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리라

 

  • ← 유니코드 6.2에 추가된 글자이다.
Türk Lirası (튀르크 리라스) - 대개는 그냥 "리라"혹은 "텔레(TL)"라고 한다.


1. 개요
1.1. 환전
1.2. 환율
1.3. 물가
1.4. 새로운 기호
2. 오스만 리라
2.1. 은화
2.2. 금화
3. 공화국 터키 리라
3.1. 1차 (1기)
3.2. 2차 (1기)
3.3. 3차 (1기)
3.4. 4차 (1기)
3.5. 5차 (1기)
3.6. 6차 (1기)
3.7. 7차 (1기) - 전반부
3.8. 7차 (1기) - 후반부
3.9. 8차 (2기)
3.10. 9차 (2기)
3.11. 공화국 금 리라
4. 사용 설명
4.1. 지폐
4.2. 동전
5. 유로화 전환 관련


1. 개요


[image]터키의 통화. ISO 4217코드는 TRY [1], 약칭은 TL이다. 보조단위로 쿠루쉬(약칭 Kr)가 있다.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수사 뒤에는 복수형을 사용하지 않는 터키어 문법상 리라와 쿠루쉬 둘 다 복수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터키 국민들의 극진한 아타튀르크 사랑으로 인해 이 나라 돈은 모두 아타튀르크를 주 도안으로 삼고 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의 건국 초기부터 시작된 유구한 전통(?)이다. 일부나마 오스만 제국쉴레이만 1세 같은 위대한 군주도 지폐인물로 선정하는 게 어떠냐고 주장하지만 글쎄... 받아질지는 미지수. 아타튀르크 자체가 1922년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렸던 인물이기에.

1.1. 환전


대한민국에서는 KEB하나은행에서 터키 리라를 취급했었으나 2019년 6월 10일 부로 중단 되었다. 과거에는 을지로2가 본점, 지역 일부 지점, 공항점 정도만 받아주고, 수수료가 정말로 장난이 아니며[2], 순수한 매입량에 의지하는지라 구매도 어려워 매우 불편한 편이었다. 과거에는 대개 한국씨티은행에서 국제현금카드를 만들고 현지에 가서 뽑아다 썼지만, '''2013년 7월 이후 터키 씨티은행이 터키 국내은행인 데니즈반크(Denizbank)로 인수합병되는 바람에 더이상 이 방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데니즈반크에서는 과거 터키 씨티은행 계좌를 가진 고객에게 데니즈반크 ATM을 이용해도 수수료를 물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지만, 외국 씨티은행 계좌에 대해서는 얄짤 없다. 다만 외국 씨티은행 현금카드로 데니즈반크 ATM을 이용할 경우 현지 ATM수수료 5리라가 면제된다. 영수증을 발급해보면, "Bu işlem için bankanız sizden ücret tahsil etmemiştir." (이 작업을 위해 당신의 은행이 당신으로부터 수수료를 물지 않았습니다.)라고 붙어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은행들은 얄짤없이 국제수수료+타은행 ATM수수료 모두 떼간다.
유로화나 달러화로 중개환전하기도 하는데, 이때는 은행이나 호텔보다 사설 환전소에서 환전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다. 우선 수수료를 물지 않고, 유로, 달러화에서 터키 리라로 환전할 경우 환율도 꽤 높게 쳐주는 편이다. '''다만 관광지가 아닌 지역 한정이다.''' 이스탄불 관광지에 있는 사설환전소에서는 굉장히 환율을 짜게 쳐주고, 환전소마다 매기는 가격이 다 다르기 때문에 몇 번 발품을 팔 필요가 있다. 똑같은 100달러를 환전해도, 관광지에서는 190리라 받을것을 200리라 넘게 받을 수도 있다. 이스탄불의 경우 악사라이(Aksaray)와 랄렐리(Laleli - 이스탄불 대학교 근처) 사이에 괜찮은 환전소들이 많이 있다. 터키어로 환전소는 되비즈(Döviz)라고 하며 당일환율은 http://www.doviz.com/ 에서 확인하거나, 신문을 보면 된다.

1.2. 환율


2021년 1월 현재 환율은 대략 150원/₺ 정도인데 2008년에는 900원/₺ 가까이 올라갔던 가치가 이후 꾸준히 떨어지고 있다. 2013 터키 시위 이후 적발된 대규모 금융 비리에 에르도안 총리까지 연루되었다는 설이 돌고 1월 28일자로 금리 인상을 시도해 어떻게든 환율방어를 하려 했지만, 1월 30일 이틀 만에 약빨이 다 하고(...) 다시 신나게 폭락하고 있다. 달러 환율은 1월 29일 유럽증시 마감기준으로 달러당 2.30리라 선을 돌파했다.
2018년 7월에만 해도 1달러당 4.70리라 선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었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이 미국인 목사를 간첩 혐의로 체포 및 구금하면서 8월에 미국으로부터 '''제재'''(!)를 얻어맞았다. 8월 1일에 5를 찍더니 8월 10일(금) 기준으로 175원/₺, 6.87₺/달러가 되기도 했다. 2018년 들어 40% 폭락한 것.# 주말을 지난 8월 13일(월)에는 오전 중 한때 7.24₺/달러를 기록했으며, 이날 대한민국에서는 난데없이 터키 버버리 직구가 핫 키워드로 떠올랐다.[3]# 14일 이후로는 17일 오전 8시~10시 (UTC기준)의 급등을 제외하면 회복세를 보여 6.01₺/달러로 8월 셋째 주를 마감했다.
현재로서는 1리라에 약 150~200원 사이의 돈만 내면 살 수 있는 아주 싼 화폐가 되어버렸다.
현재 2020년 10월 18일 기준, 1리라는 140원 수준으로 폭락에 폭락을 거듭하고있다.
11월 10일까지 리라는 폭락을 거듭하여 1리라에 130원, 달러당 8.5리라까지 떨어졌었으나 재무 장관[4]과 중앙은행원장이 교체되자 어느정도 반등에 성공하여 2021년 2월 20일 현재 달러당 6,98리라까지 회복하였다. 여전히 코로나와 여타 경제문제들 때문에 폭락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꾸준히 환율을 회복해가는 중이다.

