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clearfix]
▲ 선체의 대부분이 가라앉고 선수 부분[10] 만 수면 위로 노출된 모습.
1. 개요
2014년 4월 16일, 전라남도 진도군 관매도 부근 해상(맹골수도)에서 청해진해운이 운영하는 인천항과 제주항을 오가는 정기 여객선인 세월호가 전복되어 침몰해 승선객 476명 중 304명이(단원고 250여명)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고. 대한민국의 해난사고 중 두 번째로 많은 사상자를 냈고, 502명이 사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326명이 사망한 남영호 침몰사고 이후 세 번째로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재난 사고이다.
2. 상세
이 사건은 안전불감증에 빠져 있던 한국의 안전 관리 실태와 혼란스러운 사회의 극치를 보여준 비극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참사로 인해 당시 출범 2년차였던 박근혜 정부는 물론 대한민국 사회계, 정치계는 모두 엄청난 후폭풍과 침체, 그리고 공황에 시달렸다. 이후 언론, 정계, 경제계, 교육계 그리고 문화계에서 수많은 갈등을 야기한 증폭제 역할을 하는 사건이 되었다.
태안 사설 해병대 캠프 참사가 일어난 지 8개월 만에 또 다시 학교 단체 캠프에서 사고가 나면서, 태안 때부터 거론되던 수학여행 규제 강화 및 중단이 이 사고를 통해 현실화되었고, 2014년 한 해 동안은 수학여행 및 학교 단체 여행이 금지되거나 자제되는 분위기가 생겼었다.
대한민국 수학여행 관련 사고 중에서는 역대 최대의 참사이다. 이전까지 최대의 참사는 1970년 경서중학교 학생 45명이 사망한 모산 수학여행 참사였다.
2008년 선박연령 규제 완화로 일본에서는 운항이 금지된 노후 선박인 세월호의 수입 운항[11] , 사주인 유병언 일가의 부도덕한 경영,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부실한 선박 관리와 안전교육, 이를 방치한 승무원들, 이준석 선장과 항해사의 판단 착오와 늑장 대응, 그리고 그로 인한 시간 지체, '''가만히 있으라'''는 비상식적 안내 방송[12][13] , 그리고 정부와 관료의 선진적이지 못한 대처 등 총체적 난국이었던 최악의 해난 사고이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 남영호 침몰사고 같은 대형 재난의 경우 불특정 다수가 피해자인 게 대부분이었는데, 이번 참사는 안산시 단원구에 있는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및 교직원들이 수학여행을 가던 도중에 발생하면서 '''사망자의 90%가 같은 학교 소속, 83%가 미성년자'''였다. 단원고의 주소지인 경기도 안산시와 사고 현장인 전라남도 진도군[14] 은 이 사고 때문에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사고 당일, 세월호에는 차량 150여 대와 승무원 29명, 화물 기사 33명을 포함해 총 476명이 탑승해 있었다. 이 중에는 3박 4일 일정으로 제주도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학생 325명과 교사 1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전에 발표된 해운사의 브리핑에서는 탑승자가 477명이라 했지만, 오후 브리핑에서 승선권과 탑승자 명부를 조회한 결과 462명으로 조정되었다. 하지만, 이후 23시경 해운사는 475명으로 총 인원수를 정정하였다. 이번엔 CCTV로 탑승자를 일일이 헤아렸다고.[15] 그러다가 4월 18일 오후 10시경에는 476명으로 정정되었다.[16] 외국인은 중국 국적의 조선족 두 명을 포함하여 총 5명이 탑승했으며, 필리핀 가수 2명은 구조되었으나 중국인 이모 씨와 조선족 이모 씨와 러시아 출신 학생은 4월 21일 수색 작업에서 발견되었다. 러시아 출신 학생은 단원고 유학생인데, 주니어 수영 선수 출신으로 수영에 매우 능숙했다고 한다. 객실에서 대기하라는 방송만 아니었다면 생존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안타까움을 더했다.
오세아노스호 침몰 사고처럼 선장이 튀었음에도 승객이 전원 구조된 사례를 본 사건과 견주어 보려는 시각도 있으나, 사건의 경위 차이가 상당한 시점에서 섣부른 추측 및 비판은 삼가야만 한다.
세월호 침몰 1년 전의 모습. 세월호 침몰 한 달 전의 모습. 세월호 침몰 전 3월 27일의 모습. 이것이 멀쩡한 세월호의 마지막 모습이다.[17]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던 정부 측 인사인 '해경 123정' 정장이었던, 경위 김경일의 '''업무상 과실 치사''' 혐의가 대법원에 최종적으로 유죄(징역 3년)로 결론났다.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전인 9시 30분에 현장에 도착한, 해경에서 간단하게 대피 방송만 했어도 인명피해가 극심하지 않았을 거란 법원의 판단이며, '부실한 구조 행위'로 대량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후에 야기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건과 박근혜 정부의 비참한 몰락도 결국 세월호 참사와 직간접적 연관이 있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대통령 탄핵이었지만 탄핵 여론 형성의 시발점이 세월호 참사였고, 궁극적으로는 국민이 세월호 참사의 무한 책임을 정부와 대통령에게 물은 것이기 때문이다. 국회의 탄핵 소추안에 세월호 관련 내용이 포함되어 있던 것도 이 때문이었고, 세월호 참사 직후 석연찮은 7시간 30분의 행보와 미용시술 논란, 그리고 '''피해자와 유가족들에 대해 가한 부당하고 불합리한 탄압'''[18] 등은 탄핵 정국에서 박근혜 정부가 지지세를 회복하지 못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였다. 결국엔 정부를 파멸로 이끌 만큼,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태였던 것이다.
이후, 이 문제는 대통령 박근혜의 탄핵 사유 중 하나로서(세월호 7시간 및 생명권 침해) 탄핵안에 포함되어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가결되었으나, 헌법재판소는 2017년 3월 10일 판결하면서 이를 직접적인 탄핵 사유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아무리 심각한 재난 상황이라도 대통령이 직접 구조 활동 등에 참여할 의무가 직접 도출되지는 않으며, 직무의 성실성 같은 개념은 모호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이것을 탄핵 사유로 직접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도 비슷한 논지로 판시된 내용이 있었다. 실제로 이것이 탄핵 사유로 인정되었다면 앞으로 모든 대통령은 어떤 사고라도 일어나면 직접 구호 활동을 하지 않았다며 탄핵될 수 있는 사례를 만들어버리는 셈이므로, 정치적 안정성이 심각하게 저해될 가능성도 있었다.
헌법재판소의 다른 판례들을 종합해봤을 때 직무불성실로 탄핵감이 되려면 말 그대로 그 어느 액션도 안 하고 가만히 손 놓고 있어야 한다. 실제로 박근혜는 이에 준하는 상태로 있었을 거라는 의심이 되지만, 탄핵 판결 당시에는 세월호 7시간 등에 대한 명확한 정황이 밝혀지지 않았고, 어쨌든 세월호 사건이 터진 다음 중대본으로 출석하거나 어떠한 지시를 내린 흔적이 확인되는 상황에서는 직무불성실 등을 문제삼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러나 헌법재판관 김이수, 이진성은 보충 의견으로서 당시 박근혜의 태도를 지적하긴 했다.[19]
3. 월별 상황
4. 사고 배경
4.1. 세월호의 제원
세월호는 1994년 6월, 일본 나가사키의 하야시카네선거(林兼船渠)에서 건조한 카 페리선이며, 건조 후 일본 '''마루에이 페리(マルエーフェリー株式会社, A-Line Ferry Co.,Ltd.)'''사에서 약 18년간 '''Ferry Naminoue'''('''フェリーなみのうえ 페리 나미노우에'''[20] )라는 이름으로 가고시마~오키나와 나하 간 운항하다가 2012년 10월 1일을 나하발 운항을 끝으로 퇴역하였으며, 같은 달 중고 선박 시장 매물로 올라온 이 선박을 청해진해운이 2012년 10월에 매입하여 개수작업을 거친 후 '''세월호'''(歲月號)라는 이름으로 2013년 3월부터 인천-제주 항로에 투입했다.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는 세월호와 오하마나호 뿐이었으며, 인터넷에서 세월호나 오하마나호의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도 그 이유다. 하지만 청해진해운이 취득했던 제주-인천간 면허가 취소되고 사실상 회사가 사라지게 되어서 더이상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는 없다.
명칭인 세월호는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의미의 歲月(해 세 + 달 월)이다. 이름은 유병언 회장이 직접 지었고, 작명을 사유로 한 번 출항 시 수천만 원의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 당초에 정확한 한자 표기가 알려지지 않아 가장 흔한 단어로 음차한 명칭인 歲月號라는 명칭으로 일본, 중국, 대만 등지에서 보도되었으나 일부 언론에서 나온 ''''세'''(世)상을 넘는다(초'''월'''(越)한다)'는 의미가 퍼지면서 수정 보도되고 있다. [21]중국 방송의 수정 보도(중국어 링크): 한국 조선일보를 인용하였다고 되어 있다. 원래 중국어권에서는 표음문자의 특성상 외국어의 정확한 명칭을 알아낼 때까지는 가칭을 쓴다. 그러다 2015년 7월 26일 구원파[22] 및 유병언 전 회장 관련 정정 및 반론'에 따라 다시 歲月로 정정되었다. #
4.2. 선박 개조
[24] 이란 기사에 따르면, 당초 600명 정도[25] 가 타는 배였는데, 300여 명 정도를 더 태우기 위해 배 뒤쪽에 객실을 추가하였다. 선수부 우현 사이드 램프 도어(램프웨이) 제거가 되었으며, 배 뒤쪽을 개조했다는 전직 세월호 기관사의 증언이 나왔다고 한다. 또한 객실을 증축하면서 세월호의 무게는 페리 나미노우에(4대) 때와는 달리 239톤이 증가했다.
이게 첫 개조가 아니었는데, 일본에서도 이미 1994년 건조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589톤이 증가했었다. 결국 맨 처음 개수했을 당시 5,997톤이었던 선박은 개조로 인해 6,586톤으로 증가했고, 개조한 세월호의 순수 선박의 무게가 일본 당시 239톤 + 한국에서 589톤 총합 838톤 증가하여 6,835톤에 달했다. 상세 내역은 선박 개조 논란 쪽을 참조.
5. 사고 상황
세월호 72시간의 기록.
사고 과정과 구조, 수습 과정, 오보 및 이후 정정 과정 등의 타임라인이 잘 나와 있다. 여기서 사고 초기 대통령 지시는 후에 박근혜 정부 측 조작으로 밝혀진다. 세월호 7시간 참고.
우측 하단에 배가 시간에 따라 잠기는 모습이 나온다.
5.1. 구조 현황
'''(2017년 6월 5일 17:42 기준, 단위: 명)'''
- 단원고등학교 학생의 현황에는 단원고의 교사를 제외한다.
- 2014년 4월 22일 이후로 사망자 중에서 탑승 명단에 없는 사람들도 발견되었으나, 공식적인 탑승객 명부의 인원수는 476명에서 변경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사실상 총인원수는 476+α인 상황. 범정부 사고대책본부는 승선원 명부의 정확성 문제, 차량탑승 미신고자 등 여러 예측 불가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탑승객 숫자는 언제나 변동될 수 있는 사항이라고 밝혔다. #
- '단원고'는 단원고 학생뿐만 아닌 선생님들도 포함된다.
- '일반인'은 일반 승객뿐만 아닌 세월호 승무원도 포함된다.
- '사망'은 시신이 발견된 경우, '미수습'은 시신이 발견되지 못한 경우이다.
- 11월 21일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당일 25대의 헬기의 수색/구조 현황을 시각화로 정리했다. 시각화 사이트는 링크 참고. #
5.2. 세월호에 탑승했던 단원고 학생 인원 현황 및 배치
연합뉴스 측에서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학생들은 이미지와 같이 선실에 배정되었다고 한다. 도면상으로 확인되는 선실 절반의 출입구 방향이 선체가 기울어진 쪽 반대 방향이다.
선체가 90도 이상 기울면서 출입구 쪽 벽면이 천장으로 바뀌었고, 아래 후술하지만 벽을 타고 올라갈 수가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대피하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다.[27] 배의 창문을 깨는 등으로 출구를 확보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구조 영상에서도 볼 수 있듯, 승객들이 창문을 깨기 위해서 의자로 유리창을 내려쳤지만 결국 깨지 못했듯, 여객선의 창문을 일반인이 주위의 물건으로 깨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탈출 선원들 "구조순서 밀릴라"...승객대피 안 시켜.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휴가 중이었던 선장은 선박의 복원력이 저하됐다고 사측에 의견을 제시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부)는 전했다. #
5.3. 침몰 원인
5.4. 선장을 비롯한 선박직 승무원들이 퇴선 지시를 지체한 원인
선장 이준석이 구속될 때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사고 해역은 맹골수도로 물살이 굉장히 빠른 지역이다. 구조선이 도착하기 전에, 지나치게 빨리 바다에 뛰어들 경우 빠른 조류#s-3의 영향으로, 사고 지점에서 상당히 멀리 떠내려가서 생존 확률이 급격히 떨어진다.'''가만히 있으라'''
세월호 침몰 당시, 사고 해역의 수온은 약 11~12도 정도로 추정되며, 그 정도의 수온에서는 구명조끼를 입어서 물에 떠있는다 하더라도 생존 시간이 일반적으로는 1시간, 최대 2시간 정도에 불과하다. 조류로 떠내려갈 경우, 바다에서 1시간 이내에 다른 선박에 발견되어 구조되기는 지극히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09시 20분경, 사고 지점에 최초로 도착한 유조선 두라에이스호는 2,700톤급 선박으로 작은 배가 아니다. 충돌 우려 때문에 세월호에 가까이 붙여서 구조할 수 있는 배는 아니었다.
그러나 설령 이런 우려를 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승객들에게 '''"모든 승객은 지금 즉시, 구명조끼를 입고 갑판 위로 질서 있게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지시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최대한 배 위에서 기다리다가 마지막 순간에 바다에 뛰어들어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 실제 여객선 침몰 사고를 다룬 유명 영화 타이타닉에서도 구명정에 타지 못한 승객들은 갑판에서 버티다가 최후의 순간에 바다에 뛰어들었다.
물론 타이타닉호 침몰사고 당시는 배가 망망대해 한가운데 있었고, 구조용 헬기도 없었기 때문에 바다에 빠진 승객들은 몇 시간 동안 구명조끼의 부력으로 둥둥 떠서 구조를 기다리다가 북극에 가까운 북대서양의 영하 2도 바다에서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지만, 세월호의 경우 (구조원들의 삽질을 감안해도) 당연히 이보다 구조가 훨씬 신속히 올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에, 이랬다면 일부는 탈출 와중에 변을 당했을 수 있어도 상당수 승객이 더 살 수 있었다. 최소한 '''살아남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배 안에 갇혀 비참하게 익사하는 참사는 없었을 것이다.'''
위 내용은 사고 당시 세월호 주변에서 항해중이던 어민과 진도 관제 센터간 통신 내용이다. 이 통신이 이루어지던 사이 배는 더욱 기울었고, 결국 자신들이라도 먼저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대피 방송이고 뭐고 일단 빠져 나오는 데 급급했던 것으로 보인다.'''주변 어민: 사람이 나와야 뭐 건질 거 아니어요 다 나왔어 안 나왔냐요 몇 백 명 실었다 한디 막 사람이 어여 나와야 된디 뭐 사람이 안 나와요 사람이 왜 안 나오냐고 아이, 지금 저 물속에 다 반은 반도 넘게 잼겼것소. 배가 반 들어갔는디 반 더 들어갔는디 물 속에 지금 선실에 다 갇혀있지.'''
'''진도 VTS: 지금 말씀하시는 국 어디십니까?'''
'''주변 어민: 현장이라고 사고현장'''
'''진도 VTS: 사고 현장에 그 승객들이 안 나와있습니까? 바다로 혹시 이탈한 사람들 없습니까?'''
'''주변 어민: 와 있어. 옆에 와 있는데 헬기로만 구조하고 사람이 안 따라와'''
'''주변 어민 2: 배가 좌현으로 넘어가는데 사람이 왜 안 나오지'''
'''주변 어민: 사럼 몇 명 구하고 말겄소. 저, 형님. 저저, 나올 수가 없지 저렇게 되면. 다 들어갔는디 완전 잠수했는디 어디로 해서 나오겄어. 배가 다 들어갔는디 사람들이 지금 하나도 안 나오고 있어. 지금. 사람이 나와야지 지미 씨발 배가 다 들어가부렀는디 사람이 뭐 4백 명인디 뭐 사람 몇 명 나오도 않고 어찌라고. 못 나오고 있은께 깝깝하네. 배는 다 들어갔구만. 이제 저기서 어쩌케, 저 뭐냐 짤러갔고 들어가가지고 구조해내기 전에는 틀렸재. '''
'''주변 어민 2: 넘어가분다. 넘어가부러여. 넘어가부러.'''
'''진도 VTS: 선장님, 선장님. 그 사항에 대해서 사진으로 사진으로 쫌 찍어주십시오.'''
'''주변 어민: 알았소'''
'''가까이 가지마 배 들어가분다. 들어가부러. 손 쓸 길 없이 쏙 들어가. 배 들어가분다 뒤에서부터 들어가분께 가까이 가지 말라고.'''
'''진도 VTS: 진도 코스탈 VTS 페신저쉽 페신저쉽 세월 나우 싱킹'''
'''(해석: 여기는 진도 관제 센터, 여객선 세월 지금 침몰 중)'''
'''주변 어민: 사람 몇 명 구하도 못 하고 저 큰 배가 쏙 물에 잠수해버리네요. 음마, 음마. 이거 큰일 났구만 이거. 더 이상 안 가라앉겄소 완정히 들어가겄소요. 아, 니미 들어가부러, 들어가부러. 사람이 안 나와부네. 이거 뭐 다 죽게 생겼...'''
