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흐단 흐멜니츠키
1. 개요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내에서 카자크(코자크) 봉기를 주도하고 지휘한 인물이다. 1648년부터 1657년까지 자포로지예 카자크(Військо Запорізьке, 혹은 자포리자 코자크)의 수장을 역임했다.
흐멜니츠키는 드네프르 강과 유역의 카자크 유력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흐멜니츠키는 정교회 학교를 마친 후 키예프의 예수회 학교를 다녔지만, 철저한 정교회 신봉자였다. 중세 루테니아어, 우크라이나어, 교회 슬라브어, 폴란드어, 라틴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고 이런 지식 덕분에 그는 카자크 부대의 서기관으로 근무하였다.
자치권을 얻으면서 사실상 카자크의 독립국을 세웠으나 종주권을 재확립하려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공격해 오고 몰다비아와 크림 칸국 또한 카자크의 영토를 노리는 등 상황이 안 좋아지자 신종하는 것을 조건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였고 이를 빌미로 러시아는 타타르의 멍에 이후 처음으로 우크라이나에 영향력을 뻗치게 된다.
2. 봉기 배경
흐멜니츠키가 봉기를 일으킬 당시 루테니아 주민들은 대부분 정교회 신자였으나 영토 대부분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였기 때문에 가톨릭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폴란드 국왕이 폴란드-리투아니아 내의 정교회 인사권을 거의 장악하고, 가장 높은 액수의 상납금을 내는 사람에게 고위 성직을 수여하는 상황이 되면서 정교회 성직자들이 가톨릭에게 밀리는 상황이었다. 또한 폴란드인이나 가톨릭으로 개종한 루테니아인 지주들은 우크라이나 흑토지대의 농노들을 지나치게 가혹하게 착취하여 원성을 듣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흑토(Чернозём, 체르노좀) 지대는 평야 지대였던 특성상 유목민의 침략에 취약했고, 이 때문에 크림 칸국의 크림타타르인으로부터 정기적인 침략을 받고 있었으나 카자크들이 자체적인 무장을 갖추고 크림타타르인에게 반격을 나간 이후부터 다시금 이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은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높은 소출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서유럽에 비해 산업이 미발달한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에서 수출한 농산물을 서유럽으로 수출하고 그 대신 사치품을 구입하는 경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고, 국경이 안정되자마자 폴란드 귀족들은 필연적으로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 농노들에 대해 다시 가혹한 착취를 시도하였다. 당시 폴란드는 크림 칸국 외에도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폴란드인들은 루테니아인 정교도들이 정교회를 믿는 러시아와 힘을 합칠까 두려워 루블린 조약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내 정교도들이 서로 욕하고 싸우게 만들 목적으로, 리비우 시내 부유하고 교육받은 정교도 시민으로 구성된 리비우 형제단에게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리비우 형제단 전원을 리비우 시에서 추방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정교회 성직자들을 포섭하여 1596년 새로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파인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를 만들어낸다. 이후 리비우에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가 리비우에 정착하자 상당수의 폴란드 슐라흐타(Szlachta, 귀족계급)들은 정교회 신자 다수에게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을 강요하려는 무리한 정책을 밀어부쳤다. 이 정책은 폴란드의 동부 변경 지역을 크림 칸국으로부터 방어하던 카자크들의 대대적인 반발에 직면했다.
