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

 



'''태종조 조선 왕세자
양녕대군 | 讓寧大君'''

'''작호'''
왕세자 → 양녕대군(讓寧大君)
'''시호'''
강정(剛靖)
'''본관'''
전주(全州)
'''이름'''
제(禔)
''''''
후백(厚伯)
'''부왕'''
조선 태종
'''모후'''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부인'''
수성부부인 광산 김씨(光山 金氏)
'''자녀'''
10남 17녀
'''묘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재위
기간
'''
'''조선 왕세자'''
'''음력'''
1404년 8월 6일 ~ 1418년 6월 3일
'''양력'''
1404년 9월 10일 ~ 1418년 7월 6일
(13년 9개월 26일 / 5,048일)
'''생몰 기간'''
'''음력'''
1394년 미상 ~ 1462년 9월 7일
'''양력'''
1394년 미상 ~ 1462년 9월 29일
1. 개요
3. 여담
3.1. 명필
3.2. 일화
5. 후손
6. 대중 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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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맏아들이자 세종의 큰형. 엄밀히 따지면 태종과 원경왕후 부부의 넷째 아들이다. 태종은 양녕 위로 아들 3명을 더 두었지만, 이들은 모두 어린 시절[1]요절했기 때문이다.
아동용 역사만화 등에선 최대한 건전하게, 본인이 능력이 모자라고 동생인 충녕대군의 능력이 더 뛰어남을 알게 되어, 일부러 큰 뜻으로 놀고 날뛰면서 폐세자가 된 뒤,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한 대인배 정도로 미화되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면, 집안 배경과 자신의 권력으로 평생 동안 온갖 유흥에 패륜을 일삼다가 동생 세종의 장손인 단종을 몰아낸 수양대군이 단종을 죽이는 데까지 앞장서던 소인배에 불과한 인간이다.
후술하겠지만, 세종이 비행을 끝까지 눈감아주고 무엇보다도 목숨과 권력까지 보장해줬던 것을 감안하면 '할아버지 이성계의 무인 기질의 유전자를 너무 많이 가지고 태어난 왕족'이라고 하는 수준 정도가 미화의 한계다. 사실 이러한 미화는 세자가 개망나니라 폐위되었다는 흑역사를 덮기 위해 조선 왕조 시절부터 벌인 역사 깊은 행동이었다. 이러한 원인으로는 자식 셋을 낳자마자 잃었던 이방원민씨 내외에게 양녕은 왕자이기 이전에 너무나 특별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너무 오냐오냐해서 교육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주로 제기된다. 실제로 양녕대군의 도를 넘는 악행에 태종은 결국 그를 폐위할 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양녕대군은 세종이 인내심 많고 성정이 어진 인물이라 예외로 천수를 누릴 수 있었던 경우에 속한다. 왕정국가의 후계자가 폐위되어 낙마하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숨죽여 살면서 권력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사도세자나 광해군의 폐세자 이지의 경우처럼 즉각 유배 혹은 제거되는 것이 보통이다. 대개는 반대파에 의해 옹립되어 반역의 빌미가 되는 등 후환이 되기 때문. 실제로 태종은 양녕대군이 후환이 될 것 같으면 죽여도 좋다는 유언을 남겼고 양녕은 그 후에도 끊임없이 사고를 쳐서 신하들로부터 양녕을 벌주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참고로 세자 시절에는 양녕대군으로 불리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 대군(大君)은 '세자를 제외한' 나머지 왕의 적자들에게 내려지는 작위이므로. 양녕대군은 폐세자되면서 봉해진 봉호이다.[2] 봉호에 있는 '양(讓)'도 세자 자리를 양보·양도했다는 의미에서 쓰인 것이다. 따라서 세자 시절의 양녕대군을 두고 태종이나 효령대군, 충녕대군이 “양녕” 또는 “양녕 형님” 운운하는 모습을 그린 매체는 모조리 틀린 것이다.

2. 생애




3. 여담



3.1. 명필


[image]
양녕의 글씨는 조선조에 나온 명필들 중에서도 최고로 친다. 옛날 붓글씨나 그림 등은 임진왜란 전의 것은 무진장 비싼데, 그것도 양녕대군 글씨쯤 되면 그냥 부르는 게 값일 정도다.
숭례문의 현판도 양녕대군의 작품. 숭례문 현판을 써서 옮길 때, 개와 소도 하례하고, 마소가 머리를 숙였다는 전설도 있을 정도로 조선 시대 최고 명필 중 하나. 임진왜란 이후에 현판이 없어진 적이 있는데, 남지(南池)에서 밤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나서 파봤더니, 현판이 있어서 명필의 글씨는 땅에 묻혀도 빛이 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2008년 2월 10일에 벌어진 숭례문 방화 사건 당시에는 문루까지 화재가 번지자 현판만이라도 지키려고 떼어내다가 떨어뜨렸다.[3] 떨어진 현판은 장성삼 당시 중구청 공무원이 꺼내서 살아남았다.

