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전투

 



'''청산리 전투'''
靑山里戰鬪
한국독립운동의 일부
[image]
'''날짜'''
1920년 10월 21일 ~ 10월 26일
'''장소'''
중화민국 지린성 허룽현 칭샨리(청산리) 일대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image] 한국 독립군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군
[image] 일본 제국
'''지휘관'''
서일
김좌진
김규식
나중소
이범석
홍범도
안무
허근
강창대
방위룡
김연군
가노 노보테루
토모타케 타카시마
마사히코 아즈마
나오키 이소바야
시마즈조 기무라
'''병력'''
보병 약 1200~3000여 명
5000여 명
'''피해 규모'''
전사 60명
부상 90명

한국 측 주장
1000여 명
일본 측 주장
전사 11명, 부상 24명
(전투 결과 문단 참조)
'''결과'''
일본군의 독립군 토벌 목표 달성 실패
독립군의 러시아 방면 이동
1. 개요
2. 배경
3. 전투
4. 평가
4.1. 일본 측의 주장
4.2. 한국 측의 주장
5. 한일 인터넷상에서의 논쟁과 시선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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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만주 간도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 군정서군,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 독립군 등이 연합하여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완루구 등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구 일본군과 교전한 일련의 전투를 말하며 전과 규모에 대해 이런저런 의문점이 많은 전투다.[1]
일명 '청산리 대첩'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20세기까지는 거의 대첩으로만 불렀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21세기 들어서 내외의 논란과 함께 그냥 청산리 전투라고 부르는 빈도수가 늘고 있다. 2021년 기준으로는 구글 검색 결과 수에서 청산리 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검색수가 비슷하다.

2. 배경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만주에서의 독립 투쟁은 더욱 활발해졌고 이에 일제의 대만주 독립운동 탄압도 점차 강경해져 갔다. 이 과정에서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과 교전한 일제는 10월에 훈춘 사건을 일으켜 이것을 병력 진입 구실로 삼고서 만주에 사는 조선인들을 무차별로 학살했다.
한편 러시아 내전시베리아 전역에 개입하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는 1차 세계대전이 종전하고 조국 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자 귀국을 서두르고 있었다. 1920년 2월,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한 이들 군단은 소련 적군과의 휴전 협정이 성립된 이후 쓸모가 없어진 무기를 처분하고자 했고, 마침 독립군은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의 일부 병사들이 자신들이 보관하던 무기를 북로 군정서에 판매하였다.[2] 지원 무기 거래는 깊은 숲에서 한밤중에 이뤄졌고 동년 7월 독립군은 체코슬로바키아군에게서 매입한 무기인 권총, 기관총, 탄약 200정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도로 수송했다. 이때 획득한 총 중에는 모신나강 소총, 게베어 1871 등의 유럽제 총들이 다수였다.
1920년 8월 하순, 왕칭현 서대파에 주둔하던 북로 군정서의 주력 부대는 훈춘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얻은 정보로써 일본군 제14사단과, 제13사단의 일부가 장고봉을 거쳐 남하하고 나남의 제21사단이 도문강을 건너 북상하며 만철의 수비대가 송화강을 건너 서진해 북로 군정서군을 3면에서 토벌하려는 작전이 진행 중임을 알게 되었다. 마침 독립군 탓에 대일 관계에 난처한 처지에 있던 중국 당국의 권고도 있었으므로, 북로 군정서는 일단 안도현으로 이동해 서로 군정서와 합류한 다음 백두산 지역에 기지를 새로이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월 17일 이동을 시작했다. 대한 독립군도 봉천성의 경계 지역인 화룡현의 이도구, 삼도구 방면으로 이동했다.
연길현을 거쳐 화룡현 서부 지역으로 이동한 북로 군정서 부대는 10월 10일경 안도현 경계 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하고서 부근에 있는 이도구로 이동해 있던 홍범도 부대와 일본군의 간도 출병 대책을 협의했다. 10월 19일의 회의서는 주전론과 피전론이 맞섰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피전론이 채택되었는데, 이 때는 이미 일본군이 부근까지 다가온 상황이었다. 김좌진 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전투를 자제하였으나 결국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3. 전투


교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굶주림! 그러나 이를 의식할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었다. 마을 아낙네들이 치마폭에 밥을 싸 가지고 빗발치는 총알 사이로 산에 올라와 한 덩어리 두 덩이 동지들 입에 넣어 주었다.

