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clearfix]
1. 개요
16세기 조선의 무신.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4] 을 통솔했던 제독이자 구국영웅이다.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5] .
한국사의 모든 장군들을 통틀어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한 공로를 인정받아 난세의 명장을 넘어서 성웅[6] 이다. 명실상부 한국사에서 세종대왕과 함께 과거나 현재나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추앙받는 단 둘 뿐인 위인이다.
2. 설명
대한민국인들에게 독보적으로 유명한 역사 속의 군인이자 성웅이라는 별명이 따로 쓰일 정도로 대표적인 영웅이다. 한 인간으로서도 희대의 걸물이자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내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을 이끌고 해상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북상을 저지하였는데 전쟁 내내 적과 싸워 모든 전투에서 최소한의 희생으로 항상 승전을 거두었지만 당시 임금인 선조[7] 와 조정에게 지원은커녕[8] 불합리한 모함과 추궁을 꾸준히 당하였다. 그럼에도 이순신 본인은 끝까지 임금에게 닿지 않을 충성심과 함께 온 힘을 다했으나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 해전에서 일본군에게 마지막 타격을 입힘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누군가의 평 처럼 임진왜란을 위해 살았고, 왜란이 끝나자 떠나간 사내.
사후 조정은 관직을 추증했고 선비들은 찬양시(詩)를 지었으며 백성들은 추모비를 세우는 등 지속적으로 많은 추앙을 받아왔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순신은 현대 한국에서 성웅, 명장, 영웅이라는 최상급 수사들이 이름 앞에 붙어도 어떤 이의도 제기받지 않는 세종대왕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한국사 양대 위인이다.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세종대왕과 1, 2위를 다투며[9] 한국에서 전무후무한 성웅이라는 호칭은 오직 이순신에게만 사용되고 있다.[10] 충무공이라는 시호도 실제로는 김시민과 같은 여러 장수들이 받은 칭호지만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이순신 전용 시호로 인식된다.
사실 이순신이 이토록 위대한 평가를 받는 이유는 이순신의 군사적인 위업을 떠나서 보통 사람으로서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성인#s-2.1(聖人)이었다는 점이다. 이순신은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잔혹하고 거대한 형태의 폭력인 전쟁이라는 상황을 수행하며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감당하였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여러 사람들의 질시와 모함을 받아 파면당하고 관리로서 받은 조정의 비합리적인 처우 등 앞으로는 왜적과 싸우며 뒤로는 조정과 임금이라는 내부의 적과 맞서 홀로 버텼다. 또한 어머니와 아들까지 연이어 전시에 잃고 설상가상 자신이 모든 걸 쏟아부어 육성한 정예군이 거의 궤멸 수준으로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다시 일어나 오랜 전쟁으로 단련된 수 십배의 적군에 맞서 출전이 곧 죽음임이 확실시되는 절망적인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싸워 결국 이겼으며 천재적인 능력과 노력을 발휘하여 임진왜란 당시 존망의 위기에 빠진 조국과 백성을 끝끝내 지켜냈다. 이순신은 이처럼 자신이 처한 참담한 상황에서 인간으로서 지닐 수 있는 이상과 펼칠 수 있는 능력의 극한을 보여준 위대한 인물로 심지어 적국인 일본조차 이순신을 동경하고 사당을 세울 정도였다.[11]
이순신은 웃음이 적고 행동이 단아했으며 좌절과 포기를 모른 채 자신의 사명에만 충실하여 전장에서 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탐관오리들이 자신의 위신을 높이고자 높으신 분들과 뇌물을 주고 받는 동안 부정행위를 하지 않고 무관의 본분에 충실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원리원칙적인 성향과 굉장히 청렴한 성격 탓에 당시 상사들과 갈등이 많아 임진왜란 전에는 인사 이동이 자주 있어 여러 지역을 옮겨 다녔다. 이순신은 사람이 갈망하는 권위나 권력 같은 원초적인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신념으로 매사에 임하는 사람이었다. 이순신은 전장에서 싸우다 죽던 순간까지 누구의 인정과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직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헌신하였으며 몇몇 전투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적을 세워 어떻게 이뤄낸건지 아직도 학설이 분분할 정도이다.[12] 가령 명량 해전의 초반부에서 물살이 바뀌기 전까지 약 2시간 가량을 이순신은 대장선 1척으로 일본 측 함선 133척과 정면으로 붙어 하나하나 박살내고 있었다.[13] 분명히 조선 측과 일본 측의 풍부한 사료로 교차검증이 가능한 기록임에도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오히려 왜곡된 유사역사학자의 주장을 믿고 마는 것이다. 일개 병졸 하나하나의 공을 세세히 적어 장계를 올려 포상을 받게 했으며 자신의 공적을 부하들에게 돌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대표적으로 명량 대첩 때 자신의 공로를 안위에게 준 것이 있는데 그 덕에 안위는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허나 마냥 너그럽게 대했냐고 했다면 이것도 아닌데 훈련을 게을리하는 병사들을 매우 엄히 다스렸으며 심지어 조선 수군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왜군이 아닌 이순신 장군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고로 당근과 채찍을 정확히 다루어 부하들을 부린다고 할 수 있겠다.[14] 또 이런 사람이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기에 때맞춰 등장하여 경이로운 활약상을 남긴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 되겠다. 만약 이순신 같은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조선은 수륙 협공을 통하여 일본에게 순식간에 먹혔을 것이고 이후 명나라와 일본의 땅따먹기 전면전으로 조선은 말 그대로 가루가 됐을 것이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전투 수행 능력이 익히 알려져 있지만 기록을 보면 전략적인 식견이 그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당시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조선 수군의 총 전력은 일본군보다 열세였지만 대부분의 전투를 수적 우위를 점한 채로 압승을 거두며 심할 때는 이러한 각개 격파가 하루 동안 5~6번이 일어나 그 전투들만으로 출정한 조선 수군의 전력을 넘어서는 일본군을 수장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연합 함대를 중시하여 항상 만전의 화력을 갖추고 싸우는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적보다 열세인 상황에서 전투를 벌인 때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만한 완벽한 함정을 팠거나(한산도 대첩),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치적 이유로 출정해야 했거나(장문포 해전), 그 이상 전투를 피하면 나라가 망하는 때(명량 대첩)뿐이었다.
함대 설계 및 훈련,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전 국토가 전쟁의 화마로 털리는 바람에 교지를 쓰거나 기록을 남길 종이마저 부족했던 중앙 정부에게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 남해안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며 어로 활동으로 군량과 군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기피 대상이었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벗고 뛰어다닌 결과 1만명 이상의 병력을 중앙 정부의 지원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것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 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 한 번뿐이었다. 원균이 5천명의 병력을 지원받고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특히 자기 휘하로 피난 온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다스려 칭송을 받으며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였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과 충성심 덕에 적국이었던 일본조차 사후 연구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15]
이외에도 독보적인 정직함과 청렴함[16] 도 현대 한국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요소 중 하나다. 이순신을 뜯어 보자면 '존경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순신은 완벽에 가까운 인물이었고[17] 이러한 이유 때문에 40년 가까이 대한민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3. 역임 관작
- 사후 추증된 관작
- 해석:
- 생전(전사 직전)의 관작
- 행[28] 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상기된 80여 자의 기나긴 직위명들을 현대식으로 풀이하자면, 이 충무공은 생전에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으로서 장관급의 명예직에 상당하는 의전 예우를 받은 뒤[31] , 해군작전사령관 및 함대사령관을 겸직하고, 미국 대통령으로부터도 미 해군 원수직을 수여받은 셈이 된다. 나아가 사후에는 대한민국장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총리급의 명예직과 예우를 수여받은 것이 된다. 훈장의 경우에는 다소 애매한 비유이지만, 수여된 관직들의 경우 일반인들이 쉽게 인식하는 현재의 관제로 비교하자면 위와 같은 셈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미 해군 대원수직[32] 을 동시에 받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군사적 업적을 인정 받아 예우에서 밀리지만 미국에서 명예 원수로 대우하는 셈이고, 죽은 뒤 200년 가까이 되어는 국무총리를 부여받은 격이다.[33]
생전에 이순신이 계급이 낮을 때 장군이라고 불린 적은 있지만, 정작 가장 잘 알려진 시절에는 장군으로 불리지 않았다. 상기된 직책들 가운데 가장 품계가 낮은 직책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인데, 수군절도사면 절충'''장군''' 품계로 장군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품계 중 최상의 품계이며, 또한 당상관에 해당되었다. 당연히 조선시대에 정3품 당상관 이상의 관리에게, 통제'''사또'''나 '''영감'''이라고 부르지, 장군이라는 호칭을 쓰는 일은 없었다.[34] 게다가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는 종2품 직으로 가의/가선대부 품계가 필요했는데 이는 엄연히 영감이라고 불리는 문반 품계였으니 장군이라고 부르면 모욕이었다[35] . 그러나 현대의 통상적인 장군이라는 호칭이 대중들에게 좀 더 익숙하게 다가오는 말이었고, 여러 미디어에서 대중들에게 익숙한 장군이라는 호칭을 쓰면서 이순신 장군이라는 칭호가 굳어지게 되었다. 대한민국 해군이나 관련 관계자들은 현대에 육군 계열의 칭호로 쓰이는 장군 칭호를 기피하고 대신 해군이 사용하는 칭호인 제독을 붙여서 이순신 제독이라고 부르는 편이다. 현대 대한민국 국군에서 육군 장성은 장군, 해군 장성은 제독 칭호를 쓰기 때문이다.[36]
시대적으로도 장군이라는 명칭은 맞지 않고, 현대 기준에서는 제독 혹은 원수라고 부르거나, 당시 기준으로 정3품부터는 군대를 전역하고 문관으로서 올라가야 했기에 더이상 장군이 아니라 사또나 영감 그리고 정2품부터는 대감이라고 불러야 한다. 따라서 수사또, 수사 영감, 통제 사또, 통제사 영감, 통상 대감(정헌대부 시절), 종3품 이하일 땐 전부 나리(나으리) 등으로 부르는 게 올바른 역사적 고증이다. 이순신/평가 문서로. 외국에서도 이순신 같은 해군 지휘관은 철저히 Admiral이라고 붙여 부른다.[37]
4. 어록 및 장계
'(전라)좌우도의 전선은 본시 있던 것과 새로 만든 것을 물론하고 먼저 집합한 것이 110척이요, 사후선도 110척이라 사부,격군을 합해서 무려 1만 7,000여 명이나 됩니다 1명당 아침, 저녁으로 각각 5홉씩 나누어 준다면 하루 먹을 것이 적어도 100여 석이요, 1달에 드는 것이 3,400여 석 입니다. 경상우도는 벌써 바닥이 나서 식량을 각출할 도리가 없고, 전라도 열 고을만 쳐다보는데, 열 고을에서도 남아 있는 군량에서 백성들을 구제할 식량을 제하고 나면 수군들 먹을 군량은 겨우 앞으로 2달 남짓, 5월 보름께 밖에 더 계속되지 못할 실정입니다'
《청조획군량장》 갑오년 3월 10일 中 군량미를 걱정하는 이순신 장군
'수전과 육전의 어렵고 쉬운 점, 그리고 지금의 급한 일들을 들어가며 다음과 같이 망령되이 진술하는 바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십중팔구는 겁쟁이이고, 용감한 자는 열에 한둘밖에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분간되지 않고 서로 섞여 있지만 일단 소문만 들리면 그저 도망갈 생각만 하고 놀라서 달아나는데.....[생략] ...... 수전의 경우에는 수많은 군사들이 모두 다 같은 배 안에 있으므로 적선을 바라보고 비록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갈 수가 없으며 노질을 재촉하는 북소리가 울리면, 그 뒤를 군법이 따르니 모두 전력을 내어 싸우게 됩니다. 이것은 수전의 쉬운 점입니다'
《선조실록 계사년 9월 10일》 中 - 이순신 장군이 바라본 육군과 수군의 통솔 차이
'''수사가 수군의 대장으로서 호령을 내리더라도 각 고을의 수령 등은 자신의 소관 사항이 아니라고 핑계대면서 전혀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군사상 중대한 일까지도 내버려 두거나 등한시하는 일이 많아서 매사가 이완되고 있으므로 이런 큰 사변을 당하여 도저히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감사와 병사의 예에 따라서 고을의 수령들까지 수사의 지휘를 받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조실록 계사년 9월 10일》 中 - 이순신 장군이 바라본 전시행정
三尺誓天 山河動色 '''
一揮掃蕩 血染山河 '''석 자 칼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이순신의 장검 2자루에 새겨져 있는 문구이며, 해당 문구는 이순신의 친필이다.[38]
鑄得雙龍劍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런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
쌍룡검에 새겨져 있는 문구
閑山島月明夜上戍樓 撫大刀深愁時 何處一聲羌笛更添愁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39]
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의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勿令妄動 靜重如山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산처럼 무거이 침착하라!
옥포 해전을 개시하면서
今臣戰船 尙有十二
戰船雖寡 微臣不死則 不敢侮我矣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40]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에 실려있는 명량 해전에 앞서 올린 장계.
必死則生 必生則死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41]
此讎若除 死即無憾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이충무공행록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今日固决死 願天必殲此賊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백사집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戰方急 愼勿言我死 '''싸움이 급하다.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
- 이분[44] 의 충무공행록
임진장초 및 난중일기 원문 번역사이트들[45]##임진장초 원문
5. 용모
[image]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해군사관학교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 (이게 광화문광장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동상보다 더 실제에 가깝다는 평가가 많다)
6. 생애
6.1. 연표
- 1565년(21세) 명종 20년
- 이즈음에 방진의 딸인 방수진과 결혼. 그 전년도였을 수도 있다.
- 1573년(29세) 선조 6년
- 훈련원 별과에 응시, 낙마(落馬)해서 탈락하다.
- 1576년(32세) 선조 9년
- 1580년(36세) 선조 13년
- 둘째 형 이요신이 죽다.
- 7월: 전라 좌수영 관내 발포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47] 로 전근, 서익이 불러 부당 인사를 제안하나 일언지하에 거절함.
- 1582년(38세) 선조 15년
- 1월: 군기경차관[48] 으로 온 서익이 과거의 일에 대한 보복으로 근무 태만이라 거짓 보고를 올려 발포 수군 만호 직에서 파직되다.
- 5월: 종8품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다.
- 1583년(39세) 선조 16년
- 1584년(40세) 선조 17년
- 1월: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잠시 벼슬을 떠나 삼년상을 치른다.
- 1586년(42세) 선조 19년
- 1월: 복직하여 사복시 주부(종6품)가 되다.
- 2월: 종4품(중령)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종4품 이상의 장군직)로 임명되다.
- 1587년(43세) 선조 20년
- 1588년(44세) 선조 21년
- 1월: 여진족 시전부락 공격에 참가, 공을 세워 사면되어 백의종군 해제.
- 6월: 아산으로 내려가다.
- 1589년(45세) 선조 22년
- 1590년(46세) 선조 23년
- 1591년(47세) 선조 24년
- 1592년(48세) 선조 25년
- 4월 12일: 거북선(귀선) 건조를 완료하다.[53]
-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다.
- 4월 15일: 전쟁 발발 소식을 고지 받다.
- 5월 4일: 전라 좌수군의 1차 출동.
- 5월 7일: 옥포와 합포에서 승리로 거두다.
- 5월 8일: 적진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5월 : 종2품하계 가선대부로 가자되다.
- 5월 29일: 전라 좌수군의 2차 출동. 사천 앞바다에서 승리로 거두다. 이때 이순신이 총상을 입었다. 거북선을 실전에서 처음으로 사용하다.
- 6월 2일: 당포 앞바다에서 승리를 거두다.
- 6월 5일: 당항포에서 첫번째 승리를 거두다.
- 6월 7일: 율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6월 : 정2품하계 자헌대부로 가자되다.
- 7월 6일: 전라 좌수군의 3차 출동.
- 7월 8일: 한산도에서 승리를 거두다.
- 7월 10일: 안골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7월 : 정2품상계(중장 과 대장 사이 실질적으로 도원수[54] 정헌대부로 가자되다.
- 8월 24일: 전라좌수군의 4차 출동.
- 8월 29일: 장림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9월 1일: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 부산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1593년(49세) 선조 26년
- 1594년(50세) 선조 27년
-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의 6번째 출동.
- 3월 4일 당항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9월 29일 장문포에서 첫 번째 승리를 거두다.
- 10월 1일 영등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10월 4일 장문포에서 2번째 승리를 거두다.
- 1597년(53세) 선조 30년
- 2월 6일: 선조가 이순신의 파직을 명하다.
- 2월 10일: 부산포로 출정해 무력 시위를 벌이고 돌아오다.
- 2월 25일: 통제사 직에서 해임되다.
- 2월 26일: 후임 삼도수군통제사인 원균에게 인계 후 서울로 압송당하다.
- 3월 4일: 감옥에 갇히다.
- 4월 1일: 옥중 생활을 마치고 나오다. [55]
- 4월 2일: 류성룡을 만난 후,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지시 받고 내려가던 도중 아산에 들러 잠시 머물다.
- 4월 11일: 어머니가 별세하다.
- 4월 13일: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접하다.[56]
- 7월 23일: 이조판서 이항복, 경림군 김명원의 건의로 이순신이 종2품 삼도 수군 통제사에 복직하다.
-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수군을 폐하라는 지시를 전하다.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배 12척이 남아있나이다."라는 장계를 올리며 수군의 폐지를 반대하다.
- 8월 18일: 경상 우수사 배설로부터 전선 12척을 인계받다.
- 8월 28일: 어란진에서 왜선 8척과 조우, 교전 끝에 승리를 거두다.
-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기다.
- 9월 2일: 배설이 도주하다.
- 9월 16일: 전선 13척과 피난선에 힘입어 명량(鳴梁)입구인 임하도의 좁은 목(우수영 앞바다)을 이용하여 일본군 133척과 맞서 싸워 승리하다.
- 10월 14일: 셋째 아들 이면의 전사 소식을 듣다.[57]
- 10월 29일: 고하도로 진을 옮기다.
- 1598년(54세) 선조 31년
- 2월 17일: 고금도로 이진하여, 새로운 통제영으로 삼다.
- 7월 19일: 절이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9월 20일: 명군과 합류해 장도에서 승리를 거두다.
- 10월 7일: 명군과 합류해 왜교성에서 전투를 진행하였으나, 명군의 무리한 전술로 소득을 얻지 못하고 물러나다.
- 11월 19일: 퇴각하는 왜군을 노량에서 요격하던 중 관음포에서 총탄에 맞아 전사하다.
- 1604년 선조 37년
- 덕풍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이후 좌의정에 추증되다.
- 1643년 인조 21년
- 충무라는 시호를 받다.
- 1707년 숙종 33년
- 숙종이 친히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을 하사하다.
6.2. 태어나기 이전
본관은 덕수 이씨로서, 고려 때의 중랑장 이돈수(李敦守)의 12세손이자 조선 초의 영중추부사였던 이변(李邊)의 후손이다. 아버지 이정(李貞)은 부인 초계 변씨와의 사이에서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신(臣)을 돌림자로 중국 고대의 성인인 복희, 제요, 제순, 대우 임금의 이름을 차례대로 붙여 희신(羲臣), 요신(堯臣)[58] , 순신(舜臣), 우신(禹臣)이라 지었다. 할아버지 이백록이 태몽에 나타나 이름을 '순'이라 지으라고 했다는 설화도 있지만,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설화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59]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덕수 이씨는 문반에 가까웠는데, 할아버지가 기묘사화 때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고[60] 집안이 무반으로 전환하게 되었다는 낭설이 퍼져 있지만, 기록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61] 사실 덕수 이씨는 오늘날 한국 기준 인구 4만 명 정도의 적은 성씨치고는 파가 굉장히 많고 저마다 특색이 달랐다. 그 점을 무시하고 이이나 이식 같은 유명 인사 몇 명만 떠올리고 멋대로 문반 명문으로 결론짓고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일 뿐이다.
