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장렬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유장렬
柳璋烈
'''
<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1878년 12월 5일
전라북도 고창군 오산면 봉리
'''사망'''
1966년 8월 14일
전라북도 고창군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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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유장렬은 1878년 12월 5일 전라북도 고창군 오산면 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전북 일대에서 박경석, 채복만 등 여러 의병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1912년 말 임병찬이 조직한 독립의군부에 한훈, 이기상(李起商) 등과 함께 참여하여 일본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국권 반환 요구와 철병요구서를 제출했다.
1913년 채기중·유창순·한훈·김상옥·황상규 등과 함께 경북 풍기에서 일제 총독부 요인과 친일파 숙청을 목표로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였으며 1915년 대구의 국권회복단(國權恢復團)과 협력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대한광복회는 전라도지역 조직 확대에 힘쓰는 한편 일본인 촌천횡일을 처단하고 군자금을 수합하는 등 수백여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특히 1916년 5월 한훈·곽경렬과 함께 전북 보성군 벌교리의 서도현(徐道賢)과 박곡(朴谷)의 양재학(梁在學) 등 친일파 수명을 처단하였으며, 1917년 1월에는 일경의 수배 속에 서도현의 조카 서인선(徐仁善)을 납치하여 군자금 14,000원을 마련하였다.
또한 오성(烏城)의 일본 헌병분견소를 엄습하여 장총 1정, 권총 1정 및 군도 1개를 탈취하고 계속해서 일경과 친일파 처단 및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 그후 1918년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노출되어 동지들이 붙잡히자 그는 피신하였다. 또한 1919년 4월 이병하(李秉夏)·김제원(金濟元) 등과 함께 전북 고창의 부호 김기팔(金箕八)의 집을 엄습하여 군자금 2,630원을 모금하였고, 이어 전주의 부호 모씨가(某氏家)를 엄습하여 군자금을 획득하려다가 일경의 급습을 받고 교전 끝에 붙잡히고 말았다.
1919년 10월 4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2년형을 언도받고 전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이전의 서도현(徐道賢) 처단 및 서인선으로부터 획득한 군자금 관계, 그외 독립운동 활약이 탄로되어 1922년 11월 징역 5년형이 추가 구형되는 등 전주(全州)·광주(光州) 등으로 옮겨다니며 혹심한 고문과 악형을 당한 끝에 반신불수의 몸으로 15년 만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6년 8월 1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유장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