1.3. 물가


주변 나라들에 견주면 숙박비나 연료비 같은 물가가 비싼 편이다. 그래도 유럽 다른 나라들에 견주면 꽤 물가가 싸기에 유럽에서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편이지만, 바로 이웃 시리아이란, 불가리아, 루마니아, 조지아, 아르메니아 같은 나라 물가보단 비싼 편. 무엇보다 이란이나 이라크 등 석유대국들이 있는데도 이들 나라에서 석유를 직접 수입하기보다는 미국을 중재하여 아랍 석유를 사오기에 연료비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 리터당 5리라(2018년 1월 환율 기준으로 약 1050원)를 넘어선 게 벌써 2013년 7월 일이다. 나부코 송유관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지역 자원 개발 및 운송 합의가 이뤄지면 꽤 혜택을 볼 듯 싶다는 떡밥은 2003년부터 쭉 이어져왔지만 해당 지역의 정세불안과 무엇보다도 PKK의 준동으로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인플레이션은 11.14%(소비자물가), 7.65%(생산자물가) 수준으로 많이 가파른 편이다. 어느 신문 기사에서 하기아 소피아를 소개했을 때 터키 리라의 인플레가 심해서 아예 터키에 갈 때 미국 달러를 갖고 가라고 말했을 정도. 특히 소비자 물가가 생산자보다 대략 1.5배 큰 수치를 기록하고 있지만 터키에서 노동자 임금도 소비자물가 추세만큼이나 상승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큰 불편은 없다. 과거 터키가 전설적인 인플레이션을 기록할때에도 돈을 은행에 넣어둔 사람들은 손해를 봤지만, 보통 터키인들은 은행을 잘 이용하지 않고, 사용하더라도 매달 15일, 즉 월급날에 계좌에 들어온 모든 돈을 다 뽑아 가기 때문에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다. 그저 0자가 많아서 계산하기 힘든 정도.[5] 하지만 여행자들에게는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터키(중에서도 대도시, 관광지 위주)에선 달러와 유로사용이 어렵지 않은데, 다 여행자들 때문이기도 하고 기나긴 인플레 사정이기도 하다.
한때 버스 요금으로 100만 리라(터키 화폐, 2005년 화폐개혁 당시 1달러가 약 135만 리라였다)를 내는 등의 엽기적인 인플레이션을 자랑하는 등 범상치 않은 기록이 있다. 먼저, 인플레이션 시절 터키에서는 동전이 거의 통용되지 않았다. 무겁기만 하고 가치도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동전이 너무 자주 바뀌었기 때문에 자판기에는 아예 동전이 들어가지 않았고,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에도 이를테면 담배 한 갑을 살 때도 잔돈으로 풍선껌이나 라이터 같은 걸 주었다. 모든 돈의 활용범주가 1,000,000리라에서 끊어졌는데, 때문에 신문이나 쇼핑 카탈로그에서 가격을 표시할 때는 끝의 세자리를 지워 표기하는게 보통이었다. 만약에 3억 리라짜리 월세방이 있다고 하면, 가격을 300.000TL[6] 이라고 표기하는 식. 나중에는 이것도 귀찮아졌는지 끝의 여섯 자리를 떼어버린다. 이러한 관습이 반영된 게 2005년의 화폐개혁이다. 당대에는 신문사설에서도 '''우리 터키인은 거지부터 부자까지 모두 억만장자'''식으로 비꼴 정도로 억 단위를 사용할 일이 많았는데, 버스비만 해도 편도 200만 리라, 터키에서 제일 싼 삼순담배 한갑이 370만 리라, 책 한권에 2700만 리라 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물가시대에 적응해갔는데, 앞서 말한바와 같이 은행에다 돈을 꿍쳐놓으면 오히려 그 가치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저금을 하더라도 달러나 유로로 예금하는 외국환계좌가 대세였으며 필요한 돈은 은행에서 다 뽑아서 현찰로 들고 다녔다. 관광지에서 외국인한테 굳이 달러나 유로로 돈받으려 하는 것도 그 시대에 비롯된 산물이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입장료를 아예 미국 달러로만 받았던 것도 이 때문. 그러한 영향 때문에 터키의 민간 금 보유량은 많은 편이다.[7]
다음으로 외국인들을 이유로 치면, 평소 팁을 주는 습관이 터키에 번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아직까지도 고급 레스토랑이나 4성 이상급 호텔이 아닌 이상 팁을 줄 필요는 없으며, 특히 배낭여행자들이 자주 가는 저렴한 상점이나 숙소에선 굳이 팁 같은 거 줄 필요 없는데도 팁을 주는 사례가 있어, 되려 그게 버릇돼버려 여행객을 호구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정말 감사의 뜻으로 팁을 주겠다면 지폐로 주자. 바로 앞 문단에 언급한 이유 때문에 지폐를 훨씬 선호한다. (때문에 유로화보다 달러화가 더 유용한 편이다. 심지어 5리라짜리 지폐보다도 1달러가 더 싸니까.) 몰론 1리라 동전을 두고가도 상관없긴 하지만. 그런데 외환을 주역으로 사용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현지화인 리라보다 확연히 비싼값을 매기므로[8] 가급적이면 리라로 지불할 것을 권장한다. 더구나 이스탄불이나 앙카라 및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면 되려 환전하기 혹은 거래하기가 힘들어질 수도 있다.

1.4. 새로운 기호


[image]
예비 후보들. 가장 위에 있는 것이 정식 발탁된 기호다.
기호는 レ에 두개 줄 그어놓은 형태(대략 히라가나의 も처럼 생겼다.)가 2012년 3월에 새로 제정되었다. 그 이전에는 단순히 약칭인 TL라[9] 지정했었고, 2012년 중반 기준으로 온전한 정착이 확인되었다. 이 문자는 유니코드 6.2(2012년 9월)에 추가되었다(U+20BA).[10]

2. 오스만 리라


  • 이 단락은 터키 리라의 전신인 오스만 리라에 관한 내용입니다.
터키에서 최초의 리라화는 1843년 1월 5일에 오스만 제국술탄 압듈메지트에 의해 도입되었다.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화폐제도는 3악체(akçe)를 1파라(para), 40파라를 1쿠루쉬(kuruş)로 하는 은본위제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영국의 화폐제도를 본받아 금본위제를 도입한 것.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옛 화폐를 보면 Osmanlı Lirası (오스만 리라)라고 쓰여있는 표기 옆에 프랑스어 Livre Turque 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리라 도입으로 보조화폐로 전락한 쿠루쉬도 대외적으로는 피아스트르(piastre)라고 불리고 있었으며 리라화 도입 이후에도 유럽권에서는 리브르, 피아스트르라고 불렀다.
리라화 도입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에서는 쿠루쉬를 표준 단위로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게 워낙 소액이라(...)[11] 금화가 널리 쓰였지만 금화가 뒤죽박죽에다 변동환율이라 매우 혼란스러웠다.[12] 리라 도입 이전 오스만 제국에서 통용되던 금화 종류는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는데, 우선 소액금화로 제리 마흐붑(Zer-i mahbub)이란 금화가 있었으며 시대에 따라 환율이 미묘하게 다르지만 대체로 140~160파라(3.5~4 쿠루쉬)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하이리예(Hayriye)라는 이름의 24 쿠루쉬 가치의 금화가 있었으며, 루미 알튼(Rumi Altın)이라는 30 쿠루쉬 가치의 금화가 있었으며, 프랑스, 영국 등에서 발행한 금화도 유통되었다. 이 금화들은 변동환율제로 도시마다, 지방마다 환율이 다 달랐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서는 쿠루쉬화에 패그시킨 금화를 도입하기 시작하는데 이렇게 해서 도입된 것이 마흐무트 2세 시기의 제디드 마흐무디예(Cedid Mahmudiye = 20 쿠루쉬), 제디드 아들리(Cedid Adli = 18 쿠루쉬) 종이었다. 이렇게 되자 기존의 변동환율제 금화와 고정환율제 금화가 섞여서 오스만 제국의 화폐단위는 더더욱 혼란스럽게 되었지만, 이 제디드 마흐무디예와 제디드 아들리 금화는 오스만 제국의 금본위제를 준비하는 과정으로서 유통되었으며, 마지막으로 리라화를 도입하면서 금본위제가 완성되었다.
참고로 리라화 도입 이전에 오스만 제국에서 쓰였던 화폐단위들은 다음과 같다.
현대 터키 리라의 전신인 오스만 리라는 터키 통화역사에서 큰 족적을 하나 더 남겼는데, 그동안 각 지방마다 따로 발행되어 따로 놀던 화폐체계를 정리해버린 것이다. 앞선 문단에도 약간 서술되어 있지만, 이 리라화가 발행되기 전의 오스만 제국 화폐제계는 지금의 영국과 유사했다. 각 속주, 지방마다 화폐를 따로 발행했는데 이를테면 쿠루쉬 은화는 코스탄티니예, 에디르네, 부르사, 마나스트르(지금의 마케도니아 비톨라), 카이로, 다마스쿠스, 베오그라드에서 발행되었는데, 분명히 똑같은 쿠루쉬이고 똑같이 파디샤의 투으라가 들어간 문양이었지만 서로 호환되지 않았다. 카이로에서 베오그라드 발행 쿠루쉬를 가지고 계산을 하려는데 가게주인이 "이건 외국 돈이니 못 받는다." 라고 하거나, 이스탄불에서 카이로 발행 쿠루쉬를 들고 계산하는데 "이건 외국 돈이야, 어서 우리나라 돈 줘봐!"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어찌보면 파운드 스털링보다 더 심한게 각 지방마다 지방 내에서만 통용되는 주화들이 따로 발행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오스만 제국 시기의 디르함 은화는 철저히 아랍권에서만 통용되었으며, 이스탄불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아서 환전을 해야했다. 하지만 오스만 리라화는 제국 어딜가든 통용된 최초의 통화이자, 1리라 = 100쿠루쉬로 유럽국가 중에서도 상당히 빠른 10진법 체계를 도입한 통화이기도 하다.

