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의 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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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영조의 후궁으로 주로 문녀(文女)라고 불린다. 슬하에 화령옹주와 화길옹주가 있다.
2. 생애
2.1. 궁녀에서 후궁으로
문씨는 본래 영조의 서장남 효장세자의 부인 현빈 조씨를 모시는 궁녀였다. 그런데 현빈 조씨의 장례를 치를 때, 영조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영조는 현빈 조씨가 지내던 창경궁 건극당 아래의 고서헌이라는 전각을 문씨에게 주어 살게 했다고 한다. 아끼던 며느리의 상중에 궁녀에게 승은을 내리는 건 누가봐도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이 아니였지만, 영조는 한번 총애하기 시작한 사람에겐 물불 가리지 않고 특혜를 주었던 듯 하다.[3]영조의 맏아드님이신 효장세자의 부인 현빈궁이 죽었는데, 영조께서 효부를 잃으시고 애통하시어 상례에 친히 납시어 곡진히 정성을 다하시니라. 그런데 그곳에 소위 문녀(文女)라는 시녀내인이 있으니, 별감 문성국의 동생이라.
《한중록》[2]
그러나 영조가 문씨를 정4품 소원으로 책봉할 때 승지 윤광의가 어명을 받들지 않자 다른 승지를 시킨 일이나[4] , "그 남매가(문씨와 그녀의 오빠 문성국) 아들을 못 낳아도 다른 자식이라도 들여서 아들을 낳았노라 하려 한다"거나, "그 어미는 중이 되었다가 딸의 해산에 환속하여 들어왔다" 하는 괴이한 말이 낭자하였는데, 이러한 소문은 그만큼 당시에 문씨가 논란의 중심이었던 걸 반증한다.
2.2. 영조와 사도세자의 불화를 부추기다
당시 사도세자는 10대 후반이였는데 아버지가 형수의 장례식 중에 젊은 궁녀를 후궁으로 들이는 걸 좋게 생각했을 리도 없거니와[5][6] 이에 대한 문씨의 처신도 올바르지 않았다.
《한중록》에 따르면 문씨의 오빠 문성국은 사도세자의 처소인 동궁전의 별감들과 내통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문에 동궁전의 별감들은 사도세자의 자잘한 일들을 듣는 족족 문씨에게 알려주었고, 문씨는 그 이야기를 그대로 영조한테 일러바치며 부자간의 사이를 악화시켰다.
또한, 정조는 즉위한 다음에 "옛날 창경궁 낙선당에서 일어난 화재 원인도 문성국 때문"이라고 말했다.[7] 이 창경궁 낙선당에서 일어난 화재란 과거에 낙선당에 화재가 일어났는데 영조는 이 일이 사도세자의 잘못 때문이라고 크게 꾸중했고,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사도세자는 울분이 폭발해 저승전 앞뜰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 시도까지 한 적이 있었다. 즉, 이러한 정조의 언급은 문씨와 문성국이 사도세자에게 누명을 씌우고 그를 죽이기 위해 일부러 화재를 일으켰다는 의미다.영조께서 모르실 때도 의심하셨는데 날마다 들으시니 불쾌하신 마음에 부자 사이는 갈수록 갑갑해지니라.
《한중록》
심지어 문씨는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에게 대들었다가 이에 분노한 대왕대비인 인원왕후에게 회초리를 맞은 전력도 있었다. 그것도 사도세자가 보는 앞에서 말이다. 제아무리 문씨가 영조의 총애를 받고있었다고 해도 그녀의 행동은 예법상으로도 무례했고 내명부의 법도를 무시하는 짓이었다.[8] 이에 인원왕후가 왕실의 어른으로서 나선 일이었다.[9][10]
심지어 "사가에서 몰래 사내아이를 들여와 왕자라고 속이려 했으나, 영의정 이종성에게 발각되어 무산되었다"는 야사도 있다.
2.3. 몰락
이처럼 문씨 남매는 영조의 살아생전에는 대놓고 세자를 모함할 정도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영조가 승하하자 말 그대로 화무십일홍의 처지에 쳐했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즉시 문씨가 그동안 저질러온 죄악에 대해 포고했고, 그로 인해 문씨의 일가친척은 하루아침에 죄인으로 전락해 다같이 고초를 겪어야 했다. 문씨 본인은 사도세자를 무고했다는 혐의로 유배당한 뒤 끝내 사약을 받아 사망했다.[11] 문씨의 어머니는 제주도의 관노비가 되었고, 오빠 문성국도 노적(孥籍)[12] 에 오르고 가산을 적몰당했다. 문성국의 아들 문경행(즉, 문씨의 조카)은 유배, 나중에 성 안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가 발견된 문성국의 처남 박도오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문씨의 장녀 화령옹주의 남편 청성위 심능건은 문씨의 집을 마음대로 처분했다고 처벌을 받았고[13] , 5년 전 일찍 요절한 화길옹주의 장례에 10만 냥이나 지출한 일도 화두에 올랐다.
