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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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시대 중기, 무신들에 의해 나라가 통치되던 시기 및 그 당시의 정권을 일컫는 말.
2. 상세
무신들은 문신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춘주(지금의 강원도 춘천) 보현원에서 무신정변을 일으켰고 기존의 고려왕조를 지탱해온 문신들과 지배계층을 학살했다. 그리고 의종을 폐위한 뒤 명종을 옹립했고 정권을 차지하였다. 이후 숙청을 일으킨 무신들의 일가족과 친목파벌들이 돌아가면서 '''100년'''의 시간(1170-1270) 동안 고려를 통치하게 된다.
고려의 무신정권은 일본의 막부체제처럼 고려 국왕은 명목상의 자리일 뿐, 실권자는 무신정권의 군인들이 가지고 있었다. 주로 일본의 막부와 자주 비교되는데, 그 양상은 다르다. 일본의 막부는 교토의 덴노 조정을 그대로 두고 막부라는 정부를 따로 만들어서 국가를 운영한데 반해, 무신정권은 기본 정부를 유지한 채 본인들이 조정의 관직을 대부분 독차지하여 권력을 펼쳤다.
무신정권의 정권 교체는 대부분 쿠데타와 반란으로 일어났고, 사회에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했다. 그래서 고려 신분제의 근간을 뒤흔든 결정타 가운데 하나였는데, 천민 출신으로 집권자가 된 인물 중 김준, 이의민 등이 있다. 다만 천민이 더러 껴있는 집단이 새로운 귀족 계급이 된 것이기 때문에, 만민평등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분명 사회적 분위기에는 영향을 끼쳐서, 노비 만적이 왕후장상에는 씨가 따로 없다는 것을 내세우며 만적의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2.1. 성립과 소멸
1170년(의종 24년) 6월 보현원의 무신정변을 시작으로, 1270년(원종 11년) 5월 임유무의 숙청을 끝으로 한다. '''딱 100년'''.[2]
무신정권은 기존의 무인들의 쿠데타 정권을 잡는 것과는 다르다. 일개 무인이 권력을 잠시 잡는 일시적인 사례로 끝나지 않고 무신들끼리 권력을 돌려먹기 및 권력 쟁탈 싸움을 여러차례 하면서 왕권과 조정은 완전히 허수아비였다. 왕은 '''바지사장(얼굴마담)'''이나 마찬가지였고 폐위당하기도 했다. 아예 대대로 세습하는 60년 최씨 정권까지 가면 최씨 가문의 독재로 변질하면서 거의 준 막부 체제인데[3] , 외척이냐 무신이냐만 다를 뿐이다.
중앙에 끼지 못한 지방군인들도 중앙의 군인향우회가 독점한 권력자 흉내를 내겠다며 군사력을 사유화 해서 암군 노릇을 해먹고, 중앙의 정치조폭들은 군사력의 한계가 있으니 심심하면 지방끼리 모여서 반란을 일으킨다. 또한, 군인 중에서는 수틀리면 국외로 튀는 자들도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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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부의 기간이 긴데, 그 까닭은 이고나 이의방의 시대에도 정중부가 어느 정도 권력을 잡았으며, 무신정변 당시 무신의 실질적인 리더였고, 합의로 정중부가 얼굴마담식으로 집권해서였다. 이고나 이의방의 집권 기간에도 정중부의 직책이 더 높았다. 따라서 정중부의 집권 기간 속에 이고나 이의방의 집권 기간이 들어간다.
집권 순서대로 (이고),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그리고 최충헌 대에 이르러 어느 정도 권력이 안정기에 들어갔고 이후 최우, 최항, 최의까지 4대 60년 최씨 정권과 삼별초 출신의 김준, 임연, 임유무가 정권을 잡았다. 크게 최충헌까지의 전반부와 최충헌 이후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4]
이들의 기록은 고려사에서 경대승만 열전, 나머지는 전부 반역열전에 있다. 임연과 임유무는 함께 하나의 열전으로 수록했고, 사실상 혼자 집권 못한 이고는 별도의 열전이 없다. 몽골과의 전쟁 끝에 허수아비로 전락해있던 고려왕 원종이 원을 등에 업고 친몽주의적인 정책으로 이들을 압박 및 견제한다. 끝내 임유무가 개경 환도에 반대하다가 원종에게 밀명을 받은 배신자 무인들에 의해 살해되고 다시 개경(개경환도)으로 돌아오면서 고려는 무신정권 치하에서는 가까스로 벗어나지만 그 때부터는 원 간섭기였다.
