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고려 31대 군주
恭愍王 / 敬孝大王
공민왕 / 경효대왕
'''
<colcolor=#000> '''묘호'''
없음
'''시호'''
고려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
(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

공민왕(恭愍王)
'''군호'''
강릉대군(江陵大君)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성씨'''
왕(王)
'''휘'''
기(祺) → 전(顓)
'''자'''
원량(元良)
'''몽골
이름'''
왕바얀테무르[1]
(王 Bayan Temür /王伯顔帖木兒)
'''호'''
이재(怡齋) / 익당(益堂)
'''왕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혜비(惠妃), 익비(益妃), 정비(定妃), 신비(愼妃), 순정왕후(順靜王后)
'''부왕'''
충숙왕
'''모후'''
공원왕태후(恭元王太后)
'''능호'''
현릉(玄陵)
'''생몰'''
음력
1330년 5월 6일 ~ 1374년 9월 22일
양력
1330년 5월 23일 ~ 1374년 10월 27일
(44세 총 16229일.)
'''재위'''
음력
1351년 10월 ~ 1374년 9월 22일
양력
1351년 ~ 1374년 10월 27일 (23년)
1. 개요
3. 고려의 재흥을 꾀하다
3.1. 왕위 등극
3.2. 내정
3.2.1. 병신정변
3.2.2. 부원배 처단
3.2.3. 전민변정도감
3.2.4. 신진 관료 선발
3.2.5. 관제 개혁
3.3. 외정
3.3.1. 장사성 토벌 지원
3.3.2. 원나라의 통치기구 철폐
5. 신돈의 개혁과 좌절
6. 비극적인 최후
6.1. 공민왕과 자제위 의혹
6.2. 공민왕 시해에 관한 의혹
7. '개혁 군주'의 한계 - 평가
7.1. 의심많고 잔인한 성격
8. 예술적 기질
9. 가계
10. 초상화
11. 현대 매체에서
12. 관련 인물
13.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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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31대 임금. 시호는 고려 우왕이 독자적으로 올린 경효대왕(敬孝大王), 명나라가 하사한 공민왕(恭愍王).
간혹 고려에서 올린 시호 경효대왕(敬孝大王)을 따서 경효왕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제25대 충렬왕의 고려 시호도 경효왕(景孝王)이라 혼동할 수 있어 실제로는 많이 쓰이지 않는다. 고려식 휘는 전(顓), 몽골식 이름은 왕바얀테무르(王伯顔帖木兒).
공민왕의 아들이자 후계자 강령부원대군 왕우위화도 회군으로 비참하게 몰락하고 손자 왕창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힘도 한번 못 썼으며 결국 둘 다 신돈의 후손인 신씨(辛氏)로 몰려 처형당한다. 후대 조선 왕조는 두 사람을 왕씨(王氏)도 아니고 옥좌를 찬탈한 역적으로 간주하여 아예 두 사람의 휘를 그대로 쓰며 고려사 세가에 넣지 않고 반역열전에 넣어 비난했다.[2] 이후 창왕의 뒤를 이은 공양왕은 어떻게든 고려를 지키기 위해 이성계에게 군신동맹을 맺자고 하며 끝까지 선양을 하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강제 폐위되어 내쳐진다.
이를 보면 고려 후기 군주 중 마지막으로 정권을 장악했던 군주였다. 그래서 사실상 고려의 마지막 군주라고 봐도 무방하다. 조선 왕실 종묘에 사당이 모셔진 고려의 유일한 왕으로 이성계가 진정으로 충성심을 바친 왕인듯 하다.[3]

2. 묘호, 시호, 존호


고려는 원 간섭기에 들어서고 충렬왕 대부터 5묘제 태묘를 사용하고 묘호를 올리지 못하게 됐다. 원 묘호가 올려진 임금들은 모두 시호로 격하됐다.[4] 충렬왕 대부터 원의 간섭으로 시호조차 올리지 못하게 되었는데[5] 이는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 되면서 원 천자의 제후로 편입되었기 때문. 즉 신하로서 군주에게 시호를 받는 처지가 된 것이다.
고려사 예지 태묘 조에는 공민왕은 다시 7묘제 9실 제도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민왕이 종묘에 섬긴 아홉 군주는 태조, 혜종, 현종, 원종, 충렬, 충선, 충숙, 충혜, 충목이다. 잘 보면 원(原) 묘호가 올려졌던 임금들은 모두 묘호가 회복됐지만 묘호가 없던 군주들은 묘호를 추가로 올리지 않았다는걸 알 수 있다. 이는 공민왕이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을 했기 때문이다. 쇠퇴한다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 여력이 남아있던 원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 종묘 제도는 천자의 제도를 따르되 묘호는 따로 올리지 않았다. 대신 공민왕은 충렬왕 이하의 군주에게 다 시호를 독자적으로 올려 어느 정도 선까지 자주성을 회복시켰다.
그래서 공민왕 본인 역시 묘호가 없다. 대신 고려가 다시 자주적으로 올린 시호가 있다. 후계자 강령부원대군 왕우가 재위 2년에 올린 시호는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다. 약칭 경효대왕(敬孝大王). 명이 시호를 보내주기 전까지 경효대왕으로 주로 불렸다. 당시 고려가 상국으로 우대하던 명나라는 우왕 재위 11년에 ''''공민왕(恭愍王)''''이라는 시호를 보냈다. 이 시호가 간단하고 오랫동안 쓰였다보니 보통 이 시호로 알려져 있다. 양국의 시호를 합쳐 ''''공민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恭愍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라고도 한다.

3. 고려의 재흥을 꾀하다



3.1. 왕위 등극


'''역대 강릉(江陵)의 가신'''
'''1대'''
'''강릉대군(江陵大君)'''
왕만(王卍)
'''2대'''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왕전(王顓)'''
'''3대'''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
왕우(王禑)

(왕은) 근세의 비루한 것을 배척하고 장차 태조의 옛 일을 회복시키려고 하였다.

- 목은 이색, <목은문고 사귀곡서화찬 牧隱文藁 賜龜谷書畵讚> 中.

공민왕은 충숙왕의 3남으로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졌다. 충혜왕 - 용산원자 - 공민왕의 순. 참고로 용산원자는 충혜왕, 공민왕과는 이복 형제였으며[6] 공민왕이 태어나기 5년 전인 1325년에 태어나 1341년에 사망하였고 공민왕이 태어나던 해에 큰 형인 충혜왕이 왕으로 즉위했다. 여담으로 아버지 충숙왕이 충선왕차남인데 강릉대군이었다.[7]
원 간섭기의 왕족들이 거의 그렇듯 공민왕도 원나라에서 10년간 볼모 생활을 한다. 이를 "뚤루게"라고 부른다. 일종의 인질 형식으로 피지배 지역의 왕족들을 원나라 수도 대도에 머물게 하면서 정치 자문 등의 역할을 하게 한 제도로서 이들은 황제의 최측근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 기간 동안 공민왕은 원나라가 점점 쇠퇴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이때 평생의 반려자 노국대장공주를 만나 혼인하여 원나라에서 생활하다가 충정왕이 원에 의해 폐위되자 고려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의 로맨스가 유명해서 그렇지 엄밀히 말하면 정략결혼이었다. 결국 공민왕 역시 원 황실의 부마가 되기 위해 노국대장공주와 혼인한 것.
당시 고려는 새로운 왕이 간절했다. 당시 신하들이 강릉대군을 왕위에 올려 달라고 원나라에 줄기차게 요구했고 의견이 수용되어 왕위에 오를 수가 있게 되었다. 이후 폐위된 선왕 충정왕은 공민왕 2년(1352) 원나라에 의해 독살당한다. 역사서에는 당시 왜구의 준동과 충정왕의 만행에 질릴대로 질린 대신들이 원에 요청해 폐위되어 이후 독살당한 것으로 나오나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사실상 공민왕의 주도로 보고 있다.

3.2. 내정


왕이 되자마자 그는 원나라 생활을 할 때 파악한 원의 쇠퇴를 믿고 본격적인 반원 정책을 펼쳤다.

3.2.1. 병신정변


그 첫 신호탄으로 1356년에 병신정변을 일으켰다. 먼저 무신들의 회의 기구이자 권력 독점의 기반이었던 정방을 혁파했다. 공민왕이 펼친 반원 개혁들과는 달리 이것은 무장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한 정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를 악몽으로 물들게 한 무신정권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한 공민왕은 무인들의 발호를 두려워했던 것으로 풀이된다.[8]

3.2.2. 부원배 처단


또한 원의 연호와 관제 사용을 폐지했으며 원의 풍속인 변발호복 사용을 전면 금지시켰다. 또한 기황후의 인척임과 동시에 고려 내에서 가장 세력이 큰 친원파 무리들 중 하나이자 갖은 전횡을 일삼던 기철 일당을 중심으로 한 부원배 세력의 숙청에 나섰고, 기철의 동생들을 빼곤 아내와 어린 자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였다. 부원배를 제거하면서 공민왕이 들었던 명분 중에서는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이 정한 원칙인 세조구제(世祖舊制)를 기철 일파가 어겼다'는 점이었다. 즉 쿠빌라이가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아 직접 통치를 하지 않고 독자적인 내정 운영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것을 근거로 삼아, 고려를 원에 들어다 바치려는 책동을 하던 부원배들을 다름 아닌 원나라 황제의 이름으로 제거해 버린 것이다. 참고로 세조구제는 후대의 칸들도 못 건드렸을 정도로 강력했다.

3.2.3. 전민변정도감


한편 전민변정도감을 세워 기철 일당이 점탈했던 인구와 토지를 재빠르게 정리했으며,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라는 새로운 지식인 계층을 등용 및 육성하면서 제법 의욕적인 개혁 정책을 펼쳐 나갔다. 성적 면에서도 스스로를 절제했으며, 신하들에게도 예의를 갖추었다.