2.1. 은화


  • 악체(Akçe): 오스만 제국의 은화 중 가장 작은 금액이자 가장 오랫동안 기준통화였던 통화. 어원은 터키어로 '밝다'라는 의미의 ak에 지소접미사 çe가 결합된 것이다. 1327년부터 무게 1.154 그램의 순은으로 만들기 시작했다가 점점 은의 함량을 줄여가더니(...) 최후에는 순도 40%대까지 폭락하고 무게도 1g이 채 안 됐으며(...) 이미 17세기 말에 이르면 잔돈으로도 쓸 수 없을 만큼 가치가 없어져버렸다. 하지만 악체 자체는 19세기 초까지도 한국의 1원짜리 동전 발행하듯 계속 발행되기는 했다(...) 시대에 따라 종류가 다양한데, 그 중에서 유명한건 1470년 메흐메트 2세때 발행한 악체이 뷔쥐르그(Akçe-i Büzürg) 혹은 귀뮈쉬이 술타느이예(Gümüş-i Sultanıyye)라고 불린 10악체짜리 은화이다. 보조화폐로 만그르(Mangır)라는 1/4 악체짜리 구리동전이 있긴 하지만 13-15세기 때까지만 통용되었다.
  • 파라(Para): 3악체 = 1파라, 초기에는 악체보다 큰 단위를 결제할때 많이 쓰였으며 오스만 제국 후기에도 잔돈 등으로 많이 쓰였던 통화이다. 대부분의 경우 2.5악체와 동일한 무게의 은으로 주조했지만 후기에는 파라도 가치가 없어져 5파라, 10파라, 15파라, 20파라, 40파라, 60파라, 100파라 등의 은화가 주조되기도 했으며, 그나마도 5,10파라는 1890년대 후반~1900년대 초반 들어서는 아예 구리하고과 순도 10%(...) 은도금으로 주조하더니 1910년 들어서는 5,10,20,40파라 모두 그냥 니켈로 발행했다. 여담이지만 현대 터키어을 뜻하는 'para'의 어원이다. 관용어도 많은데, "beş para etmez" (5파라의 가치도 안된다 = 반푼어치도 안된다)[13] 같은 표현들이다. 참고로 리라화 개혁이후 화폐의 최소단위가 5파라였기 때문에 이런 말이 생겼다.
  • 샤히(Şahi): (초기에는 6.5악체=1샤히, 후기에는 8악체=1샤히), 원래 페르시아의 통화이지만 페르시아와 이웃한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터키 동부, 시리아 등에서도 발행을 했던 화폐이다. 후기에는 이스탄불에서도 8악체=1샤히의 비율로 통용되었지만, 16세기에만 잠깐 쓰였다.
  • 디리헴(Dirhem): 아랍-이슬람제국의 화폐 단위인 디르함과 어원이 같은 말로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무게단위로 쓰였지만 여전히 아랍지방에서는 디리헴을 기반으로 한 지방화폐가 통용되었다. 이스탄불을 비롯한 일부 오스만 제국 내 지역에서도 통용되었지만 오스만 제국 전국에서 유통되지는 못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세금을 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는데, 리라화 개혁 이전까지 전통적으로 은본위제 경제구조를 가진 오스만 제국에서 세금을 책정하기 위해 순은의 무게를 디리헴으로 달아 납부하게 하였다. 예를 들어 비무슬림에게 부과되는 소득세인 지즈야의 경우, 빈민층을 기준으로 자유인 성인 남성이 일인당 납부해야 할 세금은 은 1디리헴(약 40g)이었는데, 이를 시중의 화폐로 환산하는 식이다. 1690년대를 기준으로 1쿠루쉬 은화의 무게는 대략 18.4~19.9그램에 은 비중이 50%였으므로, 순은의 무게를 환산하면 9.2~9.95그램이 된다. 즉 1디리헴을 내기 위해서는 대략 4쿠루쉬(=160파라)에 해당하는 금액을 납부해야 하는 식이다. 물론 실제로는 이렇게 복잡하게 계산하지는 않았고, 단순 환산해서 은 1디리헴은 은화 몇 파라 식으로 기준이 있었다.
  • 졸타(Zolta) 혹은 졸로타(Zolota): 30파라 = 1졸타, 오스만 제국내에서 통용되던 독일 탈러화 및 마찬가지로 탈러에 패그되어있던 폴란드즈워티화와 패그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위로 18-19세기 초까지 널리 쓰였다. 애초에 Zolta 혹은 Zolota라는 이름 자체가 '즈워티'에서 왔다. 1졸타는 1.5탈러와 동일한 가치를 가졌으며, 1/2 졸타(1/2 Zolta), 1졸타(1 Zolta), 2졸타(2 Zolta)권이 있었다. 압뒬하미트 1세 때까지 발행되었으며 이후 쿠루쉬화에 통합된다.
  • 쿠루쉬(Kuruş): 40파라 = 1쿠루쉬, 1687년에 최초로 도입된 화폐로 기존의 기준통화였던 악체를 대신하기 위해 발행되었다. 쿠루쉬라는 말은 독일의 그로셴(Groschen) 은화에서 비롯되었으며 졸로타와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그로셴 은화에 패그되어 발행되었다. 공화국시대인 오늘날까지도 살아남아있는 단위이기도 하다. 역시 후기에는 다양한 쿠루쉬화가 사용되었는데 리라화 이전에는 1/4쿠루쉬, 1/2쿠루쉬, 1쿠루쉬, 2쿠루쉬, 2 1/2쿠루쉬가 있었으며 리라화 도입 후에는 1, 2, 5, 10, 20쿠루쉬로 정착하게 된다.
  • 지하디예(Cihadiye): 5쿠루쉬 = 1지하디예,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찍어낸 통화이다. 은 함량이 매우 높고(95%) 신뢰도가 높은 통화였지만, 마흐무트 2세 통치기에만 잠깐 쓰였다.