'''사람 거 헬기로 몇 명 구하고 나머지 싹 들어갔어. 요거 어치케 살아나오겄어요. 아이고메. 죽겄구만, 에이고. 순식간에 아이, 요 구조도 못하고 들어가고만 잉. 배가 기울어 있으면 구명조끼 입혀서 딱 사람을 빠쳐머려야지, 물로다가. 선장이 뭐하는 것이여. 옴마옴마 다 죽고 한 사람도 못 구하네. 들어가분다. 들어가부러. 니애미 씨벌년 사람도 못 구하니. 진짜 오메. 사람 몇 명 구하고 말았겄소. 이거 환장해 죽겄네. 들어가분다. 들어가부로 에이 니미 씨발. 한 사람도 구조... 옴마옴마'''
'''한 오백 명 죽어, 오백 명. 몇명 구하고 다 죽네. 들어가부러, 들어가부러'''
10:07 - 10:26 사이 세월호 침몰현장 주변 어민 교신 음성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순직한 서비스직 승무원 박 아무개가 무전으로 계속 퇴선 명령 여부를 조타실에 문의했음에도, 이를 '''무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무전기는 무전기를 가진 전원에서 송수신 내용이 다 들리기 때문에 못 들었다거나, 고장났다거나 하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 이외의 선박직 이외의 다른 승무원을 포함한 승객들은 자신들이 구조되는 데 걸리적대는 '''장애물'''로밖에 보지 않았던 정황이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이들 선박직 선원들은 해경 123정의 보트에 의해 기관직 승무원들 다음 두 번째로 구조되지만, '''자신들의 안전이 확실히 확보된 이후'''에도 승객 퇴선 명령은 내리지 않았고, 해경에 그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승무원 중 1등 항해사 강 아무개는 구조된 이후에 '''자기 소지품인 휴대폰을 챙기려''' 배에 '''다시''' 올라 자기 휴대폰은 챙겨 오면서도 퇴선 명령(선실 옆 객실에 탈출하라고 소리치지도 휴대폰으로 전화하지도)은 끝내 내리지 않았다.
그냥 아무 지시도 없이 줄행랑을 친 것도 아니고, 안내 방송으로 승객들의 발을 묶어놓고 자신들은 안전하게 구조된 이 행동이 어찌나 기이했는지 ,처음 사고소식을 듣고 현장에 출동했던 어선의 선장은 갑판 위에 나온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서, 사고 현장 상황을 배가 '''화물선'''이어서 승선 인원이 얼마 안 되거나 이미 상당수 인원이 구조되었단 상황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긴 '''상식적인 상황'''이라면 이렇게 판단하는 게 무리가 아니다.
안내 방송을 담당한 승무원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안내 방송 담당 서비스직 직원 강 아무개는 사고 최초 시점에서 기운 배에서 움직이면 위험할 거 같아서 '''자기 판단'''하에 첫 안내 방송(#)을 했고, 이후 '''조타실 지시'''에 따라 선내에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을 했다.
그리고 9:30분 이후 선원들이 탈출하여 '''더 이상 추가 지시가 없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엽기적인 것은 이 방송이 '''10시 14분 이후''' 곧 배가 거의 가라앉기 직전에도 나왔다.
이후 고 박지영 승무원이 빨리 빠져나가라라는 방송을 했지만 이미 대대수 승객들이 늦은 후었다. 단원고 학생들과 일반인 승객들은 물이 차오를 때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 마지막 생존자 박준혁 군만이 10시 21분, 마지막으로 겨우 잠수해서 빠져나왔다.'''[28] 다른 사람들은 탈출 시기를 놓쳤다.
이번 참사에서 인명피해가 극대화된 가장 어이없는 원인이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이었음을 생각할 때, 안내 방송 담당자의 책임도 가볍지는 않다. 선박직 승무원은 아니지만 안내 방송을 한 강 아무개는 1년 이상 승무원으로 근무하던 사람이었지만, 선박 안전에 대한 지식에선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일반인만 못했다. 숨진 단원고 학생들 중 일부는 구명조끼=침몰 직전 상황을 인지하고 안내 방송에 의구심을 품었으며, 심지어 대구 지하철 참사[29] 를 예로 들며 '''"승무원이 먼저 탈출하는 것이 아니냐"'''는 예상까지 했다!
영화로 잘 알려진 타이타닉호 침몰사고에서도 처음에는 혼란이 있었지만, 선박 설계자의 이론적 판단으로 배의 침몰이 확실시된 이후에는 승객들을 모두 갑판 위로 올리고, 승객들이 상황을 오판해서 다시 객실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객실의 문을 승무원이 모두 잠갔다. 승객들을 왜 대책 없이 객실에 머물게 했는지는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기울어진 배에서 움직이면 넘어지거나, 움직이는 물체에 부딪쳐 다칠 수 있다는 원론적인 안전 교육 내용은 떠올려서 자기 판단으로 방송을 했지만, '''배가 복원 한계를 넘어가 기울면 결국 침몰하며, 기울기가 기울수록 물이 급격하게 들어차기 때문에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했다. 탈출 지시 여부를 물었으나, 선박직 선원들에게서 어떠한 응답도 없는 상황에서 승객들이 동요하자, 동요를 막기 위해 (자기도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하면서) 방송을 되풀이했다. # 조타실의 추가 지시가 없는 상황에서 아예 안내 방송을 하지 않았다면 승객들은 알아서 각자 살 길을 찾았을 것이고, 이것도 많이 늦긴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가만히 있게 하는 것보다는 구조자가 더 나왔을 것이다.
퇴선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다고는 하지만 시시각각 배가 기우는 것을 몸으로 느꼈을 상황에서, 대기 지시 후 무대응으로 일관한 선박직 승무원들에게 무언가 사고로 인해 신상에 이상이 생긴 것 정도로 자체 판단하고 탈출을 지시하거나, 아니면 차라리 안내 방송을 안 할 수는 없었는지 두고두고 안타까운 부분이다.[30] 게다가 사고 초기 인터뷰 내용을 보면 사고 책임을 의식했는지 안내 방송의 정확한 경위에 대하여 얼버무리는 모습도 보인다.
배식을 담당하던 주방 직원들의 말에 따르면, 이 직원은 '''"성실하지만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고 한다. 안내 방송 담당 강 아무개도 결국 검찰에 구속되었다. # 조타실과 안내 방송 지시의 주체와 경위에 대한 수사 필요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이 직원은 '''대기 지시를 믿고 착실하게 따른 탓에''' 참사를 당한 학생&교사들과 더불어 지시 매뉴얼을 믿고 고지식하게 따른 탓에 결과적으로 '''악마의 방송'''을 해 버린 피해자로 보는 시각도 가능하다. 그렇다고 '피해자'로 정의되기 무리한 면이 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참고.
그 외에 배 안에서 대기하라고 한 추가적인 이유는 과거 세모그룹 시절 너무 일찍 물 속에 뛰어들어 피해자를 많이 낸 사고가 있었기 때문에, 구조선이 올 때까지 배 안에서 기다리라는 것이 청해진해운 회사 내부 지침이었다고 전해진다. 하필 또 이 사고 당시의 승무원 중 하나가 '''이준석'''이었다. 즉 이준석에게 '사고났을 땐 배에 대기시키는 게 안전하다'란 잘못된 경험칙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5.5. 사고 전 메시지
6. 구조 및 수습 과정
6.1. 사고 보도 및 가족들의 반응
해당 오보는 언론인들 사이에서 선정된 '''2014년 최악의 오보'''로 뽑혔다.
구조자 관련 오보가 수정되어 가는 과정[31]
초기에 '단원고 특정 반 인원에 대한 전원 구조'라는 발표가 '단원고 전체 구조'라고 잘못된 오보로 이어졌다. 때문에 사건을 처음 속보로 접한 시민들이 인명피해가 크지는 않다고 잘못 생각하게 만들었고, 오후가 되어서 이것이 오보로 밝혀지고 180명 미만만 구조가 되었다는 정정 보도가 이어지면서 분노 어린 여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저 338명 구조 소식을 일단 먼저 내보내고, 이후 이것의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단원고에서 발표한 거 같다는 엉뚱한 소리를 하였다. 이 내용이 발표될 때는 구조자들이 해경 및 어선을 타고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일개 교육 기관에 불과한 안산 소재 고등학교에서 이런 발표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을 하지도 않고 그냥 보도를 질러버린 것이다.
또는 사고를 속보로 선하면서, 해군함정도 동원대서 구조에 참여하고 있다는 오보를 내기도 하였다. 실제 골든아워 이전의 해당 현장에서는 해경 소속 경비정 1척과 민간 어선들이 전부였다. "대형 여객선 침몰 중-> 당연히 다 동원해서 구조중이겠지?" 라는 추측으로 속보를 낸 것.
이는 정부 고위공직자로 하여금 초기 대응에 혼선을 유발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32]
[image]
2014년 4월 18일 저녁부터 5월 8일까지 팩트TV와 GO발뉴스가 공동으로 취재하며 세월호 사고 현장을 생중계(대부분 시간은 현장 방송을 재방송으로 방송 중)하였다. 이후엔 합동생방송을 종료하고 각자 보도 중이다.
다른 방송은 여기(욕설이나 실신 등 자극성이 심한 장면이 찍힐 경우 방송이 잠시 끊기기도 한다). 아무런 지원이나, 방송사 관계 없이 한 남성이 독자적으로 방송하였으며, 방송 중간에 상황 설명에 대한 코멘트를 하는데 사고자 가족들의 감정이 북받쳐 울음바다가 될 때마다 방송 진행자 역시 울먹이며 방송하고 있어서 안타까움을 더하였다. 혼자 방송하기 때문에 힘든 점이 많다고 토로했으나, 현장에 뛰어들어가 방송하기보다는 사고자 가족들의 상황을 담담히 전하고 싶다고 4월 19일 오후 방송 중에 밝히기도 했다. 차이점은 카메라 각도와 소리가 좀 작고, 계속 현장 상황만 중계한다는 것. 4월 22일 오후부터 방송을 중단하고 현재 서울광장 합동 분향소를 중계하고 있다.
당시 사고자의 가족들은 강당에 모여서 구조 관련 소식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급하게 현장으로 달려온 학부모들이 많은 관계로 현장에 생필품 등이 부족하였으나 각지에서 구호품이 도착하였고, 4월 19일 이후로 개인 구호품은 접수받지 않고 있다.
사고 당시 구조된 사람들은 정신적 충격이 심해서 외부면회가 통제된 상태이며, 특히 단원고 학생들의 정신적 충격이 특히 심각했다. 단원고 학생들 중 구조된 학생들 중에서 거의 PTSD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는 학생도 있었다. # 이에 따라 수학여행을 가지 않은 단원고 1학년과 3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PTSD 검사를 실시했다. # 배에 탑승한 2학년 학생들의 PTSD 증상이 매우 심한 관계로 교육부에서는 학교가 아닌 병원에서 수업을 하도록 조치했으며, 수업과 치료를 병행하기로 했다. #
학부모들은 현장 상황이 언론이 전파하는 상황과 많이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수색이 지지부진한 건 둘째 치고 의지조차 있는 거냐며 학부모들의 불신이 커졌으며, 오죽하면 현장 책임자가 경비정에 탑승하고 있는 학부모들을 통해 상황 파악을 하고 있을 정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장에서 한 학부모와의 인터뷰 내용. 결국 여러 일들로 실종자 가족들은 불신이 커졌고, 같은 해 4월 20일에 청와대로 가겠다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와중에 수학여행 총책임자 자격으로 세월호에 동승했던 단원고등학교 교감이 목을 매단 채로 발견되었다. 경찰에 의하면 학생들을 구하지 못하고 자신만 구조된 것에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것으로, 그동안 단원고 교감은 "나만 구조됐다"며 자책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교감의 지갑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이러한 자책의 감정이 담겨있어, 주변 사람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 또한 단원고 교감이 사고 당시 가능한 한 생존자들을 구하며 배에 늦게까지 남아있다가 탈출했다는 것이 밝혀져 더욱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
버락 오바마의 지시에 세월호 사고 현장 구조 작업에 투입된 주한미군은 '''"아직 포기할 단계가 아니다, 실종자들을 충분히 구조할 수 있다."'''고 말하며 구조 작업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
6.2. 구조 및 수습의 어려움
6.3. 실종자의 생존 가능성
[image]
가능성은 없었다. 위의 사진은 박준혁 군의 사진으로, 박 군은 10시 21여분, 물이 턱까지 차오르는 그 세월호를 생존자들 중 '''마지막으로''' 겨우 빠져나왔다. 그의 증언으로 보면 10시 30분에서 11시 30분쯤에 모든 세월호 방들 그리고 선박 자체 안에 물이 들어왔다는 것.
[image]
이 사진은 세월호 3등칸의 모습. 여학생들이 탄 선미 부분의 대형실들이다. 잡을 것 하나 없는 형태로 되어 있어, 배가 기울었다면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참고로 세월호만 이런 건 아니고 국내 여객선 3등칸은 대개 저런 형태다. 더 자세한 내부 사진은 이 링크[33] 를 참고.
선박 사고 특성상 일단 가라앉은 뒤에는 구조 가능성이 매우 낮아진다는 것, 단순히 사망자 수(실종 포함 304명)로만 따지면 남영호 침몰사고의 326명보다는 적지만, 사망자 중 대다수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 안산시 단원고 학생들이고, 시대가 훨씬 앞섰기 때문에 사회적 파장을 감안한다면 '''한국 역사상 최악의 선박 사고'''로 기억될 가능성이 크다.[34]
상황이 좀 다르지만, 2013년에 대서양에서 선박 전복 사고로 바다 밑에 갇혀 있던 선원이 선내에 남아 있는 공기(에어 포켓, air pocket)로 연명하다 3일 만에 구조된 경우(한국어 기사 / 영어 기사)[35] 도 있기 때문에 최종 결과가 나오기까지 모두 사망했다는 판단은 금물이라는 주장이 구조 초반에는 지지를 얻었다. 에어 포켓 관련 기사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가 생존자를 구조한 잠수부 영상
하지만 에어 포켓 생존자설은 허구였던 것이, 일단 하나하나 설명을 하자면 위의 사례는 비교적 따뜻한 바다였고, 유속도 느리고 무엇보다도 배가 작아서 수색이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잠수부가 비교적 빠르게 3일 안에 진입할 수 있었다. 세월호는 훨씬 큰 배이기 때문에 구조 작업 자체가 훨씬 어려워서 단순하게 비교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그리고 이런 에어 포켓 주장은 이미 천안함 피격사건에서도 이미 전 국민을 3일간 감쪽같이 속인 전력이 있다. 당시 천안함은 두 쪽난 채로 침몰했기 때문에 에어 포켓이 형성될 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언론은 지속적으로 에어 포켓이 형성되었을 경우 내부의 사람들이 69시간 동안은 생존할 수 있으니 69시간이 골든타임이라는 주장을 일관적으로 내보냈다. 그나마 "천안함은 에어 포켓이 형성될 수 있는 수밀격벽 구조이긴 하지만, 자동으로 격실벽문을 닫혀 폐쇄되는 구조가 아니라 수동으로 닫아야만 하는 구조인데 과연 그 급박한 상황에서 문을 닫을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제기되기는 하였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 피해자들이 침몰 직후 거의 바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지자, 그제서야 언론은 "잠수함도 아닌데 물 속에서 어떻게 3일 동안이나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겠는가?" 또는 "수밀격벽은 맞지만 환풍통로가 차단되어 있지 않아 환풍구를 통해 물이 들어오기 때문에 결국 완벽한 수밀 구조는 아니다." 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뒤늦게 보도하였다.
이번 역시 에어 포켓 주장은 여전했다. 차이점은 천안함은 처음부터 두 쪽 나면서 가라앉았기 때문에 수밀이 애초부터 불가능했지만, 온전하게 가라앉은 세월호는 에어 포켓이 존재할 가능성이 분명 존재하기는 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뒤집혀서 가라앉은 세월호는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물 위에 떠 있었다. 이것이 에어 포켓 존재설의 결정적인 증거였다.
에어 포켓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사람은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인데, 그는 내부에 에어 포켓이 존재할 테니 빨리 생존자들을 구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잘 알려진 미디어들 중에서는 오직 JTBC만이 사건 초기부터 실종자들의 생존 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분석하는 전문가의 인터뷰를 보도[36] 했다. JTBC 9시 뉴스에 출연한 전문가들은 에어 포켓은 온몸 전체가 그 공간 안에 있을 때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이지, 몸의 일부는 물 속에 있는데 머리 위에 숨 쉴 공간 약간만 존재하는 형태로는 산소 부족의 문제는 없을지 몰라도 체온이 떨어지기 때문에 결국 생존이 불가능하며, 온 몸 전체가 들어갈 만한 에어 포켓은 형성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37]
기본적으로 세월호는 잠수함이 아니기 때문에 에어 포켓이 존재할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다. 배가 한 시간에 걸쳐서 180도 회전하면서 침몰하는 바람에 골고루 물이 차올랐기에 천장 쪽에 에어 포켓이 생기는 것도 여건상 불가능했다. 생존자들이 촬영한 영상에 의하면 배가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탈출하려 할 때 열려있는 문 쪽에서 물이 빠른 속도로 차오르는 것이 확인된다. 다시 말하자면, 배가 누운 상태에서 문은 천장에 해당한다. 이미 이 천장까지 물이 차올랐던 것이다.
