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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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세자. 휘는 이선(李愃). 자는 윤관(允寬). 영조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이다. 정실 아내는 혜경궁 홍씨(헌경의황후)이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정조를 낳았다. '''현대에선 아버지와 오랜 갈등 끝에 만 27세의 젊은 나이로 7월의 땡볕 더위에 쌀 담는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 (아마도 탈수로) 죽은 것(임오화변)으로 유명하다.''' 영조가 늦은 나이(42살)에 얻은 아들로, 좋게 봐주자면 영조의 기대가 너무 커서, 나쁘게(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감내하기 힘들 정도의 갈굼으로, 정신병을 얻어 기행과 비행을 일삼다가 결국 고통스럽게 죽었다.
원래 영조가 내린 시호는 사도(思悼) 단 두 글자였다. 그러나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장헌(莊獻)'을 존호로 올려 '사도장헌세자'가 되었고, 정조 7년(1783)에는 존호가 추가되어 '사도수덕돈경장헌세자'가 되었으며, 정조 8년(1784) 홍인경지(弘仁景祉), 다시 정조 18년(1794) 장륜융범기명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를 올렸고, 한참 뒤인 철종[5] 5년(1854) 찬원헌성계상현희(贊元憲誠啓祥顯熙)를 더함으로써 최종적인 정식 시호가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륜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로 길어졌다. 간혹 '장헌세자가 죽어서 '사도세자'라는 칭호를 얻었다'라는 말이 돌곤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장헌(莊獻)과 사도(思悼) 둘 다 죽은 뒤에 붙은 시호이기 때문에 둘 중 어느 것을 써도 틀리지 않다.
고종 때 4대조인 양고조부로서 묘호가 '조(祖)'로 격상되고 황제로 재추존됐다. 고종은 1863년 음력 12월에 즉위한 뒤에 사도장헌세자를 장종 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莊宗 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으로 추존했고, 대한제국이 수립된 후에는 '장조 의황제(莊祖 懿皇帝)'의 높은 시호로 황제로서 재추존했다.
조선 후기의 임금들(정순헌철고순) 중 고종과 순종을 제외하고는(이 둘도 법적으로는 사도세자의 후손이다.) 모두 사도세자의 핏줄(혈족)이다. '''사도세자''' - 정조 - 순조 - 효명세자 - 헌종이 한 줄기, '''사도세자''' - 은언군 - 전계대원군 - 철종이 한 줄기. 고종은 인조에서 갈라져나온 줄기로 전 왕인 철종과는 무려 핏줄로 17촌(거의 남남)이다. 정리하자면 철종 이변 - 전계대원군 이광 - 은언군 이인 - 사도세자 이선 - 영조 이금 - 숙종 이순 - 현종 이연 - 효종 이호 - 인조 이종(공통 조상) - 인평대군 이요 - 복녕군 이욱 (혹은 이유) - 의원군 이혁 - 안흥군 이숙 - 진사 이진익 - 이병원 - 남연군 이구(군으로 봉작 후 이채중에서 개명) - 흥선대원군 이하응 - 고종 이형 이렇게 된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후에 장조(莊祖)로 추존되는 사도세자 이선은 1735년(영조 11년) 음력 1월 21일, 영조와 후궁 영빈 이씨 사이의 막내아들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영조는 장남 효장세자를 7년 전에 안타깝게 잃고 다른 아들을 두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42세''' 고령에 어렵게 얻은 늦둥이 왕자의 탄생[6] 을 당연히 매우 기뻐했다.[7]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즉시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법적아들)로 공식 입적한 후 원자로 정했고, 이듬해인 1736년에는 '''이제 막 돌이 지난 원자를 왕세자로 정식 책봉한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얼마나 아꼈는지 세자가 읽을 책을 임금인 자신이 직접 꼬박 밤 새 가면서 필사(筆寫)할 정도였다. 성균관의 탕평비도 세자의 성균관 입학을 기념해서 특별히 제작했다고 한다.
세자 이선은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총명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태어난 지 4달만에 스스로 기었고, 6달만에 영조의 부름에 어느 정도 대답을 할 수 있었으며[8] , 7달만에 동서남북을 분간했고, 2살에 천자문을 배워 60여 자를 써내었다. 3살에 다식을 받자 수(壽) 자, 복(福) 자가 박힌 과자는 먹고 팔괘(八卦)를 박은 것은 먹지 않았다. 이에 궁녀들이 "잡수소서"라고 권하자 "팔괘는 우주의 근본이니 아니 잡숫겠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팔괘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복희를 그린 책을 보고 "높이 들라."라고 하고 절을 올렸다고 한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3살 때.''' 말하자면 김시습 수준의 천재급이었다.
또 같은 해에 천자문을 배우던 중에 사치 치(侈) 자와 가멸부(富) 자에 이르자 치자를 집고 다시 자신이 입은 옷을 가리키며 "이것이 사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영조가 어릴 때 쓰던 감투 중에 칠보로 장식된 것을 씌우자 "사치!"라고 거부했다. 그리고 돌 때 입은 옷을 입히려 하자 역시 "사치하여 남 부끄러워 싫다."고 거부했다. 이에 세자를 모시던 나인들이 과연 세자가 알고 말하는가 모르고 말하는가 궁금하여 비단과 무명을 놓고 "어느 것이 사치고 어느 것이 사치가 아니나이까?"라고 묻자 세자는 비단을 집어들고 "이것은 사치라."라고 하더니 무명을 집고는 "무명은 사치 아니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나인들이 "어느 것으로 옷을 지으어 입으시면 좋으리이까?"라고 묻자 무명을 가리키며 "이것을 입어야 좋으리라."라고 답하였다. 이것은 한중록에 나온 이야기지만, 영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어쨌거나 위의 기록만 보면 상당히 총명한 기질이 있었던 모양. 영조도 세자를 몹시도 귀여워하며, 대신들을 불러 어린 세자를 한번씩 안아보게도 하고 글을 쓰게 하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세자를 무척이나 총애했다고 한다.영의정 이광좌 : 신(臣)들이 어제 동궁(東宮)을 뵈었는데 어린 나이에 예모(禮貌)가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으니, 경사스럽고 다행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3세에 전하 앞에서 경서(敬書)를 강독(講讀)하고 논하는 것은 너무 이른 것을 면치 못하니, 오직 바라건대, 빨리 덕성(德性)을 함양해 온화(溫和)하고 문아(文雅)함이 날로 성취되게 하소서."
영조 : "경의 말이 옳다. 근일에 문왕장(文王章)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일찍이 명주와 무명베를 보고 사치(奢侈)와 검소(儉少)를 구분하여 무명옷 입기를 청했으니''', 매우 기특하다. 만약 잘 인도한다면 성취할 것을 바라겠으나, 나는 본래 학문이 없으니 오직 경들이 잘 이끌어주길 바랄 뿐이다." - 영조 45권, 13년(1737, 정사년 / 청 건륭(乾隆) 2년) 9월 10일(을미) 1번째 기사
하지만 영조는 이렇게 총명한 세자에게 화가 될법한 결정을 하는데,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세자를 생모 영빈 이씨와 떨어트려서''' 선의왕후 어씨(경종의 계비)가 살던 저승전(儲承殿)에 머물게 하고, 경종과 선의왕후를 받들어 모시던 궁인(소론 계열의 궁인)들로 하여금 세자의 시중을 들게 한 것이다. 저승전은 1730년 선의왕후가 죽은 후 오랫동안 비어있던 곳으로, 근처에는 '''희빈 장씨'''가 머물면서 인현왕후 민씨를 죽게 저주한 것으로 유명한 취선당(就宣堂)이 있었다. 그런데 영조는 취선당을 소주방으로 삼아 그곳에서 세자를 위한 음식을 만들게 했다. '''한중록'''에서 혜경궁 홍씨는 이것들이 세자를 망치게 된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한참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아기를 품에서 떨어트려, 불길한 곳에서 따로 키우게 했다는 것.
영조의 입장에서야 선왕을 모시던 궁인들로 하여금 세자를 모시게 하여 사도세자의 권위를 세워주고, 경종 독살설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던 모양이지만 이 궁인들은 워낙에 친(親)소론(친 경종지지세력) 성향이었고[9] , 영조의 뜻과는 다르게 동궁(東宮)에서 여러가지 크고 작은 분란을 일으켰다. 한중록에 따르면, 그들의 리더 격인 최 상궁과 한 상궁이 원흉인데,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어릴 적만 생각하고 그녀를 업신여기고 헐뜯어 이간질 시키고 세자와 멀어지게 했다는 것.
한중록만의 기록은 아닌 것이, 정조가 쓴 헌륭원(顯隆園) 지문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실제로 영빈 이씨는 출신이 미천했고, 한중록을 토대로 유추하면 6세에 궁궐에 들어와 궁녀가 되었고 숙종의 대전에서 일하다가 영조 즉위 후에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의 눈에 들어서 영조의 후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경종을 모시던 궁녀들에게 영빈 이씨는 하찮게 보였을 수도 있고, 실제로도 세자를 직접 낳은 어머니는 영빈 이씨라도, 정식 세자로서 영조의 정실 중전의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에 세자의 법적 어머니는 영조의 정실인 정성왕후 서씨가 된다."영빈이 비록 세자를 낳기는 했으나 사친(私親)이다. 신분상으로 군신(君臣)의 관계가 있으니 주상을 자주 만나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주상을 뵈올 때도 반드시 빈어(嬪御)가 정전(政殿)을 배알(拜謁)할 때 쓰는 까다로운 예절로 구제(具制)를 가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 되자 영빈은 그곳을 자주 갈 수가 없어 혹은 하루에 한 번이나 하루 걸러서, 혹은 며칠 걸러서 한번 가고 혹은 1달에 한두 번밖에 못 갈 때도 있었다. - 헌륭원 지문 中
혜경궁 홍씨는 궁인들에게 문제가 또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 궁인들이 태만해서 세자가 공부를 게을리하게 만들고, 세자에게 병정놀이를 가르쳐 놀이에만 빠지게 만들었다는 것. 실제로 동궁의 궁인들이나 세자시강원의 기강에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던 건 승정원일기에서도 나온다. 세자시강원의 조라치[10] '박금돌'이라는 자가 세자가 환궁할 때 술에 취해서 행패를 부리다가 취조를 받은 사건도 있었고, 송인명이라는 대신이 "동궁에 선량하지 않은 자나 말을 남들에게 함부로 옮기는 자가 있으면 안 되니, 궁인을 고를 때 선량한 자로 잘 골라야 하고, 궁 안의 어떤 일이든 신중을 기해야 한다." 고 충고하는 대목이 나온다. 박문수가 "세자의 나이가 어리니 내관들이 나쁜 영향을 주지 못하게 하라." 고 충고하고, 의관 김수규가 세자에게 유용목(愉用木)이라는 놀이 기구를 바쳤다가 적발되어 문책을 당한 일도 있었다.
