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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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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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스페인의 제2대 국왕. 스페인 재위 1556 ∼ 1598.
영국에서는 필립 왕,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 등에서는 필리프 왕으로 불린다. 포르투갈 왕으로서는 필리프(Filipe) 1세, 스페인에서는 펠리페 2세로 불린다.
펠리페 2세는 당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필두로 포르투갈 왕국의 병합과 나아가 남아메리카, 필리핀, 네덜란드, 밀라노 공국, 부르군디 공국, 사르데냐 섬, 시칠리아 섬, 나폴리 왕국, 아프리카 대륙의 남서부, 인도의 서해안, 말라카, 보르네오 섬 등을 접수한 그야말로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 제국’을 건설한 왕이었다고 평가된다. 즉, 그는 스페인 최전성기 시절의 군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빚으로 인해 명암이 드러나는 부분은 존재한다. 그의 사후에도 스페인은 18세기 까지 정체기와 성장기, 실패와 성공을 거치며 초강대국으로 번영을 구가하였으며 특히, 그가 가지고 있던 식민지 영토들은 정체시기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건설되었고 스페인 국운과 함께하였다. 현재에도 스페인의 관광수익과 문화재 중 크나큰 비중을 자랑하는 바로크 시키 주요 건물과 문화유산들이 제대로 박차오르며 시대적 조류를 주도하기 시작했던 시절이기도 하다.[3]
카를 5세의 장남이자 스페인에서의 후계자로, 유럽 최대 최강의 강대국으로서 3세기에 걸친 황금 스페인 시대를 개막한 왕이다. 이 시기 스페인은 잉글랜드, 프랑스, 교황청 할 거 없이 모두 그 군대의 깃발과 함대만 보아도 벌벌 떨 만큼의 강대한 국력을 자랑했다. 그 국력을 바탕으로 유럽, 북아프리카, 아메리카, 태평양, 아시아에 걸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유지하였는데[4] , 이는 대영제국이 생기기 이전의 일이므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스페인이 먼저라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부군 시절엔 근대적 의미에서 주권 국가와는 거리가 먼 중세적 합스부르크 보편 제국의 일원중 하나인 스페인 왕국(들)을 각종 행정, 정치 개혁과 국가 이데올로기 강화를 통해 스페인만의 독자적인 패권 세력으로 바꾸어나갔다. 이 와중에서 아버지 시절 기틀이 잡힌 부왕령 제도나 전문 행정 관료 육성 계획을 통해 스페인의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며 유지할 정부 부처 내각 시스템을 마련했다. 동시에 당시 카톨릭 세계 전체를 강타하던 트리엔트 공의회와 반종교개혁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여기서 나온 개혁을 적극 추진, 카톨릭 세계 전반에서 스페인의 정치, 군사적 영향력 뿐만 아니라 문화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 또한 확립했다. 또한 이전까지 이름만 스페인 왕의 땅이고 실질적인 국가 행정력은 거의 닫지 않으며 현지 콩키스타도르 중심으로 중구난방이었던 아메리카 식민지들을 부왕령과 왕실 재판소 (audiencia) 제도로 개편, 이후 아메리카 스페인 식민지 통치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스페인을 중심으로한 카톨릭 세계 밖에선 그의 집권기 동안 유럽의 강국들에게 한껏 질시를 유발해 프랑스, 영국, 독일계 국가들 같은 개신교권에선 격렬한 증오를 받았다. 특히 네덜란드 반란 과정에서 연이은 정치적 실책으로 인해 무려 80년간 스페인을 괴롭히며 결국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의 반틈과 여기서 나오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잃었다.[5] 또한 대잉글랜드외교 과정에서 실책으로인해 잉글랜드가 훗날 스페인을 누른 해상 패권국가가 될 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당시 서유럽 정치 지형 자체를 아예 친스페인 카톨릭 vs 반스페인 개신교 진영으로 바꾸면서 이런 갈등의 중심에서 동맹들 만큼이나 적들도 많이 만든 인물.
후세의 평가가 갈리는 것처럼, 당시에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군주로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명군과 암군의 면모를 모두 갖췄다는 평가. 현대 영미권의 스페인 사학자들 중심으로[6] 전반적으로 내치란 면에선 고평가 받으나 외치에선 실패했다는 점에서 먼 훗날의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과 비교되기도 한다.
2. 치세의 명암
스페인 내치의 역사상 펠리페 2세의 치세는 카스티야-아라곤 양 왕실 통합을 통해 스페인 자체를 만들어낸 카톨릭 공동왕 시절 못지않게 중요한 시절로 평가된다. 기본적인 왕실과 영토의 통합으로 스페인이란 국가의 하드웨어를 만들어낸게 카톨릭 공동왕이라면 이걸 실질적으로 다스리며 각 지방의 요구와 자원을 총괄지휘할 전문 관료 중심의 정부 체계, 즉 소프트웨어를 만든건 펠리페 2세 시대의 행정개혁이라 할 수 있다. 스페인 자체의 뿐만 아니라 각종 상속과 군사적 정복을 통해 얻은 이베리아 반도 외 스페인 제국의 통치 기반과 체계 또한 이때 기틀이 잡혔다. 전통적으로 영미권+네덜란드와과 여기에 영향력을 받은 한국의 펠리페 2세를 바라보는 관점은 근세 스페인인들이 내부적으로 본 내치의 성과를 반영하지 않아 박했던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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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 시기 도입된 스페인 왕실 위원회 정부 구조도.
이 와중 가장 중요한 행정 개혁은 현대 국가의 각종 정부부처와 유사한, 특정 지역이나 행정업무를 전담하는 전문화된 왕실 위원회 제도를 창설한 것이다. 왕을 수장으로 각 지역 행정기구와 분야별 전담 위원회들이 투트랙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본격적인 행정 집행은 중간에 있는 왕을 중심으로 관련 부서 위원회원들이 모여서 자문, 공론 형성 이후 집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각종 부서 위원회원들의 구성은 현지 유력자, 관련 전문 관료 계층들이 추천한 후보자들 중 왕이 선택하고 후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해당 부처들 내부는 마찬가지로 카톨릭 공동왕 시절 스페인의 교육, 문화 개혁을 주도했던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 추기경이 기틀을 쌓아, 펠리페 2세 본인이 대거 키운 인문 대학 출신 전문 세속/종교 관료들이 실무를 담당하는 체계였다.
이런 시스템은 장기적으로 권력의 중심을 왕에게 쏠리게 하고, 국가 통치 하부 부서가 자기들끼리 작당하거나 마음대로 움직이는걸 방지하는 장점이 있었으나, 빠른 대응과 해결을 요구하는 단기적 문제에 빨리 대처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이런 부작용을 최소화 하기 위해 이 왕실 위원회와는 별개로 왕의 권위를 대리하며 현지 행정부로 작동한 아메리카, 이탈리아 등 각지 부왕령 제도 또한 펠리페 2세때 완성되었다.
기본적으로 스페인은 서로마제국 시절부터 사회문화적으로 로마의 인프라가 뿌리깊게 자리잡은 곳이기도했고, 지정학적으로도 이탈리아와 가까워서 비교적 일찍 르네상스 문예부흥의 영향을 받아 이미 이전 15세기부터 인문교육 과정을 받은 전문 관료집단 양성 정책이 일찍부터 자리잡았다. 15세기 말 카톨릭 공동왕 시절 이런 문화적 역량이 실질 국가 통치 역량으로 전환될수 있는 시스템의 큰 틀이 짜였으나, 부왕인 카를로스 1세는 애초에 출신도 외국인이었는데다가 처음엔 통치에 대한 저항도 컸고, 이후에도 워낙 대외 원정과 전쟁에 바빠 스페인엔 얼마 있지도 않고 대리인들을 중심으로 통치했다. 이런 여전히 중세적 범합스부르크 보편 제국의 일원이었던 스페인을 본격적으로 독자적으로 장기적인 영향력을 투사하며 세계 각지에 흩어진 식민지, 속방들을 중앙에서 적극적으로 통치할 체계를 만든건 펠리페 2세의 공이라 할수있다. 게다가 이런 구체적인 통치 기구들 뿐만 아니라 성문화된 통치행위 넘어서 나라를 지탱할 엘리트들의 정치적 정체성, 종교 이데올로기, 문화적 사조등을 적극 후원한 점에서 펠리페 2세의 치세는 '''스페인 제국이 온전하게 스페인의 것이 된 시기'''라 평가받는다[7] .
실제로 펠리페 2세 사후 계승한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 카를로스 2세 후기 합스부르크조 왕들은 아무리 봐도 능력상 영 좀 떨어지는[8] 군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펠리페 2세 시절 마련된 전문화된 관료집단 중심 행정, 통치 체계는 한번도 붕괴한적 없다. 특히 1640년대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며 스페인 패권 몰락이 가시화된 시기에도 성격 자체가 아예 반란을 넘어 국제전이 된지 오래였던 네덜란드와, 애초에 역량 자체가 다른 속방과 차원이 달랐던 포르투갈을 제외하고 카탈루냐, 나폴리, 시칠리아 모두에서 벌어진 대규모 반란은 결국 성공적으로 진압되었으며, 핵심 본토인 카스티야 지방은 무어인들의 지역 민족적 반란 제외하곤 그 흔한 반란 하나 겪지 않았다. 16-17세기 전성기 스페인 제국이 대내외적으로 전쟁과 적, 불만세력들이 끊임없었는데도 불구하고 2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서유럽의 패자로 군림할수 있었던건 펠리페 2세 시절 완성된 거대한 세계제국을 통치할수 있는 행정체계의 역할이 지대했다.
2.1. 업적
- 1557년 생캉탱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승리. 2년 뒤 카토-캄브레시스 조약을 통해 서유럽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당분간 꺾어버림.[9]
-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에서 기즈 가문과 가톨릭 세력을 지원하여 프랑스의 혼란과 분열을 유지시킴. 펠리페 2세가 프랑스 전역에 투자한 것은 그래도 네덜란드 전역에 비하면 훨씬 적은 비용을 들여 많은 효과를 봤다. 물론 위그노 전쟁 이후 급진 가톨릭 세력의 기반이 약해지자 직접 군사를 보냈다가 패하고 반스페인 감정만 키우는 등 결과론적인 뒤끝은 안 좋았지만 이건 펠리페 2세 한창 사후의 일이고, 애초에 프랑스 내에서 '급진 카톨릭 세력 (devots)'는 펠리페 사후 손자인 펠리페 4세 시절까지고 쟁쟁한 정파였다. 애초에 천하의 리슐리외 추기경도 집권 초기엔 친스페인 급진 카톨릭 신실파의 눈치를 보느라 라로셸 반란을 강경진압해야 했을만큼 프랑스 내 스페인의 영향력은 오래 유지됬다.[10]
- 1565년, 영유중이던 필리핀에 무력을 행사해 직할 통치에 들어감. 이 땅에 그의 이름을 따서 필리핀이라 명명, 필리핀은 대 아시아 무역의 거점이 되었고, 갤리온무역이라 불리는 이것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수입을 괜찮게 올렸다.
- 1571년, 이슬람의 맹주 오스만 제국을 레판토 해전에서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투입해 대승을 거둠으로써 전유럽에 스페인의 명성을 드높임, 신성 동맹의 승리에 기여함. 여기서 펠리페 2세는 카를 5세의 또 다른 아들이자 자신의 이복형제인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를 총사령관으로 발탁했다.
- 트리엔트 공의회에 참여한 스페인 주교단들과 적극적으로 협업, 이들을 오히려 왕실이 선두지휘함으로서 스페인 교회의 이해와 관점을 많이 관철 시켰을뿐만 아니라 개혁안 집행까지 주도함으로서 명실부공한 유럽 카톨릭권의 수장으로서 스페인의 위치를 확립했다.
- 1580년, 부왕의 정략결혼, 즉 포르투갈 왕족인 모후의 후광에 힘입어 왕계가 끊어진 포르투갈 왕으로 즉위, 포르투갈과 식민지를 스페인 왕이 동군연합으로 통치하여 60년간 이베리아 반도 통일.(이베리아 연합)
- 새로운 수도 마드리드 건설과 이에 따른 귀족, 자치도시의 독자적인 정치력 약화와 왕실 중심의 중앙 권력 강화. 원래는 정해진 수도도 없었던 카스티야에 이런 정치적 변화로 말미암아 '절대왕정' 운운할만한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확립됬다.
- 1584년, 엘 에스코리알 궁전을 완공해 스페인의 부를 과시. 부왕 카를 5세의 묘도 이곳으로 이장했다.
- 이전에는 유럽 주류하곤 영 거리가 멀었던[11] 스페인에 부르고뉴와 이탈리아 출신의 예술가, 건축가 등을 초빙하여 스페인 바로크 문화의 물질적 토양을 형성.[12] 스페인도 레콘키스타 시절 흡수한 이슬람 문화, 이탈리아에서 들어온 르네상스 인문주의 등 나름 문화적 자산이 없던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유럽의 주류하곤 거리가 멀었으나, 이 시절 기점으로 유명한 엘 그레코가 대표하듯 진짜 자체적인 문화적 인프라로도 수많은 유럽의 예술가들이 유학, 취업하는 당당한 범유럽 궁정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 1554년, 영국 메리 1세와의 정략결혼으로 영국 정계에 밥숟갈을 올리며 훗날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도 스페인의 물밑 지원을 받는 가톨릭과 아일랜드 세력을 유지. 다만 결혼 생활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메리는 펠리페를 열렬히 사랑했으나, 펠리페는 메리에게 전혀 애정이 없어 굉장히 무심하게 냉대했다.[13]
- 부왕 카를 5세(카를로스 1세) 때부터 추진한 콩키스타도르 체제 개혁책[14] 을 계승하는 한편 원주민 노예제를 금지하고 스페인이 아메리카와 필리핀을 수백년간 통치할 행정적 인프라를 구축했다. 그는 행정 지역을 재편성하고, 감찰 관료를 주기적으로 보내며, 원주민 노예제를 금지하면서 지방세력의 성장을 어느정도 관리하면서 보다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계를 모색했다. 이러한 펠리페 2세의 개혁은 원주민들의 파악을 확실하게 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15]
- 당시 콩키스타도르 휘하의 새로운 정복지 관리 제도인 엔꼬미엔다 제도의 폐해를 보면 콩키스타도르들의 자치권을 폐지한 건 결코 과오라 볼 수 없다. 이 당시 스페인 왕실이 직접 개입하여 강제적으로라도 법에 따른 국가적 행정 시스템에 들어 온 지방들은 선교와 일정 부분 노동력 제공, 납세만 제외하고는 현지 인디언 지도자들을[16] 통한 일정 부분 원주민의 권리가 보장되었으나, 이렇게 중앙에서 통치하지 않고 당장 본인들도 주로 사회 하층민 출신에 물욕에 눈이 돌아간 현지 콩키스타도르들에게 맡겨 버리면 수탈 일변도로 변해 원주민 공동체들을 반란으로 몰아 넣었다. 이 중에서 가장 심했던 경우가 부왕 통치 말기에 동시대 기준으로도 악질 싸이코로 악명 높았던 누뇨 데 구즈만이 독자적으로 정복, 개간하다 결국 40년 가까이 지속 된 치치멕 전쟁이라는 초 거대 반란의 중심지가 되어버린 현대 멕시코 서부 지방, 누에바 갈리시아였다. 그리고 필리핀의 경우 부왕의 시절 루이 데 비야로보스 휘하 원정대에게 '발견'만 되었지, 그 뒤의 몇 번의 원정실패 이후에 정복은 전부 다 펠리페 본인 통치 시절 미겔 데 레가스피 지휘 하에 1570년대에 이루어진 일인데, 부왕 시절에 자치권이 있었다니 뭐니 연도 자체가 아귀에 안 맞는데, 현대 마닐라 일대를 레가스피 원정대가 브루나이에게서 뺏어오며 마닐라 건설을 선포한 시점이 1571년이다. 튀니지는 애초에 스페인이 오스만과 경쟁적으로 현지 전임 하프스 왕조 출신 꼭두각시를 내세우며 싸운거라 뭐 내치상으로 자치권을 줬다 뺏었다 할것도 없었다. 펠리페 2세는 오히려 정치 제도적으론 중앙집권 제도를 이룩했지만 실제 통치 과정에선 엄연히 법적으로 카스티야 왕국령이 아닌 곳에선 현지 자치권을 크게 보장해주었다[17] .
