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택

 


1. 개요
2. 상세
2.1. 조선시대에 시작된 전통
2.2. 역사
2.3. 방식
3. 잘못된 속설들
3.1. 간택에 떨어진다면 처녀로 살아야 했다?
3.2. 양반가들이 꺼렸다?
4. 신조어


1. 개요


조선 왕실에서 임금, 왕자, 왕녀의 배우자를 고르는 행사. 동양에서 혼인과 관련하여 간택이라는 단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왕실의 혼인'을 위한 '간택 제도'가 생긴 건 조선 태종 때이다. 태종 17년인 1417년에 태종의 명에 의해 처음 시행되었다.

2. 상세



2.1. 조선시대에 시작된 전통


간택은 조선 태종 시기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명의 제도를 참조해 신설한 절차다. 그 이전 시대엔 처녀단자를 받고 규수, 장부들을 궁으로 불러 모아 평가하는 제도는 없었다. 전조 고려에선 왕실에서 상대 집안에 전갈을 보내 혼인의 뜻을 전해 상대 가문의 의사를 들고 결정하는 사례가 일반적이고 왕가도, 이의방처럼 신하 쪽에서 먼저 국왕에게 청해 왕실과 통혼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간택 제도가 워낙 유명해, 사극에서 '''배경이 조선시대가 아닌데도 종종 '조선의 간택 제도'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고증 오류다.

2.2. 역사


간택 제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1417년 9월 2일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의해서이다. 태종이 자신의 서녀인 정신옹주를 시집보내기 위해 점쟁이를 시켜 먼저 남자들의 사주를 보게 했는데 이속(李續)이란 인물이 '아무리 왕녀라지만 몸종(신빈 신씨)의 딸에게 내 아들을 장가보낼 수는 없다'는 식의 망언을 해버린 것. 이에 태종이 분노하게 되고 이후 이속은 곤장 100대 매질 후 서인으로 강등 → 재산 모조리 몰수 후 노비로 강등되고 아들은 평생 금혼령 → 이속의 당숙과 기타 친척들에게 곤장행 등으로 이어지는 패가망신 테크를 타게 된다. 이 사건 이후 기존과는 다른 선발 방식을 만들라는 태종의 명에 의해 간택령 제도를 처음 만들게 된다.#

2.3. 방식


임금이 명을 내려 여러 후보자들을 대궐에 불러모아놓고 왕실의 웃어른들이 면접하여 뽑았다. 왕과 왕세자의 정실을 고르는 간택은, 여러 규수들을 놓고 크게 3단계(초간, 재간, 삼간)로 추슬러 골라내는 신중한 작업이었다.[1] 이보다 격이 떨어지는 후궁 간택이나, 기타 왕자의 정실, 혹은 공주/옹주의 남편을 고르는 간택은 간단히 초간과 재간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원칙상으로는 양인 집안의 딸이면 누구든 간택 대상자가 되었다고는 하나 왕비나 세자빈을 아무나 뽑을 수는 없는 매우 정치적인 문제였던지라 결국 다들 라인을 타고 각 정파가 미는 후보들 간의 경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기에 이르면 아예 간택은 형식적인 요식절차에 불과해지고 세도가의 적당한 딸을 왕후로 간택하는 지경에 이른다. 순원왕후철종비를 간택하려 할 때 노론, 소론 규수들 가릴 거 없이 뽑자고 했지만 결국 안동 김씨 가문의 여식이 중전으로 간택된 사례가 대표적.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던 혜경궁 홍씨[2] 집이 좋지 않던 명성황후의 경우엔[3] 이런 정파간의 경쟁을 없애기 위해 영조/흥선대원군이 일부러 고른 것. 이런 경우도 바로 간택된 여식의 아버지가 별다른 벼슬을 못한 것이지 문중 자체는 염연한 명문가다.
간택이 진행되는 시기 동안에는 어떤 집안도 혼인을 할 수 없는 금혼령이 내려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왕실의 혼사는 국가의 대사였기 때문이다. 때때로 명나라 사신들은 이런 때를 절묘하게 이용해 공녀를 뽑아가는 짓거리를 하기도 했다.