3.2. 일화


"'''나는 살아서는 국왕의 형, 죽어서는 부처의 형(王兄佛兄)'''"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가 처음 나온 것은 《세종실록》이다.

처음에 효령대군(孝寧大君)이 회암사(檜岩寺)에서 불사(佛事)를 짓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역시 들에 가서 사냥하여 잡은 새와 짐승을 안에서 구웠다. 효령이 말하기를,

“지금 불공(佛供)을 하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않소.”

하니, 양녕이 말하기를,

“부처가 만일 영험이 있다면 자네의 오뉴월 이엄(耳掩)은 왜 벗기지 못하는가.[4]

'''나는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또한 불자(佛者)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하매, 효령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세종 28년(1446 병인 / 정통(正統) 11년) 4월 23일(경신) 3번째 기사

또한 《성종실록》의 효령대군의 졸기에도 비슷한 일화가 등장한다.

이보(李𥙷)가 일찍이 에 예불(禮佛)하러 나아갔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가 개를 끌고 팔에는 매를 바치고는, 희첩(姬妾)을 싣고 가서 절의 뜰에다 여우와 토끼를 낭자하게 여기저기 흩어 놓으니, 이보(李𥙷)가 마음에 언짢게 여겨, 이에 말하기를,

“형님은 지옥이 두렵지도 않습니까?”

하니, 이제(李禔)가 말하기를,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 되고 죽어서는 보살의 형이 될 것이니, 내 어찌 지옥에 떨어질 이치가 있겠는가?'''“

성종 17년 병오(1486,성화 22) 5월11일 (을묘)

당시에도 이미 이런 일화가 널리 퍼져 있었는지 《용재총화》에도 몇 가지 기록이 있다.

일찍이 뜰에 새 잡는 틀을 만들어 놓았는데, 서연(書筵)에서 빈객과 마주앉아 있으면서도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학문에 뜻이 없고, 새가 틀에 걸리면 달려가서 잡았다. 계성군(雞城君) 이래(李來)가 빈객이 되어, 하루는 궁문 밖에 이르렀다가, 안에서 매 부르는 소리를 듣고 마음속으로 세자가 하는 짓인 줄로 알았다. 세자가 서연에 앉아 있거늘 이래가, “전하께서 매 부르는 소리를 하시는데 이는 차마 하실 바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뜻을 학문에 두시고 다시는 이런 소리를 하지 마시옵소서” 하니, 세자는 거짓으로 놀라면서 말하기를, “평생에 매를 보지 못했거늘 어찌 매 소리를 할 수 있겠느뇨” 하였다. 이래가 말하기를, “사냥할 때에 팔뚝에 올려놓고 토끼를 쫓게 하는 것이 매이온데, 전하께서 어찌 보지 못했나이까” 하였다. 무릇 과실이 있으면 이래는 반드시 반복하여 극간(極諫)하니, 세자가 이래를 보기를 원수와 같이 하여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계성을 보면,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괴로워지며, 꿈속에라도 보면 그날에는 반드시 오한(惡寒)이 난다” 하였다.

태종(太宗)께서 궁중에 감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무척 사랑하였는데, 새가 쪼아 먹으므로 태종께서 활 잘 쏘는 사람을 구하여 새를 쏘게 하자, 좌우에 모신 사람들이 모두, “조정 가운데 무사로서는 합당한 자가 없고, 오직 세자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태종이 곧 세자에게 명하니, 번번이 맞혔다. 좌우 사람들이 모두 경하하고 태종도 항상 세자의 행실을 미워하여 오래 보지 않다가 이날 비로소 마음이 흐뭇해 웃었다.