기록상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李百祿)은 사림파에 속하기는 했지만 기묘사화에 연루되지 않았으며 그 이후 기록에도 등장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백록은 기묘사화 이후에 관직에 진출했다. 152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어느 순간부터 평시서 봉사를 역임하다가 시정잡배들과 어울리고 다닌다고 파직되었다거나, 중종의 국상 기간에 눈치 없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벌였다는 기록도 있지만 당연히 그것으로 사형당하지는 않았다. 명종 3년에는 아들을 혼인시키기는 했지만 잔치를 벌였다는 것은 이백록이 아닌 이준으로 이백록은 무고하다는 탄원이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러한 까닭에 집안 자체도 역적으로 몰리지 않았으며, 역적 집안 출신이면 무과고 잡과고 간에 과거 응시를 못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육신의 한 명인 박팽년의 가문인데,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은 당시 멸문지화를 간신히 면해 후에 성종 때에 가문의 죄에 연좌되는 것을 면하고 이름까지 받았으나, 이후로도 박팽년의 자손들은 조상이 뒤집어쓴 역적의 오명을 벗기 전까진 과거 응시를 할 수 없어서 꽤 근래까지도 곤궁하게 살아야 했다.
또한 기묘사화에 연루됐던 사람들은 선조 1년에 신원[62] 되어, 오히려 기묘사화에 연루되었던 이들은 기묘제현(己卯諸賢)이라고 높임을 받았다. 조광조와 같이 사사되었던 김식의 증손자 김육(金堉)은 조정에서는 대신이요 왕실에서는 인척[63] 이 되었음에도 조정에 출사하지 않는다는 명분을 가지는 산림과 대등한 인물로 존중받았다. 그전부터 사림들은 기묘사화에 연루된 사람들을 동정적으로 보았고, 훈구 권신들에게 청렴한 선비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것으로 여기는 여론이 강했으니 일이 이렇게 풀린 것이다. 위의 김육이 기묘사화와 관련된 선비들의 전기를 집성한 기묘록(己卯錄)에는 이백록도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본편도 아닌 속집에, 그것도 별과에 천거된 사람의 하나로 이름만 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고로 흔히 알려진 '칭기즈 칸 어록'[64] 을 본따 창작된 이순신의 어록 중에서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는 대목은 엄연히 존재하는 기록을 무시하는 것이다.
6.3. 임진왜란 전야까지
1545년 봄에 서울 건천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일대이며, 때문에 이 근처에 충무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년 시절에 충남 아산으로 거주를 옮겼는데, 참외를 주지 않았다고 말을 몰아 참외밭을 짓밟았고, 맹인인 친구를 속여서 바로 그 친구네 집 동아#s-1를 서리하게 하는 등의 일화로 보아 어려서는 상당한 악동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성장하며 철이 난 후 공이 20세 되던 1565년에는 무관 출신으로 보성군수[65] 를 지냈던 방진(方辰)[66] 의 딸 방수진(方守震)과 혼인하였고[67] , 22세 즈음에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28세에 무과 별시에 응시하여 승마 도중에 갑자기 말이 넘어져 낙방했는데, 전하는 이야기에 따라서는 빈혈이었다고도 하고 이때 발목을 다쳤다거나 다리가 부러졌다고도 한다. 위인전에는 낙마한 직후 시험장 안에서 자란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그 껍질로 다리를 동여매고[68] 시험을 속개했으나 결국 탈락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다시 이로부터 4년이 지나 32세가 되던 1576년 2월이 되어서야 식년 무과에 급제하여[69] 12월에 함경도 동구비보에 종9품 권관으로 부임했다. 이렇게 이순신은 국경을 수비하는 야전에서 육군 초급 장교로 처음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하던 초급 장교 시절 <함경도일기>라는 진중 일기를 남겼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는데, 사실은 이미 이 일기(단 하루치 뿐이었다)가 일반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부터 실은 위조품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다만 발견자인 노산 이은상, 그리고 이순신의 일기로 고증한 서지연구가 이종학 등이 워낙 쟁쟁한 인물이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인데, 결국 몇몇 연구자들이 김성일의 유고집인 학봉전집에 실린 1579년 여행기 북정일록의 글자 몇 개를 바꾸고 날짜와 간지를 고증에 맞게 수정한 정교한 위조품임을 밝혀냈다. 이순신이 그 시기에 실제로 일기를 썼는지 안 썼는지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현재 발견된 실제 일기는 없다.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3년을 근무한 이순신은 중앙직인 훈련원 봉사로 배속되었다. 종8품의 낮은 품계였으나 이순신은 병조정랑인 서익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 하자 반대했고, 이 때문인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8개월 만에 충청도 절도사의 군관이 되었다. 일단은 좌천이라 할 수 있으나 이 일로 그는 이름을 알리게 됐다.
일본에 이상 징후가 포착되자 선조는 능력있는 장군들을 특진시켜 배치하게 되는데 이순신도 그 중 하나로 36살에 전라도 고흥 발포진의 수군 만호(종4품)로 부임해서 최초의 수군 근무를 시작한다. 기록상으로 보아 발포는 판옥선 2척, 사후선 2척의 소형 수군 기지로 파악된다. 무과 병과 급제자는 종9품으로 시작하여 450일을 근속해야 자급이 올라가는데, 이순신의 급제 시기를 감안하면 만호 벼슬을 받기 충분한 품계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선조의 결단 덕분이기도 하고, 이순신이 중앙조정에서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도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는데, 당시 이순신의 직속상관이라 할 수 있는 전라좌수사 성박이 발포진 관사에 있는 오래된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드려고 했으나, 이순신이 "관사의 오동나무 또한 국가의 물건이니 사사로이 베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제지한 일이 있었다. 그 후임으로 온 전라좌수사 이용이 전임자의 말만 듣고 이순신을 해코지하려고 하다가 당시 전라감영의 도사(都事) 직을 수행하고 있던 조헌이 이순신의 근무 평점을 타 진포와 비교해 따져서 이순신에 대한 부당한 평가를 고쳐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러나 군기 경차관[70] 으로 기어이 이순신과 맞닥뜨린 서익이 조정에 근무 태만이라고 거짓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1581년 2년 전 재직한 훈련원 봉사로 강등되었다.
이후 1583년 10월, 병마 절도사 발포 만호 시절 성박의 일로 이순신을 부당하게 괴롭혔던 전라 좌수사 이용이[71] 함경도로 전근가면서 마침 모함을 받아 파직돼 있던 이순신을 일부러 지목해서 자기 종사관으로 삼아 함경도의 권관이 되었다. 다만 이는 이순신을 일부러 괴롭히려던 건 아니고, 이용이 잘못을 뉘우치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때 이순신은 여진족의 족장 울지내를 유인 작전으로 생포했다. 다만 상관인 김우서가 이순신의 전공을 시기하여 보고 없이 행동했다고 억지를 부려 전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도 그 이후 동년 11월엔 훈련원 참군(종7품)이 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 아버지가 죽었는데, 당시 북방 최전방에 있다가 귀경하고 있던 이순신이었기에 이 소식은 이듬해 1월에서야 이순신에게 전해졌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3년상을 지낸 이순신은 사복시 주부(종6품)로 복직되었다.[72]
1586년, 42세에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었고, 1년 반 뒤에는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했다. 이때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 당시 북병사 이일에게 밉보여 녹둔도 전투[73] 이후 군관 이운룡, 이경록과 함께 자신의 첫 번째 백의종군을 시작하게 된다. 보통 1,000명 이상의 기마병에게 기습당한 상황에서 불과 수십 명으로 방어에 성공하고 반격까지 감행, 절반 이상의 포로를 구출해 피해를 최소화한 전투를 패전이라고 하진 않는다. '''아군 피해도 방어가 취약하니 병력을 지원해 달라는 이순신의 요청을 북병사 이일이 거부해서 생긴 일'''이었으며 조정에도 대략적인 전말이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74] 선조는 이일의 장계를 받고도 일반적으로 패배한 것과는 다르다고 구분을 짓고 장형을 친 후 백의종군으로 마무리지었다.[75] 아래는 관련 기록이다.
녹둔도 전투는 조정에 이순신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백의종군 석 달만에 이일이 이끄는 400여 명의 여진족 토벌군에 합류해 선조 21년인 1588년 1월에 일명 '신전부락 전투'로 불리는 대대적인 여진족 토벌전[76] 에서 추장인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생포하는 공을 세우고 백의종군을 끝낸 후 아산으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1589년 12월에 류성룡이 천거하여 전라도 정읍 현감이 되었다. 정읍이 독립된 현으로 만들어진 후 최초로 부임한 현감이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임지에서 선정을 베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선조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77] 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한 번에 종6품에서 종3품(10급 승진)까지 진급할 수 없다고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0년부터 1591년까지 이순신의 인사 발령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고을 현감, 육해군 절제사의 직책의 발령이 계속되었다. 이런 혼란스러울 정도로 급속한 인사 발령 및 승진은 당시 조선의 급박한 전쟁 준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능하고 실전 경험 있는 장수를 최전선에 배치하기 위한 특례였다. 또한 이는 이미 이순신이 이때부터 조정에 유망한 장수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간관들이 이순신이 관례에 어긋날 정도로 승진이 너무 빠르다고 말할 정도였다.
【사간원의 이순신의 승진 재검토 요청 1】
선조 25권, 24년(1591년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2월 16일(계미) 2번째 기사}}}
【사간원의 이순신의 승진 재검토 요청 2】
이는 불차채용이라는 방식으로 비변사가 처음 선조에게 올린 불차채용 대상자 명단에는 이순신의 이름이 없었다.[78] 그러나 선조가 따로 몇몇 장수를 거론하여 추가시켰는데, 여기에 이순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전의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정읍 현감에서 진도 군수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로 전임하고, 곧바로 이번에도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 좌수사로 임명했다. 이 때 간관들이 승진이 너무 빠르다며 간하자 선조는 '''다른 사람의 승진은 좀 늦출 수도 있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전라 좌수사 발탁은 끝까지 고집'''했고 결과적으로 이것이 '''조선을 구하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어찌 개정하지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하였다.>선조 25권, 24년(1591년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2월 18일(을유) 1번째 기사}}}
드디어 1591년 47세로 정3품인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2년 만에 종6품에서 정3품이 된 것인데 이는 조선왕조에서 빠른 속도의 승진으로 이름난 조광조와 비슷한 속도였다. 조광조는 2년 4개월 만에 종6품인 사간원 정언에서 정3품인 홍문관 부제학이 된다.[79] . 여기에서 유성룡과 선조가 얼마다 다급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전쟁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둘 수 없는 무리수였다.[80]
전라 좌수영은 5관 5포, 즉 5개 고을[81] 과 5개 전문 수군 기지[82] 소속 병력을 지휘하에 두고 있었으며, 이순신은 이들의 전력 강화에 주력했다. 유명한 거북선의 건조도 이때부터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순신은 전란에 대비해서 '''실전과 완벽하게 동일한 수준의 훈련'''을 꾸준히 실행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휘하 군관들의 순번을 정해서 차례대로 '''가왜장(假倭將)'''으로 임명했고 이 가왜장이 이끄는 함선이 가왜장선이 되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대항군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마저도 엄격하게 진행했으며 제대로 된 격식을 갖춰서 가왜장으로 임명된 군관에게는 직접 가왜장 임명서를 발급하기까지 했다. 이순신은 전란을 대비해서 거북선만 건조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실전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6.4. 임진년의 맹활약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이순신은 이틀 뒤에 이 사실을 고지받았다. 5월 4일 최초의 출격 작전(일명 1차 출전)으로 옥포만에서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적선 26척을 전멸시켜 임진왜란 최초로 승리를 거뒀다.[83] 옥포 해전은 임진년에 벌어진 여러 해전의 전형적인 모델을 이룬다. '''수색 섬멸전'''[84] 은 이순신이 임진년 당시 사용했던 기본 전략이었다. 이 전투에서의 조선 수군 피해는 '''부상자 3명'''.[85] 옥포 이후 적진포와 합포에서 각각 5척과 15척을 추가로 격침하고 여수 전라 좌수영으로 귀환했다. 선조는 이 싸움의 공으로 이순신을 가선대부로 봉한다.
5월 29일에 이순신은 노량에 적선들이 왔다는 정보를 듣고 2차 출전을 시작, 사천에서 적선 12척을 격멸한다. 여기서 최초로 거북선이 투입됐다. 여기서 이순신이 조총에 부상을 입었다. 6월 2일에 왜선들이 당포에 집결해 있다는 걸 알고 당포로 향해 21척을 박살내고 당포에서 도망간 왜선들이 당항포로 도망갔다는 걸 알고 추격해 당항포에서 39척, 율포에서 7척을 격침했다. 2차 출정에서 조선 수군 총 전사자는 '''11명'''. 이 공으로 8월 16일 자헌대부 승자를 받는다.
7월 4일에 가덕도와 거제도 등지에 왜선 40여 척이 출몰했다는 정보를 들은 이순신은 3차 출전을 감행, 7월 6일 한산도 해전에서 승리한다. 이는 대첩이라 부를 만큼 세계 해전사에서 의미 깊은 전투였다. 이때 사용한 전술은 거짓 후퇴로 인한 유인 후 함대 반전 및 포위 섬멸인데 이토록 복잡한 함대 운용을 보여준 해전은 거의 없다. 굳이 예를 들자면 일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알키비아데스가 이끄는 아테네 해군이 스파르타의 해군을 상대로 쓴 적이 있었다. 여기로. 이런 전술을 실전에서 육지에서라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충분히 명장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을 정도다. 이순신은 항구에 틀어박힌 적의 주력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해서 격파했다.
여기서 흔히 세간에서 이순신의 장기로 인식되는 학익진이 처음으로 구사되었다. 학익진은 본디 단순한 포위 섬멸용 진형이나, 이순신은 이것을 거짓 도주하다가 돌연 180도 선회하면서 양쪽으로 날개를 펼쳐 적을 포위, 섬멸하는 전술로 개량하였다. 성능이 우수한 전함, 강도 높은 군사 훈련과 지휘관의 대담성만이 학익진 성공을 담보할 수 있었다. 거짓 후퇴 전술은 자칫 진짜 패퇴가 될 수 있는 매우 어려운 전술임을 생각해본다면 이순신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한산도 대첩은 규모로만 따지면 국지전이었으나 그 결과는 임진왜란 전체의 국면을 바꾸어놓았다. 적들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조선에 넘겨주어야만 했다. 보급로가 끊겼으며 적의 서해 우회를 좌절시킴으로써 조선은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등 주요 곡창 지대를 지켜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군과 의병들이 끈질기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곡창 지대가 온전히 남아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군은 반격의 교두보를 확보했고, 지휘 계통 또한 회복되었다. 또한 한산도 대첩의 소식이 퍼지자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면서 의병 활동이 매우 활성화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산도 대첩 문서로.
대승을 거둔 조선 수군은 가덕도로 향하려다가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7월 10일 안골포에 도착하여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왜선 40여 척을 추가로 박살내고 여수로 귀환한다. 총 전사자는 19명. 이제까지보다는 조금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새발의 피 수준이다. 이 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 승자를 받는다.
3차 출전으로 왜군의 수륙 병진 계획은 '''완전히 좌절'''됐으며 이 과정에서 가뜩이나 모자란 화약과 화포를 포함한 수많은 물자와 인력이 물고기밥이 되자 경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 금지령'''까지 내리고 만다.
일각에서는 이순신의 성과를 단순히 보급 차단 수준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로는 일선의 적들을 고사시키기에 '''적 섬멸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봐야 한다. 몇 백 년 뒤, 독일군의 북아프리카 전선 붕괴나 미국의 무기대여법 같이 해상 보급로는 그 유지에 따라 전선은 물론 전쟁의 흐름까지도 결정짓게 된다.
일본의 보급은 부산항으로 하역된 물자가 육로로 이송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기본 계획은 접수한 정복지에서의 현지 조달이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것은 가다노 쓰기오나 기타지마 만지, 사토 가즈오 등 '''일본 측 역사학자들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역사학자 기타지마 만지 교수는 당시 제대로 된 육로가 닦여 있지 않아 수레를 운용할 수도 없는 조선[86] 에서 '''육로를 통한 보급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억지로라도 부산에서 조선의 각 전략적 요충지 및 주둔지까지 육로로 식량을 조달할 경우 이를 수송할 인원과 호위할 인원들이 대거 필요하고, 이들이 목적지까지 가면서 수송할 군량을 먹어 치우고 빈손으로 목적지에 도달하여 되려 본진에 돌아가야 하니 식량을 달라고 했을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87]
게다가 '''보급 물품에는 군량 등 식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총의 탄환 및 조총의 부속품과 화약, 일본식 활의 화살 및 활대와 각종 병장기 관련 소모성 물품들이 필요하다. '''현지 조달을 통해 식량을 그럭저럭 구했다 해도''' 이러한 것들은 현지 조달로 구할 수 없으며, '''당연한 말이지만 장비 보급이 안 되면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또한 손실된 병력의 보충 역시 수로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미 한양을 넘어 진격하느라 병력 손실을 입은 일본 육군이 더 이상 병력 충원을 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일본군은 훗날 2차 세계대전에서도 스스로도 보급에 대하여 경시를 하다시피 한 데다, 가토급 잠수함을 비롯한 미 해군의 통상 파괴 작전으로 그나마 유지하던 해상 보급로마저 차단당하면서 태평양 전쟁에서도 애를 먹어야 했다.
따라서 이순신의 공로는 적의 해상 작전 전체의 봉쇄이자 보급로 차단이었으며 이를 통해 '''적의 대전략 그 자체와 사기마저 붕괴시켰음'''을 의미했다.
8월 8일에 왜군이 김해와 양산 등지로 도주하려 한다는 정보를 받자, 이순신은 아예 적의 본거지가 돼버린 부산을 직접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8월 24일에 4차 출전에 나섰다. 부산으로 향하는 길에 왜군이 5번이나 소규모 기습을 가하나 죄다 바닷속에 쓸어넣고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 대포로 포격을 퍼부어 왜선 100여 척을 죄다 가라앉힌다. 이때 전사자는 '''6명'''에 불과했다. 이렇듯 피해가 적었던 것은 거듭된 패전으로 조선 수군만 보면 학을 떼게 된 일본 수군이 조선군의 출현 직후 배를 버리고 죄다 육지로 도주해 버린 까닭도 있다. 덕분에 손쉽게 적의 배를 싹쓸이했지만 이순신이 신임하던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해서 대승을 거두고도 이순신은 침울한 귀환을 했다.
부산포 해전의 결과로 본진마저 두들겨맞자 왜군은 더욱 조선 수군을 기피하게 된다.
부산포 해전은 전략적으로 볼 때는 빈 배 100척을 불태우고도 종전보다는 피해를 많이 입었기 때문에 한산 해전과 같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다만 그 이후로 왜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고 촘촘히 함선을 배치해서 종전처럼 조선 수군이 부산포를 공격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고 그 결과 조선 수군은 한산도에 주력을 전개하고 제해권을 완전 장악한다.
