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제선은 1878년 7월 13일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읍 산법리에서 부친 박예수(朴禮壽)와 모친 김분례(金粉禮)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박학제(朴學齊) 혹은 박선옥(朴旋玉)이며, 별명은 박엽(璞曄)이다. 그는 1908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08년 3월 30일 한성사범학교부속보통학교 본과훈도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08년 6월 일본 유학을 위해 사직을 학부에 청원하였으며, 1908년 12월 25일 대한협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 당시 한성사범학교 훈도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강제 병합의 불가함을 주장하다가 경찰의 취조를 받았다. 그 후 일제의 감시를 받다가 1913년 영천공립보통학교 훈도, 1917년 풍기공립보통학교 훈도로 근무하였다. 이 시기 그는 겉으로는 일제의 지배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내심 한일병합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이를 국권 회복의 호기로 여기고 동지를 모으기 위해 애썼다. 1915년 8월, 그는 영주 시장에 대동상점이라는 잡화상을 경영하며 권영목·유명수·정응봉·이교덕(李敎悳)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자금을 조달했다. 또한 그는 동지들과 함께 잡화상에서 밀회를 가지면서 기회를 포착하여 만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김노향(金魯鄕)을 새로이 동지로 포섭하고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20여일간 만주 봉천 지방을 답사하였다. 귀국 후 그는 1918년 3월까지 만주 이주를 결행하기로 하고 상점을 폐쇄하였다. 동년 12월 20일 경성 남문여관에서 권영목·김노향·조재하(趙在夏)·권영만,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사령(司令) 박상진 등과 더불어 회합을 갖고 만주 이주와 군대교육의 준비를 위하여 권영목을 만주로 파견하여 중국 길림독군(吉林督軍) 맹사원(孟思遠)과 협의토록 하였다.
이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유명수는 대동상점에 보관 중이던 현금 700여원을 확보하고, 권영목은 권상수(權相洙)·송주찬(宋柱燦) 등으로 하여금 지방 자산가로부터 수차에 걸쳐 1만여원을 모금케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영주헌병분견소에 발각되어 그를 비롯한 동지들이 일경에 붙잡히는 바람에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는 1918년 3월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사기횡령 혐의로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18년 5월 3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공소를 신청하여 1918년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금고 6월을 받았다. 출옥 후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한 뒤 이교덕·권영목 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38년 2월 24일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제선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박제선의 두 아들 박진양과 박태양도 부친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두 형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