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

 

Jean Parisot de la Valette
(1494 ~ 1568)
1. 소개
2. 전쟁 준비
3. 전쟁 시작
4. 성 엘모 요새 방어
5. 성 엘모 요새 함락 이후
6. 승리와 최후


1. 소개


구호기사단의 45대 기사단장이자 몰타 기사단의 2대 단장.
원래는 프랑스의 기사로 1522년에 로도스 섬 공방전이 일어날 때 참전했으며,[1] 노예 사냥꾼이기도 하여 이집트와 이스탄불 사이의 오스만 제국 해역들을 돌아다니면서 선단들을 붙잡아 노예무역을 하기도 했다. 1557년에 기사단장으로 선출되자 기존에는 무슬림 선박만을 습격하던 것을 아무나 습격했으며, 1564년 6월 4일에 로메가스에게 명령하여 오스만의 함선을 습격하도록 지시하는 등 끊임없는 분란을 만들었다.

2. 전쟁 준비


1564년 말부터 오스만 군에 대한 소문을 듣고 1565년 1월부터 정보 수집을 지시하면서 병력을 모집했으며, 대량의 물을 점토병에 담아 빌구와 생리아로 나르게 하면서 이탈리아에 배를 보내 식량을 사오게 하여 보급에도 힘쓰는 등 오스만 군에 대한 방어를 준비했으며, 2월 10일에는 기사단원들에게 소환장을 보내어 몰타 섬 공방전이 시작되기 전에 약 500명이 올 수 있었다고 한다.
4월 9일에는 톨레도 해군제독에서 시칠리아 총독이 된 돈 가르시아 데 톨레도와 함께 빌구와 생리아의 방어시설을 시찰하면서 성 엘모 요새의 중요성을 알았으며, 돈 가르시아로부터 방어에 대한 충고를 받았다. 무슬림 노예를 보유한 갤리선이 공방전이 시작되면서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 여긴 돈 가르시아가 갤리선들을 빌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물자 수송과 노예들을 성벽 축조에 동원하고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나 결국 이 갤리선들은 돈 가르시아 예상대로 무용지물이 된다.

3. 전쟁 시작


돈 가르시아가 떠난 이후에는 포르투갈의 기사인 페드로 메스키타를 음디나와 여러 지역의 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1565년 5월 18일에 몰타 섬의 항구가 총사령관 랄라 무스타파 파샤[2], 함대 제독 피알리 파샤[3], 고문관 투르굿 레이스[4]으로 구성된 오스만 군의 공격을 받자 기사단의 한 부대에게 생리아 반도로 피난민들을 분산시키도록 하면서 돈 가르시아에게 급히 전령을 보냈다. 5월 23일에는 화승총병 700명과 기병 1부대를 성문 밖에 나가 싸우게 했는데, 이들은 10명의 사망자만 내고 100명을 죽이는 전과를 세웠다.
5월 22일에는 오스만 군이 생리아 반도에 대해 정찰을 하자 성벽 밖에서 접전을 벌이는 행위를 삼가도록 했으며, 오스만 군을 탈출한 기독교도로부터 오스만 군이 성 엘모 요새를 공격할 계획을 듣는다. 기사들을 끝까지 싸우도록 설득하면서 5월 23일에는 병력 100명, 갤리선 노예 60명, 식량, 탄약 등을 성 엘모 요새에 실어 보냈으며, 오스만 군이 마르삼세트 항으로 들어오자 돈 가르시아에게 급보를 보냈다.
5월 28일에는 오스만 군이 성 엘모 요새의 허약한 부분을 포탄으로 집중 난사하자 성 안젤로 요새에서 대포 4문을 설치하여 이를 막았으며, 에스파냐의 사령관인 후안 데 라 세르다가 성 엘모 요새는 측면 공격에 힘들다는 얘기로 재원을 더 달라는 요구를 하자 불편했지만 충고에 대한 감사를 표하면서 수비대의 체면을 세워줄 것을 호소했다가 요청한 것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메드라노 사령관을 지휘관으로 하여 병사 120명과 여분의 식량, 탄약 등을 배에 실어서 성 엘모 요새로 보냈으며, 돈 가르시아와는 소형 보트를 통해 연락을 주고 받았지만 함선과 병력을 모으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소식만 듣는다. 돈 가르시아가 병력 5천명을 확보했지만 갤리선 30척 밖에 구하지 못한 사실을 군사위원회에만 알렸으며, 오스만 군의 대포 소리에 개들이 짖자 기사들에게 개들을 모두 죽일 것을 지시했다.

