훙커우 공원 의거

 




1. 상세
1.1. 몇 시간밖에 쓸 수 없는 시계
2. 체포와 순국
3. 장제스 연구 이전의 인식
3.1. 장제스 연구 이후
4. 평가
4.1. 이승만의 평가
4.2. 박헌영의 평가
4.3. 현대의 총평
5. 사진 논란
6. 대중매체에서

일본어 : 上海天長節爆弾事件(상하이 천장절 폭탄사건), 虹口公園爆弾事件(훙커우 공원 폭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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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 투척 직후의 모습

1932년 4월 29일 중화민국 상하이시 훙커우 공원에서 조선인 독립운동가 윤봉길일본 제국의 주요 인사들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사상자를 낸 사건.

1. 상세


일본제국1932년 4월 29일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이겼다고 주장하며[1] 상하이시 훙커우(홍구) 공원(현재의 루쉰 공원)에서 쇼와 덴노 탄생기념 행사[2]와 전승 기념 행사를 가진다. 전날 구파 백정기도 중국인 아나키스트 왕아차오의 도움을 얻어 나름대로 계획했지만 입장권을 얻지 못해 실패했으며, 백정기는 그 이듬해 중국 주재 일본 공사였던 아리요시 아키라를 암살하려다 실패, 이시하야 감옥에서 옥사했다. 그는 이봉창, 윤봉길과 함께 효창공원에 나란히 묻혔다.
거사 얼마 전에 있었던 이봉창암살시도로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군은, 기념식장에 물통과 도시락 이외에는 가져오지 못하게 했다. 이에 윤봉길은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한 특수 폭탄을 사용했다. 이때 투척했던 폭탄은 도시락이 아닌 '''물통 폭탄'''이다. 도시락 폭탄은 자폭용(!)으로 들고 갔지만 불발로 알려져 있다. 이는 KBS2 스펀지 197회 방송분에서도 소개되었다.
다만 체포된 후 조서에서의 내용은 조금 다르다. #

"29일 아침 자동차를 타고 신공원(훙커우 공원)으로 가는 도중, 자동차 안에서 손가락으로 보자기를 찢어서 구멍을 뚫었다. 구멍을 뚫은 것은, 폭탄을 보자기에 싼 채로 던지려고 폭탄의 발화용 끈을 당기기 위해서였다. 상황을 보니 도저히 2개를 던질 여유가 없었다. '''물통 모양 폭탄에 끈이 있어서 던지기 쉽다고 생각하여''', 도시락 상자 폭탄은 땅 위에 내려놓고 물통 모양의 폭탄을 던진 것이다."

중국인으로 위장하고 자결하여 중일 간의 분노를 고조시키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윤봉길의 조카 윤주 매헌기념관 관장은 자살용으로 들고 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
이 의거로 상하이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테이지[3]는 그 자리에서 말 그대로 인수분해되고, 상하이 파견군[4] 사령관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중상을 입은 후 상태가 악화되어서 죽었다.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츠 마모루[5]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쿠라마츠는 중상을 입었으며, 제9사단장 육군중장 우에다 켄키치 장군은 왼쪽 다리를 잃고, 해군중장 제3함대 사령장관 노무라 키치사부로 제독은 오른쪽 눈을 잃어 애꾸눈이 되었다.
재미있는게 이 때 부상을 입은 생존자 중 노무라 제독과 시게미츠 공사는 각각 태평양 전쟁시작과 끝을 알리는 인물이란 것이다. 노무라 제독은 예편 후 외교관이 되었다. 본래 초급 장교 시절부터 해외로 나가는 국방무관으로 자주 활동하며 외교 분야의 경험이 많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외교관으로 전향한 것. 미국 주재 대사로 활동하며 진주만 공습 직후 선전포고문을 들고 코델 헐 국무장관에게 간 사람이 이 사람이다. 그리고 이 당시 한쪽 다리를 잃은 시게미츠 공사는 아이오와급 전함 USS 미주리 호(BB-63)에서 가진 항복문서 조인식에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며 나타나 일본의 전권대사 자격으로 문서에 사인한 그 인물이다.
여기서 민간인이 휘말렸다는 주장이 있으나 피해자로 기록된 민간인 신분인 2명은 각각 상하이 거류민단장 가와바타와 일본 거류민 서기장 토모노(友野) 뿐이다. 이 두 단체는 일본 정부가 상하이에 거주중인 일본인들의 통제를 위해 조직한 어용 단체였으므로, 일제와 무관하게 구경하러 온 민간인이 죽었다는 말은 거짓이다. 애초에 철저한 검열이 있던 자리의 귀빈석에 아무 연고도 없는 민간인은 있을 수 없고, 폭탄의 위력 및 단상과 객석의 거리를 고려하면 투척된 폭탄에 객석의 민간인이 휩쓸릴 가능성도 없다.
이 거사에 숨은 조력자가 있으니 바로 미국인 선교사인 조지 애쉬모어 피치다. 그는 자신의 자동차 요인석에 윤의사를 태우고 직접 홍커우 공원으로 운전했다. 피치 선교사는 후에 독일인 욘 라베와 함께 '''난징대학살'''에서 중국인들을 구하기도 했다.

