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임

 

'''고려의 문하시중'''
경복흥

'''이인임'''

이림
'''이인임
李仁任
'''
성주 이씨 봉산재에 있는 초상화[1]
<colbgcolor=#000> '''군호'''
광평부원군 (廣平府院君)
'''이름'''
이인임 (李仁任)
'''본관'''
성주 이씨
''''''
승암 (勝巖)
'''생몰년'''
1312년[2] ~ 1388년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패기의 개혁가
2.3. 왕의 오른팔
2.4. 공민왕의 죽음, 그리고 흑화
2.5. 권력의 정점에 서다
2.6. 권신의 말년
3. 종계변무 사건
4. 인간 관계
5. 평가
6. 여담
7. 창작물
8.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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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시대 공민왕, 우왕 때의 권문세족, 권신, 간신.
고려 멸망과 여말선초의 고려와 조선 관계, 요동 정벌 모두에 크게 엮여있는 인물.
충렬왕 때 명성을 떨치면서 가문을 세우고 청백리였던 이조년[3]손자다. 그때부터 개경의 지배층으로 자리잡았으며 형 이인복의 경우 원나라과거에서 급제한 수재이자 공민왕 정권에서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명신이었다.[4]

2. 생애



2.1. 초기


경산부[5] 태생으로 권문세족 출신이라 벼슬 생활도 과거가 아닌 음서로 시작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정치 감각이 뛰어나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처음 맡은 벼슬인 전객시승은 조상 대대로 고려의 유력한 호족 가문이었던 성주 이씨의 입지와 조부 이조년의 명성에 비해 높은 벼슬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인임은 금방 스스로의 힘으로 좌부승선[6]으로 승진한다. 왕의 측근으로 다가간 것이다.

2.2. 패기의 개혁가


이후 홍건적의 1차 침입 때 공을 세우고 2등공신이 되었다. 홍건적의 2차 침입 때에는 개경을 수복하는 공을 세우면서 1등공신이 되었다. 이때 파견된 이인임의 직책은 서경존무사였고 당시 총책임자는 수문하시중 이암이었는데 이암이 서경 앞까지 가서 군대의 지휘를 못하던 상황에[7] 이인임의 숙부인 이승경이 대신 파견되면서 이인임도 함께 명성이 높아졌다.
이때 숙부인 이승경은 몽골에서 감찰어사를 하며 거듭 승진하다가 모친상을 당해 고려에 귀국한 거물로 원나라에 가지 않고 두 해간 머물러 있던 참이었다. 홍건적의 난을 맞아 인재가 없어 지고 있던 공민왕은 군무에 익숙한 그에게 부탁해 급히 고려 벼슬을 주고 군대를 지휘해달라고 부탁했다.[8] 이인임은 이때 숙부 이승경을 잃었으나 안우경, 이순, 최영, 임견미, 이성계 등과 함께 경성수복공신 중 1등공신이 된다.[9] 과정 중에 고려에서는 김용이 주도한 흥왕사의 변이 일어나 공민왕이 암살당할뻔 하기도 했으며[10] 공민왕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신하들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조년의 손자이며 잠시 돌아왔음에도 고국을 위해 싸우다 죽은 충신 이승경의 조카였고 무엇보다도 공민왕의 일이라면 어디든지 참여하여 공을 세우던 이인임은 젊어서는 분명 신임받을 수밖에 없는 신하였다. 상황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런 배경하에 이인임보다 일찍이 더 돋보였던 사람은 실은 형인 이인복이었다. 형인 이인복은 백이정에게 배워 주자학에 밝았으며 음서로 등용된 동생 이인임과는 달리 문과 급제, 원나라 제과 급제 등 문신으로서는 누구도 태클 걸 수 없는 번듯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11] 당연히 벼슬로도 승승장구했으며 조일신의 난을 진압한 뒤에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 성산군에까지 봉해지고 공민왕 대에도 간관을 거쳐 찬성사 겸 공신에 책록되는 등 화려한 이력을 갖게 된다. 그는 이력부터 사상까지 동생인 이인임과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행보가 비교되었다. 이인복은 공민왕에게 신돈을 멀리하도록 간언하다가 파직되는 등 뜻이 확고하고 할 말은 하는 엄격한 성품의 진정한 보수파였다. 결국 공민왕의 모든 행보에 찬동하는 동생과는 갈등하게 된다.