잔당들이 삼별초의 난으로 저항했지만 제주도의 저항을 끝으로 모조리 전멸하면서 무신정권은 사라졌다. 다만 이들 세력 일부가 오늘날의 일본 오키나와로 탈출했다는 설이 일부 나왔다고 한다. 이 시기에 오키나와에 갑자기 거성이 나오는 등 발달한 건축 기술이 등장하였으며 오키나와 유적지에서 대규모로 고려 기와가 쏟아진다고 한다. 다만 삼별초 세력이 아니라 조선 건국 이후에 옮겨간 유민이라는 설도 있다. 시기는 확정할 수 없지만 12세기~14세기 사이에 한반도에서 오키나와로 대규모 유민이 건너갔음은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다.관련 기사
3. 특징
3.1. 정치
무신정권은 정부를 제압할 수준의 병력을 쥔 군인들이 정치와 이권를 통제했다. 이 때문에 각종 향락과 로비, 패싸움을 통하여 중앙에서 군사력을 자신의 세력으로 많이 빼돌릴 수 있는 군인의 힘이 강했다. 사실상, 사병들의 쪽수를 통하여 고려왕조의 정부와 이권을 얼마만큼 나눠먹을지를 조폭들의 합의와 유사한 방식으로 파벌들이 결정하여 국가의 중앙정부가 나뉘어 통치되었던 것이 무신정권의 초기 모습이었다. 그들은 무려 100년 동안 자릿세를 다투는 조폭들마냥 이권을 뺏어먹으며 정부의 곁에서 칼을 차고 붙어있는 행보를 보였다. 또한, 기존의 고려왕조와 지배층은 사실상 박살냈음에도, 문신들이 만들어놓은 통치제도를 큰 변화없이 유지하며 자신들끼리만 권력을 돌려막고 국가의 발전을 의도적으로 저해했다. 무신정권의 통치권한은 군사력뿐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파벌이 아닌 다른 세력이나 국가의 힘이 전체적으로 성장하는 상황을 극도로 견제했다. 다른 쪽의 쪽수가 불어나는 것 자체가 경쟁자들의 군사력 상승이기 때문.
소수의 정치꾼 조폭들의 세력 싸움에 의해서 돌아가는 정치체제였다고 생각하면, 무신정권의 시대상을 아주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이는 최씨 일가의 확실한 집권이 이루어져서 국가체제가 안정되고, 군인들이 문신으로 바뀌고 권력이 평준화 되기 이전까지 반복되었다.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삼두 시기 - 이의방 - 정중부까지는 균형을 유지했는데, 이는 무신들의 합좌기관인 중방의 권한이 무신정변으로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이다. 뒷날 이고가 죽으면서 삼두 균형이 깨져도 중방의 권한이 이의방과 정중부를 적절하게 견제하면서 나름 균형을 지켰다. 하지만 경대승이 중방을 무력화시키면서 무신 정권 집정자의 견제 세력이 사라졌고, 이의민[5] 을 거쳐 최충헌 대에 이르러선 독재정권이 되어 아들에게 권력 세습까지 된다.