1.1. 몇 시간밖에 쓸 수 없는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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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은 폭탄 투척을 실행하기 전, 자신이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구와의 마지막 조찬 자리에서 자신의 새로 산 회중시계를 김구에게 주고, 김구의 낡은 회중시계로 바꿔 품에 넣고 갔다고 한다.

이 시계는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저와 바꾸어 주십시오. '''제 시계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는 쓸 일이 없으니까요.'''

또 식장에 가는 길에 김구에게 남은 돈을 다 주었는데, 김구가 사양하다가 받았지만 "돈 좀 가져가면 어때서 그렇소?"라고 묻자 윤봉길 의사는 '''"자동차 값 다 치러도 5~6원은 남을 정도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소학교 교사 월급이 20원이었다.
해방이 되자, 김구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윤봉길 생가를 찾아, 윤봉길의 어머니 김원상 여사에게 인사를 하고 윤봉길과 교환했던 시계를 보여주며, '''"아드님께서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아드님 덕분에 광복이 이렇게 빨리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원상 여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아들이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자신의 아들을 사지에 내몬 김구가 원망스럽기도 한 것 같았다고.. 이에 김구는 깊게 탄식하고 시계를 도로 품에 넣었고, 시계를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나중에 백범기념관에 김구가 가지고 있던 윤봉길의 시계만 전시되어 있었는데, 후에 윤봉길의 후손이 윤봉길이 김구에게 교환받은 시계를 가져왔고, 현재 이 두 시계는 효창공원 내 백범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2. 체포와 순국


이렇게 일본 군민과 관료들을 싹 날려버린 후, 현장에서 일본 헌병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당시 헌병들이 엄청난 구타를 가했다고 한다. 그는 연행 후 고문을 받고 5월 28일 상하이 파견 육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1월 18일 일본기선 소속 14,000t급 여객선 '타이요마루(大洋丸)'에 실려 오사카로 도착해 오사카 육군 위수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2월 18일에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됐다.
1994년에 일본의 시민운동가인 야마구치 다카시가 펴낸 《윤봉길 암장의 땅, 가나자와에서》라는 책에 의하면, 사실 일본은 윤봉길을 현장에서 '''공개 처형'''하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오히려 윤봉길에 대한 여론이 좋아지고 일본군이 침략군이라는 이미지가 심어질 수 있을 것을 염려해서, 이감 다음날인 19일에 육군 9사단 주둔지였던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사형을 집행했다. 이 때 윤봉길의 나이는 24세. 그야말로 짧고 굵은 생이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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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집행 당일 윤봉길의사의 최후의 모습.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 27분, 윤봉길은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후 숨을 거두었다. 사진에 보면 일부러 윤의사에게 흰 천을 둘러 미간을 쏘고 붉은 피가 나오게 만든것은 일장기 모양을 내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또, 카나자와에서 이른 아침 사형이 집행된 데에 대해서 폭탄 투척 당시 중상을 입고 숨진 시라카와 장군의 세력 근거지에서 그가 병상에서 사망한 시각에 형을 집행한 것이란 설이 있다. 그리고 윤봉길의 시신을 계단 바로 밑에 묻었는데, '''지나가면서 윤봉길을 밟으며 가라'''는 뜻이었다. 이렇듯 일제는 순국마저 욕되게 하였다.
이후 가나자와의 노다야마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1945년 8.15 광복 직후 재일 독립운동가 박열, 이강훈 등이 백범의 지시로 유해를 찾고자 시도했다. 처음엔 공병 작업장에 묻혀 있을 것으로 믿고 찾아내려고 수소문했지만, 관계자들은 "그때 일은 너무 오래됐으며 당시 복무한 군인들이 한 거라 모르겠다"고 했고, 묘표가 없다 보니 찾는 데 난항을 겪었다. 그러나 위수형무소 간수(교도관)이던 시게하라의 협조로[7] 다시 유해를 찾아냈는데, 가나자와 공동묘지 관리사무소 근처 쓰레기 하치장이었다. 결국 수습단으로 간 사람들은 유해의 위치를 알고 분통을 터트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게 유해가 매장된 곳은 공동묘지 관리사무소로 들어오는 길이었기 때문이며, 즉 수습단 자신들을 포함해 14년이란 세월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무덤을 밟고 갔다는 얘기였다. 또 유해가 발굴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탓에 손뼈가 소나무 뿌리에 얽혀서 손뼈 7개만은 수습을 하지못해 현재까지 암장지에 남아있다.
해당 지역 인근에는 윤봉길 기념비와 총살을 당한 지역의 비석이 설치되어 있다. 링크
그의 유해는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와 함께 고국으로 봉환되어 부산에서 봉환식을 거행했고, 이어 서울에 도착하며 태고사에 임시 봉안했다가 장례식을 치르고 용산 효창원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했다. 1962년 건국훈장 중장(現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윤봉길이 호송차 승선했던 타이요마루는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일본 육군의 수송선으로 징발되어 쓰이다가, 1942년 5월 8일 미합중국 해군 소속 탬버급 잠수함 SS-210 USS 그레나디어(Grenadier) 함이 쏜 어뢰에 피격, 승선원 817명과 함께 가라앉았다.

