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평대항축구전
경평대항축구전을 통해 두 도시의 시민뿐 아니라 전 조선 민족이 축구의 재미를 알게 되었고, 자기 고장, 자기 팀에 대한 자부심도 느꼈다. 또한 조선 민족끼리 한 울타리 안에서 한 덩어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경평전의 인기는 더욱 높아만 갔다.(중략) 전국의 온 국민이 열광하는 민족의 잔치였고 우리나라 축구 수준 향상의 촉진제 구실을 했다.
- 김용식 선생 평전 '어떤 인생' 中
휘문고보경기장에서 열린 2차전에 찾아온 관중은 무려 7,000명에 이르렀다. 1930년 펼쳐진 제2회 대회에서는 당일 혼잡을 피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경성 시내 다섯 곳의 예매권 구입처까지 마련됐다.
- 조선일보 1929년 10월 10일, 1930년 11월 27일
1. 개요
경평대항축구전은 서울과 평양간의 도시대항 축구경기이다. '경평축구대항전', 짧게 경평전으로 불리며, 유럽 축구문화의 영향으로 '경평더비'라는 말로도 불리우고 있다.
수도와 제2의 도시 또한 지역 의식이 남달랐던 기호지방[1] 과 관서지방[2] 을 대표하는 양대 대도시 서울과 평양에 당시 조선의 최고 빅클럽들이 형성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양강 구도가 이루어지면서 이들 최고의 클럽들 대결에 조선 전체가 열광하는 흡사 지금의 유럽 프로축구 리그처럼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클럽 축구가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경평전의 주축이었던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은 해방 이후 각기 남북 국가대표팀의 모태가 되었다. 가난한 신생 독립국에 불과하던 대한민국과 북한이 각각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본선 및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8강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북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이들간의 교류는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경평전 역시 그 명성만이 남은 채 재개되지 못하였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의 지역 예선에서 남북이 마주치기는 했으나 국가대표로서 만난 것이었으며, 경평전과 같이 남북을 대표하는 도시 간의 정기적 경기는 부활되지 못하였다.
다만, 1990년 10월 11일에는 평양에서, 10월 23일에는 서울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라는 명칭으로, 2002년 9월 5일과 9월 8일에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2002 남북통일축구경기라는 이름으로 경평축구의 맥을 잇는 축구대표팀 경기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만약 향후 남북 통합리그가 출범하면 평양을 연고로 하는 최상급축구련맹전의 4.25 체육단이나 평양시 체육단이 K리그의 서울을 연고로 하는 FC서울이나 서울 이랜드 FC와 같은 리그에서 맞붙게 되어 1946년 이후 수 십 년만에 '''경평축구대항전'''의 명맥이 다시 이어지는 순간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경평축구대항전과 여기서 발전한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는 근대 조선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지역 클럽들이 리그를 형성해가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K리그가 그 정체성과 방향성을 다시금 되짚어 도약을 펼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국내 통합리그가 아닐 경우엔 국제대회에서 만나는 수 밖에 없는데 이 역시 현재는 요원한 상황이다. K리그 소속 서울 소재 프로 구단들은 아시아 정규 챔피언스 리그인 AFC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을 목표로 하지만 최상급축구련맹전 소속 평양 구단들의 경우 AFC컵에 출전하는데 이 두 대회 사이의 격차가 너무 커서 아예 연계조차 되지 않는지라 북한이 아챔으로 올라오지 않는다면 국제대회 경평전도 기대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2021년 아챔의 진출권 배분 개편에 따라 북한 최상급축구련맹전에게 1장이 주어져서, 2021년 부터 K리그 소속 서울 소재 프로 구단과 최상급축구련맹전 소속 평양 구단이 맞대결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2. 역사
1929년 조선일보사에서 경성(지금의 서울) 대 평양의 도시 대항전을 구상하고 같은 해 10월 8일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제 1회 경평전을 개최한 것이 경평전의 시작이다. 조선일보사의 적극적인 홍보와 서울-평양간의 라이벌 의식이 맞물리면서, 대회가 거듭될수록 서울, 평양 각 시민은 물론 전국민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당시에는 팀 대신 군(軍)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전경성군 대 전평양군 축구대항전이란 이름이 사용되었다. 경성군은 당시 축구의 명문 경신중학 중심으로, 평양군은 일본의 최강팀인 와세다대학을 7:0으로 물리쳐 이름을 날리던 숭실학교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경평전은 1930년 제 2회 경평전을 끝으로 주최측인 조선일보사의 사정으로 1931년과 1932년 두 해 동안 열리지 않아, 사멸될 처지에 이르렀으나 1933년 4월에 평양축구단이 창단을 기념하여 경성대표를 초청함에 따라 경평전이 부활되었다. 그러나 경평전은 1935년 제4회 경성운동장에서 마지막으로 치루어졌다.