4. 평가




5. 후손


본부인 수성부부인 김씨에게서 3남 5녀, 첩실에게서 7남 12녀[5] 등 총 10남 17녀를 두었다.[6] 양녕대군의 장녀가 재령군주다.
효령대군 다음으로 자손이 제법 번성하였는데 임진왜란 발발 당시, 전라좌수사 충무공 이순신 수하로 이순신이 생전 가장 아끼고 믿던 장수로 알려진 무의공 이순신[7]이 있었다.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8] 그래서 미국에서 독립운동할 때 '프린스 리'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동양인으로서 그렇게라도 해야 현지 엘리트층을 만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어에서 프린스는 한국의 왕자와 다른 개념이라서 저렇게 얘기해도 영 틀린 얘기도 아니다. 이승만은 자신이 전주 이씨 왕가 출신이라는 것에 자부심은 가지고 있었으나, 조선을 말아먹은 대한제국 황실 자체에 대해선 대단히 싫어했고 공화국 신봉자였기에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박대했다.
여담으로 제1공화국 시절의 정치인인 이기붕효령대군의 후손[9]인데 그 아들인 이강석을 양자로 들여 족보가 꼬였다고 말이 많았다고 한다. [10] 하지만 이강석은 자식 없이 4.19때 이기붕 일가를 죽이고 자살하여 꼬인 족보는 자연히 해결되었고, 이후 양녕대군파에서 다시 양자를 들였다.
이외에 전 해군참모총장 이맹기가 있고[A], 연예계에는 가수 겸 배우 이승기[A]와 가수 이상민#, 배우 이지훈이 있다.[11] 시인 이외수도 후손이다.#[12]
참고로, 양녕대군파의 항렬은 수도군파 항렬하고 똑같다. 이는 수도군의 7대손인 증(贈) 이조참판 이민후(李敏厚)가 양녕대군의 서5남인 안창부정(安昌副正) 이심(李諶)의 6대 종손으로 입계(入系)한 게 시작으로, 후에 수도군파에서 양녕대군파로 양자로 들어간 흔적이 나타면서부터[13] 같은 항렬제차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양녕대군파 종회는 상도동에 땅과 빌딩을 보유하고 있으며, 시세는 약 1,600억에 달한다. 양녕대군묘가 상도동에 있으므로, 사실상 선산의 역할을 대신한다고 보면 된다.

6. 대중 문화에서


  • 월탄 박종화는 《세종대왕》 소설을 쓰면서 양녕대군을 상당히 부각시켰고, 소설 《양녕대군》을 따로 쓸 정도로 권력을 스스로 버린 호남아 이미지를 널리 퍼트렸다. 다만 소설 양녕대군은 양녕의 어린시절과 노년 정도 빼면 대부분 세종대왕과 겹치니 구태여 전편을 다 볼 필요는 없다.
  •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에서는 송기윤이 《1부 - 추동궁마마》, 《2부 - 뿌리깊은 나무》, 《3부 - 설중매》까지 무려 3편에 걸쳐 연기했다. 방탕한 모습은 왕이 되기 싫어 일부러 그런 것이란 설정으로 나온다.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유배지 탈출 및 기방 출입 등으로 여전히 말썽부리는 이미지로 나온다. 대신들은 그 때마다 벌 줄 것을 청하나 세종대왕의 비호로 위기를 넘긴다. 한 번은 다시 기방을 찾지 않는다고 약속한 뒤 세종의 권유로 평양에 갔을 때, 과부로 변장한 평양 제일의 명기 정향을 만나 사랑을 나눴는데, 동생이자 왕인 세종하고 한 약속을 어긴 일이라 크게 걱정을 한다. 이후 세종이 추궁할 때 그런 일 없다고 발뺌하자 자신이 정향의 속치마에 써준 시와 정향을 보고 멘붕(...) 그제서야 이 모든 게 사실 세종이 자신을 떠보려고 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세종의 명으로 정향을 측실로 맞는다.