즉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배는 이미 물이 가득 찼고, 심지어 해경이 찍은 영상 중에는 배 안에서 물이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영상까지 존재한다. 이런 정황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마저 착각하게 만든 요인은 세월호의 뱃머리가 떠있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 부분에 에어 포켓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힘을 얻었다. 하지만 이곳은 원래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수가 채워져야 할 공간이었다. 검경합동수사본부의 수사 결과, 세월호는 평형수를 권고 기준의 4분의 1 정도만 채운 것으로 드러났다. 평형수가 부족한 사실을 몰랐던 상황에서 배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이유를 에어 포켓에서 찾게 된 셈이다. #
언론의 에어 포켓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은 국민들과 실종자 가족들을 상대로 한 희망고문과 구조 방식의 왜곡이라는 좋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특히 후자의 경우, 사건 초기에 민간인 잠수사가 창문으로 사망자를 확인한 뒤 창문을 깨고 시신을 인양하려고 했으나 창문을 깨면 바닷물이 들어가 에어 포켓이 사라진다는 논리로 시신 구조를 막은 일[38] , 에어 포켓을 유지하기 위해 공기를 주입해야 한다며 수색에 지장을 준 일 등이 벌어졌다.
최종적으로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뒤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애시당초 실종자들이 당일 거의 사망했을 거라는 사실이 표면화되었다. 설령 배 안에 생존자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공기와 물 등이 충분치 않기 때문.[39] 그동안 잠수사 1명이 순직했을 만큼 수색 작업은 철두철미했지만,[40] 여지껏 단 한 사람도 찾거나 구조하지 못했다. 실종자 중 생존이 보고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7년 가까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실종자는 곧 사망자다.'''
이 같은 에어 포켓에 대한 혼란 때문에 정부나 해경은 더 비난을 받았다. 물론 정부나 해경 입장에서도 억울한 점은 일부 있다. 침몰 후 초기에는 신상철과 황색언론이 왜 에어 포켓 덕분에 생존 가능성이 있는데 구조에 소극적이냐며 희망고문과 동시에 정부를 압박했는데, 몇 달 후 에어 포켓의 존재가 불가능했음이 명백해진 다음에는 신상철이나 황색언론은 사라지고 오히려 정부나 해경이 주도적으로 에어 포켓을 통해 유족들을 희망고문했다는 정반대의 이유로 공격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억울한 점이 있어도 1차적인 책임은 당연히 국가 기관에 있다. 아무리 황색언론이나 신상철 같은 자가 떠들어도, 진실을 확실히 알리고 그에 따른 어떠한 비난도 감수할 책임은 국가 기관에 있다. 물론 사건 당일에 에어 포켓이 없고 사망 확률이 거의 100%라는 사실을 솔직히 말했으면 그 상황에서는 어마어마한 욕을 먹었을 것이다. 그 대신 초기 수색 작업 며칠 동안 무의미한 공기 주입 등으로 사고를 장기화하는 것을 막고, 그만큼 유가족들이 분노나 슬픔을 빨리 가라앉히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부와 해경은 부정적인 현실을 유가족에게 전달하면 엄청난 비난을 받을 것이라는 당장의 걱정에만 몰두한 나머지 에어 포켓 소문에 부화뇌동해 희생자를 구조는 못하면서 사고만 장기화시켰고, 결국 비판의 목소리만 갈수록 커졌다.
6.4. 해경의 발표
23일, 해양경찰은 민관군 합동 다이버팀의 수색결과 에어 포켓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우울한 소식을 전했다.
에어 포켓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발표에 구조 작업을 포기하고, 시신이라도 제대로 회수할 수 있도록 인양 작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성되자, 대책본부는 끝까지 구조한 후 인양 작업을 하겠다는 발표를 급히 내놓았다. 세월호가 침몰한 곳의 정조 시각을 최대한 활용해 탐색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7. 피해 상황
단원고등학교 학생 및 일반인 승객을 포함해 총 476명의 승선 인원 중 172명만이 살아남아 이번 사고의 생존율은 '''고작 36%에 불과했다. 거꾸로 말하면 64%가 사망했다는 뜻이다.''' 참고로 이 사건이 일어나기 '''100년 전'''에 일어났던 타이타닉호 사고의 생존율이 이와 비슷한 32%다. 전체를 통틀어 겨우 36%에 불과한 생존율이 이 사건의 참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적나라하게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이나마의 생존율도 배의 구조를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단골 승객들(화물차 기사 등), 그리고 배를 두고 비겁하게 도망친 선장과 승무원들 때문에 30% 후반대라도 찍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의 생존율은 고작 23%로 1/4도 되지 않는다.
7.1. 경기 안산 단원고등학교의 피해 상황
2학년 학생 325명(남 175명, 여 150명)과 인솔자 14명(단원고 교감 1명+담임교사 10명+비담임교사 3명)이 수학여행에 참가했는데, '''학생 325명 중 75명(남 34명, 여 41명)만이 구조되고 인솔자는 14명 중 3명(교감+단원고 담임교사 2명)만이 구조되었다.''''''정부는 오직 권력의 눈치만 살필 뿐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으며, 믿을 수 없는 언론은 참된 진실을 외면한 채 자꾸 유가족과 세월호 참사의 본질을 왜곡하려고 만든다. 이번 참사를 통해 어른들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세상에 대한 신뢰마저 잃었다. 우리나라는 미쳤다. 이 나라를 떠나고 싶은 마음 굴뚝 같다. 겉만 선진국인 우리나라를 바꿀 수 있게 도와달라.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무엇인지 우리나라를 믿을 수 있도록 이 썩어 빠진 정부를 제발 바꿔 달라. 어른들만 믿다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친구들과 그 가족, 그리고 앞으로 비슷한 사건의 재발로 인해 또 다시 희생될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특별법 제정과 친구들이 왜 자신들의 곁을 떠나게 됐는지 그 진상규명을 밝힐 수 있도록 도와달라. 우리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어린 학생들에게 또 다시 지금과 같은 나쁜 세상을 물려주어 죄를 짓지 않게 도와달라.'''
'''세월호 참사 생존 여학생의 편지'''
참고로 1~3반은 인문계 여자반, 4~6반은 인문계 남자반, 7~8반은 자연계 남자반, 9~10반은 자연계 여자반이다. 숫자가 높은 반으로 갈수록 생존자가 적어지는 이유는, 각 반 본래 정원이 자연계열 반이 인문계열 반보다 적었으며, 자연계열 학급은 배의 안쪽 객실을 배정 받아서 빠져나오기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6반 학생들이 인접 학급에 비해 비교적 많이 생존했는데, 이는 6반 담임 교사가 '선실에 있지 마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안타깝게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7반의 경우는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데, 수학여행 참가 인원 33명 중 단 1명만 살아남아 생존율이 3%가량에 불과했다.
단원고 2학년 학생 중 비행기 편으로 제주도로 가기 위해 김포국제공항에 갔다가 사고 소식을 듣고 급히 안산으로 복귀한 특수반 학생들과 수학여행 대신에 탁구 대회에 참가한 탁구부 여학생 3명(밑의 기타 참고), 그리고 항암 치료로 수학여행에 불참한 남학생 1명[42] 등 13명만 이 사고를 경험하지 않았다.
단원고 수학여행단의 책임자였던 강모 교감(51세, 윤리 전공 교사)은 구조되었으나, 학생들을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취지의 유서를 남기고 4월 18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당시 사고 현장에서 최소 7~8명을 구조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
그런데 후에 공개된 휴대전화 영상으로도 확인되듯이, '''학생들에게 배가 침몰 중이라는 사실과 심각성은 제대로 전파가 안 되었다'''. 애진이의 4월 16일 세월호 탈출기. 그 외에 바다에서 보내온 편지라고 하여 유족들이 피해 학생들의 스마트폰에서 복구된 동영상이나 사진 등을 JTBC에 제공하여 시리즈로 총 8편이 보도되었다.
'''주의'''
: 하단의 영상은 사고 상황에도 사고자들이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순수하게 장난을 치고 있는 모습이 매우 안타깝게 담겨 있으므로 시청 후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다면 시청을 삼갈 것.[43]
단원고 학생들의 '''생존율은 불과 23%'''로 일반 승객(69%)에 비해 턱없이 낮았는데 [44] 이는 일반 승객들은 안내 방송을 듣고 침몰 중임을 직감하고 자체 판단을 해서 생존 대책을 강구했지만, 단원고 학생 대부분은 ''''특히 단원고 학생들''' 가만있으라'고 콕 집어 안내하는 방송, 교감 및 일부 교사들의 안내 방송을 따르라는 지시[45] 로 인해 침몰 직전까지도 학생 대부분이 꼼짝 안 하고 객실 안에서 대기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며, '''설령 그렇다고 해도 해경이 구조 작업을 제대로 했으면 절대다수가 살 수 있었는데'''[46] 너무나 방만하게 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생존 학생 "구조 과정에서 해경 도움 전혀 없었다" 해경들 중 세월호 안으로 들어온 이는 '''단 한 명도''' 없으며, 스스로 탈출하는 이들을 배에 싣거나 헬기에 태우기만 할 뿐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같은 피해자인 일반인 승객의 도움으로 탈출했고, 민간어선이 구한 이들도 수십여명에 이른다. 헬기나 해경에서도 스피커를 이용해 퇴선 명령을 했다면 승객들이 충분히 들을 수 있었는데,''' 그 누구도 '''이를 하지 않았다.
구명조끼를 입고 객실 안에서 대기하던 학생들 중에는 배가 침몰 중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전달 받거나, 인지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희생학생들이 찍어서 남긴 영상을 보면 상황을 잘 파악한 이들도 꽤 있었다. 생존학생들은 '선원들이 전문가들이니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질서를 지키고 말 잘 듣고 있다보면 당연히 해경이 들어와 자신을 구조해줄 것이라 믿었다'고 일관적으로 증언한다. 그러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위험한 것 같다고 여겨 탈출을 택했으며, 상황이 너무 악화되자 너나 할 것 없이 탈출하는 길을 택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서 간발의 차이로 많은 이들의 생사가 갈려버렸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간단한 선박 안전교육조차도 없었던 점을 지적하며, 학교나 청해진해운 측에서 학생들을 집결하여했었다면 수십 명이라도 더 살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는 의견을 표하기도 한다.
인솔교사 14명 중에는 단 3명만이 구조되었고, 피해 교사들 중엔 학생들을 구하려고 갑판에 나왔다가 다시 객실로 들어가 변을 당한 분들이 있었으며, 자살한 교감을 제외한 나머지 2명은 무기한 병가를 내고 학교로 복귀하지 못하다가 결국 교직을 아예 그만두었다고 한다.세월호참사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었고 참사 피해자들에게는 화인처럼 새겨졌을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가만히 있으라'라는 명령의 부당함은 어른들의 말만 믿고 기다린 '착한 바보', 착한 학생의 이미지와 함께 유통되었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나쁘게 말하면 어리석은 어린 희생자의 이미지. 같은 지시에 따랐던 일반인 희생자를 우리는 '착한 바보'라 부르진 않았다. '''그나저나 정말 학생들은 가만히 있었던가. 누군가는 의심했고, 누군가는 가만히 있지 않았으며, 누군가는 가만히 있지 않으면 더 위험해질까봐 그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세월호참사는 피해자들이 가만히 있었기에 당한 사고가 아니라, 저마다 살아내려는 삶의 의지와 도전을 짓밟은 선장과 선원, 나아가 정부가 만들어낸 사건이었다.'''
-생존자 및 사망자 형제자매 구술증언록, <다시 봄이 올 거예요> 중에서.
생존 학생 수는 75명으로 이 중 추가 치료가 필요한 5명을 제외한 70명이 4월 30일 부모와 함께 안산 합동분양소를 찾아 피해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넋을 위로했다. # 의료진은 말렸지만, 분향소가 마련된 시점부터 학생들은 조문을 원했다고 한다.
5월 12일부터는 2학년 생존 학생 75명이 병원에서 퇴원하여 6교시 교과 수업을 안산 내 모 시설에서 받기 시작했다. 치유 수업은 방과 후에 진행하고 있으며, 부모와 함께 합숙하는 형태이다. #
이전에는 실종 상태인 학생들의 사망이 시신 인양으로 완전히 확인되어야 교실에 남은 학생들의 물품을 처리하기 때문에 단원고 교정으로는 돌아가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6월 25일에 생존 학생들이 단원고 교정에 복귀했다. #
그리고 2014년 10월 2학년 황지현 양(당시 17세)을 마지막으로 수습자가 2년 7개월 동안 없었다가 2017년 5월 5일에 사고 해역에서 길이 34cm에 사람 정강이뼈로 보이는 뼈 하나가 수습되었다. 신원 파악을 위해 국과수에 정밀검사를 의뢰했다.
여드레 뒤인 5월 13일 세월호 4층 객실에서 조은화 양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유골의 형태는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으며, 신원 확인을 위해 유전자 감식 중이다. 3년 1개월 동안 바닷물 속에 들어 있었기에 감식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한 달 정도 소요된다.
사흘 뒤인 5월 16일에 세월호 3층 우현에서 또 온전한 사람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단원고 학생의 유골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5월 17일, 5일에 발견된 유골의 유전자 감식 결과 체육교사 고창석 씨(당시 40세)의 뼈로 밝혀졌다. 이로서 단원고 교사 및 학생 사망자는 247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참고로 고창석 교사는 수영 실력이 뛰어난 편으로 알려졌지만, 세월호 사고 때 제자들을 가장 먼저 피신시키고 자신은 끝까지 남았다가 순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유골이 선내가 아닌 사고 해역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유실될 뻔했던 우려를 낳기도 하였다. 고창석 교사는 세월호 참사의 296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이틀 후인 5월 19일, 사흘 전에 발견된 유골의 신원은 허다윤 양(당시 17세)으로 밝혀졌다. 유골 치아 상태를 검식한 결과 10대 여학생의 치아였음이 입증되었고, 허다윤 양이 과거에 치아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유골 속 치아의 흔적과 일치해 신원이 확인되었다. 이로 인해 허다윤 양이 세월호 참사의 297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그리고 5월 25일, 13일 4층 객실에서 발견된 유골의 신원은 당초 추정대로 조은화 양(당시 17세)으로 유전자 감식 결과가 나왔다. 이로 인해 조은화 양이 세월호 참사의 298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단원고등학교 교사 양승진 씨, 남학생 남현철 군과 박영인 군[47] 까지 총 3명이 아직도 수습되지 못했다. 아직도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의 가슴 속에 남은 상처는 아물지 못한 셈이다.
2017년 6월 5일 2주 전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당시 입고 있던 그대로 온전하게 발견된 유해가 이영숙 씨로 밝혀졌다. 이로써 이영숙 씨는 세월호참사 299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2017년 6월 5일을 이영숙씨 유해 발견을 끝으로 나머지 5명은 2018년 10월 19일 세월호 마지막 수색에도 끝내 발견이 되지 않았고, 안타깝게도 단원고 교사 양승진 씨와 학생 남현철, 박영인 군 그리고 일반인 승객 권재근 씨와 권혁규 군은 영구 실종자로 남게 되었다.
7.2. 단원고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이야기
- 1. 최덕하 학생 (향년 18세)
- 2. 정차웅 학생 (향년 18세)
- 3. 남윤철 교사 (향년 35세)
: 교사.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하달한 후 학생들을 대피시키려고 끝까지 싸우셨던 선생님. 사건 이후 하루만에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왔다. 1년 뒤, 그의 모교인 국민대학교는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남윤철 교사가 재학 중 마지막으로 전공강의를 수강했던 북악관 708호실을 남윤철 강의실로 명명했다.
- 4. 최혜정 교사
: 단원고 최초 교사 피해자다. 동국대학교 출신의 새내기 교사였다. 역사교육과 영어교육을 복수전공으로 이수했고, 졸업 전에 역사교사 임용고시에 합격하였으며[49] , 역사교육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 이력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이 될 정도. 졸업 직후 안산 단원고에 부임했다. 여러 모로 우수한 재원이었으며, 장래가 기대되는 신임 교사였으나, 자신의 사랑하는 첫 제자들을 구하느라 정작 본인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향년 24세.
- 5. 전수영 교사
: 교사. 약 1년 근무 중이었던 선생님. 사건 발발 후 자신의 부모님에게 마지막 문자와 전화를 하고 학생들을 지키려다 사망했다. 그리고 60일 뒤, 사랑하는 제자들 옆에 묻혔다. 생존자 말로는 그가 마지막으로 전 선생님을 보았을 때는 전수영 교사는 학생들을 구하느라 너무 많이 지쳐 보였다고 한다.
- 6. 양온유 학생 (향년 18세)
- 7. 생존자 조대섭 학생
- 8. 생존자 박호진 학생
: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가장 나이가 어렸던 권지연 어린이(당시 5세)를 구조했다. 그러나 권지연 어린이의 7살 오빠, 엄마, 그리고 아빠는 끝내 숨졌다. 오빠인 권혁규 군과 아버지는 아직도 차가운 세월호 안에 있다.
- 9. 생존자 박준혁 학생
> “국민보도연맹 사건에도 역사에는 단순히 20만 명이 죽었다고만 쓰여 있는데, 그 20만 명의 사람들의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잖아요. 20만 명의 사람에게는 20만가지의 이야기가 있다... 기억은 언젠가는 사라지잖아요.”
>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다시 봄이 올 거예요, 창비, 2016
- 10. 김동혁 학생
: 문자 메시지로 자기의 여동생에게 수학여행을 가지 말라고 오빠로서 마지막 당부를 했다. 그래서 김예원(여동생)은 '약속을 꼭 지키고 살겠다.' 라는 응답을 했다. 참고로 고인의 여동생도 단원고 학생이었다. #
- 11. 박수현 학생
: 10시 11분에 세월호의 마지막 사진 8장을 보내고 숨졌다. 10시 18분, 박준혁 군이 빠져나오기 2분 전, 해경이 44명의 승객들을 구출할 때 창문을 물체로 깨려고 시도했으나 깨지지 않았고, 밖에 있던 해경들이 보지 못했다. 그리고 30초에서 1분 후, 그가 있었던 방에 물이 들어왔다. 이 학생이 보낸 마지막 사진들은 이후 이준석이 재판 받을 때, 결정적 증거 중 하나가 되었다.