- 상술한 제국 통치와 안정화의 연장선에서 부왕 시절 일단 정복에 성공한 스페인령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를 성공적인 부왕령 통치 체계에 편입한것도 펠리페 2세 시절의 업적. 애초에 이 이탈리아 지방들 자체가 프랑스 발루아 세력과 합스부르크 세력 사이 저울질하다 장장 반백년의 이탈리아 대전 끝에 스페인이 얻은 만큼 언제든지 지역 유지들이 다시 돌아설수 있는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펠리페 2세는 기본적으로 현지 귀족을 우대하면서도 통혼과 문화종교적 교류를 통해 카스티야에서 파견된 관료들이 큰 마찰없이 현지 통치 체계에 통합될수 있게했다.
- 네덜란드에서 삽질을 해 놓고도 전쟁을 통해 결국 반기를 든 17개 주 중에서 10개를 굴복시킴. 이 굴복한 10개 주가 훗날의 벨기에. 사실 이 업적의 직접적인 수훈자라면 단연 돈 후안과 함께 당대 스페인을 대표하는 명장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제겠지만, 기존의 알바 공 대신 그를 대 플랑드르 책임자로 기용해 병권을 쥐어준 준 것도 펠리페의 안목이라면 안목.
2.2. 실책
- 잦은 내란과 대외전쟁으로 인하여 국고 탕진. 그러나 부왕에 비해 공격적인 침략전을 더 많이 수행하며 실속을 못 건졌다는건 틀린 평가다. 펠리페 2세 시절 가장 중요한 전쟁이었던 네덜란드 전역은 펠리페와 스페인 입장에서 보면 개신교 이단들이 적법한 군주의 통치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킨 반란군 진압작전이었다. 도덕적인 평가는 어찌 보든간에 세상에 자국 반란진압을 "침략전"으로 분류할순 없다. 잉글랜드와의 전쟁도 본질은 잉글랜드 자체에 대한 침략이 아니라 네덜란드 반란을 적극 지원하는 적성 후원 세력 상대로 전쟁 벌인거고, 실제 현장에선 정식 선전포고 하기 전 이미 네덜란드 현지에 잉글랜드군 수천이 돌아다니는 마당에 스페인이 선빵때렸다고 볼수 없다. 펠리페 2세 시기 스페인의 전쟁 중[18] 스페인이 전적으로 '침략'했다 할수 있는건 포르투갈 왕위 계승 전쟁인데, 이것도 번짓수 맞지도 않는 현대 국민 국가의 관점이 아니라 당시 통용되는 유럽 왕실의 논리로는 정당히 본인이 계승한 왕위를 적설 세력들의 후원을 받는 경쟁 왕위후보자 상대로 '수호'한 것이라 현대적인 관점에서 침략전쟁이라 분류하기도 힘들다.
- 부왕이 스페인에 흡수시켰던 알토란 땅 네덜란드 통치를 잘못하여 80년 전쟁으로 불리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유발함. 게다가 이로 인해 떨어져나간 네덜란드는 결국 스페인을 제치고 해상의 패자로 등극해버린다.
- 1557년부터 1596년까지 총 4차례에 걸쳐 스페인의 국가 파산 선고. 즉위 당시 부왕이었던 카를 5세로부터 물려받은 스페인 제국의 부채는 3천만 두카트[19] 였지만, 그의 갖가지 사고로 인해 펠리페 3세가 국가를 물려받을 때는 부채가 무려 1억 두카트(!)[20] 로 불어나 사실상 변제가 불가능했다.
- 1558년, 메리 1세 사후 즉위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에게 구혼했으나 퇴짜맞음. 영국 국교회 때문에 사실 거의 불가능한 결혼이었다. 이후 영국과의 외교관계가 급격히 악화.
- 1559년, 그 유명한 '금서 목록'을 선포해 사상적 탄압 개시[21] .
- 1568년,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 있던 모리스코 무슬림 개종자들을 박해하며 알푸하라스 전쟁을 유발했다. 전시대엔 종교재판소로 가열차게 강제개종, 감시하던것도 부족해 아예 일상에서 무어인들의 모어인 아랍어나 아랍 의상을 착용하는것도 금지해 실제로 어느정도 성과도 있었던 모리스코 개종 과정에서 오히려 대거 역효과를 내었다. 이렇게 터진 반란은 당연히 이 상황이 너무너무 즐거운 역사적 숙적 모로코와 그 뒤의 오스만 제국의 후원을 받아 장장 3년에 걸쳐 동부 안달루시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여기서 패배한 모리스코 유민들은 가까운 북아프리카 해적들에게 대규모 가담해 스페인 해안지대 현지 지리, 사정도 훤한 엄청난 전력이 됨으로서 스페인에 복수했다. 펠리페 2세 이전 강제개종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순응적으로 대응했던 모리스코인들은 결국 펠리페 2세의 통치를 기점으로 정부와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너 결국 아들 시대 모리스코 추방이란 대규모 비극으로 끝나버렸다. 이 과정에서 인구 비중상 모리스코인들의 현지 농민들 중 거의 30%, 반에 가까웠던 발렌시아, 안달루시아 같은 지방들의 경제와 인구구조는 박살난건 당연. 여전히 전통적인 스페인의 민족카톨릭 사관을 강하게 추종하는 사람들은 이걸 '국민통합'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이 사람들 말곤 학계에서나 대중에서나 스페인 내외에서나 여전히 이걸 긍정적인 '업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 1588년, 과거에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이겼던 그 무적함대를 영국과의 분쟁으로 발생한 칼레 해전에서 태풍으로 인해 패하여 왕창 날려먹음. 동시기에 육상을 통한 네덜란드 원정 또한 실패.
- 1589년, 숙적인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북아프리카의 리비아(트리폴리)와 튀니지(튀니스)에서 오스만 제국이 보낸 투르크족 관리들로부터 평소부터 멸시를 받아오던 토착민인 무어인들이 분노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무어인 반란의 주도자인 마라부(Marabout)[22] 는 자신이 무슬림임에도 불구하고 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도움을 간절히 바랬다. 실제로 트리폴리와 튀니스에 침투한 유럽 국가들의 첩자들이 보내온 보고에 의하면 무어인 반란군들은 유럽인 첩자들한테 스페인인들이 볼모로 데리고 있는 옛 북아프리카 하프스 왕조의 왕자를 돌려보내고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해준다면, 투르크인들을 모조리 찢어죽이겠다고 할 만큼 반 오스만 감정이 강했다. 그러나 이때 펠리페 2세는 첩자들이 보내오는 보고를 다 받으면서도 북아프리카의 무어인 반란군을 돕기 위해 군대를 보내는 일을 끝내 하지 않았다.[23] 그로 인해 한때 북아프리카에서 뜨겁게 타올랐던 무어인들의 반란은 외부의 지원을 받지 못해 불과 1년 만에 허무하게 진압당해 사라지고 말았다. 만약 이때 펠리페 2세가 군대를 보내 무어인들의 반란을 도왔다면, 북아프리카에서 순식간에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쫓아내고 스페인에 협조적인 이슬람 세력을 동맹국으로 만들 수 있었겠지만, 펠리페 2세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그런 좋은 기회를 스스로 걷어 차 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24]
- 후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사망. 뒤에 다루겠지만 나름대로 애를 엄청 쓰긴 썼다. 하지만 명색이 도덕을 중시하는 가톨릭 군주면서도 아들의 약혼녀를 NTR해버린 것만큼은, 실로 역사에 남을만한 오명이라고 할 수 있다.
- 동시대 다른 나라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고, 세계사적으로도 엄청나게 거대했던 스페인 제국을 시대적 한계 내에서 그나마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각종 담당 업무, 자치권이 보장된 지역에 따라 자문위원회를 만들어 법치, 행정에서 중앙 집권과 효율적 통치 과정을 추구했다. 덕분에 당시 스페인 정부가 남긴 서류와 문건이 엄청나게 많고, 그 당시 스페인은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세련된 관료제, 통치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다. 이것만 보면 왜 이게 공이 아니라 과에 내려 왔는지 의문이 들법한데, 그 이유는 저런 거대한 정부 개혁 과정은 필연적으로 그 개혁 과정에서나마 국왕 일신의 권위와 지도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펠리페 2세는 그 특유의 직접 나서서 미세한 과정 하나 하나까지 관료들을 통제하려고 드는 편집증 때문에 오히려 더 사무 처리를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경우가 잦았다. 당장 네덜란드 전역이나프랑스에서 정국이 엄청나게 긴박하게 돌아 가면서 시시각각 최고 결정자의 지시가 필요한데 막상 펠리페 본인은 한 동네 수도원 수사들의 방 배정 문제나 건축 중인 엘 에스코리알의 정원사를 누구로 쓸까 같은 시시콜콜한 문제로 바빠 죽겠다며 죽치고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아 펠리페 휘하의 재상들은 국왕은 바쁘기는 더럽게 바쁘면서도 막상 중요한 일은 하나도 해결이 안되는 시간 관리와 노동 효율이 최악이다라며 불평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25]
2.3. 그 외
기본적으로 펠리페 2세 치하의 스페인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같은 범유럽 개신교 동맹권의 가장 위협적인 숙적이었고, 따라서 훗날 이 북유럽 대서양 개신교 국가들이 지중해 카톨릭 국가들을 제치고 패권을 쥐게 되면서 영미권 관점에선 상당히 일방적으로 무능하다거나 잔인한 군주였다고 과다한 비난을 받은 군주이다. 그의 치세 중 스페인이 워낙 많은 적을 추가로 양산했고[26] 내성적 성격 탓에 프라이버시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던 펠리페 2세는 살아 생전 어떠한 본인의 사생활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못하게 하였던 반면[27] , 안토니오 페레즈의 밀고 사건[28] , 오란녜 공 빌렘의 변호론 같은 정치적 숙적[29] 에 의한 기록은 많이 남아 후대까지도 많은 비판을 받은 군주이다.
그러나 치세의 영욕을 저울질해 보면 그래도 자신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며 스페인의 영광을 계승해 그 당대에도 유지시켰다는 게 현대 학계 일각의 평가다. 적어도 부왕 카를 5세에 의해 소싯적부터 체계적으로 제왕학을 수업하며 쌓은 정치적 감각과 철저한 신앙적 신실함은 확실히 보유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스페인이란 나라 자체가 애초에 법적으론 존재하지도 않고, 카톨릭 종교와 같은 왕실 아래 여전히 행정, 법적으로 다 별개인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들이 묶여있는 동군연합 국가인지라 이를 지탱하는 레콩키스타란 집단적 경험에 기반한 전투적 카톨릭 국가 이념을 부정한다는건 펠리페 2세가 아니라 누구라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영미권 중심 사관에선 애초에 잘 읽지도 못했고, 관심도 안가져 부각되지 않았던 스페인 내부 내치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합스부르크 스페인 제국의 소프트웨어를 닦아놓은 명군에 더 가깝다.
당시 스페인과 카톨릭 세계 전반의 정치학, 법학 이론 토대를 제공한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도밍고 데 소토 등이 주도한 살라망카 학파나, 펠리페 2세 시기 후반에 부상한 라이벌 예수회 학자들이나 애초에 '''종교적 통일은 국가의 모든 안정의 기반이다'''란 관점을 한번도 포기하지 않았으며, 이런 종교적 다양성은 곧 망국의 징조란 관점은 비단 스페인, 카톨릭권 아니라 반대편 개신교 진영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던 소리다. 애초에 스페인에서 카톨릭 신앙의 유일절대성은 수백년 뒤인 19세기 1812년 이베리아 반도 전쟁 도중에 작성, 발표된 스페인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 자유주의적 헌법이었던 카디스 헌법에서도[30] 종교의 자유만은 예외로 배제했을만큼 절대적이었고, 애초에 그 논리 기반 자체도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종교 문제를 빼곤) 시민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세계관에 기반해 있었기 때문에 펠리페 2세가 아니라 어떤 스페인 군주도 함부로 건드릴수 없는 문제였다. 애초에 동시대인들이나 현대 스페인인들이나 16-17세기 합스부르크 왕조 치하 제국 시절을 부르는 국명들 중 하나가 '카톨릭 군주정 (la monarquía católica)'인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리고 이런 종교적으로 억압적 면을 제외하면 동시대 스페인은 사회정치적으론 오히려 타국에 비해 자유로웠던 편에 속한다. 동양에선 맹자가 주장했으며, 영미 중심권 사관에선 청교도 혁명에서야 탄생했다고 주장하는 '''왕은 신의 뜻과 민의를 대표하는 기관일 뿐이며, 자질이 개판이면 신하들은 왕을 갈아치우는건 물론, 죽일수도 있다'''는 사회계약론적 관점은 영국에서 처음 탄생한게 아니라 후안 데 마리아나를 필두로 이 시기 스페인 법학자, 정치철학자들이 주장한 것이고, 이론적 토대는 애초에 그 이전 르네상스 시기부터 있었던 것이다.[31] 그리고 저렇게 왕의 자질이 없으면 목을 자를수도 있다는 과격한 주장도 어디 반체제 인사들이 음지에서 숨어서 한게 아니라 후안 데 마리아나가 '''펠리페 2세 본인에게 읽으라고 직접 헌정한 정치이론서인'''[32] 1598년 저작 '왕과 왕실이란 기관에 대한 논거 (De rege et regis institutione)'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그리고 왕보고 읽으라고 쓴 책에 당당하게 자질 없는 왕은 모가지 잘릴수도 있다고 써놓은 마리아나는 핍박은 커녕 오히려 왕실 주도 각종 프로젝트에 불려나가며 당대의 명사로서 명예와 천수를 누리다 갔다.
국내 행정과 재정 문제에서도 펠리페 2세는 카톨릭 스페인을 폭정의 결정체로 묘사한 적국의 프로파간다와는 반대로 오히려 대단히 유연하면서도 실용적인 모습을 보였다. 애초에 당시 큰 시대적 배경 자체가 화약 무기와 성형 요새가 상징하는 근세의 군사혁명이 한창 물이 오르던 시절이었고, 그 와중 스페인은 네덜란드에서 지중해까지 전쟁이 끊이지 않다 보니 상상을 초월하는 군비 폭등이 일어났는데, 뭐 크게보면 제위 중 파산을 4번이나 했으니 애초에 못 매꾼거라고 할수 있긴 하지만(...) 어쨋든 제대로 군비를 지불할때 이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한건 신대륙에서 나온 금은보화도 아니고, 바로 카스티야 내부 지자체들의 세금에서 나왔다. 그러나 카스티야 자체로 보면 예나 지금이나 척박한 토질과 각 지방을 연결해주는 적절한 강줄기의 부재로 인해 결코 부유하다고 보기 힘든 지방이었는데 여기서 무슨 수로 그리 많은 세금을 확보했느냐 하니, 바로 기존 봉건 영주들과 도시에게 종속된 마을들에게 세금을 추가로 걷는 대신 기존 영주, 중심 도시에서 벋어나 지방 자치를 집행할 자치권을 매각하면서 마련한 세수이다.
18세기 합스부르크->보르본 왕조 교체기쯤 되면 나머지 스페인 제국 전반의 국운이 약해지면서 이 제도도 더이상 잘라먹을 땅도, 이를 뒷받침할 인구도 안 남은 상태에서 행정 적체만 일으켜 문제를 일으키긴 했지만 이건 먼 훗날의 얘기고, 동시대로 보면 펠리페의 정책은 국가 재정도 충당하면서 부왕인 카를로스 시절땐 대규모 반란으로 왕권을 위협했던 대귀족, 대도시들의 정치적 영향력도 약화시키고, 카스티야 농민들에겐 "자유를 주신 국왕폐하"께 감사하는 근왕정서를 심어넣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보았다. 이런 펠리페 시기의 각종 성공적인 행정 개혁 덕분에 16-17세기 카스티야는 유럽 전체를 들어 농민의 조세 분담률이 가장 심한편임에도 불구하고 1520년 코뮤네로 반란 이후로는 애초에 문제의 종류 자체가 다른 모리스코 반란 빼곤 큰 반란한번 안겪으며 안정적인 내치를 유지했다.