3.2.4. 신진 관료 선발


이 즈음의 공민왕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다는 극찬도 받았다. 당대의 신진사대부의 대표격인 인물들은 이색, 이숭인, 정몽주, 정도전 등으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조선 왕조의 주요 개국 공신이 되었다. 단 이들 중에서도 조선의 개국에 기여한 이들은 정도전 등의 급진파 신진 사대부들로, 이들 가운데서도 정치적인 스펙트럼의 차이는 꽤 큰 편이었다. 또한 정몽주는 당시에도 명사였긴 했지만 총체적으로 정몽주와 정도전을 포함한 사대부들은 젊은 세대로서 공민왕 말기까지는 소장 관원, 간관으로서 존재했을 뿐 정치적으로 딱히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공민왕이 중책을 맡겼던 관료들은 이제현과 그의 제자였던 이색, 그리고 이인임의 형인 이인복과 같은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해본 경험이 있는 재상들이었으며, 이들은 양심적이고 성실한 동시에 학문의 성취가 높은 편이었지만 동시에 이후의 세대보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고 기존의 기득권과도 일정 부분 얽혀 있었다. 한편 그 밖의 요직에 자신의 측근들(연저수종공신)과 외가 쪽 친척인 홍언박(공민왕의 외사촌 형이자 홍륜의 조부), 인척인 경복흥 같은 사람들을 기용했다.

3.2.5. 관제 개혁


'... 그리고 공민이 자리를 이은지 20년 동안 관제를 4번 바꿨다. 혹 옛 관제를 따르거나 혹 새 관제를 만드니, 결국 그 번거로움을 이기지 못했다. ...'

- 고려사 백관지 中.

'... 왕이 황포(黃袍)와 원유관(遠遊冠)을 착용하고 태후전으로 가 옥책과 금보를 바치며 존호를 올리길 숭경왕태후(崇敬王太后)라 하였다. ...'

- 고려사 예지 中.

"고려 민왕[9]

의 시대에 참람히 12장의 의복(十二章之服)을 입고 범용되는 문물을 모두 황색으로 했으니(凡物皆用黃色), 태조[10]께선 미처 개혁하지 못하셨다. 태종조[11]에 황색을 금하셨으니 이는 엄격하고 분명하게 되어 전장에 실렸도다. ..."

- 세종장헌대왕실록 中.

고려의 관제는 11대 문종 대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충렬왕 대에 천자국의 관제는 사용할 수 없다는 원의 간섭으로 인해 많은 변질을 겪었다. 공민왕은 당시 관제 대부분을 문종제로 되돌렸는데, 그래서 고려사 지를 보면 공민왕의 관제 개혁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오등봉작제[12], 태후 존호[13], 폐하 존칭, 황색 사용[14], 12장 면복[15] 등 고려의 과거 문물은 공민왕 대에 상당히 회복되었다.
공민왕의 관제 개혁은 위 고려사 백관지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총 4번 진행됐는데, 현실적 한계로 인해 천자국 관제가 도로 폐지되거나 새 관제가 도입돼 정부기관의 혼란을 가중하는 부정적 면모도 있었다.

3.3. 외정


당시 원나라는 행정체계의 미비와 점점 약화되는 지방 및 하부 세력에 대한 통제력으로 인해 제 전력을 동원하기 힘들었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극렬한 대립으로 내부 분열이 꽤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 교초 남발과 중과세, 한인들에 대한 차별로 인해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 경제 중심지인 강남 일대가 원의 장악에서 벗어난 것도 매우 치명타였다.
한편 일본 역시 남북조시대의 진통을 겪고 있어 동아시아 전체가 전란에 휩싸인 그야 말로 혼돈의 시대였다. 다시 말해 당시 동아시아에서 그나마 정상적인 나라는 고려밖에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16]

3.3.1. 장사성 토벌 지원



공민왕은 대외 정책에 있어서도 꽤 괜찮은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원나라 혜종의 요청을 받고 군벌의 일파 중 강력한 세력을 이루던 장사성의 토벌을 위해 인당최영을 중국에 파견했는데,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원의 어지러운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때 최영은 고려군 1000여 명을 이끌고 나아가 맹활약했다. 다만 이후 장사성 토벌을 주도했던 토크토아가 실각하면서 군사들과 함께 고려로 귀국했다.

3.3.2. 원나라의 통치기구 철폐


공민왕은 차츰 원나라부터의 독립을 추진하였으며, 독립과 칭신을 반복하면서 한편으로 세를 잘 봐서 결국 부원배를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또 동북면에 있던 쌍성총관부[17] 무력 공격을 감행, 함락시키면서 원에 굴복한 이후 상실한 '''동북 지역의 영토를 수복'''했는데 이때 이자춘 - 이성계 부자가 고려에 귀순했다. 그리고 이름만 남아 있던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도 폐지시켰다.[19]
하지만 그 탓으로 북쪽 지역에서 원나라 장군이자 요동의 군벌이었던 나하추의 침입과 오빠 기철을 죽인 데 앙심을 품은 기황후원혜종을 설득하여 덕흥군 왕혜를 왕으로, 조카 기삼보노(奇三寶奴)를 세자로 즉위시키기 위해 침입한 최유의 침공이 있었다. 또 남쪽에서는 왜구가 극성을 부렸다.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아수라장이자 헬게이트.'''
한편 지난 날 원종이 내전 중이던 쿠빌라이 칸에게 칭신해 국체를 보존했듯이, 공민왕도 막 원을 몰아내고 불안한 처지이던 명나라에 곧 칭신하여 명 태조(주원장)의 호감을 샀다. 공민왕은 사신을 보내가며 명나라에 저자세를 취하고 곧장 제후왕으로 책봉될 정도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는데, 이는 요동 정벌을 위한 준비였다. 이미 기씨 일파의 숙청으로 관계가 나빠진 북원과는 국교를 단절하였다.

3.3.3. 요동 정벌



그러는 동시에 공민왕은 아직 명나라가 요동에 신경을 쓰지 못했던 시기, 요동 정벌을 명하는데 이것이 '''제1차 요동정벌(동녕총관부 정벌)'''이다.
1370년 12월, 일시적으로 차지했던 요동 (붉은색 점선)
제1차 요동 정벌은 발해가 멸망한 지 445년 만에 고려가 처음으로 요동성 점령에 성공한 사건이자 한반도 국가가 마지막으로 요동을 공략하고 실제로 점유했던 시기였다. 이성계가 처음 큰 전공을 세운 전쟁이기도 하며, 따라서 용비어천가고려사에도 그 경과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때 공민왕은 원을 압박하며 국력이 강성해지고 있던 명나라를 경계해 기철 일파와 원 잔당의 토벌을 명분으로 요동으로 군대를 보냈다. 총 책임자는 이인임이었으며 야전군 총사령관인 지용수를 필두로 이성계, 양바얀, 임견미가 함께 군대를 이끌었다. 당시 기철의 아들인 기사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요충지인 요동성을 근거지로 삼고 격렬히 저항했지만 결국 패배하여 도주했다. 그리하여 원정군은 요동성의 점령까지 성공하는데 하필 성내의 군량고에 아군의 실수로 불이 붙어 군량이 타버린 와중 '''무리한 영전공사''' 등으로 인해 본국의 군량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물자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후퇴할 때 총사령관 지용수가 해안선을 따라 움직이도록 해서 동선이 길어지는 등의 일로 부대 내 불만이 커졌으며, 결국 전투 후반에 전사자보다 굶주림과 추위에 죽은 병사들이 더 많은 지경에 이르렀다.[20]
그러나 이런 시도에 반발한 명이 고려에 외교적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요동의 여러 군벌들이 고려와 명 사이에서 결국 명에 투항하거나 명의 압력에 북원으로 도주하면서 요동 정벌은 결국 좌절되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일시적으로나마 요동을 정벌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그 뒤로 지금까지 한반도 국가의 영토가 요동에 미치는 일은 없었다.

4.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하지만 공민왕의 시대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난세였다. 북쪽에서는 원의 쇠퇴로 말미암아 일어난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이 침입해 들어와 수도 개경을 함락하면서 위세를 떨쳤다. 이때 공민왕은 왕비 노국공주와 함께 안동까지 몽진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남쪽에서는 왜구가 극성을 부려 남해안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수도 개경 근처까지 침략했다. 내부적으로는 권문세족의 전횡과 가뭄이 겹쳐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이 쯤되면 그냥 난세가 아니라 헬게이트 수준으로 봐야할 정도.
이럴 때 군주가 굳건한 태도로 일관되게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공민왕의 예술가적인 예민한 기질은 이렇듯 급박하고도 엄청난 압박이 가해지는 국제 정세와 국내 상황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원 - 명 교체기를 틈타 제도를 개혁했지만 원이 제동을 걸면 곧바로 다시 원위치되거나 무마되는 등 상당한 난항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기득권 세력이었던 권문세족들의 반발은 실로 엄청나서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이나, 딸들을 원 고관에 바치고 권세를 누리던 부원배 일당들과 지독하면서도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이들은 충목왕충정왕 때 추진된 개혁을 무산시켰던 장본인들이었으며, 막대한 토지와 노비,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결국 왕은 원이 혼란스러운 틈에 기습적으로 이들을 주살하고 토벌한 끝에야 간신히 숙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대규모의 기근과 홍건적·왜구의 침입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왜구는 고려 수군을 궤멸시키고 개경 인근까지 북상하여 대살육을 벌였고, 홍건적은 2차 침입 때 수도 개경을 함락시킨 뒤 궁을 불사르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으며, 공민왕은 안동까지 몽진해야 했다.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의 활약으로 간신히 개경을 수복하며 홍건적을 몰아내는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그들마저도 간신 김용이 꾸민 모략으로 인해 살해당했다.
군사권이 무장들의 손에 놓였던 상황에서 심복으로 믿고 있던 김용의 반란은 공민왕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더군다나 김용의 반란, 즉 흥왕사의 변으로 공민왕의 최측근 세력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때 공민왕의 큰 신임을 받고 있었던 김용마저 최영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것은 공민왕에게 매우 치명적이었다.

