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흐리우냐

 


гривня(흐릐ː우냐)
1. 개요
2. 1차
3. 2차
4. 3차 (현행권)
5. 4차 (2018년 이후 개정사항)


1. 개요


우크라이나통화ISO 4217 코드는 UAH, 약칭은 hrn(грн)이다. 러시아어식으로 읽으면 '그리브냐'.
인플레는 통화바스켓제로 전환 후 3%대로 바뀌었는데도 다소 불안정한 편[1]이고, 보조단위로 코피이카(копійка)가 있다. 기호는 ₴로, 대략 S를 뒤집어[2] 세로줄 2개를 넣은 형태. 복수형은 гривні(흐리우니), 흐리벤(гривень)이다. 전신은 우크라이나 카르보바네츠. 내수가 약한지 외환시장 영향을 지나치게 잘 받는 편이었는데, 근래에 들어 정치적 문제까지 겹치면서 무진장 떨어졌다. 최전성기인 2008년에는 250원도 돌파했었으나, 외환위기로 확 꺾여 150원까지 하락, 이후 계속 내리막길을 걷다가 크림반도 위기로 다시 반토막났고, 2016년에는 세토막이 나 버렸다. 어디까지 내려갈지는 두고봐야 할 것 같다. 참고로 2015년 10월 기준 환율은 53원/UAH이었고, 2016년 하반기 기준으로는 40~45원/UAH이다.
흐리브냐는 슬라브어 грива(흐리바)에서 파생한 단어로 "말갈기"[3]라는 의미인데, 이것도 산스크리트어로 "목"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첫 등장은 11세기 키예프 대공국에서 발행한 전혀 돈 같아 보이지 않는 마름모꼴 동전이다.
혹여 2,3차 권종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수정된 이 시점에서는 KEB하나은행 본지점에 가서 비고시 추심이 가능한지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추심이 된다면 당행 통장을 제시하여 입금 요청하거나 3주후에 연락이 오면 해당 본지점에 다시 방문해야 한다.
2020년 10월 1일부로 25코피이카 동전과 2차분까지의 지폐들이 퇴출될 예정이며, 향후 3년간 중앙은행과 중앙은행이 지정하는 은행에서 새 화폐로 교환하여 줄 예정이다. 한편 동전으로 대체되는 3, 4차분 저액권 지폐들(₴1~₴10)은 이날 이후에도 여전히 사용 가능하다. 우크라이나 국립은행 공지사항

2. 1차


1996년 9월 2일 출시되었으나 표기상으론 1992년판이라 되어있다. 당시의 불안정한 초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자 만든 단위인만큼 정확히 2주동안만 구권인 카르보바네츠과 교환해주었다. 교환비는 1:100,000 이며 당시 환율은 ₴1.76/USD
앞면에 들어가는 인물은 특정액면으로 고정되어 있다. 한국으로 치면 천원에 이황, 만원에 세종이라는 식.
1차
앞면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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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볼로디미르 대공[4]
케르소네소스 사적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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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공(賢公) 야로슬라우 1세[6]
키예프 성 소피아 대성당[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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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보흐단 흐멜니츠키[8]
수보티우의 일린스크 교회[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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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반 마제파[10]
키예프 페체르스크 대수도원[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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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반 프란코[12]
리비우 오페라 발레 극장[13]

3. 2차


분명 공식적으로도 두번째 시리즈인게 확실한데도 1차 시리즈와 동시에 배포되었다. 단, ₴2~₴20는 이듬해 9월 1일에, 새 고액권인 ₴200는 2001년 8월 22일에 등장했다. 첫 등장 당시에는 우크리아나 사람들 입장에서 매우 고액권[14]라 쓰일일이 없었을까 싶었는데... 1997년 아시아발 외환위기[15]의 영향으로 가치가 삽시간에 '''대폭락'''을 하는 바람에 평범한 돈이 되어버렸다. 교체 직전인 2000년 ~ 2005년의 평균환율값은 대략 ₴5/USD.
2차 (전판승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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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5
₴10
₴20
2차 (신규)
앞면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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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16]
우크라이나 중앙의회당[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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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타라스 셰우첸코[18]
키예프 성 소피아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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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라리사 페트리우나 코사치크비트카[19]
루치크 성[20]

4. 3차 (현행권)