3. 장제스 연구 이전의 인식


윤봉길의 폭탄 투척은 한국 독립운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방점을 찍었고, 1945년 대한민국의 독립에 하나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할 수 있었다. 오로지 윤봉길을 통해 한국이 독립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비약에 불과하지만, 윤봉길의 희생이 없었다면 한국의 독립은 꽤나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될 정도이다.
실제로 이 사건 직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조선인들을 제 나라도 간수 못해 빼앗긴 주제에 중국에 밀입국해 땅을 무단으로 점거하는 불법체류자, '일제의 앞잡이' 등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이 때문에 만보산 사건(완바오산 사건) 같은 화교 - 조선인의 대립까지 발생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긴 상하이 사변을 자축하는 일제의 기념 행사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고, 이게 조선인 청년 한 명의 의거라는 것이 알려지자, 중국인들 사이에서 조선을 항일운동의 동지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퍼졌다.
더구나 윤봉길의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은 수많은 세계인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세계 여론을 완전히 긍정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중국의 통치자였던 장제스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상당하게 지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다만 장제스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1명이 이뤄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는 말로 극찬했다는 사실은 와전이다. 이에 대해서는 바로 다음 문단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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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보듯 나중에 장제스는 윤봉길의 거사에 장렬천추란 휘호를 써서 유족에게 전달해주기도 했다. 이후에도 장제스는 상해임시정부를 승인해주지는 않았지만, 임시정부를 보호하고, 임시정부에 물적 지원을 제공하는 등[8]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또한 장제스는 한반도의 독립을 지지하고, 카이로 회담에서 전후 한국의 독립을 적극 주장하여 관철시키는 등 대한민국의 독립 자체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 결국 윤봉길의 희생이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이끌어낸 계기가 된 것이란 인식이 있었다.