―이범석, “우등불”

10월 21일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1제대와 전투요원으로 편성된 제2제대는 각각 김좌진이범석의 지휘하에 청산리 백운평 바로 위쪽의 고개마루와 계곡 양쪽에 매복, 전투준비에 돌입하였다. 청산리 계곡은 동서로 약 25km에 달하는 긴 계곡으로서, 계곡의 좌우는 인마의 통행이 곤란할 정도로 울창한 삼림지대였다. 오전 9시경 야스가와가 이끄는 추격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매복 중이던 이범석 부대와 교전을 벌였다. 뒤이어 야마다가 지휘하는 본대가 그곳에 도착하여 이들과 독립군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명령을 내려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으로 철수를 지시했다.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일본군에 큰 피해를 줬다고 기록했다.
김좌진 부대가 철수하던 시각에 그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이도구 완루구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때 독립군과 일본군의 군복 색깔이 거의 비슷하여 일본군이 자기들끼리 서로를 오인 사격하는 상황이 벌어져 독립군이 전과를 올렸다고 기록했다.
한편, 22일 새벽 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 부대의 제1·2지대는 그곳 주민들로부터 부근의 천수동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곧 그곳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기병 연대와 교전을 벌였다. 곧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으리라 생각한 김좌진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의 고지로 이동시켜, 오전 9시부터 포위 공격해 오는 일본군을 막아내었다. 이때 부근에 있던 홍범도 부대도 포위되어 있던 김좌진 부대를 도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날이 저물자 김좌진과 홍범도의 부대는 어랑촌 부근 고지에서 철수했다.
다음 날 23일부터 이들은 추적하는 일본군 수색대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면서 고동하(古洞河)를 따라 상류로 이동하였다. 독립군의 행방을 추적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계 곡의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하여 급습했으며 이로 인해 난전이 벌어졌다. 독립군은 반격을 가해 이 습격을 저지했다고 기록했으며, 이후 새벽 무렵 방어 태세에 들어간 일본군을 피해 안도현 지역으로 부대를 옮겼다.
이후 독립군은 일본군의 포위망이 좁아져 오자 동북쪽의 밀산으로 대거 후퇴하였고, 소련의 제안에 따라 적백내전에 참여했다가 독립군 내 분열 문제가 불거지기까지 하는 등 악재 속에서 투쟁 역량을 상실해갔다. 이후 만주사변으로 중국군과 함께 대일전에 참여한 1930년대 이후에도 외국군에 크게 의존하면서 전투를 벌이는 상황이었다. 청산리 전투가 한국인 독립군이 단독으로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인 마지막 전투인 셈이다.

4. 평가


해방 이후 교육 현장과 역사학계에서는 이 전투를 독립군이 압도적인 교환비로 일본군을 물리쳤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대첩'''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오랜 시간 동안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 투쟁의 아이콘으로 기능해 왔다. 1990년대 이전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청산리 전투보다는 대첩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했을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한일 양국 네티즌 간의 정보 공유가 활발해지고 여러 사료를 통한 교차검증이 행해지면서 대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결론들이 도출되었으며 이는 심한 논쟁과 논란거리를 낳고 있다. 워낙에 민감한 주제이다 보니 공론화가 되지는 않았지만 최근 이 사건을 가리키는 용어로 '대첩'이 쓰이는 빈도는 확실히 줄어들었으므로 암묵적으로 한국 역사학계도 이 사건의 사실 관계가 대첩과는 달랐음을 시인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독립군 측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를 근거로 하여 1000여 명을 사살한 대전과를 올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이 정도의 성과를 올렸는지에 대한 여부는 불분명하다. 한국과 일본에서 제시하는 자료를 교차시키면 내용 자체가 상이한 부분이 다수이며 부정확한 요소가 많아 독립군의 전과가 과장됐다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
어쨌든 독립군이 추격하는 일본군과 교전을 벌여서 발목을 잡은다음 이들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계속 이동하는 형태로 전투를 수행했고, 그 과정에서 대단한 전과를 거두기보다는 일본군을 상대로 교전의 의의와 약간의 전술적 성과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교전 이론으로 볼 때도 5,000명이 특정 지점에 투입될 정도면 전체 병력은 그 몇 배는 되어야 하는 것이고, 보통의 경우 10% 손실이 나면 보충병을 채우고 버티던지 아니면 퇴각한 다음 재편성하는 것이 정상이다. 물론 카미카제 같은 전법을 쓰는 놈들이긴 하지만, 그건 전쟁 막바지에 할 수 없이 쓴 전법이지 당시로는 굳이 선택할 이유가 없는 전법이다. 특히, 32% 손실이면 보충병 없이는 전멸이 맞는다. 즉, 차라리 3,300명 설이 더 설득력 있다는 얘긴데,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어느 정신나간 지휘관이 이겨봐야 별 득도 없는 전투에 그런 손실을 감당한단 말인가.
최초로 전과 부분에 대한 묘사가 나온 것은 박은식이 쓴 독립 운동의 사기 진작을 위한 일종의 역사서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이다. 여기서 가노 연대장 이하 1600명을 사살했다고 했지만 박은식 역시 목격담을 듣고 쓴 것이기 때문에 명확한 근거는 없었다. 해방 후 이범석이 쓴 자서전에는 3300명까지 피해는 늘어갔다. 허나 1000명~3300명의 사망자를 냈다는 것도 명확한 근거가 역시 부족하다.
심지어 1000명 ~ 3000명 설에 대해서는 일본 외에서도 반론이 제기되는데, 박창욱 연변대 교수의 반론을 들어보도록 하자.[3]

「야스가와 소좌가 인솔하는 1개 중대 병력을 선두부대로 추격하여 백운평에서 약 1천미터 남짓 되는 지점에서 김좌진 부대와 접전하게 되었다.