- 12. 안중근 학생
: 장래희망이 야구 선수였으며, 두산 베어스의 팬이었다. 더불어 그의 유니폼 마킹은 '21, 안중근'이었는데, 백넘버 21번은 두산 베어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박철순의 백넘버이자 안중근 군의 출석번호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 유니폼은 두산 베어스가 선수들이 사인한 야구공과 함께 기증했다.[50] 그의 사연은 이 기사에서 더 볼 수 있다.
- 13. A 학생
- 14. 생존자 B 학생
- 15. 고창석 교사
- 16. 허다윤 학생
- 17. 레네미아(어르미) 학생(닉네임)
- 18. 양승진 교사
7.3. 일반인 & 승무원 피해 상황
[image]
세월호 탑승객 중 단원고 학생 325명과 교사 인솔진 14명을 제외한 일반인 승객은 104명이었다.[52] 이 중 생존 인원은 71명으로 약 69%의 생존율을 보였다. # 일반인 승객의 생존율이 단원고 학생에 비해 높았던 것은,[53] 일반인들은 사고 당시 인원 통제를 받지 않고 개별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였고, 성인이어서 사회 경험&자기 판단에 따라 안내 방송을 믿지 않고 각자 살 길을 찾아 행동했던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세월호를 자주 이용했던 화물차 기사들은 30명 중 29명이 구조(#)되었는데, 이들이 세월호를 여러 번 타는 과정에서 배의 문제점을 평소에 느끼고 있었고, 배 구조에 익숙하여 비상 상황에서 초행길일 다른 승객들보다 탈출로를 찾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피해자 중에 단원고 학생들이 워낙 많은 비중을 차지하여 일반인 승객들은 인원 집계 등의 구조 작업부터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과 배려를 받아온 측면이 있으며, 안산에 설치된 합동분향소에서 일반인 승객들은 영정 등의 배치 등에서 배려를 받지 못해 일반인 유족들이 이의제기를 하기도 하였다. # 이들의 요구사항은 세월호 참사의 같은 피해자로서 동등한 대우와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
향후 설치될 세월호 추모공원의 대상에서도 일반인 유족들이 대상에서 제외되어 일반인 유족들이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실정. #
승무원들의 경우 33명 중 23명이 구조되었고, 10명이 사망했다. 이번 사건에서는 선박직 중심의 일부 승무원들의 '''막장 행각'''이 워낙에 큰 공분을 일으켰는지라, 승무원 희생자 또는 실종자의 유가족들은 '''세월호 승무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죄인이 된 심정으로 숨죽이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사고 초기 서비스직 박지영 씨나 양대홍 사무장의 영웅적 일화와 이후 비선박직 승무원들이 선박직 승무원들에게 사고 정황을 전해듣지 못한 채 처절히 버려졌던 정황이 드러나면서 같은 피해자로 보는 상황.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 등은 '''알바라는 이유로 청해진해운으로부터 장례비 지급도 거부당하여''' 청해진해운에게 맹비난이 쏟아졌다.
한편 언론이 입수한 국정원 보고서와 사망한 김영한 민정수석이 남긴 비망록에 정부가 단원고 유족과 일반인 유족을 분리하고 갈등을 조장하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비판을 받고 있다.
사고 발발 후 3년 1개월이 지난 2017년 5월 22일에 일반인 승객으로는 처음으로 이영숙 씨(당시 51세)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다. 유골은 구명조끼를 착용한 상태였는데, 복장 상태가 승선 당시 이영숙 씨의 복장과 같고 옷 속에서 이영숙 씨의 신분증까지 발견됐으므로, 이변이 없는 한 유골의 신원은 이영숙 씨가 맞을 것이다. 다만, 정확한 신원 파악을 위해 역시 유전자 감식 중이다.
그리고 2017년 6월 5일 세월호 선체에서 발굴된 유골 일부를 감식한 결과, 이영숙 씨의 유골이 확인되면서 일반인 희생자로서는 최초로 유골이 수습되어서 299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하지만 권재근 씨, 권혁규 군 부자는[54] 그 이후로도 수습되지 못했고, 1년 4개월 동안 더 수색했지만 끝내 2018년 10월 19일, 마지막 수색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유골이 발견되지 않으면서 세월호에서 내리지 못했다.
7.3.1. 일반인 희생자 이야기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들은 단원고 학생들과는 다르게 수학여행이 아닌 개별여행 및 제주도로 귀농을 하기 위한 목적 등을 안으며 세월호에 올랐었다. 단체여행으로 있던 단원고 학생들과는 달리 일반인 승객들은 개별 목적 및 여행이 대부분이라 각자가 행동하였기 때문에 단원고 희생자들에 비해서 희생자 수가 적은 편이었다.
그 중 미수습자로 알려진 권재근 씨와 아들 권혁규 군은 베트남 출신의 부인과 딸 또는 여동생과 함께 제주도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세월호에 타게 되었다. 사고 전까지만 했어도 제주도에 가서 감귤 농사를 지으며 제주인으로서의 삶을 꿈꾸었던 이들이었기에 기대도 컸었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로 이들은 제주 땅을 밟지 못하고 진도 해상에서 세월호에 갇혀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고 해저에 10년 동안 수장된 상태로 있는 상황이다. 부인은 이미 숨진 것으로 알려졌고, 당시 5살배기 어린 딸만이 유일한 생존자 및 구조자가 되었다. 현재 딸은 권재근 씨의 형님인 큰아버지가 보호자로 보호하고 있는 상태이다.
세월호 선원 중 한 명이자 의인으로 알려진 박지영 씨는 20대의 젊은 선원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청해진해운에 입사하여 세월호 선원으로 승선하게 되었다. 상관인 이준석 선장과 나머지 선원들이 승객들을 버리고 도망갔던 와중에도 자신은 끝까지 승객들의 대피를 유도하였으며, 동생들과도 같은 단원고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나눠주고 학생들에게 먼저 탈출하라고 지시하는 등 선장과 나머지 도망간 선원들과는 다르게 선원의 본분을 지키며 승객 일부를 구조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끝내 본인은 세월호에 탈출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희생되어 싸늘한 시신이 되어있었다. 이 당시 박지영 씨의 나이는 한창 젊은 22세였다.
박지영 씨와 함께 세월호 사무장으로 있었던 양대홍 씨는 아이들을 구하러 가야 한다며 부인과의 마지막 통화를 하고 난 후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끝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상관인 선장과 나머지 선원들이 승객들을 버리고 도망갔던 와중에도 동료인 박지영 씨와 함께 승객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가족들에게도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사망하였다.
세월호 침몰 때 민간 잠수사로 활약했던 이광욱 씨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목표를 삼으며 인도선을 세월호에 연결하고자 바다에 입수하게 되었지만, 잠수 중 호흡곤란을 앓게 되었다가 끝내 숨지게 되었다.
청해진해운 커플 사원으로 알려진 정현선, 김기웅 씨는 결혼을 앞두고 세월호 승무원으로서 승선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세월호 침몰 당시 무사히 탈출하게 되었지만, 배 안에 갇힌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해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갔다가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고 두 사람이 모두 숨지게 되었다. 두 사람의 희생은 한 번 세월호를 빠져나오고 나서 완전히 도망친 상관인 선장과 나머지 동료 선원들과 대비되는 사례이기도 하였다.
미수습자 중 최초로 일반인 신분으로 유골이 발견된 이영숙 씨는 단원고 학생들과 함께 세월호 한 배에 탔던 일반인 승객이었다. 2014년 4월 15일 밤 단원고 학생 및 나머지 일반인 승객들과 세월호에 승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진도 해상을 항해하던 세월호가 침몰하게 되었을 때 이 씨는 그 당시 세월호 3층 선실에 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끝내 세월호 선내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세월호 안에 3년 동안 해저에 수장된 상태로 있었다가 2017년 5월경에 신원미상의 유골로 발견되었고, 6월 5일 유골 감식결과에 따라 이영숙 씨의 유골이었음이 확인되면서 세월호 299번째 사망자이자 일반인 승객으로는 최초로 미수습자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7.4. 진도 및 안산 지역 피해 상황
사고가 난 지역인 진도 해역에서는 사고 직후부터 인근 어민들이 구조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어 귀중한 생명을 살렸으나, 어민들로서는 사고 때문에 정상 조업을 할 수 없어 나날이 경제적 피해가 누적되고 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구조 활동에 우선적으로 전력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 현지 주민들의 속앓이가 깊어지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월호에서 흘러나온 기름 때문에 피해는 어업조업 이외에 인근 양식장까지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아직 실종자 수습 작업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기름 방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팽목항에 실종자 가족 및 구조 인원이 들어서면서 종래 인근 섬으로 운항했던 여객 운항이 하루 두 차례로 줄어 낙도 주민들 또한 큰 불편을 겪고 있는 상황. #
이번 사고로 피해 인원이 가장 많은 안산 지역의 경우 피해자들이 모두 같은 학교이자 그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관계로 해당 지역에는 인명피해를 입은 가정이 집중되어 있고 이웃, 친족 등의 혈연, 지연 관계로 연계되어 있어 지역적, 집단적으로 안산시는 심각한 트라우마가 우려되는 상황이다.[55]
마침 평준화 된 이후[56] 라 집 가까운 고등학교를 가게 된 상황이여서, 심한 경우 한 아파트에서 8가구의 피해자가 나온 경우도 있다. 특히 단원고 인근인 고잔1동과 와동은 두세 집에 한 집 꼴로 초상(初喪)이 난 상태라 동네 분위기 자체가 침울한 상태이다. 그리고 단원중 후배들도 단원중을 나온 단원고 선배들이 사고를 당해서 슬퍼했다. 단원중도 단원고처럼 우울하고 침통했다.
전국적으로도 그렇지만 진도와 안산 두 지역은 특히 소비심리 및 경제 활동이 극히 위축되고 있고, 대형사고의 부정적 이미지가 지역 이미지에도 악영향을 미칠까 우려하고 있다. 국가에서 소기업, 상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공제 사업만 해도 안산, 시흥 지역에서 폐업 해지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늘었으며, 이는 사업 출범 후 유례 없는 일이라고한다. 100일이 경과하며 더욱 늘어나고 있다.
진도, 안산 두 지역은 4월 20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으며 진도, 안산의 경제 활동 회복을 위하여 금융지원 등의 추가 대책 마련이 이루어지고 있다. 안산시에서는 피해 유족에 대한 생활안정자금을 지원해주고 있으며, 피해 단원고 학생들의 유품(옷가지, 책, 책상)을 유품 정리 신청받는 대로 무상으로 수거하여 시내 소각장에서 무료로 소각해주고 있다. #[57]
7.5. 그 밖의 피해 상황
[image]
이 사건의 큰 여파로 '''배를 이용한 수학여행, 나아가 수학여행 자체가 금지'''되었으며, 이 때문에 국내 단골 수학여행지로 꼽히는 제주특별자치도, 경주시, 설악산 등의 관련 업체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어 해당 지역 경제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관광, 전세버스 업체도 마찬가지로서 4월 무렵이 수학여행으로 이들 업체의 성수기인 점을 감안하면 올해 영업은 거의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 결국 단순한 사고 여파로 감수(甘受)하기에는 연쇄적 피해가 현저하자, 안전을 전제로 수학여행을 재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
특히 수학여행 관련 업체'''만'''이라기보다는 사고 이후 관광업계 전반이 꽤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사고 시일이 지나면서 조금 경황을 둘러볼 여유가 생기면서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다양한 지원책을 내놓고 있는 상황.
국가적 차원에서 세월호 사고 수습에 들어가는 비용은 직접피해보상액만 최소 5500억(#)에 달하며, 직간접적 비용을 합친 총비용은 2조 원에 달한다는 견해(#)까지 있다. 도주 및 책임회피 중인 유병언 일가를 붙잡아 구상권을 청구한다고 하더라도 이들 비용을 모두 커버하기에는 모자랄 수밖에 없으며, 국세로 충당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들이 있는 재산을 순순히 내놓을 위인들도 아니라서... 처리 과정에서도 지난한 법적 절차와 더불어 온갖 추하고 짜증나는 꼴을 보게 될 가능성이 크다.
더불어 세월호 사건 여파로 파생되는 각종 사안이 사회 전 분야로 확산되고 있으므로, 직간접으로 예상치 못하는 분야의 사람들이 불이익[58][59] 을 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
[image]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국민에게 절망감을 주었다. 어른들의 말,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을 잘 지키는 바람에 250여 명의 학생들이 어이없이 수장당한 것을 보며 단원고 피해 학생들과 그 또래의 아이를 가진 부모들, 혹은 초중고 교사 중에는 방송을 보면서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당시 고2 학생들은 "'''나도 수학여행 가서 죽는 거 아니야?", "언제부터 우리가 학교를 목숨 걸고 다녀야 했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8. 수사 상황
[image]
검찰, 해양경찰에 의해 진행된 수사로 선장 이준석과 항해사, 조타수, 기관사 등 배의 운항과 관련된 선박직 직원 15명은 전원 구속 수감되었다. (주)청해진 해운의 물류부장 김모와, 물류팀장 김모, 청해진해운 해무 담당 이사인 안모, 그리고 김한식 대표이사도 구속되었다.
세월호의 구명정 정비업체인 '한국해양안전설비'의 대표도 구속되었다. 구명정이 펴지지 않는 불량 상태였는데도, 양호하다고 허위로 기재한 검사 결과 보고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유병언 회장의 측근인, (주)아해 전 대표 이강세, 오경석(53세) 헤마토센트릭라이프연구소 대표, 김동환 (주)다판다 감사(48세)도 구속되었다.
유병언의 장남인 유대균(44세)는 검거 시 일계급 특진 조건을 걸고 A급 지명 수배가 되었다. 그의 자택에 체포 영장을 들고 강제 진입했지만 유대균은 없었다. 그러나 7월 25일, 경기도 용인시에서 검거되었다. 유병언의 장녀 유섬나가 5월 말, 프랑스에서 인터폴에 의해 체포되었다. 당시 인터폴은 이미 고인이었던 유병언을 수배 중이었다.
미국에 체류 중인 유병언의 측근 김혜경 한국제약 대표, 김필배 전 문진미디어 대표에 대해서는 여권 무효화 조치와 함께, 체류자격 취소를 미국 국토안보조사국(HSI), FBI에 요청했다. 관련 기사. 미국 국세청(IRS)이 "미국 구원파교회 헌금 유용 의혹"제보와 신고, 각종 고소·고발이 있어 자체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련 뉴스.
8.1. 배 운영과 승무원 관련 논란
우선, '''4월 17일 시점에서 수사본부에서 조사 중인 혐의'''는 다음과 같다. 선장은 만약 배가 급회전으로 넘어진 게 사고 원인일 경우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가 있고,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선박법 위반 혐의도 추가된다. 다른 승선원들은 선장 지시 없이 선박을 떠났거나 인명 구조 조치를 하지 않았다면 선원법 위반 혐의가 있다. #
불과 11일 전에 같은 회사-청해진 해운의 배에서 사고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 이번 사고와 연관성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은 상황.
해경의 발표에 따르면, '''사고 당시 본래의 선장이 휴가 중이어서 다른 선장인 이준석이 대리 운항을 했다고 한다.''' # 하지만 선장의 대리 운항은 자격 조건만 되면 흔히 있는 일인지라 무조건 대리 운항 자체를 나쁘게 보는 건 지양해야 한다. 또한 이후 이준석 선장은 원래 세월호와 오하나마호를 오가며 전문적으로 대리운항을 했던 사람이라는 증언이 나오면서 선장으로서의 능력과 경험은 충분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능력과 경험은 충분했을지라도 책임자로서의 책임감이 마이너스였다. 책임감 있게 대피 방송과 승객들의 탈출을 지시했다면 299명의 사람들이 비참하게 물 속에서 사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한 달에 절반은 '1선박 2선장' 지휘체계 산으로 갔던 세월호라는 증언이 나와, 이준석 선장은 대리운항이 필요할 때만 탄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서 한 달에 15일은 세월호를 탔던 전문가라는 점이 입증되었다. 원래의 선장은 신모로, 신 선장은 배의 복원성 문제와 과적 문제를 충분히 인지하고 평상시에도 계속 본사와 인천항만공사에 문제 제기를 하였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고 당일 휴가를 냈다는 설이 있다. 신 선장은 사건 초기부터 JTBC와 인터뷰를 하면서 적극적으로 세월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반해 이준석 선장은 청해진해운에서 퇴직한 후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다시 계약직으로 채용된 대리 운항 전문 선장으로 평소 회사에 고분고분했다고 한다. 이는 이준석 선장이 구원파 신자이기 때문에 특혜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막상 재판에 들어가니 원래 선장인 신선장이 "나는 수습 보조 선장일 뿐 원래 선장은 이준석 선장"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선장은 사건 초기부터 언론사와 인터뷰를 적극적으로 했었는데, 그때부터 자신의 보조선장 설을 일관되게 주장하면 모르겠지만 재판에 와서 처음 주장하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다만 신선장 말이 사실이라면 왜 잉여인 이준석 선장이 평상시에도 신선장과 함께 배를 탔는지 의문이 해결되기는 하다. 처음 일본에서 세월호를 몰고 왔을 때 이준석이 선장이었고, 신선장이 1등항해사였다. 이 둘은 오래전부터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사건 초기 이준석은 사고 원인을 묻는 질문에 "암초 충돌은 아니다. 갑자기 가라앉았다. 하지만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다"고 답했다.[60] 이준석은 부상을 당해 옆 침상에 누워있던 경기 안산시 단원고 학생들이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해 얘기를 나누자 귀를 세워 듣기도 했다. # 자신이 선장이냐고 묻는 질문에 나는 선장이 아니라 선원이라고 발뺌했던 정황까지 드러나면서 도의적 책임 논란에서 빠져나오기는 힘들어 보인다. # 또한 꼬리뼈에 부상을 입었다며 치료를 원했지만, 병원에서는 이상 없다고 돌려 보냈다. 이후 재판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부상을 호소하는 등 계속해서 면피성 발언만 하고 있다.