2.3. 왕의 오른팔


이인임은 공민왕 5년 유인우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함락시키고, 공민왕 12년 덕흥군의 침입을 막아내는 데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공민왕이 신돈을 가까이했을 때는 공민왕의 뜻을 받들어 신돈의 개혁정책에서 실무 책임을 맡았다. 신돈이 전민변정도감을 세우고 이춘부, 이인임 등을 정치 일선에 내세워 토지개혁, 노비개혁을 혁신할 때 이인임은 최일선에서 소송과 전제개혁을 담당하게 된다. 당시 고려의 최대 폐단은 토지 소유권의 불안정[12], 과다한 지세, 양민의 강제 노비화였다. 이때만 해도 이인임은 권문세족이 빼앗은 전민을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노비를 풀어주는 일에 나서고 있었으니 훗날 우왕 대에 온 고려의 땅을 긁어모은 행보와는 사뭇 '''대조되는 일'''이다. 이때 이인임이 도왔던 신돈의 개혁정치는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흔드는 것이었고 당연히 권문세족의 장남이자 명신인 이인복은 동생과 크게 반목하게 되었다. 이인복이 이인임을 두고 집안을 망치리라 근심한 것은 사실 이인임이 젊은 마인드로 개혁정치에 참여했을 무렵이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인임은 공민왕의 곁에서 북원과의 단교, 기씨일파 숙청, 요동 정벌 등을 추진하였으며, 신돈과 함께 이색에게 톡톡히 혜택을 주고 성균관을 부활시키는 방식으로 신진사대부 육성을 지원하기도 했다. 해당 시기 책략의 기조는 모두 고려의 자주성 회복과 이어져 있었다.
고려의 왕은 친모가 원나라에서 어떤 입지의 공주이냐에 따라 그 대우가 크게 갈렸는데, 예컨대 제국대장공주의 몸에서 난 충선왕은 원나라 내에서도 중요한 황실 인척으로 대우받았고, 대대로 고려왕보다도 심왕이 원나라 내에서는 더 정치적 입지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선왕의 3남인데다가 고려인 출신 제4비인 공원왕후 홍씨[13]의 아들이었다. 당장 동복형인 충혜왕의 사례만 보더라도 30살 나이에 끌려가 죽기까지 원나라의 손에 압송, 투옥, 폐위, 복위, 폐위, 귀양, 의문의 죽음까지 온갖 일을 두루 겪었다.[14] 이러한 배경 하에서 공민왕은 원의 쇠퇴를 믿고 병신정변 등 위험한 줄다기리를 이어나갔는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기존 질서를 부수는데 동참할 반골적인 신하들이 필요했다.
공민왕이 왕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고 심지어 개혁정치까지 해나간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난이도가 높은 일이었으며, 이 당시의 결단은 어느 것이든 모두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 따라서 이제현, 유탁, 신돈, 이색, 이인임 등으로 이어지는 인재 기용 방식은, 계속해서 정치적인 시험의 일환이자 일종의 도박이었다. 공민왕은 유학자, 승려 등 기존 세력과 관계가 없는 개혁세력에게 번갈아 칼자루를 쥐어주면서 시험하기를 반복했는데, 의심이 들면 숙청을 서슴치 않았다. 이 과정에서 끝까지 남은 자는 권문세족 출신임에도 공민왕의 충복으로 나섰던 수완가 이인임 뿐이었다.
또한 이인임은 공민왕의 무리한 토목공사에 반대했던 유탁의 처벌을 둘러싸고 왕과 신하들 사이에 극심한 대립이 벌어졌을 때, 이색을 국문하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옥에 갇힌 사대부들의 유종 이색을 국문하는 대신 이색의 진심을 왕에게 잘 전달함으로써 사태를 진정시켰다. 이색과는 왕권 강화를 위해 정치적으로 상호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그는 신돈이 일본 사신을 소홀하게 대접하자 개인 비용으로 사신을 접대하기도 하는 등 유연하고 예리한 수완 또한 갖춘 자였다.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총사령관의 직위에 있으면서 이성계, 임견미 등과 잠시나마 요동을 정벌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으며, 결국 좌시중을 거쳐 수문하시중에까지 오른다. 공민왕 생전 그는 공민왕이 '''북원과의 관계를 단절'''하려하는 순간에는 서북면도통사로 원나라 동녕부를 토벌했고, '''신돈의 개혁정치''' 시절에는 백성들에게 땅을 돌려주는데 앞장서는 등 공민왕의 위험한 결단에도 늘 목숨을 내놓고 함께 하였는데, 심지어 '''영전 건축''' 등 공민왕의 독선적이고 다소 그릇된 결단에도 반대하기보다는 찬성하였다. 이 행보는 나라의 충신보다는 '''한 사람'''의 심복다운 것이었고, 국가의 신하라기보다는 단지 왕의 사람에 가까운 인생을 살아왔던 그였으므로 당연히 공민왕이 없어진 후, 이인임의 행보는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2.4. 공민왕의 죽음, 그리고 흑화


