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대(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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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원대(李元大)[2]
이명
공문덕(孔文德), 마덕산(馬德山)
본관
경주 이씨
자 / 호
달문(達文) / 덕산(德山)
생몰년도
1911년 12월 29일 ~ 1943년 6월 17일
출생지
경상북도 신녕군 지곡면 운산동
(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운산마을)[3]#
사망지
중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3. 참고 자료


1. 개요


이원대는 일제강점기에 독립군 및 공작원 등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2. 생애


1911년 12월 29일, 이원대는 경상북도 신녕군 지곡면 운산동(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동 운산마을)에서 아버지 이중호(李重鎬)와 어머니 정오동(鄭梧桐)의 5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정의롭고 외골수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런 성품을 갖고 있었던 만큼 성인이 되자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마음먹고, 친한 사이인 안병철의 권유로 1933년 8월에 중국으로 간다.
여기서 안병철은 중국에서 조선혁명군 간부 1기로 졸업한 인물인데 동기로 이육사가 있었다. 그는 2기 학생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잠입한 의열단 공작원이었기에 정의롭고 의협심이 넘치는 이원대를 보고 적임자라고 판단했던 것.
이렇게 의열단과 중국이 협력하여 세운 간부학교에 들어가 6개월동안 군사학, 철학, 정치학 등을 배운다. 그 후 김구의 부탁을 받고 졸업을 앞둔 채로 14명의 동기와 한인 특별반에 입교한다. 한인특별반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획했던 단체였다.
한인특별반까지 마친 이원대는 특파공작원이 되어 난징과 상하이 등지에 중국과 협력하여 정탐, 암살, 시설파괴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김원봉이 개편된 조선의용대에 청년장교들을 편성할 때 이원대도 초급장교로 거기에 포함되어 한중 연합작전을 전개하는 데 참여한다.
이원대는 50여 차례의 전투를 겪는다. 1942년에는 일본군이 팔로군을 소탕하기 위해 마전 전투를 벌였고 그는 일본군의 포위를 뚫고 역으로 포위하여 타격을 입히는 등의 공적을 세운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포로로 잡히고, 석 달동안 고문을 당한다. 전쟁통에 제대로 치료받지도 못하고 고문의 후유증 등으로 1943년 6월 17일에 순국한다.
사후 1977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3.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130~132p

[1] 1936년 1월 27일 고등형사과에서 복사한 사진인데, 소학교 졸업 사진으로 추정된다.[2] 본명은 이원대(李'原'大)이다. 元大는 호적명.[3] 경주 이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