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성 전투

 



'''귀주성 전투
龜州城 戰鬪'''

'''시기'''
1231년(고종 19년) 9월 3일 ~ 1232년(고종 20년) 1월[1]
'''장소'''

고려, 귀주성
(현 북한 평안북도 구성군)
'''원인'''
몽골의 1차 침입.
'''교전국'''
고려 [image]
몽골
'''지휘관'''
박서(朴犀)
김경손(金慶孫)
김중온(金仲溫)
박득분(朴得分)
박문창(朴文昌)
송문주(宋文胄) 등
<^|1>우예르(오야이)
왕영조
일라(이라) 등
'''병력'''
5,000 명
10,000 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귀주성 함락 실패, 허나 몽골과 화친한 고려 조정의 명에 따라 항복.
'''영향'''
4개월간 결사항전으로 1차 몽골침입의 피해를 최소화
1. 개요
2. 1차 공방전
2.1. 폭풍전야
2.2. 무모한 작전
2.3. 나는 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다.
3. 2차 공방전
3.1. 고려군을 지치게 하라
3.2. 전황을 뒤집다.
3.3. 어명, 그리고 항복
4. 이후
5. 평가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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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해동지도에 표시된 귀주성
고려 몽골의 1차 침입 당시 제1차 자모산성 전투, 동선역 전투 등과 더불어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 가장 극적이고 기록도 많이 남아 있는 전투다.
1231년 8월, 저고여 피살 사건을 빌미로[2] 고려에 대한 몽골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총책임자인 권황제[3] 살리타이가 이끄는 3만 명의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 내려왔다. 살리타이는 일단 함신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함신진은 성(成)이 아닌 진(陣). 즉 관문에서 싸웠으며 이는 지키기가 성보다 더욱 힘들게 자명했다. 이곳은 조충(趙沖)의 아들 조숙창(趙叔昌)이 방수장군(防守將軍)으로 보직을 맡고 있었으며, 살리타이가 항복을 권하자 성안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저 요구를 받아 들여야 된다는 부사(副使) 전간(全間)의 건의에 따라 투항했다. 이 때문에 조숙창은 《고려사》에서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렸다. 이어 살리타이는 철주에서도 승리를 거두고 정주를 함락시킨 후 부대 재편성을 실시한다.
<^|1> [image]
[image]
본군
살리타이가 직접 이끄는 부대며 남로군의 진격로를 뒤따라 내려간다
남로군
정주 → 선주 → 곽주를 거쳐 청천강을 도하해 북로군에 의해 퇴각하는 고려군을 말살하면서 개성으로 진출한다.
북로군
삭주 → 귀주 → 태주 → 위주를 점령해 고려군의 후방공격을 방지하며 청천강 연안에 머물며 고려군의 반격에 대비한다.
본군, 남로군, 북로군으로 나뉘어 개성으로 진격하게 하였는데 본군과 남로군은 동선역 전투에서 고려의 중앙군에게 안주로 퇴각한 상황이었다. 문제는 우에르(오야이)가 이끄는 북로군이었는데 1만 명에 달하는 북로군은 당시 작은 성에서 지체하고 있었고 그 성이 바로 귀주성이었는데, 귀주성은 강동 6주의 성 중 하나로 매우 중요한 성이었다.
[image]
귀주성 전투 전황도. 출처[4]

2. 1차 공방전



2.1. 폭풍전야


당시 귀주성에 버티고 있던 이는 서북면병마사 박서. 그리고 정주 분도장군 김경손, 위주부사 박문창, 삭주 분도장군 김중온, 정주부사 박득분이 이끌던 병력들이 이동해 있었고 많은 수는 아니지만 서북지방 병력이 집결해 총 5,000여명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패전하였거나 성을 포기하고 합류한 병력으로 보인다.
1231년 9월 3일, 우에르가 이끄는 제2군 1만이 귀주성에 모습을 드러내자 박서는 김중온에게 동문과 서문을, 김경손에게 남문을 맡기고 자신은 북문을 수비토록 하였고 각 병력 중 정예 별초군 250명을 뽑아 각 성문에 배치시켰다. 김경손이 직접 나서 이런 말을 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너희들은 목숨을 돌보지 말고 죽어도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爾等不顧身命 死而不退者。)"

고려사》 김경손 열전

하지만 몽골군의 무자비한 공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고려군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우별초들이 모두 땅에 엎드린 채 명령에 불응해 이들을 성으로 돌려 보냈다.
[image]
귀주성의 남문. 6.25 전쟁 때 파괴, 1979년에 복원.