사회 체계는 막장으로 치닫게 되었다. 무신정권은 고려왕조를 지탱해온 엘리트층을 멸망시켰으며, 국가 운영 경험이 없던 무신과 그 일가족들이 온갖 관직을 돌려먹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무신정권의 집권자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도는 극히 낮으면서 이익과 권력에는 굉장히 민감했다. 일단 무신정권이 출범할 때부터 의종을 폐위시키면서 발생하였고 그밖에 명종, 희종, 원종 등이 폐위당한 바 있다.[6] 이렇게 집권자에 오른 군인출신 두목들의 입맛에 안 맞다 싶으면 국왕을 함부로 폐위할 정도로 국가에 대한 충성도가 극히 낮았지만, 이의민을 제외한 무신들은 실권자에서 만족하고 자신이 직접 왕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는 무신정권이 수백명 단위의 정치 마피아 수준의 한심한 규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무신정권은 정부를 점령하는데만 필요한 군사력으로 문신들이 만들어놓은 체제를 하위호환으로 대물림하며 향락을 즐겼을 뿐이다.
한편 이들은 자신의 이익과 신변에 위협이 간다면 국가가 망하든 말든 모든 문제와 책임을 회피하고 숨어버렸다. 최씨 정권은 당시 12C 중반, 세계 최강이었던 몽골의 군대를 맞아 적극적으로 항전할 생각도 혹은 협상을 할 생각도 않고 강화도에 틀어박혀 항전도 항복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약 30여년 동안 질질 시간을 끌었으며 순간순간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 항복만 반복했다. 그리고 몽골군이 내륙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무참히 살육하든 말든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그들이 이런 짓을 한 이유는 몽골에 항복하면 자신들 정권이 붕괴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무신정권은 국정에는 큰 자질이 없는 자들이 기존의 귀족들의 부패를 더욱 저열하게 물려받았기 때문에, 국가의 쇠퇴는 당연한 현상이었다. 고려시대의 군인들은 태반이 천민이나 까막눈이었다.[7][8] 덕분에 고위 군인조차 국가통치에 대한 지식따윈 담 쌓고, 본인의 이름만 겨우 쓸 줄 아는 경우가 많았다. 무신정권부터 고려는 겉모습만 남았고, 국내외에 잘 알려진 이전의 고려와는 다른 허약한 나라가 되었다.
3.2. 군사
군인들은 본분인 외적들과의 싸움을 꺼렸고, 정치판에서 무신의 기반이 되는 각지의 군인을 정치싸움에 끌어들이기 위하여 향락과 수탈이 국가 운영보다 더 중요한 과제가 되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무신정권의 군사력은 국가 전체를 정복할 규모가 아니었기에, 각지의 군인들이 중앙의 명분과 통치력을 우습게 보고 각자의 친목라인에 따라서 정치깡패의 단위로 나뉘어 국력을 사유화했다.
당연히 국가 전체의 방위력은 쇠퇴했다. 무신정권의 유력자들은 군인이었으니 자신의 병졸을 최고의 인력으로 채웠지만, 이들은 국가 전체를 지키기 위한 대규모 군사력이 아니라 수백명을 넘기기 힘든 유력자들의 정치깡패 혹은 사유물일 뿐이었다. 고려왕조가 10만단위의 병력을 주구장창 무장시키고 지휘했던 시대는 무신정권이 아니고, 국가행정과 군사전략을 모두 다룰 수 있는 기존의 엘리트층이 집권하던 시대들이다. 대규모 군단 육성에는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 중앙의 정부를 따먹기 위한 마피아 정도의 숫자에 불과했던 무신정권은 국가를 위해 그런 엄청난 지출을 할만한 애국자들이 아니었을 뿐더러, 그런 군단을 육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경영능력 자체도 부족했다.
무신정권은 국가 전체의 군사력 증강은 오히려 다른 지방의 경쟁자를 늘리는 것으로 생각하여 지방군을 해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본인들의 사유물이 된 병력을 깡패로 활용한 패싸움을 제외하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한마디로, 무신정권은 중앙의 군인들이 국가의 군사력을 빼돌리고 사유화 하여 조폭으로 만들고, 서로 영역다툼을 벌이며 국가의 이권을 땅따먹기 식으로 해체하여 나눠먹는 패턴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무신정권은 군인정권임에도 고려왕조에서 군사적으로 가장 허약했던 지배세력이었다. 무신정권에도 어느 정도 사병은 있었지만, 경대승의 도방에서 보듯이 초창기에 직접 조종하는 사병은 '''고작 1백명''' 남짓이었고, 그런 경대승을 이의민이 '''두려워했다'''는 기록을 보면 다른 인물들도 경대승보다 군사력이나 능력으로 뛰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신정권의 전성기의 최씨정권의 사병조차도 '천명' 정도를 넘지 못했다.
