론 이 정도는 정상적이지만, 훗날 황후궁에 불이 나자 끄지 말라고 해서 그 황후가 불타 죽고 말았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야사에서 나오는 추측일 뿐이다. 황후 방씨는 가정제가 죽었을 때 유일하게 그의 무덤에 같이 묻힌 사람이다. 가정제는 황제가 되기 전에 있던 황후부터 융경제의 생모가 된 두 황후까지 황후가 모두 4명이 있었는데, 오직 방 황후만 가정제와 같이 묻힐 수 있었다. 현재 가정제의 무덤에는 황후 3명이 묻혔는데, 나머지 둘은 가정제가 죽은 다음 융경제가 생모를 부황의 곁에 합장시키는 와중에 같이 합장한 것이다. 합장이 안 된 나머지 한 명은 폐후였다. 상식적으로 자신이 죽인 다음 그 사람을 자신과 같이 무덤에 묻을 리가 없다. 사람을 죽인 다음 슬픈 척하면서 이런저런 제사를 거하게 올릴 수야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저승에서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곤녕궁의 화재로 방 황후가 목숨을 잃은 다음 사람들의 상상에서 비롯한 추측일 뿐이라는 것인데, 반박도 없진 않다.[9]
가정제는 점점 도교에 심취했다. 도교의 제문(祭文)을 청사(靑詞)라 부르는데, 급기야 청사를 잘 만드는 자가 재상으로 발탁되었단 이야기가 나올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청자를 잘 지어 출세하고 정권을 장악했다고 유명한 인물이 엄숭이다. 그는 도교를 광신하여 정치를 돌보지 않는 가정제를 대신해 국정을 전횡하기를 전후 20년에 미쳤다. 그 동안 극도의 뇌물 수수 행위가 정치전반에 만연했다. 환관 세력이 일시 후퇴했으나 그 대신 권신의 독직 정치가 왕조의 퇴락을 촉진시킨 것이다. 게다가 엄숭이 휘두른 권력의 배경은 환관 세력과의 적절한 타협에 있었다. 즉 일시적으로 후퇴했다고 볼 수는 있어도,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후퇴였다는 것.
명나라 황제들 중에서 도교를 믿은 황제는 원래 많았다. 예를 들어 명군으로 손꼽히는 홍치제도 도교를 믿었다. 엄숭은 도교의 제문을 잘 짓기로 유명했는데, 그가 단순히 제문을 잘 지어서 재상에 발탁된 것이 아니다. 엄숭은 제문으로 총애를 받기 전 이미 재상으로 발탁된 뒤였다.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쫓겨난 다음 도교의 제문으로 황제의 신뢰를 회복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청사재상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엄숭이 간신이기는 하지만, 그는 이미 대학사였고 재상에까지 오른 인물이었으며 쥐뿔도 없는 인물이 청사 하나 잘 짓는다고 재상까지 오른 것이 결코 아니다.[10]
2.3. 해서 파관
이 황제 말년에 걸출한 사람이 나타났으니 바로 그 유명한 '''해서'''다. 해서는 가정제의 무능함을 비판하는 강도 높은 비난 상소를 올렸다.
라고 황제를 정면으로 비판했다.황제 폐하께서는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백성들은 폐하의 연호인 도타울 가(嘉), 아름다울 정(靖)을 집 가(家)에 깨끗할 정(淨)이라고 바꿔 부르며[11]
'''가정(家淨)'''이라고 하면서 폐하를 원망합니다.
한국 속담에도 '서 발 장대를 휘둘러도 거칠 게 없다.'는 말이 있는데, 집안에 가구고 항아리고 식량이고 전혀 없어서 부숴먹을 것도 없다는 뜻이다.
가정제가 격노하여 사형을 명하려 하였으나, 옆에 있던 환관이 '해서는 이미 상소를 올리기 전에 '''가족과 이별하고 관을 짜놓았다.'고 알려주자 탄식하고는 결국 죽이려던 생각을 포기했다고 한다.[12] 결국 당시 재상인 서계[13] 가 말리기도 해서 처형이 늦어지다가 가정제가 죽고 그 다음에야 다시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먼 훗날 북경 부시장이었던 오함(吳晗)에 의해 해서파관(海瑞罷官)이라는 이름의 희곡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신 중화제국 초대 천자께서 일으키신 전대미문의 재앙의 서곡'''으로 역사에 남았다. 자세한 것은 해서파관 사건 문서 참조.
