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부

 

'''이름'''
이춘부(李春富)
'''본관'''
양성(陽城)
'''사망년도'''
1371년
1. 개요
2. 생애
3.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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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돈의 최측근으로 활약하며 공민왕 밑에서 찬성사, 시중 등을 역임한 고려의 관리. 양성군 이연의 손자이자 이나해의 장남으로, 신돈의 눈에 들어 출세했으나 신돈이 몰락하자 사형되었다.

2. 생애


이춘부는 어려서부터 용모와 동작이며 마음씨가 아름다운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는데 간신열전에서도 대뜸 용모 칭찬부터 나오는 드문 미남이다. 얼굴이 잘생겨서 소문이 어디까지 났냐면 원나라까지 났다. 원 영종도 이춘부를 만나자마자 총애하며 직성 사인 벼슬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희한하게도 원나라에서는 옛날에 이춘부의 아비도 얼굴이 뛰어나게 미려하고 아름답다며 같은 벼슬을 주고 이름까지 나해(那海)로 직접 내려준 적 있다.
이춘부는 이런 이력을 갖고 귀국하여 본국에서는 삼사좌윤, 밀직, 대언 벼슬을 지냈다. 모두 능력이나 이력, 연령에 비해 상당한 벼슬이었는데 원래 충숙왕 때부터 원나라 황제가 총애하며 돌려보내면 융숭한 예우를 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그렇다. 또 이춘부의 아버지 이나해는 충숙왕이 원도에 있을 때 시종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던 자라 그 장남인 이춘부도 후대받았다.
홍건적이 쳐들어와 개경이 함락될 당시 그는 전라도도순문사 겸병마사로 있었고 수성보절공신이 된다, 이후 충근절의동덕찬화공신(忠勤節義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에 임명되었으며, 난이 평정된 뒤에는 직접 수복에 참여한 사람들과 동등하게 1등공신에 책록되는 등 후하게 대우받았다. 전 생애에 걸쳐 서훈을 엄청나게 받았다. 그러나 이후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파면되고 칭호를 박탈당했다고 한다.
파면된 이춘부는 본격적으로 신돈과 가까워진다. 한 일화로 왕이 궁문 밖에서 격구 구경을 할 때 신돈이 천막 앞으로 말 타고 지나가니 이춘부가 밀직 김란과 함께 그 앞으로 가서 손 모으고 서서 이야기 하는 모양이 꼭 노비 같았다고까지 내려온다. 유순한 성격이었고 명망보다는 재능이 출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체로 신돈에게 순종했다.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기분 좋게 말했고 왕에게도 늘 아첨을 잘했다고 한다. 심지어 매일 아침 신돈의 집에 다녀온 다음 등청을 했다고 하니, 요즘 태어났어도 팍팍 승진할 만큼 성실성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결국 이 극도의 처세술을 통해 아름다운 얼굴의 이춘부는 시중까지 된다.
시중으로서 특별한 공로는 보이지 않지만 철저히 신돈의 파당이었다. 마지막쯤 사면초가가 되어 자신이 키워낸 신진사대부로부터도 미움을 받던 신돈을 끝까지 배신하지 않았다. 또 신돈이 반대파의 사형을 주장할 때마다 이춘부는 대체로 귀양으로 감해달라고 부탁하는 등 실제로 마음이 좀 약했다.
신돈 집권기의 좌우 핵심축이 이후 권신으로 유명한 이인임과 이춘부였는데 두 사람의 역할이 아주 달랐다. 신돈은 지친 왕을 정치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하여, 이인임과 유탁에게는 정부 운영을, 김란, 김군보, 목인길에게 궁중을 맡겼고, 신돈 본인의 정치는 이춘부를 통하여 했다. 이인임은 좌시중 이춘부는 우시중이었는데, 이인임은 신돈의 적극적 지지자는 아니었고 이춘부는 신돈과 공민왕 사이를 원만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며 철저히 신돈을 대리하였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말로를 가르게 된다.

3. 최후


신돈이 귀양을 가게 되면서 그의 인생도 끝이 난다. 1371년 신돈이 반역죄로 수원으로 귀양갈 때 이춘부와 김란은 왕에게 신돈의 처벌 감경 등을 주장하며 마지막까지 감쌌다. 안 그래도 운명은 정해져 있었으나, 그 일로 철직당하고 사형당했으며 곧 4형제가 다 벼슬을 해서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았던 그의 형제들 또한 모조리 귀양길에 오른다. 이춘부의 아들 이옥, 이빈, 이예, 이한, 이징도 모두 관노로 편입되어 각 주군으로 뿌려졌다. 다행히 아들 중 이옥만은 왜족이 침략해올 때 격퇴 공로를 세우고 강릉 일대를 구하여 역을 면제받으나 나머지 가족들의 소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어느 시점에선 복권이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춘부의 아들 중 이한이 바로 이순지의 할아버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