결국 공민왕 사후 이인임은 '''권신'''으로 변모한다. 공민왕에게서 우왕을 부탁받았음을 내세우며[15], 공민왕 사후 시해사건을 밝혀내고 공원왕후 홍씨경복흥의 반대를 물리치고 우왕을 옹립하는데 성공하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일각에서는 이 과정이 석연찮다는 견해도 있다. 이인임이 홍륜과 같은 명문세가 출신 자제위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설이다. 익비가 홍륜이 아니라 정말 공민왕의 아이를 임신했다면 신돈과 연관된 모니노와 후견인인 이인임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으므로, 이인임이 시해의 배후였다는 주장이다.[16] 물론 철저히 야사로서 이인임이 혼자 일을 도모하고도 그때까지의 지위를 누리기엔 당시 고려 조정엔 쟁쟁한 명사가 많았고, 익비의 아이가 홍륜의 아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공민왕이 황급히 홍륜을 살해하려 들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17]
즉위할 당시 우왕은 10세였기 때문에 공원왕후가 섭정을 맡았지만 공원왕후와 이성계 일파로서는 공민왕의 유지라는 강력한 명분을 가진 이인임을 물리치지 않고는 무엇도 할 수 없었고, 공원왕후가 1380년에 사망한 후로는 우왕이 1386년에 이인임이 사직하기 전까지 거의 이인임에게 정권을 맡기다시피 했기 때문에 우왕은 거의 10년 가까이 사실상 '''이인임의 섭정'''을 받게 되었다.[18] 한 명의 신하가 10년 이상 섭정 행위로 국무를 관장하고 심지어 왕의 양부로 대접되었다는 것은 한국 역사상 그 유례가 드문 일이다.
이인임이 이런 전략을 사용한 것은, 공민왕 즉위 시의 전례 때문이었다. 강릉대군이 공민왕으로 즉위하던 당시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는데 바로 이제현의 예다. 공민왕은 즉위 직후 60대였던 성리학자 이제현[19]을 섭정승으로 두려는 뜻을 보였다. 이제현을 권단정동성사로 두며 섭정으로 내세운 것은 지위가 약한 상태에서 공민왕이 자연스럽게 국정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었다. 이제현은 당시 도첨의정승으로 오르며 국정을 총괄하였고 후엔 김해후로 봉해진 바 있으며, 앞서 언급한 이인임의 형, 이인복의 절친한 벗이기도 했다. 다만 이제현은 압도적인 지위까지 오르지만 공민왕의 뜻으로 1년만에 자리에서 물러난다. [20] 이인임은 공민왕 때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우왕의 즉위기에 비슷한 행보로 섭정을 시작하였으며,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으로 봉해지기까지 도당을 장악하는 방식도 비슷했다. 이제현의 사례와 차이가 있다면, 그는 절대로 권력을 내려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종국엔 그 권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는 점이다.
우왕 시기에 이인임은 명, 원과의 외교문제에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동시에 북원에서 보내온 사신을 맞이하려는 '''이중 외교''' 정책을 추진였다. 이인임이 우왕의 즉위를 북원 중서성에 보고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북원과의 외교가 꼬이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고려 조정의 일부 세력이 북원에 가서 고려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다는 거짓 보고를 올린 것이다. 직후 북원은 심양왕의 손자 탈탈불화를 고려 왕으로 임명하겠다고 선포해 왔다. 심양왕이 어떤 자리인가, 대대로 고려 본국을 괴롭히며 정쟁을 일으키기 위한 자리로 활용되어 온 게 바로 그 심왕이었다. [21] 다만 원은 만약 공민왕에게 아들이 있다면 꼭 탈탈불화를 고려 왕으로 책봉할 필요는 없다고 양보책을 내놓았다. 아무리 원과 단교하고 친명을 시작했다곤 하나, 이로 인해 원이 고려의 왕을 둘로 만드는 상황이 온다면 고려 왕의 지위는 크게 위협받을 것이었다. 또한 아무리 원이 쇠퇴기를 맞이했다 하나 여전히 건재했으며, 이제 막 등극한 10살의 왕을 데리고 죽기로 맞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당장 친명의 효과를 보고 있는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면 그 또한 아니었다.이때의 명은 매년 말 100필, 금 100근, 은 만 냥, 세포 만필 등을 요구하며 강짜를 부릴 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만한 관계도 아니었다. 결국 이인임은 변절의 신호를 보낸다. 도당의 의견이 북원에 우왕의 즉위를 알려두어야 한다는 쪽으로 수렴되고 만 것이다.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우왕의 정통성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문제는 그 방식이었다. 백관의 서명을 받아 우왕의 즉위를 북원에도 알리겠다는 이인임, 경복흥, 최영 등 보수파와 군부의 의견은 정도전 등 친명파들의 극력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친명파들은 북원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것조차 반대하였고, 곧 목숨을 걸고 반대하고 나섰다. 정도전정몽주박상용, 권근, 김구용 등 10여 명과 상소하고 대간들은 이인임을 탄핵했다. 이때 신진사대부는 종국에는 그 정책을 추진한 이인임을 죽이라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이인임과 정면충돌한 정몽주의 정치적 행동은 철저한 좌절로 끝나고 만다. 박상충[22] 등이 옥고를 겪은 뒤 귀양 도중 장독이 올라 죽고 그외 정몽주, 정도전을 비롯한 21명의 사대부들이 죽거나 유배당하였다. 특히 이때 최영은 전록생과 박상충을 참혹하게 곤장치며 문초하였다. 이 때 이인임이 말하기를 "이 자들을 죽일 것은 없다"라고 하였으며, 이어 그들을 귀양보냈던 바 모두 도중에서 죽었다.
이후 이인임은 반대파를 계속해서 숙청해나간다. 전천길의 고발을 이유로 흥왕사 사건 때 출세한 무장 양백연과 그 당여들을 숙청하였고, 우왕이 15세 전후로 믿고 아끼던 유모 장씨를 중심으로 측근세력을 육성하려 하고 지윤을 후원세력으로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 또한 숙청한다. 이인임은 우왕의 유모 장씨, 장씨와 통정하던 지윤 등이 자신을 제거하려 하는 것을 사전에 알아채고 최영을 비롯 경복흥과 조정 중신들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좌절시킨다. 지윤과 그 일족은 물론 유모 장씨까지 모조리 처형되었고 이후 우왕은 정서적으로 의존할 곳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전까지는 우왕도 공원왕후의 말을 듣고 경연을 여는 등 친정할 때 바른 치세를 하려고 노력할 기미를 보였으나, 이후로는 완전히 포기해버려서 공원왕후의 사망 이후에는 오직 이인임에게만 의지하게 된다. 우왕은 이인임의 친척과 혼인한 뒤 그녀(1비 근비 이씨)와의 사이에서 창왕을 낳았고 종종 이인임의 사저에 들려 연회를 즐겼으며 이인임을 아버지라, 이인임의 처를 어머니라 부르며 절을 했다. 결국 우왕은 신하인 이인임을 양아버지처럼 여겨 사실상 통치를 맡긴 걸 넘어 사적인 부분으로도 의지하는 등 왕으로서 위태로운 행보를 보이게 된다.