이 당시 스페인의 방대한 국력을 주적으로 맞서 싸웠던 영국인들의 인상이 그랬고, 후대에서도 스페인은 전통적으로 왕권이 강력했던 나라로 착각하는데, 실상은 오히려 스페인은 프랑스, 잉글랜드와는 비교도 못하고, 옆나라 포르투갈에 비해서도 전통적으로 왕권이 약한편에 속했다. 이베리아 왕실 통합과 스페인 제국 성립 바로 전시대인 카톨릭 공동왕 이전 15세기 카스티야 군주들은 애초에 각종 반란과 암살 시도, 위협에 바람잘 날이 없는 약한 군주들이었고, 이사벨 여왕 시절 급격히 커진 왕권은 이를 뒷받침할 이사벨 개인의 카리스마가 사라지고 왕실 교체란 정치적 혼란이 터지자 일시적으로나마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 왕위를 얻자마자 상실하게 할뻔 했던 코뮤네로 반란이란 거대한 위기를 초래했다. 반란을 주도한 자치도시민들과 처음엔 방관하고 있었던 대귀족들 사이 분열이란 의도하지 않았던 호재 덕분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겨우 이 위기를 넘길수 있었지만 근본적인 정치 개혁 없이는 이런 불안 요소는 결코 사라질수 없었는데 막상 그 반란을 초래한 카를로스 1세는 치세 내내 대외원정 다니느라 이를 해결하지 못했다. 프랑스, 잉글랜드와 달리 스페인에선 만지면 병이 낫는다니 뭐니하는 왕의 손 같은 민간의 국왕 숭배적 전통도 없었고, 사회계약론과 저항권 담론의 이른 등장이 보여주듯 국왕의 권위는 법치를 통한 다양한 정파, 사회적 집단간의 이해관계 조절이란 역할에서 나왔지, 왕권 자체를 숭상하는 전통은 전무한 나라였다.
이런 배경에서 펠리페 2세는 먼 옛날 알폰소 10세 시절부터 카스티야 왕의 권위의 원천이었던 사법체계를 재정비하고, 다양한 백성과 신하들의 이권 분쟁을 조절할 왕실법원과 관료제를 키우며 무엇보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내용을 주도하며 이 결의안들을 직접 열성적으로 스페인 내부에 적용함으로서 단순한 세속 국력 뿐만 아니라, 범카톨릭권 보편적 종교성에 의지하고 또 이를 이용하는 세계제국의 최고 수권자에 걸맞는 권위를 확립했다. 전 시대 코뮤네로 혁명가들이 '스페인의 주권은 왕이 아니라 하느님과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스페인 시민에게 있다'는 논리로 카를로스 1세의 권력에 도전했다면[33] , 펠리페 2세는 그 스페인 시민들과 교회가 대표하는 하나님 사이의 집행, 중재 기관으로서 왕실을 내세우며 신민들의 분노를 사지 않으면서도 스페인 역사상 전례없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것이다. 펠리페 2세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팽창한 스페인 제국의 내실을 다지면서 동시에 외적으로 종교개혁과 서방기독교권의 대분열이란 시대적 과제를 물려받았고, 특히 대외정책과 경제정책 면에선 많은 실패도 겪었지만 차후 100년간 스페인 제국의 전성기와 흥망성쇄를 다 할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서 그 역할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3. 콤플렉스와 가톨릭에 대한 집착
펠리페 2세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린 부왕 카를 5세의 업적을 능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일평생 시달렸다. 부왕은 적장자인 그에게 1540년 밀라노 공작을, 1554년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1555년 플랑드르의 통치권을 부여하며 일찌감치 제왕학 수업을 시켰다. 그리고 1556년에 부왕이 자신에게 스페인 왕관을 넘기고 은둔 생활에 들어가자, 그는 그런 아버지에게 한시바삐 자신의 유능함을 입증해 자랑스런 아들로 칭찬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의 치세 중 가장 큰 핵심 사업의 하나인 거대한 엘 에스코리알 궁전의 건립도, 부왕을 기리는 동시에 부왕의 위업을 계승 수행하겠다는 의도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으며[34] , 그 때문에 일부러 부왕의 유해를 그곳으로 이장 안치하였다.
통치권을 막 받았을 무렵의 그는 매우 성실했다. 주야를 불문하고 격무를 마다않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늘 기도를 잊지 않았다. 심지어 결혼관계 역시 정무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던 부왕의 신념까지도 본받아, 평생 성행위를 기피했다(…). 이건 부왕과 장인마저도 정도가 지나치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의 통치에 있어서 가장 확연한 성격은 가톨릭 신앙에 대한 광신적 집착이다. 이는 부왕의 유일한 오점이 종교개혁 당시 끝내 유화적으로 마무리를 지어 가톨릭을 수호하지 못했던 것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외골수적 신앙적 집착은 무력 탄압으로 이어져 국고 탕진과 대내외적인 반대세력을 야기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사촌뻘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유화책을 추진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종교개혁과 신앙 투쟁의 시대에 왕의 신앙심은 어찌 되었든 신민들에게 있어서는 미덕으로 여겨져, 적어도 가톨릭 신자들에게 있어 펠리페 2세는 '유럽에서 가장 경건한 기사도의 군주'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모리스코 문제를 제외한 스페인 내부 통치에 있어 당시까지도 국론의 일치를 보지 못했던 스페인 내부 통합에 큰 기여를 했고, 오스트리아의 방계 합스부르크 가문을 비롯한 국제 가톨릭 세력의 맹주 위치로 장점 또한 많이 가져다 주었다. 물론 그 탓에 적대자들도 늘어나긴 했지만 말이다.
4. '서류왕'으로서의 행적
펠리페 2세는 몸소 현장에서 뛰었던 부왕과 달리, 합스부르크 왕조의 통치를 인정 받는 대가로 후대 왕들은 스페인 내의 정해진 궁정에서 스페인인 관리를 통해 스페인 중심의 국정운영을 요구한 카스티야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모든 정무와 전쟁 수행 등 사무 일체를 궁정 내에서만 보았다. 본인 또한 부왕에 비해서는 내성적인 성격이기도 했고. 때문에 현지 사정에 정통하던 부왕에 비해 현실 감각이 떨어졌다.
그는 이러한 결점을 행정 체계의 개편을 통해 보완하려 했다. '서류왕'이라는 이명이 붙을 정도로 모든 업무방식을 서류를 통해 보고받고 결재했으며, 온종일 작은 집무실에 틀어박혀 사무를 보았다. 이를 뒷받침하고자 모든 관료 임명권과 서임권을 자신의 권한으로 귀속시켜 스페인의 국정을 중앙집권화했다.
이 방식은 오늘날 관점에서는 그 전에 비해 선진적이긴 했지만, 처리 과정이 매우 더뎠고 당장 팩스도, 이메일도, 전화도 없는 시대에 서류로 통한 공무에 집착하다 보니 공무의 양의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게다가 결벽에 가까운 완벽주의자였던 펠리페 2세는 정부 전반에 걸쳐 직접적인 개입을 하여 결국 본인도 감당하지 못할 양의 서류의 산더미에 묻혀 행정 전반이 더디어 지는 결과까지 초래했다. 서울대학교 주경철 교수의 저서 <테이레시아스의 역사>에서 돈키호테를 다루며 '당시 스페인 왕은 하루에 처리할 서류를 저울로 재고 앉았을 정도로 대충 일했다'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농땡이 부리려고 저울로 서류의 양을 잰 게 아니라, 무게라도 재면서 하루에 처리할 양을 정해두지 않으면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며 똥도 못 쌀 정도로 업무량이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말년에는 소화불량, 신경과민, 당뇨병 같이 '''현대 과로 사무원들이나 걸릴 법한 병들로 고생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지방 및 대외 영지에서의 반발을 적절하게 수습하지 못하는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의심이 많고 우유부단했으면서도, 또 한번 결정을 내리면 그 결정이 아무리 실패적이어도 결코 바꾸지 않는 고집마저 강했다. 그 아들과 손자인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의 경우 특정 관료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부여해 정국이 레르마 공작, 올리바레스 공작 등의 측근에게 놀아난 반면, 펠리페 2세는 반대로 지나치게 신하들을 불신하다보니 모든 일을 직접 관리하다가 행정 전반에 심각한 차질을 낳았다. 알레산드로 파르네제처럼 검증되고 유능한 신료들과 관리들마저, 그의 견제 탓에 기를 펴지 못했던 것이다.
또 평생 여러 나라를 왕래하며 5개 국어를 구사하던 국제인인 부왕 카를 5세에 비해 펠리페 2세는, 제대로 된 회화를 스페인어 하나밖에 못했다.[35] 정치 철학 또한 현장에서 모든걸 지휘하는 타입이었던 카를 5세에 비해, 펠리페 2세는 '군주는 자고로 한 장소에서 국정의 모든 일을 내려다 보며 총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엄청난 전쟁 도발량에 비해 정작 본인은 평생 전장에 한 번도 직접 나간 일이 없었다. 게다가 상술했듯이 사무 또한 유연하지 않고 서류에 입각한 관료제 방식을 통해 수직적으로만 처리하였다.
이러한 행적을 통해 펠리페 2세의 성격이 내성적이고 폐쇄적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나, 국내 순행만큼은 부왕 못지 않게 자주 했고, 가끔씩 경호원이나 측근을 일체 대동하지 않고 돌아다녔으며, 막상 신민들과 만나면 스스럼 없이 대해 주는 등, 외향적이라고까진 못하지만 나름대로 액티브한 면도 있었다. 동시대 스페인인들은 펠리페를 행차 중에 억울한 일이 있어서 감히 왕의 행차에 끼어 들어 탄원을 하려는 신민이 있었으면 일부러 경비대를 무르고 그 말을 들어 주었던 '''친근하고 허례허식이 없었던 따뜻한 왕'''으로 기억했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군주들은 1인칭을 '우리'라고 복수형으로 썼던 반면[36] 펠리페는 공문서 같은 무조건 형식을 따라야 하는 경우만 빼고 '나'라고 일반인처럼 말하는 걸 편하게 생각했고, 상술 된 수도원 기숙사실 배정 문제(...)처럼 일반 백성들의 사소한 문제라도 일단 자신의 눈과 귀에 들어오면 따뜻하게 국왕이 직접 나서서 도와준 경우도 많았다.
펠리페 본인도 이런 격무가 지치긴 했는지 주위 사람들에게 남긴 발언이나 편지들을 보면 '업무가 너무 많아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일이 너무 많아서 기진맥진하니 이해해 달라'와 같은 내용이 적지 않게 나온다. 심지어는 기분 전환 겸 왕궁 사람들과 함께 피크닉을 나왔는데, 그 곳에서도 서류에 결재를 하고 있었다고. 이로 인한 피로와 스트레스를 해결하기 위해서인지, 평소 펠리페는 육식을 매우 좋아했다. 심지어는 본인이 그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원래는 금식을 해야 하는 사순절 기간 동안에 고기를 먹어도 좋다는 관면을 교황에게 직접 받을 지경이었다.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문화적, 이념적 사업과는 별도로 본인 자신은 허례허식을 경멸하고, 문제나 일의 핵심에 집중하며, 나름 소박하고 서민적인 성격에 가까웠다. 현지에선 유명한 일화로, 마드리드로 천도한 이후 마드리드의 수호성인인 농부 성자 이시드로[37] 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지는 우물물을[38] 떠마시는 이벤트를 주관하면서 당시 전형적인 중세, 근세도시 답게 오물 투성이었던 마드리드 길 한복판에서 서민들이랑 다 같이 줄서서 물떠마시고 같이 있던 시민들에게 덕담과 선물들을 배푼 일화도 있다. 대외적으로는 재위 초 네덜란드 순행을 끝으로 남은 40년간 이베리아를 떠나지 않았으나 포르투갈 왕위를 얻은 후(=자국령에 편입한 후) 반기를 든 포르투갈 귀족들을 진압하고자 직접 리스본에 행차한 일이 있었고, 사실 네덜란드에도 알바 공의 반기 진압 이후인 1575년에 직접 행차 하려고 했는 등[39] 재위기간이 길었던 만큼 대외적 활동 사항은 있다.
사실 부왕은 근본적으로 동서유럽에 걸쳐 거대한 땅덩어리를 그것도 직접 통치했으니 다른 시기의 군주들과 견주어도 비교하기 너무 격차가 큰 대상이고, 게다가 카를 5세 재위 중 스페인인들의 한가지 불만 요인이 "도대체 왕께서는 언제쯤 진득하게 왕좌에 앉아계시는 것이냐"였으니[40] 이러한 펠리페 2세의 정주성은 스페인 내부적으로 보면 비록 반대파 및 이교도에 대한 적극적 탄압으로 말미암아 그에 따른 반발 및 궁정 암투가 가속화되는 부작용은 있었으나 국가 정체성 강화에는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펠리페 본인도 이러한 자신의 국정 방침의 부작용 또한 모르는 점이 아니라 국정에 뚜렷한 지역별, 과제별 통치에 특화된, 현대 정부 부처 세분화의 선례가 되는 자문회의 설치와 도로, 우편 시스템의 전반적인 정비, 체계적인 정보 기관 구축 등을 통해 권력의 집중화에 따른 비효율적인 비대화 또한 줄이려고 노력했으며, 결과적으로는 '''통치해야 했던 땅의 범위와 문제들의 산재함'''에 비교하면 당시 스페인 국정 체계는 타국에 비하여 훨씬 더 효율적이고 일관적이었던 편에 속한다.
총체적으로 평가하자면 '''부왕의 시절에는 여전히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적인 보편 제국에 가까웠던 합스부르크 제국이 펠리페의 치세를 통해 스페인 중심의, 스페인이 주도하고, 주로 스페인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는 본격적인 스페인 제국으로 변화했다''' 정도로 말 할 수 있다.
5. 네덜란드의 이탈
펠리페 2세의 비타협적 종교관과 독불장군 성향이 가장 화근을 끼친 것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였다. 플랑드르는 부왕인 카를 5세에게 있어서는 고향이자 비록 그가 네덜란드에서 폭정을 하긴 했지만 자신의 고향이자 기반이라서 자치권을 주며 종교적 관용을 베풀어주었으나, 고지식한 펠리페 2세에게는 그저 스페인의 일개 속령 이상이 아니었다. 펠리페 2세는 전통적인 도시적 자치권을 누리던 네덜란드를 철권으로 통치했다. 먼저 현지 사정에 익숙한 자신의 누이를 총독으로 파견했다.
흔히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이야기할 때 가장 큰 요인으로 종교를 꼽지만 이는 그에 앞서 선행된 펠리페의 가혹한 폭정에 대한 반발의 명분으로서 급부상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펠리페 2세의 재위 도중 네덜란드 지방에서 신교도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던 지역은 역설적으로 스페인군이 다시 점령하는데 성공한 안트베르펀, 헨트, 브뤼셀 같은 지역이었고[41] 암스테르담이나 하를럼 같은 북부 네덜란드의 대도시들을 비롯한 대부분 지역은 17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가톨릭이 다수였다.[42]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 종교 문제는 기폭제적 역할을 하긴 했으나, 직접적인 원인은 종교가 아니라 수 백년 동안 상업 도시로서 자치와 지역적,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중시하는 네덜란드 지방의 정치적 전통을 무시한 점이 더 크다. 단적으로 반란 초기의 지도자였던 오라녜 공 빌렘[43] , 에그몽 백작 라모랄[44] , 후른 백작 필리프 몽모랑시를 포함하여 반란을 주도한 귀족층은 대부분이 '''가톨릭이었다.'''
종교 문제가 쟁점이 된 계기는 이러한 네덜란드의 도시들은 상업적, 정치적 전통에 따라[45] 종교적 관용과 공존을 인정하는 것이 전통이었는데 이러한 전통이 없는 스페인은 개신교도들을 이단으로 찍어 누르려고 하니 이를 막으려고 한 네덜란드의 정치적 엘리트들과 충돌하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유럽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수준의 직물 산업 중심지로서 유럽 경제의 핵심이었던 곳은 암스테르담이다.
이 네덜란드의 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다음의 사례만으로도 확실하다. 당시 스페인 치하였던 남아메리카의 포토시는 세계적인 규모의 은광으로 이 곳에서 나오는 수입은 유럽 전체의 물가를 뒤흔드는 가격 혁명의 한 요인이 되었다. 이 거대한 은광에서의 1년 수익이, 당시 네덜란드의 항구인 안트베르펀(영어권에서는 앤트워프)의 1년 수익과 같았다. 항구 한 곳이 이 정도였으니 네덜란드의 모든 항구 및 도시들의 경제력을 합산한다면 스페인에게 얼마나 그 가치가 클지 추측하기도 힘들다.