2.4. 장수와 추존
수은 등 중금속 가득한 선단을 그렇게 먹고도 오히려 총애하던 도사들보다 장수하여 환갑 직전에 사망하는 등 장수했다. 명나라에서 홍무제 주원장, 영락제 주체 다음으로 장수했고, 재위 기간으로는 만력제[14] 다음으로 긴 45년을 재위했다. 하지만 그가 죽으면서 명나라의 재정난은 표면으로 떠올랐다.
참고로 당시 중국인들은 수은을 신기한 힘을 가진 액으로 보고 장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절대 아니다. 수은 같은 중금속은 인체에 치명적일 뿐만 아니라, 장기간 복용하여 몸에 축적되면 신경이 파괴되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다만 이런 경우 지칭하는 수은은 주로 주사(경면 주사)를 의미하는데, 이는 HgS(황화제이수은, 적색 황화 수은)으로 인체 흡수율이나 위험성이 적은 무기 수은이다. 주사는 수비법이라 하여 상당히 오랜 시간 물에 띄워 걸러내는 방법으로 무기수은만 정제하는데, 이 과정에서도 증발한 수은을 흡입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물론 무기수은 중독도 없진 않고, 수은도 한약재로서 따로 존재는 하나, 한의서에도 대한대독(大寒大毒)하여 절대 함부로 쓸 수 없는 한약재로 서술했다.
그런 가운데 말년에는 경술의 변[15] 이 일어났고 남쪽으로는 왜구가 극성을 부리는 등 혼란을 겪었다. 특히 왜구의 노략질이 워낙 심해서 당시의 왜구를 "가정 왜구"라 부르기도 한다. 해상 밀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중국인 왕직이 왜구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중국 남해안을 들쑤시고 다녔던 때도 바로 이 시기였다.
다만 이 때 척계광이 1544년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했는데 기용이 늦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데, 이때 그는 겨우 16살이었기 때문이다. 척계광이 일군을 지휘하는 사령관급으로 기용된 것이 1555년, 27살 때이니 이 때도 전혀 늦게 임명한 것이 아니다.
더해서 1556년엔 산시 대지진이 터져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사건까지 벌어젔다.
근데 이 사람이 '''세종'''(世宗)으로 추존됐다. 업적으로는 당연히 자격이 없으나 정덕제 이후 끊어진 황통을 가정제가 새로 이었기 때문에 분에 넘치는 묘호를 받은 것이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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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좋은(?) 점도 있었는데, 이 가정제대부터 만력대(萬曆代)에 걸친 경제 발전과 신사층 문화의 발달 속에서 문학·미술 부문에 많은 명품(名品)이 나왔다는 것이다.
- 참고로 가정제 본인은 암군이지만 아들 융경제는 가정제의 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명군이었다.
4. 대중매체에서
- 게임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세계관에서는 템플 기사단의 후원 덕에 황제 자리에 오른 것으로 나오고(출처 :어크 백과사전) 막장성이 실제 역사보다 한층 강해졌다(...). 소녀 암살단원 샤오 윤의 정덕제 첩 시절 친구들인 나머지 첩들을 고문하고 끔살했고, 암살단 중국 지부도 자근자근 짓밟아 버렸다. 이후 이탈리아 피렌체로 떠난 챠오 융과 그녀의 스승도 잡기 위해 자객들을 파견했고, 자객들은 그녀의 스승을 죽인 걸로도 모자라 기어이 피렌체까지 그녀를 쫒아왔다. 해당 작품은 21분짜리 애니메이션 어쌔신 크리드: 엠버즈. 그리고 어쌔신 크리드 크로니클즈 차이나 편의 결말 부분에서 샤오 윤은 중국 암살단을 재건한 이후인 1567년에 마침내 가정제를 독살함으로써 비로소 복수를 완벽하게 달성하는 데에 성공한다.
- 코에이의 게임 대항해시대 3에서도 등장한다. 중국 발견 후 개항 협상 이벤트를 진행하면 자금성에서 협상할 때 등장해서 오문이란 조그만 항구를 내준다. 조건이 까다로워서 이벤트 자체를 보기가 힘들고[17] 능력치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에 헥스 에디터 같은 수단을 썼을 때 확인할 수 있다. 직업은 군인, 혈액형은 B형. 능력치는 체력 46, 지력 66, 무력 46, 매력 61로 후한 편이다.