가장 직접적인 봉기 배경은 폴란드의 귀족 미코와이 포토츠키(Mikołaj Potocki)의 카자크와 정교회 농민에 대한 억압 정책이었다. 일부 카자크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조세 증대 및 권리 축소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자 포토츠키는 봉기에 연루된 주민들을 오스만 제국 방식을 모방하여 꼬챙이에 꿰어 죽이는 형벌을 시행했으며 자포로지예 카자크의 봉기를 진압하는데 실패하자 우크라이나 내 주요 방어 거점에 용병들을 주둔시켰다. 이런 용병들은 월급이 밀릴 때마다 우크라이나 촌락들을 약탈했던 것은 덤이었다. 등록 카자크들은 자치권을 상실한 채 그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지닌 폴란드 슐라흐타 지휘관들에게 복종해야 했다. 등록제외 카자크들은 일반 농노들과 마찬가지로 농노신분의 모든 부담을 맡았으며 과거 자신들이 보호해주던 유대인들이 토지 관리인으로 부임해오면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카자크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왕에게 직접 찾아가서 포토츠키 장군이 축소시킨 카자크들의 권리를 복원시켜 달라며 탄원을 하였지만, 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3. 봉기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원래 예수회 신학교까지 다닐 정도에다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와의 비밀 협상에도 참여할 정도의 친폴란드 헤트만이었으나 마그나트 알렉산데르 코니에츠폴스키(Aleksander Koniecpolski)에게 땅을 빼앗기고 그 와중에 가족까지 폭행이나 능욕을 당하는 불상사를 겪였다. 흐멜니츠키를 이를 하소연하기 위해 두번씩이나 바르샤바를 찾아가 탄원을 넣었으나 슐라흐타의 반대로 인해 거부당하고 만다. 이에 앙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세력을 모집하던 도중 수상한 낌새를 감지한 당국에게 체포되었고 바르샤바로 끌려가던 도중 동료들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1647년 흐멜니츠키는 자신과 원래 친폴란드파 카자크로 알려져있던 것을 이용하여 폴란드 국왕이 카자크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싶어하지만 슐라흐타들이 이를 막고 있다는 편지를 들고 다니며 카자크들을 선동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과거 자신의 적이었던 크림타타르인들에게 폴란드 왕이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준비하고 있으니 미리 선제 공격을 하여 전공을 차지하라는 전갈을 넣었다. 당시 크림 칸국은 우크라이나 일대에 대한 노예 사냥이 막힌데다가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까지 겹쳐서 식량 부족으로 많은 부족민들이 기아로 죽어나가던 상황이었다. 크림 칸국에서 대군을 파견하자 카자크들은 흐멜니츠키를 헤트만으로 선포한다. 많은 카자크들이 폴란드군 장교들을 살해하고 흐멜니츠키 봉기군에 합류하기 시작했으며, 흐멜니츠키 군은 1648년 미코와이 포토츠키의 폴란드군 주력을 공격하여 궤멸시켰으며 이후 매복 공격을 성공시켜 우크라이나 일대의 폴란드 군을 섬멸하였다. 같은 해 카자크에 비교적 동정적이었던 브와디스와프 4세마저 자연사하자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폴란드 대귀족들과 카자크들 사이에 중재자가 사라진 셈이 되면서 패닉에 빠졌다. 우크라이나 각지에서 폴란드인들이 도주하기 시작했으며 농노들도 봉기하여 유대인 토지관리자들을 살해하고 카자크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대군은 폴란드 진압군을 두 차례에 걸쳐 추가로 격퇴하였으며 리비우 일대까지 자력으로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벨라루스 일대에서도 정교회를 믿는 농민들이 소요를 일으키며 보흐단 흐멜니츠키 군이 오면 환영할 준비가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흐멜니츠키는 기본적으로 친폴란드파 출신이었고 자신과 과거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와의 친분이 자신의 입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에, 폴란드와 적극적으로 적대하는 것은 일단 보류하고, 새로 선출된 폴란드 왕 얀 2세 카지미에시와 일단의 평화조약을 맺었다.
