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일제강점기의 시인
이육사
李陸史 | Lee Yuk-sa '''
'''본명'''
이원록(李源祿)
'''본관'''
진성 이씨
'''출생'''
1904년 5월 18일 (음력 4월 4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1]
'''사망'''
1944년 1월 16일 (향년 39세)
중화민국 허베이성 베이핑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관 교도소
'''학력'''
중국대학[2] 상과 2년 중퇴
'''직업'''
독립운동가, 시인
'''가족'''
이가호(부), 허길(모)
안일양 여사(배우자)[3], 이원기(형), 이원일(동생)
이원조(동생), 이원창(동생), 이원홍(동생)
이동윤(장남), 이경영(장녀), 이옥비(차녀)[4], 이동박(양차자)
'''조직'''
의열단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작품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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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육사(李陸史, 1904년 5월 18일 ~ 1944년 1월 16일)는 대한민국독립운동가,[5] 시인이다. 호는 육사(陸史)이다. 본명은 이원록(源祿) 또는 이원삼(源三), 이활(活)이며 후에 이육사로 이름을 개명했다. 윤동주, 한용운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으로 유명하다.

2. 생애


1904년 5월 18일[6]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881번지에서 진성 이씨 이가호(李家鎬, 퇴계 이황의 13대손)와 허형(許蘅)[7]의 딸인 허길(許吉)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이원록(李源祿), 두 번째 이름이 이원삼(李源三), 또 다른 이름은 활(活)이며 자는 태경(台卿). 경상북도 영천군 화북면 오동리(梧洞里) 사람 안용락(安庸洛)의 딸 안일양(安一陽)과 결혼하였다[8]연보.
이육사의 딸인 이옥비 여사의 기억에 의하면, 외삼촌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들어간 적이 있는데 이때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한 자백으로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고. 이 일 때문에 이육사가 크게 분노해 집안에 편지하기를, 더러운 피의 일족(부인 안일양을 지칭)인 사람을 더는 받아들일수 없으니 내보내라 전했다 한다.
어린 시절 조부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별세하던 무렵 보문의숙(이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이 경험으로 그는 훗날의 창작 활동에서 한학을 배운 흔적이 보인다.[9] 졸업 후 19살 때 영천군의 사립 백학학원(白鶴學院)의 교원으로 9개월간 근무하였고 1924년 4월 일본 도쿄에 유학하여 킨죠(錦城) 예비학교를 1년간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1925년 8월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하여 중국대학(中國大學)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중퇴하였다#.
19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 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인 '''264'''에서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이육사의 이름은 여기에서 시작된 셈.[10][11][12]
출옥 후 1929년 5월부터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1여년간 근무하였는데, 그 사이 1930년 1월 3일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詩)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한다. 이때 후에 교보생명을 창업하게 되는 신용호에게도 영향을 미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고, 나아가 교육보험사업에 설립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13]
1931년 8월에는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전직하였으나 1932년 3월 퇴사하였다. 같은 해 4월 만주국 펑톈으로 가서 의열단 핵심단원 윤세주를 만나 의열단 입단을 권유받고 곧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14]에 1기로 입교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폭탄·탄약·뇌관 등의 제조법과 투척법 그리고 피신법·변장법·무기운반법 등을 배웠으며 권총 사격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전한다.
[image]
1934년 6월 20일, 의열단 관련자로 투옥되었을 때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1933년 4월 학교 졸업 후 7월경 귀국하여,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했다.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1934년 3월 의열단 관련자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자라는 이유로 검거#,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7월에야 기소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2.
1937년 윤곤강(尹崑崗) ·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가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 둘째동생 이원창과 함께 의열단에서 활동했던 이병희가 그의 유해를 수습하여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고, 1960년 안동시에 이장됐다. 1968년에는 안동시에 그의 시비가 건립됐다. 2004년에 이육사 문학관이 세워졌고, 안동시에서는 안동 강변도로를 "이육사로"로 개칭했다. 강변 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시인의 대표 시인 청포도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경력이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으로(옥살이만 17번) 채워진 덕분인지 그는 윤동주와 함께 '저항시인'으로서 평가받게 되었으며 실제로 1943년부터는 한글 사용에 대해 탄압을 가해오자 한시만 쓰는 식으로 붓을 꺾지 않으면서도 저항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게다가 두 시인 모두 해방을 목전에 두고 옥사). 하지만 현재 윤동주는 서훈이 3급이고 이육사는 서훈이 4급이다. 이로 인해 많은이들이 보훈처에 정정을 요구 하였으나 보훈처에서는 안된다는 말만 있어 왔다. 아무래도 윤동주는 문단에서 힘깨나 쓰는 분들과 엮일 일이 없었으므로 거부감이 적었으나, 이육사는 문단에서 숨기고 싶은 일들이 많은 분들과 엮여왔기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면 불편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동생부터 남로당계 고위인사라 북한 사회주의 정권과의 연결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것도 문제.
전체적으로 그의 시를 평가하자면 윤동주가 부끄러움과 반성, 기독교적 희생을 주로 다루고 있다면 이육사는 남성적이면서도 목가적인, 그리고 극한에 서서도 굴하지 않는 의지를 표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육사의 시가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해서 수능에 나오면 난이도가 쉽다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딱 쉬운 난이도의 해석으로만 유도하는 고교 교육과정까지만 통하는 소리다. 이육사의 시는 상징적인 시어가 많아 의미 자체를 해석하기 어려워 이육사의 시 앞에서는 자동으로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말까지 있다.
오늘날 교과서에서 저항시인의 대표주자로 배우고, 또 그의 작품이 종종 교과서에 실리는 만큼 단순히 '저항시인'으로만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로 이육사 시인은 '저항시인'이라는 타이틀이 작아 보일 정도로 평생을 정말 초인적인 삶을 살았다. 이미 20대 초반 무렵무터 각종 독립 운동에 연관되어 감옥살이를 했으며, 만주까지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했고 조선 독립군이 사용할 무기 반입 계획에 몸소 참여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마흔 남짓한 짧은 인생이었지만 위대하게 불타오른 애국지사의 표상.
일제 강점기를 거쳐 갔던 수많은 문인들 중 가장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애국, 독립 운동을 한 애국지사라고 할 수 있다. '''39여년의 인생동안 옥살이만 17번'''을 했다는 사실이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그의 삶을 대변한다. 일제 강점기에 변절을 했던 문인들이 독립 이후 온갖 문화 권력을 누리며 살아간 것을 생각하면.....
동생인 이원조는 좌파 문인으로 활약하다 해방 후에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한다. 물론 박헌영과 더불어 숙청되는데, 여러 이설이 있지만 1955년경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옥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육사도 동생이나 의열단장 김원봉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해방 이후까지 살았으면 월북했을 가능성이 높아 말로가 편치 않을 듯. 이육사 생전에 작품집이 발간된 적은 없었고, 이원조가 광복 후 1946년에 형의 작품집을 발간한다.
1990년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3. 기타