2003년 12월 1일 ₴20를 선두로 차츰 교체되어, 2006년에 현행권 전 종류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아시아 금융위기를 뒤이어 찾아온 대침체의 공격에 또다시 굴복, 정부가 나서서 물가상승률을 '''35%'''[21]로 잡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막장이 되어버렸다. 2009년 8월에는 2012년 현재 환율에 근접한 평균 ₴8/USD의 벽이 허물어졌다.
2014년 크림 위기로 인해 그렇찮아도 불안정하던 흐리브냐가 크게 붕괴되기 시작,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면서 ₴11/USD라인도 무너졌다. 러시아의 압박이 심하게 가해진 8월에는 ₴13까지도 돌파당했다. 그나마도 ₴14 라인을 용케 저지한 결과. 하지만 이후 전망은 여전히 어둡기만 하다. 러시아 루블 못지않게 가치하락이 심해서 이제는 2020년 10월 기준 달러당 28~29 UAH 정도한다
현행 (전판승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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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
₴10
₴20
₴50
현행 (신규)
앞면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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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판과 동일
키예프 볼로디미르 요새벽[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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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2011)
타라스 셰우첸코
(젊은 시절)
체르네차 언덕[23]의 코브자르[24]와 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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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2015)
타라스 셰우첸코(재탕)
키예프 타라스 셰우첸코 국립대[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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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라리사 페트리우나 코사치크비트카
(2차와 동일)
루치크 성[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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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
흐리호리 스코보로다[27]
키예프 모힐라 학원 국립대학교[28]
  • 동전은 1, 2, 5, 10, 25, 50코피이카 및 ₴1까지 해서 7종류이다. 다만 현지 거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터키 리라처럼 50코피이카가 주로 사용되며, 10코피이카 및 25코피이카가 보조통화로 활발히 쓰이지만 5코피이카 밑으로는 일단 쓰이긴 쓰여도 너무 가치가 낮아 땅에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는 이가 없을 정도의 취급이다(...). 심지어 1, 2코피이카는 모아다가 5나 10단위로 맞추지 않는 한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결국 우크라이나 국립은행에서 10, 50코피이카 빼고 모두 퇴출시키겠다고 선언했다.

5. 4차 (2018년 이후 개정사항)