……전투는 야스가와가 인솔하는 1개 중대와 적을 견제하기 위한 북로 군정서 후속 부대 사이에 오전 9시 반경부터 시작되었다. 북로 군정서 부대는 우세한 지세를 차지하여 적을 급습한 결과 비록 약 30분 동안의 전투였으나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적들의 정보 자료에 의하면, 그날(21일) 전투 후 야마다지대는 오후 2시 반 가량까지 북로 군정서 부대를 추격하여 노령까지 갔으나 산림을 이용하여 이동한 북로 군정서 부대를 잃어버리고 철군하였다고 한다. 이를 역사상 '백운평 전투'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 서술에서 이 21일의 백운평 전투를 대서 특서하여 수다한 적을 섬멸하였고, 이에 덧붙여 적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맞불질하여 막대한 손신을 입었다고까지 하였다.

21일 전투의 전 과정을 보면 실제 전투 시간은 불과 한 시간도 못 되며 적들의 추격·수색 시간까지 합하여 약 4시간 정도이다. 그런즉 이런 짧은 시간에, 그것도 약소한 후속 부대가 그렇게 수다한 적을 섬멸할 수 있었겠는가? 적들의 손실도 야스가와 소좌가 인솔한 선두 부대에 불과하다. 가령 야스가와가 인솔한 1개 중대가 전멸되었다고 하여도 그 수는 백여 명 남짓일 것이다. 특히 적들 상호간에 맞불질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당시의 적 병력배치를 놓고 봐도 근거가 없는 과장이다.」

(중략)

「전투에서 북로 군정서군의 교성대를 직접 인솔하여 전투에 참가한 이범석 씨는, 대한민국의 국무 총리를 담당한 국가 수뇌의 신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좌진의 공로를 과대 평가하고 홍범도와 그 연합 부대의 공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도리어 홍범도군은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고까지 역사를 왜곡하였다. 청산리 전투의 전과도 지난날의 독립 신문 보도에는 가노 기병 대좌 이하 950여 명으로 기재되던 것이, 그에 의하여 1,200명, 그 후에는 3,000명으로까지 엄청나게 과대되었다.

청산리 전투의 현장이 백운평이나 야지골, 완루구나 고동하 현장에 가본 이들은 그러한 큰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백운평에서 노령으로 가는 삼림 도로가 잘 수축되어 자동차가 왕래하고 있으나, 전투 당시에는 청산리 송월평으로부터 냇물을 따라 진동나무 삼림 속으로 오솔길이 있었을 뿐이다. 당시 일본군들도 자기들의 작전 지도에 "청산리 서쪽부터는(죽평양촌) 야포도 통과할 수 없고 보병도 일렬 종대로 통과"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즉 약소한 병력으로서 1000명 ~ 3000명의 일본군을 섬멸하였다면, 그 많은 일본군이 원시림과 습개지로 이루어진 협소한 계곡을 일렬 종대로 들어가는 데는 대단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또 그 많은 군대는 좁은 골 안에서 미처 산개할 여지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실제 병력을 고찰하면 백운평 전투에 참가한 야마다 지대는 보병 5개 중대, 기병 1개 소대 그리고 기관총대와 보병 포대였는데, 이들은 22일 노령 방면으로 추격하느라 어랑촌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22일 완루구 전투에는 아즈마 지대 1개 대대와 기관총 소대 2, 보병 포대 그리고 천보산에서부터 우회하여 남양촌에서 숙영하고 서쪽으로부터 진공한 이이노 2개 중대였다. 기병 27연대의 2개 중대는 처음 아즈마 지대와 함께 홍범도 부대를 포위하기 위하여 송평령, 차창자로 우회하여 21일 어랑촌에서 숙박하였다. 22일에는 아침부터 아즈마 지대 예비대(2개 중대)와 함께 어랑촌 전투에 참가하여 김좌진 부대와 싸웠고, 오후 2시 반부터는 아즈마 지대와 이이노 부대도 어랑촌에서 홍범도 부대와 싸웠다.

이렇게 보면 21일 백운평 전투에 투입한 적의 총병력은 650명을 초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싸운 것은 야스가와가 인솔한 1개 중대이다. 22일 어랑촌 야지골에서 아침부터 김좌진 부대와 싸운 일본군은 기병 27연대의 2개 중대와 예비대(2개 중대)이고, 오후에는 홍범도 부대도 이 전투에 참가하다보니 아즈마 지대 1개 대대와 이이노 2개 중대 합계 850여 명으로 계산된다. 그런즉 백운평 전투에서 일본군을 전멸시켰다고 하여도 600여 명밖에 안될 것이고, 만약 야스가와 소좌의 선발대를 전멸시켰다면 100여 명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사실 전멸시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22일 어랑촌 전투에서 김좌진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을 전부 섬멸하였다고 하여도 800여 명일 것이요. 청산리 전투 전체에 동원된 일본 병력은 후(24일 이후)에 2개 대대가 증가되었으니 2,500명을 초과하지 않았을 것인데 어떻게 1,200명 ~ 3,000명을 섬멸였다는 것일까.

