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부부인

 


1. 개요
2. 생애
2.1. 세자빈 시절
2.2. 폐세자빈 된 이후


1. 개요


隨城府夫人 金氏
광산 김씨(光山 金氏) 김한로(金漢老)와 부인 전씨의 딸.
왕세자 이제와 혼인하면서 숙빈에 책봉되기도 했지만 남편이 폐세자되자 그녀도 폐빈되어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 되었다. 세종14년에 국대부인이 부부인으로 개칭되면서 수성부부인(隨城府夫人)이 되었다.

2. 생애



2.1. 세자빈 시절


남편이 공부를 안 하고 매사냥을 하고 술을 마시거나 여자, 그것도 기생들을 후궁으로 들이는데, 전 중추부사 곽선의 첩, 어리를 납치해 궐로 데려오는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부왕과 갈등을 일으켰다.
태종이 양녕대군이 저지른 사고들을 마무리 짓고자, 그와 어울리던 패거리를 벌주고, 그 중 몇은 파직시키자 양녕이 곡기를 끊은 적이 있었는데, "너는 어리지도 않은데 지금 어째서 부왕(父王)께 이와 같이 노여움을 끼치느냐? 이제부터는 조심하여 효도를 드리고 또 밥을 들도록 하라"[1]며 원경왕후가 잔소리를 하거나, 심지어는 실록에 보면, 태종이 지신사(知申事) 조말생을 은밀히 불러 세자가 공부를 않고 놀기만 좋아하며 황음(荒淫: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하는 것이 심하니 어쩌면 좋으냐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한탄을 했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이다.[2]기사
그럼에도 양녕대군은 어리라는 여인과 나누던 밀회[3]가 발각되어 태종으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듣고, 김씨의 친정아버지,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가 태종으로부터 문책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를 '''장인의 집'''에 숨겨두고[4], 게다가 어리가 양녕대군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이 드러나 태종이 대노하여 질책하자, 양녕은 "'''아바마마도 첩 많으면서 왜 내가 축첩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까?'''" 라며 반박하는 내용의 수서(手書)를 올려 태종을 당황케 한 일도 있다
그렇게 양녕대군은 사사건건 자기 아버지에게 계속 대들고 반항했는데, 김씨는 당시 어떻게 행동했는지 기록된 것이 없지만, 아마도 시부모님에게 고개도 못 들 정도로 죄송하고 민망했을 것이다.
게다가 남편이나 한두명도 아닌 첩실들이나 꼴도 보기 싫었을테지만 남편을 말리지 못한 대가로 김씨는 폐세자빈이 되고 친정아버지 김한로는 양녕대군의 장인이란 이유로 유배를 가게된다.

2.2. 폐세자빈 된 이후


이후 시동생아랫동서가 세자, 세자빈이 되는데, 외척을 알레르기만큼이나 싫어하던 태종은 심온을 고문하다가 처형하고 소헌왕후의 친정어머니와 자매들은 노비가 된다.
어떻게 보면 김씨를 포함한 친정 김한로의 입장에서는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어 다행이라고 할 수도. 하지만, 양녕대군은 죽을 때까지 비행을 저질렀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죽음 이후, 세종의 즉위 후부터는 그 강도가 더 심해졌는데, 안 그래도 과거 왕세자였고 현 국왕의 친형이라는 이유로 관찰과 감시의 대상이 되었는데도, 자신의 며느리까지 범하는 등 인간 이하의 행위까지 서슴치 않았고 이에 충격을 받아 아들이 목을 매 자결할 정도로 계속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 현대식: 네가 어린애도 아니고 왜 자꾸 아버지 화나게 해? 나잇값 좀 하고 가서 이나 먹어![2] 태종 35권, 18년(1418 무술/ 명 영락 16년) 3월 6일 병진.[3] 원래 '''다른 사람'''의 첩이었던 것을 양녕이 빼앗았다.[4] 그러니까 내연녀를 본처의 친정에다 숨겨놨다는 얘기다. 축첩이 당연시되던 당시 기준으로도 이는 도를 넘은 경악스러운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