2.2. 금화


리라화 도입 이전에도 금화는 굉장히 자주 쓰였지만 은본위제 특성상 금화에 대한 은화의 교환비율은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환전상에 따라 항상 변동했다(...) 일반적인 환율을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 픈득 알튼(Fındık altını): 튤립 시대의 술탄인 아흐메트 3세때 발행된 금화로 23k의 금 3.4575그램으로 만든 통화이다. 18세기에 널리 쓰인 통화로 무게에 따라 1/2, 1, 1 1/2, 2 픈득 알튼이 있었으며 모두 변동환율로 운용되었다. 평균적으로 1픈득 알튼은 3-5쿠루쉬 정도로 통용되었지만 후기에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은화 위에 금을 씌우는 짝퉁 금화가 정식으로 발행되기도 했다(...)
  • 제리 마흐붑(Zer-i Mahbub): 3.5쿠루쉬 = 1제리 마흐붑, 이 통화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에서는 베네치아의 두카트, 피렌체의 플로린, 영국의 소버린, 프랑스의 리브르 등등 외국의 금화들을 자국의 은화들과 병행해서 사용했다. 하지만 외국 상인들이 저질의 금화를 가져와 오스만 제국에 유통시키는 등 자꾸만 물가혼란이 발생하자 오스만 제국에서 직접 발행한 금화로 1787년경 3.5쿠루쉬로 비율을 고정시켜놓고 유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세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변동환율로 돌아섰으며 지방에서는 꽤 오랫동안 (20세기 초까지!) 통용되었던 화폐다.
  • 아들리 알튼(Adli Altın): 12쿠루쉬 = 1아들리 알튼, 마흐무트 2세 때 이스탄불에서 발행한 22k 금화로 얼마 가지 않아 20k로 금의 비중을 줄인(...) 제디드 아들리 알튼(Cedid Adli Altın)이 발행되었다. 아들리 알튼이란 '법적금화'라는 뜻으로 마흐무트 2세가 서구식 금본위제 개혁을 준비하기 위해 발행한 통화라 최초의 고정환율 금화라는 점에서 의의가 큰 화폐이다. 하지만 아래에 언급할 하이리예 알튼과 마찬가지로 시대에 따라 그 고정환율의 기준이 달라졌다(...) 1823년에 1 아들리 알튼은 12쿠루쉬의 가치를 지녔지만 1833년에는 16.5쿠루쉬로, 1제디드 아들리 알튼은 15쿠루쉬로 가치가 절상되었다. 여기서 금화에 들어있는 금의 함량도 환율에 반영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2, 1, 2 아들리 알튼이 있었다.
  • 하이리예 알튼(Hayriye Altın): 20쿠루쉬 = 1하이리예 알튼, 마흐무트 2세때 에디르네에서 발행된 금화로 대략 20쿠루쉬의 가치로 유통되었던 통화이다. 1/2, 1, 2 하이리예권이 있었다.
  • 루미 알튼(Rumî Altın): 로마인의 금이라는 뜻의 화폐로 마흐무트 2세 때 유통된 금화들 중에서 가장 가치가 높았으며, 주로 유럽과의 무역대금으로 통용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마찬가지로 변동환율이었으며 1833년경 1루미알튼은 48쿠루쉬의 가치로 유통되었다.
  • 마흐무디예 알튼(Mahmudiye Altın): 마흐무트의 금이라는 뜻이지만 마흐무트 2세 때는 아니고, 그 다음 황제인 압뒬메지트 시기에 유통되기 시작해 리라화 도입시기까지 아주 잠깐 (6년간)쓰였다. 20쿠루쉬=1마흐무디예 알튼으로 고정환율이었다. 사실상 금본위제도 도입에 앞선 실험적으로 통용된 임시화폐에 가깝다.
  • 메지디예(Mecidiye): 20쿠루쉬 = 1메지디예, 술탄 압뒬메지트 시기에 리라화 도입 직전에 발행된 금화로 리라화 도입 이후에도 20쿠루쉬=1메지디예로 환율이 완전히 고정되어 터키 공화국 초창기까지 유통된 비교적 장수한 화폐이다. 한편 리라화 도입 이후에는 1/4리라(=25쿠루쉬)금화가 발행되었기 때문에 메지디예는 새로 발행된 20쿠루쉬 은화의 별칭으로 바뀌어 기존의 메지디예 금화와 함께 통용되었다. 참고로 금화 메지디예는 불과 1년 쓰이고 리라화로 대체되어 은화로 발행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찾아보기 힘들며, 압뒬메지트 시대에도 메지디예는 금화와 은화가 병행하고 있었다.
새로 만들어진 1리라짜리 금화는 100 쿠루쉬 (약 9.5g의 금 혹은 99.6g의 은)의 가치를 지녔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물가가 상승하고, 결정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금화로 발행된 이전의 리라화와 지폐로 발행된 리라화의 가치가 9배나 차이나는 등의 혼란를 보이다가[14], 결국 1925년에 터키 공화국정부가 들어서면서 터키 공화국이 최초로 발행한 화폐이자 터키 역사상 아랍 문자로 쓰여진 마지막 화폐인 공화국 리라화를 발행하면서 이러한 혼란을 추리게 된다.
오스만 제국 시기 리라화는 오로지 금화로만 존재하다가 19세기 후반에 캬이메(Kâime)라는 이름의 100쿠루쉬짜리 지폐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도입되었다. 이 캬이메는 정부산하 조폐소인 다르프하네(Darphane)에서 발행한 것이 아닌 오스만 은행 같은 당시 외국계 은행에서 사설발행한 것으로 처음에는 일종의 어음이나 신용장의 용도로만 쓰였던 것이 계속되는 전쟁으로 물가가 상승하자 일반에 통용되기 시작했다.
[image]
최초의 카이메인 압뒬메지트 황제 시기에 발행된 100쿠루쉬권의 모습. 지폐 앞면에는 액면과 함께,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져있다.
Evrak-ı nakdiye-yi (본 재산 증서는)
Devlet-i âliye'den (위대한 국가(오스만 제국)에서 발행했으며)
Yalnız yüz kuruşluk (100 쿠루쉬의)
Kâime-i muteberedir. (금액의 가치를 대신하는 문서이다.)
[image]
루미역법 1331년(1915년) 11월[15] 22일에 발행된 5쿠루쉬짜리 지폐의 모습. 맨위에는 당시 파디샤인 메흐메트 5세 레샤트의 서명이 있고 왼쪽에는 프랑스어로 액면가가 표시되어있다.[16]
[image]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술탄인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 제위 1년에(1918년) 발행된 5리라짜리 금화의 모습. 동전의 앞면에는 "항상 승리하는 술탄 압뒬마지트의 아들 메흐메트 한" 이라고 쓰여있는 투으라(Tuğra - 오스만 제국 황제들의 서명)와 화폐가 발행된 해 (해당 술탄의 즉위년도로부터 몇년 째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뒷면에는 "항상 승리하는 자, 코스탄티니예 (이스탄불의 옛 이름) 발행" 이라는 문구 밑에 즉위년도 이슬람력으로 1336년(1918년)이 쓰여져 있다. 보다시피 액면이 전혀 표시되어있지 않는데, 사진에는 없지만 다른 종류의 리라 금화들도 도안은 완전히 똑같고 크기와 무게만 다르다.

3. 공화국 터키 리라


공식적으로는 "E(Emission)+숫자"의 형태로 표현한다. 그러니 현행권의 경우는 E9시리즈. 2012년 현재, E7까지는 사실상 사용중지, E8은 제한적 사용이 가능하고, E9가 주로 쓰인다.
2차 발행판부터 시작해서 1957년까지 일부 주화가 은화로 발행되었다. 25 쿠루쉬, 50 쿠루쉬, 1 리라 주화이며, 1 리라 주화 가운데 1940, 1941년판은 도안이 아타튀르크가 아닌 이스메트 이뇌뉘이다. 또한 1960년 쿠데타 당시 기념화로 10리라 은화를 발행한 적이 있는데, 이 주화는 실제로 통용되었기 때문에 미사용급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3.1. 1차 (1기)


[image]
1926년 공화국 리라 등장 이후 파운드프랑스 프랑에 강력한 페그(고정환)를 걸었기 때문에 환율이 2.8리라/USD 정도로 일정하게 유지되어 왔다. 국어(오스만 터키어)가 아랍 문자로 쓰여진 처음이자 마지막 공화국 리라이며, 뒷면에는 프랑스어[17]가 병기된 유일한 시리즈이기도 하다. 제작에는 9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막 새로운 수도로 결정된 앙카라를 도안소재로 폭넓게 사용하였다.
1930년대 후반에 터키어 표기법을 로마자로 갈아타면서 이를 반영한 신권이 발행되어 통용이 중지되었다.
앞면
뒷면

