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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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럽 십자군 전쟁 시기에 결성된 기사수도회. 정식 명칭은 '성 요한의 예루살렘과 로도스와 몰타의 주권 군사 병원 기사단(이탈리아어: Sovrano Militare Ordine Ospedaliero di San Giovanni di Gerusalemme di Rodi e di Malta, 영어: Sovereign Military Hospitaller Order of Saint John of Jerusalem of Rhodes and of Malta)'이다.
대개 줄여서 '구호 기사단(Knights Hospitaller)'이라 부르며, 함께 십자군 국가들을 방위하던 성전 기사단원은 'Templar'라고 불렸지만 구호기사단원은 'Hospitaller'라고 불렸다. 하지만 구호기사단이란 이름 외에도 성 요한 기사단, 로도스 기사단, 몰타 기사단, 병원 기사단 등 정식 명칭의 일부를 따온 여러 약칭이 있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양 쪽에서는 흔히 몰타 기사단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한국의 옛날 책 중에는 약칭인 'Hospitaller'를 '애호사'라고 옮긴 것도 있었다.
2. 설명
현재까지도 존속하고 있으며, 단체명과 각종 직책명은 과거 기사단 시절의 것을 그대로 유지하는 중이지만,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군사 단체가 아닌 구호와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사실상의 NGO로 탈바꿈하였다. 그들이 기사가 되기 이전의 업무인 의료 봉사를 하는 단체로 회귀한 것이다.
현재는 영토가 없어서 국제법상 주권 국가로 취급받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세속의 영토가 있었던 과거엔 엄연히 국제법상 주권 실체(sovereign entity)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영토가 없는 현재도 구호 기사단을 주권 실체로 인정해줘서 외교 관계를 수립한 나라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정식 명칭에 괜히 '주권'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게 아니다.[2]
한때 몰타를 지배했던 세력이라 몰타 정부가 영토의 일부를 떼어 주려고도 했었다고 한다. 만약 성사됐으면 '교황청+바티칸' 모델 비슷하게 되어 다수의 국가들이 구호 기사단을 국가로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사는 되지 않았다. 대신 기사단의 몰타 내 활동을 보장해주기 위해 옛날에 몰타에 있을 때 쓰던 성의 상부를 외국의 대사관과 유사한 치외법권 지역으로 인정해주고 있다. 그곳은 몰타 법을 따르지만 기사단원들에게 몇 가지 특권이 제공된다.
현재 본부는 이탈리아 안에 2군데 있는데, 이탈리아는 구호 기사단의 주권을 실제로 인정하는 나라라서 구호 기사단의 본부도 치외법권 지역으로 인정해준다.
이 두 장소 중 하나인 Villa del Priorato di Malta는 로마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한데, 구호기사단이 방문 목적은 아니고 대문의 열쇠구멍이 유명하다. 열쇠구멍을 들여다보면 구멍을 프레임 삼아 구호기사단의 뜰 너머로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 돔이 아름답게 보인다. 이를 보기 위한 관광객들로 대문 앞에는 언제나 꽤 긴 줄이 서있다.
기본적으로 기사수도회를 전신으로 한 가톨릭 관련 단체이나 영국,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 등에는 개신교도들을 위한 '요한 기사단'이 별도로 존재한다.
3. 역사
3.1. 창설과 십자군 전쟁
600년 예루살렘에 설립된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이 시초로서, 본래 구호 활동을 담당하던 곳이다. 1차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들로 포위된 예루살렘에서 자의에 의한 것인지 타의에 의한 것인지 의료 봉사를 계속 했다. 이들의 이러한 기원은 그들이 유연하게 살아남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성전 기사단은 보호할 성전과 전투가 없으면 존재 가치를 잃고, 실제로 사라져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병원 기사단은 전투가 없어지면 그들의 기원인 의료 봉사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니까.
이후 1113년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면서, 교황명으로 기사단으로 조직되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 방어와 같은 소극적 전투 활동에 국한되던 활동 영역이 이후 순례자들의 경호 등으로 확대되기 시작했고, 계속적인 조직 확대를 통해 거대한 군사 조직이 되었다. 검은색 겉옷에 그려진 흰 십자가를 상징으로 삼으며, 십자군 전쟁 기간 동안 전쟁의 주력으로서 이슬람 군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창설 초기에는 신앙심만으로 참여하는 귀족들이 많았으나 후대로 갈수록 물려받을 재산이 없는[3] 차남, 삼남 같은 갈 곳 없는 귀족 자제들이 주요 인재 풀이었다.
십자군 전쟁 당시 난공불락의 요새로 꼽힌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사수한 전력이 유명하다. 당시 이슬람 세력을 이끈 누르 앗 딘과 살라흐 앗 딘도 이 성을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물러난 적이 있다. 당시 한 무슬림 작가는 이 성을 두고 '무슬림의 목에 걸린 가시'로 평할 정도.
1271년에야 이 성이 함락당하는데 이때 상황이 참 드라마틱하다. 당시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지키던 구호 기사단의 병력은 수백 명 정도였으나, 그 몇십 배에 달하는 맘루크 왕조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그러자 맘루크 군을 이끌던 바이바르스 1세는 교묘한 방법을 이용했다. 트리폴리 백작 보에몽의 편지를 위조해서 "더 이상 승산이 없다. 항복하라."라는 내용이 적힌 편지를 비둘기로 성 안에 보낸 것. 여기에 속은 기사단은 성을 내주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이바르스는 항복한 기사단원들을 살려줬다고 한다.
다른 해석으로, 기사단의 무사 철수를 전제로 한 협상의 결과로 성을 내주고 철수했다는 주장도 있다. 수백 년간 난공불락이던 요새가 이런 얄팍한 속임수로 한순간에 무너졌다고 납득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미 너희 십자군들이 다 졌고 이제 너네밖에 안 남았으니 저항해봐야 무의미하다. 그냥 항복하지?"라는 식으로 주변 상황을 마치 너희만 포위된 듯이 왜곡해서 알려주어 전의를 상실하게 했을 수도 있다. 이 역시 다른 지역에서도 종종 써먹던 방법이었다.
