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터널 열차 충돌사고

 



당시 대한뉴스
1. 개요
2. 사고 원인
3. 사고 이후
4. 함께 보기


1. 개요


1970년 10월 17일 ,서울 청량리발 부산 부전행 제77호 여객열차가 원주역 기점 2km 지점에 있는 원주시 봉산동 소재 삼광 터널(현 원주 터널)에서 충북 제천발 청량리행 1508호 화물열차와 충돌하여 타고 있던 인창고등학교 소속 교감 1명, 교사 1명, 전속 사진사 1명 및 학생 10명 그리고 검표원 1명이 사망하고 49명이 부상(전부 인창고교 학생)당했다.
당시의 사고 기사
역시 수학여행 가던 도중에 일어난 사고인데, 이 사건이 있기 '''불과 3일 전'''에 모산 수학여행 참사가 터진 탓에, 정부 차원에서 '''당분간 열차로만 이동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바로 다음 날''' 거짓말처럼 사고가 또 터졌다. 이로 인해, 한동안 전국적으로 '''수학여행 자체가 금지되었다.'''

2. 사고 원인


단선에서 열차가 서로 충돌했다고 하는 것은 폐색구간에 열차가 2대가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신호체계문제가 지목되었다. 당시 중앙선은 CTC를 69년에 도입해 사용하고 있었는데 사고 당시 원주역 신호기가 고장이 나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수동조작으로 운행을 하고 있었는데 원주역에 대기중인 77호 열차를 출발시키고 반대편에서 오던 1508호 화물열차를 유교신호장(무인 교행역)대기선에서 출발하지 못하도록 신호를 '''붉은색'''으로 선로 전환기는 본선으로 부터 폐쇄(분리)했어야 했지만 선로전환기는 본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77호 여객열차를 수동으로 신호를 무시하고 출발시켰는데 출발 직후 지휘소에서는 유교역에서 화물열차가 이미 출발했음을 뒤늦게 알았지만 당시 열차와 통신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원주터널의 커브에서 서로를 발견하지 못하고 충돌, 대형참사를 일으켰다.
따라서 사고원인은 원주역 CTC의 고장과 유교역 선로교환기 조작, 신호를 무시한 화물열차에 집중되었다. 결국 검찰은 CTC 보수책임자와 조종책임자 그리고 화물열차 기관사를 각각 과실치상혐의로 기소하게 된다. 즉 비록 CTC의 고장이 원인이나 근무자들의 실수로 인해 사고가 발생한 인재라는 이야기.

3. 사고 이후


  • 열차와 지휘소간 통신수단이 전무하여 사고를 막지 못한 책임도 컸다. 이 사고를 계기로 모든 기관차는 무전기를 구비하도록 했다.
  • 이 사고로 희생된 13인(검표원 제외)의 유해도 15일에 희생된 학생들이 잠든 곳에 묻혔다.
  • 겨우 참사를 잊을만하던 1년 뒤 남원역에서 열차가 충돌해 초등생 17명과 고교생 3명이 사망했다.
  • 이 때 사고를 겪은 인창고 18회 졸업생 80여명은 최근 경주시에서 성황리에 진행되는 '추억의 수학여행' 이벤트를 알게 된 동창회장의 제안으로 참사 40년 후인 2010년 10월 16일부터 1박 2일간 당시의 은사님도 초청하여 경주시로 수학여행 한풀이를 하며 사고로 희생된 스승과 급우들을 추모했다고 한다. 수학여행 참가자들은 이 날 서울역에서 옛 교복을 입고 인창고 15회 졸업생인 이귀남 법무부 장관과 최용주 인창고 교장 및 학생들의 환송을 받으며 수학여행 열차에 올랐다. 추억의 행사를 주관하는 신라문화원은 이들의 특수한 사연 때문에 교복을 미리 서울로 보내 참가자들이 열차에 탑승할 때부터 입을 수 있게끔 특별히 준비했으며 사고로 숨진 스승과 친구들을 추모하는 영상제작과 관련 프로그램도 지원했다고 한다.기사1기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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