때문에 이 사도세자의 성장 배경과 궁인들의 행적은, 이후 사도세자가 친(親)소론적인 성향을 걷게 된 이유라는 떡밥의 원인이 된다. 후술하겠지만 사실이 아니다.
2.1.1. 아버지와의 갈등
사도세자와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은 생각보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3살 때까지 영조는 세자를 매우 아끼며 하는 일마다 칭찬했지만, '''4살 때부터 슬슬 아이를 구박하고 혼내는 모습이 점점 보이기 시작한다.''' 기대가 너무 컸던 아들인지 영조는 세자를 더 엄격하게 키웠고, 세자는 이미 9살 때 영조 만나기를 두려워하며 "오늘은 날씨가 어떤가?"를 걱정해야 했다. 10살 이후로 영조의 태도는 더욱 더 혹독해지기 시작해, 칭찬의 수가 급격히 줄었다.
아들을 얼마나 정서적으로 학대하였으면, 정성왕후 서씨가 병환이 깊어지자 병 수발 들러온 세자가 정성왕후 서씨의 피 토한 그릇을 붙들고 통곡하던 와중에도 영조가 온 것을 보자마자 울던 것도 그치고 겁에 질려 방 한구석에 웅크려 벌벌 떠는 일이 있었을 정도다. 지속적으로 학대에 노출되어 아버지를 두려워한 사도세자 이선은 아는 것도 우물쭈물해서 잘 대답하지 못했고, 이에 영조는 세자를 매우 거칠게 질책과 비난을 자주 하곤 했다. 아버지를 두려워한 세자는 대답을 잘 못하고, 그런 모습에 아버지는 자꾸 갈궈대니, 악순환이 계속된 것이다.[11] 아래를 보면 알 수 있다. 생각을 말했는데 그 생각이 영조의 예상과 달랐단 이유로 구박받는 처지이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영조가 세자를 늦게 본 것도 조급증에 한몫했을 것이다. 조선 역대 임금들은 격무(激務)에 시달려 환갑을 넘기기 힘들었고, '''평균 사망 나이가 47.1세였는데 영조는 세자를 보았을 때 이미 42세였다.'''[12] 선대 왕들을 보면 이미 곧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노인이 되어버린 것이다.[13] 영조 입장에선 죽기 전에 최대한 세자를 준비시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결과적으로는 매우 장수했고, 엄격한 교육도 세자가 아들을 낳아 세손(정조 이산)을 보고도 끝이 나지 않았다. 정작 영조 본인은 자기가 그렇게 장수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세자가 영조에 대한 애정이 싹틀 리가 없다. 이 때문에 세자는 정말로 건강이 나쁘긴 했지만 이를 핑계로 영조와의 진현(進現)[14] 을 계속해서 거르게 되었다. 왕의 불효가 신하들의 쿠데타의 정당한 명분이 되는 유교 국가인 조선의 왕실에서 왕세자가 그리한 것은 큰 문제이다. 실제로 영조가 이 진현을 몇달 째 하지 않았다고 언급하자 당시 좌의정인 김상로가 "신(臣)들이 밖에 있어서 이러한 줄을 몰랐습니다. 마땅히 입대(入對)하여 조심하도록 아뢰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손으로 땅을 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영조실록 90권, 영조 33년) (1757년 음력 11월 8일 병신 6번째 기사)
혜경궁 홍씨의 주장에 따르면, 둘의 성격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충돌이 잦았다고 한다. 영조는 사람들을 전부 모은 앞에서 어린 아이인 사도세자를 세워놓고 흉을 보며 망신주는 일을 자주하였으며, 저렇게 한 일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고 꾸중하고 이렇게 한 일은 저렇게 하지 않았다고 크게 꾸중하였다. 비가 와도 천둥이 쳐도 가뭄이 들어도 한재(寒災)가 나도 세자에게 덕이 없어 그렇다고 하였다.
1742년 9월 19일자 승정원일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8세였던 세자에게 앞에서 동몽선습(童夢宣習)을 읽어보라고 시켰는데, 세자가 책을 다 읽고 영조에게 달려와 "간신히 한 권을 다 읽었어요"라고 말한다. 동몽선습은 천자문을 다 읽고 시작하는 아이용의 교과서인데, 간신히 읽었다고 대답한 것이다. 1744년, 영조는 세자에게 글을 읽는 것이 좋은지 싫은지를 묻는다. 세자는 선뜻 대답을 못하다가 "싫을 때가 많다"고 대답하니 영조는 "네가 진실하게 말을 했으니 마음이 기쁘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필사적이라 할 정도로 공부에 열중하여 신하들도 압도하곤 했던 영조로서는 이런 세자의 성격과 학문 성취의 미흡함이 당연히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을 터였다.[15]
1747년(영조 23년), 영조는 세자에게 군왕의 책, 자치통감(自治統監)을 읽게 한다. 그런데 점점 세자의 글 읽는 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하루에 몇 시간이나 제대로 공부하냐는 질문에 저런 대답을 내놨으니, 영조의 실제 마음은 어땠을까? 세자 본인만의 잘못도 아니었던 게, 영조의 교육열(학구열)이 지나쳐 과도하게 공부를 강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의 세자 교육이 아무리 혹독했다고 해도 엄연히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이루어졌다. 그리고 교육과정 역시 명망 있는 문신들을 서연관(徐延官, 세자를 직접 가르치는 스승)으로 임명한 뒤 웬만하면 믿고 맡기고 틈틈이 점검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전례없이 그런 단계를 싸그리 무시하고 무리하고 혹독한 조기교육을 시켰으며, 교육과정에도 과도하게 개입, 간섭했다고 한다.'''영조 : ''' 세자가 내 앞이라 긴장이 되어 그러나 보다. 평소에는 글 읽는 소리가 어떠하였는가?
'''보덕 김상철 : ''' 평소에는 크게 잘 읽으십니다.
'''영조 : ''' 12시진(1일 = 12시진, 1시진 = 2시간) 안에 네가 책 읽기를 좋아하는 마음은 얼마 정도 되느냐?
'''세자 : ''' 1시진 ~ 2시진(즉 2시간 ~ 4시간 정도) 입니다.
'''응교 조재민 : ''' 12시진을 아마 깨닫지 못한 듯합니다.
'''세자 : ''' 나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영조 : ''' 정직한 대답이로구나.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16]
1743년 9월경부터 세자는 눈에 어지럼증(눈병)이 생겼다고 스승들에게 이야기를 한다. 스승들은 영조에게 먼저 치료받게 하고 휴식을 취하게 하라고 영조에게 말하지만, 영조는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재차 충고하지만, 영조는 화를 내면서 "내가 세자에게 물어보니 책만 보면 어지럽다고 했다. 그러니 치료는 필요없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승정원일기 1743년 음력 11월 10일과 음력 11월 14일의 기록이다. 영조는 세자가 공부하기 싫어서 꾀병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영조는 계속해서 공부하게 했고, 논어(論語)를 읽게 한 후에 세자에게 공부하라고 훈계하는 글을 내리는가 하면, 시간이 날 때마다 공부하라는 말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가 영조 23년 11월 11일에 영조가 세자와 주강을 같이 행하다가 질문을 한 일이 있었다.
여기서 나오는 '급암'이라는 자는 한무제의 신하로 바른 말(왕에게는 쓴소리)을 잘하는 신하였다. 한번은 회의를 하다가 급암이 한무제에게 대놓고 돌직구를 던진 적도 있었는데 한 무제는 쌍욕만 하고 끝냈다고 한다. 급암의 돌직구에 기분이 상해서 욕은 했지만 따로 벌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급암을 중용하지도 않았고 그의 주장을 잘 들어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급암은 회양 태수로 세월을 보냈는데, 바로 영조와 사도세자가 이 일화를 두고 서로 이야기했던 것이다.'''영조 : ''' 한나라의 어느 제왕(帝王)이 우수하다고 여기느냐?
'''세자 : ''' 문제(文帝)입니다.
'''영조 : ''' 너는 어째서 한고조(漢 高祖)를 말하지 않느냐?
'''세자 : ''' 문제와 경제(敬帝)의 치적이 가장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영조 : ''' 너의 기질로는 필시 한무제(漢 武帝)를 좋아할 것인데 도리어 문제를 좋아한다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세자 : ''' 무제는 비록 쾌활(快活)하지만 오히려 오활(誤活)한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영조 : ''' 어떤 일이 오활하고 어떤 일이 쾌활한 것이냐?
'''세자 : ''' 급암을 포용한 것이 영웅의 일이고 쾌활한 부분입니다.
'''영조 : ''' 그것을 어질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반드시 영웅이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이냐?
'''세자 : ''' 급암의 강직함을 포용하고 주었으니 자못 한고조의 활달한 기상(氣狀)이 있습니다.
'''영조 : ''' 네가 만약 급암을 포용한 것을 두고 참된 영웅이라 생각한다면, 너는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중략) 심하다. 어리석은 말이다. 비록 강직함을 포용하였으나 역시 등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중서는 강도에서 늙어갔고, 급암은 회양으로 내쳐졌던 것이니 진실로 개연한 일이다. 강직한 것을 포용하는 것은 강직한 이를 등용하는 것만 못하니 너는 이러한 것에 더 힘써라!
그러나 영조는 사도세자의 말을 어리석다고 말하면서 가르친다. 즉, "돌직구 한번 던진 걸 넘어가 주는 게 영웅이냐? 폭군이 아니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지. 근데 중용(重用)하지는 않았잖아. 강직한 것을 포용하는 건 강직한 이를 등용하는 것만 못해!" 라고 질책을 한 것. 게다가 사도세자가 이미 문제와 경제가 한나라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넌 사실 무제가 더 좋잖아?" 라고 단정짓고는, 다시 세자가 "무제는 장점도 있었지만 단점이 더 많았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래? 장단점이 뭔데?"라고 묻고는 장점을 말하자마자 단점은 듣지도 않고 까버린 셈이다. 이 때 세자는 13세, 현대의 초 6이다.
그러고도 영조 24년 5월 19일 소대(訴對)를 행하고 똑같은 내용을 또 물어본다. "한무제하고 한고조 중에 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묻자 세자가 "고조가 나았지요." 라고 대답했고 이에 영조는 "그럼 한문제와 한무제 중에서는 누가 뛰어나다고 생각하냐?" 라고 물었다. 세자는 "문제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또 화냈다.