무엇보다도 주변 상황을 왜곡할 것도 없이, 바이바르스의 크라크 데 슈발리에 포위 공격 자체가 이 성채 주변의 12개 요새(성채 방어를 위한 전초 기지)를 먼저 함락시켜 성채를 고립시킨 후 진행된 것이고, 크라크 데 슈발리에는 시리아 지역의 마지막 십자군 거점이었다. 굳이 왜곡이나 속임수랄 것도 없이 시리아 일대의 십자군 세력은 다 패배하여 밀려난 것이 맞고, 크라크 데 슈발리에 이외에는 다른 거점이 없었으니 저항해봤자 시리아의 마지막 십자군 거점을 지켜낸다는 상징적 의미 말고는 없다는 것은 기사단 수뇌부 역시 몰랐을 리 없는 것. 전략적 관점에서 보면 십자군 세력의 핵심 전력 중 하나이던 구호기사단이 무의미한 방어전에 묶여 있는 것보다는 레반트 해안 지역에서 아직 명맥을 이어가던 다른 십자군 국가들을 방어하는 데 합류하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즉, 세력을 보존한 상태로 다른 십자군 세력에 합류하기 위해 무사 철수를 조건으로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포기하고 물러난다거나, 얄팍한 속임수에 속아넘어가는 척하고 물러나는 것 역시 합리적인 판단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3.2. 이슬람 세력과의 대결
3.2.1. 로도스 기사단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예루살렘 왕국이 성지의 영토를 모두 상실하고 키프로스로 밀려났으며, 이때 구호 기사단도 성지의 거점을 모두 상실하자 당시까지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로도스 섬을 침공해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근처 몇몇 섬 및 소아시아 본토의 일부 거점을 확보하고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계속했다.
십자군 전쟁이 종료된 후 교황청 및 프랑스 왕의 손에 의해 철저하게 해체당한 성전 기사단과 달리 구호 기사단은 최전선에서 이슬람에 맞서는 성채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던 탓에, 성전 기사단의 재산 상당량이 구호 기사단에 흡수되어 유럽 각지에 지부를 두고 그 세력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다 15세기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세력을 떨치자 이에 반발하여 1세기가량 오스만 제국 선박에 대한 무차별 해적질을 벌였다. 당시에는 '이교도에게 가한 죄악은 죄가 아니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기사단이 해적질을 해도 통념상 문제가 없었다.[4] 주로 무슬림들을 납치해 서유럽에 노예로 팔아먹는 인신매매를 했는데, 한번은 투르크족 귀족 소녀 2명이 이들한테 납치되어 프랑스로 팔려가 그곳에서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하고 프랑스인 귀족들과 억지로 결혼을 하는 일도 있었다. 그 밖에도 오스만 술탄 공주의 유모가 이들한테 납치당해 분노한 공주가 아버지인 술탄에게 구호기사단을 응징해달라고 애걸하여 로도스섬 공방전이 벌어졌다는 소문도 있었다.[5] 이 무렵 기사단의 해군 전력은 단 7척이었지만, 로도스섬 자체가 에게해와 지중해 중간에 걸쳐 있어 시리아나 이집트 해안 지대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 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요충지였던지라 오스만으로서는 기사단의 해적질이 적잖은 골칫거리였다.
한편 콘스탄티노플 함락 때 3중 성벽이 신무기 대포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봤으므로, 대대적 개수 및 중축을 거듭하여 대포 공격도 버틸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어놨다. 그래서 메흐메트 2세 치세 말기인 1480년에 한 번 시도한 공략은 실패했다. 이때 오스만 군대는 전장에서 바로 길이 5.5미터에 60~75cm의 구경을 지닌 거대한 사석포 16문을 제조할 만큼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었으나, 끝내 구호기사단의 두터운 방어를 뚫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강력한 오스만 군대에 맞서 싸워 요새를 지켜내 승리한 기사단의 명성은 유럽 전체에 알려졌고, 오스만 군대에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절망에 빠져있던 유럽인들은 로도스 기사단의 승리를 열광적으로 축하했다.[6] 그러나 1522년,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술탄 술레이만 1세가 직접 2차 공략을 시도했다. 이때 오스만 제국은 병력 10만, 함선 300여 척을 동원하였고[7] 수비하던 기사단 병력은 기사단원 7백 명에 로도스 주민 7천여 명이었다.
기사단은 신성 로마 제국,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 등 기독교 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이들은 끝끝내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대서양 항로 개척에 바빴고, 영국과 프랑스는 왕권 강화에 몰두하던 중이었으며, 그나마 희망이었던 베네치아는 오스만과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로 휴전하던 중이었던 터라 도와주질 않았다. 결국 기사단 측은 1년치 식량과 무기 등을 비축한 요새에서 6개월에 걸친 기나긴 공성전을 벌였다.[8]
오스만군의 사상자는 1.5만~4.5만 명이었지만[9] , 술레이만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계속 밀어붙였다. 외성이 무너져 내성으로 후퇴해 버티던 기사들에게 술레이만은 '''모든 무기와 군기를 가진 채로 섬을 나가게 해주겠으며 섬에 남게 될 주민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보장한다'''는, 점령자 치고는 아주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였다.[10] 섬이 삶의 터전인 주민들은 죽을 각오로 싸울 이유가 없었으므로 항복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격한 찬반 논쟁을 벌였다. 소수 기사들이 결사 항전을 주장하였지만, 결국 주민들의 압박에 밀려 기사단장 릴라당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며 성문을 열었다.
1523년 1월 1일, 살아남은 기사단원과 민간인 수천 명은 마지막 행진을 벌이며 술레이만이 제공한 배 50척을 타고 명예롭게 베네치아령 크레타 섬으로 떠났다.[11]
3.2.2. 몰타 기사단
이후 방랑 생활을 하던 기사단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의 배려로 1530년 몰타 섬을 할양받아 이곳을 거점으로 다시 한번 오스만 제국과 전쟁에 들어갔다. 카를 5세는 기사단에게 형식적인 조공으로 1년에 한 번씩 몰타산 매 '''1마리'''를 바칠 것을 요구했다.[12] 원래 기사단은 당시 기독교도의 영역이었던 북아프리카의 트리폴리를 요구하였으나 신성 로마 제국에서 번번이 거부하였는데, 기사단이 생각했던 최적의 활동지 트리폴리는 1551년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했다. 기사단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13]
몰타는 이전 거점인 로도스에 비해서 여러모로 열악했다. 섬의 크기도 작았고,[14] 대부분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서 토양 또한 척박하여 자급자족이 힘들었다.