3.1. 장제스 연구 이후


한국과 중국은 각자의 입장 때문에 윤봉길의 폭탄 투척과 한중 항일연대를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배경한 교수는 2017년에 투고한 자신의 논문 <윤봉길 의거 이후 蔣介石 · 국민정부의 한국독립운동 지원과 '長期抗戰'>에서 기존의 인식이 결과론적이며 실증적 검토 없이 퍼져 당시 중화민국 정부의 실상과 본의를 가리고 있다 지적했다. 이에 대해선 장제스 일기, 국민당 내부논의와 당시 최신연구로 규명된 사실에 근거한다. 윤봉길 의사가 대단한 일을 해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에서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20세기초 한중관계에 대한 이해와 직결되므로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가 의거에 감동 받고 이를 찬양했다"거나 "결과론적으로 독립에 기여했다"는 데에서만 머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일단 당시 서방 언론의 일차적 반응은 '비인도적 폭거'라거나 '반인륜적 만행'이라는 식의 비판을 제기하면서도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 일본군의 해외침략에 있다는 점도 지적하는 양비론적 수준이었으며, '일면교섭 일면항전'/'장기항전' 전략을 잡은 중국 국민당 정부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차적으로는 '지극히 불행한 처사'라거나 일본인 희생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한편, 외교적 위문에 나섰다. 이는 국민당 정부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 정전협상을 통해 상해사변의 조속한 해결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한편으로는 오히려 윤봉길의 폭탄 투척으로 인해 일본의 침략전쟁이 재개되지 않을까 강하게 우려했으며 중국의 책임이 아님을 강조했다. 당시 중국 관영 언론들도 신중하긴 마찬가지였으며, 『 上海日報』 등 일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양면적이었다. 물론 중국인들은 내심 일본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외교적 수사의 왕래에도 불구하고, 훙커우 공원 사건이 일반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 기여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장제스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1명이 이뤄내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한 적이 없다.''' 장제스는 일기장에서 “옛날 사마천은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산 개인도 (그 정도가) 정말 심하다고 할 텐데 한 국가의 원수가 되어 원한을 산다면 (그 정도가) 함께 살 수 없을 정도라 했다"면서 "무력을 남용하며 침략을 좋아하는 자들 또한 (이번에) 뉘우치는 바가 있을까?”라고 적었을 뿐이다. "30만 (혹은 100만) 중국군대가 하지 못한 일을 일개 한국인이 해냈다"라는 문구는 『 上海日報』 등 1932년 5월 2일 중국 언론보도에서 발견되는데 이를 장제스가 말했다는 식으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년 뒤인 1933년 봄에 이루어진 김구와 장제스의 면담 내용에서도 이런 격찬과 감동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장제스는 김구가 제안한 특무공작을 거부하며 "천황을 죽이면 또 다른 천황이 있고 대장을 죽이면 다시 대장이 나타날 것이다. (그보다는) 장래 독립을 도모하자면 무인을 양성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한다. 물론, 험악한 분위기에서 이런 말이 오간 건 아니고, 김구와 장제스는 매우 절친한 사이였기에 제안은 정중히 거절되었다.
줄여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윤봉길의 희생은 만보산 사건 등으로 악화되고 침체된 한중 민중 간의 분위기를 풀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일본제국에 저항하고 있음을 전세계에 다시 확인시켜주었으며, 대표성을 상실해가던 임시정부 세력의 숨통을 틔워 중국의 지원을 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정작 중국 정부와 장제스는 자신들의 상황 때문에 이 사건에 즉시, 적극적으로 찬동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 이후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은 장기항전 전략에서 중요한 동북지역에 한인들을 동원하기 위함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중화 국제질서 부활"이 목적이었다. 그나마 김구와 장제스의 친분 덕에 이만큼의 지원이라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항일전쟁 시기 중국과 한국 양측에서 강조해온 “항일(반제국주의)을 위한 동아시아인들의 연대(中韓互助)”와 “동아시아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의 지원”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면모였다는 점과 함께 그것이 가지는 한계성 또한 분명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

4. 평가



4.1. 이승만의 평가


이승만은 윤봉길의 폭탄 투척에 대해 '이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 줄 뿐 한국독립을 가져다 주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평가절하했다.[9]이승만은 철저한 외교론주의자로, 장인환전명운더럼 스티븐스를 암살했을 때 미국 내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된 선례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이 국제사회에 부정적으로 비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가 미국식 의회민주주의를 배운 유학파라는 것을 생각하면 독립운동가들의 무장 투쟁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훗날 한인애국단 활동의 성과 보고서 형식으로 출판된 '도왜실기' 서문에서는 "윤봉길의 희생은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중국 국민당 정부와 임시정부의 연합을 가능케 한 사건이며, 카이로 회담에까지 이어지는 국제적 의미가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즉, 윤봉길의 희생이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결의하는 데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했다.