4. 성 엘모 요새 방어


미란다를 성 엘모 요새의 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6월 4일에는 돈 가르시아가 파견한 에스파냐의 기사인 라파엘 살바고로부터 외곽 보루를 빼앗긴 것과 돈 가르시아가 20일 쯤에 지원 부대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을 듣는다. 미란다와 살바고를 방어 상태의 시설과 병사들의 사기를 살펴봤지만 성 엘모 요새가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들었으며, 외곽 보루가 빼앗긴 것으로 수비대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메드라노가 성 엘모 요새는 요새가 훤히 보이는 외곽 보루에서 포격을 하기 때문에 성 엘모 요새를 방어하기 어렵다고 하자 여러 가지 말을 통해 안심시키면서 요새로 돌려보냈으며, 8일에는 엘모 요새가 파괴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서신을 받자 사람을 보내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그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군사위원회를 열었다가 수비대를 성 안으로 철수시켜 병력을 보내자는 것과 그대로 지키자는 것으로 의견이 갈렸으며, 결국 그대로 지키자는 쪽으로 하면서 약속과 협박을 병행하는 것으로 폭동을 진정시켰다.
빌구에서 성 엘모 요새에 방어할 신병을 모집하자 밤에 성 엘모 요새로 병력을 보냈는데, 대규모 증원군이 왔다는 표시를 내기 위해 성루에 꽂을 다수의 깃발과 함께 100여명의 병력을 배에 실어보냈다. 10일에는 다량의 불고리를 요새 수비대에게 보냈으며, 또한 탄약, 바구니, 매트리스, 밧줄 푼 것 등 바리케이드 설치에 필요한 자재와 병력 150명을 성 엘모 요새로 보냈다.
16일에 오스만 군이 맹렬하게 공격하면서 성 엘모 요새의 수비대가 위험에 처하자 성 안젤로 요새의 포병들에게 대포를 발사하도록 지시하여 7시간에 걸친 결전 끝에 오스만 군을 퇴각시켰으며, 17일에 빌구와 성 엘모 요새 간의 보급로를 오스만 군이 차단하자 기사 12명이 자청하여 성 엘모 요새로 가서 싸우겠다고 하자 병력을 더 이상 잃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거부했으며, 돈 가르시아와 교황에게 구조를 요청하는 급보를 보냈다.
19일 밤에 성 엘모 요새로 보낸 배가 오스만 군에게 발각되자 미란다로부터 더 이상 병사를 죽게 할 수 없다고 하여 배를 보내지 말라고 하자 보내지 않게 되었으며, 6월 22일에 성 엘모 요새가 다시 공격을 받아 바다를 헤엄쳐 온 사람으로부터 성 엘모 요새가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지원병을 추가로 보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를 묵살했으며, 보급품을 실은 작은 선단을 보내서 오스만 군의 봉쇄망을 뚫어보는 것으로 했지만 로메가스를 비롯한 지휘관 5명이 밤에 바다로 도망쳤기 때문에 무위로 돌아갔다.
23일에 성 엘모 요새가 함락되어 기사들이 처참하게 죽자 그 보복 행위로 지하 감옥에 갇힌 오스만 군의 포로들을 모두 죽이지만 하루에 한 명 씩 천천히 죽이도록 지시했으며, 오후에 요새의 대포 포문에 죽은 포로의 수급을 쑤셔놓고 오스만 군의 진영으로 날려보냈다. 성 엘모 요새의 수비대들의 저항 덕분에 생리아와 빌구의 취약한 방어시설을 보강할 수 있었으며, 몰타 섬 중앙의 음디나로 계속 급보를 전하면서 바다에 소형 보트를 통해 에스파냐, 시칠리아 등에도 급보를 보냈다.