다만 바위가 많은 환경은 수비 면에선 엄청 긍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주변에 보급 기지가 될만한 섬 하나 없고, 절벽으로 둘러싸여 상륙 지점도 마땅치 않은 데다, 땅이 워낙 좁아서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공격자가 숫적 우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몰타는 로도스와 맞먹을 정도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오스만의 세력이 바르바리 해적들 덕분에 서지중해까지 넓어지긴 했지만, 이곳은 유럽 국가들의 앞마당이기도 했기 때문에 동지중해 같은 우위를 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스만 측 배들은 최대한 안전하게 가기 위해선 몰타와 튀니지 사이의 해협을 지나가야 했는데,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 중간에 자리잡은 몰타섬은 해협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좋은 위치였던 것이다. 따라서 기사단은 다시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오스만을 상대로 엄청난 해적질을 하며 어그로를 왕창 끌었다.[15]
동으로는 바그다드, 북으로는 베오그라드, 남으로는 아덴까지 점령한 정복왕 쉴레이만 1세도 로도스 때와는 달리 본토와 거리가 너무 멀고 치세 말기였던지라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1560년 제르바섬 해전에서 기독교 연합군을 개발살내고 제해권을 확보했기 때문에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는지, 1565년 3월 몰타섬을 공략하기 위해 각지에서 끌어모은 4만의 군대를 파병했다. 기사단 역시 외부에 나가 있던 기사들을 소집하고 무기와 식량을 비축하며 9천 가량의 병력으로 다가올 전쟁을 준비했다. 이는 기사단장이었던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의 공이 컸는데, 그는 젊은 시절 저 위의 로도스 공방전에도 참전하였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그때의 치욕을 다시는 겪지 않으려는 듯 요새를 여럿 세우고 전력을 확보하는 것에 광적으로 집착하여 몰타를 우주방어 요새로 만들었다. 정보 수집에도 심혈을 기울여서 '''이스탄불의 황궁'''에도 그의 첩자들이 있을 정도였다. 수천km 떨어진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원정군이 출범하자마자 기사단이 바로 준비 태세를 갖출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첩보 덕분이었다.
무스타파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원정군은 5월에 몰타에 상륙하였다. 기사단은 여러 성채에 전력이 분산되었지만, 좁아터진 땅에 상륙한 오스만군 역시 성채들을 공략하기 위해 병력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해상 봉쇄에 동원된 함대도 기독교 연합군이 언제 배후를 노릴지 몰라 함부로 지원해줄 수가 없었다. 오스만군은 요새 몇 곳을 함락하고 수비군을 학살했지만 기사단의 사령부가 위치한 수도 므디나(Mdina)를 공략하는 데는 실패하였고, 서로 주고받는 포위전이 약 4개월가량 계속됐다.
오스만군의 총지휘관이었던 무스타파 파샤는 로도스 때처럼 명예로운 항복을 제시하였지만 초강경파 발레트는 이 섬이 예니체리들의 시체로 가득차게 되면 주겠다며 대놓고 어그로를 끌었다. 이 말을 전해 듣고 무스타파 역시 빡쳐서, 기사단을 전부 죽여버리고 발레트는 산 채로 콘스탄티니예로 끌고 가겠다며 노발대발했다.[16]
기사단은 결사항전의 의지로 맞섰기 때문에 오스만군은 요새 하나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특히 몰타섬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시달려 왔던 터라 이슬람에 대한 증오가 하늘을 찔러서 기사단에 자발적으로 협조했고 기사단 군대의 중추를 담당했다. 게다가 전투에서 전사하는 기독교도에게는 전대사를 수여하겠다는 교황청의 교서가 내려오자 더 적극적으로 싸웠다.
기사단은 정말 필사적으로 싸웠다. 오밤중에 기병대가 출격하여 오스만군의 야전 병원을 습격하여 부상병들을 학살하고 군마들을 훔쳐간다든가, 외부에 파견 나가 있다가 미처 합류하지 못한 기사단 측 갤리선 한 척이 포위망 전면으로 들어와 오스만 함대를 요리조리 농락하고 다시 빠져나가서 오스만 측 지휘관들의 혈압을 오르게 하기도 했고, 성벽 가장 아래쪽에 구멍을 내어 대포만 내놓고 공성 탑의 하단부를 쏴서 무너뜨리는 창의적 전술을 쓰기도 하였다. 또 포로로 잡힌 기사 한 명은 목숨을 걸고 거짓 정보를 말해줘서 오스만군이 가장 방어가 견고한 부분을 공격하게 하여 떼죽음을 당하게 만든 다음, 결국 분노한 오스만군들에게 태형을 당해 죽은 일도 있었다.
가장 격전이 심했던 '성 엘모 요새'는 오스만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는데, 수많은 병사들이 죽을 걸 알면서도 자원하여 오스만군에게 엄청난 출혈을 강요했다. 결국 성벽이 뚫려 오스만군이 쏟아져 들어오자, 기사들은 마지막 예배를 올린 다음에 현판과 십자가를 땅에 묻고 성물들을 전부 불태운 뒤 전원이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17] 실제로 기사단 본진에서는 최후의 한 명이 죽기 전 쏘아올린 불꽃 신호를 통해 요새가 함락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요새 하나에서만 사상자가 기사단 측 1500명, 오스만군 측 8000명이 나왔는데 무스타파 파샤는 "알라여, 이렇게 작은 요새에 이런 큰 희생을 치렀는데, 더 큰 요새에는 앞으로 얼마나 더 큰 희생을 치러야 합니까?"라며 절망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가을로 접어들자 오스만군은 겨울에 대비해야 했고 본토의 쉴레이만도 증원을 명령했다. 오스만군은 애초에 공성 기간을 길어봤자 4주 정도로 여기고 왔는데 막상 섬에 와보니 공성은 길어지고 먹을 것은 없었다. 교두보 격인 튀니지는 이들을 지원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나중에 이르러선 보급 부족으로 인해 사기가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기사단은 포위 직전 가축들을 성 안으로 들이거나 아예 다 죽여버렸고, 곡식도 수확할 수 있는 건 죄다 거둬가고 나머진 모조리 태워버렸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풍족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여 성 요한의 축일에 대놓고 즐겁게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며 심리전을 펼치기도 했다.