3. 잘못된 속설들


가장 쉽게 접할수 있는 자료가 나라가 혼란해지고 법도가 뒤죽박죽이된 구한말 궁에 몸담은 궁녀들의 증언을 채록한 것이었고 족보를 통해 가계를 조사해야 하는데 모든 간택 참여자들의 기록이 상세히 남아있는게 아니며 역사학자들이 왕비, 세자빈에 대한 연구와 관심을 우선하고 떨어진 사람들에 대해선 관심이 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전문가가 기초적인 검증 작업없이 주장한 내용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대중들에게 널리 퍼뜨렸는데 여기에는 각종 개설서[4]를 비롯해 대중역사서로 히트한 작가[5]나 여성사 연구자[6], 방송에 얼굴 수시로 비추는 역사학 교수까지 섞여 있었다.[7]
제대로 된 역사저술가의 부재를 절감케하는 부끄러운 단면이다.

3.1. 간택에 떨어진다면 처녀로 살아야 했다?


'간택에서 떨어져도 일단 한 번 궐문을 밟았기 때문에 다른 데로 시집갈 수 없었고 그래서 후궁으로 뽑지 않는다면 떨어진 사람들은 모두 평생 처녀로 살아야 했다'는 '''잘못된''' 속설이 있다. '''국문'''학자 故김용숙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구한말 궁녀들에게 전해들은 증언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대중들에게 널리 퍼뜨리며 생긴 오류다. 역사 연구방법론에 무지한 인사가 실증적인 검증 없이 풍문과 구술에 의존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일반화한 사례다.
족보를 바탕으로 간택에 참여한 규수들의 가계를 추적해보면 모두 시집가서 가정 꾸리고 살았다. 삼간택까지 든 여자들은 정절 지켜 처녀로 늙어죽어야 한다는 규범이 있다거나 그런 건 없지만 압박 때문에 청혼을 안 할 뿐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이것도 '''잘못된 속설'''이다. 그저 후궁 간택때 새로 후보자들을 들이는 대신 왕후 간택에서 떨어진 여성들을 들이는 사례가 있었을 뿐이다. 왕후 간택까지 갔을 정도면 이미 자질은 검증된 규수고 별도로 번거로운 절차를 거칠 필요가 없으니까. 드문 사례이긴하나 단종처럼 삼간택에 든 3명의 처녀 중 1명(정순왕후 송씨)은 왕비로 하고 남은 둘은 후궁으로 삼아 왕비 간택 한 번에 후궁까지 뽑는 사례도 있었다.
정화당 김씨가 명성황후 사후 중전으로 간택되었으나 춘생문 사건으로 입궁이 무마되어 처녀로 수절하다 1917년에야 겨우 일본의 트집으로 입궁한 사례가 있다. 일부 책에서는 그녀가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될 때 간택에서 떨어진 처녀라 쓰고 있으나 1917년 입궁 당시 47세였다면 1871년생으로 명성황후가 책봉된 1866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또 영친왕의 태자비로 고종황제의 낙점을 받았던 민갑완이 끝내 결혼하지 않고 처녀로 늙어죽은 사례가 있으나 이건 간택에서 떨어진 경우가 아니라 이미 간택 확정, 거의 약혼한 상황에서 예기치 않게 혼인을 못 한 것이라 상황이 다르다. 이후로도 혼담이 들어왔으나 모두 거절했다. 즉 못 간게 아니라 스스로 안 간거다.
삼간택조차 시집을 못가는 것이 전통이었다면 왕이 직접 낙점하여 약혼까지 한 처녀에게 혼담이 들어올 리 만무하니, 이 사례만 보아도 삼간택 처녀설은 속설에 불가함을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민갑완의 수절을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일제는 민갑완의 수절이 영친왕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려했는지 그녀를 강제로 시집 보내려고 하기까지 했었다.

3.2. 양반가들이 꺼렸다?