상술한 전고에 대한 과장은 비록 당시 상해 독립 신문에서는 직접 현지 사찰을 못하고 원지에서의 투고에 따라, 그리고 당시 정세에서 민족의 반일 투지를 고무하고자 다소 과장한 것은 양해할 수 있다손치자, 그러나 광복 이후 당시 전투에 직접 참가하였던 분이 사실을 왜곡 과장하여 세상 사람들을 미혹시킨다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 박창욱 , 김좌진 장군의 신화를 깬다, 역사 비평, 1994년 2월, 182 - 183, 186 - 187

이게 '''1994년에 나온 글임을 감안하면 학계와 민족주의 사관으로 쓰인 교과서의 괴리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물론 그 기저에는 독립군에 대한 국내 여론의 지나친 신격화가 있다.

4.1. 일본 측의 주장


  • 일본군이 정말로 수천 명 규모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다면, 일본군은 마땅히 그 피해를 보충받았어야 하는데, 수천 명이나 되는 보충인원이 일본에서 만주까지 이동하는데도 행정 문서 등의 기록이 남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 측 기록을 믿기 어렵게 만든다. 또한 한국 측의 주장대로 일본군이 졸전을 펼쳐 폭도(일본 제국의 입장에서)들을 섬멸시키지도 못하고 대량의 사상자만 낸 전투였다면 당연히 사단장을 보직 해임시키는 등의 인사 조치가 취해지는 것이 정상 아니겠는가?
  • 그리고 유일하게 실명이 거론되는 '연대장 가납'과 이름이 비슷한 사람은 가노 노보테루 연대장인데, 간도 출병사에 따르면 가노 연대장이 지휘한 제27기병 연대는 퇴로 차단을 위한 기동에 나섰으나 습지가 너무 많아 퇴로 차단은 실행하지도 못하고 어랑촌에 포진한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가노 연대장이 설령 전사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익히 아는 '계곡 속에 들어온 일본군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전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한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가노 노보테루는 1922년까지 군 생활을 계속한 것으로 나온다. 가노 연대장은 제3자인 중국 측 기록에도 살아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전투이후인 11월 13일 중국 지방 군경들이 조사한 보고서에도 전투 이후 살아있다고 나온다. 295페이지 PDF 다운 받아서 볼 것
  • 또한 한국 측 주장에서 1:4의 압도적인 숫적 열세 속에서도 전상자 교환비가 1:4라는 전과가 과장이 아니냐고 하지만, 군대라는 조직은 조직 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17명밖에 안 되는 금 제국 기병에게 송군 2000여명이 털린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오합지졸들이 숫자만 많다고 해서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 한국 역사만 살펴보더라도 1,500여 명의 일본군에게 5만 ~ 8만 명의 징집병들이 모랄빵 터지고 달아나기 바빴던 용인 전투가 있다. 당시 일본은 열강의 말석에나마 들 수 있었던 근대 국가로, 일본군은 그런 근대 국가에서 제대로 조련한 집단이었다. 훈련도나 체제, 기강, 무장 등 모든 면에서 열정은 높았지만 기강은 잡히지 않았던 독립군이 숫적, 지리적 우위를 점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교전 결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간도 참변에서 잔혹한 토벌 작전을 펼친 것이 패배의 분풀이로 해석하는 건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정답이라고 하기도 힘들다. 게릴라전을 확실히 끝내려면 게릴라군의 근거를 없애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민심을 정규군 쪽으로 되돌리든가, 근간이 되는 지역 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려야 한다. 따라서 일본군이 민심을 신경쓰지 않고 초토화 작전을 선택했다는 것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일본군이 초토화 작전을 실행했다는 사실만으로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이 좋지 못한 결과를 거두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 야스쿠니 신사의 기록에 부정확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은 일본의 행정력이 마비되다시피 했던 2차 대전 시기에 집중되어 있고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전간기 시기는 행정력이 유지가 되었기 때문에 실제와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본군이 대패를 감추기 위해 3000명을 11명으로 줄였다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지 못한 2989명의 유족들의 항의는 어떻게 감당할 건가? [4]
1979년과 1985년에 나온 일본의 군사 사학자 사사키 하루타카의 청산리 전투 연구 논문에 따르면 일본 제19사단 사령부의 보고서를 근거로 일본 측에서는 청산리 전투의 일본인 사상자를 전사 11명, 부상 24명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 수치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전사자 명부와 일치한다. 따라서 일본 측은 이 기록을 바탕으로 청산리 전투의 사상자를 파악하고 있다. 일본군의 조선군(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에서 편찬한 『간도출병사(間島出兵史)』도 피해가 미미했다고 적었다.[5]
청산리 전투의 전사자에 관한 일본 측 주장을 정리하면 첫째, 한국 측 자료의 추정치가 지나치게 들쭉날쭉하여 그대로 신뢰하기 어려우며, 둘째, 수천 명이나 되는 대규모 인명 피해가 있었는데도 군을 재편한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셋째, 유일하게 한국 측 사료에서 사망자로서 이름이 거론된 인물이 경우 청산리 전투 이후에도 활동한 것이 드러나고 넷째로 일본 19사단 사령부의 보고서를 근거로 파악한 사망자의 숫자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전사자 명부와 일치하며 다섯째, 야스쿠니 신사 명부에 오류가 있으면 유족들의 항의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청산리 전투의 일본군 피해는 전사 11명, 부상 24명으로 그리 크지 않다'''는 것.