기사단은 저번과 같이 서유럽 기독교 국가들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이번엔 지리적으로 상당히 가까운 거리였으나, 제르바 해전의 상처가 덜 아문 터라 이번에도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 요청을 무시했다. 하지만 공성이 꽤 길어지면서 기사단의 앞마당이던 시칠리아의 부왕 가르시아가 8천 병력을 보내왔다. 발레트는 일부러 오스만군 포로가 있는 곳에서 지원군 1만 6천이 상륙했다고 큰 소리로 떠들었고 포로를 탈출하게 해주었다. 포로를 통해 소식을 들은 무스타파는 결국 포위를 풀고 철군하려다 마지막으로 한 방을 날려볼 요량으로 회전을 거는데, 여기서 완전 캐발려서 오스만군은 겨우 1만 5천 정도만 탈출했다. 이때 기독교 연합군은 고지대를 선점하여 방어만 해도 이길 수 있었으나 기사단 기병대가 "적을 앞에 두고 공격을 안 한다는 게 말이 되냐"라며 닥돌을 시전하였고, 스페인 증원군과 남은 보병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함께 닥돌을 하여 당황한 오스만군을 전부 쓸어버렸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3개월[18] 에 걸친 공방전은 기사단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쉴레이만 대제는 패전 사실을 듣고 처음에는 노발대발했으나 어느 정도 정상 참작을 해주었고, '''"내년에는 내가 직접 가겠다"'''라며 이 바위섬에 강하게 집착했다. 하지만 이듬해, 헝가리 전역에서 무리한 출병과 합병증이 겹쳐 결국 사망하였고 몰타섬 정복은 오스만에 영원한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섬이 초토화되고 병력의 절반을 잃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오스만의 포위를 물리친 기사단과 단장 장 드 라 발레트는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들에서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이후로도 발레트는 언제 또 오스만 군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며 파괴된 요새들을 복구하고 수도 므디나가 방어에 취약하다는 점을 들어 고지대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로 했다. 그는 이 도시의 시공식 때 첫 돌을 스스로 들어 옮기기도 했다. 시공식 3년 뒤 그는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는데, 사후 완성된 이 새로운 도시의 이름은 그를 기리는 의미로 '''발레타'''가 되었다.
이후 1571년 레판토 해전을 계기로 오스만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구호 기사단의 해적 행위도 더욱 극성을 부렸고, 몰타섬은 기독교도 노예를 해방하고, 반대로 아랍과 아프리카 노예를 유럽에 공급하는 시장으로서 번성하였다.
3.3. 멸망
18세기 후반 들어 종교개혁으로 대륙 지부들은 모두 해체되었으나 일종의 독립 국가로 변한 몰타 지부는 여전히 건재한 상태였다. 그러나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의 일환으로 몰타섬을 침공해 점령했고, 기독교도와 싸우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구호 기사단은 항복하면서 기사단 국가는 멸망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나폴레옹이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가는 길이라서 잠깐 쉬었다 가겠다고 속여서 아무 저항 없이 프랑스 군대가 상륙하게 놔둔 후 뒤치기를 당해서 정복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다른 기록에 의하면 기사단의 중심인 프랑스 출신 기사들이 나폴레옹을 환영하면서 받아들였고, 그랜드 마스터는 이를 저지할 수가 없어서 정복당했다고도 한다. 다만 기사단에 참여할 정도라면 신앙심은 둘째 치고 혈통이 100% 귀족이란 이야긴데, 그런 이들이 혁명 세력인 나폴레옹을 환영했다는 건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귀족 출신 중에서도 혁명에 열광한 인물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고, 기사단이라는 곳이 상속에서 밀린 작은 아들들이 보내지던 곳이었으며, 무엇보다 당시 기사단의 존재이유였던 투르크와의 전쟁이 흐지부지한 상태였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즉 몰타에서의 일상에 만족할 수 없었던 일부 기사들에게는 이집트 원정이 모험, 혹은 한 몫 잡을 수 있는 기회로 보였을 것이다.
영문 위키백과에 따르면, 물과 식량을 보급받고 싶다는 나폴레옹의 요청을 받은 기사단장이 "보급은 해주겠지만, 한 번에 2척만 입항할 수 있다."라고 회답하자 나폴레옹이 "그럼 보급이 너무 늦어지고, 그러다가 영국 해군에 붙잡힐 수 있다."라고 반발하여 병력을 상륙시켜 기사단을 공격했고, 몰타섬 서부를 격전 끝에 점령한 뒤 기사단 본대에 항복을 요구해서 관철했다고 적었다. 전투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라는 듯. 다만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수 명 수준으로 적었으며, 기사단 쪽의 사상자 역시 대부분이 포로(...)였던 것으로 보아 격전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두시간 정도 저항하다 포기하고 요새안으로 후퇴한 기사단이, 다음날 24시간 휴전협정을 맺은 후, 협상과 내부 토론 끝에 프랑스의 돈(...)을 받고, 대신 요새를 비롯한 기사단의 모든 영토를 프랑스에 넘겨주고 철수하면서 전투가 종료되었다. 한편 2년 후 영국이 몰타섬을 프랑스로부터 빼앗았을 때, 기사단장이 영국에게 몰타의 기사단 본부를 반환해달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이후로도 기사단이 몰타 내의 영토를 회복하는 일은 없었다.
3.4. 재건과 현대의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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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기사단의 로브.
당시 기사단장이었던 페르디난트 폰 홈페슈는 그를 따르고자 한 단원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의 트리에스테로 떠났다. 하지만, 1801년에 페르디난트는 살해되고 만다. 이에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7세가 기사단의 보호자가 되겠다고 자청하고, 바르톨로메오 프란체스코 마리아 루스폴리를 새로운 단장으로 임명해 시칠리아의 카타니아에 기사단의 임시 지부를 마련해 주었다.
시간이 흘러 카타니아 외에도 메시나, 페라라에도 임시 지부를 마련한 기사단은 마침내 1834년 로마에 정식 기사단 지부를 만드는 것을 허가받았다. 이 시기부터 구호기사단은 군사적인 면은 완전히 탈피하여 본분인 구호활동에 노력하는 일종의 NGO로 거듭났다. 로마에 콘도티 거리에 있는 구호소에서는 우표를 판매한다.[19]
한편 영국 지부는 1888년 빅토리아 여왕의 공인을 받아 '예루살렘의 성 요한 기사단'으로 재건되어 영연방과 미국에서 활동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 적십자와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그래서 영국에서 오는 구호품들은 영국 적십자사와 성 요한 기사단 명의로 오곤 했다.[20] 1963년 몰타 기사단의 인정을 받고 정식으로 구호기사단에 편입되었다. 한때 개신교에 장악되었던 독일 지부도 역시 동일한 명칭으로 재건, 스웨덴, 네덜란드, 헝가리로 조직을 확장했으며, 영국 지부와 연대해 활동하고 있다.