경평전은 서울, 평양 이외에 다른 도시 축구팀의 성장에 힘입어 3도시대항축구전이나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와 같은 도시대항 축구대회로 이어지지만 1942년 일제의 구기종목 금지로 인해 모든 대회는 중단된다.
1946년 해방 후 동대문운동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평전이 열렸다. 1942년 이후 열리는 대회였기 때문에 시민들의 큰 관심과 열광적인 응원 속에서 진행되었지만 그 열기가 지나쳐 관중 난동이 벌어져 경찰이 공포탄을 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삼팔선으로 남북통행이 금지되면서 평양 선수들은 경비망을 뚫고 어렵게 내려왔던 것이었으며, 돌아갈때는 육로가 위험해 뱃길을 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서울 선수들을 초청하겠다는 그들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 채 경평전은 무기한 중단되었다(...)
3. 역대 전적
4. 유니폼
경성축구단의 유니폼 색상은 빨간색이고, 평양축구단의 유니폼은 파란색에 로마자 P자가 새겨진 유니폼이었다. 경성축구단의 유니폼, 평양축구단의 유니폼 광복 및 남북분단 이후 각 도시가 수도인 남북한을 서로 병치시킬 때 남한을 파란색, 북한을 빨간색으로 하는 것과는 서로 반대이다.
5. 여담
경성축구단은 1935년에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다.
2007년 K3리그에 참가한 서울 유나이티드 FC가 자칭 경성축구단의 가치를 계승한다며 창단되었다.
통일 이후 최상급축구련맹전의 평양을 연고지로 하는 축구팀이 K리그에 편입된다면 경평전의 경은 FC 서울이, 평은 4.25 체육단이 맡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서울의 또 다른 구단인 서울 이랜드 FC나 평양의 또 다른 구단인 평양시 체육단 역시 경평전에 포함 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된다면 경평의 축구팬은 물론, 남북의 축구팬이 결집해서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매치인 엘 클라시코와 같은 전쟁 수준의 더비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큰 더비이다.
2012년 박원순 서울시장이 남북의 평화를 여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며 경평전을 부활하고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의 평양 공연을 열 것을 정부와 북한 당국에 공식 제의했다.
분단 이후 경평전은 사실상 대한민국과 북한 축구 국가대표 팀간의 경기가 승계하고 있는 상태이다. 남자 축구의 경우 한국 축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2002년 월드컵 이후에는 북한 대표팀이 대한민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체로 평가된다. 하지만 북한 대표팀도 남한을 상대로 할 경우 버프가 걸려서 실제로는 두 팀간의 객관적인 전력차이보다 팽팽한 경기가 진행된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한 조에 편성되어 경기한 적이 있고 한국이 1승 1무로 우세했다. 그러나 북한은 예선에서 사우디 이란 등의 강팀을 제치고 조 2위로 월드컵에 직행하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 자주 마주치는 곳은 주로 동아시안컵 대회와 아시안 게임이다.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에서 맞붙어 남한 대표팀이 1:0으로 승리한 바 있다. 동아시안컵에서도 맞붙어서 여러차례 경기한 바 있다. 북한 대표팀과의 경기를 뛰어본 대표팀 선수들의 인터뷰에 의하면 북한 선수들의 트래시 토킹이 대단한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