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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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천하니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 야사 기록. 공민왕이 그를 등용할 때 반개혁세력이 두려워 일을 그르칠까 무섭다고 하자 그에 대한 신돈의 대답.
고려 말기의 승려이자 정치가. 공민왕이 개혁 정치를 위해 등용한 인물이다.
개혁자라는 평가와 요승(妖僧)이라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데 개혁자라고 보는 쪽에서는 강제로 노비가 된 평민들을 노비에서 해방한 것과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의 설치를 통해 당시로서 급진적인 정책을 폈던 점을 강조하는 반면 요승이라는 근거로는 과도한 권력 욕심, 최악의 처신, 불교 축제와 제사를 열기 위해 자주 일으킨 백성 수탈, 정도가 심한 부녀자 희롱과 겁탈 등이 제기되고 있다.
2. 생애
1323년 영산현(靈山縣)[3] 에서 태어났다.
고려사에서는 신돈의 법명, 출신지, 어머니의 신분만 적고 아버지에 대해 적지 않았다. 아버지는 누구인지 고려사에는 없지만 영산 신씨(靈山 辛氏)의 신원경(辛原慶) 혹은 신예(辛裔)라는 인물이 신돈의 아버지라는 설이 있다. 어머니는 계성현(桂城縣)[4] 옥천사(玉川寺)의 노비였는데 어린 나이로 출가를 하여 승려가 되었다.
공민왕에게는 명덕태후에 의해서 소개되었는데 야사에 따르면 공민왕이 꾼 꿈에서 자객을 만났는데 승려가 나타나 자객을 없애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원명의 소개로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꿈 속에서 본 승려와 행색이 비슷하여 마침내 그를 신임하게 되었다고 한다.[5]
노국대장공주 승하 뒤 공민왕이 정치에 뜻을 잃자 공민왕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정치 전면에 나선다. 이때 그는 법명인 편조(遍照)를 버리고 환속하여 신돈으로 개명했다.[6]
2.1. 왕의 신임을 받은 개혁가
공민왕에게서 전권을 받은 직후의 직책이 어마어마하다.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 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10] 겸(兼)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11] "로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만큼 길다.
그야말로 공민왕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아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셈이었다. 기본으로 대공신에 벽상삼한삼중대광(총리도 아니고 부통령급) + 영도첨의사사사(관직 중 최고의 관직으로 본래 공석으로 남겨놓는 명예직) + 판중방감찰사(국방부 장관) + 취성부원군(최고 귀족의 명예) + 문화종교부 장관 + 농수산부 장관 + 기상청장[12] 이었던 것이다.[13]
집권 초창기에는 노비를 풀어주고 토지 제도를 개혁하는 등 신속하고 공정한 정치를 펼치면서 백성들에게 성인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전민변정도감이 바로 그것으로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설치한 기관이다. 이 과정에서 권문세족과 부원배들을 포함한 조정 내의 부패한 세력들도 몰아냈다.
승려 출신이라서 신진사대부들에게도 엄청 까였지만 정작 자신은 공자는 천하만세의 스승이라고 극찬했으며 고려 성균관도 부활시켰다. 신진사대부의 세력 강화에도 크게 공헌한 셈.
2.2. 타락
그러나 환속한 천출 승려 출신에 무엇보다도 부패하고 탐욕하다는 이유로 점점 신돈의 정치에 불만을 품는 세력이 등장했다.
우선 신돈 자신이 키워낸 신진사대부 세력이 그를 불신했다. 특히 신돈은 정도전의 스승이자 좌주인 유숙을 반역죄로 죽여 신진사대부와도 등을 돌렸다. 유숙은 본래 정사에 대해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는데 신돈은 그가 지은 시를 볼 때 그가 반역을 꾀하려고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죽였다. 유숙은 고려 말 학식이 매우 뛰어나 이제현, 홍언박, 이색 등과 더불어 공민왕 시절 손꼽히던 대학자였고 고려 말에 초기 신진사대부의 주축이었다. 유숙의 죽음으로 인해 정도전을 비롯해 많은 백성들이 슬퍼하였고 이로 인해 문생들과 성균관 유생들의 분노를 샀다.
무력을 가졌던 최영마저도 그를 싫어하였다. 사실상 자신과 이춘부 같은 소수의 파당 빼고는 모두가 적이었다. 신돈 본인은 왕의 신임을 받아 갑자기 출세한 것이지,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자신이 밀려나니까.
2.3. 최후
결국 신하들의 역모 투서에 의해 역모죄로 유배를 떠났고, 1371년 수원에서 처형당했다. 국왕의 신임을 받아 개혁을 진행시키다가 국왕의 총애를 잃고 숙청되었다는 점에서 정도전, 조광조, 홍국영과도 약간 비슷한 느낌이다. 저 셋의 숙청이 실상은 태종, 중종, 정조의 뜻이었던 것처럼.
정도전의 경우는 신돈을 가장 먼저 비판했는데 정도전 자신의 스승인 유숙을 숙청한게 신돈이었기 때문이다. 신돈의 숙청은 공민왕의 뜻이었다는 느낌이 강한데 죄목은 반역죄였지만 자기 세력이 없는 신돈이 세력을 모으기도 전에 반역을 저지를 리가 만무하고 투서가 한 신하에 의해 공민왕에게 전해진 것이 몰락의 신호탄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 흔한 심문도 없이 바로 처형. 아무리 반역자라 해도 항변 한 번 들어보지 않고 처형하는 것은 무리수였지만 공민왕은 전혀 번복하지 않았다.