4.2. 한국 측의 주장


그러나 일본 측의 주장 역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첫 번째 근거로 일본군이 자신들의 패배를 축소, 은폐한 사례들이 실존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6][7] 일본군의 일방적인 패배였을 가능성은 매우 낮으나, 적어도 일본군 입장에서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아 사실대로 서술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상존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 바로 일본 측 기록인 간도 출병사에서도 나타난다.
  • 첫 번째, 간도 출병사에 따르면 일본군은, 500명~600명 규모의 기관총을 보유한 무장 조직을 상대로 1개 기병 연대는 퇴로 차단을, 1개 보병 연대는 추격을 맡았으므로 확실한 병력의 우세를 점한 상태였으며, 실제로 600명 규모의 숙영지 흔적을 발견함으로써 첩보가 사실이라는 것까지 확인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후 본격적인 추격에 나선 것은 고작 1개 보병 중대[8]였고, 이들은 30분 이상 단독으로 교전한 후에야 연대 주력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본대와 멀리 떨어진 상태였다. 600명 규모의 무장 조직을 상대로 4:1 이하의 열세에 처한 상태로 교전을 벌였는데, 오히려 1대 4의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이며 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개 중대가 고립된 상태에서 지리적으로도 열세에 놓이고 수적으로 4배 이상 많은 적에게 기습을 받아 핀치에 몰려 있었으나 용전분투하여 오히려 4대 1의 유리한 교환비로 교전을 마무리했다는 것인데, 정규군과 게릴라의 질적 차이를 감안해도 과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반론으로 제기한 예시들은 모두 정규군이 기습의 묘를 살려 들이치거나, 높은 훈련도나 병종의 이점을 살려 자유롭게 기동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거꾸로 정규군 쪽인 일본군이 기습당하고, 병종의 이점도 없었으며, 높은 훈련도를 살려 빠르게 기동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것이 똑같이 일어날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예시로 든 전투들과 같은 전쟁인 왜란과 호란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투에서, 비정규군인 의병들이 숫적 / 지리적 / 전술적으로 모두 우세한 상황에서도 항상 모랄빵을 터트리며 달아나기 바빴는가?
  • 두 번째, 일본이 간도 참변에서 유달리 잔학한 토벌 작전을 펼친 것 또한 패배의 간접적인 증거로 볼 수 있다. 일본이 의병을 잡기 위해 애꿎은 민간인까지 희생시킨 것이야 남한 대토벌 작전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때는 '의병을 잡겠다'라는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민간인들의 희생을 신경쓰지 않은 것에 가까우며, 실제로 수많은 의병들이 체포 및 처형되면서 최소한 호남 지역에 있어 항일 운동의 기반을 흔든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간도 참변에서는 이미 독립군들이 중국군과의 사전 교섭을 통해 안전 지대로 피난한 이후였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고, 일본군은 독립군에 대한 수사가 아니라 화풀이성의 잔학한 학살만 일삼았다.
  • 세 번째, 일본 측은 야스쿠니 신사에 기록된 인원과 후생성 자료, 제19사단 사령부 보고서의 내용이 일치한다는 것을 근거로 드나, 애초에 앞의 두 자료는 2차 사료에 가깝다. 제19사단 사령부 보고서를 바탕으로 전몰자를 봉안한 것이 야스쿠니 신사고, 같은 보고서를 채택하여 연금 수혜자를 결정한 것이 후생성의 자료이다. 서로를 참고한 자료들이 같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신빙성이 늘어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가 모든 전몰자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전후에도 살아있던 사람이 야스쿠니 신사의 명부에 오른 경우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 야스쿠니 신사가 자체적인 조사단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럼 대체 무엇을 근거로 집계했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오류가 있는 것인가?
청산리 전투의 전사자에 관한 한국 측 주장을 정리하면 첫째, 현대로 올수록 한국 측 자료의 추정치 역시 납득 가능한 선에서 모이고 있고, 둘째, 이 정도의 인명 피해라면 재편성을 위한 인사 명령까지는 갈 필요가 없으며, 셋째, 일본 측 사료를 전적으로 따른다 하더라도 세부적인 기록에서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고, 넷째, 일본군의 다른 대 게릴라 작전과 비교했을 때도 간도 참변은 그 정도가 지나쳤으며, 다섯째, 후생성 자료와 야스쿠니 신사, 제19사단 사령부 보고서는 서로를 바탕으로 작정된 것이므로 상호 간의 일치가 신뢰성의 근거로 작용할 수 없고, 여섯째, 야스쿠니 신사의 전몰자 기록이 정확하지 않으니 일본 측이 주장하는 손실비가 사실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도표에서도 전술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전략적으로는 실패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2018년 9월자 기사에 따르면,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 위원은 계간지 '역사 비평' 최신호에 기고한 '보고에서 석고화한 기억으로 - 청산리 전역 보고의 정치학' 글에서 청산리 전투의 실체는 다분히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당시 독립군의 상황과 전장환경 속에서 특수한 환경임을 감안했을 시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청산리 전투의 실상과 의의와 달리 근본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전과 논쟁에 매몰된다면 본질이 변질할 수 있다라고 보론했다. '청산리 전투 기록, 과대 평가 가능성 고려해야'