도산서원 근처에 있는 이육사문학관에 가면 이육사의 딸인 이옥비(1941년~)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운이 좋아야 한다. 문학관 뒤편에 사신다. 2013년 11월 3일 안동대학교 선비캠프에서 도산서원 방문 뒤인 다음날 이육사문학관 관람과 더불어 이분을 만나서 인생 및 이육사의 딸이라는 위치 등등 여러 이야기를 강연하셨다. 2007년부터 이육사문학관 근처에 있는 목재고택에서 사시면서 문학관에 왕래 하신다[15]
1980년대 TV 문학관 KBS 특집극 저항 문인 시리즈 3부작[16]에서 방영된바 있다. 용의 눈물에서 정도전을 열연한 김흥기의 투사적인 열연이 돋보이는 작품.
2011년, 8.15를 맞이하여 이 분을 소재로 한 특집극이 방영되었다. 제목은 "절정". 주연은 김동완. 배우들의 호연과 세련된 연출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나름 캐스팅이 화려 한데 이육사엔 김동완,그의 할아버지엔 오현경 어머니는 고두심이 부인 안일양엔 서현진 의열단 동지인 윤세주엔 이승효, 강문석역엔 박성웅 친일경찰엔 엄효섭,그리고 극중에 의열단장 약산김원봉도 등장한다. 세련된 연출과 호연으로 휴스턴 영화제 특집극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동대구로의 궁전맨션에 이육사의 벽화가 서상돈, 이상화의 벽화와 함께 그려져 있다.
[image]
동생인 이원일, 친구인 조규인과 함께 찍은 20대의 이육사(우측)의 사진
2019년 2월 26일 이육사 선생의 새로운 사진과 친필이 적힌 사진이 발견돼 처음으로 공개됐다 .
2019년 6월 18일자 한국일보 기사에 의하면, 이육사 선생은 대나무로 살점을 떼내는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링크

2020년 12월 15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검찰과의 마찰로 물의를 빚던 와중에 그의 시 <절정>을 언급했지만, 도리어 "훌륭한 시인과 그의 명작을 모욕하지 마라"는 빈축만 샀다.

