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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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Nguyễn Trãi, 阮廌[1]
1380년 9월 19일 ~ 1442년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작품


1. 개요


대월의 문신이자 시인, 유학자. 대월 후 레 왕조의 개국공신으로, 초대 황제인 레러이를 도와 명나라에 복속된 대월을 독립시키고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15세기 대월의 한시들 중 걸작으로 꼽히는 것 대다수가 그의 작품으로, 특히 그가 명나라에게 승리를 거둔 후 집필한 선언문인 평오대고(平吳大誥, Bình Ngô đại cáo)가 대표적이다. 한국사로 치면 정도전과 비슷한 행적을 살다 간 사람이다.

2. 생애


1380년 9월 19일, 대월의 탕롱(Thăng Long, 지금의 하노이)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호 왕조의 관료였지만, 1406년에 영락제가 이끄는 명나라의 침공으로 제 4차 식민지 시기가 시작되면서 당시 지방 토호였던 레러이가 이끄는 봉기에 가담한다.
이후 1407년부터 1423년 까지 10년이 넘도록 응우옌짜이와 레러이는 숲속에서 게릴라전을 지속하며 명나라군에 저항했다. 중간에 협상이 오가고 영락제가 병사하기도 했지만 독립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홍 강 삼각주에서 왕통 장군의 군대를 격파하고 살아남은 명나라군 병사들을 생포함으로서 제 4차 식민지 시기가 막을 내린다. 응우옌짜이는 이를 기념하여 베트남 역사상 두 번째 독립선언서인 평오대고를 남긴다.
다이응우(大虞, Đại Ngu)는 다시 다이비엣(大越, Đại Việt)으로 새롭게 재건됐고, 응우옌짜이는 승상의 자리에 오른다. 승상직에 오른 이후 대월의 여러가지 제도들을 정비했지만, 권력다툼에 밀려 야인으로 전락하고 시골로 돌아가서 지냈다.
그러나 태조(레러이)의 사후 차기 황제로 등극한 태종이 그의 집을 방문하다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 일로 그는 조정에서 귀족들에게 모함을 받게 되었다. 결국 태종을 암살했다는 죄목[2]으로 체포되어 가족들과 함께 처형되어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한다.
사후 그가 지은 한시들과 문집들이 폐기되어 상당수가 실전됐다. 나중에 20년 후 성종은 응우옌짜이가 무죄임을 인정, 복권되어 명예를 회복했다.

3. 기타


베트남에서는 호치민 시 등 주요 도시에 이 사람의 이름읕 딴 거리인 응우옌짜이로가 있고 응우옌짜이 대학교도 있을 정도로 민족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개봉한 2012년작 베트남 무협영화 '황제암살단(원제 : Thiên mệnh anh hùng)'에서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응우옌짜이가 대역죄인으로 몰려 가족들과 함께 처형당할 당시 응우옌씨 가문의 하인 덕분에 목숨을 건져 오지의 절에 몸을 의탁해 성장한 응우옌짜이의 아들이 가족을 죽인 황실에 복수하고 진실을 밝히는 내용이다.

4. 작품


  • 한시
    • 난후도곤산감작(亂後到崑山感作, Loạn hậu đáo Côn Sơn cảm tác)
    • 청우(聽雨, Thính vũ)[3]
    • 기우(記友, Ký hữu)

[1] 완태, 廌는 해태 또는 해치를 의미하며 마찬가지로 태(베트남어 Trãi)와 치(베트남어 trĩ) 두 가지 음이 있다. 여기서는 태로 읽는다.[2] 응우옌짜이는 자신의 첩 응우옌티로(Nguyễn Thị Lộ, 阮氏路)를 마음에 들어하던 태종에게 첩을 바쳤는데 태종 승하 후 이 첩이 응우옌짜이가 태종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심문관에게 말했다. 그러나 응우옌짜이가 태종을 암살했다는 설은 훗날 태종의 아들인 성종이 이를 부정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낮다. 태종의 급사 원인은 아직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말라리아 사망설, 응우옌짜이 반대 세력의 음모설, 응우옌짜이가 진짜 암살했다는 설, 태종의 황후인 응우옌 황후(阮皇后)의 흑막설, 복상사(...) 설까지 다양한 설이 제기되고 있다.[3] 빗소리를 듣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