정리하자면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큰 역사적 배경은 이미 부르고뉴 백국 시절, 즉 15세기 후반부터 내려오는 해안가의 상업적 자치 도시들의 자유로운 정치적 전통과 부르고뉴의 공작들과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들로 내려오는 중앙 집권적 정치적 변화가 종교라는 기폭제를 통해서 폭발하였다고 보는게 맞다. 사실 개신교에 대한 탄압과 정치적 단일화는 부왕 카를 5세 시절부터 쭉 이어졌던 정책이지만 네덜란드인들은 그래도 카를 5세를 동향인으로서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에 대해 큰 반발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펠리페 2세가 저지른 확실한 잘못은 대대적인 반란이 아니라 과격화 된 하급 귀족과 마드리드 사이에서 중재를 하려고 하였던 에그몽 백작 라모랄을 순식간에 처형해버리고[46] 반란의 기운이 조금이라도 거세지자 마자 알바 공작을 통해 계엄령을 내리는 등 정치적 불만과 대대적인 반란이라는 두 과정 사이를 섬세하게 해결하려고 하는게 아니라 무조건 내 편 아니면 적 편이라는 편협적이고 독단적인 방식으로 찍어 눌렀다는 것에 있다. 전 세계를 돌아 다니면서 장기적인 안목과 그를 위해 조신할 줄도 알았던 부왕에 비하면 확실하게 그 좁은 용렬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네덜란드의 귀족들을 중추로 스페인 당국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자 신교도들의 반기는 더욱 거세져 1566년부터 네덜란드 전역에 걸쳐 신교도들의 성상파괴 운동이 일어났다. 상황이 이리 되자 스페인 당국에서는 당대 최고의 군인으로 명성이 높았던 강경파 알바 공작을 총독으로 파견하여 귀족들을 처형하고 종교 재판을 실시 하는 등 폭압적인 탄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결국 네덜란드 전역은 반란의 불길에 휩싸였으며, 반란을 진압하러 파견된 스페인군이 급여 미불에[47] 대한 불만으로 엔트워프 같은 대도시들을 약탈하기 시작하자[48] 결국 1581년 네덜란드 의회에서는 펠리페 2세를 정식으로 폐군으로 선언하고 80년에 걸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 시작했다.
신대륙보다 더 큰 부를 안겨주던 네덜란드의 이탈은 스페인에게 있어서는 큰 타격이었다. 펠리페 2세는 남은 플랑드르의 이탈을 막기 위해 더 열심히 틀어막았다. 불행 중 다행히도 157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펠리페 2세의 일련의 중앙집권적 식민제도 정비에 더해 기술적 발달에 따른 새로운 '은 제련법'[49] 이 결정적인 빛을 보았고[50] , 이를 통해 신대륙의 부가 안정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한데다, 필리핀을 통한 명나라와의 교역 역시 활황을 띄는 등 여러모로 운이 따라주면서 군인들의 월급도 정상화될 수 있었다. 또한 알바 공의 공석에 대체 투입한 당대의 명장 알레산드로 파르네제의 기막힌 전술 역시 스페인군의 역량 강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뒤집어서 말하면, 적어도 1550년대 이전에 스페인이 이룩한 대외 사업, 정복들을 "신대륙에서 쏳아져 나온 금은으로 떡칠해서..." 식의 서술이 나온다면 무조건 제대로 조사 안하고 대충 대중에게 알려진 스페인 제국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에만 기반에 쓴 틀린 서술로 평가하면 된다. 지표 상으로도 아메리카에 제대로 광업과 이걸 운영하여 본국까지 수송할 인프라가 자리 잡혀 신대륙 사업이 실제로 금전적 이득이 되기 시작한 건 일러도 16세기 중반이고, 이 이전의 신대륙 개척은 스페인 본국은 일정 부분 자금, 군사 동원 허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국왕과 가톨릭교회의 이름'''만 빌려주고 나머진 현지 콩키스타도르들이 다 알아서 해야 했던, 국가 사업이 아닌 사적 사업에 가까웠고, 경제적으로 국가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였지 수익원이 아니었다.
이를 바탕으로 스페인군은 프랑스어를 쓰는 왈롱계 지방을 포함한 훗날 벨기에가 되는 남부 네덜란드의 반란을 진압하고 굴복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남부 네덜란드는 200년 넘게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하에 들게 된다 이 지역은 나중에 네덜란드 땅이 되기는 하나 통치에 실패해 벨기에로 독립했다. '''즉, 의외로 현대인들도 잘 주목하지 않는 부분이지만 네덜란드, 프랑스 양국에게서 독립된 나라로서 벨기에의 기원을 찾는다면 이는 단연 펠리페 2세와 알바 공작, 파르네제의 반쪽자리 재정복으로 성립된 것이다.'''
6. 영국과의 급격한 불화와 칼레 전투
재위 초기에만 해도 그다지 길진 않지만 영국과 그럭저럭 사이가 좋았던 시기가 있다. 1554년, 카를 5세는 당시 막 영국의 국왕이 된 사촌동생 메리 1세와 자신의 장남이자 스페인 국왕이 될 예정인 펠리페와의 결혼을 주선했다.
이 당시 펠리페는 첫 결혼 후 2년만에 아내와 사별해 9년이나 홀아비로 지낸 상태로, 정략적으로도 국가와 가톨릭의 번영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 그녀가 11세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큰 불만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나이와 별개로 영국에서 보내온 초상화도 꽤 미화가 잘 되어 있어 흡족했다.
그러나 막상 만나보니 메리 1세가 (펠리페 2세 생각에) 별로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에[51] 펠리페 2세는 메리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 일단 정략혼인의 결과 명분상으로 영국까지 다스리게 되었지만, 펠리페는 스페인 현지에 틀어박혀서 바쁘다는 이유로 영국을 별로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메리 1세는 펠리페에게 첫눈에 반한 상태였고 이후로도 그를 열렬히 사랑했다. 그녀는 전국 각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펠리페와의 결혼을 강행했고, 펠리페의 요청에 따라 역시 반대를 무릅쓰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가했다. 대체로 영국 내에선 펠리페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여왕의 남편이므로 속으로야 어쨌든 겉으로는 스페인과 동군연합 관계였다.
메리 1세는 무심한 남편을 그리워하면서 2번이나 상상임신을 할 정도로 힘들어했지만, 펠리페는 "제발 영국에 좀 오라"는 메리의 간청을 죄다 무시해 버렸다. 결국 1558년 메리 1세가 사망하자, 그 소식을 들은 펠리페 2세는 영국 국왕이 된 처제 엘리자베스 1세에게 냉큼 청혼했다. 개인적으로는 언니보다 다루기 힘들어 보이는 엘리자베스와 부부가 된다는 선택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나, 영국에서의 지배권을 유지해서 개신교 세력을 몰아내고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서 한 거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입장에서는 당연히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을 반대했던 펠리페 2세의 아버지 카를 5세에 대한 앙금도 있었고, 종교적으로도 성공회에 독실했는데다, 당시 영국 내에선 스페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이복언니 메리 1세의 남편이었던 사람이기에 굳이 결혼하려면 (일단 당시 영국의 국교기도 했던 가톨릭 기준으로) 교황에게 관면을 받아야 하는 등 여러 가지로 좋을 게 없는 결혼이라서 퇴짜를 놨다.
빡친 펠리페 2세는 1559년, 외아들 돈 카를로스의 '''약혼자'''이자 당시 자신의 적국이었던 프랑스의 공주 엘리자베트와 덜컥 재혼해버렸다. 이 결과 부왕, 아니 증조부 때부터 지긋지긋하게 이어진 프랑스와의 악연도 막을 내리고 그 종지부인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맺게 된다. 카토 캉브레지 조약을 기점으로 17세기 리슐리외 추기경을 필두로 하여 부르봉 가문의 통치권이 확실하게 뿌리 박을 때까지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의 불길에 휩싸여 나라가 분열 되었으며 스페인 또한 프랑스라는 걸출한 전통적인 라이벌을 꺾을 수 있었다.
또한 이것은 당시 잘못했다가는 스코틀랜드와 관련하여 프랑스와 본격적으로 전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던 영국을 압박하는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영국 입장에선 그나마 다행이었던 게, 스페인은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 이건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 측에서 엘리자베스 1세에게 계속 혼담을 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펠리페는 사실 개인적으로는 엘리자베스에게 약간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52] , 완전히 적이 되는 것보다는 그녀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과 결혼하게 해서 동맹 관계가 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한 듯하다. 이 탓에 영국에 있어 합스부르크 사람들은 여왕의 남편 후보로서 유력했지만, 스코틀랜드의 섭정 마리 드 기즈 왕대비(메리 스튜어트의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상황이 약간 달라졌고, 결국 엘리자베스 1세는 그들의 청혼을 거절했으며 본격적으로 성공회를 되살렸기에 자연스레 스페인과 영국의 사이는 나빠졌다.
비록 네덜란드의 반란군에게는 여전히 골머리를 썩고 있었음에도 그는 능력있던 부왕의 대외적 명성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리고 그 타겟은 자신의 청혼을 퇴짜놓았고, 가톨릭 교도인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를 처형한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와 그녀 치하의 잉글랜드는 결국 성공회 국가가 되었으나, 그녀에게 나름대로 호감을 가졌던 펠리페 2세는 그 뒤에도 다른 가톨릭 국가들 이상으로 영국에 여전히 미련이 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가 본격적으로 네덜란드 반군들을 지원하기 시작하고, 프란시스 드레이크를 필두로 한 잉글랜드 해적들이 들끓자 이를 진압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잉글랜드를 침공할 무적 함대를 출병시킨다.
이미 네덜란드 전역에서 정신나간 전비를 소모한 경험이 있는 펠리페 2세는 가능하면 잉글랜드를 정복하나, 좀 더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잉글랜드의 외교적인 굴복이라도 유도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제대로 된 육군도, 100년 전쟁 이후 체계적인 군사 개혁도 겪지 않은 잉글랜드는 스페인군이 상륙이라도 하면 성공적으로 물리칠 가능성이 전무하였기 때문에[53] 잉글랜드는 해적 프란시스 드레이크와 노예상인 존 호킨스, 탐험가 월터 롤리 등을 중용해 대처했다[54] . 아무튼 당시 영국 정규 해군의 역량을 고평가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이를 계기로 영국 해군의 교리가 각을 갖춘데다 본격적으로 국가적 지원까지 등에 업기 시작해 훗날 대양을 장악하는 기초 역량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무적함대는 칼레 항구에서 영국 해군의 매복에 걸려 타격을 받았고, 태풍으로 인하여 함대가 와해 되자 지휘 체계가 무너진 채로 뿔뿔이 흩어져 브리튼 섬을 빙 도는 삽질을 범했다. 때문에 육지에서 합세하려던 막강한 스페인 육군과의 합동작전도 무산됐고, 고생 끝에 브리튼 섬에 가까스로 상륙한 스페인 해군 병력들은 현지 주민들과 병력에 의해 개발살 당했다.
사실 당시에 스페인 해군은 무적함대라는 별칭은 있었지만 그렇게 견고한 해군은 아니었다. 스페인의 주력 부대는 어디까지나 레콘키스타를 통해 축적된 경험과 양질의 지휘관, 그리고 선진화 된 보급과 군 행정 체계로 밀어붙이는 육군이었고, 전문적인 대양해군양성이 꾸준했던 나라는 아니다. 막상 그 거대한 규모의 무적함대 자체도 실상 태반은 민간 상선을 징발해온것. 물론 갈레온항목에 나와있듯이 당시 민간 상선과 전업 군용 전투선의 구분 자체가 희미하긴 했지만, 어쨋든 대서양에서 원양 해전이란 객관적 조건에서 볼때 숙련도나 정예도는 오히려 사략 경력과 전통적으로 오래된 항해 전통이 있는 잉글랜드, 네덜란드 해군보다 떨어졌다.
사실 그 당시 해전은 지상전과 전술적인 면에서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적군의 배를 충각으로 박아서 접촉한 뒤 보병을 투입해서 육박전을 벌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이는 동서양 가릴 것 없이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강력한 육군을 가진 국가가 해군도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중해에서의 전과가 보여주는 것처럼 스페인 해군 중에서도 가장 전문화가 잘 되어 있고 그나마 상술한 것처럼 견고한 인프라와 경험이 갖추어져 있던 분야는 지중해의 갤리선 위주의 연안해군이었지, 기본적인 조건 자체가 엄청나게 다른 대서양의 대양해군은 스페인 입장에서도 초보인 분야였다. 스페인 황금기 내내 지중해 해군은 높은 전과를 올렸지만, 대서양 해군은 당장 아메리카 식민지는 물론 대담하게 스페인 본토 해안도 쳐들어와 털고 도망치곤 하던 전통적인 대양 항해 강국인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 해군에게 열세에 있었다.
가격이나 거리나 시간이나 모든 조건에서 해상수송이 압도적으로 효율적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해군의 열세 때문에 스페인은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싸우면서 본토에서부터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주둔한 주력 플랑드르 군단을 보급, 보충하기 위해선 바르셀로나에서 밀라노까지, 밀라노에서 현대 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 국경 산맥지대, 부르고뉴와 라인강변을 통해 육로로 빙빙 돌아가는 스페인인의 길이란 근세 유럽 최대규모이자 최정거리 병참로를 뚫어야했다. 이 중간 경로에 놓여있는 수많은 이탈리아, 스위스계 소국, 프랑스계 공국, 신성로마제국 회원국들이 정권이나 종교, 외교 정책이 스페인에 적대하는 쪽으로 돌아설때마다 막대한 시간과 물자를 낭비하며 새로운 루트를 뚫거나, 아예 길좀 빌려쓰잡시고 새로운 전쟁을 벌려야했던건 당연지사. 이베리아 동군연합 시절땐 이래서 원양 항해와 전투에 더 노하우가 있던 포르투갈 해군을 빌려쓰려고도 했지만, 애초에 동군연합 형성 전제조건 자체가 최대한 포르투갈의 자치권 보장이었으니 포르투갈측 군사귀족, 관료들은 원래 자기들 이익이 걸려있었던 인도양-동태평양, 브라질 식민지 제해권에만 관심있지 스페인 중앙의 유럽 본토 대전략엔 협조할 마음이 없었는지라 이것도 실패했다.
그러나 칼레 해전 자체로만 보면 스페인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힌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페인 해상세력이 순식간에 폭망하고 바로 잉글랜드가 순조롭게 패권을 빼았은건 아니다. 당시 역대급 아르마다가 황당하게 개박살나자 마드리드 시민들이 한동안 상복을 입고 다니고, 이후 잉글랜드에선 자국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불멸의 전투중 하나로 기념되긴했지만, 여전히 스페인은 잉글랜드에 비하면 전유럽과 아메리카에 걸쳐 세력을 가진 훨씬 더 강력한 나라였다. 칼레 해전에서 승기를 잡은 잉글랜드는 이듬해 야심차게도 갈리시아와 리스본을 통해 스페인 본토를 치겠다고 잉글랜드 무적함대라 불리게 될 폭탄드랍을 보냈지만 해안방어도 못 뚫고 박살난체 쫒겨났다. 이후에 일단 전투함의 수 같은 통계적인 해군력이나마 재건한 스페인이 다시한번 1596년, 97년에 걸쳐 스페인의 지원아래 터진 아일랜드 반란을 지원하기위해 또 150척 병력 만오천급의 2차 아르마다, 3차 아르마다 똑같은 방식으로 태풍으로 박살났다. 이쯤되면 진짜 신에게 버림받은건지, 학습능력이 없는건지(...) 모를지경이고, 괜히 잉글랜드측에선 일련의 폭풍을 '개신교의 바람'이라 부르며 엄청난 프로파간다거리가 된게 아니다.