당황한 세자가 문제, 경제가 무제보다 훌륭한 정치를 했다고 변명하자 영조는 수그러들지 않고 "네가 시를 쓴 것을 보니 호랑이가 울부짖는 대목이 있는데 그것으로 네 기가 매우 승한 것을 알 수 있다.(해석 : 고로 너처럼 거센 기운을 가진 놈이 정벌을 많이 한 무제보다 문제를 더 낫게 여길 리가 없다.)" 라고 꾸짖었다. 즉 영조는 별 말같지도 않은 거 다 트집잡아 세자를 갈궜다는 소리다. 다음은 실록에 실린 원문이다.이는 나를 속이는 답변이다! 너는 분명 한 무제를 통쾌히 여기고 있을 텐데 어째서 문제가 낫다고 하느냐?
심지어 두 사람은 성격도 매우 달랐다. 한중록에서는 두 사람의 성격을 설명하는데, 영조는 꼼꼼히 살피고 재빠른 성품인데, 세자는 덕성은 거룩해도 과묵하고 행동이 빠르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모든 일이 부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평소 묻는 말에도 즉시 대답하지 못해서 머뭇거리면서 대답하고, 영조는 매번 갑갑하게 여겼다고 한다. 영유아기부터 학대받고 자란 사람이 그 주체 앞에서 기죽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임금이 소대(訴對)를 행하였는데, 왕세자가 시좌(侍坐)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무제(武帝) 중 누가 더 훌륭한가?”하니,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고조의 기상이 훌륭합니다.”하였다.
임금이 하문하기를, “문제와 무제(武帝)는 누가 더 훌륭한가?”하니,
대답하기를, “문제가 훌륭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나를 속이는 것이다. 너의 마음은 반드시 무제를 통쾌하게 여길 것인데, 어찌하여 문제를 훌륭하다고 하는가?”'''하니,
대답하기를, “문제·경제(景帝)의 정치가 무제보다 훌륭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앞으로 문제·경제의 반 정도만으로 나를 섬겨도 족하다.''' 내가 매양 한나라 무제로 너를 경계했는데, '''너의 시 가운데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虎嘯深山大風吹]’는 글귀가 있어 기(氣)가 크게 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니,
시독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기(氣)가 승한 것 같지만 매우 안중(安重)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촌음(寸陰)을 아끼라는 옛말이 있는데, 춘방의 여러 신하들은 매양 서연이나 소대가 있을 적마다 성심을 다하여 부지런히 해서 원량으로 하여금 학문에 정진하게 함으로써 임금 노릇하는 방도를 알게 한다면, 종사의 다행이겠다.”하니,
이영복(李永福) 등이 일어나 절하면서 말하기를, “삼가 하교를 받들겠습니다.”하였다.
―영조실록 67권, 영조 24년 5월 19일 임인 2번째 기사
사실 사도세자와 영조가 이런한 갈등을 빚은 것은 영조가 자신의 어머니의 미천한 출신 문제 때문에 선조와 인조보다 '''더''' 정통성이 떨어지는 왕이기 때문이다.[17] 적장자가 아닌 탓에 정통성 논란이 끊이지를 않았고 항상 그를 괴롭히는 노론과 소론의 끝없는 당파싸움과 다른 사람들 경쟁자 사이에서 자리를 유지해야 했으니 늘 예민할 수 밖에 없었다.
2.2. 대리청정과 이후
한편 영조는 자신이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서 또는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18] '''자주 선위 파동'''을 벌이곤 했는데[19][20] 사도세자가 2살 때 벌인 선위 파동이야 2살짜리에게 책임이 돌아갈 순 없었으니 별 일 없었지만 사도세자가 15세 때 벌어진 영조 25년의 선위 파동은 "선위가 싫으면 대리청정이라도 시켜라. 그것도 싫으면 그냥 선위하겠다."고 영조가 막 나가는 바람에 선위보단 한 단계 낮은 대리청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희대의 비극적인 시발점이 된다.
영조의 대리청정은 말이 대리청정이지 왕권강화를 위한 쇼에 불과했다. 이 대리청정을 들어서 영조가 사도세자를 믿고 대리청정을 시켰다는 서술이 과거에는 많았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고, '''영조는 왕의 일을 세자에게 맡길 생각은 털 끝 만큼도 없었다.''' 당장 정사를 보기 시작한지 달포가 안되는 영조 25년(1749년) 2월 16일에 바로 사건이 터졌다.
결국 영조는 이 문제를 '''자기가 알아서 처리한다'''. 지켜보겠다고 하던 영조가 시행한 딱 첫날부터 자기 말을 어긴 것이다. 거기다 세자가 한 결정이 틀린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세자가 처리한 방향이 옳은 일이었다. 영조가 화를 낸 이유는 단지 '''자기가 한 걸 마음대로 바꿨다는 이유였다.''' 거기에 영조는 길주, 성진 병영 배치 문제를 자신이 직접 그대로 주관한 다음에 또 사도세자의 기를 죽이는 발언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대로 뭔가를 할 수 있었을까? 세자는 말만 대리청정이지 "알았다", "안 된다", "대조(大朝, 영조)께 물어보고 결정하겠다" 이 말 밖에는 못했다. 세자가[27] 대리청정을 하면서 전권를 행사할 수 있게끔 해준 세종이나 순조와는 대조적이다. 물론 이 시기의 세종은 영조와는 달리 건강의 악화로 슬슬 자신의 사후를 준비하려 했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세자(문종)에 대한 세종의 신뢰는 절대적이었으며, 대리청정 시기에는 세자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업무의 진행 방향만 정하고 대부분의 정사를 세자의 뜻대로 처리하게 하였다. 대리청정 이전에도 문종은 세자의 자격으로 부왕 세종의 각종 정책 결정에 참여해 왔다. 실제로 세종 후반기의 치세는 문종의 치세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물론 문종의 정치관이 부왕 세종과 매우 유사하며 부자간 사이가 매우 좋았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긴 하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경우와는 정 반대였던 셈이고 세종의 경우가 권력 이양의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다.[28]"너는 깊은 궁중(宮中)에서 태어나 안락하게 자랐으니 어떻게 임금 노릇하기가 어려운 줄을 알겠느냐? 지금 길주에 관한 한 가지 일을 보니 손쉽게 처리해 버리는 병통(病痛)이 없지 않다. 나는 한 가지 정사와 한 가지 명령도 감히 방심하여 함부로 하지 않았고 조제[25]
에 고심하여 머리와 수염이 모두 허옇게 되었는데, 25년 동안 서로 살해한 적이 없었으니 너는 이를 금석(金石)처럼 지킴이 마땅하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는 도리는 그들을 모아서 쓰는 것이 옳겠느냐? 분리해서 쓰는 것이 옳겠느냐? 저 여러 신하들은 그들의 선대를 따져 보면 모두 혼인으로 맺어진 서로 좋은 사이지만 당론이 한번 나오게 되자 문득 초(楚)나라와 월(越)나라처럼 멀어져 각기 서로 해칠 마음을 품었으니 내가 고집스럽게 조제(造製)에 힘쓴 것은 단연코 옳은 것이다. 지금 진언하는 자들이 혹자는 말하기를, ‘조제하는 것이 도리어 당파 하나를 만들었다.’ 하고, 혹자는 ‘조제하는 것이 도리어 편협하다.’ 하며, 혹자는 ‘현명하고 어리석은 사람과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등 그 말하는 바가 천만 갈래로 나뉘었다. 비록 감히 서로 살해하지는 못했으나 서로 살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던 적이 없었다. 오늘부터 네가 만약 신하들이 아뢰는 대로 듣고 믿어서 시원스럽게 그 말에 따르기를 지금 길주의 일과 같이 한다면 그 결과 종묘 사직과 신하와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한쪽은 나아가고 한쪽은 물러남이 겉으로는 시원스럽게 보이지만 당쟁을 열어 놓게 되는 것이니, 네가 이 명을 지키지 않으면 뒷날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겠느냐? 400년 조종(祖宗)의 기업과 한 나라의 억만 백성을 너에게 부탁하였으니, 너는 모름지기 나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 기대를 저버림이 없도록 하라."[26]
이덕일과 그 부류들은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친소론 성향을 보이자 불안해진 노론 대신들이 영조와 세자 사이를 이간질했다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사도세자가 골수 소론이라고 해도 친소론의 모습을 보일 수도 없다. 영조의 야단은 이렇게 사소한 것부터 시작됐고, 세자가 사소한 걸 물어보면 자기가 결정 못 한다고, 그렇다고 안 물어보면 멋대로 했다고 화냈다. 그러니 가뜩이나 아버지를 무서워하던 세자는 영조 눈치를 보며 벌벌 떨지 않을 수 없었다.[29]
그런가하면 선위하겠다는 둥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세자를 괴롭혀서 세자가 눈물을 흘리며 혼절하고 궁인들에게 실려 나가는 일도 있었다. 보다 못한 신하들이 "잘 하는 세자를 왜 못살게 구냐"고 영조에게 항의해도 영조는 막무가내였다. 세자를 옹호한 신하들 중에는 소론의 대신 뿐만 아니라 노론의 대신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당파 싸움보다는 영조의 독단적인 결정이 매우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려주는 방증이다. 애초에 영조가 사도세자를 저 정도로 학대하는 모습 자체가 당파 싸움이나 정치 성향을 넘어 신하들 개개인들에게도 매우 부정적으로 비춰졌다. 아무리 그 시대에 부모가 자식에게 훈육이 엄격했다고 한들, 어디까지나 자식이 뭔가를 잘못했거나 어리석은 행동을 저질렀을 때에만 엄격했던 것이다. 하물며 한 나라의 임금이 제 자식인 세자를, 그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필요 이상으로 엄혹하게 대하는 꼴이 똑같이 자식 키우는 입장의 신료들로서도 보기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 당연하다.[30]
선위 파동과 관련해서,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사도세자가 18살 되던 해 겨울, 궐내에 '''홍역'''이 돌아 세자를 비롯한 왕족 몇 명이 홍역을 앓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의학 기술이 현대에 비해 현저히 뒤처졌을 때이므로 홍역은 거의 죽을 병(괴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대리청정을 잘못 했다는 이유를 들면서 사도세자는 '''홍역을 앓고 나은 뒤 불과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던 쇠약한 몸으로 펑펑 내리는 눈을 3일이나 맞으며 얼음장 같은 박석에 머리를 박고서 푹 엎드려 있어야 했다.'''영조 28년 11월 4일 뿐만 아니라, 영조는 "중전의 회갑에 하례(賀例)를 드리게 해 달라"는 김상로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네 엄마의 회갑이랍시고 하례까지 받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논지의 글을 써서 세자에게 보내는 등 정서적 학대까지 가했던 상황이었다.영조 28년 11월 23일
실록에 따르면, 영조가 양위 파동을 벌이자 김상로는 "눈보라가 치는 혹독한 추위에 필시 (세자의) 몸에 손상이 올 것인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신들은 비록 돌보아 줄 것조차도 없지만 원량은 생각지 않으신단 말입니까?"라고 대놓고 항의를 했을 지경이었다. 또한, 대사간 서지수는 "송현궁(松峴宮)[31] 에 가셨다가 환궁하지 아니하려 하실 때, 김상로가 '일단 전하의 뜻에 따르겠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잘못됐습니다"라고 말했다가[32] , 영조로부터 '''"서지수는 본디 괴상한 무리인데 그의 아비와 할아버지부터 그러하였다"'''는 소리까지 들었다.영조 28년 12월 8일[33]
설상가상으로 이때 돌던 홍역으로, 사도세자의 바로 위 동복 누나인 화협옹주는 이미 그로부터 약 열흘 전 20세의 나이로 요절했던 상황이었다. 화협옹주 역시 사도세자처럼 아버지에게 미움받는 처지라 둘은 만나면 "우리 남매는 아버님 귀 씻을 물[34] 이다." 라고 웃으며 말하곤 했다. 저 정도로 사도세자가 유독 애달파 하며 챙겼던 누이인데, 이 화협옹주가 죽은 지 채 2주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영조는 선위를 하겠다고 한다. 각별했던 누이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다 심지어 자신의 몸 또한 성치 않았지만, 사도세자는 1752년 12월 8일부터 19일까지 장장 열흘 가까이 다시 한 번 눈밭에서 석고대죄를 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영조는 세자를 불러, "내 시를 읽을 테니, 네가 울면 효성이 있는 걸로 알아 전교(殿敎)를 거두겠다." 고 하여 세자로 하여금 울게 하였으나, 명령을 거두기는커녕 "들어가지 않고 여기서 무얼 하고 있냐!" 고 되려 화를 내었다. 또, 석고대죄가 소극적이면 그걸로 화를 내, 세자는 열흘 동안 아픈 머리를 바닥에 쾅쾅 찧으면서 피를 내야 했다.
