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역사)
野史
야사(野史)의 개념을 이해하려면 우선 정사(正史)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역사를 편찬하는 것은 군주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믿었다.또한 역사는 군주가 보고 배우기 위한 기록이었다. 여기서 등장한 정사(正史)는 곧 왕조가 공인한 사서를 의미하고, 상당수가 관찬 사서이다. 그래서 국가가 역사를 관리하기 위한 작업이 있었다. 왕조의 기록을 사관을 통해 기록하여 실록(實錄)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또한 전대 왕조의 역사는 사(史)로 정리했다. 24사가 바로 그것이며, 고려사도 이러한 예를 따른 것이다.
하지만 국가와는 무관하게 민간인이 사적으로 역사를 기록한 것도 존재한다.[2] 이러한 기록들이 바로 야사(野史)다. 따라서 정사와 야사의 차이는 공권력의 공인이냐 아니냐일 뿐이지, 그 자체로는 우열 관계를 함의하지 않는다.[3] 정사끼리도 야사끼리도 신뢰성은 천차만별이기에, 각 기록들의 신뢰성도 당연히 개별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정사냐 야사냐의 분류를 신뢰성의 의미로 오해하면, 일본서기와 조선왕조실록이 둘 다 정사라는 이유로 신뢰성에서 같이 묶이고,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와 파워블로거의 포스팅이 둘 다 야사라는 이유로 신뢰성에서 같이 묶여버린다.
본래 역사서로 쓰여졌으나, 정사에 포함되지는 않은 책들 전부 다. 여기에는 중국사에 있어서 사실상 정사나 마찬가지인 사마광의 자치통감이나 한국사에서 일연의 삼국유사 같이 심지어 국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아서 완성된 경우에도 가차 없다. 역사적 가치와는 별개로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이 책이 이 시대를 다룬 역사서다'''라고 공인하지 않으면 나머지 역사서는 모조리 야사다.
1. 정의
흔히 오해되는 표현이지만, 야사라는 이유만으로 그 기록이 찌라시나 2등급 사서가 되지는 않는다. 야사는 정사(=왕조 공인 사서)를[1] 제외한 모든 것을 말한다. 간단한 예시로, 일본서기는 아무리 신뢰성이 공격 받더라도 엄연히 정사이며, 21세기의 대학 출판부가 역사학 교수들을 동원해서 출판한 책도 관찬이 아니라면 야사이다.정사(正史)란 한국(韓國)과 중국(中國) 등의 동아시아 나라들에서 각 왕조(王朝)가 정통(正統)으로 인정하고 공식 편찬한 사서(史書)이다. 중국의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의 24사(二十四史)나 한국의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등이 대표적이다.
정사(正史)는 주로 국가에서 편찬한 관찬(官撰) 사서(史書)로 민간(民間)에서 개인이 편찬한 사찬(私撰) 사서(史書)인 야사(野史), 패사(稗史) 등과 구별되는 말로 쓰인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당(唐, 618~907) 이전에 편찬된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등은 정사(正史)이면서도 모두 개인이 편찬한 사서(史書)들이다. 따라서 국가가 편찬했으면 정사(正史), 개인이 편찬했으면 야사(野史) 하는 식의 구분은 옳지 않으며, 누가 편찬했느냐보다는 왕조(王朝)가 그 정당성을 인정했느냐가 중요하다. 결국 정사(正史)는 근대(近代) 이전의 왕조(王朝) 국가에서 나타난 개념으로, ‘왕조(王朝)에서 정통(正統)으로 인정된 역사서’를 뜻한다.
-두산백과, 〈정사(正史)〉
야사(野史)의 개념을 이해하려면 우선 정사(正史)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역사를 편찬하는 것은 군주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믿었다.또한 역사는 군주가 보고 배우기 위한 기록이었다. 여기서 등장한 정사(正史)는 곧 왕조가 공인한 사서를 의미하고, 상당수가 관찬 사서이다. 그래서 국가가 역사를 관리하기 위한 작업이 있었다. 왕조의 기록을 사관을 통해 기록하여 실록(實錄)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또한 전대 왕조의 역사는 사(史)로 정리했다. 24사가 바로 그것이며, 고려사도 이러한 예를 따른 것이다.
하지만 국가와는 무관하게 민간인이 사적으로 역사를 기록한 것도 존재한다.[2] 이러한 기록들이 바로 야사(野史)다. 따라서 정사와 야사의 차이는 공권력의 공인이냐 아니냐일 뿐이지, 그 자체로는 우열 관계를 함의하지 않는다.[3] 정사끼리도 야사끼리도 신뢰성은 천차만별이기에, 각 기록들의 신뢰성도 당연히 개별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정사냐 야사냐의 분류를 신뢰성의 의미로 오해하면, 일본서기와 조선왕조실록이 둘 다 정사라는 이유로 신뢰성에서 같이 묶이고,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와 파워블로거의 포스팅이 둘 다 야사라는 이유로 신뢰성에서 같이 묶여버린다.