5. 성 엘모 요새 함락 이후


29일에 오스만 측에서 항복하라는 사절을 보내자 그 사절을 교수형으로 죽이려 했지만 그 사절은 오스만 군의 강요로 끌려온 노예라는 사정을 알게 되자 풀어주면서 또다시 사절을 보내면 죽이겠다고 전하도록 했으며, 오스만 군으로 배반한 자가 동향 사람들을 부르면 응대하지 못하게 하면서 포격으로 응수했다. 30일에는 오스만 군으로부터 탈출한 기독교 출신의 메메드 벤 다부드(필리프 라스카리스)[5]으로부터 오스만 군의 작전 계획을 들었으며, 7월 3일에 시칠리아에서 조카와 잉글랜드에서 망명한 가톨릭 교도인 모험가 존 스미스, 에드워드 스탠리 등이 있는 소규모 부대가 원군으로 파견되었다.
7월 4일에 오스만 군이 성 미카엘 요새와 서쪽 해안가를 포격하자 무슬림 노예들을 2명을 한 조로 쇠사슬로 묶어 오스만 군의 눈에 잘 띄는 작업장에 투입시켰지만 오스만 군은 노예들이 죽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포격을 날렸으며, 오스만 군과의 싸움이 계속되는 와중에 빌구와 생리아 사이의 내항을 이어줄 부교와 해상 공격에 취약한 서쪽 해안선에 방어막을 설치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15일에 서쪽 해안가와 육지 성벽을 공격받아 위험에 빠지자 증원군을 보냈으며, 후발 부대를 보내지 않는 돈 가르시아에게 싸늘하면서 다급한 어조의 급보를 보냈다.[6] 오스만 군이 거리로 대포를 쏘자 거리를 가로지는 석벽을 쌓았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촉구하는 연설을 하여 병사들을 진정시켰다.
8월 6일에는 프란시스코 데 아길라르라는 병사가 오스만 군으로 탈출하여 정보를 알려주자 성벽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목표로 삼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방어 준비를 했으며, 전투 와중에 다리에 총상을 입고 지휘관들의 권유로 전장에서 물러났다. 이후 성 안젤로 요새의 병력이 철수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자 구호기사단의 성상들을 성 안젤로 요새에 모두 옮겨놓으면서 도개교를 젖혀 출입을 통제했으며, 17일에는 오스만 군과의 전투를 하면서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지원 부대가 온다는 말로 병사들의 힘을 복돋으려고 했다.
25일에는 빌구의 방어가 불가능하자 도개교를 폭파해 배수의 진을 쳤으며, 비가 오면서 병사들의 잠자리가 눅눅하지 않도록 건초 매트를 지급하면서 화승총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기계식 쇠뇌를 지급했다. 8월 30일에 오스만 군이 성벽 안으로 돌격하자 병사와 아녀자들을 동원하여 돌덩이를 던지게 해서 응수했으며, 9월 6일에 오스만 군이 승리의 상징으로 끌고 가려고 했던 갈레온 선을 침몰시키려고 하자 밧줄로 배를 부두에 묶어둘 것을 지시했다.
이후 오스만 군이 에스파냐 군의 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하는데, 신중한 태도로 일관하여 병사들에게 추격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원군으로 파견된 부대의 병사가 탈영하여 원군의 병력은 1만이 아니라 6천여 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오스만 군이 9월 11일에 발각되기 전에 기습하려고 했는데, 그 계획을 샤르데나의 배교자가 알려주자 오스만 군의 동정을 면밀히 살피면서 음디나로 군대를 집결시킨다.

6. 승리와 최후


결국 음디나에서 오스만 군을 격퇴하면서 몰타 섬 공방전에서 승리했으며, 죽기 직전인 1567년에는 키프로스 섬에 소유하고 있던 구호기사단의 토지를 모두 팔아버렸다. 또한 집안 노예들을 해방시켰으며, 1568년 7월에 숲에서 매사냥을 하고 돌아가다가 뇌졸중을 일으키면서 몇 주 뒤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스케베라스 산 정상과 성 엘모 요새의 폐허에 건설되면서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몰타 섬의 새 수도인 발레타에 위치한 승리의 성모 마리아 예배당에 안장되었으며, 생전에 영국인 비서인 올리버 스타키가 그의 비석에 비명을 새겼다. 그 내용은 여기 영원한 명예를 얻어 마땅한 라 발레트가 잠들어 있노라, 그는 성스러운 무기로 이교도를 몰아낸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채찍이자 유럽의 방패였다. 그가 스스로 세운 이 소중한 도시에 묻혀 있노라라고 적힌 것이다.
그에 대한 묘사로 균형 잡힌 체격에 키가 크고 풍채가 당당하여 기사단장이 되기에 손색없는 위엄을 지니고 있으며, 성격은 다소 침울하지만 나이에 비해서는 강단이 세다고 했다. 또한 독실하고 기억력이 좋거나 지혜롭고 명석하면서도 육해군 양쪽 모두 경륜이 풍부했으며, 태도도 겸손하면서 참을성이 많은데다가 수 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고 한다. 단, 고조 섬에 있는 기사단 감옥에는 그가 젊었을때 사고를 쳐서 갇혀있었던 기록이 있는것을 보면, 젊은 시절에는 누구든지 그렇듯, 혈기왕성한 젊은 기사 였을듯 하다.
[1] 이때는 혈기 넘치던 젊은 기사단원이었는데, 당시 기사단장이었던 랄레랑은 섬 주민들의 항의에 밀려 오스만군에게 항복을 하고 만다. 발레트와 소수의 동료들은 결사 항전을 주장 했지만 무시 당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생긴 오스만에 대한 증오가 그를 강경파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2] 로도스 섬 공방전에 참전하여 구호기사단과 싸웠으며, 페르시아와 헝가리 원정에도 참가한 전적이 있는 인물이다.[3] 제르바 섬 원정에서 승리한 인물이다.[4] 몰타 섬을 여러 번 습격한 경험이 있으며, 안드레아 도리아에게 붙잡혔다가 풀려난 적이 있다.[5] 조상이 동로마 제국 귀족이었다고 한다.[6] 그러나 돈 가르시아는 몰타 섬에 대한 방안을 펠리페 2세에게 미리 알려줬지만 제르바 섬 원정에 실패하여 막대한 돈을 들여 함대를 재건한 펠리페 2세가 그 함대를 잃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심하게 대응했으며, 돈 가르시아에게 함대를 위험하게 빠뜨리는 행동을 하지 말고 허락없이 어떠한 군사 행동도 하지 못하도록 하여 원군을 제대로 보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