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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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한말의 각료이자 친일 매국노. 경술국적 중 한 사람이다. 1873년 12월 27일 서울 태생.
자는 중덕(仲德), 호는 벽수(碧樹),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영돈녕부사 윤철구(尹徹求)의 아들이며, 후작 윤택영(澤榮)의 형이다. 순종의 비(妃)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큰아버지. 처는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 회장 김복수(金福綏)이다. 이렇게 외척이라는 신분을 최대한 활용하여[1] 일본 제국의 침략 정책에 일조하였으며 1917년에는 순종으로 하여금 일본 왕실의 참배를 종용하였다.
1908년에 시종원경에 올라서 한일 병합 때인 1910년에 자작에 올랐고 1925년에는 중추원 고문, 1935년에는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다.
2. 일생
2.1. 초기부터 정권을 독점할때 까지
윤용선은 오랫동안 의정 대신을 역임한 조정 내의 원로 중의 원로였다. 1894년 윤덕영이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것이나, 아관파천 당시 비서관에 임명된 것 등은 모두 윤용선의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반 위에 윤덕영의 권세를 확고하게 해준 것은 동생 윤택영의 딸, 즉 조카가 황후에 책봉된 일이다. 윤덕영의 조카가 황후에 책봉된 것은 윤택영이 조부 윤용선을 통하여 경운궁(엄비)에 통로를 열고 엄비의 승비(陞妃) 운동에 종사한 데서 기인한다. 윤택영은 이 일에 종사하면서 많은 계책을 세워 신임을 두텁게 하고 자신의 딸이 황후에 책봉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윤덕영은 조카가 황후가 된 다음해인 1908년, 시종원경이 되었고 황후의 태부도 겸하였다. 이로 인해 궁중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왕비의 아버지인 윤택영이 있었지만, 실제로 황후를 등에 업고 외척 세도를 부리며 정치에 깊숙히 관여한 것은 윤덕영이었다.
당시 일본은 송병준, 이용구, 이완용을 내세워 일진회를 조직하는 등 '합방'의 불가피성을 부르짖으며 한일 '합방' 조약 체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일본은 대신들을 매수하거나 회유·협박하여 일본의 정책에 협조하도록 하여 한일'합방' 계획을 어느 정도 진전시켜 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고종을 포섭하여 허락을 받는 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이어 제3대 통감이 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여론의 귀추를 살피면서 '합방'을 마지막까지 순조롭게 진행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황실을 설득해야만 하였다. 데라우치는 황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윤덕영을 그 적격자로 삼았다. 그리하여 윤덕영을 비밀리에 관저로 초대하여, '합방'의 불가피성을 주지시킨 다음 적극적인 협력을 구하였다. 즉, 데라우치는 윤덕영에게 각의를 거쳐 조약을 체결할 시기가 되었으며, 각 방면 대표자의 합의가 이미 있었다고 말하고, 조선의 이해(利害)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고종 및 순종의 양해를 얻는 데 진력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2.2. 고종을 협박하다
윤덕영은 순정효황후 큰아버지이며 순정효황후 아버지이자 순종의 장인어른과 형제이다. 이완용은 고종에게 7일간 조석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면서 결단을 촉구하였으나 고종이 비록 나라를 빼앗기는 무능한 황제였지만 자신의 지위를 알고 있었고 중심이 있는지라 이완용이 설득을 하는데 대꾸도 하지않고 꿈쩍도 하지 않아 고종의 단호함에 이완용은 포기를하고 돌아갔고 이에 일본이 실망했다고 한다.
이때 윤덕영이 본인이 직접 나서겠다고 하여 고종에게 찾아가 부탁을 했지만 고종은 들은척도 하지않자 협박하기 시작했다. 덕수궁 모든 창고에 봉인(압류)을 붙히고 물건을 관리하던 상궁도 내쫓았는데 고종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윤덕영은 고종의 과거 여자문제로 협박하자 단호하고 대꾸조차 하지 않던 고종이 주저 앉으면서 시선을 피하자 윤덕영이 고종 앞으로 가서 서서 말 하기를 "청을 들어주실 때까지 안 움직이겠습니다."라며 오후 2시부터 새벽 3시까지 서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은 차마 그럴 수 없다고 순종을 보냈다.
2.3. 옛 신하로써 죄송함이 없다
윤덕영의 집착, 집요함에 두 손을 든 고종은 순종에게 만나게 했는데 옛 신하로서의 정이나 예의라고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는 상궁들을 두려움에 떨게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조차 윤덕영의 냉혹함, 집요함에 치를떨었는데 지금까지 그 욕을 다 먹는건 이완용이다.
일본에 부탁을 고종이 듣게 만들어서 백성들의 피를 빨고 궁궐보다 더 넓은 집을 가졌다. 이완용이 30억 받았을때 100억 받고, 이완용이 가진 땅에 4배나 가지고 있을 정도로 친일 활동을 더 열심히 했지만 욕은 이완용이 다 먹는다.
2.4. 합방때문에 옥새를 빼앗다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 일주일 전에 창덕궁에서 열린 마지막 어전회의에 윤덕영, 민병석은 고종을 모시고 참석했으며 일사천리 진행되던 중 옥새가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병풍 뒤에서 숨어서 몰래 듣고있던 순정효황후가 온몸을 던져 한일합방조약에 항의했고, 이때 친일파가 순종에게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그때 병풍 뒤에서 숨어서 듣고있던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들고 울면서 도망치다가 앉아서 치마속에 숨겼는데 그 누구도 황후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자 큰아버지 윤덕영이 나서서 뺐었다.
이로써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고종과 순종을 협박, 왕실을 움직여 조선의 식민지화에 일조한 윤덕영은 그 대가로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그때 받은것 중 하나가 벽수산장이다.