이렇게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군이 스페인에서 제해권을 뺏어온건 좋은데, 막상 전쟁의 주전장이자 목적인 네덜란드 전역에선 아무리 잉글랜드군이 대규모 지원을 와도 야전에서 스페인에 대한 열세를 극복할순 없었다. 해상에서도 스페인 대서양 무역항로와 해안지대를 신나게 약탈하고 다녔지만 스페인이 공해상에서의 열세와 식민지, 해안 전역 방어의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대신 아바나, 카르타헤나, 베라크루즈, 세비야, 리스본, 코루나 같은 식민지와 본토의 핵심 무역항 수비 중심으로 문을 걸어 잠그며 대신 수송함대들을 이전보다 작게, 자주 배치하니 근본적인 스페인 군비의 원천을 차단하는건 실패했다. 게다가 제해권의 상실이란 뼈아픈 실패에도 불과하고 스페인측이 지금까지 쌓아온 국력, 외교적 영향력, 경제력을 마구 뿌리며 위에 링크 걸린 바르셀로나에서 밀라노를 거쳐 네덜란드까지 올라가는 안정적인 육상루트를 일단 개발하고 나니깐 배가 한 천척, 수병 수만명이 대서양 바다의 물고기밥이 되긴했지만(...) 어쨋든 네덜란드 주둔 플랑드르 군단의 보급과 증원이란 전략적 목표 자체는 달성했다. 이런식으로 장군멍군하며 스페인의 펠리페,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두 라이벌 군주 모두 죽을때까지 계속된 잉글랜드-스페인 전쟁은 결국 잉글랜드측 전비가 먼저 오링나면서 1604년, 스페인측은 잉글랜드 왕위 관련 주장을 모두 포기하지만 잉글랜드는 대서양 사략행위와 네덜란드 반란군 지원을 중단한다는 스페인측이 좀 더 유리한 방향으로 끝났다.[55]
정리하자면 스페인의 무적함대 격파를 비롯한 해상에서의 패전이 정치적, 국가 이데올로기적으론 잉글랜드에게 엄청난 이득을 주었고, 스페인 입장에서도 심각한 타격을 준건 맞지만 곧바로 잉글랜드의 부상과 스페인의 몰락으로 이어진건 아니었다. 백년전쟁 이후 잉글랜드의 유럽 열강으로서 첫 도약이었던 대스페인 전쟁은 스페인 패권에 흠집을 주긴 했지만 치명적인 타격을 주진 못했고, 스페인 패권 자체가 지상군 우위와 함께 무너지는건 반세기 뒤 위그노 전쟁의 피해를 회복한 루이 14세 치하 프랑스가 전면개입하면서야 이루어졌다. 대서양에서 스페인 해상 패권이 이 시기를 기점으로 무너지기 시작한건 맞지만 당시 새로운 대서양의 패자로 등극했던건 결국 중간에 GG치고 나간 잉글랜드가 아니라 끝까지 스페인 상대로 탱커이자 딜러 역할을 겸했던 네덜란드 해군이며, 잉글랜드의 부상 또한 마찬가지로 반세기 뒤 17세기 후반 영란전쟁에서야 이루어졌다.[56] 장기적인 관점으로 볼때 네덜란드를 둘러싼 엘리자베스와 펠리페 2세의 대결이 잉글랜드, 나아가 미래의 통합 영국이 세계열강으로서 떠오르는데 초석이 된건 사실이지만 그 자체의 결과만으로 보면 훗날 진짜 잘나가던 시절 영국인, 그리고 그 시점을 이어받은 미국인들이 조상들의 업적을 과장한 면이 있다.
7. 후계자 문제와 파산, 그리고 종교적 성과
비록 신대륙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금과 은, 플랜테이션으로 당대 최강의 지위를 누렸지만[57] , 펠리페 2세에겐 자식운과 회계능력이 별로 없었다. 전통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금융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던 유대인, 무어인 공동체는 이미 전시대 이사벨, 카를로스 시절에 박살나서 추방당했고, 애초에 규모나 수익성도 유럽 전체 기준으로 보면 대단할거 없었던 카스티야 제조업은 이때 저지대, 이탈리아 산업들과의 경쟁으로 결정적인 치명타를 먹었다.
게다가 그 이전 시절부터 진행된 강압적 종교, 민족 통합 정책에 대한 반발로 터진 무어인들의 반란은 결국 대학살과 강제 추방으로 끝나며 동부 안달루시아, 발렌시아 같이 특히 농경사회에선 핵심적인 농민들 중 무어인들의 인구 비중이 높았던 지방에선 순식간에 노동 인구의 반틈 가까운 수가 사라지면서 경제적인 붕괴를 가속시켰다. 이런 일련의 경제적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동맹을 맺으며 스페인 제국의 돈줄 자체를 맡긴 제노바 상인들은 스페인 제국의 자금줄 유지란 단기적인 문제는 해결했어도 이 과정에 매관매직과 특히 나폴리, 시칠리아 같은 전통적인 토착 귀족 세력이 강한 지방의 경제적 이권도 이들이 다 떠먹으면서 정치적으로 심각한 불만을 초래했다.
펠리페 2세는 총 4번 결혼했는데, 3번째 결혼까지는 아들이라고는 첫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돈 카를로스 하나만 있었다. 그런데 카를로스에겐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었다.
펠리페 2세는 아들이 치는 사고를 감싸주면서 동시에 제국을 이끌 후계자로서는 엄격하게 키우려 했는데, 돈 카를로스는 아버지에게 반감을 갖고 성장했다. 또한 아들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는 것에 실망한 펠리페 2세 역시 그가 성년이 된 후엔 반쯤 포기해서, 부자 간의 사이는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다 돈 카를로스가 머리를 크게 다쳐 사경을 헤매다 깨어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후 그는 정말 막나가기 시작한다.
내심 하나뿐인 아들과의 사이가 좋아지길 바랐던 펠리페 2세는, 이젠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자 찢어지는 심정으로 아들을 유폐시켰다. 카를로스는 유폐된 탑에서 기행을 일삼다가 죽었다. 일설에 따르면 그런 꼴을 견디다 못한 펠리페 2세가 독살했다고도 한다. 돈 카를로스가 사망한 후, 돈 카를로스와 염문설이 돌 정도로 그를 가까이 대했던 3번째 부인 이사벨(엘리자베트)는 충격으로 앓다가 사산한 후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일련의 불행을 겪고 몸을 추스린 펠리페 2세는 돈 카를로스의 약혼녀였으며 자신과 친족관계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안나[58] 와 1570년에 결혼한다. 둘 사이에서 5명의 자녀가 생겼지만, 박복하게도 4번째 아내인 안나마저 30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고 자녀들도 아들인 펠리페 3세 외에 다 일찍 죽었다. 거기다 근친상간의 폐해인지 이 펠리페 3세마저도 좀 모자란 아들이었다.
그래서 펠리페 2세는 '''"왜 이렇게 성실한 저에게 능력 되는 아들 하나를 주지 않으셨나이까!!"'''라며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했다고 한다. 후계를 이은 펠리페 3세는 여러모로 암군에 속하는지라 훗날 스페인의 몰락의 기점이 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물론 국가 재정 파산을 1번도 아니고 4번이나 한 펠리페 2세 본인도 그 계기를 적지 않게 제공했다.
가정사에서 해소되지 못한 걸 외부적인 문제로 발산하려 했는지, 그는 거듭되는 국고 파산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원정군을 일으켰다. 1565년에 필리핀에 군대를 보내 총독을 세워 통치시키고, 1571년엔 오스만 제국과의 레판토 해전에도 함대를 투입해 승리를 거둔다. 프랑스에서 터진 위그노 전쟁에 가톨릭 수호를 명분으로 개입해 프랑스 정국의 혼란을 지속시키고 서유럽의 패자로서 위치를 공고히 하였다. 1580년엔 1578년부터 왕계가 끊어진 포르투갈의 후계에도 개입해 포르투갈의 왕위까지 거머쥐고 포르투갈의 식민지도 흡수했다. 이렇듯 1570년대에서 1580년대 초까지는 펠리페 2세가 가장 잘 나가던 시기였다. 그러나 내실은 국가 파산, 신용 불량을 겪고 있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카를 5세(=카를로스 1세) 때부터 시작된 잦은 대외전쟁에 스페인의 부를 투입한 것이었다. 카를 5세는 원래 스페인 왕으로 즉위할 때 스페인 관료들과 귀족들이 요구한 조건 중 하나인 '스페인에서 나는 부를 스페인을 위해서만 사용할 것'을 무시하고 중부유럽, 동유럽에서의 패권다툼에 쏟아부었다. 그 결과, 카를 5세가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 본토와 스페인령 식민지, 플랑드르, 프랑슈콩테 등의 유럽 내 속령들을 상속할 때 같이 상속된 부채가 3,900만 두카트였는데, 이 돈을 모두 녹여다 금괴로 만들어도 순금 105톤[59] 이나 되는 엄청난 액수였다.
물론 오스만 제국과의 일전은 유럽 제1의 열강을 자처하던 스페인이었으니 당연히 앞장서서 싸워야 했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대규모 전력을 동원한 결과 스페인은 레판토 해전 승전 이후 2번째 파산을 선언하며 전통적으로 스페인 국고의 최대 수입이었던 내부 소비세(alcaldes)를 배로 올려 당시 유럽 최강대국이었으면서도 내부 살림은 가장 팍팍한 편에 속했다. 그런데도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이고[60][61] ,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에 로비자금을 살포하고, 영국과 그 도매급으로 네덜란드를 치겠다고 파병했다가 무적함대와 수만 명의 병력을 물고기밥으로 만드는 등 온통 돈 들어가는 일마다 손을 대는 바람에 펠리페 3세에게 왕위를 넘겨줄 무렵에는 그 부채가 1억(!!) 두카트로 불어나 스페인의 능력으로는 일시 변제가 불가능했다.[62] 물론 신대륙 광산들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금은보화들이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네덜란드와 프랑스에서의 전역에서도 펠리페 2세의 군대는 끝내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남부 플랑드르와 파리 시민들을 가톨릭으로 붙잡아두는 것은 성공했다. 그 결과 남부 플랑드르는 가톨릭 국가인 벨기에가 되었으며, 프랑스의 위그노(신교)군 총대장인 앙리 4세도 다 이겨놓고 막판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프랑스 또한 가톨릭 국가로 남았다.[63] 이탈리아에서도 가톨릭을 비호하여 효과를 거뒀다.
중남미 대륙과 필리핀에도 여파가 미쳤다. 게다가 그가 적극적으로 비호했던 예수회와 다른 가톨릭 수도회들(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의 선교 활동은 큰 성공을 거두어 예수회 신부들은 이 시기 전 유럽의 가톨릭 귀족 자제들의 교사가 되었고, 아메리카에도 수 많은 교회가 세워졌으며, 심지어 중국과 일본에도 그 영역을 넓혔다. 또한 중국을 오가던 조선인들이 가톨릭 관련 서적을 읽고 조선에도 가져가, 조선에도 가톨릭이 전파된다. 적어도 그가 일생을 두고 매진했던 신앙의 사수만큼은 영국 외 국가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던 셈이다. 이러한 펠리페가 직접 주도한 스페인 중심의 카톨릭 세계 결집 덕분에 실질적인 유럽의 정치적 현실은 부왕인 카를로스 1세의 치세로 인해 이게 불가능하다는게 명백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을 중심으로 분열된 기독교 세계 전체를 통일하고 이교도 투르크인들에 대항할 성전을 일으킬 보편군주에 대한 기대감은 17세기 이탈리아 사상가였던 토마소 캄파넬라가 보여주듯 펠리페 사후에도 강력한 영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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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9월 13일, 펠리페 2세는 암에 걸려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부왕만큼이나 굴곡 많고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유해는 자신이 지은 엘 에스코리알의 왕실 영묘에 안장되었다.
8. 아내와 자녀
펠리페 2세는 총 4번의 결혼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부인 및 자녀복이 영 신통치 않다. 4명의 부인은 모두 펠리페 2세보다 먼저 사망했고 그 중에 2명의 부인은 아들인 돈 카를로스와 혼담이 있었던 여성이였는데, 이전 부인이 사망하는 통에 펠리페 2세와 결혼을 했던 여성들이다. 첫번째 부인인 마리아 마누엘라를 제외하고 나머지 3명과는 위/아래로 나이차가 꽤 나는편이다.[64]
8.1. 포르투갈의 마리아 마누엘라(1527년 10월 15일 ~ 1545년 7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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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왕인 주앙 3세와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 사이에 태어난 둘째이자 장녀이다. 펠리페2세와 그녀는 아버지쪽으로도 어머니쪽으로도 이중으로 사촌간이였다. 펠리페 2세의 아버지인 카를 5세는 마리아 마누엘라의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와 형제, 펠리페2세의 어머니인 포르투갈의 이사벨라는 마리아 마누엘라의 아버지인 주앙 3세와 형제이다.
마리아 마누엘라의 부모는 9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린시절을 지내지 못하고 사망. 유일하게 남은 형제가 남동생인 후안 마누엘이다. 후안 마누엘과 펠리페 2세의 여동생인 오스트리아의 후아나도 결혼하여 이중으로 혼인하기도 했다.[65] 포르투갈은 살리카법의 영향을 받지 않아 여성도 왕위계승자가 될 수 있었고[66] 마리아 마누엘라의 남자형제들이 자꾸 어려서 사망해서 마리아 마누엘라는 한동안 포르투갈의 왕위계승자에게 주어지는 작위인 아스투리아스공의 칭호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1543년 16살의 동갑인 둘은 결혼을 했고, 2년 뒤 아들 돈 카를로스를 낳게 된다. 하지만 마리아 마누엘라는 출산 후 과다출혈로 인해 18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한다. 그녀가 낳은 돈 카를로스는 여러대에 걸친 근친의 댓가로 정신이 미약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리페 2세는 아들에게 최선을 다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부자는 스페인판 영조와 사도세자 각이 나온다. 카를로스는 갈수록 상태가 나빠지고 포악해지자 결국 펠리페 2세가 참다못해 유폐했고 카를로스는 탑에서 사망했다. 이때 펠리페 2세가 죽였다는 설이있다.
자녀
8.2. 메리 1세(1516년 2월 18일 ~ 1558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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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는 첫번째 부인인 마리아 마누엘라가 사망하고, 9년이나 지난후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메리는 영국의 왕인 헨리 8세와 첫번째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 태어난 딸로 캐서린이 낳은 자녀중 유일하게 어린시절을 지난 자녀이다. 메리의 어머니인 아라곤의 캐서린은 펠리페 2세의 할머니인 후아나와 자매간이다.[67] 즉 메리는 아버지 카를 5세의 사촌이고, 펠리페에게는 5촌 고모가 된다.
메리는 불행한 사춘기를 보내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대 후반이었지만 아직 미혼이었고, 따라서 후계자를 얻기 위해 빨리 결혼을 해야 했다. 이 때 메리가 고른 것이 예전에 의지가 되었던 사촌 오빠 카를 5세[68] 의 아들인 펠리페 2세가 그 대상이 되었다. 메리는 펠리페에게 첫눈에 반해 그를 열렬히 사랑하게 됐지만 영국 국민들은 메리와 펠리페의 결혼에 많이들 반발했고, 펠리페도 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결혼한 뒤에도 영국을 잘 찾아가지 않았고, 메리 혼자서만 무심한 남편을 그리워하며 2번이나 상상임신을 할 정도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메리가 "제발 영국에 좀 오라"고 간청을 해도 펠리페는 무시했고, 결국 결혼 2년만에 메리가 병으로 사망한다.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8.3.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69] (1545년 4월 2일 ~ 1568년 10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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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의 2번째 부인인 메리가 사망하자, 펠리페는 좀 더 자식을 얻을 필요성도 있었고 스페인의 계승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결혼을 해야 했다.
엘리자베트(이사벨)는 프랑스의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이다. 1545년 아직은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였던 앙리 2세의 둘째이자 맏딸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 그리고 나바르 출신 앙리 4세의 부인이 되는 마르그리트가 있다. 이사벨라는 이후 오빠인 프랑수아 2세의 부인이 되는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와 어린시절 방을 함께쓰며 자랐고 이 둘은 평생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70] 원래의 이사벨라는 펠리페 2세가 아닌 그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돈 카를로스와 혼담이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사벨라와 펠리페 2세가 결혼하도록 돌아갔고, 이사벨라는 14살의 어린나이로 시아버지가 될 뻔 했던 펠리페 2세와 결혼하게 된다. 수줍음 많은 성격에 귀염성이있고 외모도 예뻤던 이사벨라를 펠리페는 꽤 아꼈고 그 시기에는 애첩도 들이지 않고 아내에게 공을 들였던 듯하다. 이사벨라는 임신과 출산, 유산을 반복하게 된다.
펠리페 2세의 아들이자 엘리자베트의 의붓아들인 돈 카를로스는 엘리자베트와 '''동갑'''이며, 생몰년이 같다.] 이사벨라는 포악한 성격의 돈 카를로스와 사이가 좋았다고 하며, 의붓아들이자 하마터면 남편이 될 뻔했던 이 남자는 특히나 이사벨에게 상냥하게 잘 대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둘 사이가 불륜사이라는 소문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건 가능성이 낮다.[71] 이사벨라는 2명의 딸을 남겼고 후계자를 남겨주지 못한다. 그리고 이사벨라와 같은해 돈 카를로스도 사망하면서 펠리페는 후계자와 후계자를 더 낳아줄 아내를 모두 잃고 만다. 그래서 또 급하게 4번째 결혼을 해야했다.