사건 초기에는 이준석 선장이 상의는 스웨터를 입고 하의는 팬티만 입고 탈출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방송 화면 상으로는 상의는 입고 있는데 하의는 담요로 두르고 있거나 바지를 갈아입는 것으로 보여, 온몸이 물에 빠지지 않고 하체만 젖은 채 나온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물 한 방울도 젖지 않고''' 안전하게 퇴선한 것이 확인되었다. 그 이유로는 3가지가 꼽힌다.
첫 째로는 선원인 사실을 숨기기 위해 급히 선원복을 벗고 탈출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다. '''다른 승무원들도 사복으로 갈아입고 탈출했으니''' 일견 합당해 보인다. 그러나 모두가 이준석 선장처럼 팬티만 입고 탈출한 것은 아니다. 사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승객들이 살려달라고 외치는 객실을 지나서 옷을 갈아입고 유유히 돌아온 선원도 있는 데다가, 조타실에 모여 있다가 탈출할 때까지 한 시간 가량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서두르다 그렇게 되었다기보다는 갈아입을 사복이 없었다는 쪽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또한 사복을 입고 있어 선원인지 모르고 구조했다는 해경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언론이 그대로 받아 적다 보니 그런가 보다 했지만, 해경에서 찍은 구조 순간의 영상을 보면 다른 선원들은 작업복을 입고 있어서 누가 선원인지 알 수 있었다. 즉 모든 선원들이 사복을 입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결과론적이지만 선원복을 입고 있어도 해경은 조타실부터 배를 붙여서 선원부터 구조했을 것이다.
둘째로는 술에 취해 늦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옷을 제대로 갈아입을 시간이 부족했을 거라는 추측이다. 이준석 선장 본인은 사고 당시에 대해 담배를 피우느라 자신이 조타실을 잠시 비운 동안 배가 급격히 기울어 조타실로 급히 돌아왔다고 진술했으나, # 선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사고 전까지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평상시에도 술에 자주 취해 있었고, 항해 기간 내내 술을 마시고 늦잠을 자느라 식당에 늦게 나타나 아침을 혼자 먹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고 당일 그는 식당에 늦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고, 이로 미루어 볼 때 줄곧 늦잠을 자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경우 조타실을 지켰다는 진술은 당연히 거짓이다. 그러나 해경에 의해 구조된 직후 해경이 선원이냐고 묻자 아니라고 거짓 대답하는 바람에 음주 측정이 이뤄지지 않아 그의 음주 여부는 추측에 그친다. 다만 이 선장이 술에 취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300명이 물에 빠져 죽는 순간을 텔레비전으로 시청하며 태연하게 곰탕에 밥 말아 먹거나 방송사의 카메라들 앞에서 유유자적하게 걸어다녔던 등의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이 어느 정도 아귀가 맞는다.
당시 여러 증언들을 보면 사건 발생 이후, 사건을 직접적으로 일으킨 3등 항해사 박한결(여성, 당시 25세)는 구석에서 울고만 있었고[61] 실질적으로 1등 항해사가 지휘를 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준석이 술에 취해 지휘 능력을 잃은 것은 선장실에 가서 바지도 못 갈아 입을 정도로 몸을 가누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는... 전기세가 아까워 간단히 설명하자면 필리핀 여가수랑 방에서 검열삭제를 하다가 갑작스러운 사고에 놀라서 팬티만 입고 도망쳤다는 것인데, 필리핀 여가수의 남편도 배에 함께 탑승해 있었고, 특히 여가수는 선원들이 자신들을 구조할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기 때문에 이쪽은 언론사들이 기사의 클릭을 유도하기 위해 지어낸 낚시용 루머로 보인다. 그래도 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이들은 조타실 바로 뒤에 객실이 있어서 선장과 함께 1차로 구조되었다. 애초에 필리핀 여자 가수라는 이유로 문란하거나 돈을 위해 몸을 팔 것이라고 넘겨짚는 자체가 인종차별적인 매우 저열한 발상이다. 필리핀 정부한테 직접 항의 먹어도 찍소리도 못할 수준.
사고 시각 당시 배의 운항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은 선장인 이준석이 아니라 20대의 3등 항해사인 25세의 여성 박한결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 사건 초기 대부분의 언론들은 왜 경험 없는 3등 항해사에게 조타실을 맡겼냐고 집중적으로 추궁했고, 심지어 키를 잡은 것이 조타수라는 점에 놀라 비난했다. 하지만 이것은 선박의 운전대를 선장이 파이프 담배를 물고 운전한다고 생각하는 막연한 이미지에서 생긴 오류다. 일반적으로 선장은 조타실, 기관실은 물론 탑승객들까지 배 전체를 관리하고 1, 2, 3등 항해사들은 조타수 C, B, A와 각각 짝을 지어 시간대별로 3교대로 운항하는 것이 전 세계 표준이다.[62][63] 그렇기 때문에 사건 초기에 전문가들은 이런 운항 구조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언론에서 설명 하였다. 그러나 이후, 해경 조사에 의하면 위험 지역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선장이 지휘를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 부분을 고려하면 완전히 제대로 운항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세월호의 매뉴얼에는 이러한 규정이 빠져 있다고 한다.
문제가 되는 3등 항해사 박한결은 총 경력 1년 남짓에 해당 노선의 운항 경험은 4개월 정도에 지나지 않은 초짜라는 부분도 언론에 의해 집중적으로 추궁되었으나, 항해사 경험자들에 의하면 항해사들은 이미 해양대에서 실습을 통해 수많은 경험을 쌓는 데다가 하루에 8시간씩 운전하니 1년이면 100일만 운항해도 800시간을 조함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경험면에서는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 데다가 3등 항해사는 조타수 중에서 가장 경험이 많고 노련한 조타수 A(12년 경력)가 짝지어져 보좌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언론에서 문제삼고 있는 또 다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원래대로라면 국내에서 2번째로 조류가 센 맹골수로는 시간상 1등 항해사가 조함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사고 전날 안개로 인해 출항이 늦춰져 3등 항해사가 조함하는 시간에 맹골수로를 통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항해사 출신들의 인터뷰에서는 해당 시간에 3등 항해사가 조함하는 것은 전 세계 공통임으로 큰 문제가 없으며, 그보다는 위험한 수로에서는 선장이 조타실에서 직접 조함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즉, 경험이 적은 3등 항해사가 하필이면 맹골수로에서 조타실을 맡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위험한 항해 구간에서 선장이 조타실에 없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선장이 조타실에 있었을 경우 항해가 문제 없이 이뤄졌을 거냐면... 많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세월호는 맹골수로에서뿐만이 아니라 원래 심하게 흔들렸다고 한다. 거기서 사건 첫날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에서 당시 맹골수로가 안개도 없고 호수 같이 잔잔했다고 증언했다. 결국 1등 항해사가 조함했느냐 3등 항해사가 조함했느냐, 혹은 선장이 조타실에 있었냐 없었냐는 문제의 핵심이 아닐 수도 있다.
3등 항해사 다음으로 문제가 된 것은 12년 경력의 55세의 조타수 A 조모였다. 조모는 평상시에도 험하게 운전해왔고, 이전에 조타와 관련된 문제를 일으켜 일시적으로 조타 금지를 당한 전력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성격이 험해 직원들과 불화가 심했기 때문에, 이번 항해를 마지막으로 오하나마호로 보내지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64] 항해사 출신 전문가들은 왼쪽으로 5도 틀거나 오른쪽으로 5도 틀라고 항해사가 지시하면 그대로 따르는 것이 조타수이기 때문에 경험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듯하다. 작은 상선의 경우는 조리원이 조타수도 하는 등 무경력 초보자도 조타를 한다고 한다.
사건 초기에는 세월호가 과적 상태인 데다가 평형수도 1/4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사고 당시의 항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조타수가 키를 135도로 무리하게 꺾는 바람에 사고가 발생했다고 알려졌다. 조타수 조모는 구속 당시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키를 많이 꺾기는 했지만 실제로 꺾은 것보다 조타기가 더 많이 돌아갔다고 증언해, 이때에는 선박 조함 장치에 결함이 있어서 사고가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정설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후에 세월호 항적 기록이 복원되면서 키는 135도가 아니라 45도밖에 꺾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65] 과적 사실과 평형수 문제도 연이어 밝혀지면서 조타수의 평상시보다 조타기가 더 돌아갔다는 말은 면피를 위한 위증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여기에 조타수 조모가 자신의 막내딸 뻘인 3등 항해사 박모와 사이가 좋지 않아 사고 당일 아침에도 두 사람이 다투는 것을 목격했다는 탈출 선원들의 증언이 나오면서, 일부 언론에서는 조타수 박모가 3등 항해사 박모의 지시를 듣고도 일부러 조타기를 더 무리하게 꺾었을 가능성도 점치고 있는 판국이다.
그러나 3등 항해사 박모가 아직까지도 검찰 조사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어 현재로서는 위의 이야기들은 모두 추측일 뿐이다.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는 45도든 135도든 무리하게 꺾은 게 문제가 아니라 세월호 자체의 복원성이 없었던 게 문제라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세월호는 과적 상태인 데다 평형수도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에서도 얼마든지 가라앉을 위험성이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실시한 시뮬레이션, 그리고 인양한 세월호의 조타 시스템 유압 계통에 이상한 부분이 발견되었다. 그 부분의 고장으로 타가 완전히 돌아갔고, 원래라면 그래도 괜찮아야 했지만 과적과 화물고정 불량, 지나친 평형수 빼기로 불안정했던 세월호가 기운 채로 항해하다 해수가 유입되고 돌아버리면서 배가 누웠다는 추측이 나왔다. 방향타의 방향 자체는 유압을 잃어버린 다음에는 조류의 흐름과 인양시 외력이 작용하는 대로 움직인다고 한다. 침몰 시 사진, 침몰 후 스캔화면, 인양시 사진에서 모두 달랐다.
배가 침몰되는 와중에도 선장 및 항해사들에게 조기 탈출 의혹이 있는 점과 승객들에게 ''''객실에 들어가있으라''''는 방송을 내보낸 점과 승무원이 도망갔다는 점에서 대구 지하철 참사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 또한 참사의 큰 원인이 선장(기관사)의 조종 과실인 것도 있다. 지하철 참사 당시 정작 불이 나기 시작한 안심행 1079호보다 얼마 뒤 도착한 반대편의 진천행 1080호에서 사상자 대부분이 발생하였으며, 1080호는 '''전 역인 대구역에서 출발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출발했다'''. 진천행 열차가 중앙로를 향해 출발하지 않았다면 대구역을 통해 승객들이 빠져나가 사상자가 크게 줄었을 것이다. 그리고 생존자 한 명이 말하기로는 배에 탔을 때 비상대피 방법에 대해 전혀 설명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배에 기울기 시작하면서부터 실질적인 지휘는 1등 항해사 A가 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선박의 항해직은 비정규직 선장 이준석, 경험 많은 1등 항해사 A 강모, 그날 처음 세월호를 탄 견습 1등 항해사 B, 2등 항해사 오모, 3등 항해사 박모로 이뤄져 있었는데, 선장은 현재로서 추정되는 바로는 술에 취한 채 잠들어 있느라 지휘 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때문에 차선임자인 1등 항해사 A가 지휘를 맡은 듯하다. 선원들이 책임 회피를 위해 입을 맞춘 정황이 포착되어 정확한 내막이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그 실질적인 지휘를 맡은 1등 항해사도 다른 항해사들과 조타수들이 조타실에 모여 사복으로 갈아 입고 구명조끼까지 입은 채 구조를 기다리는 동안, 객실 사무장에게 구조선이 없어 위험하니 객실에서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린 이후 객실 승무원들이 10여 차례 무전으로 탈출 여부를 물었으나 답변을 하지 않은 점을 볼 때 딱히 지휘랄 것을 한 것 같지는 않다.[66]
1등 항해사로부터 객실 내에 대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게 아니라 객실 승무원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지금 밖으로 나가면 위험할 것 같아 전원 객실 내에서 대기하라고 자의적 판단 하에 방송한 후 위로부터의 추가 지시를 기다렸으나 끝내 지시가 없었다는 약간 다른 버전의 기사도 존재하지만, 어쨌든 탈출한 승객들은 공통적으로 객실 직원들이 지시를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무전기에서 답변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재판 중에 선장인 이준석이 2차례에 걸쳐서 승객들은 객실 내에 있으라고 지시했다는 말이 나왔다. 선장, 1등 항해사, 객실 직원이 서로 자신이 생각해서 방송을 했다고 하니 혼란스럽다. 어쩌면 10여 차례 방송을 했으니 극 초기에는 1등 항해사가 방송하고 이후 술 취한 선장이 뒤늦게 나타나 2차례 방송 지시를 하고, 이후 객실 직원이 무전으로 어떻게 할지 지시를 묻는데 답이 안 오니 자신의 판단에 의해 객실에 있으면 안전할 것 같아서 배가 가라앉기 직전까지 방송한 걸 수도 있다. 다만 사건 초기엔 여자 목소리로 모두 배 밖으로 뛰어내리라는 방송이 가라앉는 순간 나왔다고 해서 또 다른 객실 직원 박지영이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에 대한 후속 기사를 찾기 힘들다. 월간조선 2014년 6월호에는 객실 직원 박지영이 9시 35분 경비정 123정이 도착한 이후 3층 안내데스크 부근에서 큰소리로 "모두 탈출하라!"라고 소리 질렀다고 하는 정도.
이 일련의 사태에는 선장 외의 다른 선박직 직원들에게도 책임이 크다. 침몰시에는 대피 방송이나 통신, 구명정, 의료지원 등 각 직군이 맡아야 할 업무가 있는데도 아무도 그것을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사고 직후 한 조타수는 "객실에 어떻게 가냐. 정말 이 사람들 희한한 사람들이네"라는 태도를 보이며 오히려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였다. 사실 이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이다. 300명 규모의 단체 승객이 있다는 것을 승무원이 몰랐을 리 없다. 그냥 단체 여행단 대표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알리면 된다. 전화번호를 모르면 114를 경유해 단원고 교무실에 물어보면 된다. 분명한 상황판단 미숙이다.
다만 그는 이 인터뷰에서는 퇴선 지시를 선장이 내렸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1등 항해사 A와 선장 중 누가 당시 지휘를 하고 있었는지 불분명한 점이 있다. 이들이 승객과 객실 직원들을 버려두고 도망친 사이, 객실 직원들은 선장 등의 탈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계속 무전을 통해 탈출 여부를 물었으나 당연히 지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객실 승무원인 22세의 '''여성 승무원 박모가 자신의 독단으로''' 전체 방송을 통해 전부 밖으로 뛰어내리라고 방송하면서, 이때가 되어서야 백여 명의 승객들이 밖으로 뛰어내려 목숨을 건졌다. 이 시점은 선장 등 선박직 선원 15명 전원은 이미 탈출하여 팽목항으로 가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객실 직원이 직접 판단하여 탈출 방송을 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박모인지는 아직 의문이다. 왜냐하면 박모를 포함 객실 직원들의 거의 다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0여 차례 객실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말했던 객실 직원은 최후의 순간 기적으로 탈출했고, 이후 여자 목소리로 탈출하라는 방송이 나왔다고 하니 정황상 박모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
한편 위에서 언급된 선장과 항해사 등의 8명 외에도 기관실에는 기관장 등 7명의 직원들이 있었다. 이들은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선장의 어떠한 지시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관장의 판단에 따라 배의 엔진을 끄고 탈출한다. 일각에서는 그들이 배의 상황을 알 수 없는 배의 가장 밑바닥, 기관실에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을 때까지 남아 있다가 위기의 순간에 어쩔 수 없이 배를 버리고 탈출한 것이 아니냐고 그들을 바라보았고, 기관실 직원들 또한 이런 시각에 힘입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언론과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배가 침몰할 때 보통은 엔진을 끄지 않는다는 점이다. 배가 침몰하는 경우, 조금이라도 수심이 낮은 곳에서 배가 좌초되어야 탈출 및 구조에 유리하기 때문에 기관실 직원들은 침몰시에도 각자 맡은 곳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직무를 팽개치고 자신들만이 아는 통로를 이용하여 탈출하였다. 이 선원용 통로는 배의 가장 밑바닥인 기관실에서 배의 최상단에 위치한 조타실까지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통로로, 이곳을 이용한다면 배의 바닥 쪽에 있던 승객들을 구조할 수 있었지만 이들은 전혀 구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탈출 중 객실 직원들인 조리원 2명이 돈까스를 튀기다가 배가 기우는 바람에 부상을 입고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척 했다는 증언마저 나오고 있다. 이후 해경 123정이 도착하자 이들은 제일 먼저 도망쳤다. 선장이 가장 먼저 도망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기관실 직원 7명이 선장 등 8명조차 버린 채 제일 먼저 도망쳤고, 그 뒤 두 번째로 선장 일행이 도망친 것으로 밝혀졌다.