2.5. 권력의 정점에 서다


권력을 쥔 이인임은 최영을 비롯한 군부를 능란하게 조종하고, 왕실 인사들과 경복흥 등의 외척들을 견제, 약화시켜면서 독재적 정치를 펼쳤다. 이인임 집권 기간 동안 이성계는 이인임 일파인 지윤의 딸과 장남[23]의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지위와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후 이인임은 견제할 사람이 없는 권신의 삶을 유지하였고, 측근들의 위세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하인 임견미 등은 전국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수탈하고 양민을 노비로 삼아, 산과 강을 경계로 하는 봉건영주 수준의 토지노비를 보유했다. 이로 인해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특히 임견미는 짐승에 비견될 정도로 잔혹하고 악랄했으며, 이인임은 직접 '그는 질투가 심하고 음흉한 성품이다' 하면서도 끝까지 말재주를 아껴 가까운 심복으로 두었다.
또한 이인임은 명나라에 불안감을 느끼고 북원과 이중으로 통교하려 했다. 이로 인해 내부에서 친명사대를 외치는 신진사대부들에게 탄핵을 받았으나, 정도전, 정몽주 등을 유배보내고, 염흥방은 자기 파로 회유하였다. [24]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국고는 비었으나 수탈은 멈추지 않았다. 왜구 침탈에도 군대는 제대로 통솔되지 않은 채 원의 제도와 재정부족에서 비롯된 장군들의 사병화가 지속, 심화되고 있었다. 왜구는 최영과 이성계 등 장수들의 활약으로 물리칠 수 있었으나 나라는 이미 병들어 있었다.

2.6. 권신의 말년


우왕이 즉위한 후 십수 년간 권력을 누렸으나 1386년에 몸이 병들어 사직하였고, 그의 빈 자리는 이인임의 일파였던 임견미염흥방 등이 대신 자리하였다. 이들 또한 이인임 못지 않은, 혹은 그를 능가할 정도의 수탈을 자행하였다. 임견미와 염흥방은 노비들을 풀어서 백성들의 논밭 뿐 아니라 심지어 관료들의 토지까지 강탈하고 다녔는데, 이 때에 땅 주인이 땅을 내놓지 않으면 수정목(水精木, 물푸레나무)으로 만든 몽둥이로 두들겨 팼기 때문에 세간에는 이른바 "수정목 공문"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25]
그러던 와중인 1388년 1월, 염흥방 일파에 의해 토지를 빼앗긴 관리 조반의 옥사사건이 일어나면서 본래 이인임 일당의 부패를 싫어하면서도 눈감아 주던 최영이 마침내 폭발하여 이성계와 결탁하여 이인임의 일파들을 일거에 숙청하게 된다. 이 사건을 무진피화라 부르는데, 이인임은 이로 말미암아 권력을 모두 잃어버리는 바람에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최영의 역습에 대경실색한 이인임은 병든 몸을 이끌고 최영의 집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으나 최영은 끝내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다만 최영의 서릿발 같은 처벌로 임견미와 염흥방 등이 일족과 함께 극형에 처해졌던 와중에도 이인임은 고향인 경산부[26]로 유배가는 선에서 그쳤다. 이미 사직 후였던 이인임에게 고향으로 내려가는 일은 크게 형벌이 될만한 처분은 아니었다. 이때 '''최영'''이 사사로운 정에 못 이겨 '''이인임을 살려준 것으로 두고두고 욕을 먹는다'''. 이때 최영이 “이인임이 정책을 올바르게 세워 대국을 섬김으로써 국가를 안정시켰으니 허물보다는 공이 큽니다.”라고 건의해 결국 그 자제까지 모두 용서를 받아서 별 처벌도 없었다.[27][28]
그로부터 몇달 후인 위화도 회군 직후. 조민수가 갓 즉위한 창왕에게 이인임을 복권시켜 이성계와 맞서도록 건의했으나 그 때에 이인임은 6월에 이미 병으로 사망한 후였다. 조민수가 이인임을 불러들이려고 하는 이야기가 퍼지자 사람들은 국정이 문란해질 것을 우려했지만, 이미 이인임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이 죽이지 못하니 하늘이 대신해서 죽였다"'''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29] 창왕은 이인임의 부고를 듣고 "평생 영예 속에 살았으니 그대는 유감이 없겠지만 난 이제 누굴 의지하면 좋은가?"라는 유약하고 한심한 내용으로 된 애도의 교지를 내렸고 사람들은 그 교지를 비웃었다.[30]
이인임은 살아 생전 최영숙청하자는 자파의 주장을 무시했는데, 이는 정치적으로 보았을 땐 사실상 보수파이며 여러 면에서 의견이 일치하던 최영의 무력이 자신의 권력을 지탱하는 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영과 이인임은 정치면에서는 제법 의견이 맞았으며 정무를 처리하면서는 충돌하는 일이 있었으나 사적으로는 악감정이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임견미염흥방은 독자적으로 최영을 죽이고자 했었는데 이인임의 만류로 이루지 못했고, 나중에 최영을 미리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탄식하기도 했다. 결국 최영이 변심하고서야 이인임 정권은 무너지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가족까지 주륙하는 가운데서도 최영은 끝내 이인임을 죽이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준 셈이다.
말년의 이인임은 사직 후 고향 성주군에 돌아가 조부 이조년처럼 시조를 쓰며 여생을 보냈는데 주로 노년의 소박한 삶을 노래했다고 전해진다. (본래 옛 선조들의 시조에서 제일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되는 말이 '벼슬 욕심 없다'와 '안빈낙도'라는 역사학자들의 우스개소리가 있다...) 형인 이인복고금록, 금경록, 초은집 등을 남긴 것과 달리 이인임의 시는 대개 소실 되었으며 노년 우음이라는 한 편만이 남았다.