임진년의 이순신의 공적은 첫째 우선 해상에서 승전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고 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해상에서의 승전이 없었다면 한 방에 밀릴 뻔한 상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왜군의 침공에 왕과 양반, 무장, 평민, 노비 가릴 것 없이 도망가기에 정신없었던 상황이었는데 해상에서의 승전은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서 왜군의 침공에 저항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둘째 왜군의 주력은 육군이 아닌 수군으로서, 수군을 제압함으로써 전쟁 수행에 막대한 차질을 빚었다. 당초 왜군의 전략은 알려졌다시피 수륙병진이었고 해상에서의 승리는 따놓은 것처럼 왜군 지도부는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수군의 패배는 필연적으로 보급로의 단절로 이어졌고 진군한 육군은 고립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쉬운 예를 들자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전선을 유지하기 급급한 상황에 비견될 만하다. 수군이 패함으로써 왜군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셋째 호남 지역을 수호함으로써 조선군의 보급선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유일하게 호남이 온전하게 보존되어서 추후 명군의 파병과 전쟁 수행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특히 이순신은 전력을 유지하면서도 둔전에 힘쓰고 백성들을 보호해서 인심을 얻었다.[88]
6.5. 계사년 이후
계사년(1593년) 2월 6일에 조선 수군은 5차 출전을 하여 웅포에서 왜군을 7차례 공격해 왜선들을 격멸했으나 육지에서 왜성을 쌓고 버티는 전략으로 대응 방침을 트는 바람에 작년에 비해서는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7월 15일에는 전라 좌수영 본영을 한산도로 이주하고 돌산도에 피난민들을 위한 터전을 개간했다.
8월 15일 이순신은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삼도 수군 통제사는 경국대전에 없는 별정직으로 전라 좌수영, 전라 우수영, 경상 우수영, 충청 수영으로 구성된 조선 수군 전체가 각 지휘관들의 갈등 없이 통제사 하나의 지휘를 따를 수 있는 직위였다. 현재로 치자면 해군 삼남 작전 사령관이나 해군 작전 사령관 급이라고 봐도 될 위치이다.
1594년에 6차 출전으로 당항포에서 다시 한 번 왜선 30여 척을 분멸하나, 담종인의 금토패문을 받고 병중인데도 불구하고 항의의 서한을 올린다.[89]
이때 《난중일기》서 본격적으로 원균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1595년에는 아예 "원균을 조선 수군에 두지 말아주소서"라고 상소까지 올려 보낼 정도로 둘의 사이는 험악해진다. 이 개놈이 나중에 조선 수군 장병들을 상대로 저지를 일을 생각해 본다면, 이순신의 사람 보는 눈이 참 탁월하다고 하겠다. 단 이순신은 자신을 비호한 류성룡, 이원익과 시시콜콜한 요구에도 모두 응한 충직한 부하들을 제외하면 다른 대신들이나 무장들 또한 제법 거리를 두고 묘사했고, 구면일 경우엔 경멸감도 나타냈다는 면에서, 그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다. 특히 그는 장수 평가 기준도 몹시 까다로워서 이순신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무장은 별로 없다. 개중에는 나름 능력있는 장수도 있었지만 비교 대상이 이순신이니... 대신 그는 남에게 엄격한 만큼 자신에게는 배로 엄격했다. 또한 명이나 왜의 장수들에 대해서는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는데, 조선의 장군이 침략군의 장군에게 증오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에서 보여준 각종 범죄는 비난받기에 충분했다. 아무튼 둘 사이의 영향인지 원균은 충청병사로 전직된다.
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가자 이번엔 기근과 전염병이 조선 수군을 괴롭혔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 대규모 징발, 토지 유실은 농업 생산량의 급격한 감소를 불러왔고 이는 3년에 걸친 지독한 흉년으로 이어져 보급과 병력 유지에 치명타를 입혔다. 여기에다 가공할 역병까지 겹쳐 수천의 장졸들이 역병으로 떼죽음을 당했으며, 이때문에 탈영병도 속출했다. 이순신은 1594년 4월 20일에 작성한 장계에서는 삼도 수군 17,000여 명 中 사망자 1,904명, 감염자 3,759명. 도합 5,663명의 비전투 손실을 입었음을 밝혀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순신은 탈영병을 처벌하고 어떻게든 병역 자원 유지를 위해 애쓰는 한편 피난민, 유민들을 수습하고 둔전을 경작해서 보급을 자급자족하였다.
6.6. 파직
정유년(1597년)이 밝아오자 이순신에게 2가지 사건이 발생했다.'''"만약 이순신을 병신년과 정유년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ㅡ<선조 실록> 선조 31년(1598년) 11월 27일, 사관의 논평
첫 번째는 부산 왜영 방화 사건. 이순신이 자신의 부하들인 안위와 김난서 등이 부산 왜영에 숨어들어서 적의 배와 장비들을 불태웠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렸는데, 이 보고 이후 이조좌랑이던 김신국이 이순신의 보고를 허위 보고라고 올린 사건이다. 이원익의 추가 보고와 의금부의 조사 결과, 이순신의 보고는 아래 부하들이 허위로 이순신에게 보고를 올림으로써 이순신이 왕에게 보고를 허위로 하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이게 이후에 이순신이 파직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다만 의금부의 조사 결과와 이원익의 추가 보고만으로 이순신이 거짓으로 조정에 보고를 올렸다고 하기에는 무리인 부분이 많은데, 조정에서도 분명 이순신의 부하가 이순신에게 허위 보고를 올려서 이를 그대로 알리다 보니 졸지에 거짓 보고를 하게 된 것이지 이순신이 의도적으로 허위 보고를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허위 보고를 올린 관계자들이 조사를 받았지만 막상 서울까지 압송된 사람은 이순신밖에 없다. 정말 허위 보고 당사자를 조사하고자 했다면 안위나 김난서까지 같이 압송되었어야 하는데 이들은 파직도 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의 파직이 결정됐을 때 선조는 자기 입으로 직접 부산 방화 사건은 안위와 김난서가 행한 일인데 이순신이 공을 가로챈 것이다(?)라고 언급함으로써 이순신의 부하들이 한 행동임은 인정하지만 은근슬쩍 이순신 잘못으로 몰아갔으니 사실상 허위보고 사건은 그냥 명분에 불과하다.
2번째는 가토의 도해. 1597년에 일본의 이중간첩인 요시라로부터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이 정보가 조정에 보고된 것이 1월 1일.[90] 조정에서는 즉각 비변사에서 회의를 거쳐 이순신에게 출격 명령을 내렸는데, 이순신이 1월 6일부터 남해현에 공무차 들어갔다가 풍랑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상태였기 때문에 시간을 잡아먹다 보니 가토가 진작 바다를 건너서 부산에 도착해버렸다.[91] 조정에서도 이를 파악하여 가토를 잡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 추가로 있을 상륙 부대에게 압박을 주기 위하여 부산포로 출격을 명하고 이순신은 69척의 함대로 부산포를 두들기는 등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가토를 잡지 못했다고 책망하면서 "저라면 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한 원균의 장계가 조정으로 올라오고, 이와 더불어 이순신을 숙청하려고 이미 혈안이 되어 있던 선조에 의해서 싸우라는 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1597년 2월 26일에 이순신을 파직 및 압송하고 그 후임으로 원균을 임명한다.[92]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이 3월 4일에 금부에 투옥된 후 한 차례의 고신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록에 나온 선조의 언행을 보면, 선조는 이순신을 두고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고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등 그 분노가 컸기 때문에 고신의 강도 또한 가볍지는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하지만 이원익과 권율, 결정적으로 정탁의 적극적인 변호로 이순신은 목숨은 지키게 됐다.
불멸의 이순신의 영향인지 이순신을 역도로 몰아 가혹한 고문으로 반쯤 죽여놓다시피 했다는 인식이 많다.[93] 대중 매체야 자극적인 장면이 나오면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렇게 한 것이고 보다 사실에 가깝게 살펴보면, 고신 과정이 잘 드러나 있는 남이의 옥사처럼 취조 과정에서 제대로 된 답변이나 자복을 하지 않을 시 곤장을 정해진 횟수만큼 때리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역모 사건 정도는 되어야 하위 절차를 거쳐 압슬 등의 강한 고문이 가해지기 때문에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이순신 역시 사실 관계를 우선적으로 밝히는 양상으로 추국을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신의 목적은 죄인의 자복을 받아내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니다. 즉 이순신이 고문으로 '''몸이 망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만신창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백의종군 직후 앓아누운 횟수가 늘어나긴 하지만, 조선시대에 50살은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으며 주당에 장기간 스트레스에 시달려 온 사람이다. 저 지경이면 누구든 몸 망가지기 십상이다.
이 당시 이순신에게 어떤 고문이 가해졌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지만 정탁의 신구차에 한 차례의 형신이 있었다고 기록이 남아있다. 형신은 정강이를 때리는 고문으로, 고통스러웠겠지만 주리틀기가 기본 옵션인 사극과 비교하면 강한 고문은 아니다.[94]
난중일기에 의하면 출옥한 4월 1일에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술을 마셨고, 이틀 뒤인 4월 3일에 말을 타고 출발해 다음 날인 4일에 수원, 다다음 날인 5일 아침에 아산에 도착한다. 도성에서 아산까지는 직선 거리로도 90km 가까이 되고 길을 따라갔다면 못해도 이틀간은 110km는 말타고 달렸다는 말인데 '''몸이 상할 만큼 심한 고문을 받았다면 술을 퍼마시고 저 거리를 말 타고 달리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목숨을 바쳐 왜적을 5년 동안 한 번의 패배 없이 막았음에도 적의 반간계에 넘어가 파직으로 화답한 선조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수도 있고[95] 고문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 역시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파직만 당하고 나중에 재조사로 사건의 전말과 원균의 실태를 알고 나서 전력이 붕괴되기 전에 원상 복귀 시켜주었으면 그냥 재수 없는 일이 생겼다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임금과 대신들이 자기를 모함한 것과 원균이라는 희대의 쓰레기에게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넘기더니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고 나서야 관직을 돌려주었지만 제대로 된 임금의 사죄와 자신을 모함한 대신들을 처벌하는 것도 없으면서 군사들은 대부분 흩어지고 배도 없는 상황이라면 '''이순신이 너무나 큰 배신감을 느껴 일본에 투항할 수도 있었다.'''내 안에서 칼이 울었다.
노엽지 않은가? 그대를 조선군의 수괴라 부르는 적보다
'''역도라 칭한 군왕이 더 노엽지 않은가?'''
그 불의에 맞서지 못하고, 그대의 함대를
사지에 이끌고자 하는 세상의 비겁이 노엽지 않은가?
칼은 살뜰하게 내게 보챘다.
'''적의 피로 물든 칼을 동족의 심장에 겨누지 마라.'''
그 무슨 가당찮은 오만인가?
'''어찌하여 노여움을 참고 있는가?'''
이 바다에서 수많은 적에게 겨눴던 그 칼을
그대의 노여움에 겨눠라.
'내가 진정 베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내 자신'이라
칼을 달래고자 했으나 그 울음을 잠재울 수 없었다.
'''하여, 차라리 육신이 죽어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이 내 몸은 죽어지지 않았다.
ㅡ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93화 中
역사적으로 보면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위에서 자기를 죽이려고 드는 등의 배신을 하면 어제까지 싸웠던 적에게 투항하고 적국을 위해 조국을 공격하는 경우가 많다. 삼국지만 봐도 장합, 맹달, 하후패등이 있는데 여기서 하후패의 아버지 하후연은 촉나라에 의해 죽었다. 이 외에도 조선에서도 같은 케이스는 아니지만 이괄이 있었다. 이미 임진왜란 중에서 임해군, 순화군이 전시 중에도 백성들을 수탈하자 주민들이 가토 기요마사에게 포로로 넘겨주었고 이산겸, 김덕령이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모함으로 죽자 용력이 있는 자들은 모두 숨어버리고는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선조수정실록이 전하고 있다.'''
이렇게 정부의 무능으로 자기를 죽이려고 하면 그 순간 조국이고 적국이고 원수고 뭐건 없어진다. 일단 살고 봐야 하기 때문에 적에게 투항은 물론이고 적 역시 항장들을 받아들이고 공격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송산 전투에서도 이미 투항 후에 배신한 조대수를 다시 받아들였고 조대수는 안 그래도 존경하던 상관인 원숭환이 모함으로 처참하게 죽어서 명나라에 대한 원한이 있어 2번째 투항에서부터 명나라를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그러므로 이순신이라고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초월적인 인내심으로 참고 다시 조선을 위해 전쟁을 했다.
한편 파직과 백의종군 외에도 이순신의 일생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때였다. 아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80대의 노구임에도 한양으로 올라오던 이순신의 모친 변씨가 병으로 배 위에서 객사 한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이순신은 엎어져 몸부림을 칠 정도로 슬퍼한다.[96]
이순신과 조선은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똑같이 조국을 멸망의 수렁에서 겨우 건져내고 있었던 이목, 악비, 원숭환은 결국 내부의 적이나 외부의 반간계에 휘말려 처형당했고, 그렇게 나라의 버팀목이 사라지자 조국도 멸망하였지만 이순신은 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왕권을 견제하는 신권'이라는 조선 특유의 정치체제가 빛을 발휘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6.7. '''명량 해전'''
7월 16일 원균의 지휘 아래 출격에 나선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소멸했다. 이 부분에 대해 원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당시 조선군은 장비에 있어서 일본군보다 크게 뒤쳐지지 않았지만 이를 활용할 교리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병사들의 질이 낮아 사기를 담보하기 힘들었기에 이런 대규모 도주가 일어난 것"이라 말한다. 물론 조금의 사고력이라도 갖춰져있다면 입밖에 낼 수도 없는 수준의 망발이다. 임진왜란 발발 이래 5년간 '''이순신이 지휘해서 벌인 해전만도 20회가 넘는데''' 운용 교리가 없다는 소리가 말이 되는가? 병사들의 질이 낮았다는 것도 마찬가지. 5년간 이순신 밑에서 싸운 병사들이면 이미 베테랑 수준이다.[97] 전세계가 입을 모아 어렵다고 인정하는 '''해상 학익진'''을 구현해낸 함대의 승조원들이 질이 낮았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생각해보자. 질이 낮은 인원들이 어떻게 딱 2달만에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뒤집기 한판'''을 만들어낼 수가 있단 말인가? 차라리 '''사자가 지휘하는 양떼가, 양이 지휘하는 사자 떼를 이겼다'''는 속담이 더 잘 들어맞는다. 그만큼 지휘관의 역량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만일 그래도 운용교리가 없다고 정녕 말하고 싶다면 원래 있었는데 원균이 그걸 활용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순신의 운용교리를 따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기만의 운용교리를 만들지도 않았다고 말하는 게 맞다. 실제로 이순신과는 달리 원균은 함대를 지휘하는데 있어 제대로 된 운용체계가 없었다. 기록상으로 나온 이순신과 원균의 모습을 보면 이순신은 전투 전 정찰을 먼저 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지만 원균은 이순신 옆에서 그렇게 많이 싸우기라도 한 인간인데도 이순신으로부터 눈꼽만큼도 배우지 못한 건지 정찰은커녕 무작정 돌격만 하다가 함대를 말아먹었다. 평시 부대관리 측면을 봐도 이순신은 어떻게든 자원을 끌어모아 철저한 훈련을 거쳤고 그 와중에 노는 자리를 만든다 해도[98][99] 그 행위들은 부하들과의 유대감을 다지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원균은 그런 것도 없었다.
이순신이 힘겹게 모아놓은 300여 척[100] 의 함대가 고스란히 사라졌고 이는 다시 말해 조선 수군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전력이었다.[101] 단 한 번의 전투로 조선 수군의 전력 전체가 소멸한 것. 그나마 배설이 전함 12척을 수습해 장흥으로 퇴각했다.[102] 이 전함들은 이후 명량 해전에 투입되었다. 또 이후에 비정상적인 조선 수군의 전력 회복을 근거로 이때 대부분의 조선 수군 함선들이 파괴된 것이 아니라 도주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원균의 패전 책임은 분명했다. 그 후 원균의 생사는 '''불명'''. 왜군에게 죽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인식이지만 전후 그를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기에 도망쳤을 가능성도 있다. 실록에서의 마지막 원균의 목격담은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이후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03] 그 처참한 패전으로 조선은 남부 제해권을 상실했다.
당황한 조정은 7월 23일 모친상을 당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이때 선조는 '''과인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라는 교서를 내릴 정도로 저자세로 굴면서도 실제 품계는 원래보다 4품계 강등된 정3품 절충장군 품계를 주어 뒤통수를 쳤다.[104] 지금으로 치면 대장 계급의 해군참모총장이[105] 억울하게 누명쓰고 해임되었는데, 정작 같은 직책으로 복귀할 땐 소장이 된 셈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이순신은 다른 수군 절도사와 같은 품계 즉 계급이 되기에 지휘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지만,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106]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순신이 지휘할 수군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통제할 수군이 없는 수군 통제사였다.
다행히 배설이 칠천량 전장에서 미리 빼놓은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었다. 이순신은 다시 통제사로 제수되자마자 배설을 추궁해 배설이 숨겨놓은 함대의 위치를 알아내 함대를 인수하러 출발한다. 이때 곧바로 남해안으로 가지 않고 초계 → 하동 → 구례 → 곡성 → 순천 → 보성 순으로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병사를 모집하고 물자를 다 긁어가서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선조의 뜻을 알리는데, 이는 수군을 폐하고 충청도로 올라와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어떠느냐고 물어본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를 거부하고 싸우기를 결심하는 장계를 올리는데, 이 장계가 바로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란[107] 전설의 대사로 대표되는 '상유십이' 장계. 남해와 서해 남쪽을 완전히 내주더라도 어떻게든 훗날을 도모해보자고 정부에서 권하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싸우기를 결심한다.[108] 그 와중에 배설은 다시 탈영하여 종적을 감춘다.
9월 16일 이순신은 수습한 전함 13척(이후 1척이 더 보강되었다)과 어선 일부를 대동하고 명량에 출격했다. 이때 초반에 전투에 나선(이순신이 난중일기에서 가늠했던) 왜군 함선만도 133척에 달할 만큼 절망적인 전투였으나, 이순신은 수많은 왜선을 격침하고 '''결국 승리하여''' 왜군이 제해권을 잃게 만들었다.
세간에서는 보통 이순신이 명량에서 일자진을 펼쳐 축차 전술을 펼친 적을 막아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당시 이순신이 탄 대장선을 제외한 12척의 배들은 정오가 지날 때까지 대장선이 패배하는 대로 도망가기 위해 뒤에서 미적거리다, 거제 현령 안위가 먼저 대장선을 구원하러 가는 것을 보고 나머지 배들도 뒤늦게 전투에 동참하였다. 즉, 믿기지 않게도 이순신의 대장선은 '''단 한 척으로''' 전투의 중반부까지 왜군의 전선들을 무수히 폭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원인은 조선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109] 과 그에 실린 화포를 비롯한 조선의 장사정 무기들의 압도적인 전투력, 그리고 훨씬 열세였던 왜군의 해전 무기 체계(조총과 일본 활, 칼)와 교리[110] , 명량 주변의 지형 및 해류, 마지막으로 이들 요소를 더 굳건하게 만든 이순신의 전투 의지였다.
2011년 4월에 나온 '한국군사과학기술학회지' 14권에 좀 더 충격적인 연구보고가 있다. 명량 해전이 일어난 날의 조류를 연구한 것으로, 과거 1965년과 1977년에 각각 '''당시 기준으로''' 측정했던 조류 측정치와는 달리, 전투 초기엔 '''오히려 조류의 유리함을 받은 것은 일본군이고, 반대로 통상의 상선은 가장 불리한 시기에 전투 초반을 싸웠다'''고 한다. # 비록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조류가 유리하게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되면 통제사의 상선은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지세까지 거슬러가며 혼자 전반부 전투를 감당했다'''는 게 된다.[111] 상식적으로 봐도 공격해오는 일본군 입장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류를 타고 방어군이 기다리는 함정속으로 들어올리가 만무하다.
