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산 수학여행 참사

 



1. 개요
2. 발생 과정
3. 사고 원인
3.1. 철도건널목 안전규칙 무시
3.2. 버스 내 안전수칙 무시
3.3. 학생들의 안전을 무시한 교육계
3.4. 정부의 안전시설 확보 부재
4. 사고 이후 및 여파
5. 기타
6. 참고 자료


1. 개요


'''모산역 건널목 참사'''라고도 한다.
1970년 10월 14일 오후 4시 19분에 충청남도 아산군 배방면 장항선 모산역(현 배방역[1]) 근처 건널목을 건너려던 서울 경서중학교[2] 학생들을 태운 수학여행 버스가 특급열차[3]와 충돌한 사고. 인명피해는 '''사망 46명, 중상 29명'''.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수학여행 관련 참사 중 사망자 수가 2번째로 많은 참사이다.[4]
당시 동아일보 보도기사를 참고해 보자. 사진을 보면 얼마나 처참한 사고인지 대번에 알수 있다. 10월 15일자 신문기사이며. 자세한 기사와 사진은 7면에 있으나, 참혹할 수 있으니 열람시 주의할 것.

2. 발생 과정


당시 서울 경서중학교 3학년 학생들은 수학여행[5]으로 현충사를 방문하고 귀경길에 올랐다. 수학여행 중이던 경서중학교 3학년은 9개반 475명에 교사 11명이었고, 관광버스 총 7대에 나눠타고 이동했다. 이 중 3반과 4반을 합해 76명을 태운 (당시) 서울 연흥관광 소속(서울05 7358호) 관광버스[6]가 이내건널목[7]을 건너는 중, 달려오던 특급열차가 버스 측면을 들이받아 80m 가량 밀려났다.
이 과정에서 연료통에 화재가 발생했고, 버스는 그대로 전소했다.
이 사고로 운전자 및 학생 45명(3반 30명, 4반 15명)이 사망했다. 즉 충돌 당시 즉사한 이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사망자들은 중상을 입고 불타는 버스 안에서 산 채로 타 죽은 끔찍한 사고였다. 그리고 차장과 학생 29명(3반 14명, 4반 15명)이 중상을 입었다. 결국 다치지 않은 이는 '''단 2명'''뿐이었던 것. 생존한 학생들은 충돌시 차 밖으로 튕겨나갔거나, 화재가 늦게 번진 뒷좌석에 탑승했던 탓에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던 경우이며, 그나마도 인근주민들이 돕지 않았다면 사망자는 더욱 증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3. 사고 원인


알아둘 것은 당시에는 대형 버스사고가 많았다는 점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3인 이상 사망한 버스사고가 연 15건으로 111명 사망에 202명 중상이라는 집계를 내보냈을 정도. 한 달에 한 번은 사고가 난 셈이다. 이 점을 참고해 두자.

3.1. 철도건널목 안전규칙 무시


제1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당연히 철도건널목에서 지켜야 할 '''일단정지(혹은 우선멈춤)'''를 무시한 것이다.
'''도로교통법 제24조(철길 건널목의 통과)''' ① 모든 차 또는 노면전차의 운전자는 철길 건널목(이하 "건널목"이라 한다)을 통과하려는 경우에는 건널목 앞에서 일시정지하여 안전한지 확인한 후에 통과하여야 한다. 다만, 신호기 등이 표시하는 신호에 따르는 경우에는 정지하지 아니하고 통과할 수 있다.
지금은 웬만한 철도건널목마다 신호기가 설치되어 있지만,[8] 1970년대에는 신호기가 없는 철도건널목이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열차는 철로 위에서 달리며 자동차처럼 즉시 감속하여 정차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고 위험은 자동차 측에서 알아서 피하는 수밖에 없다. 건널목 근처에서, 특히 차 안에서는 열차가 접근하는지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일단정지'''가 필요하다. 이 사고도 이 규칙을 무시하고 가다가 열차와 충돌했다. 하지만 운전자에게만 모든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3.2. 버스 내 안전수칙 무시


제2의 원인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버스 내 안전수칙을 무시한 것이었다.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에는 버스를 타고 가던 중 학생들이 분위기에 심취하여 노래를 합창했는데, 운전자가 '조용히 하라.'는 말을 했고 그 사이에 열차에 충돌을 했다고 전했다. 운전자가 주위의 소음에 집중력이 분산되고 학생들에게 주의를 주다가 열차를 미처 신경을 못 썼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안전수칙으로, 버스 내에서 음주가무를 금지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학생들에게만 책임을 묻기엔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3.3. 학생들의 안전을 무시한 교육계