4. 작품


이육사의 시는 독립운동 지사로서의 강한 의지를 담은 시들이 많지만,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느끼던 인간적인 고뇌를 담은 시들도 존재한다. 대표 시로는 <황혼>, <절정>, <광야>, <청포도>, <꽃>, <교목>이 있다.


'''강 건너간 노래'''[17]
이육사

섣달에도 보름께 달 밝은 밤
앞내강 쨍쨍 얼어 조이던 밤에
내가 부른 노래는 강 건너갔소
강 건너 하늘 끝에 사막도 닿은 곳
내 노래는 제비처럼 날아서 갔소
못 잊을 계집애 집조차 없다기에
가기는 갔지만 어린 날개 지치면
그만 어느 모래불[18]에 떨어져 타서 죽겠죠
사막은 끝없이 푸른 하늘이 덮여
눈물 먹은 별들이 조상 오는 밤
밤은 옛일을 무지개보다 곱게 짜내나니
한 가락을 여기 두고 또 한 가락 어디멘가
내가 부른 노래는 그 밤에 강 건너갔소.


'''자야곡 '''[19]
이육사

수만호 빛이라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쟎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날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저려
바람 불고 눈보라 치쟎으면 못살이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취 소리
숨 막힐 마음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맘에 들리라
수만호 빛이라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쟎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절정 '''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꽃'''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한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 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5. 관련 문서


[1] 인근의 의촌리, 토계리, 단천리, 온혜리와 함께 진성 이씨 집성촌이다.[2] 베이징대학과 다른 학교로, 1913년 쑨원에 의해 세워졌고 1949년 폐교되었다.#[3]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 잠깐 언급되었다.[4] 선을 넘는 녀석들에도 출연했다.[5] 의열단원.[6] 음력 4월 4일[7] 구한말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반발해 거의한 13도 창의군(정미의병)의 의병장 허위의 사촌형이다.[8] 충남지사와 국회의원을 지낸 심대평의 처 안명옥과 안일양은 사촌지간이라고 한다.위키백과 심대평[9] <청포도>에서 마지막 연에서 '아이야'라는 구절과 같은 것 등을 비롯하여 그의 시 대부분이 한시의 기승전결 구조와 간결한 시행배열을 보이고 있다.[10] 어떤 강사가 학생들에게 이육사의 호를 쉽게 외우도록 하기 위해 지어낸 얘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있으나, 사실무근이다. 적어도 1963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에서부터 육사라는 호는 대구형무소 수인번호에서 취음한 것이라고 나오며, 1934년 의열단 관련자로 투옥되었을 당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에 본명 이활(李活)에 이명 李源三·'''陸史'''임이 병기되어 있다.[11] 본명인 이활(李活)로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그 외에도, 본디 '치욕의 역사를 도륙낸다', '현재의 역사(일제강점기 시대였으니...)를 찢어죽이겠다'라는 의미에서 호를 '육시할 육'자에 '역사 사'자를 써 육사(戮史)로 하려 했으나 호가 매우 거칠고 사나우며 너무 노골적이라는 집안어른 이영우의 권고로 육자를 '뭍 륙'자로 고친, 즉 육사(陸史)로 순화했다고 한다. 이렇게 전해지는 이육사 시인의 필명이나 호 등은 육사(陸史), 육사(戮史), 육사(肉瀉),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라고 한다.[12] 서술 근거가 된 자료는 아래와 같다. "육사 이름, 六四→戮史→肉瀉→陸史로 변천" - 오마이뉴스, 2004년 7월 31일, 항일시인 ‘육사’ 六四→戮史→肉瀉→陸史로 - 동아일보, 2004년 8월 1일, 가족 이야기- 시인 이육사의 딸 李沃非 - 조선일보, 2015년 1월 2일, 《이육사의 육사시집》 구글 도서검색 결과, 한국어 위키백과 '이육사' 문서[13] 다만 이는 교보생명에서 발표한 내용으로서, 추가적인 검증이 필요하다.출처[14] 정식 명칭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6대[15] 원래 이육사 슬하에 자녀는 1남 1녀이나 아들은 일찍 요절해 조카인 이동박을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다[16] 1부는 이상화 편으로 백윤식이 열연했고 2부는 윤동주 편으로 송승환이 열연했다.[17] 2018 수능에 출제되었는데 교과서나 EBS 연계교재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던''' 작품이다. 다만 교육청 모의고사에는 등장한 전적이 있다.[18] 모래 언덕[19] '자(子)'는 자시 즉 밤 11시~1시라는 시간을 의미하고, '야(夜)' 역시 밤이라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곡(曲)'은 노래를 의미하므로 '자야곡'은 '한밤중에 부른 노래'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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