이순신 본인도 난중일기에서 "실로 천행이다(此實天幸)"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힘든 싸움이었으나, 어쨌든 명량 해전의 승리로 인해 조선은 칠천량 패전으로 궁지에 몰렸던 정유재란의 국면 전체를 뒤집을 수 있었다. 조선은 남부 제해권을 다시 회복했고 왜군의 서해 우회는 좌절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완전히 좌절시켰던 철벽 방어선 진주성[112] 은 제2차 진주성 전투로 초토화되었기 때문에 정유재란 초반 일본군은 영남 남부 지방의 통로를 무인지경으로 통과해 호남을 싹쓸이했으나, 직산에서 명군의 빠른 진군과 완강한 저항에 직면해 패퇴한 후[113] 충청도 일대에서 퇴각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명량에서 이순신의 경이적인 승전보는 일본군의 뇌리에 서해를 장악당함으로써 보급을 차단당했던 임진년의 악몽을 되살리게 했고 일본군의 북진 의지는 완전히 꺾인 채 남해안으로 후퇴하여 겨울철임에도 왜성들을 쌓는 등 수성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이후 노량 해전이 벌어질 때까지의 2년간 해전은 3회. 일본 수군은 철저하게 이순신을 피하려고 했다. 상식적으로 '''10대1로 밀어붙여도 털리는 치트캐와 싸우는데 누가 싸우고 싶을까?'''
6.7.1. 명량 해전 당시 전과
일반적으로 당시 왜선의 숫자는 난중일기의 133척, 그리고 확실히 격침한 왜선은 대략 31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우선 왜군 전선이 133척이었다는 기록은 실록과 난중일기의 기록이다. 그리고 이 기록은 후대에 갈수록 수치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으며 정조 대에 이르러서는 '500척'까지 불어나는 경향이 있다. 다만 '''현장에 있었던 이순신 본인이 당대에 남긴 기록'''인 난중일기의 수치가 대단히 설득력이 크고, 일본 쪽 기록과도 어느 정도 교차 검증이 되는 수치이다. 양측의 주장을 절충한다면, 500여척 중에 실질적으로 전투에 참여한 전투함의 수가 133척이고 나머지는 보급선, 수송선 등의 비전투함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적선 31척을 격침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충무공의 성격상 확실히 침몰한 적선만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 전과는 더 컸겠지만 일종의 축소보고를 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114] 충무공은 도주한 적선이 수리를 받고 병력을 보충해 다시 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적선을 단순히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것을 넘어서 가능한한 확실히 격침시키기 위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다. 일각에서는 적선 100척을 격파한 것이 아니냐[115] 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근거는 거의 없고[116] , 다만 명량 해전 자체가 압도적인 숫적 열세 속에서 그저 적선이 오는 족족 전투불능으로 만들어 돌려보내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격침에 신경을 못쓴 결과가 '고작' 31척 격침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전투원들이 멀쩡해도 선체에 장군전을 비껴맞고 침수되어 돌격능력을 상실하였거나, 배는 멀쩡해도 전투원 다수가 코 앞에서 조란환에 맞아 죽거나 중상을 입어서 공세능력을 상실한 적선의 수는 배로 많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장선이 격침되고 선봉장 구루지마 미치후사까지 죽었으며 후방의 수군 총사령관 도도 다카도라가 활에 맞아 손에 부상을 당했고 도요토미가 보낸 군감 모리 다카마사까지 세키부네에 타고 있다가 급히 빠른 소선으로 옮겨타 도망갔다가 바다에 빠졌으며 '무사히' 돌아간 적선의 수가 10여척 밖에 안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있는 것이다.
최우선으로 안전을 보장받아야하는 다이묘의 안위가 망가지고 '바다에 풍덩 빠져 허겁지겁 구출(모리 다카마사)되었다.' 는 기록은, 곧 왜군함대 '전투라인 자체의 궤멸' 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교차 검증 부분에서는 일본 문서에는 명량 해전에 참전한 수군의 척수는 물론, 참전 다이묘도 총지휘관인 도도 다카도라와 구루지마 미치후사 외에는 참전했는지 참전하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만일 진법표에 나와있는 약 8,000명의 일본 수군을 토대로 60 x 133해서 비슷하지 않냐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 또한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진법표에 나와 있는 일본 수군이 과연 수부 같은 비전투 인원을 계산한 것인지 아닌지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량 해전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비전투 인원을 계산할 경우 진법표에 나와 있는 일본 수군만으로도 거진 1만에 가까운 군세가 만들어진다. 더군다나 14일 탐망군관 임준영의 보고에서는 적선 200여 척이 확인되고 있다. 충무공의 조카 이분의 행록의 333척 기록을 믿기 힘들다고 폄하하지만,[117] 행록의 기술은 이렇게 되어 있다.
즉, 이 분이 일부러 과장하고 싶어서 과장한 것이 아니라, 그는 그저 피난민의 증언을 충실하게 옮겼을 뿐이다. 더군다나 500척 기술을 마치 정조 대에 과장한 것처럼 아는 사람이 있는데, 정조 대의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500척 이야기는 정조 대의 사람들이 알아서 부풀린 게 아니라 당시 피난민들의 증언에서 나온 이야기를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그대로 옮겨 썼을 뿐이다.'''그 날 피난한 사람들이 높은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적선이 쳐들어오는데 300척까지는 헤아렸으나 그 나머지는 얼마인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명량 해전 참전 전체 왜군 선박수가 133척이라고 분명히 단정지을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명량 해전에서 왜선의 숫자를 완벽하게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한마디로 당시 왜군의 규모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당시 적의 함대는 100여 척이든 300여 척이든 500여 척이든 새까맣게 쳐들어오는 상황이고, 그런 규모의 적함을 요격하겠다고 나선 아군 함대는 고작 '''13척'''에 불과했다.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는 급박한 상황에서 적함이 몇 척이나 되는지 일일이 세고 있을 여유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13척 중 앞에 나온건 1척 뿐이니 세고 싶어도 세는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또한 이순신의 입장에서 일본 수군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는 별로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조선 수군이 공중분해되어 고작 13척만이 남은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대함대를 이끌고 나온 일본 수군을 패퇴시켜 서해안을 돌파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명량에 진입한 130여척이 견디지 못하고 명량에서 패퇴한 시점에서 이순신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므로 그 과정에서 몇척을 수장시켰는가는 장계 올리기 용도 이상의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6.7.2. 철쇄설
역사스페셜에서는 명량의 좁은 해역과 급한 조류를 이용, 명량 쪽에 배의 이동을 묶어두는 함정을 설치해 적의 연쇄충돌과 행동불능 상태를 이용한 뒤에 포격으로 쓸었다고도 하는 거 같지만, 그건 이 믿기지 않는 전적에 대해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이해해 보려다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 이끌려 오히려 단견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딱 잘라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가설이다. 전투가 벌어진 울돌목은 현재 진도대교가 건설된 곳으로 건설 당시 현대건설에서 부설한 1,300t이 넘는 콘크리트 더미가 유실된 곳이다. 그것도 바닥에 고정시켜놓은 교각하부였다. 헌데 몇 백 톤이 안 되며(그 이상은 부력을 고려해도 견인 자체가 불가능하다) 접촉 표면적의 합이 더 많았을 쇠사슬은, 철로에 실 묶어놓고 버티길 바라는 것과 같다. 왜선이 충돌할 때마다 걸리는 100t 이상의 힘은 또 별개다. 따라서 '''현대 기술로 철쇄를 만들어서 울돌목에 깔아도 안 떠내려가게 할 방법이 없다.'''
우선 당시 왜군의 대선단을 빈약한 쇠사슬 같은 것으로 저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목선이라고 해도 화포를 포함한 각종 무기와 탑승자들의 수를 더하면 수백 톤에 달하는 무게인 데다, 이 정도의 무게를 가진 움직이는 물체를 저지할 쇠사슬을 만드는 건 현대 기술이라도 불가능하다.[118] 그리고 그런 데에 쓸 쇠가 있었다면 차라리 화살이나 포환을 하나라도 더 만들었다는 게 정설. 이 철쇄설이 기록된 "호남절의록"이 있는데, 여기에 나온 철쇄설을 믿으려면 김억추가 '''검강'''으로 적선을 파쇄해버렸다는 기록도 믿어야 한다. 더구나 이 책이 나온 건 1907년이다. 그런데 철쇄설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이중환의 택리지인데, 이를 통해 이전부터 철쇄설이 해당 지방에 돌았던 것이 사실임은 알 수 있다. 일본 학자 아오야기 쓰나타로의 정한역일한사적에도 일본군의 명량 패전 원인은 이것으로 지목하고 있다. 다만 앞에서 언급된 이유로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사실 철쇄는 수로 차단용이 아니라 항만 방어용으로 널리 쓰이던 것이다.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 모두 항만 입구에 철쇄가 설치돼 있었고, 이중 전라좌수영 철쇄는 설치 포인트가 현재도 사적지로 남아 있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 용도로 널리 쓰여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때도 투르크 함대를 막기 위해 철쇄를 설치하자 메메드 2세가 함대를 통째로 육로 운송하는 것으로 대응한 바 있다. 다만 이 경우 보통 부표와 부표 사이를 연결하는 것으로, 적에게도 뻔히 보이기 때문에 안 걸린다. 접근을 하지 않게 만드는 게 목적인 것이다. 이런 항만 방어용 철쇄가 우수영에도 설치돼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고, 우수영은 명량해협 서쪽 끄트머리에 있으므로 우수영 수비용 철쇄가 울돌목 차단용 철쇄로 오인된 것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런 해석과 연계해서 명량 해전 자체의 결전장이 해협 한가운데가 아니라 우수영 앞 바다라는 견해를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견해는 이민웅 교수[119] 의 저서 <임진왜란 해전사>(2004년)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그러나 현재 이를 지지하는 학자는 사실상 없거나, 있더라도 소수이다. 사실은 관심 가진 학자도 별로 없지만. 이 주장이 지지를 못받는 결정적인 이유는 울돌목이 지닌 최소한의 지형상의 유리함이 없다는 것이다. 울돌목은 그나마 소수로 길목을 막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지만 우수영 앞바다는 그런 이점도 없는 허허벌판이라서 이런 곳에서 싸웠다가는 수적 열세로 인해 앞뒤로 포위되어 전멸당하기 알맞은 곳이다. 별도의 이야기지만 전쟁 중에 이순신이 부족하다고 한 쇠붙이는 동철, 즉 구리다.#
6.8. 전설이 되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을 막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가 임진왜란이 평정되니'''
'''성스러운 자태를 감추어 바람같이 스러진 것이었다.'''
박종화 作 《임진왜란》 中
비록 명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으나 일본군이 동원한 함대는 300척이 넘었기에 얼마 못 가 이순신은 함대를 물린다. 그러나 몇 달 안 되어 이순신은 서해안에서 일본군을 전부 몰아내고[120]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해 수군 재건에 주력했다. 다행히 명량 직후에 승전 소식을 들은 칠천량의 패잔병과 피난민들, 흩어진 전선들이 고금도의 새 통제영에 속속들이 합류하여 얼마 안 가 본래의 위용을 되찾는 데에 성공했다.[121] 패잔병 및 전선의 합류를 통해 칠천량 해전 당시의 결과를 유추할 수 있다. 칠천량 해전 당시 통념처럼 조선 수군의 상당수가 칠천량 및 춘원포에서 말 그대로 궤멸된 게 아니라, 의외로 적지 않은 함선 및 병력이 지휘 통제를 상실하고 뿔뿔히 흩어진 상태임을 알 수 있다는 뜻.
하지만 이순신은 직업적으로는 큰 공을 세웠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명량해전 직후에 이순신이 가장 아꼈던 셋째 아들 이면이 고향인 아산을 침공해온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것이다. 이순신은 이 소식을 듣고 살생과 업보로 죄를 진 자신이 먼저 죽어야 하는데 아들이 먼저 나를 떠나고 말았다고 남기며, 젊고 재능있는 아들의 죽음에 매우 슬퍼했다.[122]
그 뒤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합류하였는데, 그는 능력은 있으나 탐욕스런 인물이었다.[123] 이순신은 명 수군이 조선 백성들을 상대로 약탈 등을 자행하자 백성들과 함께 이삿짐을 싸고 떠나는 시늉을 했고, 다시는 그런 행패를 부리지 못하게 할 테니 가지 말라면서 찾아온 진린에게 귀국 군사들이 또 행패를 부린다면 직접 그들을 다스릴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하고 승낙받아 명 수군의 지휘권까지 일부 얻어냈다. 이후 진린에게 자신의 공로를 기탄없이 그냥 넘겨주는 식의 '채찍과 당근'을 병용하여 그를 마음으로 감복하게 하였다.
실제로 진린은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순신의 성품과 능력에 감복하여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124] 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125] 가 있는 사람이다."'''라는 최고의 찬사를 하는가 하면, 걸핏하면 조선인을 깔보기 일쑤인 중국의 고관이 통제사 이순신을 통상대인이나 이대인이라는 호칭도 아니고 노야(老爺) 또는 이야(李爺)라는 존칭으로 불렀으며, 자신이 탄 가마가 감히 이순신이 탄 가마보다 먼저 나가는 일이 없도록 했을 정도이다.[126] 이에 그치지 않고 진린은 이순신에게 자신과 함께 명나라로 가서 살자고 조르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이순신 장군에게 푹 빠져있던 명나라 사람 중 하나였다.[127]
소설가 김경진은 이 부분에 대하여 진린 혹은 다른 명나라 장수에 의하여 이순신의 전공이 명 신종 만력제에게 상주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으나, 명 신종 실록 및 명대의 역대 상주문 중에는 그러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아 의문이 있다. 이순신이 명 신종 실록에 보이는 것은 단 한 차례, 동정군이 명나라에 복귀한 1599년에 전사한 이순신에 대해 포상을 명하는 만력제의 조칙에서일 뿐이다. 그런데 신종 만력제가 이 당시를 전후해서 30년 동안 국사를 전혀 돌보지 않고 신하들도 만나지 않는 엽기적인 태업을 하고 있던 상황이라 후에 정조실록에서 보면 확실히 명나라 직책으로도 수군 도독으로 된 걸 보면 올라가긴 한 거 같은데 이와 관련된 기록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명사에서 기록되지 않은 명 황실에서 한 고문 방법이 동시기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하게 기록된 것을 생각한다면, 당대 양 국가 모두 껄끄럽게 여길 가능성이 높다란 생각을 해야 할 일이다. 전해진 물품이 진린 개인이 만들어 전달했다는 감정을 한 교수 발언도 있긴 하다.[128] 대체역사소설 이순신의 나라에서는 선조의 주장처럼 이이제이를 바라는 것으로 묘사했다.
[image]
[129]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뒤 왜군은 철수를 결정했다. 이순신의 함대는 명 함대와 합류해 철수하는 적 주력과 노량 앞바다에서 충돌한다. '''뒤로는 조정과, 앞으로는 왜군과''' 싸워야 했던 고독한 영웅은 마지막까지 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적선 200여 척이 격침되고 50여 척만이 도주했다. 역설적으로 충무공이 쓰러진 이 전투는 충무공의 23전 전적에서 최고 규모의 전과를 올린 전투였다.
노량 해전이야말로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해전이다. 종전까지는 이순신이 철저한 계획과 철두철미한 전략으로 완승을 거두었지만, 노량 해전은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진린과 유정은 서로 내 손에 피를 안 묻히고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130]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4개로에 있던 왜군은 철병을 결정했고 이에 대응해서 조명 연합군이 추격을 했는데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곳이 바로 노량 해전이다. 다른 곳에서는 일본군을 추격하는 둥 마는 둥 하거나 어설프게 공격하다가 반격당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131]
고니시는 진린과 협상을 해서 무사히 탈출하려고 했으나 장군의 반대 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1척만 포위망을 통과하게 해달라고 진린을 꼬여서 구원군 요청을 보냈고 왜군은 500여척에 달하는 원병을 파병하게 된다. 조선군과 명군 다 합쳐도 130여척에 불과한 전력인 데다가 명군의 함선은 왜선보다 작은 상황, 진린도 조선 판옥선을 타고 있을 정도니...[132] 조명 연합군은 이제 여수와 사천 양쪽의 왜 수군에게 포위를 당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진린은 당근 그 상황을 회피하고 도망가려고 했겠지만 이순신이 단호하게 죽음을 각오하고 진린과 한 판 붙은 끝에 노량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노량 해전은 쉽지 않은 해전이었다. 야간 해전에다 이미 전략적으로 역으로 포위당해 불리한 상황이었고 함선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전장은 좁아서 백병전을 하는, 지금까지 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것은 이순신이 결코 의도한 상황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잘 훈련된 조선 수군과 명의 연합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여서 기어코 승리를 이루어냈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군인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노량 해전은 워낙 치열해서 대장선에 탄 진린과 이순신이 위급할 때 서로 구원할 지경이었다. 전략과 전술보다 평소 훈련이 전투의 핵심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접전 끝에 결국 조명 연합군은 승리하고 이순신은 전사했으며 전쟁이 끝났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이 보여준 전략, 전술, 판단력, 철천지 원수 왜군에 대한 단호한 복수심, 민중을 사랑하는 애민정신, 사람들을 이끄는 통솔력, 그 어느 것도 모범이 되지 않은 것이 없다. 물론 시대와 상황이 만든 영웅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이것은 이순신이 평소에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의 철저한 준비와 비관적으로 느낄 만큼 현실적인 판단력이 합쳐진 결과였다. 진정한 영웅이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마음가짐이다.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고, 통곡이 바다를 덮었다고 전해진다. 그와 만나기 이전엔 부패했고 조선군 때리기도 주저하지 않으며 성질 포악한 명나라 도독이었던 진린은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는 노야(老爺)께서 살아 와서 나를 구원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하여 돌아가셨는가?” 하고 통곡했고, 그의 아들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손을 부여잡고 애통해 하였다. 이순신의 지휘를 받으며 다른 명군과 달리 꽤나 엄한 군율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명나라 수군 장졸들도 눈물을 흘렸다. 이순신의 유해가 실린 운구가 아산까지 올라가는 길엔 여기저기서 백성들이 너도나도 운구를 붙들고 '''"공이 실로 우리를 살렸는데, 공은 이제 우릴 버리고 어디를 가시오..."''' 하고 통곡하여, 운구를 옮기는 데 매우 애를 먹었을 정도였다고 전한다.도독(진린)은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3번씩이나 배에 엎어지면서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없어졌구나!"라고 하였다. 남도 백성들은 공의 죽음을 듣고 분주히 길거리에서 통곡하였고 시장에 있던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 후 가족이 고향으로 반장(返葬)할 때 남중의 선비들이 제문을 지어 와 제사하였고 노약자들은 길을 가로막고 통곡하여 고을 경계까지 통곡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이항복, <백사집>
7. 논란
이순신의 사망과 관련된 여러 설들과 각종 음모론을 모아놓은 문서. 검증되지 않은 집단 연구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니 이를 감안해서 읽어야 한다.
이순신이라는 인물 자체의 논란[133] 이 아닌, 그의 사망 등에 관련된 논란을 서술한다.