4.1. 홍건적의 난



굶주림에 지친 홍건적들이 떼거지로 고려에 침입했을 때는 '''수도였던 개경까지 함락되어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함께 상주행궁을 거쳐서 안동까지 몽진을 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공민왕은 원래 '''말을 탈 줄 몰랐는데''', 그래서 이 무렵에 아내 노국대장공주에게 승마를 배웠다고 한다.
또한 놋다리 밟기 전승은 안동 피난으로 거슬러간다. 홍건적의 침입이 교과 과정에서 생략되는 부분이 있어서 주목을 못 받는 것일 뿐, 실제로는 고려에게 상당한 피해를 안겨다 준 전쟁이었다. '''무려 20만의 홍건적 대군이 고려의 본토로 쳐들어와 말 그대로 고려의 수도와 영토를 초토화시켰다.''' 역사가들은 홍건적의 침입이 공민왕의 개혁 실패에 결정타를 안겨주었다며 평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시기였으나 최영, 이성계, 정세운 등 수 많은 명장들의 활약으로 이를 간신히 격퇴할 수 있었다.

4.2.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왜구를 근절하기 위한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는데, 당시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무로마치 막부가 들어섰으나, 무로마치 막부가 일본을 전부 통제하지 못했던 남북조 시대의 내전 상태라 규슈 일대의 통제는 고사하고, 규슈 일대의 호족과 도적들이 뭉쳐진 왜구들이 수도 교토 인근인 키나이까지 약탈하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당시 일본은 중앙 정부 자체가 없어져버려 고삐가 풀려버린 지방 세력들 그 자체였고, 왜구의 준동은 우왕 때까지 이어졌다.

4.3. 흥왕사의 변




4.4. 노국공주와 사별


더욱이 1365년, 지극히 사랑했던 아내 노국대장공주출산하다가 난산으로 인해 아이와 함께 승하하게 되자, 공민왕은 크게 상심함과 동시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이후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못 잊어서 다른 여자를 상대하지 않고 후궁도 들이지 않았는데, 후일 오랫동안 왕손이 태어나지 않자 후사가 끊길 것을 염려한 어머니 공원왕후와 신하들의 간청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 1359년 혼인한 지 10년 만에 이제현의 딸을 혜비로 맞이하고 공주의 사후(死後)에는 덕풍군 왕의의 딸인 익비 한씨[21]와 죽성군 안극인의 딸인 정비 안씨, 곡성부원군 염제신의 딸인 신비 염씨 등 3명의 후비를 더 간택했지만 이는 형식상의 혼인이었을 뿐, 정작 그녀들에게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반야에게서 우왕을 볼 수 있었던 것도 반야가 노국공주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란 이야기까지 전한다.
사실 노국공주의 사망으로 인한 타격은 공민왕의 애정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민왕의 왕비이자 원나라의 공주라는 노국공주의 위치는 공적으로도 공민왕에겐 강력한 정치적 동지이자 친원파 세력과의 대립에서 공민왕을 지켜주던 방패막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사망하면서 공민왕은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친위 세력에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이는 아래에 언급할 신돈의 발탁도 이와 연관된다.

5. 신돈의 개혁과 좌절


노국공주의 승하 후 공민왕은 신돈에게 모든 국사를 맡기는데 이에 대해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돈은 득도하여 욕심이 없으며 미천하여서 친척도 없으니, 대사로 임명하면 반드시 정실에 구애되지 않고 일을 마음먹은 뜻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인정하고, 드디어 일개 무명 승려인 그를 발탁하여 국정을 위임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고려사

즉, 당시의 권문세족이나 기득권에 얽혀있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여 자신의 새로운 친위 세력을 만들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돈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토지개혁을 주도하면서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뺴앗은 토지를 원 주인들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이는 전란을 진압하면서 많은 토지를 하사받아 전제 개혁의 장애가 되고, 사병을 거느려 위협적이었던 무장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실제 신돈은 집권 후 군사적 실권을 쥐고 있던 최영부터 좌천시켰다.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어 있다는 십실구공(十室九空)이라는 말이 있던 시대였다. 신돈은 이틀에 한 번씩 도감에 나가 일을 처리하였고 실무 책임자는 이인임과 이춘부였다. 신돈의 포고령은 왕권의 확실하고도 철저한 비호 아래 실효를 거둔다. 이는 백성들이 신돈에게 강력한 지지를 보내는 바탕으로 작용한다. 참고로 이춘부는 홍건적을 몰아낸 전쟁영웅 출신으로, 신돈의 실각 이후 사형당한다. 이인임은 당시 권문세족 중 가장 명신이던 이인복의 동생이었는데, 이인복은 신돈의 개혁에 협조한 동생 이인임과는 달리 신돈에 대항하다 귀양갔다.
또한 신돈은 성균관을 새로 건축해 미래의 주역이 된 신진사대부 세력을 크게 지원하였다. 정몽주, 정도전, 윤소종 등 당시의 권력층인 권문세족을 견제할 신진 문신 세력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공민왕의 주요 개혁 정책인 전민변정도감 설치, 성균관 중흥과 신진 사대부 등용 같은 정책은 노국공주가 난산 끝에 승하하고 신돈이 전면적으로 국정을 본 이후의 일이다. 이러한 노국공주 사후의 신돈 등용에 대해 개인으로서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의 사망으로 인해 정치에 뜻을 잃은 채 실의에 빠졌고, 삶의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현실세계에서 공민왕의 실존은 이미 사라진 채 슬픔에 대한 탐닉과 죽음에의 갈망, 그 사이를 메우는 쾌락만이 남았다. 공민왕릉을 보면 노국공주와 합장되어 있는데, 능 가운데 노국공주의 봉분과 통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놓는 등, 죽어서까지 노국공주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공민왕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후대에 의한 고려사의 왜곡 가능성을 인지하고 해석해보면 신돈이 이러한 개혁을 단행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공민왕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국공주가 죽은 후 공민왕이 완전히 정사에서 손을 떼고 이상한 행동을 했다는 것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 만약 그렇다면 공민왕의 개혁 정책이라 부르는 것들이 모두 공민왕과는 상관없이 신돈의 머릿속에서만 나왔다는 뜻이 된다. 특히 부원세력과 권문세족을 견제하고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려는 개혁 정책의 일관성을 봤을때 갑자기 나타난 미천한 출신의 신돈이 공민왕과 상관없이 이러한 정책을 모두 펼쳐나갔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 된다.
즉, 공민왕은 흥왕사의 변과 노국공주의 사망으로 인해 측근 세력이 모두 사라지자 신돈을 방패막이 삼아 권문세족을 견제하고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폈고 결국 권문세족의 모든 화살이 신돈을 향하게 되자 역모 혐의로 신돈을 제거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후 권력을 하루 아침에 천민 출신의 이름 없는 승려에 의하여 빼앗기고 소유하고 있던 토지마저 농민과 천민에게 강압적으로 내주게 된 권문세족들은 신돈에게 엄청난 반감을 품기 시작하였다. 신돈에 의해 떠 밀린 세력 중에는 탐욕스러운 대농장주와 부원배들도 있었으나, 양식 있는 귀족들과 무장 세력도 있었다. 여말선초의 인물들 중 이 시기에 벼슬을 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공민왕에게 "신돈을 내치라"는 간언을 했다가 귀양가거나 아니면 파직당했다는 기록이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정도로 저항은 엄청났다. 특히 당대 신진사대부들의 큰 존경을 받았던 유숙이나 공민왕 대 개혁을 주도했던 이제현, 이인복 그리고 최고의 명장인 최영 등 당대 활동했던 거의 모든 인물들이 신돈에 반대하거나 저항했다. 이존오는 신돈을 비판했다가 파직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민중들에게 신돈은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이런 유교적 사대부층은 기존 사대부들보다 불교에 적대적이었고, 불교계 내에서도 왕사 보우는 신돈과 갈등을 빚었다. 신돈은 천민 출신으로 불교계에서도 인정 받지 못하는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신돈은 재정과 인력을 소모하고 사망자까지 늘어나던 노국대장공주 영전 공사의 중단을 건의하자 공민왕은 다시 자신이 친정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371년에 역모를 꾀한다는 혐의로 신돈을 붙잡아 수원으로 유배보낸 뒤 곧바로 처형시킨다.