간택은 사전에 미리 다 정해놓고도 '''왕실의 권위'''를 위해 시행하는 철저하게 정치적인 행위다. 국왕은 한 나라의 군주이자 억조창생의 어버이로서 종사를 번성케해야할 의무가 있기에 마땅히 현명하고 어진 이를 가족의 일원으로 맞아들여야 하며 이를 위해 여러 사람을 궁에 맞아들여 자질을 살핀다는 것이 간택의 명분이다. 더하여 간택을 통과한 당사자도 왕실의 지엄한 시험을 통과해 자신의 자질을 입증했다는 명분이 더해지니 자연히 위상이 올라간다. 부마나 후궁 간택이야 그렇다쳐도 중전과 세자빈이라면 이는 국모, 차기 국모의 위상과 권위를 재고하는 중요한 절차였다.
그렇기에 국왕이 아닌 이들이 불응하거나(만백성의 어버이인 국왕이 훌륭한 왕실의 일원을 맞이하겠다는데 협조하기 싫다=난 네 신하가 아니다.) 간택을 흉내내는 것은(너 말고 내가 억조창생을 다스려보겠다) 심한 불충이자 군왕을 섬기는 예가 아니라고 받아들여졌다.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1446년 효령대군이 며느리를 뽑는다며 양가 규수들을 사저로 한사람씩 불러 평가하고 돌려보냈다가 대간에 적발되어 5차례에 걸쳐 탄핵상소를 받은 사례가 있다. 세종이 형제의 우애를 내세워 넘어가줬지만 조선 초기부터 간택은 오직 왕실의 특권이고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는 절차임이 강조되고 있었다. 왕권이 약했던 고려시대에는 신하가 대놓고 국왕에게 자신을 딸을 비로 들일것을 권하는 사례가 있었고[8] 간택이 폐비까지 거론하며 원경왕후와 냉전을 벌이고 처남 네명을 사사하며 왕권 강화에 매진한 태종에 의해 도입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의도는 더욱 명백해진다.
또한 왕실과 혼맥으로 이어진다는 사실, 특히 중전 내지는 세자빈으로 들이겠다는 건 당대 국정 운영의 러닝메이트로 삼겠다는 의지의 표명도 되며 참여한 규수들의 가문의 면면을 살펴보면 누대에 걸친 명문가거나 왕실과 간접적으로라도 연이 닿아있는 경우가 절대다수다. 가문들 입장에서 자기 딸이 되든 안되든 꺼릴 이유가 없다.
처녀단자만 넣으면 무조건 간택후보자로 궁궐문 넘어가는걸로 오해하거나, 간택에 참여한 가문과 그들의 가계도를 아예 보지 않거나, 극히 일부의 사례를 호도했거나, 가계도를 분석해도 다각적으로 하지 않고 부계 중심으로 일부만 들여다봐서 빚어진 오류인데 조선시대 최상류층의 혼맥은 대중의 인식보다 훨씬 좁다.
예를들어 인현왕후를 들인 숙종 7년의 간택에 참여한 가문들은 고려시대부터 재상지종으로 불린 명문 파평 윤씨와 남양 홍씨를 필두로 안동 권씨, 전주 최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진주 강씨, 창녕 조씨, 해평 윤씨 등 과거부터 명문이었나 신흥 가문인가 하는 차이만 있지 전부 쟁쟁한 가문들이었다.[9] 최종적으로 선택받은 인형왕후는 서인 명가 여흥 민씨이며 부친 민유중이 현직 병조판서였다. 이것만 봐도 간택 혹은 삼간택에서 떨어진 규수들은 수절해야 한다는 정신나간 소리는 나올수가 없다. 그런 폭거를 당하고 가만 있을 집안들인가?
일부러 세가 강하지 않은 집안을 고른 선조비 인목왕후같은 사례도 알고보면 인목왕후의 부친 김제남의 첫째 사위 심정세가 인빈 김씨 소생 능양군(훗날 인조)의 이종 사촌이고 심정세의 아버지 심엄이 광해군의 처남 류희발과 인척으로 왕실과 이어져 있었다.
간택 심사에 참여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간택단자 내는 것 자체를 꺼렸다는 이야기도 낭설. 간택에 참여하는데 패물과 몸종, 가마 같은거 못 마련할 정도로 가세가 기운 가문은 드물다.
집안이 가난하여[10] 도저히 새 옷을 장만할 수가 없어 속에 입는 옷은 오래된 것을 입고 치마는 어려서 죽은 언니의 혼수감으로 준비해놨던 것을 썼다는 혜경궁 홍씨의 사례를 호도한 주장인데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은 인목왕후의 고명딸 정명공주의 남편 홍주원의 6대손이다. 오래전부터 왕실과 연이 있었던 가문인데다 삼간택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상궁들이 혜경궁에게 잘 보이려고 충성경쟁을 벌였다. 즉, 처음부터 될줄 알고 있었기에 어렵사리 의복과 패물을 마련해 참여했고 낡아빠진 무명옷 입고 나갔어도 세자빈 되는데 지장없었다.
참고로 혜경궁 주변 인물들의 혼인관계를 살펴보면 영조비 정순왕후의 부친 김한구는 노론 중신이며 경주 김씨라는 유서깊은 가문이고 영조의 서녀 화순옹주의 남편이자 노론 완론의 중신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11]과 8촌간이다. 즉, 정순왕후는 자기 사위랑 9촌 지간. 정조비 효의왕후는 현종비 명성왕후의 동생 김석연의 5대손으로 배향 공신만 4명을 배출하고 숙종초 최고 권신 김석주를 낳은 청풍 김씨다. 정조의 서녀 숙선옹주의 남편은 홍현주는 혜경궁의 6촌 홍낙성의 손자다.
이렇듯 조선 왕실의 통혼은 현대 대한민국 재벌가들 이상으로 협소하고 오밀조밀했고 여기에 당대의 정치적 이해관계까지 포함되었다. 그래서 참여한 가문이 많지 않을 뿐이다.