현행 (신규)
앞면
뒷면
(지폐 도안)
₴1,000
볼로디미르 베르나드스키[29]
우크라이나 국립 한림원
  • 2018년 7월 1일부터 1, 2, 5, 25 코피이카는 발행이 중지되었고 2019년 10월 1일부터는 환수된다[30]. 25 코피이카는 본래 2022년 10월 1일부터 환수할 예정이었으나 2년 앞당겼다.
    • 본 환수조치에 따라 실물 유통 분야에서는 반올림제가 시행된다(실물 유통 분야에서는 진작부터 시행되고 있던 것이나, 중앙은행은 본 환수조치에 덧붙여 이를 명문화하였다). 신용카드 결제나 온라인 거래 등 현금을 직접 사용하지 않는 분야는 해당 없다. 러시아 루블화와 다르게 보조단위가 완전히 죽지 않아서 이 화폐의 가장 낮은 단위는 4원인 셈이다.
  • 2019년 10월 25일부터 새 고액권(₴1,000)이 유통된다.
  • 2018년 4월 27일부터 새 디자인의 작은 니켈화 ₴1 동전이 나왔고 500원짜리 보다도큰 황동화 옛 동전은 2020년 9월 1일부로 환수 예고되었지만 이미 가지고 있는건 사용할수 있다, 덤으로 ₴2 동전도 같은 날 나왔다. 2019년 12월 20일부로 ₴5, 2020년 7월 3일부로 ₴10도 동전으로 교체 발행되기 시작했다. 기존 발행된 지폐는 함께 사용할 수 있으며, 강제로 환수하지는 않는다, 세월이 지나면 가치가 오를수 있으니 일부는 수집용으로 놔두는것도 괜찮다고 본다. 또 지폐 도안으로 채택된 인물이 그대로 동전 도안으로 승계되었다. 추후 가치하락과 물가상승시 ₴20 지폐도 코인으로 대체되고 ₴2000 (8만원) 상당의 신권이 등장할수도 있지만, ₴1000 권종조차 찬반논쟁 끝에 나온거라 아직은 시기상조이다.
₴1=대락 40원 이라고하면 2020년부터 실제 사용하는 동전은 10k, 50k, ₴1/2/5/10, 지폐는 ₴20/50/100/200/500/1000 이다. 그리고 ₴2 이상의 동전은 기념주화로도 나오는데 이 나라의 경제력이 아직 미약해서 그런지 수집용 한정발매 치고는 500원도 안되는 낮은 액면가에 순은으로 만든것도 아니라 현지에서도 최근에 나온건 개당 4~5천원을 넘지 못하는거 같다, 모두 도안이 다른데다 저렴해서 수집러들 한테는 인기만점이다. 2020년 11월 기준 1달러당 ₴28~29, 1유로당 ₴33~33.50 선에서 왔다갔다 하는중.
[1] 2007년 12.8%, 2008년 22%에 비하면 낫긴 하다.[2] 키릴 문자 Г의 필기체는 S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생겼다.[3] 목덜미에서 등까지 길게 나 있는 털. 사람으로 치면 머리털같은 것.[4] Володимир Великий. 키예프 공국의 대공으로, 루스족 통일 국가를 건설하고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교회를 수용하여 루스족에게 그리스도교를 퍼트렸다.[5] Χερσόνησος, 흑해 북쪽 연안 크림 반도에 자리한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6] Ярослав Володимирович. 볼로디미르 대공의 아들로 키예프 공국을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으로 크게 성장시켰다. 야로슬라우의 문장이 현재 우크라이나의 국장이 되었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7] 1034년 야로슬라우 1세가 건설한 정교회 대성당으로 199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8] Богдан Зиновій Михайлович Хмельницький. 17세기 카자크 헤트만국의 헤트만으로 카자크의 종주국이던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해 이른바 대홍수라는 대규모 봉기를 일으킨 인물. 자치권을 얻으면서 사실상 카자크의 독립국을 세웠으나 종주권을 재확립하려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공격해 오고 몰다비아와 크림 칸국 또한 카자크의 영토를 노리는 등 상황이 안 좋아지자 신종하는 것을 조건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였고 이를 빌미로 러시아는 타타르의 멍에 이후 처음으로 우크라이나에 영향력을 뻗치게 된다. 소련 시절까지는 우크라이나를 형제 러시아와 하나로 합치게 만든 위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가 반러시아로 돌아선 현재 안 좋은 의미로 재평가 되는 인물.[9] 수보티우는 흐멜니츠키의 출생지이며 일린스카 교회는 1653년 흐멜니츠키의 명으로 세워진 교회로 흐멜니츠키가 묻힌 곳이기도 하다.[10] Іван Мазепа. 18세기 카자크 헤트만국의 헤트만. 카자크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지배권을 확립하려는 러시아에 맞서 대북방전쟁 당시 스웨덴 편에 가담하여 러시아와 전쟁을 하였으나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이 대패하는 바람에 스웨덴 왕 칼 12세와 함께 오스만 제국으로 피난했고 결국 거기서 죽었다.[11] Києво-Печерська лавра, 11세기 경 비잔티움 제국으로 수도를 떠났던 성인 안토니 페체르스키가 키예프 베레스토프 산에 수도원을 세운 것이 시초로 199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12] Іван Франко. 우크라이나의 작가. 작품을 통해 사회주의 이념을 드러냈기 때문에 소련 당국에서 높게 평가한 작가 중 하나로 1962년 우크라이나의 도시 스타니슬라비우(Станісла́вів)가 그의 이름은 딴 이바노프란키우시크(Іва́но-Франкі́вськ)로 도시명이 바뀌었다.[13] Львівський Державний академічний театр опери та балету імені Соломії Крушельницької, 1895년 건설된 우크라이나 3대 오페라 극장 중 하나로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14] 최고액권인 ₴100가 당시 환율로 약 6만원 가량이었다. 당시 한국물가로 6만원은 정육점에서 '''삼겹살 6kg'''정도는 사먹을 수 있었던 양이고, '''라면 4~5박스(약 120개)'''는 거뜬히 살 수 있었다.[15]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충공깽으로 몰아놓은 그것 맞다.[16] Михайло Сергійович Грушевський. 우크라이나의 역사가, 정치인. 사회주의자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의회 의장을 맡은 적이 있다.[17] Центральна Рада. 1912년 교육학 박물관으로 건립된 곳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의회의 의사당으로 기능한 곳이다.[18] Тарас Григорович Шевченко. 우크라이나의 시인, 작가. 셰우첸코의 문학적 유산은 우크라이나 문학의 토대를 이룬 것으로 평가되며 현대 우크라이나어의 문법에도 큰 영향을 끼쳤더.[19] Лариса Петрівна Косач-Квітка. 우크라이나의 시인, 작가. 레샤 우크라인카(Леся Українка)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져있다. 타라스 셰우첸코, 이반 프란코와 함께 우크라이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우크라이나어로 번역하는 등 사회주의 활동을 활발히 하였기에 소련 내에서도 고평가 받았다.[20] 14세기 중반 통일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의 마지막 왕인 류바르트(Любарт-Дмитро)가 세운 성. 루치크의 랜드마크이다.[21] 이게 얼마나 심각한거냐면, 2012년 현재 모두가 "날이 갈수록 먹고살기 힘들다"를 외치는 한국의 물가상승률은 아직 '''한 자리수'''대이다.[22] 블라디미르 1세가 키예프 시가지를 따라 세운 성벽. 몽골의 침입 당시에 파괴되었다.[23] Чернеча гора. 성자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체르카시 주 카니우 근처, 드니페르 강변에 자리잡은 언덕으로 타라스 셰우첸코가 묻힌 곳이다.[24] 우크라이나의 전통음악인 코즈바를 연주하는 우크라이나의 음유시인[25] 1834년 설립된 우크라이나의 최고 대학. 설립 당시 이름은 키예프 성 볼로디미르 황립 대학교였으나 1939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26] 전판(2차)과 동일하나 옆에 가 한마리 추가되었다.[27] Григорій Савич Сковорода. 18세기 우크라이나의 철학자이자 작곡가.[28] 1615년 정교회 수도회인 키예프 형제회가 세운 신학교인 모힐라 신학원이 시초로 1918년 소련 당국에 의해 폐쇄되었다가 1991년 다시 재개교했다.[29] Володи́мир Іва́нович Верна́дський. 19세기 우크라이나의 역사학자, 철학자.[30] 기 발행된 주화는 사용 가능하나, 은행으로 들어가면 더이상 나오지 못하고 중앙은행으로 회수 조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