2.2. 무모한 작전


전투가 진행되기도 전, 고려군이 두려움에 떨자 김경손은 대담한 작전을 펼친다. '''정주성에서 같이 탈출한 12명과 함께 성문을 열고 서쪽 성벽 쪽 용산에 있는 몽골군의 서측방을 기습'''한 것이다. 이 12명은 이미 몽골군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해서 김경손의 말에 선뜻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김경손이 팔에 화살을 맞는 일촉즉발의 상황도 벌어졌지만 북을 치며 전투를 벌여 몽골군 지휘관 한 명을 전사시키고 몽골군을 물러나게 한 후 귀환했다. '''몽골군 1만 명이 단 13명에게 등을 보인 것이었다.'''
박서는 직접 나와 절을 하며 귀주성의 지휘를 자기보다 낮은 벼슬을 가진 김경손에게 일임했다.

몽골군이 퇴각하자 김경손이 진을 정비하고 쌍소금을 불며 돌아오니 박서가 맞이하여 절하며 울었고 김경손도 또한 절하며 울었다. 박서는 이에 수성하는 일은 일체 김경손에게 위임하였다.

<<고려사>> <김경손 열전>

다음 날인 9월 4일, 몽골군이 정비를 가다듬고 귀주성을 공격해오자 오히려 성문을 열고 고려군이 나와 그들을 상대하자 몽골군이 등을 보이고 퇴각하게 된다. 이때 위주부사 박문창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보아 대규모 교전이 벌어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여태껏 이런 저항을 받아본 적이 없는 오야이는 포로로 사로잡은 박문창을 성으로 보내 항복을 권하지만 박서는 박문창의 목을 베고는 성문을 더욱 걸어 잠갔다. 이에 빡친 몽골군이 2차 공격을 퍼붓게 되는데 북문을 300명의 정예기병으로 공격하였으나 박서가 이를 막아내자 공격 방향을 변경, 김경손이 지키는 남문을 공격하도록 지시한다.
수레에 풀과 나무를 쌓고 밀면서 전진을 감행하지만 김경손이 투석기에 쇳물을 담은 통을 수레에 맞췄다. 이에 수레가 모두 타서 없어지자 몽골군은 퇴각했다.
다음에는 누사(망루를 설치한 수레)와 목상(나무로 만든 망루)을 이용해 병사들을 보호하였고 그 병사들이 땅굴을 파 귀주성 아래로 들어오자 박서는 그 구멍에 쇳물을 부어버려 몽골군 30명을 생매장시켰다.
방법이 없자 몽골군이 가지고 있던 발석기 15량을 이용해 남문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고 남문 문루와 성문 동쪽 일부가 무너지게 되었다. 하지만 박서는 성 내에 장대를 설치하여 투석기를 올린 후 맞사격을 실시해 몽골군 장수 1명과 수십명의 병사를 전사케 하였다.
9월 5일, 또 다시 공격을 감행한 몽골군은 나무에 기름을 가득 묻혀 귀주성에 불을 붙였고 이게 내부로 번져 타게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진흙을 던져 불을 끄게 한다. [5] 해질 무렵에 또다시 수레에 불을 붙여 성문을 불태우려 했지만 또 다시 실패했다.
이후 9월 한 달 동안 5차례의 총공세가 이어지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북로군은 포위망을 풀고 귀주성 남쪽으로 이동, 귀주로오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 10월 15일~19일까지 기다리게 되었다. 하지만 귀주성을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 귀주성이 단단히 버티고 있다면 후방기습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이를 정리하지 않으면 개성으로의 빠른 진격이 불가능 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

2.3. 나는 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다.