8. 전투 관련
8.1. 참전 목록
아군 피해와 성과를 보면 그 많은 전투에서의 전사자를 다 합쳐도 '''단 200명 정도'''에서 그쳤고,[152] 격침시킨 적선이 800척에 가깝다. '''이는 전사자 1명이 적선 4척을 격침'''한 격이다. 또한 병사들의 손실에 비해 지휘관과 부관의 손실률이 굉장히 높은 것도 특기할 만한 사항.
반대로 일본군은 병사들의 손실에 비해 지휘관의 손실률이 대단히 낮다. 이는 대체로 일본군 지휘관들이 후방에 위치하던 것과는 다르게 조선군 지휘관들은 전면으로 나섰음을 보여준다.
8.2. 전술
- 빠른 기동과 화포를 이용한 근대적 함대전 사상
또한 정보 수집을 통해 단 한 번도 왜군에게 기습을 당하지 않았고, 징비록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서 기습이 있을 것 같으니 준비해라"라고 하자 얼마 안 있어 진짜로 왔다는 일화까지 있다. 휘하 장수들은 이순신이 귀신이 아닌가 했다지만, 실제로는 왜군의 성향과 일기 등을 판단해 미리 대비했던 것.
김탁환을 비롯한 기괴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이길 수 있는 전장만을 택했다"라는 이유로 이순신을 까곤 한다. 하지만 이길 수 있는 전장을 택하는 것은 지휘관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므로, 이 말은 지휘관에게 있어 최고의 칭찬이 될 것이다. 무식함 때문에 까려다 도리어 칭찬을 하게 된 꼴. 전장은 지리와 기상 등 수많은 변수 덕분에 유불리가 시시각각 바뀌는 곳이고, 완벽히 유리한 장소가 있다 하더라도 적장이 지도도 볼 줄 모르는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곳에 가 줄 이유가 없다. 일본 지휘관들은 센코쿠 시대 동안 무수한 전투를 경험했고 수십년간 해적질도 해 온 베테랑들이다. 이런 장수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전장만을 택하는 것" 자체가 이순신의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을 입증하는 것이다. 만일 "이길 수 없는 전장에서 싸움을 택했다면" 이기더라도 그 손해가 막심했을 것이고, 설사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손자병법에서 싸우기 전에 이기는 것이 제일이라고 강조하고 한 편을 통째로 써서 다루는 것만 생각해도 답은 나온다.
또한 결정적으로 명량해전의 존재가 저 주장을 반박한다. 명량 해전은 객관적으로 봤을때 이길 가능성이 있는 전투가 아니었으며 순전히 전략적 판단에서, 이길 수 없더라도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기에 그 상황에서 그나마 가장 도박을 걸어볼만 한 울돌목을 전장으로 택한 것이다. 울돌목은 지형이 좁고 조류가 거칠지만 열세인 조선군 입장에서는 포위를 피하고 조류를 활용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일본군이 이순신을 무시하고 지나가기에는 역시 무리가 있었다. 울돌목은 통과하면 바로 서해이므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명량 해전에 참전한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출신지인 구루시마 해협은 울돌목처럼 조류가 빨랐고, 일본군도 전투 초반에 조류를 타고 올라오는 등 나름의 전술적 판단 하에서 울돌목에 진입했다.
다만 가끔씩은 이런 것이 아닌 본인의 감에도 의존한 듯하다. 징비록에서는 갑자기 이순신이 "왜놈들이 평소엔 달이 없을 때 기습했는데, 내가 생각해보니 이번에는 달이 있을 때 공격할 것 같으니 대비해야 한다." 이라고 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이순신이 미리 앞을 내다보고 준비했기에 일본군은 소득없이 물러나야 했다.[153]
- 규정에 입각한 엄격한 군율, 솔선수범과 공정함을 바탕으로 한 신뢰, 실전을 가장한 철저한 훈련
다만 이 군율은 단순한 똥군기가 아니다. 이순신이 평소 사익을 챙기거나,[155] 승리를 위해 희생을 강요하거나, 부하들을 도구로 여기거나, 편의에 따라 원칙을 곡해하는 상관이었다면 그가 명량 해전처럼 누가 보아도 도박과도 같은 무모해 보이는 승부수를 띄웠을 때 부하들은 '일본군에게 죽으나 이순신에게 죽으나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기꺼이 그를 버리고 달아났을 것이다. 당시 조선 수군은 폐지령이 고려되었고, 수군 장수들은 합류는커녕 은둔해 있었으며, 병력 차이는 1:10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런 상황에서 이순신의 돌격 명령을 충실히[156] 수행했다. 이런 미친 명령을 받아들인 병사들이 그만큼 이순신을 존경하고 믿었다는 것밖에는 해석할 방법이 없다. 이순신이 그저 혹독한 군율만 강조했다면 장비처럼 부하에게 목이 따이거나, 루쿨루스처럼 병사들이 싸우길 거부했을 것이다. 사실 이 쪽이 평범한 거고, 오히려 이순신의 사례가 동서고금의 전쟁사를 통틀어 꽤 드문 경우다.
이순신의 엄격한 군율은 명나라 군사들한테도 적용되었다. 특히 이순신은 군율을 어긴 명군을 직접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진린에게 위임받았는데[157] 이 때문에 진린의 명나라 수군만큼은 다른 명군에 비해 철저히 군율을 지키게 된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에 못지 않은 신망 역시 얻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진린은 물론이고 타국인 명나라 수군 장수들과 병졸들까지 통곡하는 것을 보면 이순신 장군의 인품이 외국인들까지 감명시킨 것.
이러한 신뢰와 군율이야말로 선진적인 화포 및 조선 기술과 함께 조선 수군의 승리를 보장한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용인 전투나 칠천량 해전에서 보듯이 조선군은 사기가 낮아서 뛰어난 지휘관에 의한 엄격한 통제가 있지 않으면 이길 만한 싸움에서도 셀프 멘붕해서 부대가 와해되고 마는 고질적 문제를 갖고 있었는데 이순신에 대한 신뢰와 엄정한 군율로 이것이 방지되었기 때문이다.[158]
만약 이순신이 경상 우수사로 미리 부임해 있었다면 임진왜란이 임진왜변으로 기록되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그의 전투 지휘 능력, 전략 / 전술은 절대적이었다. 비록 여러 부분에 있어 욕을 먹는 선조지만 적어도 '''북방 수비를 맡던 이순신을 반대를 무릅쓰고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수군의 중책을 맡긴''' 전쟁 초기까지의 인사 행정만큼은 정말로 뛰어난 판단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물론 센코쿠 시대의 일본의 주요 전장이 육상이었고 돈이 많이 드는 해군 전력을 체계적으로 육성하지 못해서, 왜군은 육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해전에는 어려움이 있기는 했다. 물론 왜군 쪽도 바보가 아니라서 해전에는 왜구 출신이거나 나름대로 정예 해상전력을 보냈지만 이전까지 통일된 체계를 갖춘 수군을 운영한 경험이 부족해서 손발이 안맞는 문제가 있었고 판옥선과 달리 순수한 싸움배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예 해상전력은 빠른 배와 항해에 능숙한 선원들과 도선 및 백병전을 장기로 하는 전투병력을 갖췄기에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고 왜군도 이순신한테 처맞으면서 조선 수군에 대한 대응법을 발전시켰다.[162]
일본군의 전술인 도선 접전 또는 등선 육박전은 보편적인 수상전의 형태였고 조류와 바람을 타고 빠르게 기동하는 부분에서 왜군이 뛰어난 실력을 보인건 사실이다. 이순신 장군은 그 문제를 파훼하고자 기동을 기동으로 대응하지 않고 '등선' 자체를 거부하는 형태로 전투선을 개량하고 화포를 탑재한 것이고 우선 화포와 궁시를 이용한 원거리 전투로 왜군의 전력을 깎은 다음 근접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163] 하지만 근접전에 들어가기 전에 충분한 타격을 주지 못했다면 왜 수군은 빠르게 접근하여 붙은 다음 마치 적성에 오르듯 판옥선을 기어 올라가 접전을 벌였고 이억기, 최호의 함대와 김완의 함선도 그렇게 불타버렸다.
또한 전술했듯 왜군도 이순신에게 처맞아가면서 조선 수군에 대한 대응수단을 발전시켰고 조선 수군 또한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이 파직되고, 원균이 그 자리를 빼앗아 무리하게 공격에 나섰고 그동안 왜군이 더 발전시킨 등선백병전과 포위협격술에 제대로 당하면서 칠천량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이억기와 최호 등이 휘하 판옥선들을 부려 진형을 짜고 대응하였으나 상황이 너무 나빠서 왜군에게 당하고 말았다. 병력의 피로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왜군이 야간에 기습해서 근접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원거리 전투로 적을 충분히 줄이지 못했다. 조선군이 자신들의 장점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왜군이 자신들의 장점을 원없이 발휘하는 데다 조선군은 제대로 쉬지도 못한 이런 상황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또한 전근대의 해전에서는 함선의 체급이 크다고 무조건 유리한 것도 아니었다. 판옥선은 세키부네보다 체급이 컸지만 그만큼 기동성이 낮았다. 오히려 숫적 우위를 활용하여 빠르게 접근해 포위하고 도선하려면 세키부네가 더 적합하였다. 그렇다고 함선의 체급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게 세키부네를 주력으로 굴린 왜군도 조선 측 판옥선을 복제해보거나 덩치를 키운 안택선을 건조해서 대응했다. 여하튼 함선의 경우 조선 측이 무조건 유리했다기보다는 판옥선과 세키부네/안택선의 장단점이 갈리는 것에 가깝고 이순신은 판옥선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전술을 잘 활용해서 기적같은 성과를 이뤄낸 것이다. 잘 보면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내내 철저하게 왜군의 등선할 기회를 주지 않도록 전투를 지휘했다. 병법상 아군의 이점을 극대화하고 약점을 최대한 감추는 것은 말은 쉽지만 실제로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데, 이순신은 그렇게 했다. 거기에 더하여 이순신은 중과부적의 왜군을 맞아 포격전과 함께 등선하는 왜군과 난전까지 벌였다.(정확하게는 기록상 안위의 배에 왜군이 다수 올라갔고, 다수가 전사하여 상황이 위급해지자 이순신이 적선 3척을 부수고 구원했다고 되어 있다.) 이순신은 멀찍이 뒷걸음질친 10척의 전선은 내버려두고 응전하여 온 안위와 김응함까지 해서 고작 세 척의 판옥선으로 역류하는 물살을 견디며 몇 시간 동안 수십 척의 세키부네를 막았다. 최대한 적의 등선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던 이순신이 왜군에게 유리한 해류 상황에서 격군들이 빠르게 지쳐 기동성이 저하되었을 것인데도 부순 적선만 31척이라고 장계에 올렸다. 그렇다고 조선 수군이 백병전을 무작정 기피한 건 이니다. 근거리에서 조란환과 화살을 퍼부어서 왜군의 숫자를 줄인 다음 그대로 왜선에 등선해서 포로를 구출하거나 중요한 물품을 노획하는 등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등선백병전을 수행했다.
이순신의 전공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 모든 전공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조선군 전체는 물론이고 이순신 개인이 겪은 이전의 전쟁 경험은 모두 여진족이나 왜구와 맞붙는 소규모 비대칭 전투의 형태였지 국가 간의 전면전이 아니었다.[164] 게다가 이순신은 처음부터 수군에서의 경험 자체가 많지 않았다. 전라 좌수사에 임명되기 전에 이순신이 수군에서 복무한 시기는 36살(1580년) 때 전라도의 발포 만호로 1년 6개월 남짓 복무한 게 사실상 전부였다. 그 외에는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조산 만호 등 육군에서 주로 활동했다.
또한 동아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제해권을 놓고 해전이 벌어진 것은 임진왜란이 처음이었기에 제해권의 중요도를 인식하고 있는 인물이 양군 수뇌부를 통틀어 거의 없었다.[165] 이순신 덕에 계속 이겨왔던 조선조차도 명량 해전의 승리 이전까지 수군 폐지령을 내리려 했을 정도로 제해권과 그로 인한 이득에 대해 무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칠천량의 초대형 참사 이후에도 제해권을 지키기 위해 단 1척의 전선으로라도 싸우려 한 것은, 단지 용기와 결단력의 문제가 아니라 전황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장'이라 하면 보통 거듭되는 전란을 겪으며 수많은 전투 경험이 쌓이고, 그렇게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중요한 전투에서 모범답안을 들고 나와 대승을 거두는 식으로 배출되곤 했는데, 200년간의 평화기를 겪은 조선에서 단지 소규모 교전만을 겪어 보고 그 이외엔 병법서를 탐독하며 독자적으로 전략 전술을 연구했을 뿐인 이순신이 첫 해전부터 마지막 해전까지 사소한 실책조차 보기 힘들었다는 것은 그가 단순히 모범적인 군인이 아니라 그야말로 천재적인 명장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일례로 최후의 작전의 대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도 1차 대전 참전과 라팔로 조약 기간의 연습 등의 경험을 토대로 2차대전의 활약을 펼칠 수 있었으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사관학교와 1차 대불동맹과의 교전 등을 통해서 성장해 나갔으며, 칭기즈 칸도 초창기 시절의 군사적 패배와 경험 등으로 육지에서 승전을 이어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부친 필리포스 2세가 이룩한 군사혁신과 유리한 정치구도를 발판으로 군사적 업적을 이루었다. 육군에서 타 군으로 이전하여 전공을 거둔 헨리 햅 아놀드나 밀히도 직전 시기의 신 병과인 공군을 직접 경험하고 공군으로 간 사람들이다. 직전 시대에 자신이 신 병과나 군사혁신의 단초와 관련된 전투에 참가하지도 못하고, 체계적인 군사교리 교습과 연구 없이 이룬 충무공의 성과를 요약하며 다른 군사적 천재와 비교하는 것은 독자에게 맡긴다.
1. 대전략적 구도부터 통찰하고, 그로 인해 제해권 개념을 인지하고 수뇌부에 강조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뇌부로부터 온갖 음해와 견제에도 불구하고 조국과 백성(국민)에 대한 충절을 다하며 휘하 장졸에게 불변의 사회적 자본으로 기능한 점
2. 전략적 고찰로 군사 운용의 기초를 잡고 소모전에 휘말리지 않으며 지속적 작전을 위해 민심을 얻었으며, 전쟁 초기의 수세에서 현존함대전략의 요소를 활용하고 이후 한산도로 통제영을 이동시켜 견내량 이서 지역의 해상요새화로 전략적 변모를 꾀하며, 수급보다도 적선 완파를 통한 적 전력의 효율적 감쇄를 이룩한 점
3. 작전적 운용을 극대화하여 아군의 능력을 극대화해서 유지시키고 적의 장점을 거부한 점(기습, 정찰중시, 화포 운용 적극성, 전장선택, 정찰강화 및 아군전투전력 보존 등)
4. 전술적으로 기본적 틀은 있으나 상황에 맞게 운용을 기하면서 항상 솔선수범을 한 점(일자진, 학익진, 장사진으로 순환타격 등 진법의 다채로운 구현, 수급에 연연하지 않으나 사기 고취를 위해서는 활용하기도 한 점, 진두지휘로 조직력 강화 밑 통솔 극대화, 시간적-공간적 이점을 순간적으로 활용하는 즉각대처능력 등.)
이 점 모두가 임금의 질시와 말 안 듣는 원균이란 희대의 트롤을 끼고 이룩한 가시적 성과이다.
전쟁 초기에 많은 조선군은 장군과 사졸 가릴 것 없이 도망치느라 바빴다. 반면 평소부터 역량을 갈고닦은 성웅은 때가 되자 그 면모를 실시간으로 선보이며, 200년 전란을 경험한 왜군에게 지옥을 선보였다. 돕기는커녕, 녹둔도 전투처럼 실상은 인맥을 통해 전문가로 포장된 비전문가들한테 시달렸어도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고, 노량해전을 마쳤을 때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 존재는 실로 절대적이었다. 게다가 수백년 전 성웅은 그 치명적인 트롤링을 아군한테 당하면서도[166] 천재라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그 역량을 펼쳐 주었고, 오늘날 후손들은 그런 역량을 발휘한 성웅에게 경의를 드리고 있다. [167][168]
9. 가족
가족으로는 아버지 이정(1511~1583), 어머니 변씨 부인(?~1597)과 아내 방수진, 첩 해주 오씨와 '부안댁'[169] 이라는 이름의 첩실이 있었다. 방수진과의 사이에 장남 이회, 차남 이열(이울), 3남 이면[170] 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이순신의 장녀는 홍가신의 아들 홍비와 혼인했다. 그 외 서자로 이훈, 이신과 서녀 2명을 두었다. 또한 이순신의 서녀 중 1명은 윤효전(1563~1619)의 첩이 되었는데, 윤효전은 바로 현종~숙종 연간 남인의 중심 인물이었던 윤휴의 아버지다. 다만 윤휴는 이순신 서녀의 소생이 아니라 윤효전의 적자고, 윤효전과 이순신의 서녀 사이에 태어난 사람은 윤영(1611~1691)으로 그가 윤휴의 이복 형이다.
이순신의 부친 이정은 음서로 벼슬에 올라[171] 최종 직위는 종5품 창신 교위에 이르렀으나 실무를 맡은 게 아니었고 일종의 임시직이나 명예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72] 사후 1604년에 아들 이순신의 막대한 훈공으로 좌의정에 추증되고 덕연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전라 좌수사에 취임한 직후 어머니 변씨를 여수의 고움내(현대의 여수시 웅천 지역)라는 곳에 모시고 봉양했는데, 현대에도 여수에는 '이순신 자당기거지'[173] 라고 해서 변씨가 살던 집이 남아 있다. 어머니도 상당히 강직한 여성이었는데, 《난중일기》를 보면 문안 인사를 하고 떠나는 아들 이순신에게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라고 격려한 기록도 남아 있다. 이때 이순신은 어머니의 모습을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마음으로 탄식한 빛이 없으셨다"라고 묘사하고 있다.[174] 1597년 이순신이 파직당하고 백의종군을 떠날 때, 변씨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관을 싣고 오다가 병사했는데, 이순신은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도 모자라, 임지로 떠나는 길이라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바로 떠나야 했다.''' 누가 봐도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의 이순신이 느낀 애통함은 난중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나가는 중에''' 아들 울이 종을 보내 "아직 배 소식이 없다."하였다. (중략) 조금 있으니 종 순화가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알렸다. 뛰쳐나가 가슴을 두들기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하다.''' 즉시 갯바위로 달려나가니 이미 배가 와 있었다. '''이 애통함을 글로 다 적을 수가 없다.'''"
정유년 4월 13일(1597년 5월 28일) 《난중일기》
더 기가 막힌 것은 모친의 본관이 초계이다. 다름아닌 이순신의 귀양지다. 이후 이순신은 상주(喪主)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선조가 이 소식을 듣고 그에게 고기를 하사한 적이 있다. 다른 인물이라면 순수하게 이순신의 건강을 걱정해서 고기를 먹고 몸을 추스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하필 이순신을 불행하게 만든 그 선조인데다, 《난중일기》의 기록도 "주상께서 고기를 하사하니 비통하고, 또 비통하다"고 나와 있다(정유년 12월 5일). 따라서 이 일에 대해 선조가 이순신을 진심으로 위로하는게 아니라 일부러 일종의 충성심 테스트를 했고, 이를 눈치 챈 이순신이 복잡한 감정을 일기에 쓴 것이다. 더구나 정유년 12월 5일이면 어머니에 이어 셋째 아들 이면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 뒤이기도 하다. 어머니와 아들을 한 해에 다 잃고 비통해하는 장수, 그것도 상주에게 국왕이 고기를 내려준 것이다. 이는 선조가 이순신에 대해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백의종군시키고 어머니와 아들을 잃어 비통에 빠진 신하에게 고기를 즐기라고 내어주는 행동은 조선을 지배하던 유교적 도리를 서로 상충되게 하여 신하를 곤란하게 만든 것인데,[175] 이 행동을 선조의 잔머리와 졸렬함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면 선조는 매우 어리석고 멍청하기 그지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에는 선조도 일정부분 기여한 공이 있다. 아들이 의금부에 잡혀갔다는 소식에 놀란 어머니가 연로한 나이에다 건강도 나쁜 몸인데도 아들을 보기 위해 아산까지 직접 오기로 했고 결국 아산에 오기 전 건강이 악화되어 배 위에서 숨을 거둔 것.'''竭忠於國而罪已至'''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으나 죄가 이미 미쳤고'''
'''欲孝於親而親亦亡'''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자 하였으나 부모마저 돌아가셨네.'''