    《설중매》에서는 세종 사후 혜빈 양씨가 어린 단종을 챙기는 것을 못마땅해하며 수양대군에게 왕실을 지키라고 하고 안평대군을 사사하란 상소를 올리는 등 확실하게 수양대군의 편에 선다. 그리고 한확이 죽고 슬픔에 빠져 을 비우고 한명회와 같이 술을 마시는 세조를 찾아가 환궁하라고 간언하며, 마음 다잡고 아버지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위업을 남기라고 한 뒤, 나오면서 한명회에게 "그렇게 보필할 거면 관복 던지라!"고 꾸짖는 등 왕실 어른으로써 나름 역할을 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 용의 눈물》에서는 이민우가 맡았는데, 왕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할아버지 태조와 척을 지는 것은 물론 왕으로 등극하는 데 적극 동참했던 외숙부들조차 가차없이 죽여 없애는 아버지의 모습을 어린 시절부터 지켜보며 권력의 무상함과 무서움을 알고 일부러 이렇게 반미치광이를 가장해 기행을 했다는 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어렸을 때는 심지어 세자 책봉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극중 등장하는 태종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아버지와 닮은 아들이 아버지를 거부하면서 속을 썩이는 장면은 태종이 즉위 전 아버지인 태조의 속을 썩인 것과 겹치며 극의 긴장감을 올리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고증에 철저하고자 했던 본작에서 가장 크게 미화된 인물로, 이것이 대표적인 옥의 티로 꼽힌다. 그나마 남의 첩을 빼앗거나 절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등의 미친 짓도 충분히 묘사되기는 한 것이 다행인 부분.
  • 대왕 세종》에서는 박상민이 맡았는데, 주색잡기 부분은 어리 사건과 정종을 모시던 기생인 초궁장과 밀통을 한 점을 제외하면 적당히 풍류를 즐긴 것(?) 정도로 묘사한다. 대신 요동 정벌을 주장하고 직접 왜구와 전투를 하거나 신하들까지 속이고 중앙군을 이끌고 함경도까지 가서 여진 정벌까지 시도할 정도의 대책없는 전쟁광의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실록을 비롯해 남아 있는 기록 어디에도 이런 묘사는 없다[14]. 아무튼 이 과정에서 백성들이나 내정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시피하며, 이것이 작중의 충녕대군과 대립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 왕과 비》에선 신구가 노년의 양녕대군을 맡아[15] 열연했다. 용의 눈물에서 태종이 그랬듯이 강력한 왕실을 추구하는 왕권주의자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무슨 언행이든 서슴치 않고 그에 따라 광인이니 노망이니 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는 것이 특징. 세종에게 왕위를 넘긴 데 후회는 없지만 세종이 유약한 문종에게 후사를 맡기고 그가 다시 어린 단종을 후계로 임명한 것을 상당히 원망했고, 결국 조카 수양대군을 부추겨서 조선의 왕실이 다시 한 번 콩가루 집안이 되는 데 일조하였다[16]. 1회에서부터 세종대왕(송재호)에게 한 마디 찔러 넣는데, 세종이 적자 승계 원칙을 이야기하자 "주상, 부왕께서 32년 전에 저 대신 주상을 선택하신 일 기억 안 나시오?" 라면서 반박했다. 16회에서는 단종에게 호통에 가까운 진언을 올리면서[17] 수양을 비호하다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제지당하고 끌려나간다. 계유정난 직후에도 수양대군을 만나 '이제 왕실이 반석위에 설 수 있게되었다'라는 발언까지 한다. 덕택에 내관들에게 끌려갈 뻔. 그래서인지 최후가 은근 안습한데, 89회에서 90회로 넘어가는 사이 9년이 지나 사망하는 신이 나오지 않고 권람이 죽는 것만 나왔다. 그래도 마지막 화까지 단종을 죽이라며 세조와 독대하며 거의 깽판을 친다.[18] 하지만 이 모습이 한국 사극 사상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에 가장 충실하게 양녕을 묘사한 것.