5. 한일 인터넷상에서의 논쟁과 시선


당시 기사화된 한일 네티즌간의 논쟁 '#'
과거 인조이재팬 시절, 인조이재팬을 투기장으로 둔갑시킨 분기점이 청산리 전투에 관한 논란이다.
당시 일본의 네이버 총독부를 위시한 네티즌들은 일본 대본영의 대외비 문서를 근거로 한국 측이 주장하는 '대승'이 사실이 아니며 결과는 반대였다고 주장했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 대본영의 대외비 문서에 '일본군 3명 사상 독립군 60명 사살. 다수한 총포를 노획'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한국 측 주장대로 네 자리수 인원이 전사했는데도 모든 전사자를 안치하는 야스쿠니 신사의 기록이 없다.
  • 독립군이 사살했다는 당시 일본군 연대장 가노가 이후에도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 3000여 명이나 전사했는데도 병력 충원이 없었고 오히려 일본군 연대들이 증원도 받지 않고 추격을 지속했다.
  • 3000여 명이 사망한 특기할 만한 결과인데도 어느 곳에도 기록이 없다.
  • 청산리 전투 패잔병의 사진이라고 알려진 들것에 실려 나가는 일본군의 복식[9]이 1930년대 이후 것으로 해당 사진은 청산리 전투의 사진이 아니라 중일전쟁 시기에 찍힌 것이다.[10] 1997년에 작성된 청산리 대첩 문서에 그 사진이 있다.[11] 당시 이 사진은 한국의 전쟁 박물관에도 관련 자료로서 전시되고 있었고 한국측에서는 당연하게 여겼기에 해프닝으로 끝날 오해였지만 타격이 컸다.
거기에 편승해 기존 한국의 민족주의 사관에 반감을 품은 한국인들이 합세하였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논거로 청산리 전투 대승이 사실이 아니며 독립 전쟁의 사기를 고취하고자 당시 독립 운동가 등이 윤색 과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독립군의 전과가 신문이나 사료마다 중구난방이다.
  • 청산리 전투 관련 연구 사료에서 일본군 사상자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계속해서 감소하였다.
  • 한국 측의 전과가 과장됐다는 언급이 독립군의 자서전에서도 나온다.[12]
  • 독립군이 공세인 상황에서 후퇴했으며 일본군 활동이 전혀 위축되지 않고 되려 독립군 활동이 위축되었다.
3명밖에 죽지 않았는데 군사 2만 5000명을 간도로 끌고와서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청산리 전투와 간도 참변의 인과 관계 자체가 불명확하다는 반박을 받았다. 기존 역사 교과서나 민족주의 사관에서는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보복으로 일본군이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고 주장하지만, 간도 참변이 시작된 날짜는 청산리 전투(10월 21일 시작)의 이전인 10월 9일부터 약 27일간 지속되었으므로 모순이 발생한다. 또한 일본군이 적게 죽었으니 토벌군을 적게 투입하고, 많이 죽으면 많이 투입한다는 논리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도 의문이다. 테러범 몇을 수색하고 잡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인원이 동원되거나 유해 조수를 잡기 위해 전국적 규모의 구제 사업을 하는 등 투입 자원은 당국의 필요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피해자 수에 비례하는 건 아니다.
'''당시(2004년 ~ 2005년 경) 디시인사이드 역사갤러리의 네임드 유저였던 '고람거사'가 기존 사관으로 일본인과 맞섰다가 패퇴했으며, 같은 시기 서울대학교 교수 이태진이 인조이재팬에서 활동하다가 일본 넷우익한테 대패'''[13]하면서 인조이재팬의 한국인과 한국사 사이트의 분위기는 초토화되었다. 네이버 총독부의 활동이 더 활발해짐은 물론이요 국내의 일빠국까도 이에 물타기에 돌입했으나 '고람거사'는 기존의 네이버 총독부에서 자료로 들었던 일본 후생성의 문서가 날조된 자료라는 사실을 파악했다면서 이 점을 들어 반격에 나섰다. 네이버 총독부에서는 이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말 돌리기에 들어가 싸움은 한국 측 승리로 간주될 뻔했으나 익일 일본 측에서 후생성에 직접 전화해 문서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고람거사는 일본 측이 논거로 드는 후생성 사망자 명단보다 실제 사망자가 많다는 일본 측 자료를 보고 반격에 나선 것인데 실상은 고람거사가 '사상자'를 '사망자'로 혼동한 탓에 나온 오해였다. 이 부분은 당시 활동하던 역사 사이트 회원 일부의 기록으로만 전해질 뿐 인터넷 상에는 이전 패배만큼 주지하지 않았으나 해프닝에 가까운 이유로 어이없게 패배한 사례라서 역사 사이트에서 인조이재팬을 언급하면 이것을 금기로 다루거나 분노에 휩싸이곤 했다.