이런 현상이 나날이 심해지던 와중 사도세자를 귀애해주던 할머니 인원왕후 김씨와 적모(嫡母) 정성왕후 서씨가 짧은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는 비극이 일어난다. 결국 사도세자는 이를 견디다 못해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며 자신을 모시던 궁녀를 잔혹하게 죽이고 궁궐에서 도망쳐 평양까지 비밀리에 놀러가는 등, 갖가지 기행을 벌이기 시작했다.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되었으며 급기야 약방 도제조 이천보가 "세자는 사람의 발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뛰고 거의 죽으려 한다." 라는 보고를 올리고,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마저 세자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언급할 지경에 이르렀다.
사도세자가 너무 멍청해서 영조가 답답해서 갈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어린 사도세자의 기록들을 보면 멍청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총명한 편에 속한다. 영조의 질문에 조리있게 대답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 대리청정 이전에는 영조가 칭찬하는 모습도 꽤 보인다. '''질책 1번이 칭찬 10번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혹독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칭찬하던 와중에 돌연 격노하지를 않나, 언제 어느 문제로 트집을 잡아 화내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이후로, 영조가 사도세자를 갈구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수준으로 변했다. 다음은 단순 선위 파동을 빼고도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사건들이다.[35]
- 1755년 11월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 영빈 이씨가 병이 들어 앓아누웠다. 이에 사도세자가 마땅히 선희궁이 기거하던 창경궁 집복헌(執福軒)으로 병문안을 갔는데, 그곳에는 동복 여동생인 화완옹주도 있었다. 사도세자와 화완옹주 모두 선희궁의 소생이니 문안 오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감히(?) 예뻐하는 딸 곁에 싫어하는 아들이 가까이 간 것을 본 영조가 폭발했다. 영조는 "당장 나가라!" 라고 호통을 치며 길길이 날뛰었고, 친동생과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날벼락을 맞은 사도세자는 창문과 담벼락을 넘어 허겁지겁 자신의 처소로 달아났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동궁을 나와 청휘문 안에 들어올 생각도 말라고 꾸짖은 다음에 서경의 태갑편이나 읽으라고 명령했고 이에 사도세자도 마침내 폭발했다. 사도세자는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일을 당하니 서러워서 약을 먹고 자결하겠노라 하며 크게 울부짖다 겨우 진정했다.
- 1756년 5월 1일 영조가 사도세자가 기거하던 낙선당에 갑자기 들이닥쳐, 술을 마시지 않은 사도세자에게 술을 마신 것을 자백하라고 닦달하며 몰아세웠다. 자다가 헐레벌떡 일어난 사도세자의 몰골이 말이 아닌 것을 보고 일방적으로 술에 취한 것이라 단정을 지은 것이다. 그즈음 사도세자는 동궁에서조차 안절부절못하며 취선당의 음식을 만드는 곳인 밧소주방에 자주 있었는데, 깊고 고요하여 마음에 든다는 이유였다. 매섭게 몰아붙이는 아버지를 견디다 못한 사도세자는 "밧소주방 큰 나인 희정이에게 얻어먹었다." 고 거짓으로 실토했고, 이에 보다못한 사도세자의 보모인 최 상궁이 "술 잡숫는다는 말씀은 지극 원통하오니 술내가 나는가 맡아 보소서." 라고 영조에게 항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부왕이 상궁에게 민망한 꼴을 당하자. 사도세자는 서둘러 "먹고 아니 먹고 내 먹었노라 아뢰었으면 자네 감히 말을 할까 싶은가. 물러가소." 라며 최 상궁을 물리쳤지만, 영조는 "너, 내 앞에서 상궁을 꾸짖으니, 어른 앞에서는 견마도 꾸짖지 못하는데 그리 하는가." 라고 사도세자를 꾸짖으며 춘방의 신하들을 시켜 사도세자를 '훈계'하라고 지시했다. 사도세자는 춘방의 신하들을 보고 원통함이 폭발하여 "너희 놈들이 내가 이렇게 억울한 말을 들어도 한마디 아뢰지 않고 나를 모시느냐. 모두 나가라. 어서 나가라." 며 춘방 신하들을 쫓아냈는데, 신하들이 쫓겨나는 과정 중에 촛대가 쓰러져 낙선당에 불이 났다(…). 그 불로 인해 근처의 관의합에 있던 혜경궁 홍씨와 세손까지 자리를 피해야 하자, 영조는 폭발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이라 여겨 모든 신하를 모으고 그 앞에 사도세자를 불러 세워 호통치며 "네가 불한당이냐?" 라고 크게 꾸짖었다. 하도 영조가 무섭게 화를 내다보니 사도세자는 촛대가 쓰러져 불이 났다 말도 못하고 그 시간을 견뎠고, 영조가 가고나서는 아무래도 못 살겠다며 우물에 몸을 던졌다. 경악한 신하들과 나인들이 몰려들어 건져내어 목숨은 건졌다.[36][37]
- 또한 영조는 사도세자의 생일인 매년 음력 1월 21일마다 신하들을 모아놓고 그 앞에 세자를 세워 놓으며 흉(앞담화)을 봤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혼내며 공개망신을 주는 것은,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는 최악의 교육법이다. 더욱이 자식의 생일인데 축하는커녕[38] 엄연히 아랫사람인 신하들 앞에서 세자를 갈궜으니... 한 번도 생일을 예사로이 넘기질 못하고, 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며 욕을 들으니, 세자는 생일날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망 2년 전 생일에는 사도세자도 서러움이 폭발하여 아버지 영조에게 욕을 하며 화내고, 살아 뭣하겠냐며 세손 남매가 문안을 와도 부모도 모르는 것이 자식을 어찌 알겠냐며 인사를 물렸을 정도다.
- 1758년 7월 8일 영조실록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세자를 대하는 영조의 태도가 너무 가혹하다 여긴 신하 1명이 울면서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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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서 동궁(東宮)에게 항상 엄격한 위엄을 가지고 주로 대하셨기 때문에 저하(邸下)가 지나치게 스스로 두려워하고 조심합니다. 어젯밤의 일을[39] 가지고 말씀드리더라도 저하께서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조심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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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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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 말이 지나치다. 이 말은 박홍준(朴弘儁)과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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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남태회가 울면서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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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춘방의 말을 들으니, ‘동궁께서 전하가 진전(眞殿)으로 오신다는 것을 알고서 밤이 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동궁의 예후(睿候)가 미령(未寧)한 가운데 이와 같이 초조하고 심려한다면, 어찌 민망하고 절박하지 아니하겠습니까?"
>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동궁(東宮)이 어찌 이를 알았다는 것인가?"
>
>하였다. 남태회가 말하기를,
>
>"동궁이 청대(請對)하였기 때문에 이를 알았던 것입니다."
>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춘방의 청대(請對)는 지나치다."
>
>하였다.
>
>―영조실록 92권, 영조 34년 7월 8일 임진 2번째 기사
세자는 아버지가 자신을 보러 온다는 말만 들어도 불안하고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영조실록에는 이와 같이 신하들조차 영조에게 "전하께서 저하를 지나치게 엄하게 대하시니 조금만 관용을 베풀어 달라." 고 하는 모습이 당파를 불문하고 정말, 몹시, 자주 나온다. 심지어 위의 기사조차, 신하가 울면서 간하고 있는데도 영조의 반응은 오히려 '니가 왜 그런 말을 해? 동궁이 그걸 어찌 알았어? 춘방은 왜 나대냐?' 는 식으로 오히려 화를 내며 트집잡을 구석을 찾고 있는 수준이다.
- 1759년에는 밝은 혜성이 나타났는데[40] 이와 같은 천체의 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세자가 몸을 돌이켜 수성(羞誠)해야 한다는 취지의 상소가 올라오게 된다. 이에 세자는 따르겠다고 했으나 계속되는 돌발 행동으로 영조의 불신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런 점을 볼 때 사도세자는 '세자'[43] 라는 존귀한 신분임에도 부왕에게 제대로 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그것도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자기를 모시는 아랫사람들 앞에서 말이다. 게다가 그런 처우에 감히 불만을 드러낼 수도 없으니 정신이 나가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물론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아무리 심했다고 하나, 발병 후 흑화된 그의 면모가 경빈 박씨#s-2의 죽음에서도 볼 수 있듯 지나치게 파탄적이었다고 비판하는 이도 있지만, 정신질환이라는 게 앓는 사람이 "나는 미쳐도 지나치지 않게 미쳐야겠다"라고 의지로 조절할 수 있는게 아닌 이상 그것은 제3자의 속편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도세자의 발병과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이들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과 원인제공은 어디까지나 부왕 영조에게 있다.