[image]
현재 귀주성 전경. 북한의 국보 제60호
10월 20일 밤, 북로군은 다시 귀주성을 포위하고 귀주성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북문과 남문 앞에 각각 1개 부대를, 평지인 동문에는 2개 부대를 배치해 동문을 뚫어내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수십 대의 발석거를 동원해 동문 쪽 성벽을 무너트리고 성문 안에 몽골군이 진입할 뻔했으나 이를 필사적으로 막아내 몽골군 70여 명을 죽이고 겨우 막아냈다.
[image]
발석거
10월 21일 귀주성 서쪽에 있는 산인 용산(龍山)을 점령한 몽골군은 서문 쪽에 공격을 감행, 성문을 일부 부셨고 그곳에 또다시 몽골군이 진입을 시도했다. 북문을 지키던 병마사 박서가 급하게 이동해 세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몽골의 진입 시도를 막아냈다.
한편 김경손은 귀주성 최대의 격전지인 남문에서 의자에 앉아 지휘를 하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적이) 다시 공격해 오자 김경손은 의자에 앉아서 독전하고 있는데 큰 돌덩어리가 김경손의 머리 위를 지나 뒤에 있던 군졸에게 명중해 전신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復來攻 慶孫據胡床督戰 有砲過慶孫頂 中在後衙卒 身首糜碎。). 이에 부하들이 어서 자리를 옮기라고 청했으나 김경손은 이렇게 말했다.

'''안 된다. 내가 움직이면 군사들의 마음이 모두 흔들릴 것이다.'''

不可 我動則 士心皆動。

고려사》 김경손 열전 

30일 동안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1231년 11월 초순, 몽골는 1차 공방전에서 퇴각하게 된다. 이 공방전 일수가 《고려사》김경손 열전에서는 20여 일, 박서 열전에는 3순(旬), 즉 30일이라고 나와있다. 그리고 고려사에는 몽골 장수의 말을 빌려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작은 성이 대군을 맞아 싸우는 것을 보니, '''하늘이 돕는 것이지 사람의 힘은 아니다.'''

此城以小敵大 天所佑 非人力也。

고려사》 김경손 열전


3. 2차 공방전



3.1. 고려군을 지치게 하라


11월 22일 몽골군은 재정비 끝에 귀주성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몽골군은 귀주성 북문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북문 문루와 성문 성벽 일부가 붕괴되었다. 이에 고려군도 발석거를 이용해 반격을 개시했고 무너진 성벽에는 쇠사슬로 이어 막아냈다.
이어 12월 중순까지 1달 동안 귀주성에 접근할수 있는 요충지들을 모두 점령해 지원세력을 봉쇄했고 전면적인 공격보다 지속적인 공격으로 고려군을 지치게 할 속셈으로 적은 병력으로 공격을 감행하고 대부분의 병력들은 휴식을 취하는 방식으로 전환한다. 이러한 전술은 12월 16일까지 계속 되었지만 고려군은 굳건히 성을 지키고 있었다.

3.2. 전황을 뒤집다.


12월 17일 아침, 귀주성에 몽골군이 그간의 소규모 교전이 아닌 대대적인 공격을 시도했다. 귀주성을 포위한후 남문에 포대를 수십대를 방열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이에 박서김경손은 고려군의 발석거로 맞대응하고 성의 서문을 열고 나와 300명의 돌격대를 보내 몽골군의 측면을 쳤고, 이에 몽골군이 당황해 하며 혼란에 빠지자 귀주성 수비병력이 일제히 성밖으로 뛰쳐나와 공격을 감행, 몽골군은 퇴각했다. 이때 몽골군이 어찌나 당황했는지 오히려 자신들의 진영에 목책을 설치하고 수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蒙古復以大砲車攻之 犀又發砲車飛石 擊殺無算 蒙古退屯 樹柵以守。

몽고가 다시 대포차로 공격하자 박서는 포차로 돌을 날려 적군을 무수히 죽이니 몽고는 퇴각해 진을 친 다음 목책을 세우고 수비했다.