[老年寓吟(노년우음) / 노년에 우거하면서 읊은 시]

宦海浮沈二十年(환해부침이십년) / 벼슬길 부침 이십년

長江嗚咽不平嗚(장강오인불평오) / 긴 강의 불평을 안고 울먹이네.

殘花杜宇聲中落(잔화두우성중낙) / 쇠잔한 꽃은 두견새 울음에 떨어지고

芳草王孫巨後生(방초왕손거후생) / 왕손이 간 뒤의 방초는 살아있더라.

金馬玉堂非我願(금마옥당비아원) / 금마와 옥당은 나의 원하는 것 아니고

靑山綠水有誰爭(청산녹수유수쟁) / 청산과 푸른 물은 누가 다투고 있나

倘罷天荒作國禎(당파천황작국정) / 아마 하늘이 받침대를 파하게 했을 것이니라.

또한 이인임은 말년 최영에 의해 경산부로 유배된 후까지 공민왕에게 선물 받은 시를 보존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贈 勝巖公(증 승암공)]

瑞明行白玉(서명행백옥) / 단정하고 밝음이 백옥같으며

純粹似精金(순수사정금) / 순수함이 마치 잘 다듬어 놓은 금과 같더라

太和陽春樹(태화양춘수) / 크게 화한 기운은 봄날의 뻗어가는 나무와 같으나

猗古復見今(의고복견금) / 옛날의 아름다움을 이제 보게 되도다.

내용은 이인임의 단정한 성품을 칭찬 하는 것으로, 젊은 날의 충정심은 모두 잊은 채 간악한 권신으로 살아가다 잊혀진 이인임의 말로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 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일생동안 온갖 영화를 누리던 그의 최후는 찾는 이 하나 없이 초라한 것이었다.
죽기 전 말년에 창왕 시절 윤소종과 권근이 재탄핵하였으나 미지근한 결과밖에 내지 못하였고 공양왕 즉위 후 오사충 등이 다시금 이인임을 부관참시하고 집을 연못으로 만들며 가산 적몰할 것 등을 청하였으나 묘는 아직도 터 좋은 자리에 멀쩡히 남아있고(...) 왕은 집을 연못으로 만드는 것 하나만 받아들인다. [31] 이 연못은 조선 태조 3년 이인임의 직첩을 되돌려줄 때 메워졌다.