아니 설령 사도세자의 광증(狂症)이 본래 자신의 정신문제였다고는 치더라도, 그에 대한 영조의 반응은 시대를 감안해도 정상범위를 넘어서도 너무 넘어섰다. 미쳤거나 품행이 문제라면 폐위시키든 가둬놓든 의관이나 전담 신하를 붙이든 했어야 할 일이고, 정상으로 보고 있었다면 최소한 세자로서의 대접은 해줬어야 한다. 이 시기 영조의 행태는 학계에서도 영조 자신이 편집증에 시달린 건 아닌가 의심했을 수준으로,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크게 나서서 탓하면서 이 상황에 누가 개입해서 개선시키고자 하면 그조차 극도로 싫어하며 거부하는것도 모자라 아예 훼방을 놓기까지 한다. 백번 양보해서 후계 문제로 왕권이 흔들리는 일을 걱정한 거라면, 이 일을 나서서 입막음을 시켜도 모자랄 판에 영조는 자신이 나서서 문제를 제기해버리므로 그런 가능성조차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 시기에 적힌 기사의 내용들을 보면 신하들은 하나같이 "그래도 세자는 정상입니다"라며 항변하고 영조가 "이 새끼 미쳤는데 무슨 소리냐"를 외쳐대는 수준.
그야말로 사도세자는 '''가장 존귀하고 안타까운 미치광이가 되었다.'''[44] 이럴수록 아버지(영조)와의 관계는 더 파탄이 났고, 결국 사도세자와 아버지 영조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게 된다.
2.3. 극심해진 정신질환
世子戕殺中官內人奴屬將至百餘而 烙刑等慘忍之狀不可勝言
세자가 내시, 나인, 종의 신분을 가진 자를 백여 명[45]
을 죽이고 낙형에 처하는 등 무자비한 정상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 대천록(待闡錄) 상권
세자는 결국 1757년 이후 정신질환이 심각해져 폭행, 성폭행, 살인 등의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비구니(여자 스님)를 성추행하거나, 연쇄 폭행, 성폭행을 일삼아 수많은 궁녀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성폭행했으며, 내시와 나인들을 많게는 하루에 6명까지 직접 살해하기도 했다.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였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했다.[46]
기록에는 세자가 좁거나 어두운 데 혼자 있으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폐쇄증)'''에 놓였다고 한다. <한중록>에 따르면 옷 입기를 어려워하는 일종의 강박증인 의대증에 걸렸다고도 하는데, 세자가 옷 1벌을 입을려면 10벌에서 20벌 ~ 30벌을 지어 올려야 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도세자는 의대증이 있어서 옷을 입기 전에 귀신인지 아닌지 걸어 두거나 불사르기도 했다는 등, 1벌을 순(純)하게 갈아입는 적이 없었다. 심지어 온갖 난리를 치며 가까스로 옷 1벌을 입으면 그 옷이 해지도록 입었다고. 상황이 이 지경이니 세자의 시중을 드는 나인들에게 불똥(옷을 입혀주다가 사도세자의 살결에 손이라도 닿으면 세자가 발광하여 그 나인을 죽이는 일이 다반사)이 튄 것은 당연한 수준. 그렇게 죽인 나인이나 내시의 목을 자르고 자랑처럼 보여줬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오늘날 정신 의학계에서는 '''의관(衣冠)을 갖추면 아버지를 찾아 뵈러가야 한다'''는 사고가 강박증으로 발전하여 의대 질환으로 발현된 것이라 보는데, 이쯤 되면 기록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부왕 영조에게 심한 질책을 듣고 핍박을 받은 나머지 정신이 크게 피폐해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하다. 자신의 큰아버지인 경종의 사항이 그나마 나아 보이는 것이, 경종은 생모(희빈 장씨)가 사사되기 전까진 아버지인 숙종의 총애를 받았고 사사 이후 아버지가 싸늘하게 변하여 행동도 조심해야 했었지만, 숙종도 영조처럼 노골적으로 아들 경종을 학대하진 않았다. 질책이 일시적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변하고 어릴 때부터 받아온 학대의 규모를 보면 조카인 사도세자의 강도가 더 심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에 경종이 영조에게 양위를 하고 장수하여 상왕 노릇을 했으면 자신의 동생인 영조가 사도세자를 학대할 때 제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시선도 있다. 조선 초 태종이 후궁을 성대하게 들이려 할 때 형이자 상왕이었던 정종이 조강지처를 박대하시면 못쓴다며 넌지시 불만을 표하자 행사를 조촐하게 줄였던 예가 있는 것처럼, 아무리 현 국왕이라도 상왕이 있으면 눈치를 조금은 보아 주는 게 예의였다. 그렇기에 경종이 살아있었으면 이복아우가 조카를 노골적으로 학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경종 본인도 성품이 어진 편이니[47] 자신의 옛 처지를 생각해 조카 사도세자를 잘 돌보아주지 않았겠느냐는 가정. 영조의 명목상 어머니인 대왕대비 인원왕후도 사도세자를 아끼며 항상 영조를 말렸으나 영조의 학대를 완전히 그만두게는 못한 것을 보면 경종이 살아있어도 온전히 사도세자를 보호해주기는 어려웠을 가능성도 크지만, 최소한 부자 사이에 중재자는 되어주었을지도 모르니까.[48]
당시 기록들을 보면 이러한 사도세자의 황폐해진 정신 상태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鬱火)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1753년 또는 1754년 어느 날)
'''“나는 한 가지 병(病)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 ―1756년 2월 29일 21세 때 사도세자의 편지
“이번 알약을 복용한 지 이미 수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습니다"(1754년 10월 또는 11월 추정)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虛荒)되고 미친 듯합니다”'''
그 외에 영조실록에 의하면 사도세자가 외모나 생각, 됨됨이가 고조부인 효종과 매우 닮았다고 한다. 문(文)보다 무(武)를 더 좋아했다고도 하며 위에서 서술했듯이 어릴 때부터 총명하기로 소문났다. 이보다 좀 더 후대의 기록인 고종실록에서는 그를 일컬어 "얼굴에 표정이 없고 엄숙(嚴肅)하여 신하들이 영조보다도 더 두려워했으며, 백성에게는 자애(慈愛)로웠다"고 한다. 실제로 평양행에서도 백성에게 신경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국방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도 함께 언급되어 있다.웃대궐을 수구(水口)로 가옵신다 하야, 가시다가 못 가옵시고 돌아오시니 이는 윤 5월 11일 ~ 12일 간이라. 그러할 즈음에 황망한 소문이 보태어서 아니 나리오. 낭자자(狼藉藉)하니 앞뒤로 일이 다 본심으로 하옵신 일이 아니건마는 인사나 정신을 놓으셨을 때는 화를 내시며 하시는 말씀이 "병화(兵火)로 어떻게 할까보다", '''"검을 끼고 가 어떻게 하고 싶다"''' 하오시니 한푼이라도 상정(想情)이 있으시면 어찌 이러시리오.
『한중록』
이러한 여러 기록을 볼 때,사도세자가 정말 정신 질환자나 막장이었다는 말은 신뢰하기가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사서에서는 광증(狂症)의 증거들이 너무 명백하고 광증으로 치달을 만한 이유도 보이는데 마냥 정상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정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위에 언급한 세자의 긍정적인 행적들 중에는 정조 본인이 언급한게 많아서 정조가 사실보다 미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사도세자가 병이 없는데 죽었다는 말 자체가 남인 일각에서 '노론이 병도 없는 세자를 모함해서 죽였다!'라고 주장하기 위해 만든 프로파간다가 시초이고 이것이 더욱 왜곡된 게 위의 노론 음모론. 정병설 교수는 사도세자의 광증 자체를 무시하려는 시도를 황당하다고 저서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게다가 후에 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볼 때 아버지에게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 질환을 앓았을 가능성은 크다. 외방에 나가면 스트레스의 원인인 영조에게서 멀어졌다는 해방감에 정신 이상 증세는 완화 될 수 있고, 지방에 사는 관리들과 백성들이야 세자에게 강박관념이나 위협을 주는 대상이 아닌 만큼 너그럽게 대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2014년에는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서울아산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한중록을 분석한 결과, 한중록의 내용을 볼때 사도세자는 양극성장애(조울증)의 증상에 해당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는 현대의 정신건강의학 지식이 없이 허구로 지어냈다고 보기 어렵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한중록에 나오는 사도세자의 묘사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연구 결과다. (본문에서 인용한 글의 Lee DI은 물론 '이덕일'을 의미한다.) 양극성장애라면 기분 삽화 사이 사이에 정상적인 정신건강상태를 회복하는 기간도 있기 때문에 사도세자가 광증을 보이면서도 때때로 정상적인 판단을 했다는 기록과도 모순되지가 않는다.
즉 '''250년 뒤, 정신건강의학이란 학문이 정식으로 생기고 나서 그것을 배우고 수많은 경험을 쌓은 정신건강의학의 전문가마저도, 사서에 기록된 사도세자의 정신 질환이 주작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한중록은 사도세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친정 홍씨 집안을 방어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 사후에 기록한 것이므로 내용이 왜곡되었을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사도세자는 당쟁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Lee DI. The world dreamed by Prince Sado. Goyang: Wisdomhouse;2011. p.53-54.) 하지만 한중록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신병적 증상에 들어맞는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정신 증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순전히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술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접근 가능한 역사적 자료의 양이 부족하여 자료 수집에 제약이 많았고, 이로 인해 근거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연구의 가장 큰 제한점이다. 또한 연구자가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1차 자료에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중록을 살펴보면 증상에 대한 기술이 상당히 상세하고 구체적이어서, 현대의 정신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허구로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 해당 논문 9페이지
또한 관서행과 임오화변 당시 나경언의 고변 내용을 보면 사도세자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유람과 사치에 열중한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사도세자는 연회와 아랫사람들에게 주는 하사품 구입 등에 많은 돈을 썼고, 이 때문에 세자궁(동궁)의 예산이 텅텅 비어서 시전 상인들에게 많은 돈을 빌려야 했다. 이 때문에 영조는 국고를 풀어서 상인들에게 돈을 갚아 줘야 했다.
2.4. 임오화변
1762년,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은 정말로 최극단에 달했고, 세자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꿇어앉아 용서를 빌 지경에 이르렀고 신하들도 용서해달라고 간청했으나 아버지 영조는 끝까지 사도세자를 용서하지 않고 자결하라고 했으나, 신하들의 제지로 소용이 없자 격분하여 세자를 폐서인(평민으로 강제 강등)하며 쌀 담는 뒤주 속에 가두어 버렸으며 세자에게 물 한 모금도 주지 못하게 했다. 뒤주 속에 가둬진 세자는 결국 8일만에 갈증과 굶주림 속에 생을 마감했다(아사).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임오화변 항목 참고.