자녀
- 사산아(아들, 1560년)
- 쌍둥이 사산아(딸들, 1564년)
- 이사벨라 클라라 아우제니아(1566년 8월 12일 ~ 1633년 12월 1일)
- 카테리나 미카엘라(1567년 10월 10일 ~ 1597년 11월 6일)
- 사산아(딸, 1568년 10월 3일)
8.4. 오스트리아의 안나[72] (1549년 11월 2일 ~ 1580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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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2세와 부인인 스페인의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첫째이다. 어머니 마리아는 펠리페 2세의 여동생이다. 안나는 스페인에서 태어나서 4살까지 살다가 이후 성장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했다. 안나의 형제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루돌프 2세, 마티아스, 프랑스의 샤를 9세의 왕비인 엘리자베트가 있다. 어린 시절의 안나는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딸로, 아버지가 업무로 바쁠 때에도 딸이 아프자, 일을 미루고 딸을 돌봤을 정도였다.[73]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장녀인 안나는 다들 탐내는 신부감이였는데,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으로 나뉘어진 합스부르크는 둘이 꽁냥꽁냥 할 생각을 했고 이 때문에 사촌오빠가 되는 돈 카를로스와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돈 카를로스가 사망. 그리고 삼촌인 펠리페 2세의 3번째 부인인 이사벨라 역시 출산을 하다가 사망했다. 이렇게 되자 2명의 어린 딸과 함께 홀아비로 남아버린 펠리페 2세는 급히 결혼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안나는 시아버지가 될 뻔했던 외삼촌의 4번째 부인이 된다. 안나는 21살이었고 남편이 된 외삼촌 펠리페 2세는 43살이었다. 안나는 스페인으로 가며 2명의 남동생과 함께 떠났다.[* 이 중 한명인 [[https://en.wikipedia.org/wiki/Albert_VII%2C_Archduke_of_Austria|알프레드 7세 대공][은 안나의 의붓딸인 이사벨라 클라라 에우헤니아와 결혼하게 된다. 의붓딸이자 사촌여동생인 이사벨라 클라라 에우헤니아는 원래 안나의 다른 남동생인 [[루돌프 2세]]와 약혼했었는데, 이쪽에서 결혼을 안 한다고 빼서 닭 쫓던 개가 되었다.] 펠리페는 어린 아내 안나를 아꼈고, 이 시기에 펠리페는 정부를 들이지 않고 안나에게 충실했다고 한다. 펠리페의 3번째 부인인 이사벨라가 낳은 2명의 의붓딸들에게도 좋은 엄마가 되어줬고, 안나는 펠리페에게 5명의 자녀를 낳아줬고 그 중 후계자가 되는 펠리페 3세가 있다. 안나는 활발한 성격으로 칙칙한 스페인의 궁정을 발랄하게 이끌어 갔는데 그만 결혼 10년 만인 31살의 젊은 나이에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안나가 사망하고 3년 후엔 안나의 어머니이자 펠리페 2세의 여동생이 되는 마리아가 스페인으로 돌아와서 안나가 낳은 아이와 궁정을 돌봤다.
자녀
- 아스투리아스 공 페르디난트(1571년 12월 4일 ~ 1578년 10월 18일)
- 카를로스 로렌스(1573년 8월 12일 ~ 1575년 6월 30일)
- 아스투리아스 공 디에고(1575년 8월 15일 ~ 1582년 11월 21일)
- 펠리페 3세(1578년 4월 3일 ~ 1621년 3월 31일)
- 마리아(1580년 2월 14일 ~ 1583년 8월 5일)
9. 후대의 평가
당시 스페인의 대외 강경책으로 대립한 정적들이 후대에 열강으로 부상한데다, 광신적인 종교적 열기에 따라 실제 탄압도 거세다 보니 적이 워낙 많아 스페인 국외에서는 후대에 걸쳐 시종일관 지독한 폭군으로 묘사되었다. 사실 스페인 내에서조차도 돈 후안, 파르네제 같은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이 펠리페의 견제를 받아야만 했고,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청교도와 성공회 교인을 학살한 메리 1세의 남편으로, 국사의 서사시적 위치에서 나폴레옹, 히틀러와 함께 악마로 여겨졌고 영국의 영향이 워낙 컸던 미국 등지에서도 평가가 그대로 이어졌다. 게다가 말년의 정치적 스캔들로 인해 외국으로 망명한 안토니오 페레즈라는 펠리페 2세의 서기 또한 악소문을 많이 퍼뜨려 (안 좋은 의미로) 근세 유럽사에서 가장 주목을 많이 받는 군주가 되었다.
경제정책에 국한해서 보자면 명백하게도 당시 유럽 최강국의 군주라는 양반이 비서에게 국고 재정 서류를 두고 "솔직히 이게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라고 시인하며 국가 파산의 상황을 4차례나 반복하는 모습은 재정, 회계적인 모습에서 오히려 암군이라 칭함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신대륙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금과 은이 있었기 때문에 보였던 모습이다. 많은 파산과 실책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제국은 펠리페 사후 이후에도 유럽에서 압도적인 부자나라로 유명했으며 영국과 미국이 후대에 발흥하기 까지는 스페인을 무시할 수 있는 나라는 없었다. 펠리페 2세가 방만한 재정운용으로 인해 까먹은 것도 많지만, 애초에 이 시대 자체가 근대 자본주의 한창 이전, 정치적, 종교적 권력이 경제력보다 훨씬 더 중요했던 시대였기도 했고[74] , 그리고 역설적으로 펠리페 2세가 다져놓은 내부 행정체계 덕분에 국가 파산 몇번 정도는 충분히 버틸수 있는 시스템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영미권과 종교는 같아도 스페인의 적이란건 매한가지였던 프랑스 학자들이 주도했던 전통적인 서양사학계에서는 펠리페 2세를 스페인 제국의 몰락의 시초로 보았으나, 현대와서 이 관점은 통용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현대 학계에서는 '스페인의 몰락'이란 테제 자체가 도전을 받고 있고, 국제 열강이란 측면에 한정해서 '몰락'이란 모델을 계속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기점은 펠리페 2세보다 한두세대 더 뒤로 본다. 제정적인 측면에서 펠리페 2세의 치세가 스페인의 약점을 부각시켰다 하더라도, 당장의 국력과 국제적 영향력으로 17세기 초반의 스페인은 100년 전보다 훨씬 강하면 강했지, 꿀릴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대 자체가 군사혁명으로 인해 하루가 멀다고 폭등하는 전비와 루터교보다 한층 더 과격한 칼뱅주의가 대두하면서 유럽 전체의 정치 지형이 재편되어가는 와중 부군 카를로스 시절의 두루뭉술한 중세적 보편군주와 특정한 지정학적 기반 없이 전적인 동군연합만으로 운영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적 제국은 그 한계가 명확했다.
가령 부왕 시절 유럽의 종교적 분열은 그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어도, 영국만 하더라도 여전히 교회의 수장만 교황에서 왕으로 바꾼 상태였으나 16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제대로 국교회의 교리 자체를 뜯어고치며 대외적으로도 확실하게 범개신교권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전통적인 서유럽의 육상 패권국가였던 프랑스는 부군 카를로스 시절 이탈리아 전쟁에서 두들겨 맞아 그 위상은 축소 되었지만 여전히 무시못할 강력한 대국으로 군림하고 있었으나 국왕 앙리 2세의 어처구니 없는 사고사로 인해 내부로 부터 곪아가던 종교 문제가 순식간에 폭발하면서 반세기에 가깝게 국가 자체를 위그노 전쟁이란 파국에 빠졌다. 이런 대국적 상황에서 펠리페는 일단 탄탄한 내부 행정 체계와 통치 구조를 카톨릭 교회의 세속적 비호 세력이란 이데올로기적 권력과 결합시켜 대대적으로 재편하면서 자국인 스페인과 범카톨릭권 내에서는 강력한 지도력을 확립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카톨릭 교회 내에서, 카톨릭 교회 중심의, 카톨릭적 관점에 따른 국가건설과 국정운용'''이란 전제 조건 자체가 해당 안되는 네덜란드에서 이런 펠리페 2세의 추진력과 정치적 비전은 오히려 충분히 대화와 교섭으로 풀수 있고, 실제로 스페인, 스페인령 이탈리아에선 그런식으로 해결한 정치적 문제들을 오히려 더 불피우면서 장장 80년간 이어지며 결국 장기적으론 나머지 유럽사에선 심지어 그 서로 사이 험악한 영국, 프랑스도 일시적으로나마 손을 잡게 만드는 대재앙의 발단이 되었다. 그리고 잘나가는 놈은 다구리 놓아서 팬다는 유럽사의 너무도 유구한 법칙에 따라 일단 네덜란드에서 생긴 지정학적 균열은 17세기 종국에는 스페인 패권 자체를 무너뜨리게 될 '''네덜란드+잉글랜드+프랑스+스코틀랜드+개신교 신성로마제국 구성국+모로코'''라는 무려 루터교, 성공회, 칼뱅교, 카톨릭, 이슬람 5종파를 넘나드는 환상의 대스페인 동맹을 만들어버렸다.
종교적으로는 펠리페 2세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가톨릭 세력의 반격이 상당한 성공을 이루어 독일 등지에서 개신교 세력은 그의 치세 말엽에는 슬슬 후퇴하고 있었고, 지중해의 경우 비록 튀니지를 잃고 말았지만 레판토에서 오스만에게 한방 먹여줄 수 있었다.
그의 사후 범 유럽 가톨릭 세력의 구심점으로서 스페인의 위치는 확고했으며, 그의 선대에 인정받아 성장하기 시작한 예수회는 이제 유럽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톨릭 신앙의 반격의 명실부공한 선봉에서 맹활약하고 있었고, 심지어 스페인을 대단히 경계하던 적국 잉글랜드의 제독이었던 노팅햄 경 찰스 하워드마저 그를 "기독교 세계의 최고의 군주"라 부르며 경외감을 표했다. 물론 이로 말미암아 계속 가톨릭만을 고집한 나머지 그 다음 대에서의 30년전쟁 결과 신교 세력이 승리를 거두자 스페인의 영향력과 재정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하면서 다소 빛이 흐려지긴 했지만 말이다.
신대륙의 광활한 식민지에 대해서는 선대로부터의 콩키스타도르 약화책을 계승한 펠리페 2세 특유의 강고해진 중앙 집권과 관료제에 대한 고집으로 대대적인 행정 개편이 있었다. 그리하여 인디오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예수회 등 선교사의 대대적인 파견으로 피정복민에 대한 인도적 대안을 마련한 공로를 인정받기도 하며, 그에 더해 은 제련법을 비롯한 당대의 기술적 진보 덕분에 그의 치세 후기에야 드디어 신대륙의 엄청난 귀금속이 제대로 스페인 본토에 흘러들어오게 되었다. 아즈텍 정복, 잉카 정복 같은 신대륙에서 스페인 제국 성립 큰 정복 자체는 부왕 시절 이루어졌지만, 창업 못잖은 수성적 성과인 신대륙의 행정적 재구축과 장기 지배에는 펠리페 2세 시절 본격적으로 도입된 왕실 법원 (real audiencia), 대대적으로 뜯어고친 부왕령제도, 공무원 순환 밑 감사 제도(visitas)를 도입해 16세기 기술적 한계를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거리의 장벽을 극복하게 해준 각종 행정 개혁이 근간이 되었다.
그런 한편 카스티야와 역사 깊게 내려오는 라이벌 관계였던 포르투갈의 왕위와 해외 식민지를 넘겨 받아 동군연합을 이루어 광활한 영토를 관장하게 되었다.하지만 포르투갈과의 관계는 마치 예전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그러했듯이 실상은 독자적인 국론과 이해관계, 언어가 여전히 병존하는 상태였다. 표면적으로는 같은 왕을 모시지만 식민지도 제각각 나누어 경영하고 상호간에 간섭을 최대한 자제하는 형태였던 것이다. 펠리페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통합을 더욱 추진하고 싶었지만, 포르투갈 내에서 아비즈 왕가의 사생아였던 안토니오나 모계를 통해 역시 아비즈 왕가와 이어져 있었던 라누치오 파르네제 등 다른 경쟁자들 중심으로 반대 세력이 이미 생겼으며, 포르투갈 현지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꺾었어야 했던 처지 때문에 결국 포르투갈 또한 실질적인 통합이 아니라 동군연합만 이루어 지는 형태로 편입되었다.
이게 펠리페 당시만 하더라도 스페인 입장에서는 영토를 추가하니 좋고,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여전히 실질적으로 독립 국가인 셈이니 손해 볼게없었는데, 펠리페 사후 네덜란드와의 전쟁이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브라질과 아시아 무역항들로 확대 대는 등 서로의 불똥이 튀기 시작하면서 이애매한 정치적 관계 때문에 단적인 해결 또한 불가능해 지면서 결국 포르투갈 독립 전쟁과 이베리아 연합의 붕괴의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 동군연합이라는 느슨하고 애매모호한 형태의 통합이 가지는 한계 도한 명백해 진게 17세기 유럽이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건 이동군연합 제국들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강성했던 합스부르크 스페인이었는건 자명한 일이다.
이런면에서 동시대인들이 펠리페 2세를 좋게 보았던정치적 여건과 가치관이 현대에서는 확고하게 단절 된 가치관이란 점에서 펠리페 2세의 객관적인 평가는 힘든면이 있다. 동시대적 관점에서 신실함이라 칭송받으며 외교적으로 범가톨릭권의 수장으로서 스페인의 지위를 굳혀 준 종교성은 현대 와서는 신앙에 나라를 꼬라 박은, 당시에는존재 하지 않았던 세속주의적 실용주의 관점에서 결함으로 평가 받는다. 마찬가지로 현대에선 안도라 공국과 프랑스 같은 소국들의 예외적인경우 빼곤 볼 수 없으나, 당시에는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동군연합이라는[75] 굉장히 미묘한 근세 유럽 특유의 다국적 정치 시스템 아래서는 법학자 솔로르싸노(Juan de Solórazno)의 표현 처럼 "마치 나라마다 따로 군주가 있는 양"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군사적으로 확보한 이후 정치적, 제도적으로 통합하려고 했던 시도를 일체 하지 않았던걸 정치적 지혜와 공명정대함으로 평가했지만, 국민 국가의 관점에선 이건 확장도 아니고 정복도 아닌, 남의 나라를 먹고 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좋게 볼 수 없는 자질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는 창업보다 수성 군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더욱 체계적인 국가 통치 체제를 구축한 점에 있어서는 그도 충분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군주라기보다는 차라리 내각 책임자에 적합한 인물형으로, 만약 그가 왕이 아니라 수상이나 장관의 위치였다면 오히려 더 큰 업적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당대의 군주 중 펠리페 2세만큼 전근대 유럽 국가의 영욕을 모두 겪은 군주는 없다. 한편으로는 광신적인 신앙적 전쟁과 탄압 야기로 종교개혁 이후 크게 위축되었던 가톨릭 신앙의 반격을 주도하는 한편 예수회를 꾸준히 진흥시켜 영향력을 강화한 반면, 그러한 배타적 종교성에 기인한 탄압으로 인해 스페인의 국운을 꺾은 가장 큰 단일 요소라 할 수 있는 네덜란드의 상실 및 영국과의 불화를 초래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네덜란드는 육군이[76] , 영국은 해군이 보다 더 진흥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와 관련해서는 잘못된 정책으로 반란이 터지도록 동기 부여를 하면서, 또 스페인의 군사적 역량만큼은 여전히 유럽 최강 수준을 유지하여 반란을 일으킨 주의 과반수 이상[77] 은 탈환 및 유지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지켜낸 플랑드르에서도 전대에 비해 주민들의 반감이 더 올라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반면 아라곤과 포르투갈에서는 전통적인 정치적 형태를 존중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정치적 통합에 약진을 이루었는데, 또 그 종교적 열기는 어디 가질 않아 당시 발렌시아 지방 농민들의 다수를 차지했던 모리스코들을 탄압하여 대대적인 모리스코의 반란 또한 초래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무슬림들과 이단적 부류 역시 철저하게 발본색원해 추방 및 제거함으로써 쓸만한 인재들을 잃는 부작용도 초래했다. 또한 프랑스와 대대로 이어진 적대관계를 풀고 겨우 화친을 맺어놨음에도 그 직후 일시적인 내분에 뛰어들어 이를 이용해보려다 후대에는 더 큰 적을 지게 되었다. 훗날 프랑스가 30년전쟁에서 개신교 편에 붙은게 과거 스페인에 대한 국민적 앙금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이는 스페인이 가톨릭의 맹주를 점했다고 하나 역시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는 계속 이를 인정하지 않아 입지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결과를 냈다.