4. 신조어


길고양이가 자기 주인이 될 인간을 직접 선택해서 따라오는 것.
전국에서 키워지는 고양이 다섯 마리 중 한 마리는 길에서 '집사 간택'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도 다른 가축은 인간이 먼저 길들인 반면 고양이는 인간의 도시에 먼저 자발적으로 접근해 같이 살기 시작한 케이스이므로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
기본적으로 개보다 내성적인 성격고양이 습성상 이렇게 자발적으로 따라와서 애교를 부릴 정도면 상당한 개냥이일 가능성이 높다.

[1] 3단계 모두 통과하면 부모이나 친척이라도 혼인이 통과된 자녀에게 함부로 반말 못하며 높은 말을 써야 했다.[2] 원래 풍산 홍씨 집안은 선조의 유일한 적녀인 정명공주와 부마 홍주원의 후손인 노론 명문가 중 하나지만, 영조대에 들어서 가난해졌다고 한다.[3] 왕비가 될 때 당시 아버지인 민치록은 죽고 없었다.[4] 신명호, 1998 , <조선의 왕>, 가람기획, p.201, 변원림, 2006, <조선의 왕후>, p.20, 김문식ㆍ김정호, 2003, <조선의 왕세자 교육>, 김영사, p.160[5] 박영규, 2003, <조선의 왕실과 외척>, 김영사, p.38[6] 윤정란, 2003, 조선의 왕비, 이가출판사, p.135[7] 신병주, 2001,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효형출판, p.143[8] 고려사 권94 왕가도 열전. 왕가도는 덕종 즉위후 왕비를 들일 것을 권해 자신의 딸을 왕비로 세웠다.[9] 이때 장옥정은 숙종의 총애는 받았으나 정식으로 후궁 첩지도 받지 못한 일개궁인이었으며 서인 정국에 치뤄진 가례라 남인 가문들은 배제되었다.[10] 혜경궁 홍씨의 친정 아버지 홍봉한이 정계의 거물로 떠오른 것은 어디까지나 사도세자의 장인이란 신분 때문이었고, 혜경궁 홍씨가 간택되기 전에는 음서로 겨우 정9품 말직에 오른 상태였다.[11] 초간택 부터 삼간택까지 쭉 첫번째로 입장시켜서 대놓고 내정자임을 밝혔다. 간택이 진짜 배우자 자질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라 당대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요식행위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