4.2. 박헌영의 평가


박헌영은 윤봉길의 희생 정신 자체에는 높이 평가했지만 방법론에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다. 1932년 7월에 박헌영은 '상하이 폭탄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루었다. 그는 여기서 '윤봉길의 의거는 결코 살인이 아니며, 일제의 대표들을 죽이고 병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개인적인 테러공산주의와는 무관하다.'고 못 박았다. 즉, 박헌영은 '개인적인 테러는 군중의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투쟁에 장해가 되며, 그들에게 비조직적이고 개인적인 투쟁의 환상을 심어, 결과적으로는 적에게 유리한 무기가 되고 만다.'라고 보았으며,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뒷받침하지 않은 극소수에 의한 폭력' 행위라며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사실 이것은 박헌영이 따르던 레닌과 비록 따르지는 않았지만 우연히도 유사한 삶의 궤적을 따라가게 되었던 트로츠키의 입장이기도 하다. 레닌은 당시 아나키스트들이나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들이 주도하던 차르 암살 시도에 대해 의도는 좋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였다. 트로츠키 역시 '마르크스주의와 테러리즘'이라는 책에서 테러리스트들의 의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론에는 위배된다고 언급하였다. 박헌영 역시 그러한 앞 세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입장을 그대로 취한 것이다.

4.3. 현대의 총평


독립운동에는 외교론, 실력양성론, 무력투쟁론이 나뉘어져 있었는데 사실 1930년대는 셋 중 어느 하나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게 없던 상황이었다.[10]외교로만 하자니 그 당시 국제질서는 철저히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힘의 논리에 기반해 돌아가던 때라[11] 영향력이 없을 게 뻔했고, 실력양성론은 일제의 교묘한 친일 부역자 양산에 이용되었으며,[12][13] 무력투쟁을 하자니 일본 제국과의 전면전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즉,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이 총체적 난국을 타개할 마지막 수단으로서 김구는 의거(義擧)를 택한 것이다. 당시 일본은 물론 독립운동 진영 내부에서조차 큰 비난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한인애국단의 이 폭탄 투척 덕분에 외교론, 실력양성론, 무장투쟁론 모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5. 사진 논란


한때 사건 직후 연행되는 윤봉길의 사진이 진짜냐 가짜냐를 두고 논란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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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연행되는 사진은 일본 아사히 신문 보도사진인데, 상하이 타임즈 등 중국 신문은 윤봉길이 사건 직후 일본군 수십 명에게 구타당해 피투성이가 되어 질질 끌려가 차에 '던져'졌다고 보도되었다. 즉, 중-일 양측의 보도내용이 다르기에, ''''이 사진 속 인물이 정말 윤봉길이 맞는가?\''''가 논란이 되었다.
윤봉길이 거사를 마무리한 시점에서, 주변 군인들(내지 중국 군인-민간인 포함)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라는 주장이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 가설을 채택하여, 사실 사진 속의 인물은 윤봉길이 아니고, 일본군 측이 자신들의 신사적인 대우를 어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체포하여 연행한 것을 찍었다고 방영했다. 해당 방영분에서는 실제 중국신문도 자료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에서 내놓은 윤봉길전집에 의하면 윤봉길의 사진이 맞다. 위조되었다고 주장되는 사진은 왼편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일본병에게 구타를 당하면서 윤봉길의 얼굴에 났던 상처가 가려졌을 뿐이며, 이와 대조적으로 윤봉길이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은 윗 사진에서 가려진 오른편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상처가 가려지지 않고 드러내어진 것이다. 윤봉길의 부인과 친족들, 지금까지의 윤봉길 연구들 모두 윤봉길의 사진이 맞다고 확인했다.