4. 평가
무신정권은 고려 왕족을 '''혈통자판기''' 정도로 우습게 만들었고, 이후의 집권세력들인 권문세족들도 무신정권이 망쳐놓은 고려의 왕권을 이용해서 고려를 갖고 놀았다. 그래서 무신정권 이후 초기에 있던 고려의 강건함은 멸망할 때까지 회복되지 못했다.
무신들은 고려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엘리트층을 사실상 초기화시켰다. 그 덕분에 계급제가 초기화 되고, 정계진출이 막힌 귀족들이 문화를 발전시키는 변화가 생겼으나, 그러한 일을 해낸 것도 집권한 무신들보다는 실무역할을 맡은 관료와 귀족 출신들이 활약을 했던 편이다. 즉, 실질적으로 무신정권의 영향력은 군인 친목 향우회의 이권 문제를 위해서 일어난 변화들이며, 무신정권이 고려를 위한 긍정적인 의도에서 벌인 활동은 100년 동안 전혀 없었다. 오히려 본인들의 사유물로 전락한 중앙의 병력을 제외하면 각 지방의 정규군을 해체하고, 민중을 가혹하게 착취하며 몽골제국의 침략을 간접적으로 돕는 꼴이 됐다.
무신정권 시대는 중앙부터 각 지방의 군인들이 그 지역의 군벌로 난립하며 군사력을 사유화 하고 수탈과 반란이 자주 벌어졌다. 군인들의 본분인 국가방위는 중앙(권력)과 멀어지는 3D업종에 불과해졌을 뿐더러, 각 지역의 군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호감을 사는 잔치와 로비를 일삼는 것이 새로운 성공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신정권의 중앙에서부터 그러한 풍조로 권력을 잡고 유지했고, 이러한 흐름은 사실상의 '''최씨막부'''가 성립되기 이전까지 통제를 하려고 해도 반복되었으며, 그리고 최씨집권기, 정권붕괴 이후의 잔당들에 이르기까지도, 군인들끼리의 친목질과 향락으로 각지의 군사력을 각 파벌에서 영입하며 권력을 돌려먹는 친목질은 무신정권의 군인정치가 보인 근본적인 성질이었다.
물론,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불러왔기 때문에 무신정권 후기는 단순히 좋거나 나쁘다는 식만으로 해석되지 않을 정도의 변화상이 뿌리를 갖춘다. 조폭정치에 불과했던 초기 무신정권에서 점점 정상적으로 돌아가면서, 무신들도 결국 문신처럼 바뀌고 국가 전체를 위한 합리주의에 의해 쇠퇴한다. 또한, 고려의 계급제도가 한번 리셋되는 효과도 있었다. 문제는, 그것도 군인들의 친목질이 해소되고 상식적인 정부로 돌아가면서 효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주요사건으로는 몽골의 침입, 문인들의 정계진출이 막혔을 때 주체적인 문화의 발전, 토지제도와 등용제의 정비 같은 점도 있었다. 하지만, 무신정권이 신경을 쓴 것은 본인들의 이권문제 뿐이었다.
이때문에 조선시대에서는 무신정권을 반란종자 취급했고, 조선에서 펴낸 고려사에서도 경대승을 제외한 모든 무신정권의 집권자들이 반역열전에 수록되어 있다. 반대로 대한민국 군부 독재정권 체제에서는 정당한 무인들의 혁명으로 격상되었다. 최씨 정권에 대해서도 단점이나 악영향을 숨기고 고려를 안정시켰다든지 삼별초까지 대몽항쟁의 영웅으로서 미화했었다.