'''天地安如吾之事乎'''
'''세상에 어찌 나같은 사람이 있으랴?'''
'''不如 早死也'''
'''속히 죽느니만 못하다.'''
정유년 4월 19일(1597년 6월 3일) 《난중일기》
이순신의 아내인 방수진(方守震)은 무관 출신으로 보성 군수를 역임한 방진의 딸인데, 대단한 여장부 기질이 있었던 모양. 어린 시절 방씨 집에 도적들이 쳐들어오자 방진이 활을 쏘며 저항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방수진이 베틀에 쓰는 대나무 가지더미를 바닥에 쏟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버지!! 여기 화살들이 있습니다!!"라고 소리쳐 화살이 많이 남아 있다고 속여서 도적들이 도망갔다는 야사가 있다. 또한 류성룡의 글[176] 에 따르면, 사위인 홍비가 체구가 작아서 마음에 차지 않다며 집에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집안 노비들을 거느리고 직접 농사를 지어서 집안을 유지하며, 대단히 성격이 강해서 집안 사람들 중 아무도 그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고 나온다. 이에 대해 류성룡은 "참으로 장수(將帥)의 집안에는 장수의 아내가 있다"며 감탄했다. 방씨가 사위를 박대한 이유로 단순히 사위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상대 집안에 대한 항의라는 해석도 있다. 이 사위의 아버지는 이순신의 친구인 홍가신이다.[177] 그런데 홍비는 이 결혼이 재혼이었다. 홍비의 첫 번째 부인이 일찍 죽어서 이순신의 딸과 재혼한 것. 첩으로 들인 것이 아니라 재혼한 것이므로 딱히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이지만, 조선 시대에 재취로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그다지 반기지 않는 게 당시 풍습이었다. 이를 불편하게 여긴 방수진이 사위를 박대함으로써 홍가신 집안에게 항의 표시를 했다는 해석이다.
방수진의 본명은 오랫동안 알려져 있지 않아 후세에 와서는 그냥 '방씨', 혹은 본관을 붙여 '상주 방씨'라고 불려졌다. 일부 야사 및 창작물에서 '연화', '태평'' 등의 이름이 나오긴 했지만 이를 증명할 근거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난중일기, 임진장초와 함께 국보 76호로 지정된 서간첩[178] 을 연구한 결과 본명이 '수진'임이 밝혀졌다. 다만 이에 대해선 '수진'은 방씨의 이름이 아니라 이순신의 장인인 방진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반박도 있다. 허나, 위 기사 속 반박은 시대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의견이라 아쉽다. 이순신이 부계 쪽인 살던 서울에서 출생하여, 모계쪽이 있던 아산으로 온 것이나 자신의 사후부터 장인으로부터 받은 현중사가 자신의 부계로 이어진 것을 생각하면, 타당성도 있을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그녀도 병을 앓아서 전란 중에 사경을 헤맸다는 기록도 있는데, 아들 이회가 1603년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사직하는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순신의 전사 후인 1603년까지는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류성룡은 저서인 《징비록》의 평가에서, 모두가 이순신 장군을 영웅적이고 위엄 있는 인물이고 장수로 생각하지만, '''장수로서 위엄 있는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글을 읽는 단아한 선비''' 같다고 하였다.
가족에 대해 자상한 부친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가 몇 있다. 이순신의 두 형 이희신과 이요신은 각각 4명과 2명의 자식을 남기고 비교적 일찍 죽었는데, 이순신은 이 6명의 조카를 친자식 못지 않게 잘 키워냈다. 특히 정읍 현감으로 부임할 당시에 이들 조카들을 데려가면 파직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조선은 유교 사상 덕에, 기본적으로 세금 = 백성의 부담으로 보고, 최대한 세금을 적게 걷어 필요한 데만 쓰는 식의 굉장한 긴축 재정을 강요받는 행정 체제를 가지고 있어서, 행정관이 가솔들을 데려와 먹여 살리는 것은 충분히 탄핵의 대상이 될 만한 일이다. 이른바 남솔(濫率)이라고 해서, 지방관이 가솔을 제한 이상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이 당대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카들이 부모가 모두 죽어 천애고아라 의지할 곳이 나뿐인데, 어찌 두고 가는가? 차라리 파직당할지언정 조카들을 버릴 수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읍 현감으로 있는 동안 그의 가족들이 보여준 처신이나 조카들의 행동은 정읍 주민들에게 칭찬을 받을 만큼 대단했다고 한다. 이 조카들의 혼례를 다 치러낸 후에야 자신의 친자식의 혼례를 했을 정도.
아들 사랑 또한 지극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셋째 아들 이면이 아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의 《난중일기》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심금을 울리는 애틋한 문장으로 가득하다.'''晨昏戀慟淚凝成血'''
'''조석으로 그립고 애통하여 눈물이 엉겨 피가 되어 흐르거늘'''
'''天胡漠漠不我燭兮'''
'''하늘은 어찌 무심하게도 나를 굽어살피지 않으시던가?'''
'''何不速我死也'''
'''어찌 속히 죽이지 않으시나?'''
정유년 5월 6일(1597년 6월 20일) 《난중일기》
꿈 속에서 죽은 두 형을 만난 후[179]
"새벽 2시쯤 꿈에서 내가 말을 타고 언덕을 달릴 때 말이 실족하여 내가 물에 빠졌다. 그런데 쓰러지지는 않았으므로 보니 면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 듯 했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다. (중략) 천안에서 사람이 와서 집 편지를 전했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눈앞이 아찔하고 골육이 진동했다.''' 대충 뜯고 겉을 보니 '통곡'이란 두 글자가 써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았다. 통곡하고 또 통곡하도다! 하늘이 어찌 이렇게 어질지 못하실 수가 있는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게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은 무슨 괴상한 이치란 말인가. 온 세상이 깜깜하고 해조차 색이 바래보인다. 슬프다 내 작은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네가 유독 출중하고 영민하여 하늘이 세상에 남겨두지를 않으시는 것이냐, 나의 죄가 네게 화를 미쳤느냐. 나는 세상에 살아있지만 장차 어디에 의지하랴. 함께 죽어 너와 지하에서 지내며 울고 싶으나 네 형, 누나,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질 것이니 참고 연명하겠다만 혼은 죽고 가죽만 남아 부르짖고 서글피 울 뿐이다. 하룻밤을 넘기기가 한 해와 같도다."
정유년 10월 14일(1597년 11월 22일) 《난중일기》
"나는 내일이 막내 아들(이면)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정유년 10월 16일(1597년 11월 24일) 《난중일기》
이순신은 이때 부하들이 있는 곳에서는 울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난중일기》에서는 종 강막지(姜莫只)의 소금 창고에 '''"숨어서 울었다."'''고 나와 있다. 이분의 《이충무공행록(李忠武公行錄)》에 보면 '''공이 이로 인해 정신이 쇠약해졌다'''라고 하는데, 이순신이 이리도 슬퍼했던 이유는 물론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의 슬픔도 있었겠지만 이면이 이순신 본인을 가장 많이 닮아서 유독 귀여워하던 자식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새벽나절에 꿈 속에서 고향의 종자 진(辰)이 찾아왔기에 면이 생각나 통곡하였다."
(중략)
"한밤에 생각하자니 눈물이 흐르는데, 어찌 다 말하겠는가. 기어이 내 불효함이 예까지 이를 줄 누가 알았으랴.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니 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정유년 10월 19일(1597년 11월 27일) 《난중일기》
셋째 아들 이면에 대해서는 후에 야사가 하나 전해 내려오는데, 죽은 면이 꿈 속에 다시 나타나 울며 "소자를 죽인 자가 '''근처에''' 있나이다."하고 사라졌다. 이순신이 꿈에서 깨고는 이상히 여겨 한참을 생각하다가 문득 '''아산에서 전투를 벌였던''' 일본군 포로들을 끌어와 심문하니 과연 그 중에 면을 죽인 자가 있어 즉시 그를 베어버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공사 구분은 상당히 엄격해서 아무리 상관이나 친인척이라도 예외가 없었다. 35세에 '''종8품''' 훈련원 봉사 시절에는 '''정5품''' 병조 정랑 서익이 원칙에 어긋나는 인사를 지시하자 칼같이 거절했다가[180] 이듬해 종4품 수군 만호로 재직 중, 병조 정랑이었던 서익이 군기 경차관으로 와서 감찰로 트집을 잡아 파직되기도 했다. 같은 덕수 이씨였던 율곡 이이[181] 가 이순신이 초급 군관 시절 한 번 만나보고 싶어했는데, 당시 이율곡은 지금의 행정부 장관에 해당하는 이조판서로 지낼 무렵이었다(1년 뒤 국방부 장관급인 병조판서가 됨). 당시 이런 장관급이 호의를 보인다면 출세길 열렸다며 튀어가고 현대에도 이런 고위 인사를 등에 업고 각종 청탁이나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이순신은 '''"(율곡께서) 이조 판서로 있으신 동안은 인사권이 있으시니, 저는 만날 수 없습니다."'''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물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로비' 권고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았는데 병조 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를 첩으로 주고 싶어 매파를 띄웠으나 단칼에 거절하기도 했다.
이같은 엄격함은 자신의 친인척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이순신의 장남인 이회와 조카 이분, 이완, 이봉[182] 은 전쟁 내내 별다른 무관 관직조차 없이 '''일개 의병 신분으로 참전'''했다. 조선 시대에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서 친인척끼리는 같은 임지에서 관직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상피제가 있었는데 이를 충실하게 지킨 것이다.
이완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야 무과에 급제하고 본격적으로 무관의 길을 걸었으며, 후에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의주성에서 후금군을 상대로 분전하다가 종제 이신과 함께 전사한다. 서자 이훈과 이신은 무과에 급제해 각각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에 참전하여 분전하다 전사했다. 정유년에 아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삼남 이면까지 포함하면 다섯 아들 중 4명과 조카 3명이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전장에서 분골쇄신했다. 집안의 이단아(?) 차남 이예[183] 는 순수 문관으로 형조정랑을 역임했으며 사후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덕수 이씨는 이순신 사후 조선 유수의 무반 명가로 자리하는데 무과 합격자 명단인 무과방목에선 78명의 덕수 이씨 합격자가 확인되며 이중 75명이 이순신 사후 나온 합격자다. 75명이 적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현존하는 무과방목(합격자 명단)은 조선시대 실시된 총 무과 횟수의 20%가 채 안된다. 70명 이상의 합격자를 배출한 가문은 전체 2,513 성관에서 덕수 이씨 포함 74개에 불과하다.
또한 덕수 이씨 세보를 참고하면 숫자가 아득히 늘어나는데 이순신 아래로 무과 급제자가 무려 267명이다.
10. 후손
얄궂게도 이런 먼치킨이 등장하여 이순신의 본관인 덕수 이씨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무반 가문으로 손꼽히게 된다.'''무과 급제는 267명'''이나 하는데 문관 급제는 단 1명에 불과할 정도다. 중요한 것은 원래 충무공 가문은 '''문반 가문'''이었다.[184] 그러니까 충무공의 후예라는 이유로 진로선택으로서 문반이 아닌 무반을 강요당한 정황이 보인다. 그리고 정작 실록에 기록될 때는 '''충무공에 비해서 뭐뭐가 부족하다''' 식으로 기술되었다고. 조상을 잘 만난 건지, 잘못 만난 건지... 그래도 나라를 지켜낸 사람이 나온 가문의 후손이라 조선시대 내내 특별 대우를 받았다.
5대손 이봉상(李鳳祥, 1676~1728)은 참으로 무능한 사람이었는데, 오죽하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오직 무능하다는 이유만으로 탄핵 상소까지 올라왔다가 기각됐을 정도였다.[185] 이인좌의 난 때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사로잡히기는 했으나 투항을 거부하고 피살되었는데, 이 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바로 '''"너는 충무공 집안에 충의가 서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 했느냐? 왜 빨리 나를 죽이지 않느냐?"'''였다. 능력은 없을지언정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라는 자부심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결국 이 점을 높이 사 사후에 충민공(忠愍公)[186] 으로 추존되고 조상인 이순신과 함께 현충사에도 배향되었다.
이외에도 정조 시기에는 이인수, 이승권 등이 있었다고 하며 근대에 들어오면 충무공의 후손답게 종가에서 독립운동가가 3대에 걸쳐 나왔다. 각각 12, 13, 14대 종손인 이세영, 이종옥, 이응렬 열사가 바로 그 분들이다.이순신 장군 후손, 일제강점기 3대 걸쳐 항일독립운동 투신, 이순신 장군 13대 종손도 항일무장투쟁 첫 확인. 다만 부계 후손은 아니지만 친일파인 권중현도 있다.[187]
현대에는 방송인 이종환, 배우 이미숙이 있다.
11. 인격
어릴 적부터 이어진 형 요신의 친구 류성룡과의 우정[188] 이 유명하며[189] 그 탓에 정치적으로는 어디에도 쏠리지 않은 중립이었음에도, 동인 그 중에서도 남인 계열로 여겨졌다. 단, 남인 계열로 여겨지기 시작한 건, 전라 좌수사가 되고 임진왜란 때의 전투로 주목받은 이후이다.[190]
사적인 일에는 융통성이 있었지만 공적인 일에는 일체의 부정을 허락하지않는 철저한 FM으로 임했다. 아부를 하는 성격이 아니고 우직한 편이기 때문에 군인으로서 안 당해도 될 불이익을 꽤 당했다. 녹둔도 시절에는 군공을 세우고도 되려 처벌을 받았고 임진년부터 쌓인 눈부신 전공과 민심이반으로 이순신을 경계하여 싫어한 선조에 의해 파직당하고 고문당하며 백의종군까지 했다. 그러나 선조는 원균이 조선 수군을 싸그리 말아먹고 나서야 이순신이 옳았음을 깨닫고 이순신을 재차 통제사에 임명하는 등, 이순신은 군인으로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순신은 윗사람에게 손을 비비며 입신양명하려는 스타일이 아니었으며, 매사에 현재 일어난 상황 그대로 판단하고 설명하는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이순신보다 품계가 높은 윗사람, 특히 국왕 선조의 심기를 상하게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한마디로 이순신 장군은 완벽주의적인 비관파였다. 더군다나 완벽주의는 이루어질 수 없기에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장군은 그래서 철저히 준비했고 군율을 엄격히 적용했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장군은 이를 극복하고 전투에서는 항상 승리로 이끌었다. 대단히 현실적이지만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아마 본인이 어머님에 대한 효심이 가득했던 걸로 보아 가족 관계가 대단히 돈독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백성들에 대해서도 어버이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던 걸로 보인다.[191][192]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철저히 신경 쓰는 완벽주의자라서 인지 굉장히 자주 아팠던 것으로 추정된다. 《난중일기》에 "아파서 배에서 '웅크리고(縮) 있었다"거나 "밤새 토사곽란으로 고생했다", "혼절해 있었다" 등의 서술이 많다. 실제로 《난중일기》 중에 "아팠다"는 기록만 찾아도 수십 차례가 넘는다. 심지어 하루에 10여 회 이상을 연거푸 토했다는 일기도 있을 지경. 이는 정유년 삭탈관직 당시 받은 고문의 후유증, 사천해전에서 입었던 부상의 후유증, 전쟁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와 휴식이나 치료가 없었던 점, 아래에 나오는 것처럼 과로와 스트레스를 잦은 음주로 해결한 점 등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다른 병세로는 특히 식은땀이 계속 흐른다는 내용이 매우 많다. 현대의 학자들은 스트레스성 질환인 만성 위염 또는 위궤양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11.1. 엄격한 직장 상사
그가 남긴 기록이나 여러 문헌에 의하면 굉장히 깐깐한 인물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충무공유사》의 기록을 해석한 결과, 원균을 가리켜 원흉(元兇)이라 부르며 싫어한 것이 밝혀져 충무공과 원균의 사이가 얼마나 나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원균의 행패가 그나마 점잖으면 원균의 자인 평중을 붙여 "원평중", 또는 "원수사"라고 불렀지만,[193] 행동이 도가 지나치면 가차없이 원흉이라 언급한다. 원균 역시 이순신이 지나칠 정도로 융통성 없다고 까대며 싫어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순신다운 현안이었다.[194]
부하들에게 굉장히 엄격한 상관이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부하 ○○가 기강이 태만하므로 베었다, 곤장을 때렸다' 등으로 가득 차 있다(예를 들어 김완이나 황옥현 등). 특히 많이 처벌받았던 자들이 관할 지역의 아전들이었다. 고려시대에 지방의 지배계층이었던 향리들은 조선 건국 후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수령에게 무보수로 봉사, 보좌하는 아전으로 굴러 떨어졌고, 이에 살 길이 어려워진[195] 아전들은 중간에서 갖은 비리를 저질렀는데, 이는 조선 시대 내내 큰 사회 문제였다. 이순신의 처지에선 나라의 존망이 걸려 목숨을 걸고 싸우는 판에, 그들의 비리나 과실을 눈감아 줄 리 만무했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서 '''존경할 만하지만, 상관으로 모시기엔 힘든 인물'''이라는 평이 나오기도 한다.# 능력이 엄친아급이니 '''보통 사람은 절대 따라해선 안 되는 인간의 표본'''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
小有違令 卽當軍律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명량 해전을 앞두고.
- 대표적으로 《난중일기》 기사에, 첫 출진인 옥포 해전 출진 하루 전에 군졸인 황옥현(黃玉玄)이 군영을 탈영해 도주하는 것을 붙잡았는데, 이순신은 이 황옥현을 그대로 참수형에 처했다. 사실 조선군은 군졸 뿐만 아니라 장수들도 많이 도주한 사례가 있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군기를 잡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 《난중일기》에 소개된 또 다른 일화로는, 아전 한명이 소를 데리고 군량을 가지고 오던 중, 강가에서 밥을 먹다가 잠시 술을 반주로 걸쳐 먹었는데, 그 사이에 소가 멋대로 움직이다 강에 빠져 죽었고 소에 실었던 군량도 같이 빠져버리는 사고가 나버렸다. 그러자 이순신은 그 아전을 관리 소홀의 책임으로 참수형에 처해졌다. 언뜻 보기엔 잔인한 처사로 보이지만 이순신의 수군은 기본적으로 모든 군량을 쪄서 가지고 다녔는데 물을 먹은 쌀은 군량으로서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전시상황에서 보급품을 관리소홀로 유실한 상황이니 엄한 처사를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 이때 죽은 소는 그날 병사들의 저녁 식사로 제공되었다.
