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군주

 

재령군주(載寧郡主, 1409년 ~ 1444년?)는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조선 태종의 첫째아들(장남)인 아버지 양녕대군의 왕세자 시절에 어머니인 숙빈 광산 김씨와의 사이에 장녀로 태어났다.
양녕대군은 1418년에 폐세자가 되어 동궁에서 쫓겨난 후에도 계속 풍류로 세월을 보내면서 생활의 절도를 잃었고, 따뜻한 가장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어머니 숙빈은 광산군 김한로의 따님으로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한 후 처음에는 존귀한 지위를 누렸으나, 부군의 폐빙에 따라 삼한국대부인으로 강봉되었고, 그 후 다시 수성부부인으로 지위가 낮아졌다. 양녕대군과 함께 광주와 이천에서 생활할 때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부군을 내조하고 자녀들을 보육하며 불운하게 일생을 마친다.
1422년(세종 4) 5월에 부왕 태종이 승하하자 세종은 무엇보다 먼저 광주에 방치된 양녕대군을 이천으로 양이하여 좀 더 자유스러운 생활을 하도록 조치했으며, 아울러 과년에 다다른 질녀 재령군주를 궁중으로 데리고 가 중전으로 하여금 종실의 규방 예속을 가르치도록 배려했다.
1425년(세종 7) 연초가 되자 세종은 과년이 된 양녕대군의 장녀에 대한 혼인을 서둘렀다. 기우자 이행선생의 손자요, 제학공의 외아들인 돈녕공 이자(李孜)를 사랑하는 질녀의 배위로 간택하여 혼사를 직접 주선한 것이다. 왕실의 근친이라 하여 질녀에게는 전의현주의 외명부 봉직을 내리었고, 질서(姪壻)에게도 가선대부를 제수하여 상응하는 품계를 내려주었다. 그리하여 세종의 특명으로 그 조카사위인 돈녕공 이자에게 돈녕주부라는 벼슬을 초수하였고, 이후 때마다 보직과 품계를 올려주어 마침내 자헌대부 지돈녕수사라는 정경의 반열에 이르게 하였다.
1427년(세종 9)에는 자손이 귀한 가문에 첫아들 중화공을 낳아 세가의 뿌리를 튼튼히 함에 세종은 그 질녀의 노고를 기특하게 여겨 치하하고 증손을 얻게 된 기우자 선생에게도 사람을 보내 기쁨을 전하기도 했다.
1431년(세종 13) 10월에 세종은 다시 질녀의 봉직을 전의현주에서 왕세자의 적녀(嫡女) 품계에 준하는 재령군주로 승봉(陞封)하는 특전을 내려 또 한 번 가문의 영광을 입었다. 이때 양녕대군의 맏아들 이개에게도 순성군의 봉호를 내려 함께 욍은(主恩)을 입었는데, 세종은 궁중으로 맏형 양녕대군을 초청한 자리에서 그 자녀들의 경사를 치하하고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