2.5. 장례와 추존
처음엔 묘가 양주 배봉[49] 에 있었으며, 세자의 예에 따르지도 않고 잡초가 무성히 많았던 초라한 무덤이었다. 초라하기만 한 게 아니고, 돌보는 사람도 거의 없고 버려진 무덤 꼴이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흉지(凶地)로 손꼽히던 곳[50] 이라,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에 만드는 것에 신하들이 반대한 것을 영조가 강행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묫자리는 자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던 걸 생각하면, 영조가 사도세자에 대한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51]
1968년 배봉산의 옛 사도세자 무덤 자리에서 처음 이곳에 사도세자를 매장할 때 함께 묻은 세자의 청화백자 묘지석이 발굴되었는데, 정조가 아버지의 무덤을 수원 화산으로 옮길 때 같이 가져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둔 것으로 보인다. 묘지석 자체는 1991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공개되었으며, 묘지문의 제목은 '어제지문유명조선국사도세자묘지'(御祭之文兪命朝鮮國思悼世子墓地)라 해서 '''영조 자신이 지은 것'''이다. 세자가 처음 태어났을 때 세자가 읽을 책을 국왕 자신이 몸소 필사(筆寫)했었다는 점과 함께 놓고 보면 씁쓸해지기도 하는 대목.
뿐만 아니라 영조는 사도세자의 발인(發湮)에 손자인 정조가 참석하는 것을 허락해주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처사가 부당하다고 생각한 신하들이 상소를 올렸지만 영조는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결국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만봐야 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마지막 배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날을 사관은 이렇게 비판한다.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자라면서는 글월에도 통달하여 조선의 성군으로 기대되었다. 오호라, 성인(聖人)을 배우지 아니하고 거꾸로 태갑[52]
의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배웠더라. 오호라, 자성(自誠)하고 마음을 가다듬을 것을 훈유(訓兪)하였으나 제멋대로 언교(言敎)를 지어내고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는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노라.아! 자고로 무도한 군주가 어찌 한둘이오만, 세자 시절에 이와 같다는 자의 얘기는 내 아직 듣지 못했노라. 그는 본래 풍족하고 화락한 집안 출신이나 마음을 통제치 못하더니 미치광이로 전락하였더라. 지난 세월에 가르치고자 하는 바는 태갑(泰甲)이 일깨워주는 큰 뉘우침이었지만, 끝내는 만고에 없던 사변에 이르고, 백발이 성성한 아비로 하여금 만고에 없던 짓을 저지르게 하였단 말인가? 오호라, 아까운 바는 그 자질이니 개탄(慨歎)하는 바를 말하리라. 오호라, '''이는 누구의 허물인고 하니 짐이 교도를 하지 못한 소치일진대 어찌 너에게 허물이 있겠는가?''' 오호라, 13일의 일을 어찌 내가 즐기어 하였으랴, 어찌 내가 즐기어 하였으랴. 만약 네가 일찍 돌아왔더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으랴.
강서원(康庶院)에서 그 여러 날 너를 지킨 이유는 무엇이었겠느냐. '''종묘 사직을 위한 것이고, 이 나라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참으로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거늘, 아흐레째 되던 날 피치 못할 보고를 들었도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를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53]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구술하노라. 때는 임오년 여름 윤5월하고도 21일이라. 이에 다시 예전의 호를 회복하게 하고 시호를 특별히 하사하여 '''사도(思悼)'''라 하겠노라.
오호라, '''30년 가까운 아비의 의리가 예(禮)까지 이어질 뿐이니 이 어찌 너를 위함이겠는가?''' 오호라, 신축일의 혈통을 계승할 데 대한 교시(敎施)로 '''지금은 세손이 있을 뿐이니 이는 진실로 나라를 위한 뜻이니라'''[54]
7월 23일 양주 중랑포 서쪽 벌판에 매장하노라. 오호라, 다른 시혜 말고 빈에게는 호를 하사하여 사빈(私嬪)이라고 하는 것으로만 그치노라. '''이것은 신하가 대신 쓰는 것이 아니며 내가 누워서 받아 적게 하여 짐의 30년 의리를 밝힌 것'''이니, 오호라. '''사도(思悼)는 이 글월로 하여 내게 서운함을 갖지 말지어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아무리 왕실 예법 때문이라고 해도, 명색이 아들인데 아버지 장례도 못하게 하다니 정상이 아니다.'라는 뜻이다."장례의 절차는 예법의 가장 큰 것이니, 제왕가(帝王家)의 예가 필부(匹夫)나 서인(庶人)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그 폐하여 버릴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세손이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천성(天性)에서 우러난 효성(孝誠)은 마땅히 어른과 차이가 없으니, 황인검의 상소는 가히 예의 바른 도리를 얻은 것이라 하겠다. 성상께서 한 번 곡하고 영결하는 것도 허락지 않아 지극한 정리(情裏)를 조금도 펴지 못하게 했으니, 그 흠결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영조 100권, 38년(1762년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7월 13일(계유) 1번째 기사
다만, 이에 대해선 영조가 단순히 사도세자에게 잔혹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냉혹이 아닌) 냉철한 행동이란 해석도 있다. 일단 사도세자를 역도(逆道)라는 명분으로 죽인 상황에서 계속 세손을 사도세자의 아들로 규정하고 방치하면 '역적의 아들 = 역적'이라는 연좌제 논리[55] 로 인해 세손조차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자칫하면 세손으로의 승계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 따라서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형식상 사도세자와는 무관하게 만듦으로써 세손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보호한게 이 결과라는 것. 영조실록의 직접적인 기록에 의하면 영조 자신이 효장세자가 비록 사도세자에게 형(兄)의 지위에 있으나 어려서 죽었기에 만일 사도세자가 정상적으로 살아있었다면 효장세자는 세자위에서 (추존형태라도) 왕이 되지 못한 순회세자나 소현세자의 예를 따르게 되었을 것이나, 임오화변으로 인하여 세손으로 하여금 효장세자의 장통(長統)[56] 을 계승하도록 조치하는 것이 '''의리상''' 불가피해졌다고 발언한 것이 나와 있다.[57] 물론 이 역시 세손의 인간적인 심정까지 완전히 헤아린 결정은 아니었다.
이와는 별개일수도 있는데 임오화변 이후 영빈 이씨의 장례를 치를 때의 일이다. 이미 그전 '세손으로 하여금 효장세자(진종)의 장통을 계승하게 하겠다'는 처분으로 인해 영빈 이씨는 당시 왕세손인 정조와 공적으로는 단순히 할아버지의 후궁으로서 지위(의붓할머니, 서조모)만 있을 뿐이었다. 이에 대해 영조 왈 "영빈이 죽었는데 장례를 담당하는 예조에서 세손과 혜빈(혜경궁 홍씨)이 영빈상에 임해야 하는지 가타부타 말이 없는게 말이 되느냐?"며 예조판서 이지억을 파직시킨 후 세손 모자로 하여금 영빈의 발인날 곡림을 하게 했던 사례가 있었다.[58]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가 된 시점은 사도세자의 사후여서 사도세자의 '적자'인(였던) 정조가 사도세자의 장례에 임했던 방식과는 '''극명히 대조되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장례는 최상급 장례용품을 사용했을 정도로 제대로 치러주었다. 이는 당시 예조판서 겸 호조판서 정홍순이 최대한 예를 갖춰 장사지내라고 당부를 했기 때문.(절대 영조가 지시한 게 아니다!)[59]
정조는 즉위한 뒤 아버지를 임금으로 추존하고자 했지만, 선왕 영조가 영조 40년(1764년)에 한성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있던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를 이곳에 옮겨 짓는 등의 예우를 보인 다음에 정조에게 "네 아비에겐 할 만큼 했다. 단 한글자라도 더 높인다면 할아비를 잊은 것으로 알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에 정조도 대놓고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즉위 직후의 연설에서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러나 선왕께서 나를 효장세자의 뒤를 잇도록 하셨으니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중략) 그러니 함부로 추숭(追崇)을 말하는 자는 마땅히 처벌하겠다'라는 발언을 남겼다. 이걸 이덕일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일성해서 노론 대신들이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고 왜곡했다. 전형적인 단장취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조가 사도세자의 신원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곧 수은묘를 경모궁(景慕宮)으로 고쳐 부르고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더해 올렸다. 이때 정조가 친히 편액을 써 달았으며, 서쪽에 일첨(日瞻)·월근(月覲)의 두 문을 내어 창경궁 쪽의 문과 서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정조 9년(1785년) 8월에 경모궁과 사도세자의 원묘(園墓)에 대한 의식 절차를 적은 〈궁원의(宮園儀)〉를 완성하는 등 이 일대를 정비하였다. 이후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읍치(邑治, 고을 소재지)가 있었던 화산(花山 / 華山, 현재의 화성시 안녕동 일대)으로 옮기고 묘라는 낮은 격식에서 원으로 격상시켜 현륭원(顯隆園)이라 명명하였으며, 기존 수원부 읍치와 시가지를 이전하기 위해 현재의 수원시 일대에 수원화성을 축조하였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자주 이 화성으로 행차했다고 한다. 훗날 고종 때 임금으로 추존되면서 받은 능호는 융릉(隆陵). 능의 양식을 보면 오히려 정조의 능인 건릉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조성되었다. 이때는 문성국, 숙의 문씨, 김상로 등이 역률로 추죄된 후라서 오히려 신하들이 이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라고 안도하여 조용했다.
당시에는 아직 임금으로 추숭되지 않았기 때문에 능이 아니라 세자묘인 '원'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정조는 정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으로 아버지 무덤을 정성껏 모신 것이다. 어찌나 정조가 융릉을 자주 찾았는지 능참봉[60] 들이 고생했다든가, 심지어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자세한 것은 능참봉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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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상에서 바라본 융릉(隆陵)의 전경. 정자각이 정면이 아니라 오른편에 비켜 세워졌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현륭원 자리를 정할 때 신하들이 한성에서 수원까지의 거리가 88리라서 임금이 원행을 나갈 때 80리 밖을 나갈 수 없다는 법도에 어긋난다고 반대하자 정조는 "앞으로 수원을 80리로 정하노라" 라고 말해 자신의 성묘(誠墓)를 정당화시켰다. 그리고 현륭원의 정자각을 지을 때 다른 왕릉과는 달리 능상 바로 아래가 아니라 옆으로 비켜서 지었는데, '''"뒤주 속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앞을 막아서야 죽은 뒤에도 얼마나 답답하시겠느냐"'''라고 해 신하들이 통곡했다고.