논쟁이 발생한 지 15년도 더 넘었지만 한국 역사학계는 일본인들이 제시한 대외비를 비롯한 실제 자료들과 지표에 대해 반박을 내놓지 못한 채 박은식의 주장이나 신문 기사만을 여전히 인용하고 있다(대표적으로 신용하 서울 대학교 교수). 그리고 이 사건은 몇몇 사람들에게 기존 국사 교과서의 내용에 회의적인 시선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되는 등 이 논쟁의 나비효과는 현재진행형이다. 이 논쟁의 전말과 논쟁을 통해 밝혀진 사실들이 솔직하게 공유되고 합리적으로 탐구되지 않는 한, 기존의 사관만을 가지고 일본 측 주장을 접했을 때 정반대로 주화입마하는 사람들은 계속 생겨날 것으로 우려된다.
한편 이 싸움은 한국사 포럼 및 사이트에 '''쇄신의 필요성'''을 환기하기도 했다. 이때 논쟁을 보면 '''한국 측엔 학술 논쟁을 하면서 논문을 인용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국내에는 민족주의 사관으로 쓰여진 교과서를 베이스로 한 막연한 사관밖에 없었다는 점, 엄격한 사료 비판을 이용한 논쟁을 한 경험도 없었기에, 사료를 기반으로 매사 명명백백히 검증해서 제3의 국가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토론에서는 연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또한 10대에서 20대가 절대 비중을 차지하던 이용자와 달리 일본 측은 30대에서 50대로 추정되는 인물까지 참여했다는 점도 반성할 점으로 꼽혀 고연령층에서도 인터넷을 활용한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비판이 대두됐다. 그러나 이후 역사 갤러리가 붕괴하고 역사 사이트는 분화하고 군소화하면서, 이런 논쟁의 장은 좁혀졌으면 좁혀졌지 넓어지지는 않아서 쇄신 분위기는 이어지지 못했다. 이후로 제대로 된 토론을 위해선 논문과 1차 사료들을 베이스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 게 성과라면 성과. 우리나라 역사를 탐구할 때 독립 운동 당시 사기 진작을 위한 일종의 선전과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한 민족 사관에 대해 반성할 필요가 있고, 또한 객관적 근거가 부족한 주장으로 민족적 자긍심을 억지로 키우기보다는 사실에 근거한 서술을 하되 열세의 전력과 상황에서도 일본군과 교전한 독립군의 의의를 평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14]
물론 그것과 별개로 전투 결과가 일본 측 기록과 같다고 해도, 전투에서 소기의 전략적 목적을 이룬 쪽은 독립군 측에 가깝다. 일본군의 목적과는 다르게 독립군은 조직을 온존하여 이동하는데 성공하였고 포로도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추격전의 목적 달성에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봐도 된다.[15] 일본군 전사자가 적다고 해도 저 전투 결과는 상부에서 문책을 하면 했지 칭찬을 받을 결과가 절대 아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봉오동이나 청산리 전투 이후에 일본군의 간도 학살이 더 심해진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2017년 기준으로 교과서에 따라서는 구체적인 전과는 언급하지 않고 청산리 전투의 의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시의 토론 주제는 '일본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청산리 대첩이 대첩이냐 아니냐'가 주제였기에 논쟁에서 주장을 관철당하고 이렇게 '최소한의 의의'를 찾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만큼 '''기존 사관에서 후퇴'''한 건 사실이라는 점이다.