구호기사단 홈페이지에는 "더 이상 검으로 싸우는 전쟁은 없으나, 평화로운 도구들을 사용해 질병ㆍ가난ㆍ사회적 단절ㆍ편견과 싸워 나가는 것은 믿음을 지키고 전파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라는 문구가 있다.[21] 과거에는 귀족이 아니면 가입 자격을 주지 않았으나, 이제는 귀족이 아니라도 가입할 수 있다고 한다.
2008년 79대 기사단장 매튜 페스팅(영국인, 59세)이 취임했다.
우리나라에도 회원 1명이 지부 설립을 준비 중이라는 기사가 2013년에 나왔다. 지원자는 양창수(베네딕토) 대법관, 나경원(아셀라) 원내대표, 탤런트 지진희(요한) 등이 있다. 봉사와 기도로 2년여 수련 기간을 마치면 기사 작위와 함께 정회원 자격을 받는다. 2015년 마침내 오더 오브 몰타 코리아(Order of Malta-Korea)이라는 이름으로 창립해, 박용만 회장이 대표로 선출되었다. 박용만 대표는 2018년 몰타 기사단의 한국 대표 자격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미사에 참여한 바 있다. #
이제 군사적 성격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근대 이후에도 여전히 활동하며 존속하는 '''기사'''단이라는 점이 사람들의 허영심을 자극했기 때문인지, 구호기사단의 이름을 따온 많은 사이비 기사단들이 존재한다. 이를 정리한 책도 있으며, 배포는 진짜 구호기사단이 한다고 한다. 이 책에서 정리한 사이비 기사단 수는 무려 16개. 움베르토 에코는 이런 사이비 기사단 중 하나의 초청장을 받은 것을 계기로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서 이들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기도 하였다.
2017년 1월 페스팅 몰타 기사단장이 태국에서 에이즈 예방을 위해 콘돔을 나누어 주던 알브레히트 폰 뵈젤라거 부단장을 해임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부단장이 바티칸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교황청에서 이 해임을 부당하게 여겨 갈등을 빚다가 페스팅 기사단장이 물러나게 되었다.[22] 주권국가인 몰타 기사단에 교황청이 이례적으로 개입한 사례이다.
이탈리아 출신 자코모 달라 토레 델 템피오 디 산귀네토가 제80대 단장으로 선출되었으나, 2020년 4월 29일 선종하였다.
4. 외교
외교 사절, 자국 등록 선박, 자체 자동차 번호판 등이 있고, 우편 협정을 유지하는 몇몇 나라에서만 통용되는 우표도 발행하며 UN의 영구 가입 자격[23] 도 갖추었다. 별도의 여권이 발행되며[24] , 이탈리아나 몰타 공화국 등 UN 회원국의 과반수인 110개국이 몰타 기사단을 완전한 국가로 인정한다(대한민국은 불인정). 오히려 중화민국(대만)이나 코소보를 인정한 나라 숫자보다 더 많다. 기독교권 국가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ㆍ요르단이나 이집트 같은 이슬람권, 태국ㆍ캄보디아 같은 불교권 국가들도 몰타 기사단을 나라로 취급한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몰타 기사단장 관저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로 불리기도 한다.
몰타 기사단장 관저에 대사관을 입주시킬 수는 없으므로, 주 교황청 대사관처럼 로마에 주 구호기사단 대사관이 있다. 당연히 구호기사단도 일부 국가에 대사관을 두었다.
5. 직책/계급 체계
상술된 대로, 구호기사단의 직책과 계급 체계는 중세 시대부터 쭉 이어져 내려온다. 근본적으로 다른 기사단들과 달리 다국적 기사들이 모였기에 기사단의 체계 자체가 출신 국가를 나눈다. 단 현재 기재되는 직책과 계급 체계는 중세 시대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 기사단장: 구호기사단의 총지휘관.
- 대원수: 기사단의 2인자이자 프로방스[25] 출신 기사들을 통솔했다.
- 원수: 기사단장의 부관직을 겸임, 프랑스(오베르뉴~일드프랑스) 출신 기사들을 통솔했다.
- 부원수: 이탈리아 출신 기사들을 지휘했다.
- 제독: 아라곤 출신 기사들과 구호기사단에 소속된 모든 해군들을 지휘했다.
- 갤리선 제독: 제독 아래에 있는 해군의 2인자. 포르투갈 출신 기사들을 통솔했다.
- 재무감: 영국 출신 기사들을 통솔했고 기사단의 재정을 담당했다.
- 대집행관: 독일(바이에른) 출신 기사들을 통솔했다.
- 대법관: 카스티야 출신 기사들을 통솔했으며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 기사단 주교: 출신별, 국가별로 1명씩 있었다.
- 기사단 수도원장: 기사단 주교 밑에서 아래 계급의 기사들을 지휘했다.
- 기사대장: 백인대를 지휘한 기사.
- 수도기사: 귀족 출신의 기사.
- 평민기사: 비귀족 출신의 기사.
6. 군사
구호기사단은 이름대로 기사단 자체가 군대였기에 당연히 군대를 따로 둘 필요가 없었다.
군사 부분이 따로 분리된 것은 1876년 3월 26일, 이탈리아 지부에서 현대적인 군대를 창설한 뒤부터지만, 무장 없이 이탈리아군을 보조하는 기행부대에 불과했다. 식민지나 괴뢰국도 아니고 엄연한 독립국으로서 다른 국가의 군대 아래에서 활약한 것이다. 평시에는 비무장이지만 전장에서는 베레타 92, 베레타 AR70, 베레타 ARX-160 등 호신용 수준의 무장을 갖추며 기사단 계급이 아닌 따로 군대 계급을 부여받는다. 다시말해 기사단이 문민통제화된 셈. 이 부대는 현재까지도 명목상 유일한 구호기사단의 군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이탈리아 국가기념일 중 공화국의 날인 매년 6월 2일 마다 기념식 행진에 참여하고 있다.사진1, 사진2
애매하지만 공군에 해당하는 편제도 있었다. 사보이아-마르케티 SM.82를 수송기로 운용하다 현재는 중단하여 기체가 이탈리아 항공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7. 몰타 십자가(Maltese Cross)
[image]
꼭짓점 8개가 있는 이 십자가 도안은 몰타 기사단의 상징이면서 몰타의 상징이기도 하다. 4면은 용기, 정의, 절제, 인내를 의미하고 8개 꼭짓점은 아라곤, 카스티야, 오베르뉴, 바이에른, 포르투갈, 영국, 이탈리아, 프로방스 등 기사단을 구성하는 8개 출신 지역을 의미한다. 기사단의 의무 역시 8줄로 되어서 각 꼭짓점마다 이 의무를 대입하는 해석도 있다.