3. 종계변무 사건


위화도 회군 이후, 공양왕이 즉위하자 이성계와는 정적관계이던 윤이, 이초는 명나라에 건너가 이성계를 무고한다. 공양왕은 종실이 아니라 이성계의 인친이며, 공양왕과 이성계가 장차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어 이를 반대하던 이색, 조민수, 이림, 변안열 등 고려의 재상 19인이 살해 또는 유배될 것이라면서 이를 토벌해 주기를 요청하였다.[32] 이 사건은 당시에는 오히려 이성계 일파가 조선 개국에 반대할 만한 사람을 모조리 역모죄로 몰아 가두고 죽이는 것에 이용되었다.[33]
이때 한 가지 문제가 생기는데, 윤이와 이초가 이성계의 가계에 관해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후손이라고도 말을 해버린 것이다. 명나라는 이 이야기를 믿고, 그 내용을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그대로 기록하였다. 조선에서 이러한 종계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태조 3년이 되어서였다.
조선 태조에 관한 종계오기는 표면적으로 명나라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건국 직후의 조선으로서는 왕통의 합법성이나 왕권 확립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종계 문제를 계기로 이성계를 무시하고 의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종계오기를 빌미로 조선을 복속시키려고까지 하였다. 더구나 이인임은 우왕 때의 권신으로 이성계의 정적이었다. 그런데 이성계가 그의 후사라는 것은 가장 모욕적인 말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항이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이후 양국간에 매우 심각한 외교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조선측에서는 명나라 사신이 돌아가는 길에 변명의 글을 지어 사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보냈다. 그 안에는 태조 이성계의 가계 22대를 간략하게 기록했고, 태조 즉위의 정당한 이유에 대해 밝히면서, 이인임의 불법적인 행위를 상세히 알리는 내용이 실렸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조선에서는 태종 때 다시 한 번 주청문을 보내는데 또 한 번 태조의 가계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태조가 이인임과 같은 이씨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이인임의 가계까지 상세하게 기록해 추가로 보냈다.[34]
그러나 명나라로부터는 명 태조 주원장의 유훈이 대명회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만력회전 중수본에서 변명 사실을 부기 하는데 그치고 말았다.[35]
그리하여 종계변무는 이후 근 200년간이나 양국 관계에서 외교 문제가 되었고 이 문제 때문에 조선에서는 근 200년 가까이 끊임없이 이를 고쳐달라고 명에 요구하고, 명은 안 된다고 거절하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는데 이를 종계변무 사건이라고 한다. 이게 완전히 해결을 보게 된 건 선조대인 1584년에 이르러서였다. 그것도 명 태조실록은 태조의 업적을 기록한 책이라 함부로 못 고치니 끝내는 대명회전만 고친 것. 200년간이나 골머리를 썩여 온 문제라 선조는 개정판을 명에서 가져오라고 명했고, 마침내 1588년 개정된 대명회전이 조선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한 사신단은 전원 공신이 되었다. 이후 청나라 때 대청회전을 편찬할때도 같은 문제가 있었고[36] 그 이후에도 다른 기록이 발견되어 이를 수정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자그마치 철종때 일.[37]
더 상세한 사건 경과는 해당 문서 참조.

4. 인간 관계


  • 친척으로 유명한 문장가였던 도은 이숭인이 있었으며, 친조카로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의 남편인 흥안군 이제[38], 역시 친조카로 조선 개국 후 성산군에 봉해지고 대제학, 영의정에 이른 이직[39], 조카사위로는 하륜[40]의 경우처럼 친척들을 통해 신흥 사대부 집안이나 이성계 집안과도 통혼하는 등 신진 세력과 연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41] 성주 이씨는 원래는 지방의 대형 호족으로 중앙정계에는 고려말 이장경 대에 떠오른 집안이었으나 고려가 길게 가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의 명성은 이어가지 못한다. 후손들이 조선에서 관직에 오르기도 했지만 이인임의 후손은 조선에서 벼슬하지 말라는 유지가 있었기 때문에 성주 이씨는 다시 지방의 토착세력으로 돌아갔으며 한참 동안 조선에서는 일부러 벼슬을 하지 않거나 조선에서 벼슬을 할 경우 성산 이씨로 성씨를 갈아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이인임의 조카인 이직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헌하여 2차 왕자의 난에 방원을 돕고 영의정까지 올랐으니 형제간 가족간에도 각각 의견이 맞지 않은 모양이다.
  • 이인임은 이성계를 경계하기도 했다. 평소에 최영에게도 "이성계는 왕이 되려는 사람이다"라며 그는 틀려먹었다고 끊임없이 말했을 정도. 물론 이성계를 아꼈던 최영은 이인임이 자신과 이성계를 이간질시키려는 것으로 알고 한 귀로 흘러버렸지만 뒷날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야심을 드러내자 이 때 이르러 "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았구나!"라고 탄식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점을 보면 노회한 정객답게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던 모양이다. 아예 고려사 열전에 '자기 일당을 요직에 심기 위해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니 문객들이 그 밑에 가득 몰려들어 각자 자신이 가장 후대받는다고 여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우려는 그가 세상을 떠난지 몇개월 후에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가 조금 늦게 태어났다면, 역사는 현재와 다르게 바뀌었을지도..

5. 평가


이인임은 일반적인 권문 세족들과는 달리 문무 모두에 식견이 있고 정치적 능력도 우수한 인물이었다. 공민왕 시해 직후의 정국을 빠르게 안정시키는 한편, 고려 말의 혼란기에 장기간 실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 능력을 나라를 위해 쓴 게 아니라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사용했다는 점'''에서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무능한 데다 인격에 결함까지 있었던 우왕과 결합하여 고려 멸망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 인간이 저지른 부패와 그 결과 고려가 아주 고생했던 것 때문에 역성혁명으로 조선이 생겨났다는 것으로 사극에서 나오고 실제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인임이 집권 당시 생긴 피해 손해가 어마어마해서 '''이 인간이 만든 부패와 손실만 아니면 요동 정벌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42]

6. 여담


  • 경상북도 성주군성주 이씨 봉산재에는 이인임의 초상화가 있다.[43] 봉산재에는 성주 이씨가 배출한 명신들의 초상화가 소장되어 있어 이 중 일부는 '성주 이씨 영정'이라는 이름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스물 두 명의 초상화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중 일부 초상화들을 분실해 버렸고 오늘날 남아 있는 초상화는 총 10명의 초상화이다. 물론 현대에 그려진 이인임의 이 초상화는 문화재에서 제외된 그림이지만, 분실된 초상화 중에 이인임의 초상화가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7. 창작물