6. 비극적인 최후


'''고려사에 따르면''' 말년에 공민왕은 거의 반 폐인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는 공적 기구인 국왕으로서의 정치와 행정에 대한 전권은 신돈에게 맡긴 채, 노국대장공주 영전 건설에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동원했고 이는 결국 국가재정 악화와 인부의 사망자 증가를 불러왔다. 그리고 언제나 슬퍼하면서 불공이나 탄식으로 날을 지새웠다.
민심도 당연히 악화되었으나 말리는 신하들의 간언 자체를 파면이나 처형 등의 처벌로 틀어 막아버렸다. 신돈이 키워놓고 새로운 정치 원동력으로 삼으려고 했던 사대부들조차 공민왕의 영전공사 강행과, 여러 난행들에 실망해 있었고 공민왕 역시 신하들을 믿지 못한 채 흥왕사의 변 당시 자신을 보호했던 환관들만을 믿고 의지했으며, 영전공사에 찬성한 일부 신하들만을 비호하였다.
결국 공민왕은 반 폐인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모든 육체적, 정신적 동력을 잃어버린 상황이 되었으며 다급해진 것은 후사의 문제였다. 하지만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를 제외한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아서인지 다른 후궁들의 몸에서 공민왕의 후사가 나올 가능성은 매우 낮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공민왕은 스스로의 수명을 길게 보지 않았고, 애써 살려고 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선왕 충정왕은 16살의 어린 나이로 원나라에 의해 독살당했고, 덕흥군은 역적이 되었던데다 그 왕씨 혈통을 부정했던 바 있어서, 당시 살아 있는 왕손들은 대부분 공민왕과 촌수가 멀었다. 참고로 우왕 때 처형당한 충혜왕의 서자 왕석기는 이 당시 아예 존재가 알려져 있지도 않았다.
이래서 공민왕의 후계자 문제는 중요할 수 밖에 없었다. 신돈의 여종이었던 반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왕우는 공민왕의 아들이 맞는지에 대한 혈통 문제가 있어서, 공민왕은 "왕우의 생모는 반야가 아니라 죽은 궁녀 한씨"라고 선포해 출신이나 혈통 문제를 덮으려고 했다.
하지만 멀쩡한 생모를 두고 다른 여자를 생모로 선포한 것은 오히려 왕우의 혈통을 더욱 의심스럽게 하는 결과만 낳았고,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마저 왕우가 자신의 손자인지 의심해 다른 왕족을 공민왕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다. 특히 명덕태후는 공민왕의 사후에도 이 문제 때문에 우왕의 즉위를 반대한 적이 있다. 이 반야와 우왕 이야기 때문에, 아예 "공민왕 본인이 일종의 무정자증이어서 처음부터 후손을 남기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는 루머가 있는데, 노국공주와 반야가 임신한 것을 볼 때 가능성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공민왕은 성적 측면에서도 방종해져 공민왕 스스로 여장을 하기도 하고, ''''자제위''''라는 미소년 집단을 뽑아 자신을 시중 들게 했다. 나중에는 공민왕이 이들로 하여금 후궁들을 '''범하게''' 해놓고 자신은 이것을 '''지도, 감독(!)하거나 감상하고 있었다 한다.''' 이때문에 공민왕의 왕비 중 한 명인 정비 안씨는 이를 참다 못해서 머리를 풀고 자살을 시도했고, 공민왕도 이에 질려서 잠시 그만뒀다는 기록도 있다.
자제위 소속 젊은이들은 궁에 갇혀 국왕의 상대를 해야 했기에, 대가로서 많은 재물과 권세를 누렸으며 궁녀들과도 문란하게 행동하여 신하들의 지탄을 받았다. 후에 공민왕을 살해하는 홍륜은 외척이던 남양 홍씨의 자손인데, 공민왕의 어머니 명덕태후에게는 친정쪽으로 조카증손자가 되고, 공민왕에게는 외사촌형의 손자, 즉 손자뻘이 된다. 홍륜의 아버지인 홍사우도 공민왕에게 홍륜을 멀리하라고 간언할 정도로 홍륜의 집안에서는 홍륜의 사람됨을 우려하기도 했다.
결국 공민왕은 이 자제위 중 하나인 홍륜이 3비 익비 한씨를 임신시키자, 공민왕은 그것을 은폐할 의도로 홍륜과 내시 최만생을 죽이려 했다. 다만 고려사의 기록이 왜곡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는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공민왕이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단지 사통하였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사자들을 살해하려고 했던 것이 공민왕의 의도였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눈치챈 그들에게 역으로 시해당했다.
참고로 익비는 원래 고려왕족 출신으로 왕씨였으나 공민왕의 비가 되면서 한씨 성을 받았다. 그리고 익비가 홍륜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1376년에 역적의 씨를 살려두면 안 된다는 조정의 여론에 따라 살해되었다.
고려사의 기록은 공민왕이 '''변소'''에 행차한 것으로 시작된다. 변소라고 하면 단순히 시골에서 볼 수 있는 낡은 화장실을 생각하기 쉽지만 고대의 변소는 생각보다 규모가 꽤 컸고, 특히 왕실이나 귀족의 화장실은 단순히 화장실 용도로만 국한되지 않고 탈의실의 기능도 겸했으며, 여기서 바깥에서 말하기 힘든 은밀한 사실을 고하거나[22] 남녀끼리 정사를 치르기도 했다.
이때 공민왕에게 내시 최만생이 쪼르르 달려가 "홍륜이 익비를 임신시켰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만취해있던 공민왕은 "홍륜을 죽일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사실을 고한 최만생에게 '''"너도 비밀을 아니 같이 죽어 줘야겠어."'''라고 말한다. 이에 놀란 최만생은 당사자인 홍륜 등과 모의하여 술에 취해서 잠을 자고 있던 공민왕의 처소로 난입해서 칼로 난도질하여 그를 시해한다. 향년 45세였다. 이때 어찌나 처참하게 시해되었는지 '''뇌수가 병풍에 튀었을 정도'''로 시신은 참혹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공민왕을 시해한 무리들은 이후 당황해서 자신들이 죽여 놓고선 왕이 시해당했다며 궁궐 곳곳에 외쳤으나 결국 사태를 보고받아 출동한 이인임과 근위병들에게 모두 체포되었고[23] 홍륜과 최만생은 역모죄로 거열형에 처해졌고 자제위는 모두 참수형에 처해진다. 홍륜의 아버지인 홍사우 역시 연좌제에 따라 함께 처형당했다. 홍사우는 왜구 토벌에 공이 큰 장수여서 홍사우가 죽은 뒤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백성들이 크게 슬퍼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말 그대로 호부견자.
공민왕의 왕릉인 현정릉은 지금도 개성시에 있으며, 북한 정부가 다른 고려왕릉들에 비해 더 신경을 쓰는 듯하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자신이 모셨던 왕인 공민왕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종묘 내부에 공민왕 신당을 세울 것을 명하였다. 왕조 국가에서 종묘의 의미는 상징성이 있다. 조선 왕조에서 진정한 고려 왕조는 공민왕까지 인정한다는 의미라고도 볼 수 있다. 공민왕 신당은 지금까지 현존하고 있고, 덕분에 우리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은 물론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준마도도 감상할 수 있다.
이성계가 공민왕에 대해 저런 조치를 한 것은 진정으로 섬긴 고려의 마지막 군주가 바로 공민왕이라는 점이 근거가 된다. 우왕창왕은 말할 것도 없고, 공양왕도 그저 바지임금으로 내세운 거에 불과하니. 애초에 이성계가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이유가 공민왕 때문이었다. 공민왕이 쌍성총관부 수복을 위해 그 지역의 천호였던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과 협력하면서 이성계까지 등용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성계가 공민왕을 섬겼기 때문에 조선 개국 이후 왕씨 몰살을 자행하는 과정에서 고려 왕들의 어진을 불태울 때 공민왕의 어진은 분소당하지 않았다.

6.1. 공민왕과 자제위 의혹


'''앞서 서술한 고려사의 기록들에 대해 학계에서는 고려 말기의 기록은 대부분 조선의 건국을 미화하고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왜곡되고 윤색되었다고 보고 있다.''' 고려사 자체가 공민왕이 죽은지 80년이 흐른 후 조선 건국 합리화라는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쓰여졌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24]
조선 건국 세력들은 ‘폐가입진론(廢假立眞論, 가짜를 없애고 진짜를 세운다)’이나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 우왕이나 창왕은 왕씨가 아니다)’에 근거해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주장의 신빙성을 위해서는 공민왕이 후사를 얻지 못한 이유를 만들어야하는데 그것이 공민왕의 동성애로 이어지는 것이다. 멀쩡한 공민왕의 아들 우왕이 있었지만, 우왕을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학계에서는 우왕도 궁인이던 한씨(순정왕후 한씨)의 아들로 보고 반야의 이야기도 꾸며낸 것으로 해석한다.
또한 자제위에 대해서도 정치적으로 고립된 공민왕이 젊은 귀족을 모아 친위세력으로 키우려 했다는 견해도 있고, 권문세족들을 믿지 못했던 공민왕이 그들의 자제들을 궁궐에 인질로 잡아두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고려사에도 자제위에 대해 왕권을 강화하고 신변 호위 및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궁중에 설치하였고, 공신과 고위 관직자의 자제를 선발하여 배속시켰다고 나와있다.[25]

