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당 김씨
1. 개요
貞和堂 金氏
대한제국 시절 민갑완과 마찬가지로 국제정세에 희생된 비운의 여인. 집안은 광산 김씨로 헌종의 무품 빈 경빈 김씨와 같은 집안이다.
2. 생애
고종의 새 왕후로 간택되었던 여인. 을미사변 이후 간택되어 입궁했으나, 춘생문 사건으로 무마되었다. 강제 출궁 후 처녀로 수절하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고 대한제국이 일제에게 병합한 뒤인 1917년에야 일본의 트집으로[1] , 재입궁하여 후궁으로서 당호를 받았다. 품계는 상궁.
영친왕의 아내로 고종 황제의 낙점을 받았던 민갑완이 끝내 결혼하지 않고 처녀로 늙어죽은 사례처럼, 민갑완이나 그녀 역시 둘 다 간택에 확정되었으나 정지척 상황과 맞물려 희생된 것이다. 그녀가 1871년생이고 을미사변이 1895년이고 고종의 새 왕후 간택 역시 1895년이라고 치면, 그녀는 무려 22년 동안 처녀로 수절하다가 47세의 나이로 입궁하게 된 것이다.[2]
그러나 고종 황제를 보지도 못한 채 궁궐 구석의 작은 방에서 살아야 했고, 고종이 사망하던 순간까지 내전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유해나마 상면할 수 있었고, 황후는 커녕 후궁으로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평생 쓸쓸히 지내다 사망한다.
[1]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을 알현하고 오라는 요구를 고종이 거부하자 윤덕영이 고종의 허락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김씨를 입궁시킨 것.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괴롭히는 윤덕영을 이기지 못한 고종은 자기 대신 순종으로 하여금 일본에 다녀오라고 말해 사실상 허락을 하고 만다.[2] 일부 책에서는 그녀가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될 때 간택에서 떨어진 처녀라 쓰고 있으나 1917년 입궁 당시 47세였다면 1871년생으로 명성황후가 책봉된 1866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