고려사》 박서 열전

[image]
공성용 사다리, 운제(雲梯)
1231년 12월 5일, 고려 조정은 회안공 왕정#s-1을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주둔하고 있던 안주로 보내 화친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12월 중순쯤 되었을 때 살리타이는 평주에서 포로로 잡힌 지의심, 학록, 강우창 등을 보내 회안공 왕정의 글을 전달했지만 박서는 듣지 않았다. 살리타이가 다시 사람을 보내 설득했지만 박서는 성을 굳게 지킬 뿐이었다.
몽골군이 또다시 운제를 동원해 성을 공격하자 박서가 대우포(大于浦)[6]로 모조리 박살내버려 성에 접근할 사다리가 없어 성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에 몽골군은 25기의 발석거를 동원해 성벽을 50칸이나 부쉈지만 박서가 쇠사슬로 그부분을 막아냈다. 이후 몽골군의 총공격이 가해지자 귀주성의 백성 남녀노소 할거 없이 모두 나와 돌을 던져 저항하여 막아냈다.

吾結髮從軍 歷觀天下城池攻戰之狀 未嘗見被攻如此而終不降者。 城中諸將 他日必皆爲將相。

"내가 성인이 되어 종군하면서 천하의 성에서 전투하는 모습을 두루 보았지만 이처럼 공격을 당하면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은 경우는 보지 못했다. 성 안에 있는 장수들은 훗날 반드시 모두 장군이나 재상이 될 것이다."

《고려사》 박서 열전에 기록된 몽골 장수의 감탄.[7]


3.3. 어명, 그리고 항복


이듬해인 1232년 1월. 고종이 최임수(崔林壽)와 민희(閔曦)를 시켜 몽골인을 데리고 귀주성 밖에 가 "이미 회안공 왕정이 몽고군과 강화를 했고 우리 3군도 이미 항복했으니 전투를 그만두고 항복하여야 할것이다.(已遣淮安公侹, 講和于蒙古兵, 我三軍亦已降, 可罷戰出降.)"라고 하였지만 박서는 항복하지 않았고 이에 민희가 분노로 자결하려고 했다고 한다. 최임수가 그를 말리고 다시 박서를 설득에 나섰고 왕명을 더이상 어길 수가 없던 박서김경손은 결국 항복을 하게 된다.

4. 이후


훗날 몽골 사신이 박서가 성을 굳게 지키며 항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죽이려 하자 최우가 그에게 "나라에 대한 경의 충절은 아무데도 견줄 수 없으나 몽골의 말도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경은 잘 생각해 처신하라.(卿於國家 忠節無比 然蒙古之言 亦可畏也。卿其圖之。)"고 해 박서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죽주로 귀향을 했다. 하지만 최씨 정권의 몽골과의 결전 의지로 인해 다시 등용되어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가 되었다.
김경손은 자신의 형이었던 김약선이 최우의 사위로써 후계자로 지명된 상태였기에 별다른 처벌은 없었고[8] 오히려 3차 침입 기간 도중 호남 지방에서 발생한 이연년의 난을 진압하며 그 공으로 추밀원지주사로 승진까지 했다. 그러나 후계자로 지명되있던 형 김약선이 최우의 서자였던 최항의 음모로 살해당했고 이후 최항이 새로운 집권자가 되어 자신의 반대파들을 숙청하던 때에 그 역시 살해당한다.
송문주는 이후 있을 2차 침입 기간 중 죽주산성에서 결사항전하여 몽골군을 격퇴했다.

5. 평가


[image]
귀주성 전경

외로운 성에서 약한 군졸로 천하의 사납고 날랜 강성한 오랑캐를 막아 동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를 산악처럼 우뚝 서게 하였다. '''우리 동방에서 성을 잘 지킨 것은 안시성 이후 또 귀주가 있으니, 박서와 김경손의 공은 작지 않은 것이다.'''

