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1. 개요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2]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의열단의 일원이었으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경관들을 사살하여 항일 무장 투쟁의 발판을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상옥 의사가 순국한 이후 국내외에서 활발한 항일 무장 투쟁이 전개되었으며 거사 당시 쌍권총을 사용하였다는 점도 유명하다.
2. 생애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한학을 수학하는 동시에 어의동보통학교[3] 를 다녔다. 14세부터 낮에는 철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학교에서 공부하는 한편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1910년 경성영어학교를 다녀 국제 정세와 서양 문화에 안목을 넓혔고 1912년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영덕철물상회'를 경영하였으며 1913년 정진주와 혼인하였다. 1917년 물산장려운동과 일화(日貨) 배척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를 위해 말총모자를 창안하고 생산해 보급하였으며 농구, 장갑, 양말 등도 생산해 지방을 순회하면서 국산품을 장려하는데 앞장섰다.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3·1 운동 이후부터였다. 1919년 4월 동대문 교회 안의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혁신단'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혁신공보』(뒤에 『독립신문』으로 개제)를 발간해 독립 사상을 계몽하고 고취하였다. 1919년 12월 암살단을 조직해 일본 고관 및 친일민족반역자에 대한 응징 및 숙청을 기도하였고 1920년 4월 한훈, 유장렬 등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민족반역자 서씨 등을 총살하였으며 오성헌병대분소를 습격해 장총 3정과 군도 1개를 탈취하였다.
1920년 8월 24일 미국 의원단이 동양 각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1920년 5월부터 김동순, 윤익중, 신화수, 서대순 등의 동지를 지휘해 환영하기 위해 나오는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및 일본 고관을 암살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 계획은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었고 동지들이 붙잡혀 단독으로 거사를 추진했으나 여의치 않자 10월 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등과 독립운동 거사 계획에 참여하는 동시에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1921년 7월 독립운동 자금의 모금을 위해 한때 귀국해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모금하여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으며 이 무렵 한당사령부장을 맡게 되었다. 1922년 11월 중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시영, 이동휘, 조소앙, 김원봉 등과 의논해 조선 총독 및 주요 관공서에 대한 암살 및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는데 1923년 1월 사이토 마코토가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도쿄행을 기회로 총살하려는 계획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안홍한을 수행시켜 권총 4정과 실탄 수백 발, 대형 폭탄은 의열단에서 맡아 김한으로부터 받기로 하고 안동현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김상옥은 상하이를 떠나면서 농부 차림으로 변장하고 밤을 틈타 압록강 철교를 건너면서 경비경관을 사살하였고 신의주에 들어와서는 세관검문소 보초를 권총으로 머리를 때려눕히는 등 격투 끝에 국내 잠입에 성공하였다. 이후 서울에 와서 김한, 서대순 등 동지들과 만나 총독을 암살하기 위한 치밀한 거사 계획을 세웠으나 상하이 주재 일본 경찰의 통보로 일제가 경계를 강화하자 총독 암살 거사는 시일을 끌게 되었다.
3. 김상옥 의거
'1923년 1월 12일 밤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는데 이 폭발로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고 행인 남자 6명과 여자 1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큰 소동이 났다. 마루야마 경무국장이 수사를 진두지휘하고 경성검시국의 오하라 검사가 나서 수사를 했지만 의거 당시만 하더라도 의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일본 경찰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1월 17일 일본 경찰은 의거의 장본인을 알아내고 은신처를 추적하였는데 1월 17일 새벽 3시 은신처인 매부 고봉근의 집이 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 와사부로에게 탐지되었다. 종로경찰서 우메다와 이마세 두 경부의 지휘 아래 20여 명의 무장 경찰에게 은신처가 포위되었는데 고봉근의 행랑방에 있던 여자가 종로경찰서에 있는 친정오빠에게 밀고하여 탄로난 것이다. 은신처가 탄로나자 김상옥은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먼저 종로경찰서 유도 사범이며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한 다음에는 이마세와 우메다 경부를 사살하고 다른 일본 경찰 수 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에 추격하는 일본 경찰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가옥의 옥상을 뛰어 다니며 도주했다. 일본 경찰은 군대까지 불러 산을 포위했지만 김상옥은 눈 덮인 남산을 거쳐 금호동에 있는 안장사에 이르러 스님에게 승복과 짚신을 빌려 변장하고 교묘하게 산을 내려왔다.