단, 위 여덟 꼭짓점의 의미는 나중에 적당히 갖다 붙인 것이고, 이 십자가는 원래 이탈리아의 상업 도시 아말피의 문장이다. 아말피의 상인들이 구호기사단을 창립하면서 도시의 문장을 그대로 사용한 것.진실하게 살고(Live in truth)
신앙심을 갖고(Have faith)
죄를 뉘우치고(Repent of sins)
사람들을 겸손하게 대하고(Give proof of humility)
정의를 사랑하고(Love justice)
자비를 베풀고(Be merciful)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하며(Be sincere)
박해를 인내한다(Endure persecution)
현재의 독립국 몰타는 국기가 따로 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몰타 십자가를 쓰지 않지만, 여전히 기사단 관련 유적지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관광 상품에도 다양하게 변형해서 집어넣어 팔고 있다. 참고로 이 십자가 도안은 독일 제국의 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erite) 훈장에도 채용되었다.
8. 세인트 존 앰뷸런스(Saint John Ambulance, St.JA)
구호기사단은 영국을 포함한 영연방권에서는 구급차로도 유명하다. 다른 나라처럼 소방서에서 직접 구급차를 운영하지 않고 구호 기사단에서 제공하는 구급차를 굴리기 때문이다. 나라에 따라서 무료인 곳과 유료인 곳으로 나뉜다.
9. 대중 매체
사실 예루살렘 왕국 시절에는 성전 기사단과 라이벌 격이었으며, 오히려 성전 기사단보다 더 강력하게 오스만 제국과 장기간 대결하며 기사단 국가를 유지했고, 심지어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기사다운 엄청난 전투력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안 망하고 남아 있다 보니 '''신비스러움과 음모스러움이 부족해서''' 그런지 창작물에서 등장하는 빈도는 성전 기사단에 비해서 많이 밀린다(...). 아무래도 현존하는 준 국가/NGO 단체이다 보니 성전 기사단처럼 막 다루기 껄끄러운 면도 있다. 음모론 분야에서도 성전 기사단은 이야기가 많지만 구호기사단은 거의 이야기가 없다. 초창기부터 오로지 무력 집단으로서 개설된 성전 기사단과는 달리 구호기사단은 말 그대로 구호소에서 시작해 기부받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구성된 만큼 폭력성도 비교적 덜했다. 그러다 보니 악역에 그다지 적합한 집단도 아니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집단으로서 사료가 되는 기록도 많아 음모론이 개입할 여지도 그만큼 적다. 그래서 등장하더라도 선역으로 나오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성전 기사단보단 나은 역할로 나올 때가 많다.
- 소설
- 푸코의 진자에서 라피스 엑실리스를 추적하기 위한 밀지를 노린 세력 중 하나로 나온다. 단 이 임무는 현대의 구호기사단과는 상관없고, 중세 구호기사단의 행적을 복기하는 정도의 비중을 차지한다. 번역자 이윤기는 '병원 기사단'이라고 번역했다.
- 하드 보일드 소설의 시초인 몰타의 매의 매 조각상은 여기서 만든 것이다.
- 대체 역사 소설인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는 세르비아 십자군에 참가했으며 주인공의 제안으로 이피로스 군과 함께 움직이며 마케도니아 회복에 큰 공을 세운다. 그리고 그 다음 화에서 제국 내부에 지부 설립을 허가받으며 주가가 상승하고 있다. 주인공 역시 대 오스만 전선에 있어서 주요한 파트너로 생각하며 본격적인 병원 설립도 기대하고 있다. 소설의 배경 시대상 십자군도 완전히 몰락한 상황에서[26] 제국을 도와 이교도에게 점령당한 마케도니아를 수복했다는 활약상이 있기에 대 이슬람의 최전선으로 인정받은 수준을 넘어 위상이 한층 강화될 듯하다. 그 뒤 아라곤과의 전쟁과 3차 오스만 전쟁에서는 관망하는 모습을 보였고[27] 모두 주인공의 승리로 끝나자 주인공에게 봉신화를 자처, 제국의 해군 전력으로 편입된다.
- 대체 역사 소설인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도 견서사가 교황청을 방문하자 조선과의 관계를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해 교황 측에서 이들의 파견을 결정해 페데리코 추기경의 호위 명목과 조선 해군 강화라는 임무를 받고 조선에 단원들이 파견을 온다. 그 뒤 관전단의 이름으로 조선군에 합류해 등선군과 함께 조선 백성 구출을 위해 싸우고 있다.
- 영상매체
- 만화
- 네이버 웹툰 갓 오브 하이스쿨 세계대회 편의 몰타 기사단 팀은 여기에서 따온 듯하다. 다만, 공통점은 적다.
- 헬싱의 제9차 공중기동 십자군(...)의 구성원으로 등장한다. 전체 3172명 중 몰타 기사단이 2457명이었는데 최후의 대대#s-4.1.2와 아카드에게 전멸한 것으로 추정된다.
- 게임
- 미니어처 게임 인피니티에서는 판오세아니아 국교회 휘하에 이들의 이름과 이념을 딴 구호기사단이 있다.
- 미니어처 게임 Warhammer 40,000의 스페이스 마린 챕터인 블랙 템플러도 몰타 십자가와 검정색 메인 컬러 등 모티브적인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다만 이들은 다른 십자군 기사단들에서 온 모티브도 많이 섞여 있고, 챕터 색상이나 군사 국가에 가깝게 변모한 점을 보면 튜튼 기사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덤으로 현대의 구호기사단과는 달리, 자비 없는 무시무시한 자들이다. 심지어 옛날엔 오랜 전우라도 사이커의 자질이 생기면 자결을 종용하거나 거부하면 처형해버리곤 했다. 요즘엔 설정 변경으로 이런 막장짓은 폐지.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캠페인에선 2번 나오는데, 살라딘 미션에선 적으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미션에선 동맹군으로 나온다. 둘 다 십자군 전쟁기를 배경으로 한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에서는 첫 번째 주인공이자 블랙 가문의 시조인 모건 블랙이 성 요한 기사단 소속인데, 위에서도 나오듯이 성 요한 기사단은 구호기사단의 옛 이름들 중 하나다. 단 첫 시작이 몰타 공방전이라는 점을 빼면 실제 구호기사단의 역사와는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 캠페인 1장을 시작해 보면 몰타섬의 동남부 부분에 표시가 되어 있지만 여기는 오스만군이 일단 상륙하여 작전회의를 열었던 지점이지 전투가 벌어졌던 곳은 아니다. 게다가 성 요한 기사단은 당시 주군으로 모시고 있던 스페인의 지원을 받고서야 오스만군을 격퇴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스페인군이 그림자도 안 보일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아예 적으로 나오기까지 한다[28] . 기사단원들을 봐도 프랑스어나 하다못해 스페인어가 아니라 영어를 쓰고 앉았는가 하면[29] 기사단장이 실제 기사단장과 다른 인물이고, 주인공인 모건 블랙이나 오스만 측 조연 사힌 등도 몽땅 가공 인물이다. 이후에는 아메리카로 넘어가는데, 성 요한 기사단이 아메리카로 갔던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30] 이야기는 완전한 창작이다.