1TL
앙카라 국회의사당를 배경삼아 소로 쟁기끄는 농부[18]
수상관저
[image]
5TL
회색늑대와 마을
앙카라 교각

10TL
앙카라 성채와 회색 늑대
앙카라 성채

50TL
무스타파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
아피욘의 성채[19]

100TL
아타튀르크
마을(소재지 불명)

500TL
아타튀르크와 괵메드레세(사히비예 메드레세시)[20]
시바스[21]

1,000TL
아타튀르크
사카리야[22]의 철길

3.2. 2차 (1기)


2~4차는 굉장히 짧은 통용역사를 지니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공급이 자주 끊기는 바람에 모든 권종이 한꺼번에 쓰인 적은 없고, 1937년에서 1944년까지 자주 등장했다 사라졌다 했다. 마지막으로 중지된 시기는 1952년 11월. 영국산이다.
앞면
뒷면

0.5TL
(50kr)
(쿠루쉬)
무스타파 이스메트 이뇌뉘
터키은행 본관

1TL
보스포루스 해협

2.5TL
아타튀르크
울루스광장(앙카라)의 승리상

5TL
군인상(앙카라)

10TL
앙카라 성채

50TL
앙카라 염소[23]

100TL
다르다넬스 해협

500TL
루멜리 히사르(요새)[24]

1,000TL
군인상(앙카라)
  • 500리라와 1,000리라는 아주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2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3.3. 3차 (1기)


모든 시리즈에 지금은 지겹게 볼 수 있는 아타튀르크가 빠지고 이뇌뉘가 들어간 첫 시리즈. 2차 시리즈와 혼용되어 사용된 긴급발행권의 성격을 지닌다. 1942년부터 1947년까지이며, 영국(초반), 독일, 미국산(후반)이 섞여있다. 종류는 2.5리라부터 1,000리라까지 1, 5단위로 올라가며 7종.

3.4. 4차 (1기)


2차 및 3차와 혼용되어 쓰인 시리즈인데 영국과 독일이 서로 싸우느라 나라꼴이 시망ㅋ해버리니 발주가 곤란해지자 미국에 발주넣어 들여온 시리즈이다. 극혼란기에만 잠깐 쓰였다. (47년 ~ 48년) 종류는 단 2가지(10, 100리라)이며, 이뇌뉘가 그려져 있다.

3.5. 5차 (1기)


1951년부터 등장해 7종류(2.5 ~ 1,000리라)가 여러번 변화를 거치며 32가지 바리에이션을 만들고는 1971년에 숨을 거둔 나름 장수한 시리즈. 전란 후폭풍에서 벗어나고 점차 외주를 줄이며 국내산(터키)으로 찍어내 예전의 영광을 되찾았다. 전성기 당시 환율은 9리라/USD정도. 이때부터 모든 돈 앞면에 아타튀르크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3.6. 6차 (1기)


[image]
1966년 처음 도입되기 시작해 1983년까지 생존한 두번째 장수 시리즈. 20리라만 영국에서 만들고 나머지는 모두 터키 국내산으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시장개방을 위해 점진적으로 환율을 변동제로 풀어주는 과정에서 무언가가 잘못되었는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게 되었다. 말기의 환율이 100리라/USD까지 치솟았었다고 한다.
앞면
뒷면

5TL
아타튀르크
마나브가트 폭포

10TL
크즈 쿨레시[25]

20TL
아늣카비르(앙카라)[26]

50TL
톱카프 궁전의 장미정원 내 분수대
[image]
100TL
아라라트 산

500TL
이스탄불 대학의 정문[27]

1,000TL
보스포루스 교각

3.7. 7차 (1기) - 전반부


[image]
1979년부터 등장한 시리즈로, 인플레 혼란기에 해당한다. E7에 해당하는 시리즈는 모두 15개 종류에 36가지 바리에이션이 존재하는 참으로 방대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최저액권과 최고액권의 격차는 무려 2,000,000배. 당연하지만 전 종류가 한꺼번에 쓰인 적은 없다.
앞면
뒷면

10TL
아타튀르크
아타튀르크에게 꽃을 전달하는 초딩

100TL
마흐메트 아키프 에르소이[28]
[image]
500TL
이즈미르 시계탑

1,000TL
파티흐 술탄 메흐메트 2세와 오스만 시절 이스탄불의 전경

5,000TL
4종류가 있다.[29]

10,000TL
미마르 시난[30]셀리미예 모스크(에디르네[31])

20,000TL
터키 중앙 은행 본관

50,000TL
터키 대 국민의회 (국회의사당, 앙카라)

3.8. 7차 (1기) - 후반부


디자인상 10만 리라(1990년 첫 발행)를 기준으로 전반과 후반을 나눈다. 최고액권인 2000만 리라는 2002년에 등장하였고, 모든 종류는 2005년 1월 1일부터 사용이 중단되었다. 개혁 직전인 2004년에는 환율이 135만 리라/USD이었다. 2016년 1월 1일부로 통화로서 효력을 잃는데, 계산하기도 귀찮고 교환하기도 귀찮은 탓에 이미 이것들은 시중에서 거의 안 받아주는 편.
워낙에 "0"이 많다보니 당시 계산할 때, 일단 0을 3개 먼저 빼놓고 계산했다고 한다.
10만 리라, 25만 리라는 동전도 발행되었다.
앞면
뒷면

100mTL
아타튀르크
아타튀르크에게 꽃을 전달하는 초딩

250mTL
크즐 쿨레(알란야)[32]

500mTL
갈리폴리 전투 기념관(차낙칼레)[33]

1,000mTL
아타튀르크 댐

5,000mTL
아타튀르크의 영묘 (아늣카비르)

10,000mTL
피리 레이스의 지도[34]

20,000mTL
에페소스의 유적지[35]

3.9. 8차 (2기)


디노미 탈출을 위해 삽질에 삽질을 거듭하다 결국 2005년에 개혁한 시리즈(Yeni Türk Lirası)로, 이때부터 ISO 4217코드가 TRY로 바뀌었다. 약간의 진통은 이어졌지만 강력한 통화정책의 덕분인지 빠르게 회복되었다. 구권과의 디노미 비율은 1(신):1,000,000(구). 20리라까지는 E7의 디자인을 이어받았고, 뒤늦게 나온 2종은 새롭게 개정된 신판이다.
참고로 이 당시에는 구권인 TL과 구분하기 위해 일부러 YTL이라고 표기하였다. 2020년 1월 1일부터 통화효력을 잃어버린다.
앞면
뒷면
[image]
1YTL
구권과 동일
[image]
5YTL
[image]
10YTL
[image]
20YTL
[image]
50YTL
아타튀르크
카파도키아
[image]
100YTL
이스학 파샤 궁전[36]
이 시기의 자판기로 돈벌기(...)는 여기 참조. 물론 지금은 E9가 등장하면서 해결된 상태. 동전의 최소단위는 1쿠루쉬이며, 구권 1만 리라에 해당했다. 이때 1만 리라 이하의 지폐는 아예 취급하지 않았었는데, 이미 사장되었었기 때문. 그리고 새 터키리라 도입당시에도 1쿠루쉬는 쓸일이 없어서 상점에서 물건을 살때 잔돈을 받을때면 5쿠루쉬 이하는 그냥 버렸다. 이것은 2012년 현재도 마찬가지이며, 한국에서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3.10. 9차 (2기)