고려를 생각해서 신돈의 개혁을 지지하기보다는, 신돈의 빽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는 권력욕밖에 없다. 결국 공민왕과 신돈이 갈등하자 가차없이 신돈을 저버리고, 반신돈파로 변모하는 비열한 기회주의자 모습을 보인다.
전형적인 악역(…). 다만 단순한 간신으로 표현되기보다는, 본래 성격에다가 잔인하고 흉포한 모습을 더한 모습으로 나온다.
  • 육룡이 나르샤(SBS) - 최종원[44]
이인겸 문서 참고.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 어쩐지 불독을 닮은 모습으로 나오는데, 사실 캐릭터 모델은 김종필. 이건 작가가 직접 인증했다. '원조 보수'라는 점에서 이인임의 캐릭터를 김종필의 얼굴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7.1. 정도전(KBS 1TV)


배우는 박영규. '''대중적으로 듣보잡이었던 이인임을 일약 슈퍼스타(?)로 만든 계기. 심지어 이인임이 본작의 진 주인공이라는 평가까지 있다.'''[45]
박영규가 개그 캐릭터도 많이 연기하긴 했지만 사극에선 상당히 진지한 역을 많이 맡는 편인데, 정도전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보였다. 이인임은 국사 교과서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 등 대중적인 역사 관련 서적에서 등장이 적어서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은 편이었으나, 정도전으로 단숨에 인지도가 올라갔다.
대단히 카리스마 있고 수완이 훌륭한 입체적인 인물이지만 역사 속의 이인임에 비해서는 단순하고 잔인무도하다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인임의 공적 또한 있지만 그것은 공민왕 시절에 달성한 것이고, 우왕 시절에는 확실히 국정을 농단한 권신이자 간신이다. 때문에 공민왕 말기부터 시작되는 드라마 스토리상 이인임이 악역으로 나오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더 자세한 설명은 이인임(정도전) 문서를 참고.