언론에서 문제를 삼는 부분은 정규직인 기관장이 비정규직인 선장을 평상시에도 무시하였고, 이번 역시 어떠한 지시 없이 독단적으로 탈출했다는 사실이다. 세월호는 항해사 이하 선원들이 대부분 외국인인 다른 선박들과는 달리 임금을 적게 주면서도 착취할 수 있는 구원파 출신들을 선호하였다는 증언이 있고, 임금을 적게 주기 위해 15명의 선박직 선원 중 단 4명만 정규직이었다. 심지어 퇴직 후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던 이준석을 불러들여 270만원이라는 턱없이 적은 돈을 주면서 비정규직 선장을 맡겼다(정규직 선장은 400만 원). 이 때문인지 이준석은 항해 중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방에서 자거나 술을 마시면서 보냈고, 실질적으로 기관장이 선장 노릇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원래 선장이었던 신 선장이 운항할 때도 이준석 역시 배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한 배에 지휘자가 2명도 아니고 3명인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15명의 선박직 선원들은 기관장을 중심으로 한 기관사 7명이 먼저 해경 123정을 타고 도망가고, 1등 항해사 A를 중심으로 한 선원 8명은 2차로 해경 123정을 타고 탈출하였다. 이들은 선원복을 벗어버리고 선원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이름까지 속이고 다 함께 팽목항으로 가서 자원봉사자들이 주는 곰탕을 맛있게 먹은 후 후식으로 커피까지 받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선원들은 자신은 해경과 함께 구조를 도왔다거나 탈출을 지시하는 방송을 했다거나, 5도밖에 꺾지 않았다고 하거나, 잠깐 담배 피우러 나왔을 뿐 조타실을 비운 적이 없다는 등의 밑도 끝도 없는 면피성 거짓말을 계속 쏟아내고 있다. 이들은 이미 외신을 통해 세월호의 악마로 규정되었다.
일반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언행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바, 이들이 전원 구원파의 신도들이며 이 교리에 의해 이런 일을 저지른 건 아닐까 의심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즉 자신들은 이미 구원받았으니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 알 바가 아니라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이에 대해 구원파측에서는 선원들 대부분은 구원파가 아니라고 하지만 이 부분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다만 이준석 선장의 아내를 포함한 주변인의 인터뷰에 의하면 이준석은 술을 좋아할 뿐 광신교도적인 면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고 한다. 물론 주변인 인터뷰이니만큼 걸러 들어야겠지만, 그냥 자기들끼리 아는 사람이므로 다른 사람들의 목숨보다 자신들의 유대 관계를 우선해서 탈출했을 가능성이 높다. 선장과 관련 직원들의 탈출은 그냥 부도덕한 책임 회피이고, 사이비 종교랑 엮는 이상한 선동성 글들은 이들을 악마처럼 묘사하는 병맛 글들이 넘쳐나니 주의.
일반직(객실) 직원 14명은, 선박직 직원 15명과는 다른 영웅적인 행동을 보였다. 사무장, 사무원, 조리원 4명, 아르바이트 불꽃놀이 담당(아르바이트는 총 6명) 등으로 이루어진 14명의 객실 직원들은 무려 10명이 사망하고 4명만이 생존하였다. 이 중 조리원 1명, 알바생 1명등 2명은 양사무장이 구해주어, 양사무장의 의로움에 대해 증언 하였다.) 선장 등 책임자에게 조기 탈출 의혹이 있는 와중에, 23세의 여승무원 박지영은 끝까지 남아 승객들에게 구명조끼를 나눠주었는데 한 여고생이 왜 언니는 탈출 안 하냐고 묻자 "선원은 제일 마지막이다. 언니는 친구들 다 구해주고 나중에 나갈게." 라는 선원로서의 당연하나 선박직 직원등은 안한 영웅적인 모습을 보이고 끝내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 안내데스크에서 승객들에게 모두 탈출하라고 외친 것도 박이고, 모두 배 밖으로 뛰어내리라고 방송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박모이고, 다친 사람들에게 휴지를 건네주고 편의점 출입문을 잡아주어 탈출을 도와준 것도 박이다. 더군다나 박지영 씨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자신의 목숨은 다 포기하고 구조 활동을 했던 셈. 사람들는 박지영 씨가 한 일을 보고 아직 대한민국에는 희망이 있다라고 말할 정도.
그리고 사무장 양모(45세)는 가족에게 "통장에 있는 돈은 애들 학비로 쓰라. 나는 승객을 구하러 가니 전화를 이만 끊겠다."라고 마지막으로 전화하고 학생들 등 승객들을 지키고 빠져나오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다가 끝내 숨졌다. # 아르바이트에 불과한 불꽃놀이 담당인 김모마저 객실 직원이자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와 함께 목숨을 걸고 수많은 승객들을 구한 업적을 인정받아 둘이 함께 의사자로 지정되었다. 사건 초기에는 김모 집에서는 예비 며느리가 탄 배가 가라앉았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나중에야 자신의 아들이 알바로 세월호에 탄 것을 알았다고. 이후 이 둘은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아르바이트생들의 부모들조차도 "내 아들은 수영 선수 출신이니 제 몸만 건사하자고 하면 탈출을 못 했을 리가 없다. 아들은 끝까지 학생들을 구조하려다가 탈출하지 못한 것이다. 장하다, 내 아들아!" 라고 말할 정도로 전원이 깊은 신뢰를 받고 있다.
여러 가지 정황상 일반직(객실) 직원은 배 운항과 관련된 정보를 바로 접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직 객실 직원 14명 중 대부분은 선장, 항해사, 기관사 등 배의 운항을 담당해서 배의 침몰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던 선박직 직원들에게서 같은 회사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언질을 받지 못한 채로 선내에 남아있다가 승객들과 함께 유명을 달리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 그보다 중요한 건 객실 직원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상식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고, 선박직 직원들은 상식을 초월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어서, '한 번 구원을 받았으면 이후 어떠한 악행을 해도 상관 없다'는 구원파의 교리에 따라 선박직 직원들이 행동한 것이 아닌가 하는 찌라시까지도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사고 선장의 2004년 신년 인터뷰가 갑자기 화제가 되고 있다. 원본. 또한 사고 선장은 2010년에는 OBS, 2012년에는 Channel A에서 직원들의 지시만 따르면 자신의 배가 안전하다고 인터뷰했다. # 외신들도 이 부분에 대해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해당 기사.
사고 당시 세월호에게 먼저 다가간 유조선 두라에이스(2720t)호의 선장은 배가 기울어가는데도 탈출하려는 승객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위쪽에 있는, 두라에이스호가 찍은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세월호 선장이 탈출 명령을 내렸다는 진술이 더더욱 신빙성을 잃었다. #
2014년 4월 28일을 기준으로, 생존한 선박직 선원 15명(선장 포함 항해 7명 + 기관 선원 8명) '''전원'''이 경찰에 의해 구속되었다. 선원들의 처벌 수위와 유사 사례, 각종 논란 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논란을 참조.
9. 형사 재판
10. 해경 123정 정장, 김경일 경위의 업무상 과실 치사죄, 징역 3년형 판결
대법원 재판부는 전 '해경 123정장이었던 경위 김경일이 낸 상고심에서, 상고를 기각하고 최종적으로 유죄(업무상 과실 치사죄 인정, 징역 3년)를 확정했다.
대법원은 사고 당일 '해경 123정, 정장 김경일이, 현장에 도착했던 오전 9시 30분에 세월호가 약 45~50도 정도 기울어 있었으며, 선체 상태를 감안하여 '''승객들이 빨리 퇴선하지 않으면 선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익사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예상할 수 있었다'''며, 당연히 퇴선 지시를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구조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당시에 선체 내부에 있던 승객들과 구조자 사이에 대화가 가능했고, 일부 출입문이 열려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구조를 기다리던 승객들에게 ''''123정이 세월호에 접근해 대공 마이크 등으로 퇴선 방송을 실시하거나 승조원이 갑판에 승선해 퇴선을 유도했다면 승객들이 밖으로 나오거나 바다로 뛰어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대법원은 밝혔다. 대법원은 해경 123정이 현장에 도착했던 오전 9시 30분부터 9시 45분까지 약 15분이, 인명을 구조할 수 있었던 '골든타임'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세월호가 61도 이상 기울어 내부 진입이 어려워진 9시 46분 이후에 대해서는 해경의 업무상 과실을 물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해경 123정(승무원 13명)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데, 세월호 사고 현장에 도착하기 전은 물론, 도착해서도 세월호와 교신하지 않았다. 도착하기 전에 9시 3분과 4분에 총3회 교신을 시도한 것이 전부다. 가는 도중과 도착해서도 교신을 시도해야 할 텐데 그러지 않았다. 또한 세월호 안에 있는 승객들의 상황을 살펴야 할 텐데, 123정 승조원 13명 중 단 한 명도 세월호 선내에 진입시켜 상황 파악을 하도록 하거나 하는 행위도 하지 않았다. 이미 구조한 승무원과 승객들에게 다른 승객들의 상황을 질문도 하지 않았다.
해경 123정은 보유하고 있던 고무 보트 하나를 하강시켜, 세월호에 근접시켜서, 기관실 선원과 조타실 선원들을 차례대로 전원 구조한다. 일반 승객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퇴선 지시만 내려서, 사람들이 구명조끼를 입은 상태에서 바다에 뛰어들기만 했어도 주변에 2700t급 유조선 두라에이스호(Doola Ace)가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구조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해경123정 정장 김경일은, 세월호 내 승객들에게 '''탈출 방송을 하지 않았는데도 한 것처럼 상황을 조작'''했으며, 세월호 선내에 대원들이 진입하지 않았는데도 진입한 것으로, '''항적일지 등의 문서를 조작'''했다. 생존 학생들도 "해경은 선내로 들어오지 않았고 모두 배 밖에서 쳐다보고 있기만 했으며, 배 안 상황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고 재판에서 증언했다. ''''해경이 배에서 탈출하라고 방송했더라면 과반이 배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이 생존자들의 일관된 발언이다.
'''그러나 해경이 구조를 '포기했다' 혹은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명백한 거짓이다. 사건 당시 해경 123정[67] 은 탑재고무보트를 이용해 79명을 구조했다. 해경 항공대 소속 헬기가 35명을 항공구조했고 어선 두 척과 관공선(어업지도선 등)이 58명을 구조했다. 이는 법원의 공판 기록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사망자가 0명 내지 1~2명이 될 수도 있었던 사건이라는 점이다. 해경 123정 승무원들이 세월호 핵심 승무원(선장, 항해사, 기관장)이 퇴선해서 세월호의 선박 지휘권이 사실상 무주공산이 된 직후 또는 300명에 이르는 단체여행객의 존재를 알게 된 후에, 직권으로 마이크, SNS, 전화, 문자메시지 등 모든 수단을 활용해 퇴선 명령을 내렸으면 단체여행객 전원 생존이 가능했다. 사고 해역으로 출동하면서 서둘러서 조치를 했으면 단원고 교무실, 경기도교육청 등을 경유해서 단원고등학교 교감과 인솔 교사, 반장, 부반장 등의 연락처를 확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또한 좁은 구역에 모여 있는 단체여행객의 특성상 1~3명에게만 퇴선 지시가 분명하게 전달되었다면, 단체여행객 전부 다 바다에 뛰어들어 생존했을 것이다.
즉, ''' 해경이 긴급 상황에서 지나치게 무능하게 대처했고, 부실하게 구조 작업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시간도 아예 없지도 않았다. 해경이 신고 접수를 받고, 사고해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 09시이고, 사고 해역에 도착한 시간이 대략 9시 30분 정도이고, 세월호에서 탈출한 마지막 생존자가 구조된 시간이 10시 24분이다. 구명조끼를 입고 물 위에 뜰 수 있는, 그리고 물 위에 뜬 사람들, 선원실에서 나오는 '''선원과 선장을 우선 구조'''하고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다 재차 접근해서 자력으로 탈출한 사람을 배 위에 올린 정도가 해경의 구조 작업이었다. 이런 임무는 사고 즉시 근처에서 달려온 화물선과 어선들도 할 수 있었던 구조 작업이다. 선내 상황 확인과 탈출 유도라는 가장 기본적인 임무조차 무슨 이유인지 방기했다. '''당시 해경은 사고 대처에 대한 전문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11. 각계 반응과 대처
각계의 반응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반응을, 대한민국 정부의 대응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정부대응을 참조할 것.
11.1. 각계의 반응
11.2. 정부의 대응
11.3. 실종자 가족들
실종자 가족들은 굉장히 불안해 하고 흥분해 있는 상황이다. 현장을 방문한 정부 관계자는 사고 초기에 실종자 전원 구조라고 알린 것(#) 등의 정부의 잘못된 정보 제공 등으로 격앙된 실종자 가족에게 뺨을 맞기까지 했으며, 정홍원 국무총리는 물 세례도 받기도 했다. #
11.4. 반응의 배경
11.4.1. 정보 전달 체계의 문제
이 상황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은 정보 전달 체계 문제였다. 이미 관련 부서에서는 부정된 배를 들어올릴 것이라는 내용을 사고자 가족에게 계획으로 설명하거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산소 공급을 했다고 통보했는데 이후 아직 장비가 도착하지 못해 주입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하고, 생존 인원과 실종 인원의 숫자가 크게 변동되는가 하면, 선체 내부에 진입했다고 했다가 하지 않았다고 하는 등, 중앙대책본부의 번복이 심각하게 잦다. 과거 해군과 국방부로 명령-보고 체계가 일원화되었던 천안함 피격 당시와 달리 이번 사고에서는 중앙대책본부와 해경이 같은 조직이 아니어서 정보 공유나 전달 체계가 미비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에 대해 자세한 문제점들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만 한 사실 역시 문제로 꼽혔다. 사고자 가족들을 안정시키는 것 역시 정부 당국의 역할임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중대사안의 번복은 여러 모로 그 역할을 다 하지 못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결국 당국은 상황 전달에 혼선이 잦았던 이유로 사고 현장 브리핑 창구가 분산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결국 4월 18일 밤 브리핑 창구를 서부해양경찰청으로 단일화하겠다고 발표했다. # 또한 정홍원 국무총리는 혼선이 있었던 사실에 대해 사과하였다. #
이를 갑작스러운 사고이기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로 볼 수도 있지만, 그 대상이 이를 감안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경황이 없고 사소한 소식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사고자 가족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관련 작업 및 통보들이 보다 세심하게 이뤄지지 못한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다. 결국 일련의 사태는 정보 전달 체계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거나, 있더라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소리이므로, 대참사 앞에서 부실한 정부의 위기 대응 능력이 드러났다는 소리가 된다. 결국 21일 박근혜 대통령은 정부의 초동 조치 미흡과 복지부동하는 공무원들에 대해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며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의 모두발언에서 지적하였다.
11.4.2. 국가위기 관리 매뉴얼 축소화 논란
국가위기 관리 매뉴얼을 이명박 정부에서 폐기하고 NSC를 축소, 분산시켰다는 지적이 있다. 참여정부 시절 안보와 사회 재난까지 포괄하는 체계적인 위기관리 시스템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청와대 지하벙커에 위기관리 센터를 만들어 놓았다. 이것이 어느 정도 강력한 위기관리 통제력을 갖고 있냐면 정부의 총 27개 안보, 재난 및 안전 관련 상황 정보가 센터 상황실에 연결되어 있어 대통령 필요시에 언제든 국가의 상황 정보를 실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으며, 안보/재난 상황 시 정부 주부부처가 어디인지 알려주는 총 33개의 위기 유형에 대비한 국가 위기관리 기본지침과 운영 매뉴얼이 있었다. 심지어 27개의 상황정보 중에서 선박 관제 시스템이 있어 500톤급 이상의 선박에 대해 전 세계 어디서든 조난이 발생하더라고 즉각 청와대가 이를 파악할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의 계획과는 반대로, 다중 상황에 대한 일원화된 대응 방안이 실제 상황 발생시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태 등 북한의 직접적인 공격 행위가 연속으로 발생하면서 자연스레 정부의 주요 관심사는 '''안보'''로 이동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매뉴얼은 이명박 정부는 물론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삭제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 상황이다. 그러나 정부부처 개편을 하면서 방재청 업무가 안전행정부로 이관이 됐는데, 현장 전문성이 부족한 행정직이 지휘 중이라는 의견이 요점이다. # 또한 각 부처별로 재난 관련 부서가 분리되어 있는 등 기존 참여정부가 의도한 일원화된 재난대책 구성과는 차이가 난다는 게 또 하나의 쟁점. # 박근혜 정부에선 이명박 정부 시절 폐지한 NSC 사무처를 다시 부활해 상설화(#) 시켰지만 다원화된 구조 속에서 매뉴얼과 관련조직이 실제 초기대응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고, 사고 발생 3일차인 18일 밤에서야 이런 단일화를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 초기대응에 있어서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매뉴얼은 없어지지도 않았으며, 이명박 정부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다만 정부가 바뀌면서 매뉴얼을 실행해 줄 주체가 변경 및 축소되어서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의 인터뷰에 따르면 참여정부는 포괄적 안보라는 개념 하에 국방뿐만 아니라 자연재해 등으로 인한 사회시설 마비 등에 청와대가 컨트롤타워로서 대비했었지만, 이명박 정부 때 안보라는 개념이 국방으로 좁아졌고 박근혜 정부가 이를 그대로 계승했기에 기존의 매뉴얼이 힘을 쓸 수 없었다고 한다.[68] #
11.4.3. 지나친 관심이 낳은 문제
그 외에 사고 관련인들에 대한 배려 없이 자극하는 행위도 문제다. 일부 정치인들이 별다른 대책도 없이 재난 지역을 방문하여 사실상의 유세 활동을 벌인 것은 물론, 앞선 총리의 경우도 사고자들의 가족들이 있는 체육관 안에서 언론과 인터뷰를 강행하다 그들을 분노케 했음이 누출 영상에서 드러났다. 생방송 중 욕 먹은 기자 역시 구조가 지연되는 와중에 '''지난 밤'''의 상황을 진척 상황이라고 전달하다 욕을 먹었다. 답보 상태에 빠진 현 상황을 전달하는 것과 전날의 사태 추이를 마치 지금 벌어지는 것처럼 전달하는 건 엄연히 다른 것임에도, 진척되지 않는 상황에 답답해하는 피해자들의 가족들을 전혀 배려치 않은 셈이다. 결국 20일 새벽에 실종자 가족들과 유가족들이 직접 청와대로 찾아가서 항의를 하겠다는 소동이 일어났다.
