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행록

 

1. 개요
2. 내용
3. 보관 역사
4. 번역
5. 바깥고리


1. 개요


日本行錄. 조선 세종 2년, 1420년에 회례사(回澧使)로 일본을 다녀온 노송당(老松堂) 송희경(宋希璟, 1376~1446)이 자신이 겪은 10개월간의 체험을 시와 산문의 형태로 기록한 사행일기(使行日記).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1419년에 1만 7천여명의 조선군이 230여척의 배를 타고 대마도 오사키항과 쓰치우라를 공격하여 가옥 2000여채와 배 130여척을 불태우고 왜인 114명을 참수하는 대마도 원정이 있었다. 이러한 소식이 일본 교토에 전해지고 이에 교토 조정이 크게 분노하여 조선에 사신을 보내 항의하자 이에 조선에서는 1420년에 회례사(回澧使)를 파견하기로 하는데, 이때 일본으로 향한 인물이 바로 노송당 송희경이다.
일본행록은 회례사로 임명된 송희경이 일본 사신과 함께 대장경 복사본 1질을 들고 서울을 출발하는 1420년 1월 15일부터, 일정을 끝내고 복귀하는 동년해 10월까지 약 10개월간의 일본 사행 체험을 일기로 남긴 것으로, 하루하루의 일정을 일기로 남긴 후 그 밑에 그날의 느낌을 시로 표현하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대마도를 떠나다

그 동안 북쪽 물가인 선여관(船餘串)에서 풍우(風雨)에 막혀 10일 동안 머물러 있다가 3월 초 1일에야 비가 개고 바람이 편리하므로 사시(巳時 오전10시 전후)에 배를 띄워 일기(壹岐)로 향하였다. 큰 바다에 나가니 바람이 없어서 섬까지 미처 가지 못하고 해가 빠져 하늘이 어두웠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아득할 뿐 갈 곳을 알 수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다 정신을 잃고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큰 바다에서는 의지해 있을 곳이 없으니 새벽이 될 때까지 배를 운행(運行)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더니, 여러 사람들도 다 어찌할 도리가 없으므로 배를 저어 앞으로 갈 뿐이었다. 홀연히 작은 산이 보이나 어두워서 또한 그곳을 알 수 없었다. 배가 산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홀연히 포구(浦口)를 발견하고 즉시 배를 멈췄다. 배는 물결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거의 엎어져 빠질 것 같아, 종사관과 배 안의 사람들이 다 정신을 잃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처음에 야음비량(也音非梁)에 정박하였을 때에 양예(亮倪)가 왜장(倭長) 삼보라(三甫羅)를 나에게 보내어 적변(賊變)에 대비하게 하므로 내가 받아들여 배에 태우고 가던 중인데, 이날 밤 나는 삼보라와 같이 앉아 있었다. 나는 물결이 심하여 앉아 있기 어려우므로 궤(櫃)의 끈을 붙잡고 배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대로 밤새도록 노고하였다. 사람들이 동쪽이 밝아 온다고 하기에, 나는 놀라고 즐거워서 보니 바로 일기도(壹岐島)였다.

날 저물고 연기 어두워 물길을 잃었는데 / 日暮煙昏失水程

사면에서 파도 일어 더욱더 놀랐네 / 波生四面轉堪驚

끈을 잡고 오르락내리락 마음 등걸 같더니 / 攀繩上下心如檮

홀연히 동쪽 하늘 밝아 온다고 하네 / 忽報東方天欲明

'''노송당 일본행록 3월 1일자 일기'''

일기도의 간사모량(干沙毛梁)에 들어감

이날 평명(平明)에 간사모량을 향해 가는데, 세 척의 작은 배가 양구(梁口)로부터 우리를 향하여 화살처럼 빨리 오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다 놀라서 말하기를, “저것은 반드시 해적(海賊)이다.” 하고, 북을 쳐 기를 세우고 갑옷을 입고 서서 기다렸다. 배가 왔을 때에 물으니 그것은 진길구(陳吉久)가 보낸 우리를 영접하는 배였다. 양(梁)의 어귀에 두 갈래의 물이 서로 부딪히는 곳이 있는데, 옛날 최 회례사(崔回禮使)가 빠져 죽은 곳이다. 배들은 다 여기를 지나가기를 어렵게 여긴다고 하였다. 다행히 세 척 배가 이끌어 주어 무사히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미 양에 들어간 뒤에 공달(孔達)과 서로 “살아나서 다행하다.” 말하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지 못할 즈음에, 한 왜인(倭人)이 두 동이 술과 한 마리의 기러기를 올리며 말하기를, “이것은 진길구가 먼저 가면서 관인(官人)을 위하여 머물러 있다가 대접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또한 21년에 조선에 가서 유치되었다가 상은(上恩)을 입고 돌아와 나의 어머니를 다시 보게 된 자입니다.” 하였다.