  • 공주의 남자》에선 생략당했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 양녕대군의 포지션은 온녕군이 대신한다. 다만 온녕군은 계유정난 얼마 후에 사망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각색을 가해서, 김승유에게 살해당한다.
  • 인수대비》에서는 성우 박웅이 연기했다. 《왕과 비》와 같은 작가인 정하연이 극본을 쓴, 사실상의 리메이크 작품인만큼 여기서도 역시 행패남. 하지만 "할 줄 아는 건 효도밖에 없다"고 문종을 까도 생각보다 행패가 덜하다.[19] 되레 김종서가 사망 직전의 문종을 보려는 걸 막자 분통 터져 쓰러지는 수준. 다만 계유정난 이후, 어서 단종을 폐위시켜야 한다고 꼬장을 부리다가[20] 이번엔 명나라의 녹을 받는다며 인수대비의 친정아버지 한확의 뺨을 친다(…). #[21] 그래서 한확은, "이런 치욕을 다시 당하지 않도록 좋은 왕비가 되어달라"고 인수대비(함은정 분)에게 말한다… 안습.
  • 2012년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는 백도빈이 연기한다.[22] 이 영화의 양녕은 그야말로 역사 속의 방탕한 양녕 그 자체. 첫 장면에서부터 주색잡기에 땡깡을 부리다 아버지 태종 이방원에게 분노의 이단 옆차기(...)를 맞고 폐위된다. 이후 세자가 된 충녕에게 찾아와 2차 땡깡을 시전하나 실은 세자와 바꿔치기된 거지 덕칠에게 누구세요?를 시전당하고... 이내 열받은 덕칠에게 두들겨 맞는다.
  • 김진명의 소설, 《하늘이여 땅이여》에서는, 《태조실록》의 고증성과 고사성어 함흥차사(咸興差使)의 속뜻을 연결시켜, 양녕대군의 존재를 아버지의 쿠데타를 괴로워하다 일생을 마친 유교적 의인(義人)으로 묘사하여 풀어내고 있다.
  • 웹툰히어로 툰드라쇼 2 - 조선왕조실톡》에서는 권혁수가 연기한다. 정성호가 분한 황재근과 시간을 넘나들며 톡을 한다. 헌팅을 하다가 황석정을 구해줬지만 황석정을 맘에 안 들어했으나 황석정은 그에게 꽂힌다. 결혼 못한 모태솔로들을 짝지어 주지만 남의 첩을 궁녀로 들였다 결국 태종에게 찍혀[23] 폐세자가 되고 충녕대군이 세자가 된다.
  • 웹툰 《왕 그리고 황제》에서는 올곧은 세자였지만 (고종의 혼이 들어간) 태종에게 푸대접을 받자 쿠데타를 준비하다가 양녕대군이 고용했던 산적이 반역모의를 밀고해 국문을 받은 뒤 죽임을 당할 뻔했지만 충녕대군의 변호로 목숨을 건지고, 세자자리에서 쫓겨난다. 38화 끝부분에서는 어린시절의 진평대군안평대군에게 "조선에서는 마땅히 어질고 현명한 이가 왕이 되어야 한다"면서 "만약 왕이 어질고 현명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숙부의 말뜻을 깨닫고 "아..."라고 말하는 진평대군이 압권.
  • 탑툰과 레진코믹스에서 연재하는 성인 웹툰인 용포철인의 주인공인데, 무려 마물과 싸우며 조선의 밤을 수호하는 슈퍼히어로로 나온다. 조연인 세종대왕은 뒤에서 양녕대군을 지원하다가 심심하면 형의 사이드킥으로 활동.
  • 드라마 《대군 - 사랑을 그리다》에 등장하는 양안대군은 양녕대군을 모티브로 하였다. 세조에 해당하는 진양대군을 끊임없이 획책하고 선동하는 인물로 그려졌으며 절 앞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스님을 조롱하였다는 등의 야사도 반영되었다. 배우는 손병호.