6.2. 공민왕 시해에 관한 의혹


중국의 정사인 명사 조선열전에서는 "이인인(李仁人)[26]이 공민왕을 시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공민왕의 시해 사건 배후에는 신돈파(?)였던 이인임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궁녀를 겁탈했다는 홍륜은 이미 아내가 있었다. 둘째, 공민왕은 이런 문란한 사생활에 대한 서술과 달리 정사를 보는 데 별 탈이 없었다. 셋째, 이인임이 권력을 잡은 후에 북원의 사신의 말에서 "왕을 죽인 죄를 용서한다"란 말이 있으며, 명나라에 왕의 시해 사실이 새어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인임이 시해의 배후였기에 이를 두려워했을 것이며, 배후가 아니었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만 이인임과 공민왕 시해의 관련성은 고려사고려사절요 어느 부분에도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 설을 받아들이자면 이와 같은 사실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한데, 그 부분은 이인임 실각 4개월 후 위화도 회군이 발생하면서 집권을 위해 우왕의 혈통과 공민왕의 총명함을 깎아 내릴 필요가 있었던 이성계 등이 자제위의 홍륜 이야기만을 남겼다는 것으로 설명하는 모양.
그러나 이는 사실상 명백한 루머로, 우선 이인임이 혼자 일을 도모하고도 그때까지의 지위를 누리기엔 우선 당시 고려 조정엔 그를 견제할 만한 '''쟁쟁한 명사와 충신'''이 너무도 많았다. 또한 익비의 아이가 홍륜의 아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당시 멀쩡히 정사를 볼 정도로 판단력이 있었던 공민왕이 황급히 홍륜을 살해하려 들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북원 사신의 발언도 정확히는 '''"바얀테무르 왕(공민왕)이 우리를 배반하고 명나라에 귀부하였으므로''' 살해한 것을 인정한다"는 것으로, 정확히는 우왕 원년, '''우왕의 즉위 과정을 정당화'''하는 발언이었다. 이전까지 우왕을 인정하지 않고 심왕의 손자인 터터부카를 강제로 왕으로 세우려던 북원이 이인임의 화전양면책을 받아들여 고려의 후계 승계에 대해 한 발 양보 발언을 보내온 것이다.
또한 이인임신돈파여서 공민왕에게 앙심을 품었으리라는 설은 아예 앞뒤가 다른 것으로, 애초에 이인임을 전민변정도감에 넣은 사람은 신돈이 아니라 공민왕 자신이었다. 그 증거로서 당시 신돈의 측근이던 이춘부 등이 신돈 실각과 함께 모조리 사형당한 것과 달리 이인임은 그대로 다시 공민왕의 곁에 돌아왔다. 즉 그는 신돈 일파였다기보다는 공민왕의 수족이었다.
따라서 신돈파(?)였던 이인임이 앙심을 품고 시해했다는 주장은 다소 무리가 있는 주장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고려사 이인임 열전의 원전이 된 고려국사는 정도전 등이 직접 나서서 편찬한 책으로 이인임에 대한 비난은 티끌만한 것도 빼지 않았다. 고려국사는 단기간에 조선 개국공신들이 편찬에 참여하면서 이들의 사견이 너무 많이 개입됐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여러차례 개수되었는데 현존하지는 않는다. 공민왕을 약간 깎아내리기 위해 이인임의 가장 큰 악행을 홍륜에게 옮기고 없던 일로 만들어가며 축소 기록하는 일은 사실상 정도전태조의 인격이 뒤바뀌지 않는 한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27]
마지막으로, 이인인(李仁人)이 공민왕을 시해하였다는 중국발 조선열전의 정확한 내용은 사실 '''이인인과 그 아들 이성계[28]가 고려 사왕(四王,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을 함께 시해'''하였다는 오기이다.
어쨌거나 홍륜의 공민왕 시해 이후로 신돈의 개혁 운동에 반대하던 자제위의 집안들은 약화[29]되었으며, 이인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익비 등 우왕에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를 차근차근 정리하여 자신의 정치 기반을 공고히 했다.[30]
이런 배경들에 착안하여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이인임이 자제위를 충동질해 공민왕을 차도살인 했다는 과감한 각색을 보이고 있다. 또한 그 전의 드라마인 대풍수에서도 비슷한 각색을 하였는데 이쪽은 이인임의 내연녀인 가상의 고려 최고 무당이 음모를 꾸며 공민왕을 시해했다는 내용이다(…).

7. '개혁 군주'의 한계 - 평가


史臣贊曰 王之未立也, 聰明仁厚 民望咸歸焉 及卽位 勵精圖治 中外大悅想望大平。自魯國薨逝 過哀喪志 委政辛旽 逐殺勛賢 大興土木 以斂民怨。狎昵頑童 以逞淫穢 使酒無時 歐擊左右。又患無嗣 旣取他人子 爲大君 而慮外人不信 密令嬖臣 汚辱後宮 及其有身 欲殺其人 以滅其口。悖亂如此 欲免得乎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왕이 즉위하기 이전에는 총명하고 어질고 후덕하여 백성들의 기대를 모았고, '''즉위한 후에는 온갖 힘을 다해 올바른 정치를 이루었으므로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면서 태평성대의 도래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국공주가 죽은 후 슬픔이 지나쳐 모든 일에 뜻을 잃고 정치를 승려 신돈에게 맡기는 바람에 공신과 현신이 참살되거나 내쫓겼으며 노국공주의 영전 건설 같은 무리한 건축 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샀다. 완악한 무뢰배들을 가까이 해 음탕하고 더러운 짓을 함부로 하였고 수시로 술주정을 부리며 좌우의 신하들을 마구 때리기도 했다. 또 후사를 두지 못한 것을 근심한 나머지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대군으로 삼고서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해 몰래 폐신을 시켜 후궁강간하게 한 다음 임신하게 되면 그 자를 죽여 입을 막아버리려 했다. '''패륜적 행동이 이와 같았으니 죽음을 면하려고 한들 어찌 피할 수 있었겠는가?'''"