정조는 부친의 묘를 명당이라는 수원 화산(花山)으로 이장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아버지의 무덤에 성묘하러 갔다.[61] 그런데 막상 갈 때는 신하들을 독촉했는데 돌아올 때는 얼마 가지 않아 쉬었다 가기를 반복하며 현륭원이 있는 곳을 돌아보느라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정조가 돌아오는 길에 쉬었던 고개를 지지대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62] 한편, 사도세자 묘로 가는 길목에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김상로의 형 김약로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에 정조가 행차할 때마다 보게 되었는데 그 무덤을 지날 때면 항상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그 쪽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다른 길을 만들어 일부러 피해갔다고 한다.
야사로 무덤 근처에는 많은 나무가 있었는데, 어느날 송충이가 크게 번져 사도세자 묘의 소나무가 모두 말라죽는 일이 일어났다. 그 꼴을 본 정조가 인부들이 잡아온 송충이를 집어 "내 아비가 억울하게 죽어 이 곳에 누워 계신데 그 나무를 갉아먹는단 말이냐."하고 호통을 치고 그 송충이를 씹어 삼켰다. 이후로 무덤 근처에 송충이가 싹 사라졌다는 전설적인 일화가 있다.[63] 이후에 백성들이 흉년으로 사도세자 묘 근처의 소나무 껍질까지 벗겨먹는 상황이 벌어지자, 정조는 처벌 대신 콩주머니를 나무마다 매달게 하여 나무껍질 대신 먹도록 한 일도 있었다.
정조의 갈망은 비명에 간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追尊)하는 것이었겠지만, 결국 죽을 때까지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다만 사당의 명칭인 경모궁으로 높여 불렀다.[64] 이후 순조, 헌종, 철종 대까지 사도세자를 추숭해야 마느냐를 두고 논의가 있었지만 사도세자 추숭을 반대하던 벽파가 숙청된 다음에도 사도세자 추숭은 이뤄지지 않았고 이미 순조 말엽에는 사도세자 추숭을 요구하면 철 지난 얘기를 왜 꺼내냐고 면박을 듣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소원은 후에 왕실 족보상 현손이었던 고종황제가 사도세자를 왕을 뛰어넘은 황제[65] 로 추존하면서 추존 못했던 정조의 한(恨)을 풀게 된다. 여담으로 이 때의 기록에 의하면 정조는 자신의 측근들에게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고 싶다는 비원(費願)을 여러차례 말했고 그 측근 중 한 명의 자손이 고종을 모시게 되었을 때, 그 일화를 전하여 고종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정조 이후의 국왕들은 모두 사도세자와 관련이 있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서증손자이며, 남연군의 양아버지가 은신군이다. 대한제국기에 황제로 추존된 것은 고종황제의 고조부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족보상 상당히 복잡하지만, 고종황제는 간접적으로 사도세자와 2번이나 연결이 된다. 고종은 즉위할 때 효명세자의 양자가 되면서 족보상으로 정조의 양증손자가 되었다. 은신군은 숙종의 6남 연령군이훤의 가계를 이었고 정조는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었지만, 둘 다 사도세자의 친아들. 참고로 고조부까지가 커트라인이기 때문에 영조는 황제로 추존되지 않았지만, 한참 먼 조상인 이성계는 조선왕조의 개창자라서 황제로 추존되었다.
사연 많게 살다간 세자이기 때문인지 민간에서는 '뒤주대왕신'이라는 이름으로 신으로 모셔졌다.# 비슷한 예로 단종을 영험한 신으로 모신 사례도 있다.
3. 초상화(어진)
4. 가계
- 증조할아버지 : 현종 이연
- 증조할머니 : 명성왕후 김씨
- 할아버지 : 숙종 이순
- 할머니 : 숙빈 최씨
- 아버지 : 영조 이금
- 어머니 : 영빈 이씨
- 아내 : 헌경의황후 홍씨[69][70]
- 후궁 : 숙빈 임씨
- 후궁 : 경빈 박씨#s-2
- 후궁 : 수칙 이씨(守則李氏) - 정조 때 30년 수절 사실이 알려져 정렬(貞烈)의 칭호를 받았다.
- 후궁 : 가선(假仙) - 사도세자가 평안도에 갔다가 데려온 여자로, 본래 여승이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후, 가선은 사도세자를 모시던 내시 박필수(朴弼秀) 및 기녀 5명과 함께 처형되었다.
4.1. 후궁 문제
《한중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궁녀 임씨(사후 숙빈 임씨)가 은언군을 임신하자 영조의 질책이 두려워 그녀를 낙태시키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오히려 사도세자의 정실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임씨가 너무 불쌍해서 출산하는 것을 도와줬다고 한다. 혜경궁 입장에선 남편의 첩인 임씨를 질투하긴커녕 피해자로 인식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결국 은언군이 태어나자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조는 1달 넘게 사도세자를 크게 꾸중했고, 혜경궁까지 너무 투기를 안 해도[71] 여자가 아니라며 꾸중했다. 며느리를 아껴서 세자가 죽은 후에도 궁궐에서 살게했던 영조가 혜경궁을 혼냈던 건 이때가 유일하다고 한다.
학문을 가까이 해야 할 20세의 젊은 세자가 궁녀에게서 자식을 본 것이 영조에게는 매우 못마땅했던 것. 하지만 사도세자는 은언군 이후에도 숙빈 임씨에게서 은신군을, 경빈 박씨에게서 청근옹주와 은전군을 얻어 영조의 노여움을 샀다. 숙빈 임씨는 낙태를 당할 뻔하고, 경빈 박씨는 총애를 받았지만 나중에 광증(狂症)에 시달리던 사도세자를 말리려다가 역으로 사도세자에게 살해당했다.
결론을 내리면 사도세자는 자신의 후궁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고[72] , 영조가 후궁들과 그 자녀들을 못마땅해 했으니, 사도세자의 정실 부인인 혜경궁 홍씨조차도 사도세자의 후궁들을 질투하거나 증오하기는커녕 오히려 동정할 정도였다는 것.
5. 현대 매체에서의 사도세자
아버지에 의해 심한 학대를 당하고 엽기적인 죽음을 맞은 쇼킹한 스토리의 주인공이라서 사극의 단골 등장인물 중 하나. 또한 아들 정조와 연관되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부분은 노론 음모론인 이덕일 사관에 오염당해 사도세자가 노론에 의해 모함당해 죽었다는 맥빠지는 연출을 한다. 그나마 이덕일 사관이 나오기 전인 '하늘아 하늘아'에서 사도세자가 자신이 죽인 사람의 목을 휘두르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기는 한다.
따지고 보면 여타 사극에서는 정말로 실제보다 많이 미화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예전에 사도세자의 일이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는 노론의 음모론으로 죽은 실패한 개혁가 이미지를 집어넣어 대리만족을 많이 주었지만, 점차 정보가 많아지면서 그러기 힘들어지고 있다. 또 물론 영조의 자식 교육에 문제가 있었고, 그게 세자에게 영향을 끼쳐 아무리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사도세자는 화풀이 용으로 강간, 살인을 밥먹듯이 하고 부인을 때려죽인 엄연히 연쇄 강간살인마이며, 범죄자다. 물론 실제 현대 법을 적용한다면, 법률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심신미약이 적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상기했듯 사도세자의 광증은 그 당시는 물론 250년 뒤에도 전문가들이 인정할 만큼 확실했기 때문. 그러나 현대의 대중에게 심신미약으로 인한 살인이 좋게 인식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해 봤을때 실제 사도세자의 모습을 가감없이 그려낸 사극이 나온다치면 사도세자에 대한 인식은 밑바닥으로 떡락할 것이 거의 분명하다. 심신미약이라고 하지만 다른말로 하면 그냥 미치광이 연쇄 강간살인마라는 그림밖에 나오는 게 없으니까...(...).
영조도 똑똑한 아들을 단지 미치게 했다는 비난의 수준을 넘어서서 아들을 이렇게 왕위 계승자는 커녕 인간으로 보기도 힘든 강간살인마 범죄자로 만들었다는 극렬한 비난을 피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결국 사극을 본 시청자들 입장에선 차기 후계자 교육을 개판으로 해 수신 제가도 못하여 나라의 국본을 인간 이하의 괴물로 만들어 망친 편집증 환자 왕과 망가질대로 망가져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미치광이 살인마 세자 부자가 쌍으로 돌았다라는 소리 밖에 안 나올 것이다. 그게 실제 역사적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거기에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범죄 행위 사실을 알고도 필사적으로 승정원일기나 사초까지 지우면서 숨기고 부친을 미화하기 급급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면 정조의 이미지 떡락도 피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실제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그러낸 사극이 나온다면 그 동안 실컷 조선의 중흥을 이끌어왔다고 미화되어 왔던 영조-사도세자-정조까지 조선 왕실 3대의 치부가 싸그리 드러나서 이들의 이미지 하락을 피하지 못할것이다. 거기에 조선 왕실을 계승한 현대의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입장에서도 신하들이 이간질해서 훌륭한 왕재를 가진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노론 음모론이 차라리 구미에 맞지, 아들을 미치게 한 아버지-미치광이 살인마 아들-아버지의 범죄 사실을 은폐하고 미화하는 손자라는 실제 역사상의 개막장 그림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어쩌면 사극에서 노론 음모론이 흥한 것도 이런 실제 역사에서 눈을 돌리기엔 이거보다 적절한 게 없으니까 그게 선택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나마 이를 묘사한 작품은 옛날에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사극인 대왕의 길, 붉은 달이나 영화 사도 정도이고 실제로 이들 사극에서도 사도세자에게 피해 당한 이들의 공포나 분노가 잘 묘사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를 표현하는 순간 사도세자가 악인으로 찍히기 때문일 듯 하다. 사실 사도세자가 벌인 온갖 폭력, 살인극을 생각하면 대왕의 길, 붉은 달이나 사도에서의 묘사 이것도 많이 미화한 것이다. 사실 나무위키 이 문서부터도 사도세자를 지나칠 정도로, 정말로 많이 비호해주는 편에 속하긴 하지만 말이다.