군신간의 예의나 종친간의 의리를 도외시한 채, 고종의 결의를 촉구하고 어전 회의를 형식적으로 개최하는 등 한일 합방의 배후에서 활약한 윤덕영의 공로는 매우 컸다. 윤덕영 또한 한일 '합방' 과정에서 자신이 막후의 제 1인자였다는 긍지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합방' 이후 논공 과정에서 이완용에게는 작위와 훈장이 거의 최고 수준으로 주어진 것에 비한다면 윤덕영에게 주어진 작위는 보잘것 없었다. 이는 병합 과정이 표면상 이완용에 의해서 진행된 것으로 나타났고 윤덕영의 공로는 이완용의 그늘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2.5. 나라와 바꾼 인성. 백성의 피, 땀, 눈물
그리고 여기에 한술 더 떠 친일파 중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은 윤덕영 . 이완용의 4배인 "19.467평" 즉 축구장 8개의 면적. 즉, 이완용 땅은 윤덕영 땅에 반도 채 안된다고 한다. 옥인동의 약 54%, 지금의 서촌부지. 수성동계곡, 배화여고, 인왕산 자락까지 모두 다 윤덕영의 집터였으며 아직도 그곳엔 흔적이 조금 남아있다. 집 안에는 능금나무밭, 자연숲, 한옥99칸, 하천이 있는 총 "2만평"의 대저택.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백성들의 피, 땀, 눈물로 만들어진 곳. 1921년 6월 23일에 보도된 동아일보기사에 조선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집이라고 소개된 곳이 바로 이 벽수산장이다.
세상 사람이 아방궁이라 부르는 그 집.
세상 사람들이 아방궁보다도
아방궁을 짓는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 까닭을 더 이상하게 생각한다.
바로 이 벽수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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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1년 6월 23일 기사 내용
2.6. 망언
나는 단지 하세가와가 시키는 대로 하였을 뿐인데 나보고만 악인이라고 한다"(權藤四郞介, {이왕궁비사}(李王宮秘史))라고 변명하였다.
왕실을 중심으로 한 그의 눈부신 활동에 대해 {공로자 명감}(1935년)에서도 "1910년 시종원경으로 있을 당시, 병합을 맞아 상하의 안태(安泰)를 위해 평온원만한 해결을 하려고 노력한 한 사람으로, 그 정성, 그 상식은 당시 가장 걸출한 인물로서 빛나고 있었다"(47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병합'의 공로로 일제로부터 자작과 매국 공채 5만 원을 받은 그는 이왕직 장시사장(掌侍司長), 황해도 관찰사, 철도원 부총재 등을 거쳐 1925년에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2.7. 말년
이후 만 15년이나 중임한 끝에 1940년 8월에는 중추원 부의장에 오른다. 그는 특이한 두상을 가져 '''대갈 대감'''이란 호칭을 들으면서 친일파 탐학으로 큰 악명을 떨쳤다. 동생 윤택영이 빚에 쫓겨 북경으로 달아날 무렵에는 옥인동에 특급 호화 주택 송석원을 지어 세인들로부터 빈축을 샀다. 그리고 이 집의 안방 마님으로 이길선(李吉善)의 딸을 앉힌 후 그 입막음으로 5만원을 준 일화가 있다. 또한 참봉 첩지를 대량으로 위조해 팔아먹는 사기극을 벌이기도 하였다. 대갈 대감은 천주교 잠지에서 윤덕영에 대한 글에서 나왔다.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후에는 조선 총독부 시국 대책 조사 위원을 지냈으며 아내 김복원은 일제의 전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친일 여성 단체인 애국 금차회 회장을 맡아 금비녀 헌납 운동에 앞장을 섰다. 남편의 반민족 행각에 걸맞는 내조를 한 셈이다. 이처럼 몰락해 가는 조선 왕조의 친족으로서 일신의 영달과 부귀를 위해 왕실과 나라를 팔아먹은 그는 1940년 10월 18일에 사망함으로써 그 화려한 친일의 막도 내리게 된다.
3. 여담
- 서촌에 있는 박노수 미술관은 원래 윤덕영이 그의 딸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이후 1973년에 남정 박노수 화백[2] 이 이 집을 구입하여 2011년까지 거주했다. 현재 미술관으로 쓰이는 모습을 보면 새로 지은 것처럼 보이나, 일제시대 초기에 지은 건물로 잘 보면 일본식 양식 중국식이 절충된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다.
- 서울 종로구 옥인동에는 그의 자택인 벽수산장(碧樹山莊))이 있었다. 프랑스식으로 건축한 호화대저택이었다. 광복 후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언커크)사무실로 사용하였다가 1966년 4월 5일 화재로 전소되어서 1973년 철거되었다. 철거되기 전까지 약 7년간은 철조망으로 들러 막아 놓았지만 뚫어 놓은 개구멍으로 동네 어린이들 놀이터로 쓰였으며, 건물 터를 거쳐 가면 지역 관할 청운초등학교까지의 통학로가 100여 미터가 단축되어서 학생들은 자주 들어가곤 하였다. (그런데 밤에는 스산해서 아무도 안 들어갔다.) 아이들이 부르는 이름은 언커크였고, 매국노가 쓰던 별장이란 것까지만 알고 있었다. 건물은 대부분 타서 없어졌지만 2층 바닥 일부와 벽면이 남아 있었는데, 집안 천장에 수족관이 있었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쓰인 건죽 자재가 화려하고 마당도 넓고 규모가 컸다. 2019년 현재는 정문 기둥 일부만 이후에 지은 건물 일부로 남아 있다. # 바로 옆에 있던 이완용의 집 때문에 이완용 별장으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였다. 이완용 집도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된 사실이며 2003년 지어진 집이 오해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