고려사》 공민왕 - 논평[31]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반원정책을 펼친 고려의 회광반조를 상징하는 인물로 불리는 한편 대조적으로 아내의 죽음 이후 고려의 멸망을 가속화시킨 암군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조선광해군과 비슷한 면모가 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나 대동법처럼 공민왕도 전민변정도감과 개혁 정책을 펼쳤으나 후기의 타락은 두 명 다 비슷하다. 국사 문제에서는 두 사람이 묶여 나오는 경우가 꽤 잦은 편.
일단 의심이 많아 신하를 함부로 죽이거나 숙청하는 일을 자주 벌이는 것이 가장 큰 비판 대상으로 그 예로 들 만한 사건이 당시 '삼원수'라 불리며 홍건적의 침입으로부터 고려를 구해낸 당대의 명장인 안우, 이방실, 김득배와 정세운을 한꺼번에 왕명을 빌미로 살해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들은 권력을 탐했던 간신 김용의 모략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인물들인데 후에 이러한 모략이 밝혀졌고, 김용도 본인이 흥왕사의 변을 일으킨 탓에 최영에 의해 제거되었다.
역사학자 임용한은 이 사건을 공민왕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로 판단하고 있다. 공민왕이 세력이 커진 무장들을 제거하기 위해 김용을 사주하여 그들을 죽였고, 오히려 이 때문에 자신이 코너에 몰리자 최영을 동원해 김용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 씌어 그를 제거했다는 것이다. 흥왕사의 변 때 공민왕을 끝까지 호종하다 살해당한 홍언박도 이 희생양 중 하나로 지목되었으며 이후 홍언박의 손자인 홍륜이 공민왕을 시해한 이유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한편 최영과 이성계 이전에 고려의 명장으로 손꼽히던 인당이라는 장군이 있었다. 인당은 반란군의 토벌 지원병으로 갔던 원에서도 꽤 용명을 떨쳤고 압록강 변의 영토를 수복하는 전쟁에서도 상당한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공민왕이 보낸 심복 장수였던 강중경을 군법 위반으로 처형하면서 국왕의 의심을 샀고 동시에 원나라가 반발하면서 이를 해결하고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희생물로서 인당을 처형시켰다. 오죽하면 나중에 신돈이 등용될 때 신돈이 "전하께선 참소하는 말을 잘 믿으신다고 들었습니다"라고 언급했을 정도.
이런 무장 세력들의 대한 숙청은, 임진왜란 시의 선조와 마찬가지로, 계속되는 전란 속에서 공을 세워 세력을 키워간 무인 세력들로부터 왕권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공민왕은 1356년 병진정변 당시 무신들의 회의 기구였던 정방을 가장 먼저 폐지시켰다. 그가 얼마나 무장 세력들을 경계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더군다나 고려 전체를 뒤흔들며 혼란하게 만들었던 무신정권이 끝난 지 채 100년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김득배 등의 자식들을 공민왕이 위로하였던 것은 이런 불가피한 숙청 이후의 나름의 속죄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도 공민왕 사후 무장 세력들의 힘은 더욱 커졌으며 이들을 견제하던 이인임마저 무진피화 사건으로 인해 몰락한 이후 권력은 최영이성계가 장악했으며 결국 이성계가 역성 혁명을 일으켜 조선 왕조를 세웠다. 하여튼 이러한 공민왕의 의심은 신하들의 불안감을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이후에 홍륜이 공민왕을 시해한 결정적인 이유로 제기되기도 했다.
성격 역시 우유부단하여 개혁을 시도한다고 했지만 중요한 순간에서 우물쭈물하는 경향이 있기도 했는데 고려사고려사절요에서는 이런 점들을 공민왕의 주요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이러한 성격은 어린 시절부터 무려 10년씩이나 원에서 볼모생활을 하면서 불안정한 생활을 한 데다가 즉위한 이후에도 노국대장공주를 제외하고는 든든한 지지기반이 하나도 없었던 점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국정을 주도하던 대신들의 대부분은 공민왕이 척결해야 할 권문세족들이었고 그렇지 않은 신하들 또한 공민왕의 눈으로는 고려 왕실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한편 모후인 명덕태후 또한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진 못했다. 지지기반이 하나도 없었던 점과 공민왕의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이 합쳐져 우유부단함으로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여러 가지로 한계나 단점도 많았던 군주로 고려 멸망에 책임이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조선 시대에 편찬되었고 공민왕 본인이 조선을 건국한 주역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위치에 있는 만큼 그에 관한 기록과 평가는 주의해가며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고려의 국력과 군사력의 회복, 영토 확장, 권문세족의 세력 약화, 신진 사대부의 성장 등의 긍정적인 측면 역시 분명히 존재하였다.
하지만 신흥 무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무장이었던 유탁과 신진 사대부들에게 존경을 받은 유숙까지 숙청을 해버린 바람에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실린 공민왕에 대한 평가가 추락하는데, 실제로 조선 왕조에서도 이 두 사서에 대해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도 도저히 공민왕을 옹호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고려사의 기록된 말년에 대한 왜곡 가능성과 조선의 평가가 어땠던 간에 오히려 공민왕은 객관적인 교차 검증을 하면 할수록 비판점이 더 쏟아지는 판국이다.
참고로 공민왕 대에 무고로 처형된 유탁의 경우는 안우의 전우이자 이성계의 선배 무장이고 이성계조차도 최영과 더불어서 가장 존경했던 무인이다. 실제로 그의 아들인 유습은 대마도 정벌에 참여했다. 특히 이성계의 꿈 이야기에서 유탁의 이야기가 나온 것을 보면[32] 신흥 무인들의 중심이 본시 유탁 장군이었던 것이다. 정도전의 경우는 본시 이색을 존경했다고 알려져있으나 정작 그의 스승은 유숙이었다. 유탁은 신돈과 관련되어 있다는 무고로 인해 처형당했고 유숙은 지은 시가 신돈의 행태를 꼬집은 것이라는 누명을 쓰고 귀양간 뒤 신돈의 음모로 살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실질적으로 개국공신들의 스승이자 상관들인 인당, 정세운, 안우, 이방실, 유숙, 유탁, 홍언박, 김득배 등 명망 있던 여러 문무 신료들이 결과적으로는 공민왕의 손에 죽었던 것이다. 그래서 재위 말기의 평이 조선 왕조의 손을 떠나서 좋은 평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정치적인 숙청도 명확한 목적성을 가지고 필요한 만큼만 해야 제대로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태종이 일종의 모범 사례인데 지나친 숙청은 신하들에게 두려움만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군주에 대한 불신과 경계심까지 품게 만들며 쿠데타의 빌미가 될 수 있다. 훗날 말년의 공민왕을 살펴보면 본인이 권력을 쥐어주고서도 믿지 못해 숙청한다든지, 자신의 힘에 좀 가깝다 싶으면 무작정 죽여버리는 무자비한 모습이 보인다.
신하들을 복종시켜야 할 그의 리더십도 꽤 부족했다고 여겨진다. 나중에 덕흥군을 따라 고려에 침입한 최유도 한 때는 공민왕을 따랐었고, 호종공신이던 조일신을 제어하지 못했던 것을 보더라도 그런 면의 카리스마는 부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조일신이 난을 일으킨 것은 순전히 조일신 본인의 뜻만으로 행해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너무나도 갑작스레 난이 발생했고 더군다나 주요 타겟은 공민왕을 비롯한 왕실과 대신들이 아닌 기철을 비롯한 친원파 세력이었다. 이를 보면 적어도 조일신의 난에 공민왕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거나 혹은 반원 세력을 탐탁치 않아하던 공민왕의 의중을 알아챈 조일신이 선수를 쳤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조일신을 직접적으로 제압한 것은 공민왕의 사주를 받은 최영과 이인복이었다는 사실이 반론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공민왕이 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거나 직접적으로 지원을 했더라도 아직까지는 조정 내에서 친원파 권문세족들의 힘이 큰 시기였다는 것과, 원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조일신을 제압했을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공민왕은 신하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하거나, 신하들에게 위엄을 보일 정도의 뚝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공민왕은 즉위 후 기철 일파 척결을 포함한 반원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했음에도 늘 자신의 입지에 대해 불안해했으며, 원, 명과의 외교적 갈등이나, 조정 내부의 정쟁은 그의 섬세한 성격상 본인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즉, 고려 말의 혼란한 외교관계와 더불어 이미 고려에 대한 충성심이 존재하지 않는 신하들과의 권력투쟁을 견뎌내기에는 공민왕의 성격이 너무 맞지 않았던 것. 참고로 공민왕의 명으로 쌍성 총관부 수복 작전에 선봉에 섰던 유인우 역시 나중에는 공민왕을 배신하고 덕흥군의 편에 붙었다.
근본적으로 공민왕 주변에 형성된 측근 세력 자체가 미래의 출세를 위해 공민왕에게 의탁했던 호종공신이나 자신의 외척 등으로 좁았던게 문제였다. 이마저도 공민왕은 이들을 완전히 믿지 못했다는 것은 아이러니. 하여튼 이러한 연유로 큰 권력을 쥐어주고 적절한 시기에 숙청을 반복했고 이러한 점은 최측근들조차 추후에 공민왕의 통수를 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공민왕이 또 다른 주인공으로 나오는 MBC 드라마 신돈에서도 잘 표현된다. 초기부터 정세운이나 이제현, 이인복을 제외한 대신들을 쉽사리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원에서부터 자신을 호종했던 조일신과 김용조차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례로 김원명 등이 사직을 청하자 쉽사리 윤허하던 공민왕이 이제현과 그 뒤를 이어 이인복이 사직 요청을 해오자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장면이 나온다. 공민왕이 얼마나 그들을 믿었는지 알려주는 부분.
그리고 신진 사대부들의 육성이 당시까지는 미비했다. 동시에 공민왕이 이들을 완전히 포섭하지 못한 것이 한계라 할 것이다. 공민왕 자신의 사상에서도 성리학을 깊게 이해하고 수용하기보다 기존의 한당유학의 전통과 불교에 심취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런 공민왕과 비슷한 사상 체계를 가지고 있던 기성 유학자들은 기존 권문세족과 일정 부분 유착 관계에 있어 개혁에 힘을 실어주기 어려웠다.
그리고 정도전, 윤소종, 정몽주, 권근, 조준과 같은 소장 성리학파 세력들은 공민왕 대까지는 젊어서 중책을 맡기기 어려웠고, 왕 말기에는 국왕이 실의에 빠진 채 신하들을 불신해 개혁을 추진하지도 못하였다. 이 신진 사대부들은 공양왕 때가 되어서야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문제는 이들 중 정도전, 조준 등을 비롯한 강경파들은 고려를 다시 일으켜세우는 선택을 한 게 아니라 아예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건국하는 선택을 했다는 것.'''.
더불어 원과 홍건적,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무장들의 수훈이 늘어남에 따라 그들의 토지를 몰수하기가 어려웠고, 오히려 토지를 분배해야 했으며, 이는 재정 악화로 이어져 군비 조달의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원의 제도 하에서 사병 집단을 거느리던 장수들을 통제하거나 사병을 혁파하기도 어려워져 개혁을 추진하기가 어려웠다.
공민왕은 계속 현실적 권력 유지를 위한 기성세력 유지와, 개혁을 위한 기성세력 제거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으며 현실적 힘도 제약되었다. 본격적이고 근본적인 전제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이성계가 군권을 거의 장악했던 공양왕 대였으며, 그때조차도 기성세력의 무수한 반발이 있었다.
거기다가 공민왕 본인부터가 직접적으로 무엇을 하기보다는 호종 공신 혹은 인척 등으로 이루어진 소수의 측근에 의존하고, 편 가르기, 숙청, 암살, 배신이라는 극단적인 방법들로 국정을 운영하였던 것도 자충수였다. 결국 이 일련의 잔혹한 숙청과정을 통해 정치적인 장애물들은 없어졌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신임할 수 있는 신하들도 같이 사라져버린 셈이다.
신돈을 기용했을 때도 이런 모습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는데 권문세가들과 신진세가들이 하나같이 썩어 문드러졌다고 비판해 타락한 고려의 현실에 대해 개탄하는 동시에 신진사대부들이 권문세족들을 비판하지만, 막상 권문세족과 서로 통혼하기를 원하며, 심지어 권력을 잡으면 권문세족과 똑같아진다는 식이었다. 또한, 통치자의 역할이 누구나 다 말할 수 있는 현실을 말하기보단 그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지에 대한 대책을 내놓는 것이기 때문에 공민왕 본인의 이 발언은 어찌 보면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연고 없는 신돈이라는 외부인사를 기용해 개혁을 다시 시도했지만 신돈마저 권력을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그도 숙청한 후엔 아예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신돈 숙청 후 자제위를 동원해 엽색 행각을 벌였다는 기사가 있지만 어느 정도 왜곡의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봐야 한다.
결국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했고 공민왕 역시 실패한 군주로 남았지만, 그의 개혁 시도는 신진 사대부들 중에서도 급진파였던 정도전 등과 신흥 무인 세력이었던 이성계에게 많은 힘을 부여해주었고 이는 조선 건국의 밑거름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막장이던 고려의 국세도 생각보다 많이 회복하여 공양왕 대로 가면 조선 후기보다 국가에 등록된 전답의 수가 많아지기도 했다. 다만 그렇다고 이 시기 고려가 조선보다 농업이 발전했다는 뜻은 아니다. 농업은 당연히 조선이 훨씬 앞섰으며 고려가 회복돼갔다 해도 왜구들 때문에 여전히 나라는 개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에 끊임없이 망가져 가던 고려의 국력을 꽤 회복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는 있을 것이다.
조선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도 공민왕 사당이 건립되기도 했고 곳곳에 공민왕을 신으로 모시는 사당이 많이 세워졌다. 대표적인 예가 서울 창전동에 위치한 공민왕 사당. 이는 이성계에 의해서인데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은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공격에 내응하기도 했고, 그런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는 만 스물한살의 나이로 공민왕 앞에서 격구 실력을 뽐내기도 했으니, 이러한 인연들 그리고 이성계가 공민왕을 진짜 고려의 왕다운 왕으로 여겼는지 종묘에 공민왕을 모시게 된 것이다. 영정을 보면 노국공주와 함께 그려지고는 했는데 거의 공인 커플로 인정받은 셈이다.

7.1. 의심많고 잔인한 성격


'''천성이 의심이 많고 잔인해서 심복대신이라도 권세가 커지면 의심해서 죽였다.'''