[4] 1월 18일은 무내미 이모집에서 유숙하고 1월 19일 새벽 삼엄한 일본 경찰의 경계망을 피해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은신하며 동상도 치료하는 등 앞으로의 거사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3년 1월 22일 새벽 최후의 은신처마저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고 말았다. 상하이로부터의 서신이 효제동으로 온 것을 전해 준 전우진이 일본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붙잡혀 고문당한 끝에 은신처가 발각된 것이다. 1월 22일 5시 반경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가 총지휘관이 되고 보안과장 후지모토가 부지휘관이 되어 시내 4곳의 경찰서에 총비상령이 내렸다. 기마대와 무장 경관 400여 명이 은신처를 중심으로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였으며 왜경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김상옥은 미처 피신하지 못하자 권총으로 무장한 다음 방 안 벽장 안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는데, 구리다 경부가 방으로 들어와 벽장 안을 열어젖히고 들어오자 김상옥은 그를 가장 먼저 사살했다. 이후 벽장과 붙어 있던 집 벽을 뚫고 순식간에 옆집 74번지를 지나 76번지로 피신하였으나, 겁에 질린 76번지 집주인이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자 다시 담을 넘어 72번지로 갔다. 이후 담벼락을 지탱해 권총 두 자루로 무려 3시간 반 동안이나 총격전을 벌이다가 총알마저 떨어지자 벽에 기댄 채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마지막 1발을 스스로의 머리에 쏘아 자결해 순국하였다. 김상옥은 순국하고 나서까지도 일본군들을 떨게 했는데, 눈을 뜬 채로 사망하여 그의 시신을 본 졸개들이 두려워하여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결국 그의 어머니를 불러다 생사를 확인하게 하였다. 나중에 김상옥의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했을 때 확인한 결과 몸에는 총 11발의 총상이 있었다고 하는데[5] 자결에 사용한 두부의 한 발을 제외하면 10발의 총알을 맞은 것이다. 신념은 총알로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증명한 셈. 이 과정에서 구리다 경부를 위시한 수많은 경찰 간부가 사살되었고 일본 경찰 16명이 사상당했다. 수백여 명의 추격을 받은데다, 총격전이 3시간 반이나 벌어졌음에도 피격당한 총알이 10발밖에 안 된다는 것도 대단하다.[6]
4. 기타
- 일본 철혈 통치의 핵심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1천여 명의 일본 군경에 혼자 맞서 총격전을 벌일 정도의 인물임에도, 안타깝게도 대중들에게는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고 대중매체에서도 잘 다뤄지지 않았다.
-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사람이 진짜 김상옥이 맞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물론 김상옥의 업적을 폄하하려는 의도의 주장이 아니라,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서울역에서 암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경찰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면 당연히 총독의 개인 경계도 강화될 것이 뻔한데 그런 거사를 힘들게 만드는 우를 범할 이유가 있었겠냐는 것. 일제는 진짜 장본인을 찾지 못하고 김상옥의 소행으로 단정해서 그를 추격했다는 것이다.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을 실제로 실행한 인물로는 무명지사 김상환, 맹호단원 이강연, 고려공산단원 이한호 등이 제기되고 있다.
- 일반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이 무장 투쟁에 사용하던 폭탄이 다소 만듦새가 조잡했던 것과는 달리, 종로경찰서에 투척된 폭탄은 위력이 대단했다고 한다.[7] 당시로서는 이 정도의 고성능 폭탄을 제조할 기술력을 지닌 독립운동 단체가 의열단밖에 없었던 것이 거의 분명하므로 김상옥의 의거로 보는 것이 맞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것은 일종의 실험적인 의거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제조된 폭탄의 위력이 실전에서는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는지 시험도 해 볼 겸 조선총독부와 일본 경찰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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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이 전투에서 사용한 권총. 실물은 안타깝게도 찾지 못했고, 증거품으로 찍힌 상단의 사진만 전해진다. 총열이 조금 더 짧다는 점과 방아쇠울이 다르게 생겼다는 점을 빼면 스미스 & 웨슨 38 DA Revolver 38 S&W와 비슷하다. 형태로 보아 은닉이 쉽도록 개인적으로 개조한 모양이다.
-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및 독립장에 추서 되었다.
-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는 김상옥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의사가 순국한 곳이 있는 종로4가 북쪽 효제초교 앞길은 그의 이름을 딴 "김상옥로"로 명명되었다.
- 생전 별명은 '동대문 홍길동'이었다고 한다. 본진과 같은 영덕철물점을 중심으로 독립자금을 지원함은 물론, 무장투쟁을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여,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기마경찰을 맨손[8] 으로 때려눕혀 검을 빼앗았을 만큼 무술에도 능했으며, 당시 총을 다루는 솜씨는 말 그대로 명사수라 불릴 만큼 비범했다고 한다.