4.1. 이성계와의 비교
무신정권은 후대에 비슷한 배경을 가진 이성계와 자주 비견되고는 했다. 최씨 정권은 왕도 마음대로 갈아치우며 몇 대에 걸쳐 집권할 정도로 이성계보다도 더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연히, 양자를 비교하면서 왜 무신정권은 이성계보다 강력한 권한을 휘두르고 집권기간도 더 길었던 사람이 많았음에도[9] 이성계처럼 역성혁명을 통해 새 왕조를 창건하지 못했는지 논의가 자주 있었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군인 마피아 집단에 불과했고, 그 점에서 한국사 최고의 사령관 중 하나였던 이성계와는 엄청난 격차가 있다. 무신정권은 견제세력이 없는 100년 동안 국가 운영에 대한 비전 없이 횡포를 휘두르기만 했으나, 이성계는 고작 4년만에 국가를 통합하고 낡은 고려를 대신할 나름대로의 비전을 제시하며 새로운 왕조를 건설했다. 심지어 이성계의 시대는 무신정권이 쉽사리 학살한 문신들과는 달리 매우 강성한 라이벌인 최영과 권문세족들이 남아있는 시대였다. 무신정권은 군사적으로 무능했으나, 이성계는 본인부터 나라의 수호자로 평가받은 유능한 군인이었다.
무신정권은 별다른 기반 없이 중앙을 장악할 수 있는 수준의 군사력은 있었으나, 이성계와 같이 외적을 자기 사병으로 토벌할 정도의 압도적인 군사적인 능력이 없었다. 무신정권의 핵심 친위대는 딱 수도에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깡패 수준에 불과했다. 최충헌은 이 점을 염려했는지 집권한 뒤에 고향 진주에 어느 정도 기반을 만들기는 했는데, 이런 비교적 용의주도함 덕분에 최씨가 4대나 간 것이기도 하지만 몽골의 침략이라는 변수 때문에 그리 큰 도움이 되었는지는... 반면 이성계는 고려 말기에 '''순수한 사병으로만 2천여명'''(...)을 이끌고 다니며 외적들을 만날 때마다 박살내버렸고 이는 중국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만큼 의문의 여지도 없다. 사실 이성계의 가별초도 그들만의 특수성[10] 을 제외하고 규모로만 따지면 이성계와 비슷한 수준의 군사력을 갖춘 라이벌이 상당수 있었다. 심지어 고려말기는 별 세력도 없었던 문신 조반이 염흥방의 노비에게 받은 수모를 복수하려고 "수십 기"의 병사를 움직였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무신정권은 단순히 수도권에 숨어살면서 연명했던 정치조폭 이권집단이었음을 생각하면 근본적으로 매우 허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이성계는 국가의 수호자로서 정당성을 얻을만큼 외적을 격퇴해 화려한 "국가적인 공"과 정도전과 남은, 윤소종 같이 새로운 국가적 비전을 제시할 "유능한 문신"들이 있었지만, 무신정권은 국가적인 공도 없고, 새로운 국가적 비전을 제시하고 구현할 능력도 없었다. '''무신정권에서 그나마 좀 깨어있고 다른 모습을 보였다는 경대승 또한 무신정변 이전으로의 복귀 말고는 별다른 정치적 비전이 없었다'''. 그나마 이 복귀 정책도 당시 무신정변 덕분에 왕에 오른거나 마찬가지인 명종에게 심한 불쾌감과 분노를 불러 일으킨다.
5. 집권자 및 기간
보면 알겠지만 최씨 정권이 절반을 훨씬 넘게 차지한다. 간략화하면 (혼란) - 이의민 - 최충헌 - 최우 - 최항 - 김준인데, 이들의 집권 기간이 84년이다. 한국사에 수백년 왕조가 너무 많아서 안 와닿을 수 있는데 이 정도면 길다. 중국에는 최씨 4대 세습보다 오래 못간 왕조들이 넘쳐난다.