- 명일방주의 주인공 세력 '로도스 아일랜드'는 이름으로도 알 수 있듯 현실의 구호기사단을 모티브로 한 조직이며, 구호소로 시작되었다는 구호기사단의 기원에 걸맞게 제약회사라는 설정이 있다.
- 미디블2: 토탈 워에서도 등장 십자군 기사 길드를 유치해서 영입할 수 있다. 기사단답게 전투력도 좋고 공중 위생 보너스도 받을 수 있기에 유치하면 꽤 잘 써먹을 수 있다. 확장팩인 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 중 십자군 시나리오에서는 안티오크 공국 팩션용 병종들로 등장한다. 그 외에도 엠파이어: 토탈 워에서도 기사단이 몰타 섬에 위치한 논플레이어블 팩션으로 등장하며 올팩션 설치시 플레이 가능하다.
- 토탈 워: 엠파이어에서도 아직 몰타 섬을 통치하는 시대인지라 플레이 불가능한 일반 중소국가 팩션으로 등장한다. 올팩션 모드를 설치하면 다룰 수 있기는 하지만, 영토가 몰타 섬 하나인 데다가 특수병과 없이 일반 범용 병과만을 사용하다보니 컨셉 플레이 아니면 선택할 메리트가 없는 편. 그래도 바르바리 해적 역시 존재하므로 역사대로 바르바리 해적이나 오스만 등을 상대로 약탈이나 해적질 할 수 있다.
- 대항해의길이란 중국산 모바일 게임에 등장한다. 동방 탐험 시대를 맞아 쇠퇴하는 기사단의 위기가 드러난다.
-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는 초대작인 어쌔신 크리드 때부터 등장했다. 당연히 시대 배경상 템플 기사단, 튜튼 기사단과 함께 적대 세력으로 등장하며, 실존 인물인 10대 그랜드 마스터 가니에르 드 나폴루스가 인체 실험마저 불사하는 또라이(...)로 등장하여 알타이르 이븐-라 아하드에게 암살당한다. 그러나 구호기사단이 이렇게 인상적으로(?) 등장한 것도 고작 이 1편이 끝이었고, 1편 이후 구호기사단의 처지는 한마디로 안습. 몇백 년 뒤인 어쌔신 크리드: 레벨레이션의 지중해 방어전 임무(로도스섬) 때는 암살단원들을 붙잡아 자기네 요새에 가두는 등 암살단에게 시비를 걸다가 결국 암살단원 한 명을 살해하고 말았고, 이 때문에 지중해 방어전 임무에서 암살단에 아주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그리고 거기서 또 몇백 년 뒤인 어쌔신 크리드: 로그 시점에서는 해상전 임무에서 템플 기사단 쪽의 셰이 패트릭 코맥에게 도움이나 받는 처지가 되는 등 더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아예 로그 시점에서는 68대 구호기사단 그랜드 마스터 '마누엘 핀토 다 폰세카'(이쪽도 실존인물)가 사실 템플 기사단의 기사단원인지라 사실상 템플 기사단의 하부 조직(...)으로 전락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 Crusader Kings 2에서는 십자군이 활성화된 이후 창설되는 기사단의 일종으로 등장한다. 전체적으로 기독교 기사단은 중기병 비중이 높은 편이지만, 그중에서도 성전기사단이 중기병 비중이 높은 것과 대조적으로 다른 병과도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함선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마도 상기의 사략활동을 반영한 듯한데, 비록 해전은 구현되지 않았지만 따로 선단 용병대를 고용하지 않아도 병력을 수송할 수 있다는 점은 장점.
- Europa Universalis 4에서도 플레이어블 국가중 하나로 등장하며 티어는 국토가 게임 배경 기간 동안 섬 한개가 전부였던 만큼 4티어로 잡혀 있다. 십자군 기사단이었던 만큼 예루살렘 왕국으로 변신할 수 있는 디시전을 가지고 있으며 프랑스 문화권이라 프랑스를 멸망시키고 프랑스가 되는 엽기 플레이도 가능하다. 다른 국가로 플레이시 AI는 재미있게도 실제 역사에서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성전을 빙자한 해적질을 했던 것을 반영해 오스만을 지속적으로 해적질하며[31] 1520년에 술레이만 1세가 로도스 섬을 함락시켰을때 카를 5세의 자비로 몰타 섬을 할양받은 것을 고증해 로도스 섬을 함락시키면 자동적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몰타 섬에서 세력이 부활한다. 물론 플레이어가 구호 기사단으로 플레이시 부활따윈 없이 바로 게임 오버.
