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선축구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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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조선축구대회는 FA컵의 전신인 전국축구선수권대회의 전신이다. 전조선축구대회는 1921년 조선체육회가 주최한 제2회 전조선체육대회에 정구와 더불어 축구를 정식 종목으로 채택하면서 개최되었으며, 한국 축구 최초의 내셔널 컵 대회이기도 하다.
전조선축구대회는 1921년부터 1940년까지 총 21회 개최되었지만, 일제가 조선의 모든 축구팀들을 강제로 천황배에 참가하도록 만들면서 대회가 폐지되었다.
관서체육회에 의해 1925년 평양에서 창설된 동명의 전조선축구대회가 있지만 서로 별개의 대회이다.
2. 연혁
- 아래 기록은 대회 최고 부문인 청년부(혹은 일반부) 기준 기록이다.
2.1. 역대 우승팀
2.2. 우승 횟수
- 서울의 불교청년회[12] 와 평양의 무오청년회는 각각 서울과 평양을 대표하는 구단이었으며, 둘이 맞붙는 경기는 라이벌전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울과 평양을 대표하는 진정한 라이벌전은, 서울과 평양 서로에게 자극 받아 1933년 같은 해에 결성된,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13] 간의 경평대항축구전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경평대항축구전 문서 참고.
3. 전문부 별도 연혁
- 1925년 전조선축구대회에 전문부[14] 가 신설되고 2년 후 전문부가 청년부에 통합된 뒤 전문학교 팀들이 청년부 우승과 준우승을 거의 독차지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최고의 축구팀들은 전문학교 팀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문부가 청년부에 통합된 지 5년 후 다시 전문부를 부활시킨 것을 보면, 전문학교 팀들이 성인 무대를 독식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문제 제기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문부가 신설된 1925년부터 전문부의 기록만 분리해서 다음 표로 정리했다.
3.1. 역대 전문부 우승팀
3.2. 전문부 우승 횟수
[1] 심판 판정 불만으로 경기가 중단되어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2] 1922년 2월에 치러졌다.[3] '''평양무오단'''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4] 1922년 11월에 치러졌다.[5] 구락부는 영어 Club을 한자로 음역한 단어이다.[6] 대한축구협회에서는 1923년도 전조선축구대회 준우승팀을 무오청년회라 기록하고 있으나, 당시 발행된 신문기사에서는 임술청년회를 준우승팀으로 보도하였다.#[7] 전문부가 신설되면서 전문학교 팀들이 전문부에서 대회를 치르게 되었다.[8] 전문은 전문학교의 준말이며, 전문학교는 일제강점기 당시 현재의 대학교를 이르는 말이었다.[9] 전문부가 청년부에 통합되면서 전문학교 팀들이 청년부에 편입되었다.[연세대]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연희전문은 연세대학교의 옛 이름이다.[고려대] A B C D E F G H I J K L M 보성전문은 고려대학교의 옛 이름이다.[숭실대] A B C D E 숭실전문은 숭실대학교의 옛 이름이다.[10] 전문부가 부활하면서 전문학교 팀들은 전문부에서 대회를 치르게 되었다.[리그전] 청년부 대회가 리그전으로 치러졌으며 청년부 우승팀과 준우승팀은 표기된 바와 같다.[11] 당시에는 무승부 시 프리킥 1점, 슈팅 1점 등으로 점수를 계산해 점수가 더 높은 팀이 승리했다.[12] 조선축구단의 전신이다.[13] 재정적 문제로 1932년 즈음에 해체된 무오청년회의 주요 인사들이 평양축구단 창단에 다수 참여했다. 이 때문에 평양축구단을 무오청년회의 정신적 후신으로 본다.[14] 전문은 전문학교의 준말이며, 전문학교는 일제강점기 당시 현재의 대학교를 이르는 말이었다.[15] 당시에는 무승부 시 프리킥 1점, 슈팅 1점 등으로 점수를 계산해 점수가 더 높은 팀이 승리했다.[16] 1945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병합되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