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년 형제의 난
1. 개요
무신정권 시기에 일어난 반란. 대몽항쟁 시기인 1237년 전라도 담양 일대에서 일어나 나주까지 영향을 끼쳤다. 주도자는 이연년(李延年) 형제로, 형 이연년은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동생은 알려지지 않았다. 백제 부흥을 내걸고 일어난 난이라는게 특이점이다.
2. 발생
1237년 정월, 전라도 담양 일대[1] 에서 백적도원수(百賊都元帥)[2] 를 자처하며 봉기했다.
봉기의 원인에 대해서는 전라도, 경상도 일대에 설치된 최씨무인정권의 농장이 원인이었다는 설, 팔만대장경 조판 사업 중 발생된 폐단으로 발발했다는 설부터 본관이 원율(현재 전남 담양)인 이연년 형제가 지역세력화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기도 한다.
3. 진압
이연년 형제의 반란은 해양(현재 전남 광주) 등의 여러 군현을 무너뜨렸고, 급기야 장수 김경손이 나주에 나와있다는 말을 듣고는 나주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이에 김경손이 나주의 원로들을 모아놓고 울면서 항복하면 안 된다고까지 말한 점을 미뤄보면, 나주성을 포위하기 이전까지는 이연년 형제가 꽤 승승장구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경손은 이연년 형제의 군세가 많지만 모두 짚신 걸친 촌백성이라 평하면서 별초 30명을 뽑아 나주성 밖으로 나가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헌데 나주성을 포위한 이연년은 귀주성 전투로 명성이 높은 김경손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 그를 사로잡기 위해 활을 쏘지 말라는 배려 또는 실책을 범했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자 김경손과 별초 30명은 출전하는데, 이연년은 용맹하게 돌격해오는 김경손의 말고삐를 잡으려 했지만 김경손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이연년 형제의 군대도 김경손에게 진압당하면서 허무하게 난이 평정된다.
4. 기타
이연년 형제의 난(백적의 난)은 김사미의 난, 최광수의 난과 같이 각각 백제, 신라,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면서 일어났다는 점이 특징이다. 적어도 고려시대까지 삼국에 대한 의식이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다는 증거로도 쓰인다. 다만 이 난을 끝으로 몽골의 침공이 계속되면서 삼국 부흥을 표방한 반란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5. 창작물에서
드라마 무신에서는 이연년 등이 나주성을 공격하려는 것을 알고 나주 관아에서 동요하자 김경손이 설득해서 싸우도록 하는데, 이연년이 김경손의 명성을 우려해 공격하지 않고 설득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공격한다. 그러나 김경손이 나주성을 공격하면 역적이라고 해서 이연년의 군사들이 크게 동요한다.
이연년이 나주성을 포위하는 것으로 식량을 떨어지게 하고 그러면서도 식량을 보내주어 김경손을 설득하려 드는데,[3] 김경손이 성문을 열겠다고 이연년을 속인다. 김경손이 군사들과 함께 성문을 열고 나타나 재빨리 이연년의 군사들을 돌파해 이연년을 죽이고 군사들을 공격해 반란을 진압한다.
6. 같이보기
[1] 당시 전라도는 현재처럼 전라북도, 전라남도로 나뉘어지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전라좌도와 우도로 구분했으며 먼 훗날인 개화기 무렵에 조선 13도로 정비되면서 분리되었다.[2] 아마도 백제도원수의 오기 혹은 의도적으로 백제에 대한 표현을 낮춘 걸로 보인다. 참고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릉비도 백제를 '백잔'(百殘, 백제 떨거지 놈들)이라고 낯췄었다.[3] 여담이지만, 고려시대인데 감자와 옥수수를 보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