이번 사고의 버스는 3반과 4반이 탑승한 '''선도차'''였다. 그런데 당시 선도차에는 '''교사가 탑승하지 않았다!''' 맨 마지막 차에 교사가 한꺼번에 탑승했던 것이다.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현장지도를 하고 운전자로 하여금 안전운행을 하도록 감독할 책임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선도차라면 가장 먼저 앞서 안전을 확보해 가야 하므로 운전자는 물론이고 지도교사에게 막중한 책임이 따라야 한다. 비록 차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의무가 경감되지는 않는다.
그뿐만 아니다. 이번 사고에서 버스에 발생한 화재는 무려 50분이 넘어서야 의용소방대에게 진압되었다. 학생들 구조 과정에서 주변 주민들은 적극 참여했지만, 정작 교사들은 너무도 무책임했다. 주변 주민들 曰, "'''뒷짐만 지고 있었다.'''" 점점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교사들은 인근 중학교로 대피(…)까지 했으며, 심지어 자기 학생을 나 몰라라 내버려두고 아이들보다 1시간 먼저 서울로 귀경했으니 할 말 다 했다. 다만 후술할 이기훈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 칼럼에 의하면 당시 교사들이 오전 및 오후 담당차량을 헷갈렸고, 해당 차량 기사가 급히 출발한 거라고 했다. 또 주민들이 직접 구조한 건 맞지만 불길이 급속히 번져 누구부터 먼저 구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급박했고, 교사들이 뒤이어 나섰지만 때는 늦었다.
그리고 위에서 설명했듯 버스 한 대에 '''무려 75명'''이 탑승했다. 거의 30명 가까이 정원초과를 했던 것이다. 이게 얼마나 문제인지 와닿지 않는 사람을 위해 설명하면, 한국의 좌석버스 중 대다수가 41~45인승이다. 더군다나 70년대는 2020년 현재와 비교하여 안전관련 기술이 현저히 좋지 않았음을 생각하면...[9]
그리고, 45인승 버스에 75명을 태우려면 답은 하나다. '''2줄짜리 좌석에 3명씩 앉히고, 이래도 67.5명이니 통로에까지 사람을 세워야 한다.''' 전자는 '''안전벨트를 맬 수 없고''', 후자는 '''굳이 설명이 필요한가?''' 사고가 안 났으면 돈 아끼는 꼼수로 여기겠으나, 이번 사고에서는 피해를 키운 악재 중에서도 악재였다. 이 또한 수학여행을 준비한 학교의 책임이라 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학교에서 이번 수학여행을 반강제적으로 했던 것이 드러나 비난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당시 일선 학교들은 수학여행 때 안전 지도에는 소홀하면서 그저 학생들을 목적지로 보내기에만 열을 올리고, 막상 가서는 놀기에 바빴는데, 이랬던 교육계 전반에 비난의 화살이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3.4. 정부의 안전시설 확보 부재


이러한 기본적인 사고원인 말고도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바로 '''철도 건널목'''이었다. 현충사가 건립되면서 방문객이 크게 늘어나 당시 사고현장 철도건널목의 운행차량이 급증했다고 한다(무려 하루 5천 대!).
그 외에 버스 운전수가 고령(당시 57세)의 나이에 고혈압을 앓고 있었고, 운전자 적성검사에서도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음주운전을 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 때문에 사고 직후에 운전자 연령상한선 검토가 언급되기도 했다. 그러나 운전자가 무사고 경력이 25년이나 되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해서는 섣부른 판단은 힘들다.