[1] 다들 조선 건국 이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조선왕조 공식기록에는 그 3명이 없고, 오직 태종의 언급만 있다. 태종이 양녕의 장자 정통성을 강화하려고 일부러 기록하게 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하지만, 그 유명한 태종 스토커(...) 민인생이 끼어 있었을 당시 사관(史官)의 꼬장꼬장함을 감안하면 가능성은 크지 않다.[2] "세자(世子)에게 관교(官敎)를 내려주고, 심씨(沈氏)를 봉(封)하여 경빈(敬嬪)으로 삼고, 제(禔, 양녕대군의 본명)를 강봉(降封)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 삼고…(후략)", 《태종대왕실록》 35권, 태종 18년 6월 5일 기사[3] 크기만 큰 줄 알았지 무게가 150kg인건 몰랐다고[4] 이엄이란 귀를 가리는 방한구로, 지금의 귀마개 같은 물건. 효령대군은 귓병을 앓고 있어서, 양녕대군 말대로 초여름에도 이엄을 쓰고 다니고 있었다. 고로 '부처님이 그렇게 잘났다면, 왜 니 귓병은 못 고쳐주냐?' 라는 뜻이다. 이 뒤의 이어질 말과 합쳐서 양녕대군의 호쾌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기록.[5] 스캔들이 있었던 기생 어리의 딸도 포함한다. [6] 아들 10명 + 딸 17명 = 도합 27명의 자식(...)이라는 계산결과가 나온다.[7] 양녕대군의 5번째 서자 장평도정(長平都正)의 5대손.[8] 장평도정(長平都正)의 장남 부림령(富林令) 이순(李順)의 14대손이고, 임진왜란 때에 활약한 무의공 이순신의 방계 10대손이다.[9] 흥선대원군의 측근이었다가 임오군란에 연루되어 처형된 이회정의 증손이었다.[10] 이 입양의 문제는 무려 3가지나 있었다. 첫 번째, 장자는 집안을 이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집에 양자로 들어갈 수 없다는 법을 어긴 입양이었다. 두 번째, 입양 당시에 파가 다르면 고려 대상에서 일단 제외했는데 이를 무시했다. 세 번째, 파가 달라도 항렬이 맞으면 모르겠는데, 이강석은 이승만의 손자뻘 항렬이다.(이승만과 이기붕 일가의 마지막 공통조상인 태종 이방원을 기준으로, 이승만이 이방원의 17대손이고 이강석이 19대손이다.) 즉, 여러 모로 꼬인 입양이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 역시 아들뻘이라기 보다는 손자뻘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차라리 양손으로 입양하는게 더 나을 뻔 했다. 아니면 이기붕 본인이 이승만의 양자가 되던가(...).[A] A B 전주 이씨 양녕대군 20세손, 시조 43세손 '基'자 항렬이다.[11] 출처. 전주 이씨 양녕대군 17세손(대수로 변환하면 16대손, 출처 기사에는 16대손으로 나와있다.), 시조 40세손 '承'자 항렬이다.[12] 전주 이씨 양녕대군 18세손, 시조 41세손 '秀'자 항렬이다.[13] 거꾸로 양녕대군파에서 수도군파로 입계한 경우도 있다.[14] 그나마 활을 잘 쏘았다는 묘사 정도는 있는데, 이나마도 정신 수양의 일환으로 무관은 물론 문관들에게까지 널리 인기가 있었으니 양녕이 특별히 무술에 능했다고 볼 근거는 되지 못한다.[15] 다음 작품인 태조 왕건에서는 왕건의 아버지인 왕륭 역할을 맡았는데, 우습게도 왕륭이 아들 왕건으로부터 추존받은 묘호가 바로 세조이다.[16] 이전 작품 용의 눈물에선 어린시절 피비린내나는 골육간의 권력 투쟁이 싫다며 세자 책봉부터 거부하던 모습을 보였으니 이미지 차이가 심한데, 극작가가 다른 사람이니 의미는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용의 눈물에서 이미 직접 권력 투쟁의 마당에 뛰어들기 싫다는 것이었지 그 필요성 자체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또 작품 맨 마지막 화에 일부러 놀아제끼는 일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길을 찾으라는 깨달음을 얻는 장면이 있는데, 이 길을 찾다 보니 본작에 나오는 캐릭터가 되었다고 보면 충분히 이해될 만 하다.[17] "폐위당하는 것보다 선위해서 물러나는 것이 모양새가 보기좋지 않습니까"라는 협박성 발언까지 한다 [18] 다만 이 작품의 전작이 주요 인물이 세상을 떠날 때마다 꼬박꼬박 내레이션으로 졸기(卒記)가 나오던 용의 눈물이라 비교될 수 있는데, 이 작품은 국왕 이외의 인물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퇴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람의 죽음을 지켜본 신숙주도 한명회의 대사로 '범옹이 죽었을 때 나도 같이 가야 했다' 라고 언급될 뿐이며, 효령대군이나 월산대군 등의 왕족들, 심지어 한명회처럼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조차 예외가 아니다.[19] 하지만 굉장히 어이없는 대사인 것이 문종은 세자 때부터 대리청정을 하면서 재능을 입증한데다가, 세자 시절의 양녕대군은 효도라도 잘 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정하연이 수양대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그의 정적들을 비하하는 성향이 있는데 왕과 비가 방영했을 때와 달리 현재는 수양대군에 대한 부정적인 재평가가 대세라 괴리감을 일으킨다.[20] 그래도 나름 "주상이 나이 어리다고 얕보지 마시게. 조금이라도 힘이 생기면 자네 목을 내놓으라고 하게 되어 있어. 김종서가 관 뚜껑을 열고 나오게 된다" 라고 제법 그럴 듯하게 말한다.(…)[21]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양녕대군 역의 박웅이 1994년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바로 한확 역으로 출연했다는 것. 옛날에 한확 역을 맡았던 배우가 늙어서 과거에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뺨을 친다는, 상당한 수준의 배우개그.[22] 아버지인 백윤식은 양녕을 옹호하다 파직된 황희 역을 맡았다.[23] 기생들과 어울리며 찍은 사진을 태종이 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