당연하지만 사고자 가족들 외에 일부 여론이 모든 공무원들과 구조팀에 비난을 퍼붓거나, 그들에 대한 음모론을 펼치는 것은 도를 넘은 행위임에 분명하다. 사고와 구난에 소극적이었던 관련인들을 제외하면 이 상황에서 가장 애태우는 것이 바로 구조팀이었으며, 주위 어민들과 함께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하고 기울어진 선체로 올라가 당시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소중한 영상을 촬영했던 전남201호 어업지도선 승무원들 또한 사고 해역 주변에서 불법 조업을 단속하던 해양수산직 공무원들이었다. 실제로 위에서 이야기했듯, 진도, 해남 근처 해역은 예로부터 물살이 거세서 과거 삼별초의 항쟁시에 몽골군과 전투를 치르면서 몽골군이 곤욕을 치른 곳이며, 이순신 장군이 명량 해전에서 활용한 지형이다. 당시 왜군이 외해를 돌아서 공격하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위험한 수역이다. 때문에 물살이 다소 약해진 현 시점에서도 동력선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수준. 이러한 상황에서 구조팀을 닦달하거나 비난하는 건 그들의 마음만 조급하게 하고 추가 인명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을 키울 뿐이다. 실제로 천안함 피격사건 때 서해에서 한주호 준위가 순직했던 건 이런 여론의 닦달 때문에 각종 안전 기준을 넘은 상태에서 기를 쓰고 구조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이었다.[69] 이 사고로 여론과 천안함 유가족들은 한주호 준위의 유가족에게 사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된다.
5월 6일 결국 일이 터졌다. 민간 잠수사 중 한 명이 기뇌증으로 사망했다.
단원고 학생 이외의 일반인 탑승객에 대한 소홀한 관리 또한 문제다. 세월호 선원 등을 제외한 구조된 일반인 탑승객들은 약 80명 남짓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마저도 퇴원한 50여명의 위치/행방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뉴스 링크를 부탁합니다). 학생들에 비해 나머지 실종, 사망자들의 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치료도 자비를 하며 합동분향소에도 없는 등, 그 수가 학생들에 비해 적어서니 묻히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일반 승객들의 대한 뉴스조차 적으며 그나마 있는 것도 묻혔다.
세월호 침몰 당시 구출된 6세 여아의 연고자를 찾는다는 트위터가 올라왔는데(#), 17일에 나오기로는 다행히 친척들과 연락이 되었다고 한다. 이 아이는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이사를 가는 중이었다고 하며, 다른 가족들은 여전히 실종 상태이나 친척들이 아이를 돌보고 있다고 한다. # 24일에 아이 어머니의 시신이 발견됐다. 아버지와 오빠는 아직 실종 상태이다. # 구조 당시 가족 중 7세 오빠가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 아이에게 입혀줬다고 하며, 현재 오빠는 실종 상태이다. 태국의 한 네티즌은 Prayforsouthkorea 캠페인에서 이 사연을 그림으로 그려서 올렸다. #[70]
12. 관련 사건사고
13. 사건의 여파
이때부터 박근혜 정부의 총체적인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평가가 수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정부가 비난을 받는 사건들이 터지긴 했지만, 이런 유형들은 이전에도 여러 번 있거나 공공연한 비밀로 여겨지던 부정이어서 '우리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으면 화가 나지만 일단 넘어가겠다.'는 것이 시민 여론이었다.
하지만 세월호 건의 경우 내용과 대처, 피해자들의 신분 등 여러 모로 볼 때 너무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바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대통령의 모습을 본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다. 사실 세월호 침몰 사고는 여타 대한민국에 있었던 큰 인명사고중 대한민국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사고 발발 초기부터 구출 시도 실패로 선체가 완전침몰하는 과정이 모든 언론의 카메라 영상을 통해 생생히 중계된 대형사고다.''' 더군다나 정부 기관인 해경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누워 있던 여객선엔 아직 희생자들이 살아 있었다. 국민들은 이후 배가 완전히 침몰하며 승객들이 희생되는 모습을 봐야 했다. TV만 봤다면 이렇게 하지말아야 한다는걸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취할수 있는 최악의 결정으로 수백명의 어린 목숨이 바닷속으로 사라지는걸 우리 모두가 보게 된 것. 이로 인한 국민들의 내상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
그럼에도 사건 수습의 주체가 되어야할 정부관료, 집권여당의 태도는 민경욱 대변인의 "청와대는 재난 콘트롤타워가 아니다."라는 희대의 망언으로 귀결되었다. 심지어 몇몇을 제외한 기성언론들까지 이를 비호했다. 가뭄,흉년같은 자연재해도 왕의 부덕으로 치부하고 백성을 달래던 조선시대만도 못한, 역대 재난사고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아니 오히려 더 못한 대응 방식과 수습 과정 때문에 박근혜 정부에 대한 국민적인 실망과 분노를 안겼고, 이는 이후 지지율 폭락으로 이어지게 된다.[71] 이후 다른 사건들로 인해 박근혜 정부의 무능을 질타하는 자리가 생길 때마다 세월호는 꼬리표처럼 따라붙게 된다.
[image] [범례]
2014년 5월 19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통해 이 사건의 초동 대응 실패와 정경유착 등 구조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해양경찰청을 해체할 것을 발표하였다. 해양경찰의 수사, 정보 기능은 경찰청으로 이관되고 구조, 해안 경비 기능은 신설되는 국민안전처로 이관했다. 경찰은 18년 만에 독립했던 해양경찰의 수사와 정보 업무를 흡수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조직이나 관련자들이 해경 때와 같이 그대로 유지되었음은 물론, 당시 해경 본청의 주요 요직들은 줄줄이 승진하는 모습을 보여줘 결국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임이 밝혀졌다. 기사. 결국 이 쓸데없는 개편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국민안전처를 해체하고 해양경찰을 다시 창설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사건 이후로 수 년이 지나고 정권도 바뀌었지만, '''국가 주도의 재난 안전시스템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씁쓸한 의의를 남기기도 했는데, 이러한 '''후진국형 참사를 한 번이라도 허용하게 되면 정권도 흔들릴 수 있음을 정치권에 인식''' 시켜주게 되었다는 것.
13.1. 경제적 영향 논란
13.1.1. 부정적 영향 주장
연초 민간소비와 건설투자가 회복되던 가운데 그야말로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지출이 세월호의 사고 수습에 집중되고 있었고, 시민 사회는 애도의 분위기로 회식이나 야구장의 응원도 자제할 정도였다. 결국 국내 경기가 회복에 대한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2014년 1분기 GDP는 전년대비 3.9%의 성장을 보였으나 2분기는 3.4%로 감소했고, 이는 전분기 대비 0.5% 성장에 불과했다. 미국과 일본의 경기가 회복인 시점에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사후처리가 정쟁화되고 정부의 대응이 세월호 유족들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장기화되자 3~4분기까지 지연이 된 것이다. 3, 4분기 GDP 성장률은 각각 3.3%, 2.7%까지 하락하여 연초 기대감과 달리 점차 하락을 보였다. 동기간 유럽과 미국은 경기가 회복임에도 불구하고 해외 경기에 민감한 한국으로서는 이례적인 저성장을 뜻한다. 통상 국가적인 재난의 경우 빠른 수습과 원만한 해결이 관건이다. 길어질수록 사회 구성원의 본업 복귀가 늦어지고 그만큼 경제의 활성화는 늦어지게 된다. 또한 추경을 통해 인위적으로 투자를 늘려야 하나 정부의 세수 부족과 전 정권의 부채부담으로 인해 추경 편성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13.1.2. 부정적 영향 반박
- 사건 여파로 인해 경기 침체를 불러왔다는 것에 대해 변명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해당 동영상 강의의 12분경을 보면, 소비자 심리지수는 곧바로 회복되었지만 다시 감소했다고 나온다. 만약 경기 침체가 세월호로 인한 것이었다면 소비자 심리지수가 아예 내려가서 천천히 회복되어야 하지만, 곧바로 회복되었다가 다시 감소되었다는 것은 세월호로 인한 경기 침체는 바로 회복되었지만 다른 요인으로 인해 다시 감소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바로 밑의 메르스 침체로도 반증할 수 있다. 세월호는 정신적인 충격은 있을지언정, 물리적인 충격은 없었지만 메르스의 경우 외출하여 접촉함으로써 전파되는 바이러스가 원인이기 때문에 바깥 활동을 삼가게 되고 직접적인 충격이 온다. 그랬기 때문에 메르스의 경우에는 소비자 심리지수가 크게 감소하여 6개월에 걸쳐 천천히 회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또한 GDP 성장률 저하를 단순히 정부의 책임으로 돌렸다고 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세월호 침몰사고를 드립하는 것도 근거가 부족하다. 관광을 예로 들었지만 한국관광공사의 월간관광시장동향보고서를 보면, 2014년에 외국인의 국내관광으로 17조~18조를 벌어들였으며, 이전부터 꾸준한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관광지식정보시스템에서의 2014년 통계를 확인해 보면 총 국민여행총량의 국내 여행에서 2013년에 비해 여행자 수는 20만 명 증가, 여행 횟수는 400만회 감소, 총 여행 비용은 1조 6천억 원 증가로 나타난다. 개연성으로 생각해봐도 소비심리 위축은 이해가 갈 수 없는 상황이며 이는 통계학으로도 명확하게 나타난다.
13.2. 한국 연안해운에 끼친 영향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한국 연안해운에 만재해있던 중고선박 운용, 중소형선박 운용 기조가 완전히 뒤엎어졌다. 세월호 침몰의 원인이 중고선이라서, 혹은 중소형 선박이라서는 아니지만 ''''노후선보다 신형선이 안전하다', '작은 배보다 큰 배가 안전하다''''는 생각이 일반 여론만이 아니라 정부, 나아가 해운사들에게까지 확대된 것이다.
당장 정부는 2009년 기존 선박운용가능연수를 25년에서 30년으로 연장하는 규제완화를 시행하였다가,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다시 25년으로 환원했다. 세월호는 침몰 시점 기준 20년으로 30년은커녕 25년에도 못 미치니 규제 완화와는 무관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재정 문제로 해운사들이 신조선 건조는 커녕 비교적 선령이 젊은 중고선 도입에도 미적지근거리자 '''연안여객선 현대화 펀드'''를 도입, 정부에서 건조비 반액을 15년 무이자로 지원하는 조건으로 여객선 신조를 적극 지원하기에 이른다.[72]
그리고 이렇게 건조된 1호 선박 실버 클라우드의 총톤수는 20,263GT로 '''세월호의 3배'''에 육박한다. 그리고 연안여객선 현대화 펀드의 경우 정부 주도하에 표준설계모델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건조될 선박들도 최소 이 정도 규모라고 생각하면 된다. 펀드로 자금을 지원하는 경우라 시일이 걸리긴 하지만, 2030년까진 주요 항로는 다 동급 이상의 신조함으로 바뀌게 된다.
중고선 도입에 있어서도 그 기조가 반영된 건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 이래 중단된 인천-제주 여객항로 입찰에 성공한 대저건설의 경우 해당 항로에 투입하기 위해 중국의 중고선 동방명주 8호를 구매, 오리엔탈 펄 8호로 재명명했다. 이 배는 중국 쪽 회사가 서해 한중카페리로 쓰기 위해 건조했다가 중국 측 항구의 선석 문제 및 회사의 재정문제로 매각한 것으로, 2018년 구매 시점 기준에서 선령이 2년에 불과하고 총톤수도 24,747GT에 달한다.
이렇게 연안여객선들의 규모가 커지다 보니 기존 중소형선 위주의 여객선 부두가 작아서 각 항만들이 부랴부랴 여객선 부두를 확충해야 할 지경. 당장 상술한 대저건설의 오리엔탈 펄 8호는 '''인천항에 접안할 곳이 없어서''', 인천-제주 여객항로는 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이 완공되는 2019년 하반기에야 재개통된다.
그동안 경제성만을 생각하며 일본제 노후선을 들여와 운행하던 관행이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뒤바뀐 것이다. 그러나 인식만 바뀌었을 뿐, 안전의식이 미비하다는 것은 전 국민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13.3. 한국 부모의 자녀교육에 대한 인식 변화
세월호 침몰사고 이후 자녀교육에 대한 한국 부모의 인식 또한 '''매우 크게''' 바뀌게 되었다.
세월호 사고 이전까지는 자녀들이 좋은 성적을 받아 반에서 또는 전교에서 상위권에 들어 소위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 만이 오직 부모들의 바람이었다. 자연히 특목고와 자사고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대치동의 학원가가 최전성기를 맞이했던 무렵으로, 성적과 진로 문제로 부모와 자녀간에 크고 작은 갈등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가 터지면서 '''학생 200여 명이 차디찬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죽어가는 참혹한 현장'''과 '''친구, 가족을 하루만에 잃은 수백명의 유가족들이 울다 지쳐 넋을 놓아버린 처참한 풍경'''이 전국민에게 생생히 방송되고 그 여파가 겉잡을 수 없이 퍼지자,[73] 학부모들의 사고방식은 180도 뒤집히게 된다. 즉 자녀가 1등을 하는 것 따위보다는, 일단 건강하고 '''안전하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가 되었다. 여기서의 안전은 비단 교통사고 뿐만이 아니라 학교폭력이나 왕따, 교사에 의한 아동 학대 등의 학교 내부의 문제, 그리고 각종 차별 문제 등으로 확장되어, 정부와 학교에 자녀의 안전을 믿고 맡길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지게 되었다.
이같은 인식은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을 계기로 더욱 심화되어 정부의 잇단 등교개학 연기 조치를 믿지 못하겠다는 부모들이 많아졌다.[74] 정부와 교육당국의 충분한 공론화를 거쳐 단계적으로 시행해도 정착될까 말까인 9월 학기제를 2020년부터 당장 도입하자는 학부모들의 주장이 커졌던 이유이기도 하다.[75] 일부 학부모는 9월 학기제를 실시하지 못할 바에는 불안하게 자녀를 학교에 보내느니 차라리 자녀를 자퇴시키고 홈스쿨링을 시켜 검정고시를 준비시키겠다고도 한다. 2020년 현재까지도 학교 간판과 학력을 따지는 문화가 남아있고 홈스쿨링과 검정고시 출신자에 대한 편견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세월호 사고 이후 한국 학부모들의 자녀 교육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증거이다.
14. 의혹
15. 인양 관련 사항
16. 유사 사건·사고
“가만히 있으라” ‘일본판 세월호’ 유족들 손배소 승소(2011년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 때): 세월호 유족들이 오카와 초등학교 추도식에 참여하는 등 양국 유족들의 교류가 이어졌다.
16.1. 유사 해상 사건·사고
선박 침몰 사고를 참조. (선박명 기준 ㄱㄴㄷ순)
- 고창 심원면 거룻배 전복 사고
- 마할리카 2호 침몰사고
- 연호 침몰 사고
16.2. 해상사고 외 유사 사고
아래 사고들은 해상사고는 아니지만 세월호 참사와 유사한 사고이다.
16.3. 학생들이 사망했던 비극들
아래의 사고들은 세월호 사건과 같이 학생들이 집단으로 사망했던 안타까운 사고들이다.
- 천호대교 버스 추락 사고
- 태안 사설 해병대 캠프 참사
- TWA 800편 추락 사고[78]
- 저먼윙스 9525편 추락 사고
- 위버링겐 상공 공중충돌 사고
- 추풍령 경부고속도로 연쇄추돌 참사
- 그 외 비극이 된 수학여행들
17. 관련 단체, 기관
- 4월16일의 약속국민연대 (이하 4.16연대)
- 4.16 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 구원파
- 대한민국 해양경찰청
- 세모그룹
-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 청해진해운
- 전라남도
18. 관련 인물
19. 관련 자료/문헌
- 단행본
- 세월호, 그날의 기록 - 진실의힘. 2016.
20. 기타
트위터에서 외국인들도 #PRAY FOR SOUTH KOREA 트위터 메시지들이라는 해시태그를 달면서 실종자의 생환과 사망자에 대한 애도에 동참했다. 사고를 보도한 뉴스에도 많은 해외 네티즌들이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댓글을 달고 있다고 한다. # 덧붙여 해외 웹에서는 사건 사고와 관련된 한국 자료가 영어로 번역되어 퍼지고 있다. 1, 2, 3
- 일본에서도 이를 기리기 위한 곡을 만들었다. 참고로 한국어로 불렀다.[영상끝부분관련참고] 일본인이 부른 세월호 추모곡 영상.
- Eric Benet도 2014 서울 재즈 페스티벌에서 세월호 리본을 달고 추모 공연을 했었다. 관련 영상.
- 히스토리 채널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Engineering disaster' 에피소드 1에서 이 사고를 다루었다.