죽을 고비 넘기고 선창에 의지하니 / 同經萬死倚篷窓

감개가 북받쳐 서로 보며 눈물짓네 / 感極相看淚數行

두 동이 술에 한 마리 기러기를 곁들여 보내 주니 / 況遣朋樽兼隻雁

객중에서 도리어 미간(眉間)에 기쁜 빛 도네 / 客中還得動眉黃

최 회례사 운사(崔回禮使云嗣)의 사당에 제사함

일기도의 간사모량에 들어가서 바라보니 양(梁)의 어귀 서쪽에 외딴 섬이 있고 섬 아래의 물가에 돌로 굴을 만들어 놓은 것이 있었다. 사람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정축년의 회례사(回禮使) 최공(崔公)의 사당이라고 한다. 최공이 배에 오른 날부터 비위를 다스리고 과실을 규찰하여 조금도 용서함이 없으니 온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이 양의 어귀에 이르니 마침 해가 빠지고 바람이 거슬러서 물결이 극심하였다. 배가 파선할 때에 회례사는 취하여 배 안에 누워 있었는데 뱃사공이나 수행원들이 다 그를 구제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한 배 안의 사람들이 다 살았으나 회례사만이 홀로 죽게 되었다. 그 뒤에 왜인이 그곳에 돌을 쌓아 굴을 만들고 조선회례사 사당이라고 하였다. 배를 타고 왕래하는 사람들이 치제(致祭)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듣고 슬프게 여겨 압물(押物) 김원(金元)으로 하여금 술과 밥을 갖추어 제사하게 하였다.

동쪽 바다 외로운 섬 작은 사당 있어 / 東溟孤島小祠開

내 여기 와 분향하고 술 한잔 올리네 / 我到焚香奠一盃

적막하게 충성심을 묻는 이 없고 / 寂寞忠心人不問

분노에 찬 물결만이 오고 가누나 / 驚濤含忿但往回

일기도(壹岐島)

삼삼오오 작은 배 저어서 / 三三五五小舟橫

나무꾼 아침마다 바다로 들어가네 / 樵採朝朝入海行

왜주 한 잔에 마음 다시 장해져서 / 倭酒一盃心更壯

왜인들 저희대로 살아감을 보아 두네 / 忍看頑俗自投生

'''노송당 일본행록 3월 2일자 일기'''

일기는 그날의 일상을 시로 표현한 것이 총 227편이고 중간중간 일기체의 산문이 삽입되어 있다.
일기의 내용에 따르면 송희경은 일본 조정을 안심시키고 동시에 그들의 내부 정세를 파악하라는 임무를 받고 서울을 출발, 교토에 도착하였으나 일본 관리들이 대마도 원정 당시 명나라의 강남 병선 1000여척이 참전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심지어는 중국배 2만여척이 상륙하려 한다는 허황된 소문까지 떠도는 것을 보고 황당해한다. 당황한 송희경은 급히 교토 조정에 나아가 사실이 아님을 설명하고 진정시켰으며, 일기에서는 이러한 일본의 터무니없는 상황에 어처구니없어 하는 내용을 남겼다.
당시의 일본은 무쿠리고쿠리, 즉 몽고와 고려라는 잔혹하고 악랄한 침략자의 이미지 때문에 13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이에 대한 트라우마가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송희경은 한반도와 열도 간의 교린 관계를 다시 돈독하게 세우고 10월에 서울로 복귀하였다.
그 외에 일기의 내용은 주로 일본의 문물과 풍물에 관한 것으로 1400년대 초기의 일본 문화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 볼 수 있으며, 조선 전기의 양국 관계와 사행 문제, 대마도에 대한 인식 등에 대해서도 연구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3. 보관 역사


송희경이 쓴 원본은 훗날 분실되었다가 송희경의 4대손인 송순이 다시 찾아 보관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약탈되었다.
이후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던 월봉해상록의 저자 정희득(鄭希得)이 일본에 있던 일본행록을 알아보고 이를 필사해 가져왔으며, 현재 한국에 전해지는 일본행록은 정희득의 필사본이다.
일본에는 코마키본(小牧本), 하기노본(萩野本), 동대본(東大本), 경대본(京大本), 회여록수재본(會餘錄收載本), 역사지리수재본(歷史地理收載本) 등이 전해져오는데, 이중 코마키본이 송희경-송순으로 이어진 원본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본 학계에서는 노송당 일본행록을 15세기 초 일본 사회 연구 자료로서 매우 귀중히 여기고 있다.

4. 번역


한국고전종합DB에 원문과 번역이 올라와 있다. 일본행록 원문, 일본행록 번역

5. 바깥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