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로슬라프 1세

 


생몰년도 : 978년 ~ 1054년
1. 개요
2. 업적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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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로슬라프 1세 무드리(현공)는 키예프 공국정교회를 도입했던 볼로디미르의 열두 아들 중 한 명으로 키예프 공국의 전성기를 이끈 명군이다. 1010년부터 1019년까지 노브고로드의 공후였음 1019년부로 키예프의 대공이 되었다.
당시 키예프 공국은 중앙집권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고 유력자들이 교역 거점을 장악하던 형태였기 때문에 1015년 볼로디미르의 사후 1036년까지 계승 분쟁이 이어졌다. 야로슬라프 1세는 키예프 공국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이후 볼가 강 유역 교역 거점에 야로슬라블이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를 위협하던 페체네그 유목민들을 크게 격파하면서 키예프 루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야로슬라프 현공의 문장이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국장이 되었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2. 업적


야로슬라프 1세는 자신을 스웨덴 공주와 결혼시킨 선대의 정책을 계승하여 유럽 여러 왕실들과의 혼인 정책을 취하여 키예프 루스의 국제적 지위를 공고히 하였다.[1] 또한 종교와 문화, 예술 면에서도 엄청난 업적을 쌓았는데 기독교를 크게 부흥시키고 소피아 성당을 비롯한 여러 성당과 수도원 등의 건축물을 짓고 종교 시설에서 사람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교육하도록 하였다. 또한 슬라브 관습법에 동로마 제국의 법학 지식을 접목시켜 루스카야 프라브다라는 러시아 최초의 법전을 만들었다. 이 법전에서는 재산권을 중시하고 특히 상인의 권리를 중시 여겼으며 이자의 한도의 제한을 두는 등 당시 사회, 경제적으로 세세한 내용을 많이 반영하고 있어 초창기 키예프 루스의 사회상를 연구할 때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 그의 세 딸은 각각 노르웨이, 헝가리, 프랑스의 왕들과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