10. 같이 보기
[1] 덴마크 국기와 비슷하지만 치우지지 않았다.[2] 비슷한 케이스로 교황청이 있다.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교황령을 상실한 뒤 한동안 영토가 없어서 서러운(...) 세월을 지냈는데, 그 기간 동안 일부 국가들은 교황청이 영토가 없어도 주권 실체로 대우해 줬다. 현재는 바티칸 시국이 만들어진 게 교황청이 영토까지 있는 국가나 마찬가지가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들이 교황청(바티칸 시국 자격이 아니다)과 직접 수교를 해주고 있다. 자세한 점은 바티칸 문서 참고.[3] 유럽은 장자 단독 상속제다. 그 아래 자식들은 빌어먹든 굶어죽든 알아서 살아야 했다. 이들은 보통 기사, 사제 등이 되었고, 집에서는 재산을 물려주지는 않아도 기사나 사제가 되는 데 필요한 지원 정도는 해 주었다. 물론 게르만 족은 원래 자식들에게 동등하게 유산을 분배하는 상속제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로 인해 강력한 왕권이 형성되기 어러워 점차 장자 상속제로 바뀌었다.[4] 이는 이슬람 쪽도 마찬가지여서 무분별한 약탈이 자행되기도 했다.[5] 출처: 바다의 제국들[6] 그래서 기사단장은 로마 교황으로부터 추기경의 작위까지 받을 만큼, 크나큰 영예를 누렸다.[7] 당시 기사단 측 기록에 따르면 온 로도스의 땅이 전부 오스만의 붉은 깃발로 뒤덮였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8] 이 당시 로도스 기사단은 상당히 뛰어난 기사들이었다. 거의 일당백 수준의 실력자들이었고, 각종 무기에 능했다. 심지어 총도 상당히 잘 다뤘다.[9] 만약 이때 오스만 군대의 총사령관이 술탄 술레이만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오스만 군대가 철수해야 했을 만큼 오스만 군대의 피해 상황도 굉장히 컸다. 그러나 술탄 술레이만 본인의 로도스 섬을 함락시키겠다는 의지가 워낙 확고해서 추운 날씨와 전염병의 창궐에 막대한 사상자 속출에도 불구하고 계속 밀어붙여 결국 로도스 섬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10] 사실 이때 술레이만도 더 격렬하게 싸우기는 힘들었으리라는 게 정설이다. 이 전투에서 예니체리를 상당히 많이 잃었기 때문이다. 예니체리를 더 잃으면 정치적으로 힘들 수도 있는 탓에, 술레이만 역시도 적당한 선에서 협상해서 보내는 게 나은 선택이었다.[11] 세계사에서 이런 후퇴는 그리 드물지 않다.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협상을 제안한 군주(혹은 사령관)가 자신의 명예를 지킨다는 명분도 있지만,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다른 적들이 어차피 항복해 봤자 죽을 것이라 생각해 점령군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물자를 정리해 버리고 결사항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대개 전쟁의 목적은 무력을 통한 요구사항 관철이지, 적군과 거주민의 목을 싹 다 베는 게 아니니까.[12] 이것이 대실 해밋의 대표작인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 몰타의 매에서 주요 매개체가 되는 몰타의 매 조각상이 만들어지는 모티브가 된다. 카를 5세에게 매년 매를 한 마리씩 바치다가 자신들을 잘 도와주는 카를 5세에게 선물로써 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매 조각상을 카를 5세에게 보냈는데, 그게 흐르고 흘러서 러시아를 거치고 미국으로 오게된 것.[13] 일부러 트리폴리에 안 들어갔다는 견해도 있다. 기사단은 당시 유럽 귀족의 자제만 입단을 허용하는 까다로운 규칙 때문에 전투원이 아무리 많아도 1천 명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인원이 모자랐다. 이런 상황에서는 육상전에 강한 튀르크군이 공격하면 순식간에 밀려버렸을 것이다.[14] 로도스는 약 1400km2으로 제주도의 3/4쯤 되고, 몰타는 약 300km2으로 서울의 절반쯤 된다.[15] 이때 기사단의 해적질이 얼마나 오스만을 비롯한 이슬람측에 골칫거리로 여겨졌느냐 하면, 몰타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뱀 소굴'이라는 말이 오스만 제국에서 나돌았다고 한다.[16] 이런 오스만에 대한 관점은 레판토 해전 때도 그대로였다. 심지어는 기독교 연합군 총사령관의 지시를 항복으로 잘못 판단하여 명령에 불복종하는 경우도 있었고 싸우다가 승산이 없다 싶으면 그냥 오스만군과 같이 자폭하기도 했다.[17] 사실 전원이 싸우다 전사한 것은 아니고, 일부는 도망가거나 항복했는데 해안 끄트머리에 위치한 요새여서 도망갈 곳이 마땅찮았고, 그동안 잔혹한 전투와 막대한 피해로 분노가 끝까지 차있던 오스만군 역시 항복을 받지 않고 잡힌 병사는 즉결 처형해버렸다. 그나마 오스만 육군이 아닌 오스만 해군에게 항복하거나 해안가 동굴에 숨은 소수 병사들만 살아남았다고.[18] 정확히는 '''3개월, 3주, 그리고 3일'''.[19] 가치 있는 것들은 5유로 이상이며, 이탈리아어를 하는 것이 좋다.[20] 참고로 나치 독일에도 엄연히 적십자가 있었으며, 나치 정부의 선전 도구로 쓰이기도 했지만(적십자 문양에 하켄크로이츠를 쑤셔박았다) 연합군 사상자를 수습해주는 등 그 역할을 제대로 했다. 이들마저 없었으면 2차 세계대전 전몰 장병의 시신 수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21] 사실 따지고보면 100% 완전 무장해제는 아니다. "군사" 문단 참고[22] 몰타기사단, 콘돔 사용으로 교황청과 갈등 봉합, 교황청의 승리[23] 다만 UN 총회 옵서버 자격이고, 그마저도 바티칸 시국과 같은 비가맹국 대우도 아니라는 점에 주의.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의 지위는 국제적십자사나 국제올림픽위원회와 같은 옵서버 '단체'이다.[24] 심지어 전자 여권이다.[25] 옛 프랑스의 남동부 지역[26] 북방 십자군의 주력이던 튜튼 기사단도 그룬발트 전투 패배로 몰락하고 있고, 리투아니아의 개종으로 명분도 사라진 상황이며, 소설에서도 선포된 십자군은 원래 목표인 세르비아 구원에는 실패했다.[27] 아라곤과의 전쟁으로 악감정이 생겼을 기사단 내부의 아라곤 출신자들을 무시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3차 오스만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도 아라곤은 베네치아와 협력해 제국을 지속적으로 견제하고 있었다.[28] 스페인이 아즈텍인들을 노예로 부리는 모습을 본 모건 블랙이 '개 같은 스페인 놈들 모조리 없애버리고 아즈텍인들 구해주자!' 라고 하는 데에서는 정신이 대략 멍해진다.[29] 주인공인 모건이야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설정이 달려 있으니 그렇다 쳐도 알레인 매그넌 같은 경우 나폴레옹과 달리 프랑스어 억양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며, 설정상 기사단 소속일 터인 일반 유닛들을 찍어 봐도 영어가 나온다.[30] 심지어 한동안은 식민지 경영까지도 했다. 번역[31] 원역사에서는 기독교도는 공격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슬람 선박과 해안만 해적질했지만 게임 내에서는 AI의 한계상 기독교 국가도 털고 다닌다....였는데 패치로 국교 지역은 못털게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