- 명량 해전이 발발하기 전에 이순신은 수군을 수습하러 다녔는데, 이때 훔친 소를 끌고 가던 절도범들이 주변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목적으로 왜적이 온다고 떠벌리고 다니자 이들의 목을 베었다.[196] 이를 가지고 이순신의 유일한 실수라는 비판이란 헛소리가 있지만, 칠천량의 수군이 궤멸해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중임에도 범죄를 숨기고 혼란을 유발하고자 백성에게 왜적이 쳐들어온다고 유언비어를 말하고 다녔다는 점에서, 해당 범죄자들을 곱게 대해줄 이유가 없다는 게 오늘날에도 국가가 제대로 운영된다면, 처벌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197][198] 이에 대한 비판을 운운한 이들은 현실 감각이 없다는 뜻이다. 신립의 경우 적이 온다고 보고한 부관을 죽인 것은 지휘관과 참모들에게만 보고한 것으로 백성들에게 혼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는데 지휘관이 보고자를 죽인 것이므로 명백한 직권 남용이자 살인죄로 비난받아야 하지만, 이순신의 경우는 엄연히 다른 일이다. 게다가 조선 시대에는 소 절도범은 중죄인으로 간주했고, 당시의 소 1마리의 가치는 오늘날의 집 1채의 가치에 맞먹을 정도였다.[199] 이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농경 사회에서 소는 생산 수단 그 자체다. 오늘날로 치자면 전쟁 중이라 정신 없는 시기인데, 공습 시작됐다는 거짓말을 해서 사람들이 대피한 사이 엄연한 전략 물자인 휘발유, 경유 등을 털어갔다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200]
또한 '''완벽주의자'''로 가차 없이 백성들을 징집해 수군으로 훈련시켰으며, 전함 건조 등의 일도 철저하게 했다. 당시 조선 수군은 칠반천역(七般賤役) 중 하나로 여겨졌는데, 한번 입대하면 빠져나오기도 힘든데다 후손에게도 피해가 미치기에 탈영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로 인해 탈영자의 친족을 수군으로 강제 징발하는 법도 있었다. 이때문에 그 법이 너무하다 하여 이 법을 폐지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이순신은 장계를 2차례나 올려 그 일을 반대했다.[201] 그런데 백성들 처지에서 보면 육군보다는 믿음직하고 부유한 충무공 휘하의 수군이 복무하기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202] 게다가 수군과 그 군영 근처에 있으면 힘들어도 굶을 일은 없었다. 특히 임진왜란은 조선의 곡창지대인 삼남이 전쟁터였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굶는 자가 속출했고 이는 임금인 선조나 조정 대신들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런 판국에 밥을 안 굶는다는 것 자체가 장수들과 병사들,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천국인 셈이다. 이는 이순신이 섬에 둔전을 둬서 군량 확보에 신경을 써왔기 때문이다. 정유재란 이후에는 해로 통행첩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통행을 허가하는 대가로 쌀을 걷었는데, 며칠 안 가서 쌀 수천 석이 쌓였다. 이로써 군량 확보, 간첩선 방지, 백성들의 자유로운 통행이 보장되었다.
이외에도 철저한 '''엄벌주의자'''로, 수많은 부하들에게 형벌을 집행해서 어떻게든 수군에서 벗어나려 용쓰던 수졸들은 그를 무척 두려워했다. 그러나 최고 지휘관으로서 군대의 규율을 잡는 것은 원래부터 당연한 일이었고, 탈영, 물자 횡령, 적전(敵前) 도주는 현대에서도 최대 '''사형'''까지 당할 수 있는 중죄이다.
'''탈영''': 제27조(지휘관의 수소 이탈) 지휘관이 정당한 사유 없이 부대를 인솔하여 수소를 이탈하거나 배치 구역에 임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중략)
2. 전시, 사변 시 또는 계엄 지역인 경우: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
'''물자 횡령''': 제75조(군용물 등 범죄에 대한 형의 가중)
① 총포, 탄약, 폭발물, 차량, 장구, 기재, 식량, 피복 또는 그 밖에 군용에 공하는 물건 또는 군의 재산상 이익에 관하여 「형법」 제2편 제38장부터 제41장까지의 죄를 범한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1. 총포, 탄약 또는 폭발물의 경우: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2. 그 밖의 경우: 사형, 무기 또는 1년 이상의 징역
때문에 후대의 역덕후 / 밀덕후들은 이렇게 엄정한 이순신의 군기 확립을 두고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사망 원인 2위 = 이순신"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1위는 전염병이며, '''0위는 원흉'''이다.'''적전 도주''': 제30조(군무 이탈)
① 군무를 기피할 목적으로 부대 또는 직무를 이탈한 사람은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1. 적전인 경우: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
한국 군형법
다만 마냥 엄격한 것은 아니고 타인은 물론 본인에게도 관대하지 않고 철저히 원리 원칙에 따른 삶을 살아가며, 부하들에게 항상 최고인가 최선인가 물으며 개인의 잠재력과 능력을 극한까지 뽑아내어 부려먹고, 부려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잘 한건 큰 상을 주고 벌 역시 너도 나도 공평하게 받으며, 때에 따라서는 할 일을 하고 한없이 풀어줘서 소탈한 모습으로 부하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니 뒷담을 하기도 어렵고, 종래는 본인 스스로가 진두지휘하며 최후의 전쟁터에서 적을 분멸하다 장렬히 전사하는 군인으로서 더 첨언할 수 없을 만큼 장렬한 삶을 살다가 떠났으니 평범한 능력을 가진 부하들 입장에선 '''일은 더럽게 힘든데 그렇다고 절대 욕 할 수는 없는''' 그야말로 참 답답한 상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11.2. 공정함과 애민(愛民)
상벌에는 항상 공정했으며, 백성들과 병사들의 식량 공급[203] 과 생계, 부정부패의 절대 엄금 등 민생에도 진심으로 최대한 신경 쓰는 등, 장군이자 목민관으로서도 병사들을 포함한 백성들을 진심으로 돌보고 보살펴 주었기에, '''덕장(德將)'''의 면모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이순신이 정읍 현감으로 일할 때 인근 태인현의 현감이 공석이라 태인 현감까지 겸임하게 된다. 그간 현감이 없어서 밀렸던 일들을 이순신 장군이 바로 그 자리에서 신속하고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태인현의 백성들이 현감으로 임명해달라고 청할 정도로 사무 능력은 물론이고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했던 점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승첩 장계에서는 계급을 막론하고 일반 병졸이나 승려, 심지어는 '''노비'''까지도 가리지 않고 일일이 소속과 계급, 이름을 빼먹지 않고 적어 전공을 기록하고 있으며, 사망자 역시 신분을 가리지 않고 장계에 이름을 올려 적절한 보상을 받도록 해주었다. 따라서 백성과 병사들은 이순신을 매우 두려워하면서도 진심으로 존경하며 반기를 들 생각을 품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문건에서 이순신이 벌하거나 벌하려 했던 죄인들이 한 행동들은 군기 위반, 탈영, 군용 물자 유용 및 횡령, 군무 이탈이나 군무 회피 알선, 유언비어 유포 등 현대 기준으로 봐도 전시엔 사형이나 중형을 피하기 힘든 중범죄였다. 한마디로 '''정상적인 원리 원칙을 집행'''하는 이순신의 처분이었기에 엄격하지만 가혹하다 할 정도는 아니었다.[204] 애당초 가혹하기만 했다면, 수많은 백성들이 이순신의 통제영으로 피난 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통제영 자체가 일본 수군과 싸우기 위한 전진 기지인 만큼 전쟁터와 가장 가까운데도 말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조선 수군을 완전히 전멸하게 만들고 백성들도 대부분 비참하게 죽어가게 된 상황에서, 이순신이 돌아오자 백성들은 울며 절하고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이순신이 돌아오자 "원균의 살점을 강제로 뜯어서라도 먹고 싶다"고 하는 등 원균을 철저하게 증오하며, "장군께서 오셨으니 우리는 살았다"는 식으로 이순신의 귀환을 진심으로 반겼다(《난중일기》 1597년 8월 6일).
- 청성잡기에 따르면 충무공이 처음 호남 좌수사에 제수되었을 때 왜적이 침입한다는 경보가 다급했다. 왜적을 막는 것은 바다에 달려 있었으나 공은 바다를 방비하는 요해처를 알지 못했고 한다. 그래서 충무공은 날마다 포구의 남녀 백성들을 좌수영 뜰에 모아놓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짚신도 삼고 길쌈도 하는 등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면서 밤만 되면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였다고 한다. 충무공은 평복 차림으로 그들과 격의 없이 즐기면서 대화를 유도하였다. 포구의 백성들이 처음에는 매우 두려워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친숙해져 함께 웃으면서 농담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대화 내용은 모두 고기 잡고 조개 캐면서 지나다닌 곳에 관한 것들이었다. '어느 항구는 물이 소용돌이쳐서 들어가면 반드시 배가 뒤집힌다', '어느 여울은 암초가 숨어 있어 그쪽으로 가면 반드시 배가 부서진다.'라고 하면, 공이 일일이 기억했다가 다음 날 아침 몸소 나가 살폈으며 거리가 먼 곳은 휘하 장수를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급기야 왜군과 전투를 하게 되어서는 번번이 배를 끌고 후퇴하여 적들을 험지로 유인해 들였는데, 그때마다 왜선이 여지없이 부서져 힘들여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였다고 한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기록된 야사에 따르면 "이순신이 장인을 시켜 검이나 인두, 가위 등을 만들어 조정에 자주 바쳤다"고 한다.[206] 이순신은 청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조정에 뇌물을 바쳐 스스로의 안위를 보전하는 듯한 문구로 볼수도 있는데 이 행위는 당시 의심이 많던 조정에 물자를 바쳐 적대감을 줄여, 마음놓고 전투에 임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바친 내용물은 뇌물로 오해받기 쉬운 사치품이 아니라 무기와 도구 등 전투물자였고 이후에도 공무에 필요한 종이, 둔전 생산 곡식 등을 '''공공성이 강한 물품이 주된 대상'''이었다. 만성부족에 시달리던 조정은 이순신에게 더욱 바치도록 닦달했다.
11.3. 사람을 보는 눈과 다루는 법
이런 만큼 사람을 평가하는 안목도 대단히 엄격했다. 난중일기를 보면 원균을 비롯해 자신이 만나거나 문서를 통해 알게 된 사람에 대한 장단점을 매우 상세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엄격했다.
"The person most critical of Admiral Yi... was Admiral Yi."
'''이순신 장군에게 가장 비판적인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었어요.'''
Extra Credits. 한국의 성웅: 이순신 편 中
이순신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기록은 '''난중일기'''였다는 말도 있을 지경 한 마디로 이순신에게 가장 비판적인 사람은 다름아닌 이순신이었다는 말이다.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는 제가 처음 본 소감으로는 '자신의 일기가 아니라 변명록이다' 라고 했을 정도로 소상하고 객관적이며, 마치 누가 나중에 보고 검토할 것을 예측했던 듯 깔끔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난중일기는 원래 개인일기이므로 사료로서의 가치를 그냥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장군의 이 일기는 무서우리만큼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매사를 기록하여 빈틈이 없기에, 개인의 기록임에도 사료적인 가치를 인정받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을 다루는 재주도 상당해서, 명량 해전 이후 명나라 도독첨사였던 진린과 연합을 할 때도, 상대가 영의정인 류성룡이 최악의 연합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성질이 포악하고 조선인 때리기를 주저않는 그 진린이었는데도, 이순신하고 같이 여러 전투를 겪으면서 나으리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순신은 자신이 확보한 수급을 진린에게 양보해 공을 돌리기도 하고 명 수군의 행패를 이유로 병력 철수를 하려 해서 진린한테 명 수군의 기강을 잡을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는 등 완급 조절을 통해 진린을 잘 주물렀다. 이러한 점이 유명 수군 도독이 부여된 여러 정황 중 하나가 아닌가란 말도 있다. 그러나 명량대첩을 다루는 기록과 기타 여러 군데에서 보이는 이순신의 행적은 그가 상대방을 대할 때 지위의 고하를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서 예의를 해 왔다는 담백한 증거이다. 태생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란 생명체들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의 디딤돌이라 할 수 있는 사람 간의 예의를 무시한 결과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빈번히 보이는 인적 자원 관리 문제라는 씁쓸한 지적을, 400여 년 전의 성웅이 몸소 그 역량을 보여 방증한 셈이다.
11.4. 취미 생활
이순신의 취미라고 할 만한 것은 활쏘기와 음주, 독서였다. 특히 음주의 경우 술을 매우 좋아했는데 의외로 《난중일기》에서 자신에게 찾아오면 술을 먹여 보냈다거나, 밤새 같이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정말로 많이 나온다. 부하나 동료 아무개가 이순신과 같이 술 먹다 뻗어서 인사불성이 됐다는 기록도 많은 것을 보니 음주 스타일만큼은 두주불사에 엄청난 주당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조선시대판 인생게임이라 할 수 있는 승경도 놀이를 즐겼다. 《난중일기》를 보면 의외로 '''부하 장수들과 함께 승경도 놀이를 즐기는 기록'''도 제법 자주 나타난다. 현대로 치면 4성 장군이 휘하 참모들과 보드 게임을 즐겼다는 건데, 이순신이 마냥 무섭고 엄한 사람이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207] 또 전란 중이지만 추석이 되면 여러 장수들과 모여 술과 반찬을 같이 나눠먹기도 했다. 또 항왜 출신 부하들이 축제를 하게 해달라고 조르자 마지못해 허락하고는 광대로 분장한 항왜들의 놀음을 구경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 역시 이순신이 엄격해도 풀어줄 땐 풀어주는 융통성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일화.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당대의 무인답게 활쏘기를 즐겼다. 《난중일기》에는 대개 15발 중 10발 ~ 11발 정도 명중했다고 한다. 《퇴마록》의 저자 이우혁은 후속작 《왜란종결자》에서 이 기록을 근거로, 이순신 개인의 무예는 그렇게까지 뛰어나진 않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장수로서 모자라다 싶을 정도로 못쏜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그에 대해서는 이러한 근거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정리해보자면, "장수들이 모여서 대결을 해보면, 대충 40발 초반이 꼴찌를 기록했는데 이순신이 (특별히 잘 맞혀서) 기록해 놓은 것이 43발이었다." 잘 쐈다 못쐈다는 게 보통 10여 발까지 차이는 나지 않고, 당시의 평균 수명과 나이를 생각할 때, 엄청나게 못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고, 장수들 평균에서 조금 떨어지는 수준으로 보인다.[208] 한때 32살이라는 나이에 무과 시험에 합격을 했고, 합격 성적 역시 중간 성적으로 합격했기 때문에 무예 실력은 뛰어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우혁이 쓴 왜란종결자에서도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합격한 식년 무과는 별시가 아닌 4년에 1번 열리는 정시로 총 합격 인원은 29명인데, 이는 문관을 뽑는 과거 시험보다 합격자 수가 더 적다. 게다가 이순신 장군이 응시한 식년 무과의 합격자 평균 연령은 34세로 당시 32세였던 충무공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17명이며, 최연소 합격자는 23세, 최고령 합격자는 52세였다. 이를 볼 때 이순신 장군의 합격 나이는 결코 늦은 것이 아니며 합격 성적 역시 29명 가운데 병과 4등으로 12등을 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합격자 대부분이 현직 군관들 즉, 직업 군인들이었으며 이순신 장군과 같은 일반 보인 출신은 단 4명에 불과했다. 이미 정식 무과 시험에 현역 군인들과 같이 합격했다는 것 자체부터가 뛰어난 무예를 지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엄청난 명궁의 실력은 아니지만 장수로서 갖춰야 할 기본 실력으로는 충분한 수준이라는 뜻.
책읽는 것도 좋아했는데 특히 삼국지연의를 좋아하며 즐겨 읽었다. 이충무공전서에 따르면 대략 임진왜란 7년전쟁 막바지였던 무술년에 명나라 수군 도독인 진린이 조선 수군의 수영에 온뒤 이순신의 인품에 감화된 일화 중 하나가 전해진다. 어느 날 진린이 천문을 봐서 장군성이 흔들리니 이를 이순신 장군의 별이 흔들리는봐 다가올 전쟁에서 이순신 장군이 크게 다치거나 전사할 위험에 대한 조짐이니 이순신에게 제갈무후의 고사를 들며[209] 이순신에게도 기도를 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순신 장군은 본인의 능력과 업적은 무후만도 못할진데 어찌감히 무후처럼 기도를 올리겠냐며 정중히 사양하는 일화가 전해진다.[210] 2013년에 《난중일기》에서 《삼국지연의》를 인용한 부분이 발견되었다.## 또한 《청성잡기(靑城雜記)》에서는 "충무공에게는 세상을 피해 은거한 도우(道友, 도 닦는 벗)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몰랐지만 충무공만은 그를 알고 있어서, 큰 일이 있을 때면 매번 그와 상의하였다. 왜구가 침입하자 공은 사자를 통해 편지를 전하여 나랏일을 함께 도모하자고 부탁했다. 그는 늙은 부모가 있어 갈 수 없으니, 다만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공에게 보내면서, “이 책을 숙독하면 일을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은 여기에서 효험을 얻은 것이 많았다."라는 글귀가 발견되었다.
11.5. 남편으로서
이순신은 정실 부인 및 첩들에게도 충실한 남편이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부하나 친지의 여성 가족들이 와서 잤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난중일기를 잘못 읽은 사람들은 이를 보고 당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성관계를 했다는 내용은 당연히 아니고 이순신을 찾아 왔다가 그냥 하룻밤 머물고 갔다는 내용이다. 말 그대로 '숙박'을 의미한다. 실제로 단순히 숙박만을 뜻한다는 게 전문 연구가들의 견해이다. 그 외엔 특별한 날 부하들과 연회에 참석하거나 조정 인사들을 맞이하는 행사에 기생들이 동행했다거나, '여진'이라는 하녀와 성관계를 했다는 내용이 몇 번 나온다. 그런데 이것도 전문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명백한 오역이라고 한다. 그리고 만약 오역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가정해도, 신분제 사회인 당시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이 정도의 성생활은 자연스럽다.[211] 무엇보다 이순신이 여색으로 일을 망치거나 비난을 당했다는 기록은 전무하다. 선조와 원균이 이순신을 억지로 탄핵할 때도 여색과 관련된 부분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는 별개로 성웅도 여색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이 상당히 매력적인 소재로 작용하는지, 현대의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창작물 중에는 이런 식으로 이순신의 여자 관계를 창작해서 넣은 작품들이 제법 있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도 '여진'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212]
11.6. 학문 소양
이순신은 처음부터 관직을 순수 무인으로 시작했으므로 유학자, 문인으로서의 이미지는 사실상 전무하다. 물론 조선시대의 무관 또한 엄연히 유학을 배운 사대부로서의 교양을 갖춰야 했고, 이순신 역시 그러한 교양은 당연히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나 조선의 경우 무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신립, 이일 등 당대 이름을 날린 장수들 처럼 얼마나 용맹하게 나가 싸우냐가 좋은 무인 이라는 평가 기준이었다. 매일 일기를 쓰고 시를 남긴 이순신이 이시기 다른 무인들에 비하면 특이한 편이었다. 또한 이순신은 무관으로서 관직 생활을 하면서 전방의 야전 지휘관 자리를 전전했고, 특히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뒤에는 철저하게 전쟁 준비 및 수행에 임하였으므로 학문을 연구하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의 예술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다만 난중일기와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글 등을 통해 이순신의 학문 수준 및 문학의 소양을 짐작할 수는 있다. 굳이 이순신의 예술을 꼽자면 서예 유묵이나, 전쟁을 수행하는 자신의 처지와 감정을 표현한 시조가 몇몇 있다. 대표적으로 ''''한산도가(閑山島歌)''''가 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하는 그 시조다.