6. 무신정권기의 반란
역사상 반란이란 건 늘 있어왔지만 무신정권 시기의 반란의 빈도수는 당연히 그 정점에 달해있다. 이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천대받던 무신이 반란으로 권력을 휘어잡는 것을 본 사람들이 자신들도 할 수 있다며 반란을 일으킨 경우가 많았고, 이외에도 무신들이 문신을 향한 적개심으로 틈만 나면 문신들을 학살하려 해 문신들이 살고자 반란을 일으킨 경우도 있다. 그리고 무신 권력자들도 간신히 중앙의 정권만 틀어 쥐고 있는 수준이었고 명분도 취약했기 때문에 국가통제가 잘 안되었고 자기세력을 키우기 위해 '토지겸병' 등을 하기도 했으며 자리보전을 위해 대권에 도전해오지 않는 한 다른 세력들이 일탈행동을 하는 것을 방관했다. 이 외에도 몽골군의 침입으로 사회가 혼란해졌고 이에 대해 야심과 불만이 가득쌓여 터진 반란도 많다.
- 1172년 철주민란, 창주민란, 성주민란
- 1173년 김보당의 난
- 1174년 제1차 개경승도의 난, 조위총의 난
- 1175년 석령사의 난
- 1176년 망이·망소이의 난, 손청의 난
- 1177년 김순부 · 김숭의 난(제1차 의주적의 난)
- 1182년 전주 관노의 난
- 1187년 조원정의 난
- 1190년 동경민란
- 1193년 김사미 · 효심의 난
- 1198년 만적의 난[14]
- 1199년 명주 민란, 김준거 · 김준광의 난, 금초의 난
- 1200년 정방의의 난, 금주 잡족의 난
- 1217년 최광수의 난
- 1218년 이장대의 난
- 1219년 한순 · 다지의 난(제2차 의주적의 난)
- 1200년 밀성 관노의 난, (밀성 관노 투속 사건) 진주민란, 광명 · 계발의 난
- 1217년 제2차 개경승도의 난
- 1231년 충주 노군의 난
- 1232년 이통의 난
- 1233년 필현보의 난[15]
- 1237년 이연년 형제의 난[16]
- 1257년 안열의 난[17]
- 1258년 조휘, 탁청의 난
- 1269년 최탄의 난
- 1270년 삼별초의 난(삼별초 항쟁/강화도->진도->제주도)
- 1271년 숭겸의 난
7. 관련기구
8. 관련인물
8.1. 무신
- 기탁성
- 김경손
- 경대승
- 경진#s-3
- 김준
- 김방경
- 김약선
- 김통정
- 노영희
- 두경승
- 박존위
- 박진재
- 배중손
- 서균한
- 서유
- 서민경
- 서준
- 서찬
- 서돈경
- 서응려
- 서광순
- 서칭
- 서긍
- 송군수
- 송유인
- 양숙
- 우학유
- 이고
- 이광정
- 이린
- 이소응
- 이영진
- 이의민
- 이의방
- 이준의
- 이춘부
- 임연
- 임유무
- 정균
- 정중부
- 조원정
- 진준#s-2
- 채원
- 최우
- 최의
- 최충수
- 최충헌
- 최항
- 한순
- 허승
8.2. 문신
8.3. 왕가
8.4. 환관
8.5. 승려
8.6. 평민, 천민
9. 유사사례
9.1. 한국
9.2. 외국
- 후한의 동탁, 조조
- 일본의 정이대장군과 막부
- 대월 후 레 왕조의 찐씨 정권
- 네팔 왕국의 라나 가문
- 마라타 제국의 페슈와 바트 가문
- 프랑크 왕국의 궁재 피핀 가문(카롤루스 마르텔 등)
- 카이로 아바스 칼리프와 맘루크 왕조
- 서로마 제국의 리키메르, 오레스테스
- 군인황제시대[18]
- 삼두정치[19]
10. 창작물
- 드라마 무인시대는 이 무신정변 전반부 약 50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비록 크게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단편적인 캐릭터 성에서 벗어난 매력적인 캐릭터들 묘사, '방향성 없는 절대 권력은 타락한다' 라는 중후한 주제에 충실한 전개,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들이 가득한 화려한 캐스팅 등으로 인해 대한민국 대하 사극의 수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 2012년 MBC드라마 무신은 시대적으로 무인시대와 바로 이어지는 시간대로 최충헌 정권 말기부터 김준 정권까지를 다루었다. 그러나 무신 집권자들 미화를 비롯해 압축된 스토리에 많은 논란이 휩싸이고 드라마의 질도 슬슬 확연히 떨어지며 걸작이나 수작이라고 부르기에 한참 멀다. 그나마 여몽전쟁(대몽항쟁) 몇몇 장면을 나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 어느 교과서의 삽화의 장면 정중부가 "자 궁에 문신들을 모조리 죽여라" 하는 패러디 밈이 있다.자, 궁에 문신...들을 모조리 죽여라!
