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범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이성범은 1882년 4월 10일 경상도 상주목(현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의 양반 가정에서 아버지 이계도(李啓道)와 어머니 함양 박씨 박주원(朴周源)의 딸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장암동의 구장(區長)으로 재직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그는 이러한 전국적인 추세에 호응하여 같은 마을 사람 김재갑(金在甲)·홍종흠과 이웃 마을 입석리 사람 이용회(李容晦)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4월 4일에는 인근지역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는 권고문을 보내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특히 그는 청년들을 모아 놓고 조국의 독립에 있어서 청년의 역할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등, 특히 청년의 규합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4월 8일 오후 2시 1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문장산(文藏山)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급보를 받은 상주 주재 일본군 헌병대장 이하 수많은 헌병들이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투석으로 대항하다가 결국 체포되었으며, 그해 5월 15일[3]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3개월형을 언도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인 1920년 4월 26일 특별 사면으로 감형되어 출옥하였으며, 출옥 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후 1957년 10월 5일 별세하였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웃 마을인 화북면 용유리 화북중학교 앞에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념하는 광복의사 화은 이성범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석의 글은 화북면 출신의 김인 전 국회의원이 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