'''《동사강목》'''

한반도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공성전 중 하나며, 이 전투로 인해 몽골의 초반 전략이 완전히 산산조각 나버렸다. 북로군이 귀주성을 점령한 후 남하해야 했지만 귀주성에서 4개월간 발이 묶이면서 더이상의 진격이 힘들었고 남로군은 동선역 전투에서 패배하며 개성 점령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전투 이후 고려군몽골군의 전투방식이 바뀌게 된다. [9] 고려군은 몽골군이 공성전을 할 시 성문을 열고 기습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효과가 좋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교범으로 삼았고 몽골군은 고려에 침입할 때 공성전에 대한 대비를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드라마 무신 21화에 이 전투가 등장한다.
김경손이 주된 인물로 나오는 만화 살례탑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다만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묘사가 이어진다.

[1] 강화 회담이 1월 16일에 이뤄졌으니 16일 이후인 20일 ~ 25일 사이에 종료가 된 듯 보인다.[2] 당시 몽골은 금나라 침공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고, 명목상 금나라의 신하국인 고려가 자신들의 후방을 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조치가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당연히 고려에게 "야 너 금나라 돕지마!"라고 하면 들어줄리가 만무하니 소수의 병력을 보내 협박을 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몽골의 주력도 아닌 3만의 병력이 고려왕의 항복을 이끌어내는 예상치도 못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다만 토크멘터리 전쟁사에 따르면 이때 침공한 몽골의 병력이 주력군인지 아닌지는 현재도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대목이라고 한다.[3] 점령지에 황제의 대리로 통치할 수있는 권한이 있는 직책.[4] 참고로 전황도에서 고려와 몽골의 공격로 표기색이 정 반대로 되어 있다.[5] 기록에 따르면 이때 사용된 기름이 '''사람기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은 "사람 기름은 물로 안 되고 진흙이 있어야 꺼지니 장수된 자는 기억하라"라고 했는데 물로 쉽게 안꺼졌다는 기록을 봐서 인화점 발화점 끓는점 등이 비교적 높고 안정한 같은 일반적인 동물성 유지류가 아닌 몽골이 이미 정복을 하며 돌아다녔던 콰레즘이나 페르시아 등지에서 얻은 석유를 이용한 방화무기일 수도 있다. 특히나 빠른 속공과 공포를 강력한 무기로 삼았던 몽골군이니만큼 이런 화염무기를 '사람기름'이라는 식으로 포장해 방어측의 사기를 꺾으려든 게 아닌가 추정된다.[6] 고려사에 "큰 칼날이 장착된 거대한 무기"라고 나온다. 파성추의 수성용 버전으로 보이는데, 운제 같은 공성병기를 쳐서 쓰러뜨리는 것이 주 목적으로 보인다. 공성탑이나 운제 같은 병기는 쓰러지면 그대로 재활용이 불가능해지며, 잔해가 공성군의 공격을 방해할 수도 있다.[7] 이 말을 한 장수의 나이가 대략 70여 세쯤 되었다고 한다. 이정도면 칭기즈 칸을 따라 몽골 통일을 필두로 서하, , 호라즘 제국을 물론 심지어 러시아까지 갔을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온갖 기상천외한 것들을 겪었을 베테랑이었지만 이런 말을 했을 정도니 가히 귀주성의 방어력이란 엄청났던 듯.[8] 이 점에서 임용한은 김경손을 높게 평가한다. 고려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일가에 소속된 인물로 최씨 일가와 함께 후방에서 떵떵거리며 지낼수 있었으나, 김경손은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려 했기 때문.[9] 이 말은 좀 어폐가 있는 게 전통적인 수성전은 원래 성에 틀어박혀서 수비만 하는 게 아니라 적을 압박하고 빨리 지치게 하기 위해 별동대를 내보내 찌르는 게 기본 교리다. 정확히 말하면 고려 수뇌부가 전면전을 포기하고 전투지침을 해도입보를 통한 지구전으로 바꿔서 이런 전투양상이 많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