《정조암살 미스터리 8일》에서는 100% 이덕일의 주장을 채택하여 사도세자를 악의 축 노론에 맞서는 정의의 용사로 그렸으며, 혜경궁 홍씨는 남편을 죽음으로 몰어넣는 천하의 악녀로 묘사하였다. 정사에 나오는 사도세자의 광증은 노론 사관이 현실을 왜곡하여 서술한 것이고, 심지어 사도세자에게 죽은 내관도 노론이라서 죽인 것이라는 말이 정조의 입을 통해 나온다. 뒤주 속에 들어갈 때도 아버님의 뜻이 정 그렇다면 따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당당하게 뒤주를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이덕일도 이 정도로 사도세자를 미화하진 않았다. 이는 카타르시스를 증대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이긴 한데...문제는 재미를 위해 사실상 진실을 왜곡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 역사를 아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고 있자면 미치광이 싸이코 강간살인마 사도세자를 옹호하기 위해 그 범죄자에게 가정폭력을 당한 피해자 혜경궁을 악녀로 만든 제작진이 정말 저열하게 보일 수 밖에 없다.[73]
《대왕의 길》에서는 임호가 사도세자 역을 맡아 뒤주 속에 갇혀죽기까지의 사도세자를 연기했으며, 《이산》에서는 이창훈이 특별 출연. 회상 장면에서만 등장한다. 《무사 백동수》에서는 오만석이 연기하여 효종의 북벌지계를 계승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영조가 뒤주를 내온 것은 사실 퍼포먼스였고 세자를 빼돌려 살려주려고 하나 결국 목숨을 잃었다. 이 드라마의 원작인 《야뇌 백동수》에서는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져 죽은 줄 알았으나 김광택에 의해 발견되어 그와 함께 있다.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2014년작 드라마 《비밀의 문》에서도 사도세자가 대대적인 개혁을 하려다가 노론에게 약점을 잡힌 영조에게 괜한 미움을 받고 있다는 식의 묘사를 하고 있다.
《와탕카》에서는 그가 뒤주에 갇혀 죽은 게 아니라 사실은 '''트랜스 뒤주'''라는 로봇이라 아버지가 외면했다고 왜곡했다.(아들에게 본모습을 보여줌)
몇몇 대중 역사 소설에서는 정순왕후가 사도세자에게 연심을 품었다가 거절당하자 세자를 모해한 것으로 나오기도 한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저 당시 정순왕후는 궁궐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되었고, 나이차로는 사도세자 쪽이 더 가까웠기 때문인 듯. 물론 역사적 사실과는 '''상관없다'''. 굳이 가능성을 찾자면 정말 사도세자와 근친상간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 쪽은 오히려 여동생 화완옹주 쪽이 높다.
영화 《역린》에서도 정순왕후가 노론들을 지휘해서 사도세자를 죽였다는 근거없는 이덕일식 사관을 그대로 수용했다.
《붉은 달》에선 김대명이 연기했는데 노론 음모론이 아닌 기록에 남은 사도세자의 광기를 잘 소화해내 호평 받았다. 다만 임오화변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조명한 정통 사극이 아니라 사도세자의 광기에 대한 기록에 상상력을 더해 각색한 호러 드라마다. 여기서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자 원한을 품은 장희빈의 귀신이 사도세자를 미치게 만든다(…). 이 장희빈 귀신은 세손까지 해하려 했으나,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삶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은 선희궁이 자신의 몸을 불살라가며 저지한다.
이성준 PD가 연출한 조주희 / 한승희 작가의 원작 만화 밤을 걷는 선비(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이 영조 시대이며 세손으로 출연한 이윤의 아버지 사동세자(장승조 분)가 사도세자를 모티브로 하였다는 설이 있다. 작중 최종 보스인 귀가 권력의 정점을 찍은 현조와 손잡고 사동세자를 죽이는 데 일조했다고.
이준익 감독의 《사도》에서는 유아인이 사도세자를 연기했다. 여기도 노론 음모론에서 탈피해 영조와 사도세자의 부자 갈등을 주로 부각시킨 영화라고 평가된다. 세부적인 심리나 자잘한 일들을 제외하면 현실의 역사와 가장 비슷하게 묘사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홍창표 감독의 궁합에서는 아직 사도세자가 어릴 때라 아역배우 최우진이 연기했다. 아직 어린 꼬맹이라 본인이 뭘 하지는 않고 어머니 영빈 이씨가 이선의 이복누나 주인공 송화옹주를 음해하는 메인 악역으로 나오는데 아들 이선을 위해 갖은 음모를 꾸미지만 결국 실패하여 영조에게 펑펑 울면서 사죄하고 아직 이때까지는 세자를 사랑한 영조는 세자를 꼭 안아준다. 그러나 우리는 훗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기에 참으로 안타깝고 씁쓸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5.1. 역대 사도세자 배우
- 유인촌 - 안국동마님 (MBC)
- 최수종 - 조선왕조 500년 - (MBC)
- 정보석 - 하늘아, 하늘아 (KBS)
- 임호 - 대왕의 길 (MBC)
- 이창훈 - 이산 (MBC)
- 오만석 - 무사 백동수 (SBS)
- 유아인 - 사도 (영화)
- 이제훈 - 비밀의 문 - 의궤살인사건 (SBS)
- 김대명 - 드라마스페셜 - 붉은 달 (KBS)
- 조한준 - 정조암살 미스터리 8일(CGV)
6. 기타
- 사도세자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병약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실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무예를 익혀 야외로 나가 사냥을 할 만큼 건강했다고 기록한다. 효종이 가지고 있던 청룡언월도를 15세에 들어 놀랍다는 기록(일반인은 못드는 무기를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2학년이 자유자재로 이용했다는 것을 봐서 무술(무예)의 달인이라 할 수 있다)이 있고, 대리청정 시절 무예도보통지의 기초가 된 무예신보를 편찬할 정도다. 영조가 세자에게 실망감을 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공부를 게을리하고 잡학과 무예에 능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신체는 강건했을지라도 정신은 병약했다.[74] 유년기부터 성인 때까지 아버지의 심한 질책을 듣고 자랐으니까.
- 게다가 정력도 왕성했다. 사실 조선 후기에는 갈수록 왕손이 귀해졌으며, 당장 영조만 해도 큰 아들 효장세자를 일찍 잃고 당시 기준으로는 아주 늦은 나이에 사도세자를 얻은 뒤로 다시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 반면 사도세자는 길지 못한 삶을 살면서도 정실 부인인 혜경궁 홍씨와의 사이에서 일찍이 의소세손과 정조 등 두 아들을 낳고 다른 후궁들과의 사이에서도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을 두는 등 다산하였다. 일각에서는 역설적으로 이 아들들의 탄생이 그 자신의 죽음을 앞당겼다고 보기도 한다. 영조 입장에서는 사도세자를 대체할 또 다른 적법한 후사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른바 삼종 혈맥이라는 것인데, 조선 중후기에 들면 선대 삼대왕인 '삼종'의 혈맥을 모두 이은 후손이 정말 드물었던 관계로 영조가 생모의 출신(무수리)이 한미함에도 불구하고 왕이 될 수 있었던(효종 - 현종 - 숙종) 논리였으며, 사도세자의 경우에도 형 효장세자가 죽었기 때문에 삼종 혈맥은 더욱 귀했다. 그런데 이 귀한 삼종 혈맥이 사도세자에 이르러 자손이 번성하게 되는 바람에 더 이상 귀하지 않게 되어, 세손이 있으므로 세자는 희소성이 떨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 비만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체심비풍(體心肥豊, 뚱뚱하단 말)', '비대'하다며, "잘못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몸이 무거워 다치기 쉬우니 걱정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승정원일기의 영조 19년(1743년) 5월 3일 기록에는 "세자가 숨을 쉴 때 들리는 소리가 마치 바람소리 같더라.[世子鼻息有聲, 意或以爲風也。]"(…)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 물론 이때는 그나마 걱정이라도 할 정도로 사도세자에 대해 어느 정도의 애정은 보였지만, 사도세자가 좀 더 자라자 미워하게 되면서 아들의 용모에 대한 얘기도 더더욱 신랄해진다. 대신들 앞에서 "이 아이의 배 좀 보라"라고 말하는가 하면, "지난 번 가마 탈 때 보니 가마가 좁아서 세자가 탈 수 없었다. 그 가마는 내가 동궁 시절에 타던 것이다."라고 했는데 영조가 30살 어른이 되어 탔던 가마가, 12살 어린 사도세자에게 좁았다는 것이다. 다만 위의 무술 이야기를 종합해볼 때 단순한 비만이 아니라 일종의 근육돼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어진만 봐도 알겠지만 영조가 체격이 그다지 크지 않고 호리호리한 편이기도 했다. 물론 사도세자의 어진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순 없으나 기록을 종합해보면 강호동이나 마동석, 김종국 정도의 체형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 외모는 미인이었던 어머니 영빈 이씨를 닮아서 미남이었다고 한다. 영조도 젊었을 적엔 꽃미남과였다고 하니 부모 양쪽에서 미모를 물려 받은 셈. 사도세자가 14세의 나이로 처음 대리청정을 하던 날 대신들이 사도세자의 위엄 있는 모습에 기가 죽어서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을 정도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동복 누나 화협옹주도 생모를 닮아 미인이었으나, 공교롭게도 남동생 사도세자처럼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다고.
- 의외로 영조는 손자들인 의소세손과 정조를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의소세손은 영조가 무척 아끼던 딸 화평옹주의 3년상 끝무렵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초산이었던 혜경궁 홍씨를 간호하던 선희궁(영빈 이씨, 사도세자의 생모)마저 마뜩찮게 보기까지 했다[75] . 사도세자 역시 첫 아이를 본 기쁨도 잠시, 나 하나도 힘든데 이 아이는 어찌하냐며 슬퍼하였다. 마찬가지로 영조는 정조에 대해서도 의소세손이 죽던 때에 생겼다며 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나중에 영특함을 드러내면서야 아끼기 시작했다.
- 생전에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다. 평양에 갔을 때 당시에도 유명한 화가인 변상벽[76] 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한 적이 있다. 이 그림은 사도세자 생전에는 받지 못했다가, 그림을 그린 지 10년 후에야 정조와 혜경궁 홍씨가 받아 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이 초상화는 그 소재가 불분명하다.
- 생전의 세자 시강원에서 활동하며 사도세자를 교육했던 이천보(李天輔), 이후, 민백상(閔百祥)은 사도세자가 사망한 이후의 행적이 수상하다. 당대의 기록인 영조실록에서는 이들이 단순 병사, 자연사했다고만 나온다. 이천보의 졸기 그런데 후대의 고종실록에선 이들에게 시호를 추증하면서 세 사람이 임오화변에 죄책감을 가지고 신사년(1761년)에 동반 자살을 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 구글에서 rice chest(뒤주)를 치면 사도세자가 검색된다 카더라(...) 영문위키백과의 Crown Prince Sado 항목이 앞에 나오기도 한다.
- DC인사이드의 다이어트 갤러리에 사도세자 다이어트가 공개되어 화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