2. 야사에 포함되는 부류
본래 역사서로 쓰여졌으나, 정사에 포함되지는 않은 책들 전부 다. 여기에는 중국사에 있어서 사실상 정사나 마찬가지인 사마광의 자치통감이나 한국사에서 일연의 삼국유사 같이 심지어 국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아서 완성된 경우에도 가차 없다. 역사적 가치와는 별개로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이 책이 이 시대를 다룬 역사서다'''라고 공인하지 않으면 나머지 역사서는 모조리 야사다.
- 삼국유사
- 편년통록
- 왕대종족기
- 자치통감
- 가락국기
- 위략
- 동몽선습 - 조선시대 서당에서 배우는 아동용 교재 동몽선습이 맞다. 박세무가 아동 학습용으로 유교윤리와 함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
- 동사강목
- 동사
- 발해고
- 열조통기 - 안정복이 조선 태조에서 영조까지의 국왕들의 일화를 다룬 편년체 사서.
- 조선해어화사
- 규사 - 조선 후기 영남 유생들이 편찬한 서얼의 역사서.
- 해동역사
- 동국지리지
- 아방강역고
- 대동운부군옥
- 성호사설 - 이익의 저서로, 이중 경사문(經史門)에서 이익 본인의 사론과 중국과 한국의 제도, 인물, 풍속에 대한 대조와 비교를 하고 있다.
- 오주연문장전산고
- 이향견문록 - 철종시대에 유재건이 중인들 가운데 유명한 인물들에 대해서 분석한 책이다. 저자가 사실성을 중시해서 엄격하게 분류하였으며, 동일한 자료가 서로 다른 책에서 발견될 경우에는 다른 사서를 기준으로 삼아서 신빙성이 높은 것만 기록했다. 이 때문에 이향견문록에 기록된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은 다른 사서를 통해서 교차검증이 가능하다. 다만 이 경우에도 패관문학적 성향이 강하다라는 평가가 있지만, 이 책의 역사서의 성향을 강조하는 논문도 존재하는 등 다소 복잡하다. 현재는 역사서로 인정하는 성향이 좀 더 강하다.
- 지봉유설
- 연려실기술 - 이긍익이 저술한 백과사전식 사서. 야담집의 성향이 강하지만 기사본말체로 서술되어 사서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긍익은 이 책에서 정치적인 내용을 인과적으로 분류 분석하였고,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서술했다. 여기에 사견을 최대한 배제하였으며, 인용시에는 반드시 근거를 달았다. 이게 야담집이라고 하면서도 다른 야담집과는 달리 이 곳에 배치된 이유이다. 실제로 연려실기술은 역사서 취급을 받았으며,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일화를 사실로 믿은 결과 사실과는 다른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각인된 사례가 많다.
- 화랑세기
- 남당유고
- 청야만집속편
- 소대수언
- 동사초
- 파한집
- 보한집
- 기재잡기
- 용재총화
- 역옹패설
- 죽창한화
- 수이전
- 어우야담
- 패관잡기
- 필원잡기
- 대동야승
- 해동야언
- 청구야담
- 동국고사
- 해동야서
- 기리총화
- 고금소총
- 대동기문
- 청성잡기
- 징비록
- 난중일기
- 매천야록
- 일성록
- 윤치호 일기
- 계축일기
- 한중록
- 인현왕후전
[1] 한자 때문에 오해를 부르지만, 정사는 그냥 관찬 사서일 뿐이며, 정사라는 이유만으로 '올바른' 역사가 되지는 않으며, 야사보다 '우월한' 기록이 되는 것도 아니다.[2] 특히 서양의 경우 중화권에 비해서 관찬 사서의 전통이 약하기에 헤로도토스의 《역사》나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등 수많은 고전들이 사찬 사서이다.[3] 가령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을 비교하자면, 실록의 상대적 신뢰성은 실록이 정사니까 당연한 것이 아니라, 1차 사료들을 동원해서 비교적 동시대에 기록했다는 이유 등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실록이 승정원일기보다 신뢰성에서 밀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야사(사찬)인 《난중일기》는 실록에 떨어지는 2등급 사료인 것도 아니며, 현장 지휘관이 보고 들은 1차 사료이다. 물론 혹시나 이순신의 주관적 목소리가 과도한게 아닌지는 방법론적으로 의심해볼 수 있지만, 난중일기를 실록보다 열등한 사료로 볼 이유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