고려사

조선 왕조가 들어서고 자신들의 손으로 멸망시킨 왕조의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실 종묘에 사당까지 지어줄 정도로 공민왕을 대우한 조선이었지만 그의 천성을 잔인하다고 힐난했다. 역대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고, 전 왕조의 마지막 왕이 성군으로 평가받은 경우는 없다. 물론 공양왕이 있지만 실질적으로 공민왕을 진정한 고려의 마지막 왕으로 보기도 하므로 고려사가 조선 왕조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특히 이성계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우왕부터 신돈의 핏줄로 조작해야 했기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부왕인 공민왕의 재위 후반기 부분부터 지어내서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공민왕의 평을 담은 고려사는 세종대왕이 불공정한 평가를 내릴 필요가 없다고 하여 몇 번이나 고친 것이지만 완성본이 나온 것은 세종대왕이 승하하고 난 이후라 보지 못했다. 즉, 이게 완전히 공정하다고 확단하기 힘들고 세종대왕이 검증한 버전인 것도 아니다. 생전 세종대왕의 성격을 고려할 때 완성되었다면 또 수정하라고 했을 가능성도 꽤 높다.
그러나 전조의 사서라고 해서 무조건 조작부터 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옳지 못한 시선이다. 그 증거가 분명치 않은 사건, 요컨대 우왕의 출생에 관한 건이라든지, 공민왕이 자제위를 시켜 후궁들을 범하게 했다든지 하는 등을 제외하고서라면 대부분의 사건들은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보아야 한다. 김득배, 안우, 이방실의 숙청 건, 신돈을 중용했다가 내친 건과 같은 것들은 조작이라고 볼 수 없다.
김득배, 안우, 이방실은 이성계와 최영 그리고 정도전 등과 같은 신흥 무인 세력과 신진 사대부였고 특히 김득배의 제자이자 문생은 조선 태종 이후 재평가받으며 존숭되기까지 했던 정몽주였다. 일찍이 그는 김득배의 문생이어서 이 일을 한 없이 한탄했다고 한다. 특히 후대로 가면서 공민왕의 아내 노국대장공주가 몽골 출신이라는 것에 더해, 윤이이초 사건과 그 뒤를 이은 표전문 사건이 1차 왕자의 난로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등 정치 외교적으로 안정되면서 본격적인 혹평이 쏟아진 것이다.
확실히 세 숙장의 숙청 건을 보면 천성이 의심이 많고 잔인해서 심복대신이라도 권세가 커지면 의심해서 죽였다는 평가도 틀린 것은 아니다. 물론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측근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다는 변명은 가능하다. 저 평가는 명군으로 평가받는 고려 광종 왕소조선 태종 이방원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사실 저런 면이 없는 군주는 드물다. 그렇지만 측근을 쳐낼 수 있는 환경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 그리고 그 측근을 확실하고도 안전하게 쳐내는 것은 오로지 왕의 책임이다. 공민왕은 그 판단을 그르쳐 홍륜에게 암살당했다.
조선 왕조 성종 때가 되면 공민왕은 수양제(!) 급으로 묘사되고, 영조 대에는 영조실록의 내용으로 보아 절대로 본받아선 안되는 왕이 되었다. '''실제로 광해군을 공민왕과 맨 처음 비교한 것은 조선 왕조였다.'''

8. 예술적 기질


'''천산대렵도'''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지녔던 군주이며, 특히 그림에 뛰어나서 대표작으로 천산대렵도가 유명하고 아끼는 신하 염제신의 초상화도 직접 그려줬다고 한다. 또한 직접 거문고를 다루기도 했다는데, 이 공민왕이 다룬 것으로 전해지는 거문고가 수덕사에 있다. 공민왕 사후 길재를 통해서 조선 왕실에서 거문고를 소장해오다가, 일제 강점기 때 의친왕 이강이 당시 수덕사의 승려인 만공에게 선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9. 가계


  • 제1비 :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 제2비 : 혜비 이씨(惠妃 李氏)
  • 제3비 : 익비 한씨(益妃 韓氏) - 덕풍군 의(德豊君 義)의 딸.
  • 제4비 : 정비 안씨(定妃 安氏)
  • 제5비 : 신비 염씨(愼妃 廉氏) - 서흥 염제신의 딸. 혜비와 같이 공민왕 사후 출궁해서 여승이 되었다.
  • 제6비 : 순정왕후 한씨(順靜王后) - 우왕이 추존. 반야의 존재 자체가 조작이고 궁인 한씨가 우왕의 친모가 맞다는 주장도 있다.
  • 후궁 : 반야(般若)
    • 아들 : 우왕(禑王) 모니노 (牟尼奴)

10.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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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에 모셔진 노국대장공주공민왕.[33]
경기도 박물관에 모셔진 공민왕과 노국공주 어진. 경기도박물관 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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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인근 화장사에 보관되고 있었던 원본 어진.#
조선 후기 영정 (작자 미상)

11. 현대 매체에서


"공민왕은 영웅의 모습을 갖춘 왕인 동시에 로맨티스트이자 최고의 예술가였다. 모든 것을 지닌 사람이여서 매력을 느꼈다."

"궁안에 갇혀 있지 않고 역동적인 왕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백성의 소리를 듣고 기득권층의 부패를 혁파하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고자 했던 이상적인 개혁가였다고 생각해요. 가능만 하다면 개성에 있는 공민왕의 능에 가서 참배하고 싶은 심정입니다."출처

2005년~2006년 MBC 주말 드라마 신돈에서 공민왕을 열연한 정보석[34]

예술적 감각과 반원 정책으로 대표되는 개혁 군주라는 이미지와 노국공주와의 로맨스, 극적인 삶 등 여러 매력적인 요소 때문인지 한국사에서 인기가 많은 왕 중 한 사람이다. 게다가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하면서 고려가 더 이상 부흥할 기회를 잃고 멸망의 길을 걷는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여말선초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도입부에 넣기에도 좋은 인물이다. 그 인기를 반영하듯 사극에서도 많이 등장했다.
  • 대표적으로 개국에서 공민왕을 연기한 임혁신돈에서 공민왕을 연기한 정보석이 열연한 바 있다. 특히 신돈의 공민왕은 공민왕의 말년에 보인 광기어린 모습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영화 <쌍화점>의 고려 왕(주진모)도 공민왕이 모티브가 된 캐릭터다. 다만 어디까지나 공민왕이 모티브인 것이지, 영화 속 고려 왕이 절대 공민왕 본인은 아니다. 그런데 선전물에선 공민왕과 자제위 언급이 나온다. 수위가 높아서 오히려 고증 비판은 적은 편.
  • 신의에서는 류덕환이 재위 초기의 공민왕을 맡았다. 이 드라마에서의 모습은 공민왕을 참고할 것. 비슷한 시기에 방영한 대풍수에서는 류태준이 공민왕을 연기하였는데, 고려사의 기록대로 노국공주가 사망한 후에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며 삐뚤어지다가 급기야 자제위의 홍륜을 상대로 남색을 하게 된다. 그런데 노는 모습이 상당히 변태스럽다는 평이 있다(…).[35] 그러나 결국 이인임의 사주를 받은 홍륜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김명수가 역을 맡았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신하들의 정쟁에 모든 의욕을 잃고 공주의 영전 건설에만 몰두하는 폐인으로 등장. 신하들 가운데 믿을 사람이 없어 자제위를 친위 세력으로 두었고 의심증이 있어 믿었던 신하들을 도륙했던 것은 역사와 같다. 그러나 난행을 일삼다가 살해당한 정사와 달리 태후와 정도전의 일갈에 다시 한 번 희망을 품어 이인임을 내치고, 정도전에게 자신의 뜻을 담은 그림을 하사하며 대궐로 다시 들어가는 것을 모니노와 약속하는 등 정사를 바로 잡을 의지를 다졌으나, 내쫓길 위기에 처한 이인임의 모략으로 홍륜에게 살해되었다. 드라마에서 홍륜에게 살해당하기 전에 노국공주의 환청 혹은 영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공민왕은 이 목소리를 듣고 공주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음에 홍륜이 들어와 칼을 겨누자 분노하여 크게 소리치나 결국 살해당한다. 드라마 1화, 2화는 공민왕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만큼, 사실상 1화, 2화의 진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 코에이징기스칸 4에서 파워 업키트 추가 시나리오 4번(1370년)에서 고려 국왕으로 등장하는데 공민왕 말년이라 그런지 능력치는 다소 수수한 편이다. 아마 게임 제작 시 공민왕 말년의 난행을 감안하여 수수한 능력치를 준 듯하다. 다만 생몰연도 정도는 고증해 주지… 수하 장수로 이성계최무선이 있는데 이성계 때문에 그럭저럭 게임을 이끌어 갈 수 있지만, 어쩐 일인지 화포병을 편성할 수도 없고[36] 기본 병과인 경보병, 단궁병으로만 초반을 이끌어야 하는 데다가, 주변의 명과 무로마치 막부도 강적인지라 쉽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노국공주는 1365년에 이미 사망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여기서는 노국공주가 생존해 있다! 하지만 출신이 고려 출신으로 되어 있다.[37] 파워 업키드에서 해당 시나리오를 플레이하면 명과 무로마치 막부의 파상공세가 펼쳐져서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의 막장 상황을 간접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먼저 명과 동맹을 맺고 무로마치 막부에 전력을 집중하는 게 정석적인 공략법[38]. 더욱이 명의 북경이 문화도가 높아서 교역을 통해 고려의 문화도를 올리기 쉽고, 명이 남경에서 다자이후를 계속 공격해 대기 때문에 다자이후의 방어도가 약해진 틈을 타 어부지리로 점령할 가능성도 있어서 더욱 이득이다. 또는 조금 멀지만 가도가 깔려있는 북원의 카라코룸을 점령 해서 몽골기병과 화포병을 확보 해도 괜찮다. 후계자는 고려의 문화치와 공민왕의 능력으로는 좋은 왕자를 생산하기가 어려우므로 그냥 공주를 이성계에게 시집 보내 사위 무장으로 삼는 게 무난하다.
  • 그나마 게임 원조비사(징기스칸 3: 고려의 대몽항쟁)에서는 정치 B 전투 C 지휘 B 매력 A로 쓸 만해서 대부분 시나리오 3에서 충숙왕일부러 죽이고 공민왕을 군주로 삼아서 플레이하거나 공민왕을 부하로 삼아서 플레이를 해봐도 꽤 잘 하는 편이다.
  • 대체역사소설인 환제국사의 주인공은 신들의 힘으로 공민왕으로 태어났다.
  • 애니메이션 흙꼭두장군에서 흙꼭두장군이 지키던 쌍릉이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쌍릉을 모티브로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2. 관련 인물