- 사회 활동에서도 상당히 시대를 앞선 사람. 자신이 설립한 '영덕철물점'이라는 곳을 기반으로 능란한 사업수완을 발휘해 독립자금을 조달했으며, 당시 철물점 종업원들에게 요즘의 '노동조합'과 같은 단체를 설립해 자신들의 권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단발령 이후 사람들 사이에 잘린 머리를 감추고 다니기 위해 모자가 유행했는데, 이것이 대개 수입산이지라 말총을 이용한 모자를 창안해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 그의 항일 정신을 대표하는 일화 중 하나로, 김상옥 의사가 중국에 있을 때 오랫동안 함께 활동하던 여류 독립투사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일이 있었다. 이때 김구는 김상옥에게 돈을 주며 '관'을 사 오라고 했으나, 김상옥은 그 돈으로 관을 사지 않고 권총을 사 왔다고 한다. 동료의 원한을 갚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관보다는 총이 더 필요하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물론 돈을 마련해 장례식을 위한 관은 따로 구입했다고 한다.[9]
- 보통 여느 독립투사들이 벌인 의거를 기리는 행사를 할 때 '의거 기념식'이라는 표현을 쓰고 사망자들은 순국 '추모식'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런데 김상옥 의사는 사망일이 1월 22일임에도 '순국 추모식'이라는 말 대신 '시가전 승리 기념식' 또는 '독립활동 기념식'이라는 용어를 쓴다. 비록 일본제국 경찰과 서울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이시고 마지막 한 발로 순국했으나, '시가전'이라고 칭송될 만큼 혁혁한 공로를 세운 데다 당시 일제에 준 충격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역사가에 따라서는 김상옥 의사가 펼친 활약으로 일본에 억눌린 우리 민족이 저항을 위한 의지를 되찾았고 이후 항일 무장투쟁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 실제 생존 애국지사 중 한 명은 어릴 적 신문에 난 김상옥 의사의 투쟁을 보고 '일본 놈들은 수천 명인데 왜 이분은 홀로 싸우시는가?'라며 독립운동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 순국하는 당시의 일화에도 일본제국 경찰들이 김상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잘 나타난다. 김상옥 의사는 마지막 총알로 자결한 후에도 양손에 권총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멀리서 이 모습을 본 일본제국 경찰들은 김 의사가 살아 있을까봐 다가가지 못했고, 결국 김 의사의 어머니를 보내 생사를 확인하게 했다고 한다.
- 종로 5가 효제동 김상옥 의사 의거터라는 정류장(정류장 ID : 01-204)이 있다.
5. 대중매체에서
드라마틱한 생애, 영웅 그 자체라는 인물이기에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데 대단히 적합한 인물이지만 실제 작업이 이루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독립 이후 영화화를 위한 시도가 있었으나 좌절되었고,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시도가 있었으나 번번히 엎어졌다. 하지만 김상옥 의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크리에이터라면 다들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는 의지를 보이는 만큼, 조만간 결과물이 도출될 가능성이 높다.
- 드라마 및 만화 원작 각시탈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라는 얘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
- 아래는 김상옥 의사와 관련된 다큐멘터리 자료이다.
[1] 폭탄 투척 후 경찰들과 쌍권총으로 총격전을 벌이다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자결하였다.[2] 상하이를 떠나면서 남긴 김상옥 의사의 말. 사실상의 유언이다. 오늘날 서울시 종로구 효제초등학교에 이 어록의 비문이 세워져 있다.[3] 오늘날의 종로구 효제초등학교.[4] 이 때 추적을 방지하기 위해 짚신을 거꾸로 신었다는 일화가 있다. 안장사 방향으로 발자국이 향하도록 짚신을 신었다는 이야기.[5] 이 때의 광경을 당시 17살이던 서양 화가 구본웅이 목격했다고 한다. 구본웅은 자신이 목격한 김상옥 의사의 죽음을 시화집 "허둔기"에 그림과 글로 남겼다.[6] 의열단은 다른 독립운동 단체보다 침투와 도주에 능했는데, 김상옥 의사는 말할 것도 없고 김익상 의사는 조선총독부에 침입해 폭탄을 투척한 다음 건물에 있던 사람들에게 경고까지 한 다음 유유히 도망쳤다. 참고로 저 의거 당시 김익상은 전기 수리공으로 위장한 상태여서, 들어올 때나 나갈 때나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7] 당시 언론 보도에는 폭탄 제조자가 유태인이나 아랍인일 것이라고 추측할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KBS 다큐 등에 따르면 폭탄의 제조자는 이태준 선생이 소개해 준 헝가리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다만 이태준은 이미 1921년 죽었고, 사건은 2년 후의 일이므로 사실성이 떨어진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8] 기마경찰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대인 일본제국 경찰이 말에 타고 있었으므로 그가 훨씬 불리했음에도 제압하고 검을 빼앗은 것이다. 그저 구전되는 에피소드가 아니며, 실제로 이때 빼앗은 검이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9] 비슷한 이야기가 곽낙원 여사에게도 있다. 여사의 생일상을 차리겠다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내 먹을 것은 내가 마련할 터이니 돈을 달라"고 한 다음, 생일날 모인 사람들 앞에서 권총 두 자루를 내놓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