5. 둘러보기
[1] 세종 묘호는 그 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명군에게 부여하는 것이다.[2] 정확히는 폐에 물이 차서 염증이 생기는 익수사고로 죽었다. 심지어 죽었을 당시 아들은 커녕 남동생인 울도왕 주후위마저 죽어버린 상황이였던지라 대가 끊겨버린 상황이였다.[3] 아버지가 아들에게, 형이 동생에게 제사를 지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이웃한 조선의 예법 역시 마찬가지였다.[4] 단 이러한 불문율이 몇번 깨진 적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금나라의 장종(조카) > >선종(장종의 이복형)의 사례와 고려의 헌종(조카) > 숙종(숙부), 조선의 헌종(조카) > 철종(숙부)의 계승이 있다. 단 금나라의 경우 이후에 선종이 되는 완안오도보가 서자라 계승권이 없었던 데다가 장종의 다른 동생이나 후계자가 없던 상황이였고 고려의 경우에는 반강제적인 양위, 조선 철종의 경우에는 항렬 상 헌종의 숙부이지만 나이가 어린데다가 왕통이 귀해서 가장 가까운 왕족인 철종 이외에는 대안이 없었다.[5] 성화제의 4남이자 홍치제의 이복동생이다.[6] '고(考)'는 망부(亡父), 즉 '돌아가신 아버지'라는 의미.[7] 이는 조선시대에도 영향을 크게 끼쳤다. 흥미롭게도 가정제 사후 즉위한 선조와 달리 인조가 자신의 생부인 정원대원군을 추숭하려고 어거지를 쓴 추숭 논쟁과 매우 닮았다.[8] 이렇게 죽은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동진의 사실상 마지막 황제 효무제는 애첩한테 "네 나이도 이제 30살이구나. 더 젊은 여자를 찾아야겠다."라고 말했다가 질식사 당했다.[9] 가정제는 황후가 죽자 그래도 자신을 구해주었던 황후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어 다시 보고 싶어 했다는 기록이 있고, 자신이 죽으면 황후 옆에 묻어달라고 말한 기록도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주장도 있다.[10] 기실 명나라의 재상이라고 말하는 내각 대학사는 원래 황제의 자문역할을 하던 정5품정도의 관직이였으나, 홍무제시기 승상직이 폐지되면서 중요해졌고, 가정제시기 예우(禮遇)를 1품관인 육부상서(六部尙書)의 상위에 두면서 사실상 재상이 되었다.[11] 집안이 깨끗하다. 집이 깔끔하게 정리 정돈이 잘 됐다는 뜻이 아니라, 집안에 아예 아무 것도 없다. 즉, '''아무 것도 없이 가난하다'''는 말이다. 한국어 독음만이 아니라 중국어 발음도 嘉靖과 家淨은 둘 다 jiajing으로 같다. 현대의 중국어 발음과 달랐던 명나라 시대의 중국어 발음으로도 두 단어의 발음이 같았던 모양이다. 홍무정운에서도 家는 嘉운에 속하고 靖은 淨운에 속하는 동음 글자로 나온다.[12] 사실 해서를 죽이면 자신이 충신을 죽인 폭군으로 역사에 남으리란 게 두려웠다. 그래서 해서를 고문만 하고 처형은 하지 않았다.[13] 서계는 간신이 아니다. 황제 앞에서 사바사바해서 오래 자리를 보전했다는 평이 있기는 하지만, 명재상이란 평가를 받는다. 또한 명나라 말기의 대표적인 명재상으로 꼽히는 장거정을 키운 인물이기도 하다. 일종의 멘토인 셈이다.[14] 참고로 가정제는 만력제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15] 몽골의 알탄 칸이 베이징을 포위한 사건[16] 이것과 똑같은 얼굴의 인물이 홍콩의 관광지로 유명한 식당인 점보의 로비 계단에 그려져 있기도 하다. 동일 인물인지는 확인 하지 못함.[17] 중국을 플레이어가 아닌 경쟁자가 발견해야 하고(게임상으로는 바스코 다 가마가 발견) 자금성도 스폰서와의 계약으로 발견해야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