흐멜니츠키가 평화 협상을 맺자마자 폴란드 의회는 크림 칸국에게 카자크들과의 조약을 끊고 우크라이나 군대를 기습할 것을 요청하였다. 뒤통수를 맞은 흐멜니츠키는 당장 단합되고 통일된 카자크 국가를 건설하는 생각을 보류하고 대신 폴란드-리투아니아 내에서 카자크들의 권리를 회복 및 진전시키는 선에서 다시 협상을 진행해야 했다. 새로운 협상을 통해 기존의 카자크들의 권리는 많은 진전을 이루었으나 폴란드인 지주 상당수가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에 다시 복귀하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65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대귀족들은 자신들의 알짜배기 소득원을 다시 전부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크림 타타르족과 외국인 용병들을 고용하여 다시금 우크라이나 카자크들을 공격하여 밀어부치기 시작했다. 1651년 키예프가 함락당하자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더 이상 폴란드와의 일체의 협상을 거부하고 여지껏 협상 상대로 생각하지 않던 위험한 이웃 국가였던 바로 루스 차르국으로 달려가 원조를 청했다.
4. 대홍수
흐멜니츠키는 루스 차르국 지원을 얻는 조건으로 루스 차르국에게 신종할 것을 맹세하였고 이에 차르 알렉세이 1세는 흐멜니츠키의 요청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1651년 3월 루스 차르국의 의회 젬스키는 카자크들을 루스 차르국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킬 것을 결의하였으나, 폴란드에 적대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망설였다. 알렉세이 1세는 1653년 11월 젬스키가 카자크 헤트만국을 루스 차르국의 보호국으로 삼으며 폴란드에게 선전포고를 함을 결의할 때까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보류했다. 마침내 다음해인 1654년 1월 페레야슬라우에서 카자크 헤트만국이 러시아의 속국으로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는데 페레야슬라우조약의 결과 카자크는 광범위한 자치권과 더 많은 군대의 보유, 키예프 대주교구의 권리 존속 등을 받아내었으며 그 조건으로 루스 차르국에 대한 신종과 외교권 박탈에 동의했다. 이로서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전쟁이 개시되어 폴란드는 러시아에 대패하고 파죽지세로 밀렸다.
이 때 간을 보던 스웨덴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폴란드 왕위를 내놓으라는 명목으로 제 2차 북방전쟁을 일으킨다. 스웨덴군은 약체화된 폴란드군[1] 을 격퇴하고 결국 무저항 상태의 바르샤바를 함락시켰고 국왕 얀 2세는 실레시아로 도망가고 만다. 그러자 루스 차르국 측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휴전, 곧바로 스웨덴령인 리보니아를 공격했다.
또 한편 루스 차르국 군대와 대치하고 있던 야전 헤트만인 야누시 라지비우(Janusz Radziwiłł)는 리투아니아의 다른 마그나트들과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해체하기 위해 스웨덴과 결탁. 연방에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분리해 스웨덴-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을 이루며 리투아니아는 다시 두 개의 공국으로 나누어 하나는 자신이 또 하나는 종제 보구스와프 라지비우(Bogusław Radziwiłł)가 가져 스웨덴을 종주국으로 인정하는 케다이네이 협정을 맺고 말았다.
연방을 적으로 보는 흐멜니츠키는 스웨덴을 동맹자로 보고 있었고, 루스 차르국의 휴전을 배신이라고 생각해 차르와 손을 끊기 위한 계획을 준비했었다. 그러다가 1657년 8월 급사했다.
5. 평가
폴란드 지주들의 우크라이나 농노와 카자크 착취에 맞서 우크라이나인을 구했다는 평가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 제국에 종속시킨 역적이라는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이다. 소련 시절까지는 우크라이나를 형제 러시아와 하나로 합치게 만든 위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가 반러시아로 돌아선 현재 안 좋은 의미로 재평가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친러 세력, 우크라이나 내 반러 세력과 친러 세력의 중재를 담당하는 중립파는 여전히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1] 카자크 대봉기 당시 폴란드군의 피해가 컸고 러시아는 대군을 동원하여 폴란드 군을 공격하는 와중에 군대의 일축을 맡은 카자크가 루스 차르국 편에서 싸우면서 폴란드군의 절대 다수가 러시아 방면에서 싸우고 있었으며 후방에 남아있는 병력은 얼마 없었다. 그나마 후방에 남아있는 병력 또한 상당수가 지휘관인 귀족들을 따라 스웨덴 편에 가담하는 바람에 결국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