해외로 눈을 돌리면 신대륙 식민지 관리를 대대적으로 손보아 체계를 확실히 하는 한편, 비록 원주민들에게는 불행이었지만 필리핀에 총독을 파견하고 마닐라를 스페인의 태평양 기지로 삼아 대중국 무역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행하는 작업도 이룩했다. 펠리페 2세 치하 마닐라 건설로 인해 이전에는 발견해놓고 깃발 꽂아 놓은 수준에 불과했던 스페인 제국이 실제로 마닐라-아카풀코-멕시코 시티/베라크루즈-세비야로 이어지는 무역로로 단단하게 묶여진 거의 범지구적 경제, 무역적 실체로 성장했다.[78] 그러나 그런 한편으로는 지중해 너머의 요충지인 튀니지를 오스만에 빼앗기고 상술한 모리스코 유민들의 복수심으로 인해 북아프리카 바르바리 해적들이 대전성기를 맞으면서 오히려 스페인 지중해 해안과 이탈리아 해안 도시들에겐 큰 재앙을 초래했다.
이러한 결과 스페인이 신세계의 엄청난 부를 벌어들였음에도, 스페인 자체적으로는 바로 그 신대륙의 부가 오자마자 플랑드르,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대금 지출하느라 바쁜, 얼핏보면 먼 훗날의 종속이론스러운 경제적 식민지 관계에 빠져버렸다. 당시 이런 스페인 정치경제의 난국을 그리는 전형적인 묘사가 "베라크루스에서 몇달이나 걸려 도착한 금은보화를 적재한 배들이 세비야 항구에 잠시 멈추자마자 바로 앤트워프, 제노아로 가버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베네치아와의 경쟁으로 지중해 상업 패권이 심각하게 약해진 제노바와 독일(푸거 가문 등)의 자본가들을 스페인 편으로 끌어들여 외교적으로는 범지중해적 가톨릭 동맹을 형성할 수 있었으나, 재정적으로 당장 쓸 수 있는 자금줄을 얻은 대신 스페인 자체적인 경제적 부흥이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일각에선 펠리페 2세는 종교적 불관용과 잦은 전쟁, 이로 인한 국력 소진으로 인해 무굴 제국의 6대 황제 아우랑제브와 비교하곤 하는데 따지고 보면 전혀 적절하지 않다. 일단 아우랑제브가 본인이 싸지른 수많은 전쟁과 반란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아들인 바하두르 샤 1세가 좀 어찌 수습하려고 하다가 픽 죽어버리면서[79] 무굴제국은 이미 벌려진 사방의 전쟁을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하다 나데르 샤라는 걸출한 외적에게 후드려맞고 순식간에 델리 밖으로는 통치력을 행사하지도 못하는 식물제국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조 스페인 제국은 펠리페 2세가 네덜란드에서 거하게 삽을 푸긴 했지만 그 사후에도 명실부공한 서유럽 최강 국가이자 세계제국으로 패권을 최대한 박하게 봐도 1659년 프랑스와 전쟁을 패전으로 마무리한 피레네 조약까지[80] 유지했다.
무굴 제국의 경우에는 마라타 연맹이 탄생하게 된 내부 반란의 위협이란 면에서도 스페인 또한 1640년대에는 카탈루냐, 포르투갈, 나폴리, 시칠리아, 밀라노 전역에서 반란이 터지면서 진짜 스페인 제국 자체가 한방에 공중분해될 위기에 처했으나, 기본적인 역량 자체가 다른 지방들하곤 차원이 달랐던 포르투갈을 제외하곤 소모된 시간과 자원은 막대했지만 결국 모두 하나 둘씩 재정복하는데 성공하면서 16세기 처럼 독자적인 언터쳐블 원톱 패권에선 내려왔을지언정 주요 열강으로서 면모는 여전히 유지했다. 그리고 네덜란드를 대표적으로 일련의 뼈아픈 실책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패권이 유지되는데는 펠리페 2세가 이룩한 내부 행정 개혁의 역할이 지대했던 만큼 아무리 봐도 내치란 측면에선 좋게 봐주기 힘든 아우랑제브와 펠리페 2세는 직접 비교가 불가능하다. 전장에 직접 안뛰고 사무실에 처박혀 나라 다스리는 공무원 왕의 전형인 펠리페와 달리 평생 전장에서 치세의 영욕 모두를 겪은 아우랑제브는 차라리 부군 카를로스 1세의 언럭키 버전으로 보는게 더 적절하다.[81]
종합하자면, 근대적인 국민국가는 커녕 근세적 절대주의 왕조 국가와도 거리가 먼,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세적 사적, 종교적 보편제국에 가까웠던 당시 스페인 패권을 그나마 근대적 국가와 더 가까운 체계적인 행정 체계와 관료제 중심으로 돌아가는 스페인이란 확고한 중앙을 기반으로한 제국으로 개편하면서, 이 와중 내치에선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자국 내에서만 통하는 방식을 외부에서도 강압적으로 밀어붙히다가 큰 사고도 많이 친''' 외치에선 상당한 실패를 겪은 군주라고 볼수있다. 업적 또한 확실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 업적들 또한 중대한 부작용, 실패한 이면이 따라와 상당히 극단적으로 치세가 영욕을 왔다갔다 한 편이다.
그에 대한 평가야 어쨌든 당대 유럽 최강국이었던 스페인의 군주인 펠리페 2세의 비중은, 적어도 서유럽사에 있어서는 부왕에 버금간다 할 만하다. 그래서 아돌프 히틀러, 나폴레옹 다음으로 유럽사에서 관련 전기가 가장 많이 쓰여진 인물이다. 16세기 후반 유럽 최강대국 스페인의 영화와 영욕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긍정적인 면이든 비판적인 면이든 유럽사의 맥락 속에 그 위치와 영향력만은 큰 무게를 차지하고 있다.[82]
10.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image]
문명 6에서 스페인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 등장. 주인공이 가톨릭 선교사들을 수용하는 대가로 금은보화가 아닌 작물 씨앗을 요청하자 감동해서는 농작물 종자는 물론이고 우수한 종마, 건축가, 조선공 등을 바리바리 싸서 보내준다. 조선 천자 못지않을 정도. 그 덕에 견서사가 가장 먼저 방문한 국가가 에스파냐이고 돌아갈 때는 반드시 그에게 인사를 올리고 가는 것이 정례화 될 정도이며 사대부들에게도 여성문제 빼면 이상적 군주로 평가된다. 3차 견서사 때 정사로 온 이덕형이 그의 병세에 눈물을 보일 정도로 조선에서의 이미지는 호감 그 자체. 다만 아들이 원역사의 트롤 행보를 보이며 대 조선관계를 다 망치게 생겼다..만 다행히 이기빈이 중동에서 벌인 해적질 덕에 아들이 조선에 우호적 시선을 가지게 되면서 한동안 대 조선관계는 잘 유지될 듯하다.
10.1. 관련 문서
[1] 엘라자베트는 스페인식으로 이사벨라(이사벨)로 발음하기에 이사벨로 불리기도 한다.[2] 펠리페 2세의 조카딸이기도 하다.[3] 스페인 자체의 국운과는 별개로 이런 문화적 영향력은 펠리페 사후 오히려 더 꽃을 피워 17세기 중반, 벨라스케스, 바르톨로메 무리요, 프란시스코 데 주르바란 시절에 정점을 찍게된다[4] 사실 이는 아버지 카를 5세의 제국을 묘사하면서부터 나온 수식어이다.[5] 식민지인 네덜란드에서 거둬들이는 한 해 세금 액수가 스페인이 정복한 영토인 아메리카 대륙에서 캐오는 황금과 은으로 벌어들이는 수익과 맞먹었다. 그런 네덜란드가 독립해 떨어져 나가면서 스페인은 엄청난 경제적인 타격을 입었던 것.[6] Geoffrey Parker, J.H, Elliott 등[7] José Martínez Millán, Historia de Felipe II, rey de España (1998) 참조[8] 펠리페 4세가 그나마 알고보니깐 그리 일 안하고 손놓고 있던 군주는 아니더라 재평가받지, 펠리페 3세는 여전히 평가가 박하다. 아예 지체장애인이었던 카를로스 2세야 말할것도 없고[9] 물론 그보다 더 직접적인 이유는 앙리 2세의 급서로 인한 프랑스의 내분 때문이다. 또 생캉탱 전투에서 이기긴 했지만 그보다 30여년 전인 파비아 전투 수준의 완벽한 대승도 아니었다. 다만 나름대로 잘 나가던 앙리 2세의 코를 제대로 꺾어줬다는 점과, 생캉탱 전투 날짜가 성 라우렌시오의 축일이었고 이걸 기념하는 엘 에스코리알 궁전까지 건립하여 펠리페 정권 이미지에 혁혁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10] 위그노 전쟁 자체야 앙리 4세의 파리 입성과 낭트 칙령으로 끝났지만, 앙리 4세 본인도 일찍 암살당하고, 잇다른 정치적 혼란은 1620년대 라로셸 반란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 시절부터 프랑스는 내전 당시 스페인의 개입에 대한 복수심은 충만했지만 이런 내부 정리 문제때문에 30년 전쟁 터질때까지 본격적으로 스페인에 칼을 들이대지 못했다[11]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풍족하고 우아한 유럽 귀족 문화의 정점에 있었던 벨기에와 부르고뉴에서 자란 카를로스 1세와 그 측근들이 처음 스페인에 왔을땐 왕실 자산의 소박함과 서민들 먹는거보다 좀 낫고 귀족들에 비해서는 딱히 나을것도 없는 왕의 식탁 등 질박한 궁정문화에 경악했다[12] 물론 네덜란드인이기는 하지만 펠리페 2세의 초상화를 그린게 루벤스이기도 하다.[13] 사실 메리는 펠리페보다 나이가 10세나 많은 데다가 못생겼기 때문에 펠리페는 메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메리와의 결혼식을 앞두고 그녀의 초상화를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과장해서 그린 화가한테 펠리페가 결혼식 당일, 메리를 만나보고는 충격을 받고 화가 나서 (화가한테) 욕설을 퍼부었던 일도 있었다...[14] 카를 5세 본인도 그 에르난 코르테스를 파면하고 직접 총독을 임명해 파견하는 등, 말년에 콩키스타도르 개혁에 적극적인 박차를 가했다.[15] 물론 선왕 카를 5세 역시 그 전대와 비교하여 콩키스타도르의 폐해를 개혁하려던 흔적이 역력했던 것 역시 사실. 다만 온전히 스페인 쪽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아들에 비해 광활한 영지를 위협하던 무수한 외적들과 종교적 내분 수습에 더 우선순위를 뒀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16] 까씨께(caique)라고 하며, 이 의미에서 파생되어 현대에서는 마치 우리나라의 김대중, 김영삼 같은 정계 파벌의 보스들을 뜻하기도 한다.[17] 물론 종교 문제가 걸린 네덜란드는 예외다. 펠리페 2세에게 종교문제는 애초에 타협의 대상 자체가 아닌지라 네덜란드는 다머지 속령들과 동일선상에서 보기 힘들다[18] 당연한 말이지만 신대륙에서 콩키스타도르들이 임의로 사병들 끌고 시작한 정복전쟁들은 별개이다. 이건 애초에 스페인 정부가 직접 관여하고 지시한것도 아니고, 이 당시도 부군 시절처럼 신대륙 확장은 스페인 중앙 정부가 아니라 면허 받고 자기 돈으로 군대 모은 콩키스타도르들이 사적으로 벌이는 식민 사업의 형태로 이루어졌다.[19] 1두카트는 순금 3.5g이다.[20] 당시 스페인 GNP의 170%였다고 한다.[21] 다만 이 점은 당시 체계적인 검열 시스템의 부재, 금서 목록을 총괄하는 이단심문국의 관료제적 허술함, 그리고 검열의 실질적인 비집행으로 인하여 서류상에만 남아 있는 법이 되었다. 당장 이단심문국의 검열은 스페인 내부의 인쇄소에만 손을 댈 수 있으니, 금서 목록에 등록 된 책이 필요하면 바다 건너 이탈리아나 플랑드르의 인쇄소를 통하면 아무 문제 없이 구할 수 있었다는 소리. 어떻게 보면 괜히 불필요한 오명 하나만 추가한 꼴이 되었다.[22] 본명은 아니고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 수도자를 가리키는 말이다.[23] 왜냐하면 만일 북아프리카의 반란에 스페인이 군대를 보내 직접 개입하게 되면, 이 일이 오스만 제국을 자극하여 또 다시 막대한 돈을 들여 오스만 제국과 전면전을 벌일 위험으로 번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24] 다만 이건 상당히 결과론적인 관점이다. 불과 1년 전에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 해군의 주력인 무적함대가 몽땅 날라간 상황에 펠리페 2세로서는 북아프리카의 무어인 반란군을 돕기 위해 군대를 보내고 싶어도 그 군대를 수송할 함대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당시 지중해 전선은 스페인 입장에선 지킬것만 더럽게 많지 막상 얻을수 있는 이익은 아무것도 없는 전역이었다. 특별한 자원도 없고, 토착 현지세력도 신대륙 인디언들과는 비교도 못하게 정치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기반이 강한데 안그래도 사방팔방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 스페인 입장에선 북아프리카-지중해는 레판토 해전 같이 카톨릭 세계의 수장이란 이데올로기적 명분이 크게 걸려있을때 빼곤 전혀 취해봐야 이득이 없는 지방이라 애초에 해당 지역으로 본격적인 확장을 할 생각 자체를 안했다.[25] 동네 수도원 수사들이 수도원에서의 방 배정으로 막 싸우다가 동시대 최대, 최강의 권력자 중 하나였던 스페인 국왕에게 직접 중재를 부탁한다니 웃기는 야사 같지만, 제프리 파커의 펠리페 2세 평전 2014년 개정판인 Imprudent King: A New Life of Philip II에 나오는 실화다.[26] 영국, 네덜란드, (내전 후의)프랑스, (합병 이후 독립 투쟁을 전개한)포르투갈 등. 부왕 시절 헨리 8세 치하의 영국만 하더라도 문자 그대로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 때문에 생긴 간판만 바꾸었지 실질적인 알맹이는 여전히 가톨릭 국가였으며, 아직 개신교와 가톨릭의 대립이 정치적, 국제적 대립으로 발전하지는 않은 상태여서 타협의 여지가 남아 있었지만, 영국 국교회 자체가 에드워드 6세의 치세를 겪어 대륙 칼뱅주의를 본딴 종교적 변혁이 급격화 되면서 두 나라는 결국 영영 결별하고 만다. 그와 반면 아들 펠리페 2세가 다스린 16세기 후반은 독일과 북유럽에서의 루터교회의 입지 확립과 결정적으로 급격한 칼뱅주의의 대두로 인하여 종교 문제가 전유럽적인 정치 문제로 부상했기 때문에 기존의 외교 구도 자체가 훨씬 더 양극화 되어서 외교 활동 자체가 더 제한적이었다. 그래도 사보이, 제노아, 토스카나 등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들은 여전히 펠리페 2세의 시대에도 무리 없이 스페인 영향권에 편입되었으며, 부왕 시기의 교황과의 대립 또한 펠리페 2세가 윽박지르고 교황이 데꿀멍 하는 형태로나마 갈등이 해소 되었다. 근본적으로 16세기 전반과 후반의 유럽의 여건 자체가 확 바뀌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27] 막상 서류왕 답게 본인이 쓴 어마어마하게 많은 공문서, 편지들과, 일 하는 시간은 긴데 막상 집중해서 빨리 처리하는 효율은 더럽게 떨어지는 사람답게 쓰라는 공문서에 쓸대없이 자기 기분, 감정 상태, 방금 하던 일 같은 쓸대없는 시시콜콜한 사적 내용은 많이 적어놔서 역사학적으로 보면 오히려 사생활과 알려진게 풍부한 편에 속한다(...)[28] 펠리페 2세가 총애하던 비서로, 펠리페 2세의 명에 따라 이복동생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과 정치적 암투를 주도하다가 돈 후안의 비서가 정치적 살인을 당하고 이 일이 궁정 내의 스캔들로 커져 자신에게 체포령이 떨어지자 펠리페 2세와 스페인 궁정에 대한 비밀 자료+유언비어를 가지고 프랑스로 튀어 비밀들을 넘겼다. 일각에선 돈후안의 군사적 능력을 높이 사 차라리 이 사람이 펠리페 3세 대신 스페인 왕위를 이었으면 어쨋을까 상상하기도 하는데 돈후안은 부친에게 인정은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사생아'''다. 