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성(조선)

 


'''李宗城'''
생몰년: 숙종 18년(1692) - 영조 35년(1759)
1. 개요
2. 활동 내역


1. 개요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천(梧川)이다. 백사 이항복(恒福)의 5세손으로 이태좌(李台佐)의 아들이며 이광좌는 이종성의 재당숙(7촌숙부)이다.

2. 활동 내역


소론의 대신으로 좌의정을 역임하고 영조 28년(1752) 영의정이 되었지만 이듬해(1753)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적이던 김상로 등의 간계로 영의정을 사직했다. 영조 34년(1758) 영중추부사가 되어 장헌세자를 잘 보살폈다. 이후 장조(莊祖)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야사로 왕통이 어지럽혀질 뻔한 일을 막은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평소 알고 지내던 궁궐 수문장 손호관에게 "어느 노비가 보자기로 싼 음식 바구니를 들고 올텐데 이유를 불문하고 그 바구니를 칼로 베어 버려라"라고 엄히 명했다.
그의 말대로 한 여자 노비가 바구니를 가져오자 수문장은 단칼에 베어버렸는데, 그 안에는 한 갓난아기가 죽어 있었다. 알고 보니 궁 안의 한 후궁[1]이 자신이 왕의 아들을 임신한 척하고 바깥에서 아기를 데려와서 왕자로 삼기 위해 음모를 꾸몄는데, 이를 이종성이 알고 막은 것이다. 이에 사람들은 그의 혜안에 감탄했다고 한다. 결국 그로 인해 문씨 일족은 모두 멸족되었으며, 평소 문씨 일가의 행실을 알고 멀리 했던 문김 생원만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수문장 손호관과 관련된 다른 야사도 있다. 하루는 이종성이 평복 차림으로 강에서 낚시를 하는데 우연히 기골이 장대하고 대범한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무과에는 급제했으나 오랫동안 벼슬을 하지 못해 서울로 올라와서 벼슬을 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종성은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저동(苧洞) 사는 이 중추부사가 사람에게 공정하다고 하니 그에게 부탁하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이는 주저하다가 혹시나 해서 이종성이 알려준 집으로 가서 중추부사를 만났는데, 알고보니 중추부사 대감이 바로 이종성이었다. 무례를 범했다며 용서를 구하자 이종성은 오히려 젊은이가 마음에 들어서 이리 한 것이라며 그를 궁의 수문장으로 일하게 했다고 한다.
[1] 아마도 당시 전횡이 심했던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인 듯 하다. 문씨가 외부에서 남아를 데려와 사도세자와 정조를 대체할 왕자로 내세우려 했다는 야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