- 해경이 피해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가 뒤늦게 알려졌는데, 이게 너무나 비정해 비난을 받았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 159페이지에 실려 있는 증언에 따르면 한 생존 학생은 겨우 해경의 손에 끌어올려져 구조되었지만, 해당 해경은 다친 곳이 없는지 물어보거나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위로와 격려를 건네기는커녕 "존나 늦게 올라오네, 씨X. 이 새X 존나 무거워" 라는 쌍욕을 퍼부었고, 그 말을 들은 학생은 "죄송해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구조된 또 다른 학생은 바다에 빠지는 게 무서워 노란색 펜더가 달린 로프를 몸에 감았는데, 해경은 "그거 빨리 놔라, 개새끼야"라고 말했다. 학생이 "안 돼요. 죽을 것 같아요"라고 사정했지만 해경은 계속 욕설을 퍼부었다. 결국 학생은 펜더 밧줄을 풀어야 했다고 한다. # 죽을 뻔한 상황의 사람들임을 감안해 놔둘 수도 있었고, 정 안 되면 좋게좋게 부드러운 말로 설득해도 되었을 텐데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수준의 폭언이다. 책을 실제로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는 검찰 진술조서에서 발췌한 내용이며, 법정에서도 증언되어 인정된 명백한 사실이다. 참관 중이던 유가족들이 생존자들의 이러한 진술에 깜짝 놀라 항의하면서 재판이 잠시 중단되는 소동이 일어난 적도 있다. 유족들이 몰랐던 이유는...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하다. 심지어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난 지 채 하루도 안 된 학생의 병실을 찾아와 이것저것 물으며 진술서를 받아내기까지 했다. 또한 지장을 찍으라는 말에 학생이 머뭇거리며 안 하고 있으니까 직접 손을 끌어다가 강제로 찍었다. 심지어 거기다가 이 진술서는 해당 학생의 동의하에 편안한 분위기에서 작성했다는 문장을 억지로 쓰게 시키는 짓까지 저질렀다. 도대체 피해자를 뭘로 보고 있었던 건지, 그들은 죄인이 아닌 참사에서 살아난 피해자인데 피해자에 대해 배려하는 마음이 도대체 있긴 했던 건지 의문이다. 해당 증언 출처. 오죽했으면 듣던 진행자가 '미쳤네요'라며 분노한다.
- H.O.T.의 4집 노래 '아이야'가 이 사고로 인해 재조명되었다. '아이야'라는 노래 자체도 본래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의 피해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인데, 이 노래가 만들어진 뒤 15년 만에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처럼 또 많은 학생들을 비롯한 사람들이 해를 입은 사건인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 옛날에 아이들을 눈 앞에서 사고로 잃고도 다시 아이들을 사고로 잃게 만든 사회에 대해 회의감을 들게 만든다는 말이 많았다.
- f(x)의 정규 3집 앨범 타이틀곡 'Red Light'의 가사 내용이 이 사고를 비판했다는 팬들의 추측이 있었고, SM엔터테인먼트의 이성수 본부장 인터뷰 기사로 사실임이 확인 되었다. 또한 레드벨벳의 미니 2집 앨범 타이틀곡 '7월 7일'의 가사 및 뮤직비디오가 이 사고를 추모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또한 B.A.P의 정규 2집 수록곡 'RIBBON IN THE SKY' 에서도 이 사고를 비판했다.
- 버즈의 4집 앨범 'Memorize'의 수록곡 '그림자'가 세월호 사건의 비판/추모곡이라고 한다. '그림자'는 버즈 멤버들의 자작곡인데, 앨범 'Memorize'를 작업하던 도중 세월호 사건이 터져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버즈의 노래답지 않게 헤비메탈스럽고 음침하다. 앨범은 2014년에 나왔지만 2016년 박근혜의 탄핵이 가결되면서 버즈 2집 'Buzz Effect'의 '일기'가 절묘하게 들어맞는 가사로 재조명 받을 때 했던 전국투어에서 밝힌 사실이라 몰랐던 이가 대다수이다. 가사 중에 "감추려 했던 차갑게 뻗친 손끝"이 인상적이다.
- 국카스텐의 2집 앨범 'Frame'의 수록곡 '작은 인질'도 세월호의 영향을 받은 곡이다. 그 자체로는 화가 장 포트리에의 '작은 인질'이라는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며 사고 이전에서부터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작업 도중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면서 그를 고려하여 작업했다고 한다. 또한 사망한 단원고 학생 박수현 군이 생전에 국카스텐의 열렬한 팬이었기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멤버들이 빈소와 분향소를 찾아가고, 콘서트에 그의 가족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 미국의 한 민간회사가 피해자들 사진으로 추모 우표를 만들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를 두고 국내 네티즌들은 블로그 등에 빠르게 해당 내용을 퍼 나르면서, 4~50여 년이나 지난 박정희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와 비교하며 미국이 잘났다느니, 한국이 독재 국가라느니 비난을 하는데, 미국에서 나온 그 우표는 누구나 돈을 내고 원하는 아무 사진이나 넣어서 만들 수 있는 나만의 우표 형식이다. 즉 돈만 내면 하다 못해 자신의 얼굴 사진도 넣을 수 있다는 것이며, 동시에 미국 우편 당국은 공식적으로 세월호 추모 우표를 발행한 적이 없다. 그리고 발행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발행된 대통령 취임 기념 우표에는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도 있다. 그래도 정 그렇게 아니꼽다면 본인이 직접 우리나라 우체국에 가서 나만의 우표에 피해자들 사진을 넣어서 만들면 된다. 잘못된 정보로 여론을 선동하는 몰지각한 일은 지양해야 할 부분이다. 잘못된 여론 선동의 예 1, 잘못된 여론 선동의 예 2, 잘못된 여론 선동의 예 3. 참고로 "세월호 피해자 추모 우표"로 알려진 그 우표는 이벤트성이기 때문에 당연히 일반 판매는 안 했고, 주문 회사에서 유가족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 베가 아이언 2가 4월 24일 공개 예정이었지만, 이 사고로 인해 한 달 늦게 공개되었다. 그리고 팬택은...
- 이 사고가 일어난 지 1년 후 지중해에서 더 많은 사망자를 낸 침몰 사고가 일어났다. 침몰 당시 선장이 술에 취해 대마초를 피우고 있었던 것은 덤.
- 그것이 알고 싶다 2016년 11월에 이른 바 '골든 타임'에 하라는 구조는 안하고 청와대에 보낼 영상을 찍느라 정신 없었다는 게 밝혀졌다. 재난시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선 조치 후 보고지만, 당시 정부 관계자는 현장에 출동한 이들에게 집요하게 사진과 영상을 요구했고, 그 덕분에 구조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 고민정 아나운서의 남편인 조기영은 '당신의 일곱 시간'이란 시에서 세월호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내용으로 담았다고 한다. 내용.
- 두 번째 콜드플레이 내한 공연에서 콜드플레이는 1집 수록곡 'Yellow'를 부를 때 잠시 10초간 공연을 중단한 다음, 세월호 참사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에게 묵념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너의 이름은.을 기획할 당시에 세월호 침몰 사고의 영향을 받았음을 밝혔다.
- 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무책임으로 인해 군경소방의 모든 공무원들은 박근혜라면 치를 떤다. 군 같은 경우에는 세월호 구조 작업하다가 군인 1명이 순직했고, 소방 쪽에서는 이번 사고와 전혀 관련이 없는 엄한 소방방재청을 해체시킨 데다가 구조 헬기가 추락해 5명의 소방관이 순직했고, 경찰은 해양경찰청을 해체했기 때문. 이번 사고로 해체돼 국민안전처로 격하돼 들어간 해양경찰청과 소방방재청은 박근혜의 파면 이후 문재인 정부가 국민안전처를 폐지시키면서 소방방재청은 독립기관이 되었고, 해양경찰청은 원래 있던 해양수산부 산하로 돌아갔다.
- 단원고 탁구부는 이 사고가 일어나기 전, 제 60회 전국남녀종별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16일에 열릴 예정이었던 준결승전까지 진출했다. 때문에 탁구부 7명 중 2학년 3명은 수학여행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준결승전 당일, 친구들이 탄 배가 침몰했지만 모두 구출되었다는 오보를 받았고, 이를 그대로 믿고 다시 힘을 얻어 결승까지 따낸 단원고 탁구부는 몇 시간 뒤 200명이 넘는 친구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접하게 된다. 단원고 탁구부는 결승에서 승리해 우승을 따냈지만, 침통한 분위기를 거두지 못하고 메달 수여식 도중 눈물을 감추지 못해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뉴스 영상 링크.
-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그날, 바다가 2018년 4월 12일 개봉했다. 제시된 주요 논점은 AIS데이타 조작설과 앵커 투하 외력설이었으며, 이러한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당시 발표 과정이 혼란스럽고 이상했음에 많은 공감을 샀다. 하지만 뉴스타파에서 이 내용을 반박하며 검증을 시도했고 그 내용 또한 많은 수긍을 얻었으며, 뉴스타파의 반론 중 일부 역시 일부 시청자의 예리한 재반박에 직면했다. 뉴스타파는 급변침의 원인을 솔레노이드 고착 고장 증상인 것으로 분석한다.
- 과도한 취재와 관련해, 단원고 생존 학생들이 학교에 복귀하면서 낸 성명서의 내용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 전문
- 사고가 일어났던 날 오전부터 사고 해운사인 청해진해운 홈페이지는 접속자 폭주로 일찌감치 일일 트래픽이 초과(웹호스팅은 하루에 쓸 수 있는 데이터 전송량이 호스팅 상품 중류에 따라 정해져 있다.)되었는데, 마침 청해진해운 홈페이지를 호스팅하던 호스팅 업체 팀장은 아침 뉴스에서 이 사고 뉴스를 접하고선 심상찮은 느낌이 들어 청해진해운 홈페이지에 대해서는 일일 트래픽 제한을 풀어버리라고 직원들에게 지시했는데, 홈페이지가 계속 열리자 청해진해운에서 호스팅 업체로 전화를 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홈페이지가 계속 열려 있어 자기네 회사에 전화가 폭주하고 있으니 홈페이지를 막아 달라'고 요청하는 전화를 한 것이다. 정상적인 회사라면 오히려 '홈페이지 접속이 차단되지 않도록 해주세요'라고 요청하는 게 정상이다! 청해진해운의 이 같은 어처구니없는 행위에 격노한 호스팅업체 팀장은 직원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청해진해운 홈페이지는 다운되어서는 안 된다."는 특명을 내렸고, 역시 분노한 직원들도 청해진해운의 거듭된 홈페이지 폐쇄 요구를 씹어버리고 홈페이지가 계속 원활히 열리도록 조치했다. 결국 사고가 발생한 지 1주일 만에 청해진해운은 호스팅 서비스 해지 신청을 했는데, 상식 밖의 이 처사에 또 분노한 호스팅 업체 직원들은 서비스 해지 신청 처리를 일부러 지연시켜 해지 신청한 지 1달이 지나서야 호스팅 서비스를 중단시켰다. 물론 추가 과금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2017년 1월 신년 기자 간담회에서 박근혜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연도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자 이 호스팅업체 팀장은 "나와 우리 팀 직원들 모두가 그날 일을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어찌 저 따위의 무책임한 발언을 할 수 있는가!!!" 하며 또 다시 격노했다고...
- 이승원 작사/ 성용원 작곡, 소프라노 류정례의 노래로 '바람이 잠든 곳'이라고 클래식 음악에서도 세월호 추모곡이 발표되었다. #
- 일본의 소설 작가 나카야마 시치리는 세월호 사건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은수의 레퀴엠"이라는 소설을 집필했다. 프롤로그에서 부산-시모노세키 운행 한국적 선박이 컨테이너 과적으로 복원력을 상실해 200명이 넘는 사망자와 실종자를 내는 대참사가 발생했고,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을 놔두고 먼저 몸을 피신했다는 배경 설정을 제시한다. 작중에선 사고 당시 일본인 남성이 일본인 여성의 구명조끼를 뺏기 위해 폭행을 행사했고 여성은 결국 사망하는데, 이것이 긴급피난이 적용되어 무죄가 되었다. 그리고 저 남자가 살해된 다른 사건의 최종 공판이 4월16일에 벌어진다. 그런데 선고 기일은 5월 16일...
- 아이돌 그룹 디아크의 1집 앨범 수록곡 '빛(The Light)'의 뮤직비디오는 모녀 가정의 딸이 수학여행을 가다 버스 사고로 사망하며, 시간이 지난 후 어머니가 딸이 좋아하던 요리를 담은 도시락을 싸고 딸이 갖고 싶어하던 가방을 든 채 수학여행 현장을 방문해 딸을 생각하면서 오열하며 슬퍼한다는 내용이다. 작중 분위기와 노란 리본을 암시하는 개나리꽃 등 여러 부분에서 세월호 침몰 사고를 연상시킨다는 의견이 많다. 게다가 이후 디아크가 해체됐기 때문에 뮤직비디오를 거슬려 한 정부가 중소 기획사라는 점을 이용해 팀을 해체시켰다는 소문까지 있다.
- 2017년, 세월호 사건의 생존자들이 졸업하면서 '메모리아'라는 그룹을 만들었다고 한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물품을 만들고 있다.
-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해 어린이날은 주말+어린이날+부처님 오신 날 합쳐서 4일, 직장인 한정으로 근로자의 날과 샌드위치 데이까지 합쳐서 최장 6일 연휴였지만, 그렇게 즐길 분위기는 아니었다.
-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4개월 뒤인 2014년 8월에 해양수산부에서 해로드(海road) 앱을 출시하였다. 이 앱을 다운받으면 휴대전화로 자신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해양경찰에 전송할 수 있는 긴급 구조요청 기능을 실행할 수 있어, 여객선을 탑승하거나 어업 활동 등으로 바다로 나가는 사람은 미리 설치해두면 좋다.
- 배틀그라운드에 등장하는 권총인 P1911 슬라이드 측면에는 "APR.4.2014.16.SEWOL.I WILL NOT FORGET TO REMEMBER THE VICTIMS" 라고 적혀있는데 '2014년 4월 16일 세월. 저는 희생자들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의미이다.
- 이 사고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지하에서도 사고가 터졌다.
- 박무직이 일본에서 연재한 만화 오리진의 등장인물인 최찬정 박사는 세월호 사건으로 형을 잃은 것으로 나온다. 형의 죽음에 아버지는 일을 그만두고 진상규명을 위해 힘 썼지만 정부와 언론이 유가족들을 공격하고, 피자 먹으며 유가족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보고 한국이 싫어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 이후 미국에서도 인종차별을 당하는등 고생을 한 끝에 세계적인 로봇공학자가 되었다.
- 이 사건은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역대 세번째로 많은 인명피해를 낸 사건이었지만 6년뒤 전세계에 불어닥친 감염병 대재난이 일어났고, 이로 인한 국내 사망자수가 결국 세월호 참사를 끝내 넘어서게 되어 역대 네번째가 되었다.
21. 같이보기
Disapprove: 반(反)지지율
Sinking of Sewol: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Year-end tax adjustment controversy:연말정산 논란
MERS outbreak: 2015년 대한민국 메르스 유행
NK Crisis: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
Visit to China: 박근혜 대통령 중국 전승절 참석 논란
Defeat in legislative election: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1원내정당 지위 획득 실패
Park's confidante scandal: 박근혜-최순실 게이트.[72] 단, 연안여객선 현대화 펀드의 경우 세월호 참사의 영향 외에도, 2016년 조선업 불황을 타개하는데 약간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연안여객선 현대화 펀드를 신청할 경우 배의 건조는 무조건 '''국내 조선사'''여야 한다.[73] 세월호 사고에 맞먹는 인명피해를 낸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와 더 큰 인명피해를 낸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도 세월호 사고 때만큼 대한민국 전체가 초상집이 되지는 않았었다. 세월호 사고의 경우는 '''한 학교의 특정 학년이 단체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한꺼번에 참변을 당한 사고'''였을 뿐만 아니라 서해훼리호나 삼풍백화점 때와는 달리 멀티미디어의 발달로 사고 실황이 실시간으로 전국에 생중계되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충격이 그만큼 컸다.[74] 특히 2020년의 학부모 세대는 청소년기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를 귀에 대못이 박히게 들으며 자란 세대이기도 하다.[75] 대한민국보다 코로나 확산세가 훨씬 심각한 미국과 유럽에서는 학기제를 바꾸자는 학부모들의 주장이 거의 없었다. 여기에 드루킹 사건으로 정치생명에 큰 위기를 맞고 있는 김경수 경남지사가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학부모들의 불안감에 편승하여 9월 학기제 도입론을 제기한 것도 한몫했다.[76] 물론 이는 중국이 자국민의 인권마저도 필요하다면 단호하게 짓밟는 독재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민주국가에서는 이런 짓을 하다간 선거 대패가 확정적이다.[77] 이 사고가 터지고 2달만에 세월호 참사가 발생해 또 안타까운 학생들의 목숨을 잃었다.[78] 어학연수를 가던 학생들이 변을 당했다.[79] 달려있는 일본어 댓글들을 번역기로만 돌려봐도 세월호를 애도함과 더불어서 혹여 이 참사에 기뻐할지도 모르는 넷 우익 등의 성향을 지닌 일본인들을 비판하는 내용의 댓글들임을 알 수 있다.[영상끝부분관련참고] 끝에 나오는 노란 리본의 끝이 뾰족해서 '축하'의 의미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노란 리본#s-7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추모글에 마침표를 찍으면 안 된다'라는 것과 비슷한 도시전설, 한 마디로 헛소문이다. 그리고 일베에서 사용했다고 하면서 '역시 일본인은 나쁘다', '이건 조롱의 의미로 넣은 거다'라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거 없다. 순수하게 추모의 의미로 올린 것이니 일본을 싫어하더라도 이 영상에 담긴 뜻을 곡해하지는 말자.[80] 작중에 직접 어떤 사고라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배경인 2016년 2월로부터 22개월 전에 있었던 사고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무엇보다 박자기가 펼친 노트에 적힌 날짜는 2014년 4월 16일.[81] 원래부터 성수기에는 B747이 서울-제주 노선에 고정 투입되었었다. 이 사고로 인천 출발 배편이 전멸하여 항공사들이 반사이익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