2009년 1월 1일 부터 통용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시리즈. 이때부터 YTL의 Y가 탈락하였다. 유적지에 중점을 두던 과거와 달리, 전반적으로 유명인사를 디자인 소재로 적극 기용하는 방향.
환율은 이제 거의 안정되었는데... 터키 경제성장률이 매년 5% 이상씩을 찍으면서 초반에 언급했듯 물가상승률은 여전히 가파른 편이다. 예를들면 이스탄불의 교통토큰인 제톤(Jeton) 1개의 가격도 2004년에는 65~100만 리라(0.65~1 새 터키리라)였지만 2019년 현재는 4리라(400만 리라)로(약800원) 많이 올랐다.
2018년 8월 미국의 경제제재로 인하여 환율이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image]
[image]
[image]
아타튀르크 A타입
아타튀르크 B타입
아타튀르크 C타입
앞면
뒷면
[image]
₺5
아타튀르크 A타입
아이든 사이을르[37]와 태양계 및 Z-DNA구조 그림
[38]
[image]
₺10
자히트 아르프[39]
[image]
₺20
아타튀르크 B타입
미마르 케말렛딘(건축가)과 그가 세운 가지 대학 본관
[image]
₺50
파티마 알리예 토푸즈(작가)와 꽃과 서적들
[image]
₺100
아타튀르크 C타입
부흐리자데 무스타파 으트리(음악가)와 류트와 삽화고서
[image]
₺200
유누스 엠레(시인)와 영묘와 비둘기
동전은 1쿠루쉬가 탈락하여 5, 10, 25, 50쿠루쉬와 1리라의 5종이 되었다. 이 중에서 1리라 동전이 가장 보편적으로 이용되고 25, 50쿠루쉬가 보조단위로 주로 이용된다.[40] 10, 5쿠루쉬는 마트나 패스트푸드점과 같은 대형업체에서나 볼 수 있다. 5쿠루쉬 미만은 '''그냥 버린다.''' 마트같은 곳에선 잔돈이 부족할 경우 10쿠루쉬 단위로도 버리는걸 볼 수 있다.
9차에는 동전에도 앞면에 아타튀르크가 그려져 있는데 최소액권인 5쿠루쉬는 완전한 옆모습을 하고 있다가 위 사진처럼 액면이 커질수록 아타튀르크가 점차 앞쪽으로 돌아보는 모습으로 바뀐다. 비정상회담에네스 카야가 이를 언급했었다.[41]
실물 및 액면
지름
두께
무게
특징

1,00₺[42]
26.15mm
1.90mm
8.2g
바이메탈 (바깥쪽 황동)

0,50₺
23.85mm
1.90mm
6.80g
바이메탈 (안쪽 황동)

0,25₺
20.5mm
1.65mm
4g
가장자리에 톱니무늬가 있는 백동전

0.10₺
18,5mm
1,65mm
3,15g
톱니무늬 없는 백동전

€0.05₺
17.5mm
1.65mm
2.9g
톱니무늬 없는 백동전

€0.01₺
16.50mm
1.35mm
2.2g
작은 황동전

3.11. 공화국 금 리라


오스만 제국때 발행되던 리라 금화가 현대 터키에서도 계속 발행되고 있다. 오스만 제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25, 50, 100, 250, 500쿠루쉬 5종으로 발행되고 있다. 현재는 오스만 제국 시절의 리라 금화와 달리 주로 선물용이나 재물축적용을 위해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리라의 가치하락이 심해지면서 이 금화를 모임이나 저축용으로 비축해놓는 경우가 많다. 전통적으로 아기가 태어나거나 결혼을 하면 축의금대신 금화를 선물로 주는 풍습이 있는데, 이 리라 금화를 준다. 크게 아타튀르크가 그려진 아타 알튼과 공화국 금화 두 종류로 나뉘며 모양과 무늬가 약간 다르다. 한편 오스만 제국 시절에 발행된 리라 금화중 수집가치가 없는 것들은 아직도 공화국 금 리라와 함께 섞여서 사용이 가능하며 환전도 가능하다.

4. 사용 설명



4.1. 지폐


  • 5리라
사실상 잔돈으로 쓰이는 지폐로 2021년 현재는 싸구려 케밥도 이거 한 장으로 먹기 어려워졌다. 지방도시에서도 6리라 이상은 받는다. 쌓일 일도 없을 것이다.
  • 10리라
유로로 따지면 대략 1유로 조금 넘는다.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터키에서는 이정도도 작은 돈은 아니라 쓸 수 있는데가 많다. 특히 마트나 장터에서 이 돈 한 장으로 살 수있는게 꽤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2021년 현재 시장물가로 양파를 겨울철에는 3kg, 여름철에는 6-7kg 정도 살 수 있다.
  • 20리라
아마도 여행자라면 조금 부족하고 현지 거주자라면 주력으로 사용하게 될 지폐.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입장료를 지불하거나, 기념품을 사거나 매우 유용하게 쓸 수 있다. 하지만 터키에서 살다보면 20 리라짜리가 이곳 물가에 비하면 의외로 큰 돈임을 알 수 있다. 학생할인을 이용하면 이 돈 한 장으로 영화관도 갈 수 있다. 아니면 카페에서 물담배 한 대 피울 수 있는 돈이다.
  • 50리라
과거에는 50 유로짜리처럼 고액결제용으로 자주 쓰였지만, 인플레이션때문에 이젠 그렇게까지 큰 돈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보다 낮은 터키 물가를 생각하면 여전히 큰 돈이다. 마트나 시장에 가서 장을 보면 이 돈으로 3일치 먹을거리를 살 수 있다. 장거리 버스 여행이나 숙박에서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돈이다. 2021년 현재에도 이 돈이면 다진 소고기 1킬로그램나 생닭 두마리는 사고도 남는다.
  • 100리라
과거에는 상당히 보기 힘든 돈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고액결제용으로 흔하게 쓸 수 있다. 하지만 소매상이나 전통시장에서 얼마 사지도 않고 이 돈을 꺼내면 잔돈 없다고 다른 돈을 달라고 하거나, 이 돈밖에 없다고 하면 거스름돈을 만들기 위해 큰 돈을 깨려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마트에서 100, 200리라 지폐를 꺼낼경우 위폐감별기를 가지고 유심히 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관광지에서는 펑펑 쓰게 될 것이다, 애초에 관광지 물가는 일반 물가보다 비싸니까.
  • 200리라
과거에는 ATM기에서도 받지 않을 만큼 고액권이었고 일상생활에서 볼 일도 별로 없었다. 오히려 200 리라짜리를 내면 "어디서 가짜돈으로 약을 팔아?" 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지만 현재는 그정도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일상생활에서 쓰기에는 약간 큰돈이라 보기 쉽지 않다. ATM에서 돈을 뽑을 때도 200리라 짜리는 입금만 가능하지 출금하면 100리라짜리만 뱉는다. 이건 2021년 현재도 마찬가지다. [43] 여행지에서도 꽤 비싼 기념품을 구입하거나, 좋은 숙소에서 숙박을 하거나, 항공여행 할때에나 쓰게 될 것이다. 200리라는 구권으로 치면 2억 리라에 해당한다. 구권 최고액의 10배. 2020년 11월 기준 1리라에 고작 135원, 1달러에 8리라를 돌파할만큼 수년사이에 가치하락이 심각한 통화이다. 따라서 조만간 500리라 신권이 출시되고 10리라 미만은 동전으로 대체될수도 있을거같다.