8. 같이보기



[1] 당시에 그려진 것이 아닌 현대에 그려진 것이다.[2] 고려사 등의 정사에는 이인임의 연령이나 생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이인임의 가문인 성주 이씨 가문 기록에서는 원나라 황경 원년(1312년)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문 기록이라 신뢰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지만, 형 이인복이 1308년생인 것을 감안하면 완전히 틀렸다고만 보기는 어렵다.[3] 유명한 시조 다정가(이화에 월백하고~)를 짓기도 했다. 이조년의 형제들 이름은 이상한 네이밍 센스를 보여주는데 형제들 이름이 순서대로 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이다. 형인 이억년도 유학자였다. 한국 성리학의 시조라 불리는 안향의 직계제자. 형 이천년의 후손이 바로 요동의 왕이라 불렸던 명나라의 장군 이성량이고 이성량의 아들이 임진왜란 때 명나라군을 이끌고 지원을 왔던 장군 이여송이다.[4] 이인복은 동생 이인임이 총명하나 부덕함을 보고 집안을 망치리라 근심했었다고 한다. 이인복은 공민왕을 보좌해 근거리에서 반원 자주 정책 및 왕권 강화 정책을 이끌었을 정도로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특히 신돈을 멀리하라고 공민왕에게 간언을 하다가 파직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신돈의 개혁에 동참한 아우들 이인임, 이인민, 이인립과는 당연히 일찍부터 관계가 그닥 좋지 못했다.[5]경상북도 성주군.[6] 공민왕 시대에 반원 운동으로 복구된 관직 중 하나로 왕명 출납과 군사 기밀을 다루고 백관의 장계와 품달 여부를 다뤘다.[7] 문신 출신으로 출격을 하려 하지 않는데다가 군기도 엉망이었다.[8] 나중에 이승경은 고려 장수들이 전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에 울분이 일어 식음을 전폐했고 이 일로 병이 나서 죽는다. 공민왕이 재상들을 만날 때마다 충신이라 칭찬하고 슬퍼하며 충근경절협모위원공신이라는 공신호를 하사한다.[9] 경성수복공신은 개경을 수복해 책봉되었으므로 이후 상당한 군권을 갖게 되나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해 다수 공신들을 숙청한다.[10] 노국대장공주가 칼을 맞을뻔한 것도 이때다.[11] 이장경이 중앙 정계에 손을 뻗기 무섭게 그의 아들 이조년 대에 아들 다섯이 모두 과거에 급제한 신기록을 가지고 있는 집안이었으므로 장남의 엘리트적 행보는 경외시되는 것이었다.[12] 땅 하나 주인이 3~8명씩이었다. 그 모두에게 지세를 내야했다.[13] 복국장공주, 조국장공주, 경화공주 세 공주와 충숙왕이 계속 혼인하는 동안 내내 서열이 밀려 제4비까지 갔다.[14] 물론 충혜왕은 막장왕이긴 했다.[15] 그야말로 공민왕의 측근에서 산전수전 다 함께 헤쳐온 넘버원 신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설득력을 가졌다.[16] 다만 익비는 딸을 낳았다.[17] 다만 흥미로운 지점은 명사 조선열전에서 이인인(李仁人, 이인임의 오기로 보임)이 공민왕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착안하여 정도전(드라마)는 이인임이 자제위를 충동질 해 공민왕을 차도살인했다는 과감한 각색을 보이고 있다.[18] 이인임이 섭정승으로 별도 품계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조선시대에 들어 우왕을 신우로 기록하고 반역열전에 수록하던 당시, 이인임의 섭정 전개를 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9] 이색의 스승이다.[20] 보통 신하가 비공식적 섭정승을 맡는 경우는 전례상 길어도 3개월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21] 고려의 왕들은 늘 원의 제후인 심양왕에 의해 견제받아왔고, 선대왕의 예를 보더라도 심양왕을 겸하자 고려왕의 자리보다 심양왕의 자리를 더 중하게 여기는 왕도 있었을 정도로 심왕의 힘이 더 컸다.[22] 조선 태종의 측근 박은의 아버지.[23] 훗날의 진안대군 이방우.[24] 한때 개혁적인 사대부였던 염흥방은 변절 후 임견미와 더불어 가장 악독하게 땅을 긁어모으고 국유지까지 강점하기에 이른다.[25] 《고려사》 임견미열전에서는 우왕이 임견미의 아들인 임치 앞에서 "늬 애비가 수정목 공문을 그리도 즐겨 쓴다며?"라며 조롱했다는 기록까지 보인다.[26] 경산부는 현재의 성주군, 즉 이인임의 본관이다.[27] 최영은 그의 자식들을 살려준 것은 사실 이인임과 최영의 관계가 돈독하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지윤의 제거, 우왕의 유모 장씨 축출, 천도 반대 등의 문제에 대부분 같은 입장을 가져왔고, 이인임과는 대립하면서도 같은 시대를 보낸 처지로서 목숨을 건지도록 사정해줄 만큼의 정이 있었다.[28] 이인임이 물러나기 약 육 개월 전에 판삼사 자리를 놓고 이인임과 최영이 이성계를 두고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최영이 판삼사 자리에 이성계를 앉히겠다고 말하니까 이인임은 이성계는 사람이 틀려먹었다고 했으며, 떠나면서도 이성계를 경계하라고 경고했다.[29] 정도전이 편찬한 고려국사에서 가장 강하게 비판되는 인물이 이인임 열전의 이인임이다.[30] 근데 창왕은 이때 9세였다.[31] 집을 헐어 연못으로 만드는 것은 대역죄인에게 해오던 관행이었다.[32] 단순히 윤이와 이초의 개인적인 책동에서 비롯된 사건이 아니라, 공양왕 즉위 이후 정권에서 소외당한 이색 등 이성계에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무고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33] 명나라 조정에서는 한바탕 논란이 일었으나, 이성계가 오히려 요동을 정벌하려던 왕에게 반기를 들고 회군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오히려 윤이와 이초를 의심하였고 무고임을 밝혀 귀양보냈다.[34] 이게 문제가 된 것은 중국에서는 우리의 '본관' 개념이 없어서였다. 즉 우리는 덕수 이씨 전주 이씨 같은 식으로 같은 이씨에서도 나눠서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그냥 다 같은 이씨였다는 것[35] 그러나 명의 입장에서도 태조의 유훈이 기록된 대명회전을 고작 소국의 요청 때문에 뜯어 고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36] 이는 영조때 일인데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청나라가 대명회전을 참고하기로 한 것인데 문제는 이게 개정판을 참조할 것인지 원판을 참조할 것인지였다. 원판을 참조하면 또 종계변무 문제로 골치를 썩일게 뻔하니 조선에서는 필사적으로 개정판을 참조하게 만들려고 하여 어마어마한 뇌물을 먹였고 그 효력 덕인지(?) 결국 개정판을 참고하기로 결론이 났다.[37] 이건 사실 웃픈 일인데 이것이 기록된 서적은 청나라에서도 듣보잡이었기에 수정하러 온 사신들에게 "그런 게 있었나?" 반응이었다.[38] 이인임의 동생 이인립의 아들[39] 이인임의 동생 이인민의 아들[40] 이인임의 형인 이인복하륜의 스승이었고, 이인복이 이인임 바로 아랫동생인 이인미의 딸과 하륜을 부부로 맺어주었다.[41] 그러나 이인임과 이인복, 이인미는 제각각 생각이 달라 그다지 의견이 일치되는 가족관계였다고 할 수 없다.[42] 실제 이후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은 완벽히 회복한 것도 아니면서 요동 정벌을 단행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인임의 폐해가 없었다면 훨씬 빨리 회복했거나 그 재산을 모두 군력에 넣었다면 상당히 바뀌었을 거라는 주장이 많다. 물론 확실히 가능하다고 보기는 힘드니 저런 주장도 있다는 정도로만 해석하자.[43] 문서 상단에 있는 초상화이다.[44] 이인으로 이름이 살짝 바뀌었다.[45] 작가가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이어서 그런지 대사에서 이인임의 주장들이 상당히 논리적이다. 여타 사극은 설득 신에서 별다른 느낌이 없는데, 이인임이 최영을 설득하는 장면을 듣다보면 어느새 시청자도 설득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