사실 일련의 사태에는 본인의 잘못이 크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그는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의 지도자로서 너무도 많은 흠결과 약점을 보였다. 무엇보다 왕의 총애로 권력을 얻은 이상 자신의 입지가 좁다는 것을 인지하고 왕의 의중을 파악하고 안심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잘못이 컸다. 스포츠로 따지면 선수가 감독을 무시하고 날뛴 격으로 감독이 아무리 총애해도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처음부터 이를 경계했는지 첫 만남 때 대뜸 "대왕께서는 참언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하여 절대로 죄 주지 않겠다는 "스승은 나를 구하고 나는 스승을 구하리라"라는 맹세문을 받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맹세가 흔히들 그렇듯 쓸모없게 되었다.
이 맹세문은 신돈이 처형될 때 그에게 분노한 공민왕에 의해 다시 한 번 언급된다.
고려사의 기록을 따르자면 공민왕은 신돈에게 꽤나 큰 배신감을 느낀 듯 하며 이로 인해 분노가 폭발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네가 전에, 부녀자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그 기운을 이끌어다 기를 기르는 것일 뿐,[14]
절대 사통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듣건대 자식까지 낳았다고 하니 이런 것이 맹세문에 있었더냐? 도성 안에 저택을 일곱 채나 지었으니 이런 것도 맹세문에 적었던가? 이러한 작태가 몇 건에 이르니 죄상을 다 따진 뒤에 이 맹세문은 불에 태워 버리도록 하라.'''
고려사 반역열전 신돈.
3. 이후
신돈이 죽고 나서 공민왕도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자신의 측근들인 자제위들에 의해 시해당한다. 신돈의 좌절된 개혁은 사실상 고려 최후의 개혁 시도였던 것. 공민왕이 죽은 후 정권을 잡은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 일파는 즉시 신돈 일당의 죄를 사면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구악을 능가하는 신악이 되었다. 다만 신돈이 성균관에서 지원한 신진사대부 중 급진파 일원들은 조선을 건국하는 원동력이 된다.
자기가 아끼는 여종이었던 반야를 공민왕에게 바쳤고 반야에게서 "모니노"(훗날의 우왕)가 태어나게 된다. 이 때문에 이성계 일파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과 손자라는 의미로 "신우"와 "신창"이라고 부르며 고려사 반역 열전에 집어 넣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여불위와 비교되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의 정당화를 위하여 계속 매도될 수 밖에 없었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조선 500년 내내 신우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까지도 신돈은 러시아의 그리고리 라스푸틴마냥 정력의 상징 쯤으로 취급되었다.[15] 조선이 망해 우왕과 창왕이 왕씨냐 신씨냐 논의가 자유로워진 현대에는 혈통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16] 이성계 일파의 모함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니어서 이래저래 외롭게 되고 명예도 잃은 인물.
4. 기타
- 신돈 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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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창작물
[1] 고려사엔 '신돈' 이름은 호와 함께 공민왕이 내려 줬다고 한다. 하지만 일설엔 신돈이 본명이라고 한다.[2] 공민왕이 내려준 호.[3] 현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일대[4] 현 경상남도 창녕군 계성면 일대[5] 신돈을 처음 소개한 김원명은 이후 신돈의 뒤통수를 치려다 발각되어 숙청당한다.[6] 돈(旽)이라는 이름은 환속할 때 공민왕이 준 이름이지만(출처 고려사 신돈 열전) 원래 출가하기 전의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7] 이상 직위는 공민왕이 내려준 것이다.[8] 마음대로 가진 직위.[9]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나서 자칭한 직위.[10] 불교 국가인 고려를 포함한 종교계 모든 일을 관장하는 자리.[11] 점이나 제사 같은 것을 주관하고 날씨 등에 따라 농업 등을 관리하는 자리.[12] 오늘날의 기상청장과는 달리 왕실의 제사까지 관여하는 일종의 사제 역할을 겸한다.[13] 참고로 한국사에 등장하는 엄청 긴 이름으로는 견훤이 즉위 전에 사용한 도독명과 최충헌의 관직명(벽상삼한삼중대광개부의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상장군상주국병부어사대판사태자태사), 고종 황제 시호 등이 있겠다.[14] 탄트라 밀교(특히 좌도밀교)의 수행법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이 기록을 참고했는지 신돈(드라마)에서도 신돈이 티베트로 가서 수행하는 장면이나 금강령을 흔드는 장면 등을 넣기도 했다.[15] 대표적인 예가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 작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관계한 여인의 수효에 대하여..(중략)..스무 서너 살에 벌써 이백 명은 넘으리라는 것을 발표하였습니다. 서른 살 때는 벌써 괴승 신돈이를 멀리 눈 아래로 굽어 보았을 것입니다."[16] 신돈, 우왕, 창왕은 반역자로 취급받아 무덤도 남아 있지 않다. 무덤이라도 있다면 유골을 통해서 유전자 감식이라도 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