4.2. 동전


  • 1리라
화폐개혁 직후에는 지폐 버전도 있었지만, 2009년 화폐개혁 이후 지폐는 완전히 사라졌다. 2009년 당시에만 해도 1리라로 할 수 있는게 의외로 많았지만, 2017년 현재는 할 수 있는게 별로 없다(...) 터키에서 살거나 여행하다보면 가장 많이 쌓이는 동전이 된다. 특히 유로화와 달리 2리라 지폐같은게 없기 때문에 2리라짜리를 사고 5리라나 10리라 지폐를 깨서 계산하면 1리라 짜리가 3개 나온다. 스펙을 보면 알겠지만 2유로짜리와 거의 비슷한 크기에 무게를 가지고 있으니 가볍지도 않다. 모이는대로 써버리자. 특히 화장실 요금 계산하는데 유용하다.
  • 50쿠루쉬
가장 유용한 잔돈 넘버투 식당에서 음료를 주문하거나, 껌 초콜릿같은 자잘한 군것질이나 작은 생수병을 살때 유용하게 쓰인다. 50 단위이고 계산하기 편하기 때문에 가격표에 흔히 붙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25쿠루쉬
가장 유용한 잔돈 넘버원 터키에서 살다보면 의외로 25 쿠루쉬짜리가 많이 필요하다. 특히 마트나 전통시장을 애용할 경우나 돌무쉬를 탈 때 유용하다. 특히 75쿠루쉬 단위를 계산하려면 반드시 이 동전을 쓰거나 거스름돈으로 받게된다. 특히 소액잔돈의 마지노선이기 때문에 자주 보고 자주 쓰게 될 것이다. 2019년부터는 마트에서 비닐봉투를 더이상 공짜로 안 주고 25쿠루쉬에 팔기때문에 25쿠루쉬짜리가 더 쓸모있어졌다.
  • 10쿠루쉬
쩌리동전1(...) 일반적으로 마트에서나 관공서에서 세금 낼때에나 유용하다. 여행자들은 마트 같은델 가지 않는 이상 볼 일이 없을 것이다. 특히 터키에서 거주할 경우 한국에서나 해외직구를 이용할 일이 많은데, 도중에 세관검사를 받을경우 (EMS로 보내면 거의 백퍼센트 세관검사를 했다는 스티커와 재봉인의 흔적인 UKİM (Uluslararası Kargo İşleme Merkezi, 국제소포업무센터) 마크가 붙은 테이프를 볼 수 있다.) 수수료로 8리라 60쿠루쉬를 청구하는데, 이때 10쿠루쉬가 없으면 잔돈으로 10쿠루쉬나 5쿠루쉬가 무더기로 손에 들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모아두었다가 돌무쉬 탈때에나 쓰자. 그래도 다섯개 모으면 작은 생수 한 병 살 수 있다.
  • 5쿠루쉬
쩌리동전2(...) 진짜 쓸모없다. 이딴 동전을 왜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마트에 갔는데 잔돈이 없으면 받고, 쌓이게 된다. 쌓이게 두지 말고 어떻게든 써버리자. 5 쿠루쉬짜리랑 10 쿠루쉬짜리가 쌓이면 골치가 아파지는데, 스펙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두 동전은 색깔도 똑같고, 크기도 비슷한데다가 앞면의 아타튀르크 초상도 똑같아서 섞여있으면 구분하기 정말 힘들다. 2009년 이전의 신 터키 리라는 적어도 아타튀르크 초상은 액면마다 다 달라서 구분이라도 쉬웠다. 워낙 가치가 없는지라 구걸하는 시리아인 퇴치용으로 주면 되려 거지가 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21년 현재는 음식배달을 시키거나 마트에서 물건을 살 경우, 5쿠루쉬 짜리도 계산 안 하는 경우가 많다. 5쿠루쉬 거스름돈으로 왜 안 주냐고 따지지 말자. 반대로 가격 끝에 .05쿠루쉬가 붙어도 5쿠루쉬는 안줘도 뭐라고 안 한다.
  • 1쿠루쉬
이런 동전도 있었나? 주로 세금을 내거나 학비 같이 공공기관과 관련된 계산을 하다보면 의외로 보기 어렵지는 않다. 쓸데가 없어서 그렇지(...) 특히 AK BANK 현금인출기로 전기, 수도, 가스 영수증을 결제하면 거스름돈으로 1 쿠루쉬짜리들이 나오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동전은 워낙 소액이라 마트에서도 받지 않고, 주지도 않는다. 가격표에 5 쿠루쉬 밑단위로 나올때도 있지만 실제 계산할때는 반올림해서 계산하기 때문에 줄 일도, 받을 일도 없다. 한국에서 온 친구나 손님이 있으면 기념으로 가지라고 줘버리는 용도 이외에는(...) 실생활에서 쓸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5. 유로화 전환 관련


터키는 오랫동안 유럽연합 가입을 준비해왔고, 더불어 유로 도입도 추진해왔다. 그러나 유럽 주요국에 비해 한참 모자라는 경제력이나 문화적 차이 등으로 인해 유럽연합 가입이든 유로 도입이든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지금은 아예 에르도안 정부에서 반서방 성향을 보이면서 이 모든 노력이 중단된 상황이다. 게다가 유로화 도입시 물가상승 / 불평등 심화 / 경제주권 침해는 불보듯 뻔하다.
사실 이런 노력은 비단 터키 뿐 아니라 극동유럽과 카프카스의 국가라면 한 번쯤 시도해보고 있는 현상이다. 대표적으로 화폐를 유로화 체계에 가깝게 개편 및 개혁하거나 유로화를 모방하여 지폐/주화 디자인 및 규격을 정한다. 정작 유로존 국가들은 아오안이지만.

