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응봉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생애
정응봉은 1895년 5월 15일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읍 서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5년 경북 영주에서 대동상점(大同商店)을 운영하며, 만주 독립군양성에 필요한 자금모집을 전개하였다. 대동상점은 1915년 8월 3일 국권회복을 위해 박제선·권영목 등이 도모하여 경북 영주군(榮州郡) 영주시장 내에 개점한 잡화점이다. 대동상점은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비밀회의 장소로 제공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은 조만간 만주로의 이주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이때 정응봉을 비롯한 유명수·이교덕(李敎悳) 등은 이 계획에 찬동하고 상점의 점원으로 일하였다.
정응봉·권상수·송계찬(宋桂燦) 등은 독립군 양성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16년 3월 이후 지방부호들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체포되었고, 1918년 5월 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4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의 지원을 위해 독립자금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8월 1일 경북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에 사는 부호 박규영(朴奎永)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하였으나, 이런 사실이 일경에 탐지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9년 9월에는 매서(妹參) 신철균(申喆均)이 사는 경북 문경군 농암면 율수리에서 부호들에게 '뜻을 강하게 하여 시기의 도래를 기다려야 한다' 라는 문건을 작성하여 각 면사무소 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배포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이 일로 1920년 2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공갈미수와 보안법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후 출옥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민천공사사무원으로 있다가, 1925년 봄에 귀국하여 1927년 12월 14일 신간회 경성지회 제1차 간사회에서 조직부 상무간사로 피선되어 활약하였다. 그러나 신간회가 해소된 뒤 조용히 지내다 1947년 9월 20일 충남 홍성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정응봉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0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