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근(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유상근은 강원도 통천군 순잠면 오유리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출생년도는 알 수 없다. 그가 자필로 작성한 이력서에 따르면, 그의 부친은 유춘기(柳春基)이며 어머니는 김성녀(金姓女)였다.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강원도 통천에서 살부터 9살 때까지 한학을 배우고 10살에 통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공부하다가 집안 사정으로 북간도 연길현 2도구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3개월 만에 봉밀구 필산촌으로 이사하여 1년간 거주하며 부친을 도와 농사를 지었고, 다시 용정촌으로 이주하여 1년 정도 머물며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에서 학업을 수행했다고 한다.
그러다 19살 때 하얼빈으로 간 그는 이모부인 이종익(李鍾翊)의 집에 머물렀다. 이모부 집에서 특별한 일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유상근은 이모부에게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여 약간의 여비를 얻어 다렌(大連)을 거쳐 1930년경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는 공동조계 오마로에 있는 영주여관(瀛洲旅館)에 머물렀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생활하기 위한 여러 정보나 상황 등에 관해서 알아보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한국인을 소개받기 위해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찾아갔다.
그는 인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신기섭(申基燮)을 만났고, 신기섭의 소개로 마당로 보경리 4호의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을 찾아가 김구를 만났다. 김구는 유상근을 영국인이 운영하는 버스회사의 검표원으로 취직하도록 해줬다. 하지만 그의 생활 형편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이력서에 따르면 가난을 면치 못해 홍콩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홍콩과 광동 등지에서 인삼 장사로 생활을 도모했다.
그러던 중 1932년 1월 김구의 부름을 받고 상하이로 온 그는 대한교민단의 의경대(義警隊)에 가입했다. 그러다 김구와 모종의 논의를 거쳐 거사를 위해 사진 촬영을 하고 1932년 2월 24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뒤 입단선서문을 쓰고, 세 장의 사진을 촬영하였다. 사흘 후인 1932년 2월 27일 의경대를 사직하고 홍콩으로 향한 그는 놋쇠로 만든 타원형 폭탄 2개, 권총과 25발의 탄환을 소지했다.
그러나 일본으로 가려던 그의 계획은 돌연 취소되었다. 김구가 그를 다시 상하이로 부른 것이다. 김구는 유상근에게 다롄으로 가서 최흥식(崔興植)을 도울 것을 지시했고, 유상근은 4월 25일 윤봉길이 훙커우 공원 의거 때 사용한 것과 같은 모양의 수통형 폭탄과 도시락 형태의 폭탄 1개를 건내받았다. 이때 그는 수통형 폭탄 1개만을 사용하겠다고 하여 도시락 형태의 폭탄을 김구에게 다시 돌려 주었다. 그 후 유상근은 수통형 폭탄을 가지고 4월 27일 상하이를 출발해 5월 4일 다롄에 도착했다.
다롄에 도착한 그는 아옥정(兒玉町) 만철기숙사 아옥요(兒玉寮)에 거주하면서 현지의 상황을 파악한 뒤 일본 관동군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繁), 남만주철도 총재 우치다 고사이(內田康裁), 관동청장관 야마오카(山岡萬之助) 등을 처단하는 일을 논의했다. 그 후 하얼빈으로 향한 그는 암살 대상들이 하얼빈에 도착하자 이들에 대한 경비 상황과 일본 요인들 중에서 누가 마중을 나가고 영접하는지 등을 살펴보고 다렌에서 최종 거사를 결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유상근은 두 가지 방법을 구상하였다. 하나는 국제연맹의 조사단을 맞이하기 위하여 일본의 주요인물들이 다렌역으로 마중을 나올 것이 분명하므로 이들 일본의 주요인물들이 다렌역에 도착하였을 때 폭탄을 던져 처단하는 방법이었고, 또 하나는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국제연맹 조사단을 방문하는 장소에게 의거를 결행하는 방안이었다. 이를 위해서 유상근은 현지에서 발행되는 각종 신문 등을 통해 조사단과 일본 주요인물들과의 회견장소와 시간 등을 파악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하였다.
유상근과 최흥식은 국제연맹 조사단이 1932년 5월 26일 오후 7시 40분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현지 발행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는 조사단 일행이 다렌을 떠나 다음 행선지로 출발하는 5월 30일 오전 9시 30분에 거사를 벌이기로 했다. 또한 일제 경찰에게 절대 붙잡히지 않기 위해 미리 준비한 권총으로 자살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최흥식이 김구에게 발송한 전보가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모든 게 들통나고 말았고, 유상근은 1932년 5월 24일 아옥요에서 체포되었다.
일제는 한인애국단이 만주사변을 조사하기 위해 다롄에 도착한 국제연맹 조사단 일행을 폭사시키려고 준비하다 체포되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한인애국단장 김구는 1932년 8월 10일자로 <한인애국단선언>을 발표해 일본 관동군사령관 혼조 시게루 등 중국 동북지역을 침략한 군수뇌부 등 주요 인물을 처단하려는 것이었고 결코 국제연맹 조사단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었음과 한인애국단의 ‘폭렬한 행동’은 인류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것이며 일제에게 자유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임을 밝혔다.
그 후 유상근은 대련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 예비, 폭발물 취체규칙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다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여순형무소로 이송된 뒤 1945년 8월 14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유상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