6. 대중매체에서


윤봉길 의사를 다룬 극화물에선 비중 있게 다뤄지는데, 단독 작품으론 1967년작 영화 <일본제국과 폭탄의사(이용민 감독)>이 있으며 1992년 MBC 특집드라마 <님이여>와 1995년 KBS 대하드라마 <김구> 등을 통해 비중 있게 다뤄졌고, 2019년 6월 22일 방영된 3.1운동 100주년 기념 MBC 특별기획 드라마 이몽 15회 (2회연속의 변칙분량으로는 29~30화)에서 이 사건이 재조명되어 다루어졌다. 이 드라마에서 신인배우 이강민이 열연했다.
[1] 결과적으로 상하이를 방어하던 19로군과 5군을 쫓아내는데 성공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를 위해 제공권, 제해권을 모두 장악했음에도 2차례나 병력을 증원해야 했으며 무장도 빈약했던 중국군의 2배나 되는 병력을 동원해야 했다. 이겼다고 하면 이긴 셈이겠지만 일본측에서 자랑할 수준은 아닌 찜찜한 결과였으며 일본군 대대장이 포로로 잡히는 등 중국군을 상대로 전에없는 참담한 결과들이 초래되었다.[2] 참고로 이 날은 현대 일본에서도 공휴일이다. 전후에도 천황탄생일이었다가, 1989년 쇼와 덴노의 사망 이후에는 '녹색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여 공휴일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2007년부터 녹색의 날을 5월 4일(이전에도 두 휴일 사이에 끼어있어서 휴일로 지냈다)로 옮기고 '쇼와의 날'로 변경했는데, 이것 때문에 주변 국가는 물론 일본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3] 일본어 위키피디아에서는 그의 지위를 상하이 거류민단 행정위원회 회장으로 기록하고 있다.[4] 해군 육전대만으로 국민당군의 방선을 뚫을 수 없자 해군 사령관이던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독의 요청으로 파견된 육군을 말한다. 초기에는 1개 사단+1개 혼성여단으로만 구성되었으나 이 정도 병력으로도 방어선이 뚫리지 않자 2개 사단을 추가 파병하여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를 창설하게 된다.[5] 훗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미국에 핵 두 방 맞은 뒤 USS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한 바로 그 인물이다.[6] 위의 사진은 독립기념관 제 5전시관에 전시된 레플리카.[7] 자진 참여 발굴단 중에, 다행하게도 이시가와현에 사는 박성조라는 재일교포가 같이 공부하던 소학교 일본인 동창들을 찾아다니며 수소문에 나섰는데, 요시다(吉田)라는 동창이 “범인이 총살집행의 뜻을 통고받자 형틀까지 20여미터를 당당하게 걸어가며 무슨 염불같은 것을 외우고는 눈가리개는 필요없다고 거부했다. 정말로 훌륭한 태도였다. 총살 때에 진노라는 육군 헌병이 입회했다” 라는 증언을 들었고, 그 진노라는 헌병의 집을 찾아가자 “헌병이었던 동생은 도쿄에 살고 있는데 연락하겠다. 끝에 동생은 그 때 형무관이었는데 아마 무엇인가를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라는 답을 들었으며, 이튿날 다시 만난 진노는 암장 때에 독경(讀經)을 해준 여승이 있었다고 일러주었다. 그 여승이 바로 노다야마 가쿠손인(覺尊院)의 주지로 있던 야마모토 류도(山本了道)로, 야마모토는 자신이 독경을 해주었던 윤봉길이 묻힌 자리를 기억하고 그 지점을 가리키며 "나무아미타불"을 외었고, 과연 그곳에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있었다고 한다.[8] 중일전쟁 중 충칭으로 수도를 옮길 때 차량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1천 대로도 모자랄 지경에 1백 대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에 6대를 할당해 주었다.[9]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창조파와 개조파 (후술할 각주 참조)의 갈등을 중재하지 못했다. 결국 국민대표회의 개최 후 임정이 급속하게 쇠락하고, 이승만은 1925년에 탄핵당한다. 그가 탄핵당하고 7년 후에 훙커우 공원 의거가 발생하였다.[10]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 야심차게 세워져 삼권분립 체제를 갖추고 대미 외교 담당 기관인 구미위원부를 워싱턴에 설치했을 정도였지만, 1923년에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유명무실한 임정을 해산하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자고 주장했던 창조파 (신채호가 대표)와 해산까지는 필요없고 내부개혁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던 개조파 (안창호가 대표)가 격렬하게 갈등하고,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했다. 결국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이탈해 임정은 껍데기만 남은 조직이 되었고, 이를 타개하고자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임시대통령으로 추대한 뒤 의원내각제로 개헌 (국무령) 까지 했으나 큰 성과가 없었다. 김구는 임정이 성장하려면 확실한 성과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고, 그 수단으로 폭탄을 선택하고 1931년 한인애국단을 창설한 것이다.[11] 당시 소련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에 따라 경제개발과 군비 증강에 열을 올리느라 한국인들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줄 여건도 의지도 없었고, 중국은 당장 자기네들도 일제에 당하고 있는(...) 입장이었다.[12] 사실 순수히 실력양성을 주장해 실행에 옮기는 것부터가 일제의 지배 하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이상에 불과했다.[13] 덤으로 자치론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쪽은 독립운동가들을 내부 분열시켜 팀킬을 유도하는 전략에도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