무인인 본인의 임무와 연관된 병법, 즉 군사학 부분에서도 이순신이 직접 이를 정리해서 집필한 서적은 없다. 다만 난중일기 및 기타 관련 기록에서 그가 어떤 사상을 바탕으로 작전을 구상하고 이를 시행했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나와 있으므로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위에서도 나온 것처럼, 이순신의 군사학 사상은 철저한 원칙주의에 입각한 정통파에 가깝다. 이부분은 내용이 방대하므로 이순신/평가 문서로.
12. 유명 어록
명량 해전 이전, 조정에서 '수군을 해산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라는 명령을 내리자 이를 반박하며 수군을 끝까지 지휘하겠다는 주장이다.自壬辰至于 五六年間 賊不敢直突於兩湖者 以舟師之拒其路也 '''今臣戰船 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今若全廢舟師 是賊所以爲幸而由 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戰船雖寡 '''微臣不死 則不敢侮我矣'''
임진년부터 5·6년 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은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적들이[213]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발언은 흔히 이순신이 직접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난중일기에서도 언급했듯이 병법, 정확히는 오자병법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무조건 죽을 각오로 옥쇄해라'라고 잘못 해석하기도 하나,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필사즉생행생즉사 문서로.招集諸將約束曰 '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又曰, 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謂矣。爾各諸將, 勿以生爲心, 小有違令, 卽當軍律。'再三嚴約。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강화 협상을 하며 전쟁이 소강 상태가 된 1594년, 명나라 칙사인 담종인이 '함부로 왜군과 교전하지 말고 자리를 지킬 것'이란 내용의 통보인 금토패문(禁討牌文)을 보내자, '답담도사금토패문'이라는 이를 반박하는 글을 올렸다. 현대에는 이 중 '저 왜적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라는 구절이 특히 유명하다. 2010년대 이후 한일관계가 크게 나빠지고 한국 내 반일감정이 더 강해지면서, 저 문구를 인용하는 사례가 크게 늘었다.日本之人, 變詐萬端, 自古未聞守信之義也。兇狡之徒, 尙不斂惡。
왜적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교활하고 흉악하여, 그 악랄함을 감추질 않습니다.
답담도사금토패문(答譚都司禁討牌文, 담종인에게 보내는 답장 중에서.-이충무공전서 1권 잡저中)
13. 인간 관계
13.1. 권율과의 관계
어렸을 때부터 친근하게 지낸 류성룡을 통해 권율과 처음 만났으며 이후에도 계속 서신을 주고 받으며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순신이 빌려준 함포는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격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후에 권율은 이순신이 참수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정탁, 이원익과 함께 이순신을 구해내고 자신의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이 내려지자 이순신을 자신의 군사참모로 두며 보호했다.
또한 권율의 사위 이항복 (후에 93대, 95대 영의정)은 최측근인 무관 안위#s-2를 보내 이순신을 돕게 했는데, 안위는 이순신의 오른팔 격의 인물이 되어 명량 해전에 큰 공을 세워 승리에 기여하고 이때의 공으로 전라우수사로 승진하여 이순신과 함께 한다.
하지만 난중일기를 보면 1594년 - 1595년 (선조 27년 - 28년)에는 공무 및 인원 차출 등의 여러 정황에 대해 충돌하여 잠시 권율에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재밌게도 1595년 8월 17일에 적은 일기(일미일기)를 보면 권율이 원균을 질책하자 원균이 고개도 들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우스워했다고 적혀 있다. 나중에 권율은 원균을 두들겨 팬다.[214][215]
행정 관계로는 조선군 내에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권율은 도원수였다. 삼도 수군 통제사는 오늘날의 해군 참모 총장에 상응하는 직위[216] 이고 도원수는 합동 참모 의장에 상응하는 직위이다.
권율의 행주대첩은 권율과 육군만의 힘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이순신 장군의 휘하 장수 (참모격) "정걸"이 육군의 군수물자를 수군으로 운송하고 배급했기에 가능했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권율도, 자신보다 지위가 아래인 이순신 장군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217]
13.2. 원균과의 관계
이순신은 원균을 '''"원흉"'''이라고 부를 만큼 극도로 싫어했다. 이는 난중일기에서 찾을 수 있는 원균에 대한 언급으로 확인할 수 있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와서 보았다. 그 음흉함을 이를 길이 없다.'''
《계사년 2월 23일》
'''경상우수사 원균이 왔다. 그 술주정이 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망령된 짓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계사년 5월 14일》
'''경상우수사 원균이 '웅천의 적이 감동포로 들어갈지도 모른다'면서 들어가서 치자는 공문을 보내왔다. 그 흉계가 참으로 가소롭다.'''
《계사년 6월 5일》
'''경상우수사 원균이 정걸 충청수사와 함께 도착하여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하는데, 원 수사가 하는 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도로 흉측한 속임수들이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일을 하고도 후환이 없을까?'''
《계사년 7월 21일》
이순신과 원균의 첫 번째 합동 작전이었던 옥포 해전때, 전공과 관련된 행동과 장계 문제로 갈등을 빚기 시작하다가 결국 전란 2년째인 1593년부터 난중일기에 그에 대한 악평이 나오기 시작한다. 허위 공문을 올리거나, 적의 수급을 탐내며 전투 중에도 아군의 피해는 아랑곳하지 않거나, 함대 요청을 했음에도 이순신을 은근히 무시하며 늦게 오거나 한두 척만 가지고 참여하는 등등... 별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이순신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경상우수사 원균이 와서 영등으로 출정을 나가자고 독촉하는 데 음흉하기 짝이 없다. 자기가 거느린 배 25척은 모두 보내고 오직 7, 8척만 가지고 와서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을 쓰고 일하는 것이 모두 이런 식이다.'''
《계사년 8월 30일》
이렇게 이순신과의 갈등이 지속되자 조정에서는 1595년에 원균을 형식상으로 승진시켜 충청 병사에 임명한다.[218][219] 이 틈을 이용하여 이순신과 정면 대결을 꺼린 일본은 계략을 사용한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전략적 정보유출 작전에 속은 선조는 이순신에게 부산진을 공격하라 명령한다. 이순신은 무리한 명령을 거부하여 명령 불복종으로 백의종군에 처해진다. 그리고 이후 원균이 이끈 정예 조선수군은 칠천량에서 깡그리 전멸한다.
13.3. 류성룡과의 관계
명재상 류성룡과 이순신의 관계는 유명한 사실이다. 어린 시절 한양에서 친분을 다진 이후 평생의 절친이자 서로의 조력자가 된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일개 무명의 무관이었던 이순신을 선조에게 적극적으로 천거한 인물이 류성룡이었다.[220]
둘은 각자의 저작인 《난중일기》와 《징비록》에서도 서로에 관해 자주 언급한다. 《난중일기》에서 류성룡과 서신 교환을 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이순신의 꿈에서까지 류성룡이 자주 나타나는 사실을 보면 각별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성격이 대쪽같아 일기에서 지적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다. 권율마저도 지적한 이순신이 지적되지 않은 두 인물이 선조와 류성룡이었으니 말 다했다.[221]
한 번은 충무공에게 류성룡이 사망했다는 오보가 전해진 일이 있다. 이때 이순신은 "이건 잘못된 소문이다. 그럴 리가 없다… 근데 만약 류 정승이 돌아가셨다면 어떡하지? 점을 쳐볼까?"로 요약할 수 있다. 실제로 이날 이순신은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급기야 점까지 쳐보며 류성룡의 안위를 걱정한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에게 《증손전수방략》이라는 병법서를 보내주었다. 그 책을 읽고 나서 이순신이 책을 높이 평가하는 장면도 있다.
하지만 류성룡은 선조가 이순신에게 대노하였을 때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류성룡이 적극적으로 이순신을 변호할 경우, 이순신과 친밀한 류성룡이 나설 경우 상황히 악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적으로는 친구이나 공적으로는 재상이기에, 자칫 선조의 오해를 사서 두 사람 모두 숙청될 수 있었다.
13.4. 선조와의 관계
이순신은 선조의 신하로서 그에게 충성했다. 1591년 류성룡은 이순신을 천거하였다. 파격적인 내용에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선조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임명한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1년 전이었다.
선조는 평화시기에 큰 실책을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되는 군주였다. 다만 그의 전란 대처능력은 그의 평가를 반박하기도 힘들게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선조가 임명한 장수들은 연이어 일본군에 패퇴한다. 급기야 조선 건국이래 최초로 수도를 함락당한다. 종묘사직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유교국가에서 이러한 행동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선조가 계속해서 개성, 평양, 의주로 피난하는 모습에 민심은 요동쳤다.
선조의 평가가 나락으로 떨어질 때, 이순신은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는 조선에게 희망이었지만, 선조의 권력에는 크나큰 위기였다. 선조는 이순신을 크게 의식하였고, 이는 이순신을 끌어내리는 원인이 된다.
선조에게 있어 이순신은 전쟁종결에 반드시 필요한 신하이지만 그만큼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13.5. 이광과의 관계
생전에 그를 어머니 다음으로 아낀 사람은 같은 덕수이씨 가문의 사람이자 먼 친척 형인 이광이었다. 이광은 가문에서도 촉망받는 인재였던 친척동생이 파직을 당하자 안타까워 했고[222] 마침 자신이 전라도 군대의 총사령관인 전라감사에 있었기 때문에 친척동생인 충무공을 종사관으로 삼거나 조방장으로 삼는 등 자신의 곁에 두었다.
그 후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해오자 매우 반가워했고 웬만하면 충무공이 부탁하는 것은 자신의 재량을 이용해 모조리 들어줬다. 그리고 선조가 충무공을 의심하자 선조에게 좌수사는 절대로 그럴 인물이 아니라며 열심히 친척동생의 변호를 해주었다.
14. 평가
후대의 평가와 각국의 평가를 모아놓은 문서. 일본 웹에서의 왜곡도 포함되어 있다.
15. 그 밖의 이야깃거리
- 동시기 같은 덕수 이씨 인물로 율곡 이이와 이광이 있었다. 이들의 존재로 이순신이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루머를 반박할 수 있다. 이순신의 덕수 이씨 가문이 정말로 역적의 가문이었다면 (이들과의 관계를 논외로 하더라도) 같은 가문인 이이와 이광도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논리가 된다.[223] 그야말로 이순신에 대한 쓸데없는 루머가 이순신 본인은 물론이고 여러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치는 셈이다.
- 이순신의 필체가 담긴 친필 편지 원본이 발견되었다.관련 기사
- 이순신에 대한 기록이 남은 문헌은 《난중일기(亂中日記)》,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 《난중잡록(亂中雜錄)》, 《충무공행록(忠武公行錄)》, 《통제사이충무공유사(統制使李忠武公遺事)》, 《충무공행장(忠武公行狀)》, 《충무공시장(忠武公諡狀)》,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등을 비롯한 수많은 문헌이 있다.
- 2009년 《난중일기》와 당시 사료를 바탕으로 철저한 고증을 거쳐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평소 식단이 재현되었다. 한국어 위키백과 이순신 밥상 문서재현된 밥상 사진 국내기사
- [조선정벌기]에서는 이통제라는 인물로 등장하는듯하나 명나라 장군을 구하려다 고니시에게 전사하는 별볼일없는 역할로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이순신이 각인되기 시작했을때는 징비록이 일본에게 전해졌을때이다.
- 광화문 광장이 생기기 전에는 도로 한가운데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어서, 전역한 해병대원들이 밤에 술먹고 전역신고를 한다고 동상 앞에 가는 일이 잦았다. 당연히 항상 상주하는 경찰들이 잡으러 가는데, 해병대를 갓 전역한 병사들이라 경찰들보다 신체능력이 우월해서 이순신장군 동상을 빙글빙글 돌면서 경찰한테 도망다니며 전역신고 다 외치고 호로록 도주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 한국 인터넷을 중심으로 "일본 측 군사 기록에는 구루시마 미치후사[231] 가 이순신 장군이 입에서 뿜은 번개를 맞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라는 루머가 알게 모르게 퍼져있다. 이른 바 이순신 번숨설. 그러나 이것은 디시인사이드의 유머성 글이 시초로, 실제로는 일본측 기록에도, 조선군 기록에도 "이순신 장군이 입에서 번개를 뿜었다"와 같은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임진왜란 당시의 군사 기록은 군사 부대의 수를 늘리거나 줄이는 등의 과장은 있었어도 "입에서 나온 번개를 맞고 죽었다"와 같은 낭설을 기록할 만큼 허술하지는 않았다.
-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됐을 때 일화가 있는데, 원균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금부도사의 체포를 받아들였을 때 군사들이 달려나와 울면서 앞길을 막자 이순신은 "나는 죄가 없기에 가서 조사를 받고 증명하면 풀려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전하의 명을 어기고 금부도사의 일을 방해하고 있어 그 죄가 매우 크니 어서 비켜라."라고 그들을 꾸짖었다. 겨우 군사들을 지나치자 이번에는 백성들이 몰려나와 이순신을 부르짖고 금부도사 일행을 비난하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는데 금부도사 일행이 겁에 질려 갈팡질팡할 정도였다. 이순신은 금부도사에게 잠시만 자신을 풀어 달라 하여 함거에서 나와 백성들을 주목시켰고, 잠시 한양에 갔다가 곧 돌아올 테니 걱정 말고 기다리라고 차분하게 타일렀고 그제서야 백성들은 통곡하면서 길을 열어 주었다고 한다.
15.1. 이순신 장검(長劍)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이순신이 사용한 또다른 칼이라는 쌍룡검의 행방은 며느리도 모른다고 하며, 근 100년이 되었다. 그저 일제강점기 시절 어느 일본인이 가져갔다는 추정만 할뿐. 이 쌍룡검이 실제로는 이순신의 검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로.
현충사에 소장된 이순신의 장검을 실전에서 사용한 검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데, 조선은 화약 병기나 원거리 병기에는 많은 투자가 이뤄진 반면,(세종, 문종 문서로.) 검 문화가 덜 발달한 국가다. 조선의 병과상 검을 사용하는 병과는 팽배수, 도수(조선 전기)나 등패수(조선 후기), 조총병(조총 + 쌍수도 / 장도 또는 요도)로 한정되어 있었고,[234] 전반적으로 보병은 창으로 상대를 막으려 했지만 이게 제대로 안되어서 무너졌고 기병에서도 가장 선호되는 무장은 마편곤(馬鞭棍) 같은 기병용 타격 병기였다. 검 자체에 대한 대우나 일반적인 인식도 《무예도보통지》에서 나오듯이 썩 좋지 않다. 조선의 검 문화에 대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인데, 성호사설에서 이익은, "우리나라 병사들은 일본도를 얻으면 경사면을 갈아내는데, 이 경사면이 있어야 칼의 날이 손상당해도 쉽게 갈아서 쓸 수 있지만, 그걸 모르고 칼날의 경사면을 갈아내 버린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외에도 조선 초기 《문종실록》에서도, 병사들이 임의로 칼날을 분질러 길이를 줄이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검신을 아예 없애버리는 상황도 벌어져, 문종이 도검의 길이를 법적으로 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또한 이순신 본인부터가 검에 대한 인식이 마뜩찮다. 일반적으로 왜검을 손에 넣으면 소유하거나 진상하는데, 이순신은 죄다 녹여서 물자로 전환시켰다. 이순신 본인은 검법이 맞지 않다고 했으나, 황진이 통신사를 수행하고 오면서 왜검을 사왔던 점, 조선이든 명이든 쌍수도를 적극 장려하려고 한 적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어디까지나 '''핑계'''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또한 승산이 충분함에도 근접전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패주하는 일이 많았던, 다시 말해 근접전 자체가 익숙지 않았던 조선군의 현황 속에서 일본도는 가지고 있어봤자 제대로 써먹기 힘들었다. 다만 이순신의 함대 내에 항왜(降倭) 출신 병사가 존재했음이 확인되므로, 이들은 자신의 일본도를 가지고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1596년 1월 1일자 난중일기에 환도와 함께 왜검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일본도 양식의 검을 활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현충사에 전시된 검에 대해서도, 왕권을 상징하는 태아검(太阿劍)처럼 '''장식용 및 군기 확립을 위한 장식'''이라고 설명되어 있으므로 요주의.[235] 또한 《난중일기》에 이순신이 새로 검을 만든 것이 편하게 쓰였다는 말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 장검은 태구련 등 대장장이들이 자신들이 대장장이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만든 장식용 검으로, '''갑오년에 만든 물건이고, 이순신이 새로 만든 검은 그 뒤인 정유년 이후이다.'''
현충사 장검 날 옆면 홈 안에 칠해진 빨간 줄은 만들 때부터 있던 게 아니라, '''누군가가 공업용 페인트로 칠을 해놓은 것이다'''.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칠했는지는 밝혀진 게 없으며, 페인트칠이란 사실이 2014년 8월 하순에서야 밝혀지면서 문화재청에서 이 페인트칠을 벗기기로 결정했다. 현재는 벗겨진 상태라고 한다.
15.2. 대중문화에서
15.3. 화폐 인물
[image]
이승만 정권이 퇴출되자 500원권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100원이 지폐이던 시절에는 500원권 지폐의 인물로, 100원이 동전이 된 현재에는 100원 동전에 그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다.
[image]
100원 동전에도 삽입되어 있는데 구 100원 동전에 있는 이순신 장군은 구 500원권에 삽입된 이순신과 오묘하게 거의 비슷하다.
15.4. 이순신체
충무공의 사당인 현충사가 있는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만들어 배포한 서체. 난중일기의 서체를 분석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서체의 유래가 유래라 그런지 무엇을 쓰든 비장함이 넘쳐흐르는 서체로, 현대적인 개념을 접목시켜 트위터 등지에서 많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공개 당시의 관련 기사 다운로드 사이트
종류로는 이순신체와 이순신 돋움체가 있으며 이순신체는 이순신Bold, 이순신Regular이 있고, 이순신 돋움체는 Bold, 이순신 돋움체Medium, 이순신 돋움체Light가 있다.
한컴 오피스 한글에서 이순신Bold가 '댛' 글자가 보이지 않는 오류가 있는데, 완성형 한글 2,350자 내에 들어가지 않는 문자이므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모바일 게임 제5인격의 한글판 공식 글씨체가 이순신Bold이다.
다키스트 던전의 공식 한글 번역 역시 이순신체로 되었다고 한다. 다만 Bold인지 Regular인지 판별은 힘든 것 같다.
15.5. 이순신 관련 문화재 소실
2015년 8월에 이순신과 관련된 고서 중 하나가 문제가 되고 있는데, 해당 고서가 소실된 장계별책인지 다른 책인지 논란이 되고 있다.#
장계별책을 도둑질한 범인과 같은 교회에 다니는 지인인 덕수 이씨 15대 종부[236] 인 최순선은 이미 2009년에 사기 혐의로 구속된 경력이 있고, 같은 해에 사채업자 전씨에게 현충사 소장 유물을 팔아넘기려다 '''사채업자가 거부해버리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벌인 전력도 있는 데다[237] , 양자와 유산 문제로 법정 다툼을 벌이는 등[238] 여러모로 유명하다. 그 외에도 한때 충무공 고택 터가 경매에 나가기도 했지만 다행히 후손들이 되찾았다.[239]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종부 최순선이 '''충무공의 유물과 종가 재산을 담보로 사업을 벌였기 때문이다.'''
16. 관련 단체
- 충무공이순신기념사업회
- 한국서화교육협회 성웅이순신연구회
- 여수지구이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
- 순천지구이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
17. 관련 문서
- 기타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