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밀
1. 소개
조선상고사에 인용된 《해상잡록》 (海上雜錄)[1] 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인물. 을밀 관련 사실은 아래 기록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다. 아래의 기록은 춘향전의 모티브라고 추정되는 안장왕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으므로 안장왕 항목과 함께 보는 게 이해에 도움이 된다.
안장왕이 주가 갇혀 있음을 몰래 탐지하여 알고 짝없이 초조하나 구할 길이 없어 여러 장수를 불러 “만일 개백현(皆伯縣)을 회복하여 한주를 구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천금과 만호후(萬戶候)의 상을 줄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아무도 응하는 자가 없었다. 왕에게 친누이동생이 있어 이름을 안학(安鶴)이라고 했는데 또한 절세의 미인이었다. 늘 장군 을밀 (乙密 ) 에게 시집가고자 하고 을밀도 또한 안학에게 장가들고자 하였으나 왕이 을밀의 문벌이 한미하다고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 을밀은 병을 일컬어 벼슬을 버리고 집에 들어앉아 있었는데 , 이에 이르러 왕이 한 말을 듣고는 왕에게 나아가 뵙고 “천금과 만호후의 상이 다 신의 소원이 아니라 , 신의 소원은 안학과 결혼하는 것뿐입니다 . 신이 안학을 사랑함이 대왕께서 한주를 사랑하심과 마찬가지입니다 . 대왕께서 만일 신의 소원대로 안학과 결혼케 하신다면 신이 대왕의 소원대로 한주를 구해오겠습니다 .”라고 하니 , 왕은 안학을 아끼는 마음이 마침내 한주를 사랑하는 생각을 대적하지 못하여 드디어 을밀의 청을 허락하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였다 . 을밀이 수군 ( 水軍 ) 5천을 거느리고 바닷길을 떠나면서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먼저 백제를 쳐서 개백현을 회복하고 한주를 살려낼 것이 니 대왕께서 대군을 거느리고 천천히 육로로 쫓아오시면 수십 일 안에 한주를 만나실 겁니다 .”하고 비밀히 결사대 20 명을 뽑아 평복에 무기를 감추어가지고 앞서서 개백현으로 들여보냈다 . 태수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그 생일에 관리와 친구들을 모아 크게 잔치를 열고 오히려 한주가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 사람을 보내 꾀었다 . “오늘은 내 생일 이다 . 오늘 너를 죽이기로 정하였으나 네가 마음을 돌리면 곧 너를 살 려줄 것이니 , 그러면 오늘이 너의 생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한주가 대답하였다 . “태수가 내 뜻을 빼앗지 않으면 오늘이 태수의 생일이 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태수의 생일이 곧 내가 죽는 날이 될 것이요 , 내가 사는 날이면 곧 태수의 죽는 날이 될 것입니다 .” 태수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빨리 처형하기를 명하였다 . 이때 을밀의 장사들이 무객( 舞客 ) 으로 가장하고 잔치에 들어가 칼을 빼어 많은 손님을 살상하고 고구려의 군사 10만이 입성하였다고 외치니 성안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 이에 을밀이 군사를 몰아 성을 넘어 들어가서 감옥을 부수어 한주를 구해내고 , 부고 ( 府庫 ) 를 봉하여 안장왕이 오기를 기다리고 , 한강 일대의 각 성읍을 쳐서 항복받으니 백제가 크게 동요하였다 . 이에 안장왕이 아무런 장애 없이 백제의 여러 고을을 지나 개백현에 이르러 한주를 만나고 , 안학을 을밀에게 시집보냈다
《조선상고사》(출처:위키문헌)
2. 실존 인물?
혹자는 '을밀대가 을밀에게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을밀대'는 고려사 지리지 평양부조에 이미 등장하였다. 그러므로 역사학적 방법론에 따라 해석하면 오히려 을밀대에서 을밀이라는 인물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을 뿐, 그 역을 뒷받침하는 사료는 없다.
3. 기타
조선 후기의 견문록인 계산기정에서 을밀의 묘가 언급된다. 소남문 밖에 동그런 봉분 형상이 있어서 생겨난 전승으로 추정된다.부벽루는 장경문(長慶門) 밖, 전금문(轉錦門) 안, 영명사(永明寺)의 동쪽 켠에 있는데, 훌쩍 날 듯이 뛰어나 있고 강물이 담벼락을 때리며 암벽이 둘러싸고 치솟아 있다. 뒤에는 모란봉(牧丹峯)이 있고 앞에는 능라도(綾羅島)가 마주 보고 있다. 부벽루의 앞 기둥에는 ‘고요한 그림자는 벽옥을 가라 앉힌 것이요, 부동하는 광채는 금이 날뛰는 거라.[靜影沉璧 浮光躍金]’라는 대련(對聯)이 있다. 아름답고 깨끗한 점으로는 동방의 누대 중에서 으뜸간다. 동쪽으로 바라보면 조천석(朝天石)이 멀리 하늘과 같이 푸르고 서쪽에는 을밀대(乙密臺)가 소남문(小南門) 밖에 있는데 성가퀴가 둘러 있다. 그 가운데에 둥그런 봉분 형상이 있어 어떤 사람은 '''을밀(乙密)의 묘(墓)'''라고도 하는데, 읍 사람들이 그 의견에 따라서 산에 제사하는 곳으로 삼았다. 밤이 깊어지자 술에 취하여 득월루(得月樓)를 거쳐서 돌아왔다.
이해응의 계산기정(18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