4. 사고 이후 및 여파


당연히 해당 학교는 무기한 휴교하고 학생들의 유해를 운구해와 안치했다. 그러나 무려 1시간 가까이 버스가 불탄 탓에 학생들 유해는 말 그대로 숯덩이가 되었고, 많은 유해가 뒤엉켜서 도저히 신원확인이 불가능해 유가족들이 공동장지를 요구할 정도였다. (DNA 검사도 없던 시대인 1970년이라는 것을 상기해 보자.) 희생된 학생들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온 나라가 큰 충격을 받았고, 당연히 그 여파는 실로 엄청났다.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 홍종철 장관과 교통부(현 국토교통부) 백선엽 장관은 그날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10] 서울시 교육감도 사표를 냈으며, 사흘 뒤에 중등교육과장과 경서중 교장, 교감 및 당시 교사 11명도 모조리 직위해제를 당했다. 17일에는 교장ㆍ교감과 3반ㆍ4반 담임은 파면되었고, 나머지 교사들도 해임당했다. 그러나 교감은 이에 반발해 '''인솔 책임은 해당교사에게 있다'''는 취지로 행정소송을 걸었고, 여기서 이겨 해임취소 판결을 받았다.
반면 서울시교육위원회는 버스 수학여행을 금지시키고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1인당 2백만 원씩 지급토록 했지만, 사고 버스회사는 2,700만 원밖에 보상금을 못 냈다. 치료비도 부족해 응급치료만 받고 끝내는 경우가 많았고, 장기 입원학생들은 3등 병실에서 푸대접 속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문교부는 각급 학교를 시켜 '자발적 모금'이란 명분 하에 돈을 강제로 걷어냈고, 당초 내걸었던 '고교진학 특혜 조치'도 잘 지켜지지 않아 생존자 27명 중 13명만 전기 고교입시에 합격했다. 생존자들조차 육체적/정신적 후유증도 심각하여 경서중 부상학생 중 한 명은 1년 넘게 입원해 있는가 하면 전신 화상을 입은 이들은 1972년까지 수 차례 대수술을 받았고, 수술한 머리의 흉터가 허전해 모자를 계속 쓰기도 했다.
이 참사는 대한민국의 수학여행과 관련 사고들 중 사망자 수 1위였으나, 44년 뒤 세월호 참사가 무려 5배 이상의 사망자 수를 기록하여 '''2위'''가 되었다. 깨지지 않아야 할 기록이 깨진 것이다.

5. 기타


  • 워낙 큰 대형참사에 피해자도 중학생들인지라 위령비가 당연히 세워졌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에 위령제가 공식적으로 중단되고,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역도 이전하고 세월도 많이 흘러 이런 사건이 있었다는것 조차 뇌리에 잊혀졌기에 위령비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가 현재는 한국철도공사 지정 철도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현재는 사라진 모산역 터에서 위령비가 이전되어 근처 삼거리 길가에 위치해 있다.
  • 이 사고로 희생된 학생들은 유가족이 별도로 수습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기도 김포시 고려공원묘지에 합동안장되었으나, 조성 초기 위령비 제막 과정에서 부실 문제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워낙 시간이 흘렀고 참사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기 때문인지 현재는 관리상태가 좋지 않다고 한다. 근 50년 전 사고이기에 유가족들도 대부분 사망했거나 매우 고령이기 때문에,[11] 정부와 지자체가 직접 나서지 않고는 관리하기 힘든 실정이다. 고려공원묘지[12] 장릉산 산책로 샛길을 걷다보면 공원묘지 쪽 수풀 사이로 위령비와 함께 합동장지를 확인할 수 있다.
  • 당사 학교였던 서울 경서중학교는 1992년에 지금의 위치인 서울 강서구로 이전했다. 옛 학교 부지에는 지금 서울서부지방법원 청사가 들어서있다.

6. 참고 자료


[1] 신선이설(이전) 때문에 역명이 바뀐 것. 사고장소와는 관계없이 두 역터는 1km 이상 멀리 떨어져 있다. 사고가 났던 구 모산역과 건널목 은 건물은 물론 선로까지 흔적도 없이 치워진 상태이며 선로가 이설된 관계로 건널목 또한 없다.[2] 1910년에 개교한 역사가 100년 이상 된 꽤 오래된 학교로 당시 마포구에 있었다. 1993년에 마포구에서 강서구 가양동으로 옮긴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참사 10년 뒤에 이윤상 유괴 살인 사건의 피해자 또한 이 학교 출신이다.[3] 3000호대 기관차가 끌던 통일호이다[4] 원래 1위였으나,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나면서 2위가 되었다.[5] 당시 언론에서는 소풍으로 기사를 내기도 하였다.[6] 신진자동차 DB102LC[7] 현 온천대로 모산제일교회 앞 횡단보도 자리[8] 단 시험장에서는 신호기가 없어서인지 일시정지해야 한다.[9] 사실 이에 앞서 살펴봐야 할 것은 학생+교사 수이다. 학생 475명에 교사 11명으로 총 인원수는 486명. 이들을 45인승 버스 9대에 나눠 태운다고 하면 평균 탑승자 수는 54명이다. 그런데 버스 한 대에 75명을 태웠다는 것은 적어도 '''평균보다 20명 넘게 과다하게 태웠다는 말이다.''' 54명씩 맞게 태웠다면 적어도 이 정도까지의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10] 하지만 장관들의 사표는 반려되었고, 각각 이듬해 6월과 1월에 교체되었다.[11] 2020년 기준으로, 유족 중 부모 세대는 생존해 있다 할지라도 대부분 90세 이상이며, 형제 세대도 최소 60세 이상이다.[12] 김포시 감정동 62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