능력주의로 정부를 구성하는 현대도 아니고 봉건 왕조에서 군사적 재능좀 있다고 해서 적장자를 내치고 국왕의 이복형제 사생아를 후계자로 삼는다는거 발상 자체가 안통한다[29] 낭설로밖에 보이지 않는 근친상간, 아들 살해 등에 대한 막장 드라마성 유언비어를 그대로 여과 없이 써놓아 후대에 생긴 펠리페 2세를 둘러싼 음험한 분위기의 형성의 소스가 되었다.[30] 미국 헌법과 망국 직전 발표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5월 헌법 다음으로 세계에서 3번째로 이른 자유주의적 헌법이다[31] 그리고 이런 르네상스-근세 저항권 사상의 계보는 살라망카 학파 소속 학자였던 도밍고 데 소토에서 후배인 페르난도 바스케스, 그리고 바스케스를 적극적으로 읽으며 참조한 네덜란드 법철학자 휴고 그로티우스까지 이어져 결국 훗날 영국의 존 로크가 완성시키게 된다. 즉, 따지고보면 네덜란드인들이 일으킨 반란을 정당화할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것도 사실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받았던 스페인 학자들이었던 셈이다.[32] 애초에 집필의도 자체가 왕세자 재왕학 교육서로 쓰시라고 쓴 책이었다[33] 동시대 코뮤네로 반란에 참가하진 않았지만 호의적인 서술을 남긴 알론소 데 카스트리요 수사가 집필한 "공화국론 (Tractado de la República)"에서 나온 주장이다[34] 카를 5세도 옛 이슬람 성터인 알함브라 궁전 내에 자신의 이름을 딴 궁전을 건립했다. 그러나 후기엔 이슬람 건축에 감명을 받았던지 더는 이상 이슬람 유적을 훼손하지 못하게끔 단단히 못을 박았으며 그 결과 많은 유적이 지금까지도 보존될 수 있었다.[35]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는 소싯적의 통치 경험과 모계의 영향으로 알아듣기는 다 알아들을 수 있었으나 말하기가 안 됐고, 프랑스어는 그나마 말하기가 가능했으나 성격 자체가 부끄러움이 많아 발음을 망치는 게 부끄러워 일부러 회화를 안했다. 결정적으로 치세의 대부분인 40년간을 자국 내에서만 보낸 탓에 뒤로 갈수록 그 정도는 더 악화됐다. 이 말은 결국 스페인어 하나밖에 제대로 못 했다는 건데, 스페인어는 불가타 라틴어의 방언이라 같은 불가타 라틴어의 방언인 이탈리아어, 포르투칼어와 어느정도 의사소통이 됐고(정확히는 카스틸리안어), 그나마 좀 이질적인 프랑스어도 당시에 "국제어"라서 누구나 어느정도 회화는 가능했는데다가 같은 로망스어 화자로써 매우 쉬웠다. 한마디로 네덜란드어 같은 게르만계 언어는 하나도 못 했다는 말.[36] 이런 걸 '장엄복수형'이라고 한다.[37] 교회박사 성 이시드로와는 동명이인[38] 어느날 성 이시드로는 밖에서 열심히 밭일하고 있는데 마누라가 깜빡한 사이 애가 우물에 빠졌으나, 하나님의 기적으로 우물물이 스스로 우물 위까지 차올라 아기를 건져 구할수 있었다는 전승이다[39] 병환과 가족 일 때문에 못 했다. 그리고 이 놓친 행차가 그의 평생을 괴롭히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터지는 것에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다만 이후의 중요한 원정군에도 자기 자신만은 끝까지 쏙 빠지면서 대신 누가 봐도 뻔히 한심한 아들을 국왕 대리로 투입한 것을 소심한 면모로 들 수는 있다. 이는 부왕이 겐트에서의 반란 당시 몸소 친정하는 의욕을 보인 것과 대조적인 점.[40] 부왕의 재위 초기에 터졌던 카탈루냐 직공 길드, 카스티야 코무네로스의 봉기에서 반란의 주체였던 도시민들이 아예 봉건적인 사회 형태 자체를 뒤집으려는 사회 혁명적 슬로건을 내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귀족들 다수가 반란군들과 국왕군 사이에서 저울질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나마 카를로스 1세의 성공적인 대외 정책으로 고양된 스페인인들이 이러한 국왕의 부재를 용인하고 지지해 준 것이었으며, 이 때문에 카를로스 1세에게 후계자는 반드시 스페인에서 자란 '토착 스페인인'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던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에 대한 종교적, 정치적 탄압의 시초나 수 많은 전쟁으로 인한 빚이나 펠리페 2세가 짊어져야 했던 짐들 중 다수의 시초는 부왕에게 물려 받은 것 또한 적지 않다.[41] 1556년에 터진 성상파괴 사건도 남부지방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현 프랑스령 Hondschoote)[42] 북부가 개신교 지역으로 완전히 전환된 것은 1578년에 이르러서였다.[43] 과묵한 성격으로 말을 대단히 아껴 침묵공 빌렘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다만 나중에 스페인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와중에 정말 칼뱅교로 개종하기는 한다. 특히 준비된 친합스부르크 귀족으로 어렸을적부터 합스부르크가문과 시간을 함께 보냈었다.[44] 세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가톨릭 신앙이 강했던 귀족이었다. 그래서 알바 공이 자신의 목을 자를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45] 네덜란드의 경우도 그렇고, 베네치아를 포함해 근세 유럽의 이러한 상업 도시들은 종교적 관용이 인정되는 몇 안되는 경우였다. 여러 종교를 가진 비즈니스 파트너와 만나는데 특정 종교 하나만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46] 훗날 베토벤이 작곡한 '에그몬트 서곡'이 바로 이 사건을 주제로 한 것이다.[47] 무려 2년 가까이 월급을 한 푼도 못 받는 처지라 스페인군 병사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를듯이 높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병사들이 월급을 못 받으면 당장 먹고 살기 위해 약탈을 벌일 수밖에 없다.[48] 남부는 말할 것도 없고, 북부에서도 하를럼 등이 싹 털려버렸다.[49] 수은을 사용하는 아말감법.[50] 포토시 은광은 그 전까지 인디오가 쓰던 재래식 제련법을 모방해야만 했었다. 생산성이 떨어졌던 것은 당연한 일.[51] 사실 메리 1세도 어릴 때는 미인이라는 평을 들었지만, 어머니 아라곤의 캐서린이 앤 불린에게 밀려 왕비 자리에서 쫓겨난 후 공주 지위를 박탈당하고 아버지 헨리 8세한테 박대당하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 거기다 건강도 좋지 못했고, 특히 자궁이 안 좋아 평생 힘들어했다. 또한 시력이 나쁘다 보니 자연히 얼굴을 찌푸리게 되어 인상이 나빠졌다.[52] 성적 상대로서 호감을 가졌는지는 알 수도 없고, 사극 쓸 것도 아니면 중요하지도 않으나, 일단 군주라는 동업자에 배짱이 두둑했던 엘리자베스 1세를 군왕의 자질을 가진 호걸로서 높게 평가했다[53] 당장 당시 잉글랜드의 방어 계획만 보아도 스페인군의 상륙 지점을 완전히 잘못 예측 하는 등 스페인 상대로 제대로 된 전면전을 치를 능력이 전무하였다[54] 당시의 노예상인이나 탐험가, 해적은 무시할 자들이 아니다. 드레이크는 스페인의 군항 포트 로얄을 점령하고 산토도밍고 서부의 토르투가 항을 해적항화 하였고 존 호킨스는 당시 부실하던 잉글랜드의 재정을 크게 책임지는 상인이었으며 월터 롤리는 훗날 아크 로얄 호를 건조하는 뎁포드 조선사를 관리하게 된다.[55] 영미권의 전통적인 시각에선 이때 잉글랜드까지 상대하면서 까먹은 국력이 결국 훗날 스페인 패권 몰락의 단초가 되었으니 길게보면 영국의 승리로 간주하려는 성향이 있지만, 이 시절 잉글랜드가 백년전쟁 이후 거의 150년만에 처음 대규모로 대륙의 전쟁에 개입하면서 까먹은 전비 때문에 청교도 혁명과 삼왕국전쟁이란 영국사 최대 최악의 내전을 유발한 왕실과 의회의 재정 싸움이 시작됬으니 이 또한 어불성설. 조선이랑 싸운이후 도쿠가와가 도요토미를 이겼으니 임진왜란의 승자는 일본이란것과 마찬가지인 소리이다.[56] 그 영란전쟁도 항목 보면 나오지만 사실 잉글랜드가 자체적으로 승리한게 아니라 그 루이 14세의 프랑스한테 집중적으로 얻어맞아 국력이 소진된 네덜란드에게서 어부지리로 얻어온것에 가까웠다. 영란전쟁 자체에서 영국이 이겼다기보단 동시대 대불전쟁에서 탈진한 네덜란드의 공백을 영국이 점차적으로 매꾼것에 가깝다[57] 하지만 이 신대륙에서 캐오는 황금과 은은 스페인 본국에 투자되지 못했고, 스페인이 무기를 사들이는 이탈리아 상인들한테 무기 값으로 지불되어 대부분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그래서 스페인이 힘들게 신대륙의 황금과 은을 가져와도 정작 별로 이득을 보지 못했다...[58] 막시밀리안 2세의 딸이고 막시밀리안은 펠리페와 4촌이니 부계로는 5촌 조카, 모계로는 펠리페의 여동생이 막시밀리안의 부인이니 외조카[59] 1두카트는 순금 3.5g으로 주조한 금화이다.[60]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80년 동안 지속돼서 스페인의 국력을 갉아먹는 밑 빠진 독 역할을 했다.[61] 또한 네덜란드의 독립군들은 일명 고아센('바다의 거지'라는 뜻)이라 불리는 함대를 이끌고 스페인의 항구를 봉쇄하거나 신대륙에서 황금과 은을 실어오는 스페인 보물선을 마구 약탈하여 스페인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62] 이러한 팩트를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 한 에피소드로 다뤘다.[63] 수 백만의 희생자를 남긴 것 치고는 뭔가 허전한 위그노 전쟁의 이러한 결말은 과연 그 뒤끝이 상당히 심하여 이후 프랑스 정계 또한 여전히 세력이 강한 친 가톨릭, 친 스페인 신실파와 위그노 세력, 그리고 종교와는 상관 없이 왕권 자체를 강화하려고 하는 앙리 4세와 그 아들 루이 13세의 대결 구도로 이루어져 결국 1620년대 까지 위그노들의 반란을 몇차례 진압하고 리슐리외 추기경이 신실파와 그 수장 마리 드 메디치를 숙청하고 종교적 관용을 선포하면서야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졌다.[64] 2번째 부인인 메리는 위로 11세, 3번째 부인인 이사벨라는 아래로 18세, 4번째 부인인 안나는 아래로 22세 차이이다.[65] 후안 마누엘은 16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는데, 부인 후아나가 낳은 아들이 이후 포르투갈의 왕이 되는 세바스티앙 1세이다. 세바스티앙 역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66] 단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없이 출생 순으로 계승권을 주는 체계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아들이 우선이고, 아들이 없을 경우에 한하여 딸에게 계승권이 돌아가는 체계였다.[67] 후아나와 캐서린의 어릴 때 모습이 매우 닮았다.[68] 헨리 8세가 메리의 어머니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려고 교황의 승인을 받으려 했을 때, 교황은 카를 5세의 눈치를 보느라고 그의 이모인 캐서린과의 혼인무효를 허락하지 않았다.[69] 엘라자베트는 스페인식으로 이사벨라(이사벨)로 발음하기에 이사벨로 불리기도 한다.[70] 메리 스튜어트는 태어난지 5일만에 아버지 제임스 5세를 잃고 여왕이 되었는데, 메리 스튜어트의 어머니인 마리 드 기즈는 프랑스 왕족으로 자신의 친정으로 아직 어린 메리를 보내 양육을 시켰다. 메리 스튜어트는 왕위 계승자의 부인으로 프랑스 궁정에서 자라게 된다. 어린시절을 내내 화려한 프랑스 궁정에서 보내다가 남편이 사망하고 돌아간 스코틀랜드의 황량함에 흠칫 놀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71] 이 썰로 만들어진 것이 오페라 돈 카를로스. [72] 펠리페 2세의 조카딸이기도 하다.[73] 이 시기에는 유아사망률도 높았고 특히나 왕족 같은 경우 직접적인 육아를 부모가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의 부모 자식 개념과는 약간 관계가 달랐기 때문에 매우 특별한 일이였다.[74] 쉽게 말하면 빚 못갚겠으니 항의하려면 우리 스페인 테르시오 보병의 창끝에 대고 항의하시오(...)란 논리가 통했던 시대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 빛 자체도 액수는 무시무시하지만 대부분 국내 부채인 현대 일본마냥 스페인이 빚을 때먹은거 보다 스페인 제국이 제공하는 군사력, 외교적 동맹 네트워크가 무너지는게 훨씬 더 위험해서 궁극적으론 을이 될수 밖에 없는 제노바, 스페인령 플랑드르 상인들에게 진 빚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말이야 이리 쉽지 한번 파산 선언할때마다 당장 잘나가던 공세도 한방에 올스톱 되는등 실제 피해도 막심했지만, 어쨋든 기본 군사력과 정치력만 어느정도 되면 국가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건 막을수 있었다.[75] 실제로 크킹2를 보면 아주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거지만, 중세적정치적 전통, 법률이 여전히 팔팔히 살아 숨셨던 16~17세기 유럽인들 대부분은 '자기 나라'의 군주를 '다른 나라'와 '''공유'''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단일 국체로 보는 프랑스의 예만 들더라도 브르타뉴 공국은 16세기 중반까지, 나바라 왕국은 17세기 까지 실질적 독립을 유지했고, 흡수 이전 토착 세력의 실질적 자치는 대혁명 이전까지 쭉 이어졌다.[76] 스페인이 자랑하던 테르시오를 붕괴시킨 선형진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77] 이 당시만 하더라도 네덜란드에서 인구도 많고 부유한 지역은 현대 네덜란드가 아닌 벨기에 지방, 즉 정치적 수도였던 브뤼셀, 알프스 이북 유럽 최대의 무역항이었던 엔트워프 등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스페인이 탈환한 지역들은 독립 전쟁 과정에서 다 파괴되어 버려 네덜란드의 세력 밸런스가 결정적으로 북부로 넘어가 버렸다.[78] 포르투갈 동군연합 이후 명목상으론 이미 포르투갈이 다져놓은 아프리카 해안-인도양 루트도 차지하게 되었지만, 상술했다시피 독립된 무역망의 유지는 왕위 계승 협상 과정에서 포르투갈인들이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라 실질적으론 여전히 따로 별개의 무역 시스템으로 돌아갔다.[79] 70대에 죽었으니 결코 요절은 아니다. 아버지 아우랑제브가 더럽게 장수한것일 뿐[80] 이때 원래 중세 아라곤 왕국, 그리고 본토 스페인의 유일한 피레네 산맥 이북 영토인 로세요 (스페인어: 로세욘, 프랑스어: 루시용)와 세르다냐 (세르다뉴)를 빼았겼고, 이베리아 반도 본토의 땅을 빼앗겼다는 상징성 때문에 흔히 스페인 패권 몰락 기점으로 삼는 사건이다[81] 게다가 그 아우랑제브 본인도 갈수록 마냥 종교적으로 불관용적이기만 했던건 아니라는 관점이 더 주류가 되고 있다. 아우랑제브 종교 정책의 문제점은 펠리페 2세처럼 진짜 아예 전국적 강제개종을 밀어붙히는 동시대 유럽의 교법화적 불관용이 아니라, 같은 종교인 무슬림을 비롯해 하필이면 지역 유지들과 귀족들의 특권과 권력을 마음대로 무너뜨리는 정치적 과오에 더 가깝다[82] 일례로 현대의 미국에서는 이니셜의 나열로 KPCOFGS인 종속과문강문계의 명칭을 외울때 King Philip came over from great Spain으로 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