아예 문씨의 두 딸 화령옹주와 화길옹주의 작위를 박탈해야 한다는 상소까지 올라왔지만, 정조는 "두 옹주는 영조의 골육이며, 문씨가 흉계를 꾸밀 때는 강보에 싸인 아기였을 뿐"이라며 감싸주었다.[14] 덕분에 문씨의 자식인 화령옹주는 순조 대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화유옹주가 사망하자 "선조의 옹주 가운데 궁중을 출입한 사람은 단지 이 옹주 하나 뿐이었는데" 라고 말한 바 있다.[15] 이를 토대로 봤을 때 아마도 화령옹주는 살아남긴 했으나 궁궐에 출입조차 못하고 왕녀로서 제대로 된 예우는 받지 못한 듯 하다.
3. 평가
인조의 후궁이였던 귀인 조씨와 행적이 매우 닮았다. 자신의 뒷배가 되어주던 국왕이 승하하자마자 과거에 저지른 악행이 밝혀지고, 본인은 사약을 받고 처형당했으며, 본인의 자식들도 연좌제로 인해 작위를 빼앗길 뻔했던 게 똑같다.
다만 이에 대해 문씨를 일종의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해석도 있다. 문씨의 행적이 영 좋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사도세자를 참소했다는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임오화변 문서에 나오듯이,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은 일개 후궁이나 신하가 거짓으로 모함하는 수준으로는 절대 생길 수 없었다. 후대의 학자들도 이 사건의 근본은 사도세자와 영조 두 사람에게 있다는 게 정설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조가 즉위할 당시엔 임오화변이란 거대한 사건의 후폭풍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고, 사소한 희생양을 만들어서라도 왕실과 조정 내의 혼란을 무마시켜야만 했다. 노론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던 정조는 노론 주류와 큰 연관이 없는 문씨를 공격함으로서 그들을 안심시켜야 했고, 노론 입장에서도 문씨가 죄를 뒤집어쓰는 것이 임오화변의 책임에서 벗어나는데 더욱 유리했다. 게다가 선왕의 일개 후궁에 불과한 문씨에겐 마땅한 권력과 지지세력도 없었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정조와 조정 전체가 문씨를 임오화변의 범인으로 몰아간 것. 같은 예로 김상로가 있다. 그는 영조가 문씨 남매와 함께 사도세자를 모함한 인물이라며 언급한 사람이다. 그런데 정작 김상로는 이전부터 사도세자를 옹호했으며, 임오화변 당시에는 이 문제로 인해 파직당한 상태였다. 그리고 정조가 즉위했을 때는 이미 김상로는 사망했으므로 관작을 추탈하고 가족들을 유배형에 처하는 것으로 끝났다. 김상로가 한 때의 노론의 영수이긴 했지만 이 과정에서 김상로 집안을 제외한 다른 노론 인사들의 처벌은 없었다.
결론을 내리면 숙의 문씨와 김상로를 희생양으로 삼은 대가로 정조와 노론은 임오화변의 원한을 끝내고 상호협력할 수 있게된 것.
4. 자녀
- 남편 : 제21대 영조(英祖, 1694년 ~ 1776년, 재위 : 1724년 ~ 1776년)
5. 창작물에서
- 조선왕조 오백년 - 김혜선. 김혜선이 본격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작품이다. 여기에서는 사실상 영조를 꼬드겨서 좌지우지하는가 하면 자신과 같은 시기에 임신을 한 다른 산모의 사내 아이를 궁궐 안으로 몰래 들여와 자신이 왕자를 낳은 것 처럼 조작하려다가 실패하는 이야기도 나온다[16]
- 대왕의 길 - 윤손하. 윤손하의 사극 데뷔작이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궁녀로 들어간다. 역사대로 현빈 조씨 궁에서 침방 나인을 한다. 꾀가 많아서 나인 시절부터 상궁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17]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수상한 기운을 느끼고 한량인 자기 오라버니에게 돈을 쥐어 주고 궁궐 별감들과 어울리라고 이야기하며 정보 수집에 애를 쓴다. 현빈 조씨가 사망하자 찾아온 영조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는다.[18]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된 후로 계속 영조의 총애를 입었고,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를 이간질한다. 바라던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둘 낳자 외부에서 남의 사내 아기를 몰래 데려 오려고 한다. 결국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고, 뒤주에 못이 많이 박혀 뽑느라 장례에 차질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듣자, "못 뽑는 수고는 왜 하누? 뒤주채 묻으라지."라는 희대의 명대사를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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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 출신으로 영조의 승은을 입고 회임을 한다. 영조의 총애가 대단해서 위세가 대단하다. 정성왕후의 환갑에 대해 영조가 별 말이 없자, 이에 대해 영조를 두둔하는척 하며 영빈 이씨를 나무랐다가 인원왕후에게 회초리를 맞는다. 그런데 그걸 안 영조가 등판해서 후궁 하나 제 맘대로 못한다고 양위 선언을 해 버렸고, 그걸 또 인원왕후가 "윤허하오~"하고 쿨하게 받아들여서(...) 한바탕 난리가 난다. 나중에 딸을 출산하면서[19] 영조의 총애도 사라지고 기세등등하던 위세도 꺾인다.[20]##
