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규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영규는 1895년 6월 7일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읍 불효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1월 일본 도쿄에 있는 와세다대학 (조도전대학: 早稻田大學) 경제학부에 재학중 조선기독교청년회의 서기로 선출되어 재일유학생 단합을 위해 활동하면서 각종 연설회, 집회 등을 통하여 민족정기와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시대사조(時代思潮)를 전파하여 조서민족의 진로를 자각케 하는데 주력했다. 그해 2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가 세계에 천명되자, 그는 이에 고무되어 회원 40여 명과 함께 독립선언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각 부서 연락과 서무를 맡아 활동했다.
1919년 2월 7일, 장영규는 백관수(白寬洙)의 집에서 김도연(金度演)·이종근(李琮根)·최원순(崔元淳)·최승만(崔承萬) 등과 만나 독립선언으로 주동자가 체포될 때 후속 거사를 주관하도록 위임받았다. 이후 그는 2월 8일에 3천여 명의 유학생이 도쿄 신전구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집합케 해 2.8 독립선언이 발표되도록 지원했고, 2월 12일 도쿄 YMCA 기숙사에 있는 최승만의 방에서 변희용(卞熙瑢)·장인환(張仁煥) 등과 함께 제2차 유학생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여 그 준비단계로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소집촉진부 취지서를 600여매를 등사해 유학생들에게 배부하고 시위를 전개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경찰에게 탐지되어 체포되고 말았고, 이후 몇달간 옥고를 치르다 풀려났다. 하지만 1924년 4월 일경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가 더욱 극심해져 일본과 국내에서 피신 생활을 지속해야 했다. 8.15 광복 후에는 광주에서 조용히 지냈고 1970년 6월 2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장영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