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화(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이민화는 1898년 1월 13일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 방현리에서 부친 이규진(李奎溍)과 모친 김해 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충무공 이순신의 11대손으로, 13살 때 천안군 풍세면에 사는 창원 유씨와 혼인하고 처가 댁에 살면서 학문에 전념했다. 그는 성정이 불같았다고 전해진다. 한 번은 위 처남과 몸싸움이 벌어져 입고 있던 저고리가 찢어지자 그 찢어진 저고리를 장대 높이 매달아 처갓집 대문에 높이 세워놓고 "사위 대접을 이렇게 하는가?"라고 항의했다고 한다.
이민화는 1916년에 외아들을 낳은 뒤 아들이 돌이 지날 무렵인 1917년 12월 만주로 홀연히 떠났다. 그는 만주에서 대종교에 입교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담하였다. 1919년 8월 북로군정서가 조직되자 이에 참가하여 제2학도대 제2구대장으로 임명되어 사관연성소 생도들을 통솔하면서 교관으로도 활동했다. 이후 그는 나중소가 지휘하는 교성대(敎成隊)에 편입되어 소대장을 역임했다.
김훈(金勳)의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의 10월 20일 청산리 전투 첫 기사에 따르면, 이민화는 골짜기 본도(本道)의 전방 60도 경사진 산복(山腹)에서 매복하여 적을 기다렸다가 일본군이 나타나자 전투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천수평 전투에서는 천수평 남방 고지를 선점하여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혔으며, 뒤이어 어랑촌 전투에 참가해 천수평 북방고지로 이동하여 주요 거점을 점령했다.
청산리 전투가 끝난 후, 이민화는 본대와 함께 북상하여 1920년 12월 말에 밀산에 도착했다. 그 후 러시아령 자유시에 가서 고려혁명군의 장교가 되었으나, 자유시 참변을 겪고 러시아 령을 탈출했다. 그러나 1923년 9월 13일 밀산에서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중국 토비(土匪)와 교전 중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이민화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