[1] 2005년 개혁 이전에는 TRL이었다.[2] 리라당 50원이나 떼간다![3] 마침 현지에서 세일중이었다. 한국에서는 300만 원대인 트렌치코트가 버버리 세일가로는 70만 원대이니...[4] 전임 장관이 베랏 알바이락(Berat Albayrak)이라는 양반이었는데 다름아닌 에르도안의 사위이다. 게다가 법학 전공자고 경제는 1도 모르는 인간이라 예전부터 낙하산이라는 비판이 있었으나 장인빽으로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짤렸다. 그리고 이 양반이 내려가자마자 환율이 일일 5% 가까이 폭락하는 기적을 실현한 바 있다.[5]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장기간 인플레이션이 진행된 브라질도 비슷한 식의 풍경을 볼수있었다. 우선 현금을 그대로 두면 돈의 가치가 떨어져나가기 때문에 월급날에 현금을 필요한만큼만 남기고 나머지는 물건을 사재기하거나 저축을 하더라도 외국환으로 저축하는것이 대세였고 돈이 있는 가정에서는 부동산이나 금같은 안전자산에 투자하는 식으로 버텨냈다. 이렇게 현금의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에 의외로 구매력이 컸고 월급도 물가오르는 만큼 올랐기 때문에 한때 브라질사람들이 겉으로 보이는 경제사정에 비해서 돈을 많이 쓴다는 얘기가 나돌았던것이었다.[6] 터키에서는 소숫점을 ,로 자리점은 .로 찍는다. 한국과 반대다.[7] 다만 터키 중앙은행의 금보유량도 세계적인 기준에서 보면 적은 편은 아니다. 세계 12위 권을 차지하는 정도.[8] 2016년 현재 3.24리라/EUR인데, 유로화로 계산하면 대개 3리라/EUR로 통크게 내쳐버린다. 한화로 치면 리라당 100원 가까이 손해보는 셈이다. 달러도 상황이 비슷한데 대략 2.96리라/USD 정도. 여담이지만 면세점이나 페리회사등, 유로로 가격을 매겨놓은 곳에선 역차별하기도 한다.[9] 화폐개혁 직후에는 YTL(Yeni Türk Lirası - 새 터키 리라)[10] 그런데 이걸 둥글게 해서 뒤집은 것(즉, "も"를 정확히 180도 돌린 것)이 아르메니아 드람의 기호다보니, 일부에게 까이기도 한다고.[11] 83%은 기준으로 1그램이 채 안 된다(...) 그래서 45.3%, 25% 정도밖에 안되는 은화도 흔했다. [12] 다른 이야기지만, 오스만 제국에서는 각 지방에서도 별도로 화폐를 발행하기도 했는데 이스탄불에서 발행된 화폐는 지방에서도 통했지만, 지방에서 발행된 화폐는 이스탄불이나 다른 지방에서 잘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환전소를 들려 돈을 환전하든가, 아니면 금화를 들고 다녔어야 했으므로 금본위제 경제가 아닌데도 오스만 제국 사람들의 금화의 사용도는 매우 높았다.[13] 예전에 조선에서도 상평통보등의 구화폐를 처분하고 백동화로 교환할때, 2전짜리 상평통보는 백동화 1전으로, 1전짜리 상평통보는 0.5전으로 쳐서 바꾸어 주었기 때문에 반푼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원래 반푼이라는 단위는 조선에서 없던 단위이다.[14] 당연한 얘기다. 전쟁통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은행들은 자신들이 발행한 지폐에 대한 금태환을 거부했다. 결국 사람들이 지폐를 믿지 못하고 금화에만 의존하게 된 것.[15] 현대 터키어로 11월은 kasım이지만, 당시에는 kanun-i evvel이라고 불렀다.[16] 과거에는 이 항목에 이슬람력이라고 되어있었지만, 당시 오스만 제국의 공식역법은 히즈라 기년을 사용하지만 내용은 율리우스력인 루미역법(Rumi takvim)을 사용하고 있었다. 루미역법은 1840년 탄지마트 개혁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달력으로, 새해가 3월에 시작하고 그레고리우스력과 비교할때 13일이 더 빨랐다. 이러던것이 점진적인 개혁을 거쳐 1916년 (1332)에는 새해를 3월에서 1월로 앞당기기 위해 이 해는 10달만을 가지게 되었고, 13일을 앞당기기 위해 10월이 18일까지밖에 없었다. 결국 1333년(1917년)부터는 기년법을 제외하고는 그레고리우스력과 완전히 동일하게 개혁이 이루어졌고 1928년에 터키 공화국이 히즈라 기년을 폐지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사라졌다.[17] 프랑스어로 단위는 리브르.[18] 이때까지만 해도 앙카라는 한적한 시골에 불과했다.[19] Afyonkarahisar, 아피욘카라히사르(카라히사르 이 사힙 아피움 카라 히사르). 검은'''아편'''성이라는 뜻으로, 중앙 아나톨리아 지방에서도 어느정도 규모는 있는 중소도시지만 주변부에 워낙 인기있는 관광지(동쪽의 소금호수와 카파도키아, 서쪽의 파묵칼레)로 포위되어 있다시피해 그대로 아오안이 되어버린 비운의 도시.[20] 하늘의 마드라사(학원(院))라는 뜻. 시바스에 있다.[21] 중앙동부 아나톨리아에 있는 중간규모의 도시. 터키와 중동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였다고 한다.[22] 터키 서북부의 아다파자르가 있는 지역. 이스탄불 동부에서 아시아 본토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으며, 터키 독립전쟁 당시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터키군이 사카리야 강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그리스군의 진군을 저지. 전쟁의 전황을 뒤바꾸었다.[23] 털이 복실복실한게 양과 염소를 섞어놓은 모습인데 라마와도 좀 닮았다.[24] 1452년 오스만 제국의 황제 메메드 2세가 4개월만에 구축한, 이스탄불 교외에 자리한 요새. 당시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기 위해 만든 요새로 루멜리아(Rumelia)의 요새라는 뜻. 여기에서 루멜리아란 '로마인들의 땅' 이라는 뜻으로, 오스만 제국 시절에 발칸 반도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25] 처녀의 탑이라는 뜻.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 해협 남단에 있는 등대이다. 1110년 비잔틴 시절에 지어졌다.[26] 아타튀르크와 이뇌뉘가 잠들어있는 묘소. 아타튀르크 사후 15년이 지나서야 완공되었고, 터키 공화국 건국사 박물관(+ 아타튀르크 전시장)을 겸하고 있다. 원래는 프리키아 족의 고분(공동묘지)이 있던 자리였는데, 이 건물이 세워지면서 '''철저히 갈아 엎어버렸다'''. 몰론 유물과 유골은 들어내 인근 박물관에 모셔다 놓았지만.[27] 언덕위에 있어 접근하기 어려운데다, 모 블로거의 말에 의하면 학생증을 검사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28] 작사가. 터키 국가를 만들었다.[29] 1판(콘야의 메블라나 묘소), 2~3판(메블라나 루미와 그의 묘소), 4판(아프신-엘비스탄의 지력발전소). 앞면도 1판과 2~4판의 초상화가 다르다. 즉, 2판은 앞면도안 변경, 3판과 4판은 뒷면도안 변경인 셈.[30] 카이세리(카파도키아의 동쪽에 있는 중간규모 도시.) 출신의 기독교도. 데브시르메 제도에 따라 예니체리로 징집되었으나, 황제 쉴레이만 1세의 눈에 들어 건축가로 전직하였다. 참고로 미마르(mimar)는 성이 아니라, 터키어로 건축가라는 뜻.[31] 이스탄불 서북쪽의 도시로, 1370년대 내지 1380년대에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이래 1453년까지 아나톨리아 반도 쪽의 부르사와 함께 오스만 제국의 공동 수도였다.[32] 붉은 탑이라는 뜻. 요새로 이용되었다.[33] 위령비 같은 곳이다.[34] 오스만 제국의 해군 제독이자 항해사인 피리 레이스가 그린 고지도. 유럽과 아프리카 서부 및 남미 동부(브라질)까지 그려져 있지만, 이 지방들을 식민지배하려는 의도였다기보다 '그냥 자료가 있으니까 그려 넣었다' 에 가깝다.[35] 터키 서남부 해안의 셀축(이즈미르 남쪽) 남쪽에 있다. 터키에 남아있는 그리스 유적지 중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지역.[36] 터키 아나돌루 동부 끝자락의 도우베야즈트에 위치한 오스만 제국 시절의 성. 17세기 중엽에 지어지기 시작했지만 무슨 사정에서인지 18세기 후반에야 완공되었으며, 이스학 파샤는 완공한 사람의 이름이다.[37] 역사과학자.[38] 현재는 50리라와 햇갈린다는 이유로 자청색으로 바뀌었다.[39] 터키의 수학자로 그가 세운 아르프 불변식이 뒷면에 함께 있다.[40] 1/2, 1/4단위를 사용하는 이슬람 문화권과 닮아있는 부분 중 하나이다. 가령 터키어를 어설프게 배운 여행객들이 가장 혼동하는 단위가 çeyrek과 yarım, 그리고 buçuk인데, '체이렉'은 1/4 (페르시아어 'châhâr-e yek' 처허레 옉'에서 온 단어다), '야름'과 '부축'은 1/2를 뜻한다. 다만 야름은 '반 리라', '반 킬로' 같이 다른 숫자가 붙지 않을때만 사용하며, '부축'은 10.50리라 - 10리라 반 같이 앞에 다른 숫자가 있을때 쓴다. 가령 터키어로 3,25TL 10,50TL, 500.000TL은 각각 Üç çeyrek, On buçuk, Yarım milyon lira가 된다.[41] 7차, 8차에서는 옆을 보다가 앞을 보다가 다시 옆을 본다.[42] 유럽식 소수점 표기법. 한중일영미권과는 반대로 온점(.)을 천단위 구분할 때 쓴다.[43] 진짜 운이 좋으면 가끔 200리라짜리를 얻을수 있지만, 사람들 왕래가 많은 곳의 ATM기에서는 집세같은거 내려고 1000리라씩 뽑는데, 안에 100리라짜리도 없어서 50리라나 20리라짜리를 잔뜩 뱉는 경우가 꽤 자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