6. 대중매체에서


1982년에 KBS1을 통해 방영된 3부작 기록드라마 <우둥불>의 메인 스토리이기도 하며, 1983년 이장호가 감독한 <일송정 푸른 솔은>이 본격적으로 이 전투를 그린 영화지만 당시 막대한 제작비를 들였으나 서울 관객 7만 3천에 그치며 흥행은 실패했다. 이 영화에서 김좌진 역을 배우 김기주(1940~2001)가 맡았는데 이 사람은 나중에 여명의 눈동자에서 무다구치 렌야를 연기했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 당시 유일한 청산리 전투 참전 용사로 살아있던 이우석(1896년 - 1994년)이 나와서 잠깐 내레이션을 한다.[16][17]

"그때 엄호를 맡았던 동지들은 모두 전사를 했거나 실종을 했어요. 이제 나도 머지 않아서 저세상으로 가겠죠. 헌데, 이 늙은이 죽기 전에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어요. 나라가 반쪽으로 갈라졌단 말이에요. 요즘 젋은이들은 그래도 마음이 편할지 모르겠는데, 우리같이 반평생을 남의 땅에서 고생한 사람들은 그게 자꾸 서럽단 말이오. 우리 후손들, 모두 똑똑하고 능력도 많은데, 어서 이 나라, 한 나라로 합쳐지게 힘들 좀 써 봐요."

2002년작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미와 와사부로의 남동생이 이 청산리 전투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이로 인해 미와가 조선인을 증오하게 되었다는 설정이 붙어있다.
[1] 전과가 신문이나 증언, 사료마다 중구난방에 죽었다는 지휘관, 병력들이 대부분 살아서 활동했다.[2]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체코 군단이 한국 독립운동에 감동해서 적극 지원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또한 사령관 라돌라 가이다 장군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지 또한 미심쩍은 면이 있다. 체코군 문서의 '한국 독립군과의 관계' 단락 참조.[3] 기갑 갤러리글에서 재인용 [4] 같이 싸우다 죽었는데 11명만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후생성 명부에 올라 유족 연금을 받고 나머지는 못 받는다면 이는 일본에서 크게 논란이 될 일이다. 인조이재팬에서 논쟁하던 당시 한국측도 이 부분을 반박못하고 일본측에 완패하게 된다. 야스쿠니 신사가 부정확하다는 논리는 제2차 대전때의 일로 청산리 전투 시기랑 비교하는건 넌센스다. [5] 간도 출병사는 일본군이 본토에 보고하는 비밀보고서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으로 여기서도 피해를 줄인다는것은 상식에 맞지 않다.[6]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 말기의 대만 항공전에서도 엄청난 날조 보고를 올린 적이 있다. 다만 일본군이 잘나가던 전쟁 초중반에는 사실대로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과연 당시 상황이 거짓보고를 해야 할 정도로 심한 상황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7] 물론 미군과 독립군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므로, 미군 상대로 수백 명 사상자는 당연한 취급이지만 독립군 상대로는 대여섯 명만 사망해도 골치 썩고 자존심 상하는 게 당연하다.[8] 메이지 23년 육군 정원령에 명시된 1개 중대의 정원은 장교와 부사관까지 포함해서 136명이다![9] 1932년에 제식화된 군모(태평양 전쟁영화을 보면 흔히 보는 그것)와 98식 군복 등. https://blog.naver.com/novumsatus/220721837154[10] 그 동안 복식을 근거로 국내에서 중일전쟁 시기 사진으로 추정해 왔었는데, 2020년 동북아역사재단 등 국내 학자들에 의해 1938년에 발간된 지나사변화보 68호에 있던 사진으로 확인되었다.[11] 해당 문서는 과거 한국인들의 주장이자 해당 논란이 붙거졌을때의 한국인들의 인식을 그대로 담고 있다. 들것사진을 포함해 연대장 전사와 같은 주장들이 있으며 이는 한국에서는 정설이었으며 교과서적인 내용이었으나 이런 기존에 우리가 알고있던 사실들을 가지고 토론에 임했다가 반박을 받았다.[12]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의용대 출신 김학철 선생의 자서전 '우렁이 속 같은 세상'등의 저서에서 항일 무장투쟁사가 과장되거나 부풀려졌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하루하루 힘들게 싸우는 무장투쟁 운동가들에게 힘이 되기 위해서 과장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는 언급이 나온다.[13] 단 이태진의 경우 청산리 전투가 아닌 을미사변관련 떡밥이었다.[14] 비주류, 재야 같은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학설들과 학자들이 하도 설쳐서 청산리 대첩처럼 과장되거나 왜곡된 주장, 사실들이 아직까지도 상당히 많다.[15] 만약 충분한 목표를 달성했다면 추격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16] 이전에 있던 내레이션 내용은 실제 내용과 전혀 다른 말이 들어가있었다. 요즘 젋은이들이 과거의 고생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는데, 실제 내용은 보다시피 분단에 대한 슬픔이다.[17] 덧붙이자면, 이분은 1994년 6월 26일 돌아가셨는데, 말년에 행상과 막노동을 하면서 무허가 철거민촌에서 고생하면서 살았다. 그런데도 독립유공자 신청을 안했는데, 그걸 하기 위한 서류에 한일협정 찬성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었고 그 서류에 도장을 찍는 행위를 나라를 다시 팔아먹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