  • 김용
  • 노국대장공주
  • 반야
  • 신돈
  • 우왕
  • 윤소종[39]
  • 이인임
  • 정지
  • 최만생
  • 홍륜

13. 같이 보기



[1] 몽골어로 바얀은 '풍요로운' 이란 뜻을, 테무르는 '철(鐵)'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2] 고려사 열전은 신돈, 신우, 신창 열전을 마지막으로 끝난다.[3] 어찌보면 당연한 게 이성계는 홍건적의 난왜구 토벌로 본인의 능력을 나타내기 전에 부친 이자춘과 더불어 동북면의 실력자로서 공민왕의 개혁에(반원정책) 있어서 본래 친원에서 공민왕의 신하가 되어 역사에 전면에 나타나게 해준 군왕이었으니 이성계 개인에게 있어선 역성혁명으로 비록 고려를 무너트리고 자기 나라(조선)를 세웠지만 오늘날의 이성계를 있게 해준 이가 공민왕이기에 그 충성심이 적어도 거짓은 아니었을 것이다.[4] 태조는 태왕, 성종은 성왕, 명종은 명왕 등등.[5] 충렬왕의 경효, 충선왕의 선효, 충숙왕의 의효, 충혜왕의 헌효, 충목왕의 현효라는 시호는 공민왕 6년에 일괄적으로 올려진 것이다.[6] 충혜왕과 공민왕의 모후는 고려인공원왕후 홍씨였던 반면 용산원자의 모후는 원나라 출신의 조국장공주였다.[7] 충숙왕이 생전에 직접 신하들에게 공민왕을 왕위에 올려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었다고 한다.[8] 이후 정방은 다시 부활했고, 1388년 이성계위화도 회군을 일으켜 신진사대부가 권력을 잡았을 때 완전히 사라진다.[9] 고려 민왕은 당연히 공민왕이다.[10] 조선 초대 국왕 태조 이성계.[11] 조선 3대 국왕 태종 이방원.[12] 공양왕의 아버지는 공민왕에게 '정안백' 백작위를 받았다.[13] 공민왕의 모후 명덕태후는 생전 공민왕에게 '숭경왕태후' 존호를 받았다. 고려사 후비열전에 수록된 숭경왕태후 책봉문에는 대놓고 공민왕이 고려의 옛 문물을 참고했다고 언급한다.[14] 황색은 천자의 색으로써 제후는 쓸 수 없었다.[15] 천자는 12장 면복을 입었으나 제후는 9장 면복만 입을 수 있었다.[16] 여담이지만 이 시기 지구 반대편 유럽오스만 제국의 팽창, 흑사병의 유행으로 혼란했었다.[17] 지금의 함경남도 등지에 위치.[18] 정보 출처 : 두산백과[19] 이 정동행중서성은 정동행성이라고도 불리며 일본 정벌을 위해 일본 정벌을 단행하면서 1283년과 1285년에 각각 설치했다. 그러나 세조 쿠빌라이 칸이 붕어한 뒤 일본 정벌이라는 본래의 목적이 없어지면서 원나라에 하정사(賀正使)를 파견하는 의례적인 기구로 바뀌었다가 1299년에는 다시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기구로 변하였다.[18][20] 다만 이렇게 이동했기에 원나라의 잔당 세력이던 나하추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다.[21] 외가의 성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22] 그래서 삼국지에서 이적이 화장실에 간 유비에게 암살 음모를 알린다거나 한복이 지우개 칼로 자살하는 얘기가 나온다.[23] 최만생의 옷깃에 혈흔이 묻은것을 이인임이 발견했고 이인임은 그를 붙잡아 고문하자 최만생이 모두 실토하여서 들통났다.[24] 물론 고려사가 조선 세종시기 과도한 윤색으로 새로 쓰이긴 했지만 기본적인 입장은 고려가 멸망할 수 밖에 없던 이유와 조선이 건국되었어야 하는 정당성에 기반하기 때문에 이를 충분히 담아내야 한다. 특히나 후술하듯이 공민왕과 우왕, 창왕의 관계에 대한 설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공민왕 시기부터의 왜곡 가능성이 농후한 편.[25] 몽골제국에서 이러한 비슷한 제도인 '''뚤루게(禿魯花)'''라는 것이 존재했으며, 당장에 공민왕도 이 제도로 인하여서 중국에 있어야했다.[26] 이인임의 오기로 보인다. 아마도 임과 인이 발음이 비슷해서 잘못 들어서 오기됐을 가능성이 있다.[27] 그러나 생각해봐야할 것은 조선초 창업자들의 생각에서 고려의 마지막 왕이 공민왕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조선 창업의 정당성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부정적인 기술을 할 수 있음을 고려해봐야 한다.(우와 창은 신돈의 자식들이니 고려 대상도 아니고, 공양왕은 왕위를 비워둘 수 없는 것이기에 올린 사람이다. '''즉, 조선 개창자들-특히 정도전-에게 고려는 공민왕이 사망하면서 끝난 나라였다.''')[28] 이성계의 휘는 단(旦)이며 중국에서는 이인인과 그의 아들 단(旦)의 짓이라고 적고 있다.[29] 자제위는 1372년에 설립된 것으로, 그 전해인 1371년에 이미 신돈이 사사되었다. 오히려 자제위는 신돈의 개혁이 사실상 실패가 된 이후 왕이 1인에게 몰아주던 권한을 문벌이 좋으면서 연소한 인재들을 육성하여 향후 집단에게 주기 위한 발판으로 사용되기 위한 것으로 봐야한다.[30] 그러나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굉장히 미묘한 측면이 있다. 공민왕이 후궁들과 자제위 사이에 불륜관계를 만들어서 이를 구경하였다라는 것을 도대체 누가 알 수 있고, 익비가 임신한 아이가 홍륜의 씨인지 공민왕이 어떻게 특정하였는지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홍륜 하나 죽이는데 무슨 암살 계획까지 하며, 최만생은 공민왕이 임신 사실을 알고 있는 모두를 죽인다라는 말 한마디에 자신이 죽을 것을 염려해서 홍륜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또 자제위의 다른 사람들은 왜 왕이 홍륜을 죽이는데, 자신들을 총애하던 공민왕을 죽이는 것에 동조한단 말인가? 심지어 이 모든 일은 모두 궁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또한 이인임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숫자의 군사 를 가지고서 갑자기 왕이 죽었다라는 것을 불가사리한 신통력을 발휘하여 알고서는 궁으로 쳐들어가 자제위들을 제거하였는지는 정말이지 신기할 따름이다. 게다가 이때 하필이면 최영이 제주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 제압차 개경을 비웠다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이상할 따름이다. 추측이기는 하지만 자제위가 공민왕을 죽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궁 방위력이 약화된 잠깐의 빈틈시기에 이인임이 궁 내에 있던 왕과 그의 친위세력들을 일거에 척살하고, 왕 시해의 죄를 자제위에게 떠넘겼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31] 이 부분은 조선 시대 사관의 의도적인 오기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즉 폐신을 시켜 후궁을 강간하게 한 다음 입막음을 위해 죽이려 한 게 아니고, 단지 사통한 자를 죽이려고 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32] 고려사 유탁 열전[33] 이성계가 종묘를 세울 당시 바람결에 날아들어온 그림이라 전해진다. 바람결 운운이 정치적 은유임을 고려해 보자면,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고려의 실질적인 마지막 임금이 어디까지나 공민왕임을 내세우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꽤 높다. 우왕과 창왕은 아예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자손인 신씨라는 것이 조선 왕조의 공식적인 입장이었고, 공양왕은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에게 공손히 양위한 임금에 불과하기 때문.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 중이며, 당대 작품이 아닌 이모본(移模本)으로 보인다. 공민왕은 복두를 쓰고 홍포단령에 홀을 들고 있다. 관복이 송나라 것에 가까운데 실제로 익선관을 쓰는 형식의 명나라 관복은 우왕 때나 들어왔다. 노국대장공주는 복잡한 머리 장식에 남편과 마찬가지로 송나라 양식의 복제를 하고 있다. 현재 이 초상화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34] 실제로 정보석은 이 당시 공민왕 역에 상당한 애착을 보여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연기 역시 공민왕 말기의 광기 어린 모습을 잘 표현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35] 역할 바꾸기 놀이를 해서 홍륜에게 굽실거리며 술을 따라주거나 욕을 들어먹으면서 이를 즐기는 듯한 묘사가 나온다.[36] 사실 고려에서 화포가 실전에 투입된 건 우왕 치세부터니 완전히 틀린 묘사라고만 보기는 힘들지만. [37] 이 게임에서 장수들은 문화에 따라서 병종 등에 추가 능력을 얻는 시스템이었다. 예를 들어서 서유럽 문화권 출신이면 십자군을 지휘할 때 능력치가 상승하는 식이다. 대부분은 자신의 문화권이 정해져 있고, 가상 장수들은 등용된 도시의 문화도에 따르는데, 문제는 왕의 자손들은 왕의 출신 문화와 왕비의 출신 문화 가운데서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노국대장공주를 몽골 문화로 설정하면, 태어나는 왕자가 몽골 문화로 탄생해서 몽골 기병에 플러스 효과를 받는 상황이 일어난다. 이런 점을 고려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냥 몰라서 그럴 수도 있고. [38] 무로마치 막부와 동맹을 맺는 선택지도 있는데, 이 게임에서 고려와 명은 문화권이 같지만, 일본과는 문화권이 달라서 동맹 기간 및 성공 확률에도 패널티가 있다. 가끔 컴퓨터의 무로마치 막부가 고려와 먼저 동맹을 제의하는 경우도 있으니 상황 보고 잘 판단하면 된다.[39] 평생동안 절절하면서 변치않는 공민왕바라기의 모습을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