궁녀 출신으로 영조의 승은을 입고 회임을 한다. 영조의 총애가 대단해서 위세가 대단하다. 정성왕후의 환갑에 대해 영조가 별 말이 없자, 이에 대해 영조를 두둔하는척 하며 영빈 이씨를 나무랐다가 인원왕후에게 회초리를 맞는다. 그런데 그걸 안 영조가 등판해서 후궁 하나 제 맘대로 못한다고 양위 선언을 해 버렸고, 그걸 또 인원왕후가 "윤허하오~"하고 쿨하게 받아들여서(...) 한바탕 난리가 난다. 나중에 딸을 출산하면서[19] 영조의 총애도 사라지고 기세등등하던 위세도 꺾인다.[20]##
[1] 이 해에 정조가 즉위하면서 문씨의 작호를 삭탈하고 폐출했다. [2] 혜경궁 홍씨, 정병설 편역, 『한중록』, 문학동네, 2010. [3] 영조는 지난날 왕대비였던 선의왕후의 상중에도 영빈 이씨를 봉작한 전례가 있다. 다만 이건 선의왕후가 기록에도 남을 정도로 영조와의 관계가 험악했던 탓도 있지만.[4] 영조실록 79권, 영조 29년 2월 8일 갑오 4번째기사. # [5] 영조는 손자인 정조가 상중에 태어났다는 이유로(정조는 친형 의소세손가 사망하고 6달 반 후에 태어났다.)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처럼 총애하지 않았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 트집인 것이 의소세손의 상중에 정조가 태어났다는 말은 수정된 시점, 즉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합궁이 그보다 9개월 전이었다는 소리다. 시아버지가 며느리 상중에 며느리의 시녀와 관계를 맺은 것과, 첫째가 죽기 거의 3달 전에 부부가 관계를 맺은 것 중 뭐가 더 부적절한 일이겠는가?[6] 정작 영조는 사도세자가 대비였던 인원왕후(영조의 계모, 사도세자의 할머니)의 나인인 경빈 박씨를 후궁으로 들였을 때 화낸 걸 생각하면, 정말 영조는 자기 기준으로만 자식들을 차별하거나 편애하는 사람이었다.[7]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 5월 13일 계미 2번째기사. # [8] 영빈 이씨는 문씨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품계도 높은 데다가, 세자의 생모인지라 입지가 전혀 다르다.[9] 다만 인원왕후는 경종에 대해서는 왕실의 어른으로서가 아닌 영조를 돕기 위해 간접적으로 노론의 편을 들었다. 이는 경종이 자신이 아닌 선대 왕비인 인현왕후의 자녀로 입적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10] 영빈 이씨에게 대들어 회초리를 맞았다는 이야기는 《대천록》에서 나온다. [11] 이때 당시의 실록을 보면 조정의 중론은 거의 대부분 문씨를 하루라도 빨리 사형시켜야 된다는 쪽에 있었다. 즉, 문씨의 편은 단하나도 없었던 것.[12] 모역, 반역 등의 중죄에 대해 죄인은 극형에 처하고, 그 처자도 연좌시켜 노비의 적에 올리고 재산은 몰수하는 처벌을 말한다.[13] 정조실록 11권, 정조 5년 윤5월 25일 정묘 1번째기사. # [14]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 5월 14일 갑신 1번째기사. # [15] 정조실록 3권, 정조 1년 5월 21일 을유 1번째기사. # [16] 실제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이며, 드라마 최초 방영 전에 연재된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17] 처치 곤란한 오라버니의 비단을 잘 처분해 주었다.[18] 이때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이야기를 적절히 이용한다. 빈소에서 바느질을 하다가 갑자기 영조가 들이닥쳤고 바느길감을 감추면서 손도 감췄다. 영조가 뭘 감췄냐고 묻자 부끄러움을 숨겼다고 하니 영조가 무엇이 부끄럽냐고 물으니 "거친 손, 곱지 못한 손이 부끄러워 숨겼을 뿐"이라고 답한다. 드라마 상에서 숙빈 최씨가 어릴 적부터 고생을 많이 해서 손이 못 생긴 걸로 나오고 영조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무척 큰데 이걸 이용한 것이다.[19] 영조가 사도세자를 나무랄 때 "아들이 하나만 더 있었더라면..."하는 장면이 있다. 혹 아들이 태어났다면 세자 등극까지는 어렵겠지만, 광해군 - 영창대군의 관계처럼, 최소한의 견제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미 영조에게 단단히 밉보여 정신적 학대를 받고 있던 사도세자 입장에서는 이복동생에게 편애가 쏠려서 마음고생을 더 했으면 더 했지 별 도움은 안 됐을 가능성이 높다.[20] KBS의 단막극인 드라마 붉은 달에서는 화완옹주 역을 맡은 적이 있다. 영조 입장에서는 후궁에서 딸이 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