11. 바깥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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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몽 항쟁기에는 강화도(강도, 江都)가 임시수도였다.[2] 여담으로 고려는 918년 ~ 1392년 간 존속 중, 100년마다 큰 격변기를 겪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즉 900년 건국, 1000년 거란 침략, 1100년 여진 침입, 1200년 무신정권, 1300년 원 간섭기, 1392년 멸망.[3] 많이 사용되는 표현은 아니지만, 일본에서는 종종 '최씨 막부(崔氏幕府)' 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사의 친숙한 개념을 이해하기 쉽게 빗대는 것에 가깝다.[4] 무신정권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도 무인시대와 무신이 각각 전반기와 후반기를 배경으로 비슷하게 했다. 두 시기의 가운데에 비교적 길고 안정적이었던 최충헌 ~ 최우 집권기가 끼어있어 이야기가 한 번 맥이 끊기기 때문. [5] 단 이의민은 조원정, 두경승과 공동집권했다.[6] 물론 원종의 경우 임연이 멋대로 폐위시키긴 했으나 원종의 사돈이자 후원자였던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이 압력을 행사하면서 얼마 후 복위했다.[7] 근데 사실 다른 국가들의 군인들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군인들이 좀 특이한 케이스였다.[8] 전쟁에서 지휘관으로 활약한 윤관, 강감찬같은 사람들은 장수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문신'''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무신들을 뽑는 무과도 엘리트 군인을 뽑기 위한 시험이었지만 고려시대는 사정이 좀 달랐다. 이 때는 지휘부 쪽은 문신들이 맡아서 '''문신들도 대장급 위치로 전장에서 뛰고''', 그 아래 군인들(무신들 포함)은 천민 출신이거나 못해도 일자무식인 경우가 많았다. 무신들이라 해봤자 결국 전쟁 때는 문신의 부하로써 군대를 부리는 위치 정도에나 있었기 때문.[9]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부터 조선건국까지 걸린기간은 4년으로 짧다고 평가받던 경대승 집권기간 만큼이나 짧은 기간이었다.[10] 이성계의 병력은 고려인, 여진인, 몽골인, 중국인을 아우른 다민족 혼성 '''기병''' 군단이자 동북면을 중심으로 원나라 정규군, 여진족, 왜구, 홍건적, 나하추 등 온갖 적군과 싸운 백전연마의 최정예.[11] 정통성 문제 때문에 이의민의 지지를 받아야 했다.[12] 이와 관련해서 이의민이 김사미 · 효심의 난와 관련있다는 소문도 돌았다.[13] 정중부, 이의방, 이고와 같다.[14] 한국사 최초의 노비들의 신분해방운동이다.[15] 서경 즉, 평양에서 친몽 세력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반란은 곧바로 진압되었지만 이 반란의 여파로 인해 평양이 결국 몽골군에게 넘어가 버리고 만다.[16] 백적의 난 또는 백제부흥운동 봉기[17] 安悅[18] '허수아비 황제를 옹립한 집정자'라는 면만 빼면 유사점이 많다. 무인 위정자들, 친위대의 하극상, 믿을 수 없는 부하들, 수권세력의 잦은 교체, 지방의 반란, 자질이 떨어지는 위정자, 평온한 시기라면 있을 수 없는 하위계급의 벼락출세, 민생의 파탄 기타등등.[19] 정중부, 이의방, 이고의 연합정권시기와 비슷하다.[20] 이 시대는 천민이 왕도 가지고 노는 권력자가 되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